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월드컵이 한창이다. 즐겁게 시청하고 있던 차에, 얼마전 아르헨티나전 참패 후 한 네티즌의 정확한 예측이 주목받은 적이 있다. 뭐, 나도 심심하던 차에, 주목받지 못하겠지만 행복하게나마 예측 겸 상상해보자. 내 예측의 대상은 16강 이후부터다. 

16강 진출팀 예상  

A조에서 1위 멕시코, 2위 우루과이가 진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두 팀이 전력상 비등해보고 조1위를 두고 용호상박 다툴것으로 예상되는데, 아무래도 더 절실한 멕시코가 이기지 않을까 싶다. 프랑스가 남아공을 크게 이기지 않는한, 두 팀의 진출이 유력하다. 

B조는 아르헨티나가 1위, 한국이 2위로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할 것이다. 반드시. 

C조는 미국이 1위를 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 1위가 슬로베니아이지만 마지막 상대가 영국이다. 영국이 강팀으로서의 자존심 회복의 기회가 있는 만큼 승리할 것으로 예측된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약체인 알제리를 만난다. 미국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영국과 승점이 같은 상황에서 다득점에 앞선 미국에 부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2위는 영국 진출 예상.

D조는 독일이 1위, 세르비아가 2위를 차지하여 16강에 진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독일과 가나가 맞붙는 마지막 경기에서 위기에 몰린 독일이 강팀의 면모를 보여줄 것이 확실하다. 세르비아는 호주와 상대하기때문에 가나보다 유리한 입장이다. 

E조는 네덜란드의 1위가 거의 확정적인 가운데 덴마크가 일본을 누를 것으로 예상한다. 

F조는 파라과이의 1위가 확실시된다. 마지막 상대가 뉴질랜드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경기에서 이탈리아는 슬로바키아를 만난다. 이탈리아의 승리를 조심스레 점친다. 이탈리아가 2위로 진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G조는 북한이 이미 죽음의 수렁에 빠진 가운데, 브라질이 1위, 포르투갈이 2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E조는 스페인의 우승후보다운 면모를 다시 세우기 위해 칠레가 희생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 경우 스위스가 2위로 진출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16강이 모두 가려지게 되면 이제부터 결승토너먼트다. 이렇게만 되면 한국이 4강 신화를 다시 재현하는데도 유리한 대진이 완성된다. ㅎㅎ 

우선 16강의 한 쪽 테이블에서의 결과를 예상해보자. 

16강-1경기 멕시코 對 한국 : 한국이 멕시코를 만만하게 생각하는데, 최근 전적도 괜찮다. 8강을 노려볼만 하다. 한국 8강 진출 

16강-2경기 미국 對 세르비아 : 미국이 16강을 진출하지만 세르비아도 만만찮을 것으로 예상한다. 힘겹게 세르비아가 이기지 않을까 예상한다. 세르비아 8강 진출 

16강-3경기 파라과이 對 덴마크 : 파라과이이 쉽진 않겠지만 넉넉히 이길 것으로 예상된다. 파라과이 8강 진출 

16강-4경기 스페인 對 포르투갈 : 스페인이 토너먼트에 들어서면서는 힘을 낼 것으로 예상된다. 포르투갈이 분위기를 타긴 했지만 선수들 면면이 스페인에는 무리이지 싶다. 스페인 8강 진출 

이렇게 8강이 가려지만 8강 대진도 한국이 해 볼만하다. 

8강-1경기 한국 對 세르비아 : 세르비아와는 평가전에서 한 번 이긴 적이 있다. 8강전 상대로는 약팀이기 때문에 아주 해볼만하다. 이렇게 해서 4강 신화가 재현된다. 한국 4강 진출 

8강-2경기 파라과이 對 스페인 : 스페인의 승리 예상. 스페인 4강 진출 

한국과 스페인의 4강. 스페인이 유리하지만 한국도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은 상태이기 때문에 쉽게 결판은 나지 않을 것이다. 2002년의 좋은 기억이 있지만, 재현되기는 어렵지 않을까? 

