똘레랑스, 의미와 원리에 관하여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똘레랑스'라는 게 이제는 그리 새삼스러운 단어는 아니다. 저 먼 타국 파리에서 택시를 몰던 한 사람이 어느날 홀연히 날아와 이 '똘레랑스'라는 걸 던져 준 후로, 우리에게 이 말은 비교적 유행을 제법 탔다. 그래서 이제는 '똘레랑스'하면, "아 그거"할 정도는 된다. 많이 들어보고 대충은 뭔지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는 '대충'에 들어가야 하겠다.

'똘레랑스'라는 그리 새로울 것 없는(?) 개념을 접했을 때 우리는 대체로 수긍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충 그 개념은 어지간히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그 개념을 머리로만 아는데 지나지 않았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개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새로울 것 없기' 때문은 아니다. 분명 '똘레랑스'가 우리에겐 신선한 충격일 순 없었지만, 하나의 '새삼스러운 각성'일 수는 있었다. 그간 치우쳐 두었던 것이었기에, '아 그런 게 있었지', '그거 당연히 좋은 거지' 정도의 각성이랄까, 일깨움 말이다.

흔히 '관용'으로 번역할 수 있는 '똘레랑스'하면, 타인을 존중하고 그 차이를 인정하는 자세를 말한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차별하고 '틀린 것'으로 규정하여 폭력을 가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라면 모를 수 있는 그런 인지상정(人之常情)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동양에서 오랫동안 추앙받아온 성인의 말씀 중에 '和而不同'이 있으니, 이것은 차이의 조화로움에 대한 지극한 경지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런 화이부동의 자세를 하나의 이상으로 생각해 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견지하지 못하고 다만 하나의 이상일 뿐으로 치부해 왔던 것이다. 그 치부되어 온 것에 대한 '새삼스러운 각성', 그것이 홍세화가 던져 준 '똘레랑스'였다.

지금 우리사회에 이 '똘레랑스'가 또한 새삼스레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그것이 현재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도 '새삼스레'에 강조점이 찍힌다. 새삼스럽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암묵적으로 혹은 아주 절실하게 '화이부동' 내지 이 '똘레랑스'가 요구되어 졌던 것이다. 그래서 항상 '똘레랑스' 혹은 '관용'에 대한 요구는 여전히 '새삼스럽'지만, 그런 만큼 항상 현재적이고 절실하게 요청되어지는 개념인 것이다. 아니 지금까지 개념으로만 머물러 왔던 이것이 이제 실천적 운동으로 생동해야 할 것이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책세상문고>판의 얄팍한 책자 하나가 우리에게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책세상문고 - 우리시대>시리즈의 72번째 책자를 우리는 유심히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바로 하승우의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이다. 하승우는 "홍세화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고 또 공감한다"면서

   
  외세와 기득권 세력에 시달려 위축되고 경직된 한국 대중에게 이성을 길잡이 삼아 현실을 비판하고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필요하다. 제국주의와 반공 이데올로기, 군부, 재벌 등 많은 상대와 싸우다 보니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진보 세력에게도 문제를 솔직히 인정하고 차이를 환대하는 똘레랑스의 개념이 요구된다.(8쪽)  
   

고 천명한다. 그는 이 똘레랑스를 "편견에서 벗어나 사물의 옳고 그름을 토론하고 잘못된 불의를 바로잡겠다는 적극적인 관용"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에는 '똘레랑스'와 '관용'이 마냥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담겨있다. 그러나 '똘레랑스'의 번역어로서의 '관용'이 우리가 익히 들어아는 '관용'과 다르다는 번역의 엄밀성을 따져 묻는 것은 다소 불필요하게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똘레랑스'와 '관용'이 어떻게 다르다는 개념적 논의에서 한발 나아가 '똘레랑스'가 어떤 것이고, 그 개념이 어떻게 우리의 실천적 자세로서 활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점을 분명히 한다. "똘레랑스가 죽은 개념이 아니라 현실에서 살아 숨쉬는 개념"이길 바라고 그러하기에 "그 개념이 등장하고 성장한 구체적인 맥락"과 "그 개념이 자리 잡기까지의 시행 착오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실천적 '사회 윤리'로서의 '똘레랑스'가 가능하게끔 하기 위한 필수요소가 된다.

저자는 이러한 동기하에 이 소책자에 가히 '똘레랑스'의 역사를 추적하여 담아내고자 하는 지나친 욕심을 부린다. 분명히 그 욕심은 이 얄팍한 책자에서 풀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책세상문고>가 으레 그러하듯이, 이 책 또한 '똘레랑스'의 모든 것을 찾게끔 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담당할 따름이다. 그 안내자로서 충실히 성공하기 유해서는 다분히 유혹적이고 매력적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책세상문고> 시리즈가 이런 역할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책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는 그런 점에서 충분히 성공의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똘레랑스의 역사를 추적하는 과정은 얼핏 지난한 일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을 얼마나 압축적으로 간단명료하게 보여주느냐와 동시에 흥미까지 더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 관건을 하승우의 이 책은 어느 정도 해결한 것처럼 보인다. 제1장 '똘레랑스의 등장과 형성'에서 그는 똘레랑스의 기원을 고대 아테네로까지 확장시키면서 볼테르와 헨드릭 빌렘 반 룬의 논지들을 언급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관련해서 고대 아테네 사회에서 우리는 똘레랑스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 '중세의 종교 분쟁'에서 비롯된 톨레랑스의 탄생(혹은 재발견)의 비극을 전한다.

