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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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종석이란 이름은 내게 낯선 이름이다. 이전에 아는 바 없었고, 지금도 제대로 아는 바 없는, 내게는 그런 인물이다. 알라딘에 거하면서 그 이름을 은근히 자주 보게 되었던 것이 이 책과 나의 인연을 맺어주었을 것이다. 특정의 누구를 거론하진 않겠지만, 이 자릴 빌어 그 분께 감사를 드려야겠다. 나름대로 괜찮은 책 한 권 읽게 해 주었고, 글 잘 쓰는 한 저자를 알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감염된 언어>를 읽고 난 후의 지금, 나는 고종석의 다른 책들에 기웃거리고 있다. 그만큼 <감염된 언어>를 통해 무엇인가 고종석이란 이름에 적잖은 매혹을 경험했다고 해야겠다.

다소 빈약해 보이고(요즘 책들은 양장본이 아니더라도 책 표지가 반양장처럼 다소 딱딱해 어느정도 무게감이 있다.) 글자 크기도 좀 큼지막한 듯 하고(재보지는 않았다.), 쪽수도 몇쪽 안되는(271쪽에 달하긴 하다. 비슷한 쪽수를 가진 다른 책과 비교해보니 이 책의 두께는 2/3정도 밖에 안된다. 그만큼 안돼보였나 보다.) 이 책을 대면한 첫 느낌은, 그저 그랬다고 해야겠다. "감염된 언어-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라는 제목이 그만큼 가벼워지고, 별반의 흥미를 더해주지 못했다는 얘기다. 어쩌면 요즘 책들의 화려한 외장에 내가 너무 익숙해져 있는 탓이기도 하겠지만, 이 책의 외장은 확실히 요즘의 책들보다 좀 떨어진다. 그러나!

책장을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그 외장 두로 숨겨둔 고종석의 유쾌한 필력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개마고원의 편집자는 그것을 이렇게 귀뜸해 주고 있었다. "편집자 주 - 본문에 나오는 외래어의 표기는 필자의 요구에 따랐습니다." 한 권의 책이 저자와 출판사의 이름을 달고 대중에게 팔리려 할때에 그 책은 사적 소유에서 공적 소유로 그 성질을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으례히 한글맞춤법과 외래어표기법 등에 맞추어 출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터, 굳이 이런 편집자 주를 단 것은 저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궁금하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도 들린다. "이 책을 읽으려면 단단히 각오하고 읽으시기를." 과연 어떻길래?

무엇인가 의미있는 책에서는 무엇하나 남다르지 않은 것이 없다. 책의 서문에서부터 독자들을 압도하는 책치고 나쁜 책이 없다고 본다. 누가 감사하고, 누가 고맙고, 누구의 덕이라느니 하는 인사치례만 늘어놓은 서문들을 나는 경멸한다. <감염된 언어>의 서문은 내가 경멸하는 그런 종류의 서문이 아니다. '서툰 사랑의 고백'이라지만, 강력한 '자유주의자' 선언처럼 여겨진다. "그(언어) 변화의 과정은 곧 감염의 과정이었다. 외국어와 외국 문화의 감염 말이다. 문화사는 곧 감염의 역사고, 그 문화를 실어나르는 언어의 역사도 감염의 역사다. 인공 언어가 아닌 한 감염되지 않은 언어는 없다."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그 '감염된 언어'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듣는다. 순수 국어를 주창하는 우리 국어학자들이 들으시면 목을 잡고 쓰러질 일이다. '민족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민족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그만큼 누구 못지 않은 한국어 사랑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감염된 언어'를 사랑한다는 고백에서 우리는 저자의 붓이 어디로 흐를 것인가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이 어디로 흐를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서문에 난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볼 대목은 '영어공용어화 논쟁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대목이다. 271쪽의 이 책에서 이 부분이 100쪽이 넘으니, 가히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그만큼 필자가 이 대목에 할애한 사고의 분량이 많을 것이리라. 나는 '영어공요어화'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결사반대쯤이라고 해두자. 내 눈에 흙이 들어오고 난 다음에 그 때 가서나 해라 정도라고 해두자. 그런데 저자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영어공용어화를 쌍수들고 찬성하는 쪽도 아닌듯하다. 영어공용어화 논쟁을 촉발시킨 당사자 복거일이 자신의 스승이라고 밝히고 있으면서도 그는 어느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 논쟁을 차분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일관된 '개인주의', '자유주의자'의 자신의 견해를 투영해 간다. 그런 그에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손 치더라도 미움이 가지는 않는다. 이 대목에서 내가 느낀 것은 '영어공용어화'에 대한 나의 생각을 보다 차분히 정리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관심을 가져야할 대목이라는 얘기다.