다른 16강 테이블은 간단한 예상만 하자. 

16강-5경기 우루과이 對 아르헨티나 : 아르헨티나 8강 진출 

16강-6경기 영국 對 독일 : 우승후보끼리 일찍 만났지만 독일의 승리를 점쳐본다. 독일 8강 진출 

16강-7경기 네덜란드 對 이탈리아 : 네덜란드 8강 진출

16강-8경기 브라질 對 칠레 : 브라질 8강 진출. 

8강-3경기 아르헨티나 對 독일 : 아르헨티나 4강 진출

8강-4경기 네덜란드 對 브라질 : 브라질 4강 진출

준결승에서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만날 것으로 예상된다. 아르헨티나의 상승세일까? 안정적인 브라질일까? 결승에서 아르헨티나와 우리나라가 다시만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브라질이 결승에서 스페인과 격돌하지 않을까 예상한다. 

결승 스페인 對 브라질 : 스페인 우승. 스페인이 우승의 한을 한번 풀어보라고....인심썼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10-06-22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이군요! 저는 브라질이 우승 한 표! ^^ 아르헨티나랑 브라질이 붙지 않을까 싶은데.

멜기세덱 2010-06-22 17:0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오랜만이죠.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조1위를 하는 이상 4강에서 만날 확률이 높은데요. 브라질이 포르투갈한테 지지 않는 이상 조1위가 거의 확실해서리.

전호인 2010-06-22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우리가 브라질 누르고 결승가서 아르헨티나 설욕한번 할까요? ㅋㅋ
간만에 뵙는 듯...

무해한모리군 2010-06-22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모처럼 뵙습니다.
뵙고 싶어요 ^^

순오기 2010-06-22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멜기님이닷! 반가워서 덥석~~~~~ ^^
나는 한국 16강 진출, 일본은 16강 좌절을 기원하는 심뽀에요.ㅋㅋ
우승은 어디가 될까...점쳐보는 재미도 좋을 거 같아요.^^

멜기세덱 2010-06-22 18:14   좋아요 0 | URL
기원이 아니고, 예상이에요...객관적으로다가....ㅋㅋ
 

예전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썼던 글인데, 여차저차해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메일함을 정리하다가 가상의 공간에 쳐박혀 미아가 되었던 글을 다시 불러내본다. 글이 좀 긴데, 보관차원에서 올리는 것인만큼 스크롤 압박을 좀 견뎌야 할 것 같다. 

 

이상 ‘인간’ 현상 ― 결혼의 노후화

이상 ‘인간’ 현상

  현재 전 지구적 문제로 거론되는 것은 무엇보다 이상 기후 현상이다. 지구 온난화의 가속화에 따라 엄청난 재앙들이 연이어지고 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환경의 변화들이 보고되고 있다. 이런 이상 기후 현상의 원인으로 손꼽히는 것은 바로 산업화에 따른 무분별한 환경파괴다. 개발과 성장의 논리 아래 최근 1~2세기 동안에 자연은 무참히 파헤쳐져 왔다. 누군가 ‘환경의 역습’이라고 했던가? 최근의 이런 기후 이상으로 인한 재앙들은 말하자면 지구 공멸의 전초전일 뿐이라고 한다.

  이런 소름끼치는 재앙의 징조들에 누구나 문제의식을 느끼긴 하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내놓고 있지는 못하다. 이상 기후 현상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실태조사와 원인 분석, 그에 대한 구체적 대안들을 찾는 작업은 이미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임에 틀림없다.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환경운동가들에 의한 이런 활동들이 계속되고 있는 것에 그나마 위안을 가질 뿐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일련의 ‘이상 기후 현상’에 대한 대처에서 소외된 또 하나의 ‘이상 기후’ 현상이 있음을 지적해야 하겠다.