   
  똘레랑스는 피의 연못에서 개화했다. 똘레랑스를 꽃피운 결정적인 계기는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이다. 당시 프랑스 국왕의 어머니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음모에 따라 구교도들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에 모인 신교도들을 학살했다. 파리에서만 3,000여 명의 신교도가 죽었고 프랑스 전역에서 2만 명 가량의 신교도가 학살되었다. 신교도들은 생존을 위한 반격을 시작했고 종교 전쟁의 불길은 유럽 전역으로 번졌다.  
   

이런 비극적 사건의 연속을 통해 '똘레랑스'의 필요성이 전면에 부각되었던 것이다. 살육을 멈추고 피의 비극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똘레랑스'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똘레랑스는 다분이 종교적 관용이라고만 정의내릴 수 없다. 종교적 관용일 뿐 사회 정치적으로 이것이 적용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은 중세의 종교적 요구가 곧 정치적 사회적 요구와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해결된다. 곧 종교적 똘레랑스는 곧 정치적 똘레랑스였던 것이다.

중세의 암흑을 벗어나 '광신에서 이성으로'의 변화의 시대에 똘레랑스는 "자신의 삶과 환경을 주체적으로 통제하는 자유로운 개인의 신념"으로 변해간다. "밀에게 똘레랑스는 개인의 자유 실현뿐 아니라 사회의 화합과 진보를 위한 필수 조건"이었던 것이다.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런 똘레랑스의 필요성이 확대되었던 반면 사회주의에서는 이질적인 것이라는 편견을 갖지만, 하승우는 "사회주의는 똘레랑스를 거부할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똘레랑스의 기원과 탄생, 그 사회적 필요성의 요구, 똘레랑스 확대의 과정 등을 고대 아테네에서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주의에까지 걸쳐 살펴본다. 그러나 그런 방대해 보이는 작업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흥미를 놓치지 않게하는 간단명료함을 버리지 않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이 똘레랑스라는 것의 모습은 크게 2가지로 대별된다. 미국산 탈러런스와 유럽산 똘레랑스가 그것이다. 미국으로 넘어간 똘레랑스는 미국식 발음으로 탈러런스(tolerance)가 되면서 똘레랑스와 발음 "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차이가" 생기게 된다. 하승우는 그 차이를 구분하면서 탈러런스는 "타협을 추구하는 관용"이고 똘레랑스는 "정의를 부르짖는 관용"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탈러런스가 가지는 위험성이 부각되는데 "미국 사회의 탈러런스는 이성적인 것(타협을 하려면 이익을 계산할 이성이 필요하다)이고 다원주의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자율적인 조절을 내세우는 다원주의의 현실은 사실 부패한 정치와 자본의 결탁으로 얼룩져 있다". 반면 똘레랑스는 탈러런스와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관용'이지만 "'정의'와 '연대'를 강조하는 '뜨거운 이성'이"고 "정의를 위해 서로 연대하는 것"이며, "사회를 적극적으로 바꾸려" 하는 것이라고 하승우는 말한다. 이런 점에서 하승우는 우리 사회에 탈러런스적인 관용이 아닌 똘레랑스적 관용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탈러런스와 똘레랑스의 구분을 짚고 가는 것이며, 자세히는 아니지만 번역어로서의 '관용'과 동양적 똘레랑스의 냄새가 나는 '화이부동'이나 '중용(中庸)' 등과도 다소간 다르다는 것은 살짝 언급하고 있다.

하승우가 우리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똘레랑스, 즉 "사회를 적극적으로 바꾸려"는 관용이다. 그렇다면 이런 똘레랑스가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 그 작동 원리를 알아야 "희망의 사회 윤리"로서 똘레랑스가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승우는 그 기본 원리를 5가지로 제시한다. 먼저 '인간의 완전함에 대한 부정'에서 똘레랑스는 출발한다. 인간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에서 출발할 때 독선과 독단을 버리고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똘레랑스가 작동할 수 있다. 똘레랑스는 "완전무결함을 부정하지만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자발성을 존중"하는 원리가 기본이 되는 것이다.

나머지 원리들을 나열하면 똘레랑스는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극단을 거부하는 태도"가 요구되며, "폭력을 거부하는 이성적인 토론과 설득"을 통해 작동된다. 이와 함께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은 '차이와 다양성의 존중'이다. 마지막으로 '공화주의와 자유의 실현'을 목적으로 똘레랑스는 작동되는 것이다.