대학에서 영어로 하는 강의의 비율을 높여가고 있고, 나날이 영어의 중요성은 높아져만 가고 있는 현재, 영어공용어화는 논쟁이 아닌 대세로 시나브로 이뤄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사를 해서 반대해야할 것도 아니고, 그렇게해서 되는 것도 아닐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고종석처럼 차분히 자신의 견해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나는 어디까지 그의 논리에 동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태도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와 내가 달리하는 견해는 또 있다. 국한혼용에 대한 문제이다. 그는 공식적 국한혼용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다. 나는 역시 그의 입장과 달리한다. "내게는 '대한민국'이 '大韓民國'보다 더 표의적이다. 즉 '대한민국'이 '大韓民國'보다 더 직접적으로 그 뜻이 전달된다. 그게 과장이라면, '대한민국'이 적어도 '大韓民國'만큼은 직접적으로 그 뜻이 전달된다. '대한민국'이라는 글자의 꼴이 '大韓民國'이라는 글자의 꼴보다 더, 또는 적어도 '大韓民國'이라는 글자의 꼴 못지않게, 눈에 익숙한 탓이다."라는 그의 견해와 나는 반기를 들 수 있다. '대한민국'일 때에 그 의미는 사라진다. 단순히 우리나라의 국호로만 기능할 뿐이다. 국호에 담긴 그 이름은 사라진다는 얘기다. '大韓民國'일 때의 큰 나라, 백성의 나라라는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이렇게 사사건건 나와는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많지만, 그의 의견을 또한 존중하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또한 느끼는 것은 그와 '싸울' 준비를 해야겠다는 강한 위기감을 느낀다. 아마 이것이 고종석의 필력이 가지는 힘이 아닐까 한다.

또한 이 책에서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은 향가와 고려가요에 대한 저자의 글이다. 무엇보다 모든 글에서 저자의 자유로운 생각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그 움직임을 나는 꽁무니를 부여잡고 따라갈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 움직임의 춤사위를 감상하면 그만일 것이다. 거기에 고종석이란 인물의 밉지 않은 생각들을 접하고 웃음지어주는 그만인 것이다. 나를 긴장시키는 그의 글을 나는 계속 읽어야 겠다고 생각한다. 고종석이 나를 동화시키더라도, 나는 고종석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기위해 그를 가까이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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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1-22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상당히 매력있고 설득력있는 글이죠. 그의 다른 글들도 읽어보시면 반하실 겁니다. 고종석 팬들이 많군요.

글샘 2007-02-07 0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종석에게 절대로 반하지 않습니다. ^^ 그는 가진자의 논객을 따름이죠.
맘만 먹으면 프랑스에 가서 몇 년 살다 올 수 있는...
극우꼴통은 아니지만, 보수주의자 중에 좀 멋진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근데, 아무리 읽어봐도 마음엔 안 듭니다.
 
감자 배따라기 어린 벗에게 용과 용의 대격전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1
이광수.김동인 외 지음, 최원식 외 엮음 / 창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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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가을쯤, 창비가 20세기 한국소설 시리즈 50권 완간을 자축하면서 대대적으로 할인예약 판매를 한 적이 있다. 역시나 나는 혹해서(무려 40%를 깎아 준다기에) 다소간 무리를 각오하고 이 시리즈를 구입하였다. 창비의 이 시리즈 완간은 자못 그 의의를 높이 살만 하겠다. 무엇보다 지난 격동의 20세기 우리 문학을 정리하는 한 차원에서, 그 거대한 작업의 일부라 할 수 있는 소설을 모아 내었다는 것이 크게 높이사야 할 업적이다. 차후로 소설 외에 문학 전반에 걸친 작업이 시도되어야 하겠고, 이것은 그 초석을 마련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겠다.

이 시리즈를 구입하기까지 내게는 얼마간의 흔들림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나름의 국문학도라고 자처하는 나로서는 일반인의 교양 수준 이상의 (준)전문가적 역량이 요구되어진다. 그러하기에 나는 그간 문학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되는 주요 작가들의 작품들을 보다 전문적으로 읽어 내려는 그런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것은 아직도 크게 변함을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시리즈를 구입하는 것은 내게 얼마간 불필요한 일은 아닐까 하는 흔들림이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여러 작가들의 각종 작품들을 개별적으로 구해 읽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시리즈가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닌 바에도 이 시리즈를 구입하는 것은 이중의 지출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이 시리즈는 일반인의 교양 수준으로서, 중고등학생들의 필독서 수준으로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나에게는 다소 부족함이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한가지 부끄러운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까지 일반인의 교양 수준에도 못 미치는 미흡하기 짝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면서 뒤로 밀어놓고는 이렇게 말만 떠벌렸던 것을 나는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과감히 이 시리즈를 구입했다. 더이상 뒤로 밀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전문가적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일반 교양 수준이라도 섭렵하고 가야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더 나아간 생각은 어차피 이 소설들은 거반 원본 텍스트들을 구해 읽어야 하겠다는, 또한 다시 읽고 또 읽어도 부족하겠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러니까 이 소설들을 한 번 읽고는 내버릴 수 없는 것이 국문학도의 운명일 터이다.