  기후를 우리가 폭넓게 해석한다면 이런 기후의 이상은 자연의 전반적 변화, 즉 자연의 이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생태계 전반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들이 포함되어야 하고, 거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이상 인간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 사회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이상 현상 또한 우리가 직면한 또 하나의 이상 기후 현상으로 인한 재앙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 해수면 상승 ― 결혼의 노후화

  이상 기후 현상에서 대표적인 것이 지구 온난화 문제다. 이런 문제들의 모든 현상들이 모두 맞물리는 것이긴 하지만 지구 온난화는 그 중에서는 가장 위협적인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그것은 지구 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인데, 이것으로 인해 지구의 육지란 육지는 자칫 물로 뒤덮여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수면 상승은 이상 기후 현상의 바로미터(barometer)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상 인간 현상의 바로미터는 무엇일까? 언뜻 꼽자면 출산율 저하나 노후화 현상 등등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의 근원에는 우리가 문제시하지 못했던 척도가 있으니, 바로 평균 결혼 연령의 급상승이 그것이다.

  최근 통계청에서 조사한 2006년도 평균 초혼 연령은 남자가 30.9세, 여자가 27.8세다. 1990년 평균 초혼 연령은 남자가 27.8세, 여자가 24.8세였고, 2000년에는 남자 29.3세, 여자 26.5세였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남자의 평균 초혼 연령은 2.5세 상승했고, 여자는 2.3세 상승했다. 통계청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1990년부터로, 최근 16년간 남녀의 평균 초혼 연령은 각각 연평균 0.19세와 0.18세다. 그러니까 대략 남녀 공히 연간 약 0.2년씩 결혼 연령이 늦어진 셈이다. 이를 월로 환산하면 매년 두 달하고도 열흘씩 초혼 연령이 늦어졌다는 얘기다. 직접적인 수치의 비교는 어렵겠지만, 이것은 해수면 상승의 수치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결혼 연령의 급상승을 결코 시답잖게만 볼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이것은 이상 기후 현상과는 다른 차원에서 사회 ․ 경제적 문제를 야기한다. 또한 인류의 생물학적 성장과정 상에도 반하는 현상으로 이는 갖가지 문제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엉성하긴 하지만 예전의 결혼 연령대를 짐작해 볼 수 있거나 결혼에 담긴 사회 ․ 경제적 의미와 그 매커니즘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영화나 문헌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고, 결혼 연령의 상승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며, 그것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 나름의 주장을 펴보고자 한다.  


‘춘향이와 이몽룡’에서 ‘로미오와 줄리엣’까지

  2000년 개봉한 거장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영화 <춘향뎐>, 감독 : 임권택, 주연 : 조승우 ․ 이효정, 2000.)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서편제>를 비롯해 우리나라 영화계의 거봉인 임권택 감독의 영화라는 점에서 화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 모르지만, 이보다 더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 춘향과 이몽룡을 맡은 주연 배우의 실제 나이다. 특히 여주인공 춘향 역을 맡아 열연한 배우는 1983년생의 이효정이란 여고생이었다. 촬영 당시 나이가 16살이었으니, “이팔 꽃나이” 딱 춘향이의 나이다. 이몽룡 역을 맡은 조승우도 당시 스무 살이 안 됐을 때였으니, 원판 성춘향과 이몽룡의 실제 나이와 거반 비슷하게 캐스팅한 셈이다.