   
 

똘레랑스는 공화주의와 파트너를 이룬다. 그리고 공화주의의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공화주의는 자신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타인의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 똘레랑스는 참견할 수 있는데도 참견하지 않는 것이다. 똘레랑스는 인내의 다른 형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다른 사람에게 강제할 능력이 있지만 그렇게 하기를 신중히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똘레랑스는 덕(virtue)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68쪽)

똘레랑스는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공익에 참여하지 않는 개인주의는 똘레랑스가 아니라 이기주의와 통한다. 똘레랑스에는 자신의 자유만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까지 키기려 하고 이를 위해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개인주의, 공화주의가 깔려 있다.(72쪽)

 
   

 그러나 이러한 똘레랑스의 기본 원리를 토대로 똘레랑스가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무엇을 똘레랑스하고 무엇을 똘레랑스하지 않을 것인가, 즉 무엇을 앵똘레랑스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극단을 앵똘레랑스하는 것이 똘레랑스의 원리인데 사실상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 사회에서 이 똘레랑스가 제대로 작동할 것인지는 의문이고, 그런 한계를 뛰어넘지 않고서는 자칫 탈러런스와 같이 권력과 자본에 결탁하여 사회 정의는 커녕 개인과 민중을 억압하고 지배계층에 복종하는 부작용을 낳기 십상인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인지하고 똘레랑스가 어떻게 그 한계를 넘어 현실 사회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 하승우의 이 얄팍한 책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현실 사회에 어떻게 이러한 똘레랑스를 적용할 수 있을까에 대해 논의한 제4장 '똘레랑스와 접붙이기'라고 할 수 있다. 하승우는 "똘레랑스라는 개념에 영양분을 주는 것은 현실이고 그 현실을 바꾸는 힘은 대중의 실천"에 있기 때문에 이런 접붙이기 작업이 꼭 필요함을 역설한다.

사실 "홍세화는 이미 그런 접붙이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하승우도 우선 홍세화가 한국 사회에 똘레랑스를 소개하고 한국 사회에 그것을 실험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그것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반성적으로 성찰한다. 그것은 "한 번의 시도로 완성될 수 없기에" 이런 성찰을 통해 새로이 "평가하고 보완"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똘레랑스가 이 현실 사회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먼저 '차별하는 똘레랑스'가 제시된다. 그것은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차별"로서 정당한 차별이고 "차별하는 똘레랑스는 똘레랑스를 실천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사실 동양에서 차별은 차이에 대한 억압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차별이 전제가 되어 조화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여기서 차별은 사물들로 하여금 각기 제자리를 찾게 함으로써 혼란스럽지 않게 하는 것을 뜻한다. 제자리를 찾게 한다는 것은 신분으로 묶어두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지위와 개성, 재능이 제 역할을 다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일의 순서를 구분하고 합당하게 함으로써 부당한 간섭이나 강제 없이 공동체의 삶이 유지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차별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상황을 바로잡는 것이다. 기득권 세력이 가하는 처벌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은 질서를 바로잡는 차별이다.(118쪽)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차별"을 통해서 똘레랑스가 접붙여질 땅이 조성되면 이어서 '시민의 접촉을 보장하는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고 '자율성과 연대감을 기르는 자치'로 숙성시키며, '자신의 가치를 되새기는 존엄'란 물을 주어 똘레랑스가 완전히 이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똘레랑스가 그 한계를 극복하고 이 사회에 정의를 지켜내는 사회 윤리로서 개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승우는 이런 원대한 희망을 아주 간단히 소책자에 담아내고 있지만 그것이 그만큼 간단한 문제이고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이 소책자가 우리 사회에 똘레랑스의 필요성을 다시금 각인시키고 그것의 실천적 생동을 요구하는 경적으로서의 가치는 크다. 하승우가 이 책의 제목을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라고 한 데에는 그 희망의 절실함과 그 이룸의 어려움을 함께 담아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점은 똘레랑스가 한국 사회에 접목될 수 있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씨앗의 발아라는 필연적 과정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저자의 이후 작업이 요청된다. 이 책에 안내된 참고문헌을 통해서 똘레랑스를 찾아 읽고 있게 된 것은 이 책이 그 역할을 다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자의 희망처럼 똘레랑스가 우리 사회에 '희망의 사회 윤리'가 될 수 있는 마음이 간절해 진다. 그래서 이 소책자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그 희망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을 공유할 때, 그래서 똘레랑스가 이 사회에 뿌리내릴 때 이 책이 그 역할을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역할을 하기에 이 얄팍한 책자는 부족함이 없다. 다음은 하승우의 제안이다. 그와 함께 우리도 '같이 걷자.'

   
 

제법 긴 여행을 했다.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실천하는 행동으로 나타날 때 생명을 얻는다.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개념은 그저 관념일 뿐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은 마침내 아버지에게서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허락받고도 집을 떠났다. 홍길동은 개인의 만족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역적으로 몰리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사회의 부조리와 맞서 싸웠다. 똘레랑스는 홍길동이 나섰던 그 길고 긴 길 위에 있다. 미래의 청사진 같은 건 없다. 걸어가며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긴 과정과 수없이 많은 만남이 있을 뿐. 똘레랑스의 뜻은 그 길의 끝에 있는 약속된 미래가 아니라 바로 그 길에 있다. 같이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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