그렇게 몇 달 책장을 차지하던 이 50권의 시리즈를 얼마전 그 첫 권부터 꺼내어 들었다. 역시나 시작은 이광수, 김동인으로부터였다. 이광수나 김동인, 나아가 신채호, 현상윤 등은 근대문학의 초창기 여명으로써 익히 배우고 들어 친근감 마저 느끼게 하는 인물들이다. 이광수의 <무정>, 김동인의 <배따라기> 등은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이 첫 권을 읽어내는 것에는 약간의 지루함 마저 동반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고백을 하자면, 문학사적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신채호의 단편이나, 양건식, 나혜석의 단편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별반 새로움이랄 것은 느끼지 못했지만, 단편적인 문학사적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이들을 작품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부족함은 또한 말할 수 없이 많지만) 만나볼 수 있는 작은 기회였다.

이광수는 우리 근대문학, 근대소설의 논의에서 그 첫 장을 장식하는 인물이기에, 우리에게는 누구보다도 잘 알려져 있다. <무정>을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한 번씩은 읽었을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시리즈는 20세기의 한국 '단편' 소설들을 모아놓은 것이기에, <무정>을 싣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광수의 문학 세계를 그의 두 편의 단편을 통해서 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기에, 그리 탓할 바는 못되는 듯도 하다. 사실 우리 근대문학, 근대 소설에 있어서 무게있는 장편을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렇기때문에 이 시리즈가 단편소설만으로 구성된 것이기도 하다.

사실 20세기의 소설을 정리한다는 것은 50권으로는 턱없이 모자람이 있다. 문학사적 평가를 높게 받는 작가(작품)으로만 구성하더라도 100권을 넘기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렇기에 이 시리즈가 그 작업을 완벽히 해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이 50권의 작업도 함부로 시도될 수 없는 일이기에 일말의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아쉬움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지만, 현상윤, 양건식, 나혜석 등을 만나게 해준다는 것은, 그 부족함이 크더라도 칭찬 한마디 해주기에는 족하다.

1권을 읽고난 소감을 몇자 적는다면, 우선 기존의 문학사적 평가를 바탕으로 했다곤 치더라도, 대중적 취향과 필요성에 너무 치우친 얄팍한 상술이 보인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이광수, 김동인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새로이 근대문학연구에서 주목받고 있는 현상윤의 소설이 달랑 <핍박> 한 편 밖에는 올려놓지 못한 것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건식이나 나혜순의 경우도 그런 아쉬움은 남는다. 뭐 이것저것 다 따져서는 1권의 분량이 넘치고 넘치겠지만, 김동인의 <붉은 산>은 어느정도 빠져도 될 성 싶다. 조절의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편집부분에서도 아쉬움은 남는다. 뒤에 낱말풀이를 부록으로 남겨놓고 있지만, 후주보다는 각주로 처리해 놓는 것이 불편함을 덜어줄 듯 하다. 편집자의 의도를 생각해보면, 일일이 낱말풀이를 찾아보지 않을 사람들을 위해 걸리적 거리는 것을 뒤로 빼놓은 듯도 하지만, 찾아보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이 없지 않다. 이래저래 아쉬움이 남는 이 시리즈는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유용하고, 필요한 것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앞으로 창비를 더불어 역량있는 출판사의 20세기 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정리 작업들이 이루어 지기를 더없이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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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위한 4천만의 국어책
이재성 지음 / 들녘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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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이들이 문법을 어렵게 생각한다. “문법 어렵지 않아요!”라고 할 수도 없다. 사실 문법은 어렵게 생각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국어 문법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문법은 어렵고 따분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문법을 어떻게 하면 쉽게 공부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수도 없이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그 방법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왕도는 없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문법에도 왕도는 없어 보인다.

  근래에 들어 우리말 관련 책들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의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라는 책은 베스트셀러의 자리까지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글쓰기 관련 책들도 다양하게 출간되고 있다. 최근 대학 입시에서의 논술 반영의 영향이 큰 듯하다. 글쓰기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부분이 아무래도 맞춤법이나 문법이지 싶다. 그래서인지 문법 관련 책들도 출간되는데, 이 책 <글쓰기를 위한 4천만의 국어책>(이하 <국어책>)이 그런 종류다.

  사실 이런 대중적 글쓰기 관련 도서들을 나는 외면해 왔다. 아니 내게는 별 도움이 되는 책들은 아니어서 읽을 필요가 없었다. 말하자면 내게는 이런 분야의 전공서적들을 읽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책들은 어디까지나 전공서적은 아니기 때문에 내겐 외면의 대상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최근 이 <국어책>을 읽게 된 것은, 뭐랄까 어떤 호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내가 수년간 공부해 온 문법을 어떻게 설명하고 풀어놨기에 대중적으로, 그러니까 문법이라면 치를 떨 일반인들이, 이 책을 그렇게도 많이 사서 읽을까 하는 의문에서 오는 그런 호기심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어느 정도 그런 호기심을 풀 수 있었다.

  “제발 외우려고, 공부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문법책을 내던졌던 거예요!”라고 저자는 말하는데, 그럼 난 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법이라는 것이 공부 안하고, 외우지 않고 되는 거란 말인가? 내가 그렇게 문법 공부를 해 왔건만, 문법은 외우지 않고 되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저자 참 “구라가 심하다.”고 생각이 되는 대목이다.

  문법은 우리의 언어사용에서 하나의 규칙을 찾아내어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그 규칙은 어떤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 이럴 땐 이 규칙이, 저럴 땐 저 규칙이, 어떨 땐 규칙이라고 할 수 없는 예외적 사항들이 적용된다. 그러니 외워야 하는 것은 문법 공부에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외우는 것은 지극히 싫어하는 나로서는 이것을 포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내 전공을 말아먹는 일이기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참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외우지 말라고? 외우지 않고 되는 것은 없다. 저자의 뻥은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뻥일 뿐이었으니, 이 책을 ‘내던져’ 버려야 할까?

  이 책은 문법을 나 같은 입장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국어학을 하나의 공부대상으로 하는 나와 같은 국어학도의 입장이 아니라, 대중의 입장, 즉 일반 언어사용자의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 일반 언어사용자, 즉 언중들에게 있어서 문법은 보다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법을 알아야 하는데, 그들의 입장에서도 이 책은 제대로 ‘뻥’치고 있다. 사실 다소 재밌게 읽히기는 했지만, ‘공부’ 안하고, ‘외우지 않고’는 이 책을 읽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여기서 이 책의 몇 가지 점들의 문제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사실 내가 문법을 공부하는 것은 문법의 전 분야가 아니라, 그 한 부분이랄 수 있는 학교문법을 공부하고 있다. 사실 일반인들에게 적용되는 문법이란 것이 바로 학교문법인데, 학교문법에 있어 이 책은 어떤 설명들은 학문문법, 즉 개인 문법학자의 설에 관한 것들이다. 그런 점은 분명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지적하고 넘어갈 것은 문법 용어에 관한 저자의 생각이다. 문법 용어에는 아무래도 한자어가 지배적이다. 그런데, 저자의 입장처럼 “어려운 한자어를 써서 겁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한자어를 쓰지 않고서는 문법의 중요한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간소화를 이루기 어렵다. 논의에서 벗어날 우려가 있어 더 왈가왈부 하지는 않겠지만, 이 책을 읽는 처음부터 귀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어 언급하고 간다.

  저자는 말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면서 “글보다 말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실 말이 먼저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에서는 말과 글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 말이 중요하면 글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둘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과 글을 그렇게 분리해서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 보인다.


“[더우기]라는 소리를 영어처럼 소리 나는 대로 쓰면 ‘ㄷㅓㅜㄱㅣ’가 됩니다. ‘더우기’가 맞춤법에 맞는 표기인지 ‘더욱이’가 맞는 표기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런데도 한글을 마치 한자처럼 네모 안에 답답하게 갇혀 있어요. 훈민정음을 만들 때 우리나라가 한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네모반듯하게 규격화되어 있는 한자의 글자꼴에 이미 익숙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글도 한자처럼 모아서 쓰게 되었어요.”


  미치고 팔짝 뛰겠다. 이 저자는 우리나라 맞춤법의 기본 원리도 묵사발로 만들어 버린다. 사실 문법을 논하면서 말의 소리를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를 알겠지만,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식의 말은 너무하다 싶다. 더욱이 한글의 모아쓰기가 세계적으로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가를 저자가 알고 있다면 이런 식의 무식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저자는 한자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듯싶다. 더 말하고 싶지 않다.

  앞에서도 내가 학교문법을 공부한다고 했는데, 학교문법이 저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 무식한 것이 아니다. “‘학교문법’은 학생들에게 설명하기 쉽게 만든 문법”이라고? 갈수록 가관이다. 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게 학교문법이 아니다. 학교문법은 말하자면 일반 언중들의 말하기에서 사용하는 하나의 규칙이다. 저마다 말하는 것이 다르고, 문법을 논하는 학자마다 그 규칙들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통일된 규칙이 필요하다. 그것이 학교문법인 것이고, 그런 규칙이 가르치는 곳이 학교일 수밖에 없기에 이름하여 학교문법인 것이다.

  “문법은 규칙인데 규칙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규칙만으로 말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문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말은 맞는 말인 동시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문법이 규칙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말은 그리 간단한 것이 못된다. 특히 우리말에서의 규칙화는 무척이나 어렵다. 그래서 외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얘기다. 일반화되지 못하고 규칙화되지 못하는 것을 문법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그 예외적인 것들을 빼버린다? 그럴 수 없기에 여러 가지 예외적 현상들을 문법에 포함시키고 있다. 저자 말대로 ‘제대로 된 문법’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제대로 된 문법을 하고 있는가? 웃지 못 할 일이다.

  이 책에서 ‘-아/어, -게, -지, 고’를 부사형 어미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 현행 7차 학교 문법에서는 이것을 분명 부사형 어미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무런 언급 없이 부사형 어미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저자의 소홀함이라고 볼 수 있다. 학교 문법에서는 부사형 어미라고 인정하지만 이러이러 해서 부사형 어미라고 할 수 없다 식의 설명이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7차 학교문법에서는 “국어에서 궁극적으로 연결 어미는 부사형 어미로 볼 수 있다는 특수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설명도 그 안에 들어있다고 보여 진다. 부사형 어미에 관해서는 여전히 학계의 논의가 있고 필자의 주장은 그 일부이다. 그 일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중에게 내어 놓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중주어문도 학교문법에서의 견해와 조금 다르다. 저자는 서술절 내포문으로도 볼 수 있고, 이중주어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앞서 주장한 대로라면 이 또한 모순일 수 있겠다. 학교문법에서는 원칙상 이중주어문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아무런 언급 없이 이중주어문으로도 볼 수 있다고만 한다. 마치 그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보어 설정의 문제도 학계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 부분이다. 필수적 부사어를 보어로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논란으로 정리되는데, 저자는 아마도 필수적 부사어를 보어로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에 있는 듯하다. 필수적 부사어를 보어로 인정하게 되면 보어의 규칙화에 치명적인 어려움을 가져온다. 이런 이유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괜한 필수적 부사어로 짜맞추기식 설정이라고 보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물론 저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저 그렇다는 것이다.

  저자는 관형격조사 ‘의’에 대해 전면 부정하면서 ‘연결조사’로 설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읽고 저자의 말만 듣고 어디 가서 이건 연결조사야 하면 창피당하기 십상일지도 모른다. 다만 저자의 주장을 일정부분 수긍할 수 있는 부분도 크다. 하지만 학교문법에서 소유격조사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고 관형격조사로 이름 하면서 체언간의 연결의 역할을 하고 있음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책에서의 상대높임법 분류에도 문제가 있다. 현행 7차 문법에서는 격식체를 4가지, 비격식체를 3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비격식체를 2가지만으로 구분한다. 거기에다가 “비격식체에서도 상대방이 아주 높을 때만 ‘-요’를 붙여 상대방을 높인다는 사실을 표시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요’를 붙이지 않는 것으로 상대방이 아주 높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다. ‘-요’는 분명 두루 높임으로 상대방이 ‘아주’ 높지 않더라도 붙여 쓰고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담겨있다는 것은 이 책이 ‘4천만’ 국민의 ‘국어책’으로 기능하기에 의문을 들게 한다. “만약 몽룡이가 형을 무서워하고 어렵게 생각한다면, 몽룡이는 형을 아주 높은 사람으로 생각해 ‘-요’를 붙여 말할 거예요.”라는 설명에 과연 수긍할 수 있는가? 웃지 못 할 노릇이다.

  저자의 주장은 시제의 문제, 즉 미래시제의 설정에서도 나타난다. ‘-겠’이 그것인데, 현행 학교문법은 미래시제로 ‘-겠’을 설정하고 있다. 분명 이것은 문제이지만, 그런 언급은 전혀 없이 ‘-겠’은 미래시제가 아니라고 설명하면 그렇게 배운 사람들은 뭐가 되는가? 미래시제 ‘-겠’의 설정여부는 학계의 논란의 대상이기도 하다. 아직 합의되지 않은 그 논란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 학교문법과 배치되면서까지 일반 대중에게 떳떳하게 내어놓는 저자의 자신감을 높이 사야 할 듯하다.

  이 외에도 사동 표현에서 ‘-시키다’가 빠져있다. 그리고 이중모음을 설명하면서 “두 개의 단모음을 합해서 만든 글자”라는 어느 문법책, 언어학 책에도 없는 설명을 하고 있다. 이중모음은 단모음 두 개의 합이 아니다. 그럼 이중모음은 다시 단모음으로 나누어져야 한다는 얘긴데, 어느 문법학자도 이중모음을 단모음 2개로 나누지 않는다. 저자가 반모음에 대해 알고 있는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엿보이지만 이만 줄이기로 하겠다. ‘4천만’의 ‘국어책’임을 자임하는 이 책이 이런 문제들을 안고 있다면 극히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여러 가지 삽화와 예들이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렇게 따분하고 지루하게 문법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도 이 책의 중반까지는 그런 대로 가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는 여느 문법책과 차별을 두기는 어렵긴 하다. 하여간 이 책이 ‘4천만’에게 쥐어질 ‘국어책’이기에는 저자의 사견과 일방적 주장이 곳곳에 너무 많이 담겨있어 지극히 부족해 보인다. 그리고 그 ‘뻥’, 즉 문법을 공부하지 않고 외우지 않고 알 수 있다는 그 ‘뻥’은 ‘뻥’으로 검증되었다고 본다. 만약 문법이 정말 그런 것이라면 저자가 굳이 책을 쓸 필요도 없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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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7-01-07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법 공부는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저도 수업시간엔 학교문법을 위주로 배우긴 했지만 그 때마다 교수님께서 "학계에는 이런 이런 의견도 있으니 참고해라"라고 하셨던 게 생각나네요.

멜기세덱 2007-01-08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문법을 다루다 보면, 애매한 것들이 너무 많아요. 공부하다보면, "이게 무슨 문법이냐?"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도 참고해야 하는데, 그렇게 한다는 게 솔직히 쉽지 않죠. 하여간 어려워요...ㅎㅎ
 
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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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캐비닛』을 읽고난 후의 느낌이랄까, 흔한 감상이랄 것은 조금 남달랐다는 정도이다. 조금 독특한 소설이라고나 할까. 이 소설을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으로 직접 고른 한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또 한 명의 괴물 같은 작가를 갖게" 된 거 같지는 않다. 평범의 언저리 그 이상이었다고 하는 것이 그 작가의 역량이 범인의 그것보다 높다고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 소설이 평범의 언저리에서 조금 벗어난 것은 작가의 어떤 필력때문이라기 보다, 이 소설의 이야기가 된 소재의 약간의 독특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작가는 우리에게 '캐비닛' 하나를 던져주고는 뭐 특별할 것 없은 없다고 말한다. "우아하고 낭만적인 상상을 떠올리는 짓은 일찍감치 집어치우""볼품없고 낡아빠진 캐비닛", "상상할 필요도" 없는 "평범한 캐비닛"이라고 수차례 말한다. 그럴 바에야 왜 그따위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캐비닛'을 던져주는 것인가? 여기에 조금은 호기심이 발동한다. 그래서 그 '캐비닛'을 열어보게 하는 것이다. 뭐 '칠천팔백예순세 번'의 자물쇠를 열려는 시도 같은 것은 우리에겐 필요없었으니, 호기심의 발동은 즉각적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겠다.

이 '캐비닛'을 열고 부터는 사실 흥미로웠다. '루저 실바리스'와 '심토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허허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궁금증들을 유발하고 있다. "우리가 이해하건 이해할 수 없건 상관없이, 우리가 부정하고 있는 환상과 마법은 우리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이 도시에서, 각자의 집에서, 심지어 우리 몸속 깊은 곳, 대장이나 맹장 같은 곳에서 매순간 일어나고 있으며 또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이 소설에서는 증명해 보이겠다는 듯 하다.

에이 그런게 어딨어? 하고 우리는 처음엔 반문한다. 그렇다고 이 소설을 다 읽은 후에도 그 반문이 역전되는 것은 아니다. 조금 누그러진다면 또 모를까. "에이 그런게 어딨니? 있다면 뭐 할 수 없고." 사실 이 소설속의 이야기들을 우리가 믿기에는 너무나도 허무맹랑할 뿐이다. '새끼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남자' 이야기라든가, 샤워를 하고 나오자 자신의 성기가 사라져버렸다는 남자', '시간을 잃어버리는' 사람들, 도플갱어, '고양일로 변신하고 싶'은 사람 등등, 별의별 특이한 인간군상들이 등장한다. 이걸 어떻게 믿어? 난 도무지 못 믿겠다. 하지만 이런 일이 정말로 있을까 하는 의문이 조금은 일었다고 해야겠다. 그런 의문이 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했던 것이다.

작가는 이 이야기들은 죄다 '거짓말'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아니 죄다 거짓말이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이야기들 속에는 혹시 '나도?'라는 물음을 하게 만든다. <저도 심토머인가요?>란 장에서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나온다. 그 답은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우리도 '심토머'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하기사 이 소설의 화자 '공대리'도, 그리고 '손정은'도 조금씩은 '심토머' 기질이 보이고 있다. 나도 어떤 점에서 '심토머'일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 듯도 하다.

우리는 나름대로 조금씩은 '특이한' 부분들이 있다. 남들과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어느 한 부분이라도 달라야 하는 것이 이땅을 살아가는 사람의 당연지사 아니던가? 그런데도 모든 것은 획일화 표준화 하려는 이 사회에서 저마다 조금씩의 '심토머' 기질을 숨기고 잘라내려고만 한다는 것은 잔인한 처사가 아닐까? "대표성의 잣대에 기대지 말고 개별성의 잣대로 사람을 대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성숙하고 깊이 있는 인간관계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존중이 우리의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그저 '평범한 캐비닛'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안에 담은 것들은 특이와 이상(異相)과 다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무언가는 지극히 평범한 교훈에 다름 아니라는 얘기인 것이다.

이 소설 전체의 이야기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특이한 것들을 모아놓고는 이것은 하등 특이할 것이 없다는 작가의 '구라' 속에는 다른 것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그 '특이'는 저마다 가지고 있는 '평범'의 다른 모습일 거라는 얘기 아닐까? 나는 그렇게 본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다양한 환상적 상상적 소재들은 소설의 흥미와 재미를 이끌어 내기에 효과적인 것들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을 읽어내는데 그리 지루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느꼈던 여러가지 아쉬움들로 인해, 그런 흥미와 재미에도 불구하고 다소 높은 평가를 하기에는 석연찮을 수 밖에 없었다. 여러 심사위원들이 그런 아쉬움들을 몇가지 지적하고 있지만, 어떤 치밀한 구성이나 이야기의 개연성 등은 소설의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전개의 치밀함에서 오는 소설에 대한 흡인력보다는 이야기들의 특이한 소재의 흥미성만 강하게 남는다는 얘기다.

심사위원 중 하나였던 은희경의 심사평을 들어보자. "몇 가지 아쉬움을 말하자면, 우선 소설이 좀 길다.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해도 길면 늘어지게 마련이다. 쓰는 사람이 재미있어야 재미있는 소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늘 읽는 사람을 의식하여 독자보다는 늦게 그리고 조금 웃어야 톤과 길이의 균형을 잃지 않는다. 이 작품은 더구나 병렬형 구성이다보니 독자는 금방 패턴에 익숙해지는데, 이미 이 작품과 낯을 익힌 독자에게 자기 소개를 하는 듯한 초기 설명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중간중간 화자가 권력자가 되어 훈계하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부분이 있는데 이 역시 작가가 화자와 동일시되는 부분에서 좀더 냉정해져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이 소설은 소설로서는 다소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한다. 누구의 말처럼 "또 한 명의 괴물 같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보다 소설자체의 내구성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아쉬움이라면 그런 아쉬움이다. 특이한 것들을 갖다 놓았지만 뻔한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소설의 내구성이라고 한다면 그런게 좀 부족하다 싶은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읽었고, 그래서 읽어난 후의 아쉬움이 크다. 김언수라는 소설가에게 그 아쉬움의 폭만큼의 '기대'는 남겨 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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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1-09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 우리 역사 바로잡기 1
이덕일, 김병기, 신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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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흔히 우리 역사의 자랑거리로 “역사상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침입한 적이 없다.”는 것을 말하곤 한다. ‘얼마나 자랑할 것이 없으면 그런 것을 자랑할까?’ ‘뭐, 내세울 것 없으니 임기응변으로 갖다 붙인 것 아니겠는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간혹 이런 생각들을 해오곤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또한 그만한 자랑거리가 없다. 드넓은 벌판을 누빈 징기스칸의 몽고나, 아직도 거대한 영토를 거느린 중국 등의 대제국의 역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찬양을 받아왔다. 우리의 역사에서 그렇지 못한 것을 한탄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래서일까? 주변의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한편, 우리 역사에서 숨은 대제국의 역사거리가 없는가를 열심히 찾고 있지 않은가?

  사실 우리가 다른 나라의 침입을 수백차례 당한 것은 뼈아픈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 역사에서 다른 나라를 침범한 적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기 어렵다. 어찌 과감히 ‘단 한 번도’를 내세울 수 있느냔 말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역사가 말 그대로 다른 나라를 침입하여 칼과 창을 흔들어 파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자랑거리가 아니겠는가? 난 요즘들어 그런 생각을 해보곤 한다.

  일본의 역사왜곡의 지난한 문제에 골머리를 앓아오던 차에, 저 기세등등의 대륙의 지배자께서 우리의 역사를 갈아먹으려 하고 있으니, 양수겸장을 맞은 것이 아닌가? 난감한 노릇인 것은, 말도 안 되고, 허무맹랑하기까지 한 논리로 우리의 고대사를 가로채려 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우리의 역사학계에서는 당황한 탓인지 속수무책으로 이렇다 할 대응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다.

  나는 이런 현실 속에서 차라리 우리의 역사가 한낱 보잘 것 없는 영토를 차지해 왔다손 치더라도 ‘다른 나라를 단 한 번도 침입한 적이 없는’ 평화를 수호하고 지켜온 아름다운 역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중국의 동북공정은 무력과 전쟁의 목적, 즉 대제국의 옛 꿈을 다시금 실현하고자함에 그 기저를 두고 있다. 이것은 다만 지나간 역사의 왜곡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거기에는 피와 전쟁의 참혹한 역사만을 남긴 제국주의의 부활의 꿈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들과 똑같은 논리, 똑같은 목적에서의 ‘이에는 이, 눈에는 눈’식의 대결적 대응은 바람직한 것이 못 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옛 역사에서 “광활한 저 대륙을 종횡무진 누비며 대제국을 지배했었다”느니 하는 대응 말이다. 제국주의에 제국주의로 맞서는 것은 끝없는 파멸을 자초하는 것일 터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역사가 사실과는 다르게 왜곡되는 것에는 어떠한 타협과 정치적 의도가 반영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변 강대국의 무서운 의도가 숨어 있는 역사왜곡의 문제에 대해 유효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충실한 우리 역사의 발굴과 체계화가 필요하다. 허무맹랑의 논리에 실증적 사료와 논리적 역사기술을 내세운다면 그들의 역사왜곡은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는 다소 선정적 제목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보다 유효적절한 대응의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제목이 선정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우리 역사 인식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좀 위험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제국주의적 대결이 바로 이러한 인식이다. 어린아이들의 싸움에서 흔히 보이는 것이 자기 아빠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서로 주장하는 것이다. “너희만 강대국이었니? 우리도 강대국이었어 임마! 까불지 말라고. 확 그냥!”식의 논리가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는 한 마디에 담겨 있지는 않은 것인가?

  그러나 이런 제목을 담은 의도가 보다 대중의 주목을 끌기 위한 방편이라고 보여질 뿐, 책 속의 내용은 꼼꼼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고조선의 역사를 재검토하고 서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고조선이란 나라가 역사적 사실일 뿐 아니라, 과거 중국 고대의 한나라와 견주어 손색없었던 강대국이었음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난 적어도 저자들의 집필의도가 거기에 있을 뿐이라고 보고 싶다. 그들과 똑같은 제국주의의 끝없는 열망이 담겨져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들이 밝히고 있는 이 책의 의도를 “일제 식민사관과 중화 패권주의 사관은 한 세기 가까운 시차를 두고 있지만 두 사관의 한국사 공격이 고조선이란 동일한 대상에게 집중”되고 있고, “우리 국민들의 현재의 역사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식민사관’에 대해 그를 바로잡고자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우리 역사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인식”이다. 그것을 위한 이 책의 노력은 가히 높이 살만하다.

  이 책에서는 우선 국사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고조선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를 조목조목 따진다. 우리 국사 교과서는 대강 훌터 보아도 오류와 정리되지 않은 서술임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고조선에 대한 우리 학계의 체계화되지 못한 역사서술의 문제가 담겨 있고, 또한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 기술의 더 큰 문제가 담겨있다 하겠다. 우리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초석을 다잡는 것은 바로 우리 역사 교육의 현장부터가 시급하다고 하겠다. 고조선에 대한 신화적 인식은 우리의 역사의 기초를 단순한 신화로 치부하게끔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역사 인식의 기초가 그런 오류를 바탕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신화속의 고조선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역사적 사실로서, 정확한 역사 인식을 위해서 이 책은 단연 돋보이는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된다. 흔히 ‘고조선’의 ‘고’가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서 붙인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아주 기본적 사실조차 잘 모르고 있었으니, 다 아는 듯하지만 거의 모르고 있는 것이 우리 역사의 시작이랄 수 있는 ‘고조선’이 아닌가 한다.

  이 책은 이 외에도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고조선의 모습을 복원하고 있다. 전체적 맥락이 고조선이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던 강대국이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다만 우리 역사가 광대한 제국의 역사를 가졌었다는 뿌듯한 자랑거리로만 다가오지 않길 바란다. 이 책이 우리에게 보다 가치가 있는 부분은 고조선에 대한 보다 정확한 역사 인식을 갖추게 하는 것임에 있다고 하겠다. 고조선을 알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 책이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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