  춘향 역을 맡은 여배우의 실제나이가 무에 그리 화제가 될 법 한가 의아스럽겠지만, <춘향뎐>이 조선 후기 연행되어 전해오던 판소리 <춘향가>를 리얼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점과 겹쳐질 때 이는 대단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청소년보호위원회에서 문제 삼기를 “이 영화에서 미성년자인, 춘향역의 여배우의 가슴이 노출되는 등의 장면이 ‘영리 또는 흥행의 목적으로 청소년에게 음란한 행위를 하게 하는 행위’를 금지한 청소년보호법 26조 2항에 위배될 소지가 있어 고발을 검토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는 이래저래 논란이 되었지만, 창작의 자유를 앞세운 영화계의 반발이 거세, 청소년보호위원회의 유감표명 정도에서 마무리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 논란의 연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것이 21세기 초엽에 논란거리가 되었다는 점을 확실히 해두자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춘향전의 대표적 판본으로 전하는 󰡔열녀춘향수절가󰡕의 배경 “숙종 대왕 즉위 초”(조령출, 󰡔열녀춘향수절가󰡕, 보리, 2007, p.225. 이하 이 글에서 󰡔열녀춘향수절가󰡕의 원문 및 번역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함.) 그러니까 17세기 말에서부터 이후 판소리로 연행되었던 조선후기까지 이 춘향이와 이몽룡을 두고 어떤 논란이 있었을까를 궁금해 하면 어떨까? 춘향전이 읽히고, 판소리로 연행되면서 사람들은 혹시 이팔청춘 춘향이와 열여덟의 몽룡이를 두고 21세기적 논란으로 설전을 벌였을까? 비슷하긴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다.

  당시 󰡔열녀춘향수절가󰡕는 대단한 음서였다. 현대식으로 하면 ‘빨간 책’ 말이다. 그래서 이걸 읽자면 몰래몰래 숨어서나 가능했다. 간혹 읽다가 걸리면 경을 치기 딱 알맞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봐도 야하기는 무지 야하다. 솔직히 어디 가서 당당히 낭송하기에는 겸연쩍다. 판소리로 연행될 때는 ‘눈대목’이라고 하는 클라이막스 몇 부분만을 주로 했겠지만, 판에 따라서는 재미로 야한 대목들을 능글맞게 뽑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데에 재미를 갖는 사람들이 꽤나 많을 법 하니 말이다. 이야기가 약간 삼천포로 빠진 감이 없지 않은데, 다시 논지로 돌아오자면, 조선후기, 아니 20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이 음란물의 주인공의 나이가 열여섯, 열여덟인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학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시대에서, 아무리 이야기 속의 일이라고 해도, 열여섯, 열여덟의 ‘어린 것’들이 벌이는 이런 ‘음탕’한 짓이 별반 문제되지 않았을까? 반면, 자유와 개성과 인권을 최고의 선으로 내세우는 21세기에서는 왜 이와 비슷한 것이 논란이 될까? 이쯤해서는 이만한 아이러니가 없겠다.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사회의식도 자연스레 변하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찮다. 조선시대에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없었던 데에는 그것이 ‘일반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21세기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그것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겠다. 즉, 조선시대에는 그 나이 또래라면 말 그대로 ‘과년(瓜年)’한 나이인 것이다. ‘과년’은 “결혼하기 적당한 여자의 나이”를 가리킨다. 즉 결혼할 때가 된 나이의 남녀가 벌이는 정사는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글로, 판소리로 유포시키는 즐기는 것에 혀를 차고, 경을 칠 뿐인 것이다. 이와 달리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이 논란이 되고 문제가 되는 것은, 말하자면 이제는 이 나이가 ‘과년’한 나이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엄마, 나 그사람하고 ‘동거’하기로 했어.”

한국의 16세 소녀가 이렇게 선언했다고 가정해보자. 조용했던 집안의 평화는 순식간에 사라지게 된다. ‘집안 망신’에서 ‘미친 년’에 이르기까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단어들이 난무하고, 가족 간 갈등이 깊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나이의 소녀가 또래의 어떤 소년을 사랑하고, 함께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류 역사의 긴 흐름을 생각해볼 때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결코 벌어질 수도 없고, 벌어져서도 안 되는 일이다. 즉, 우리나라에는 인류의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가로막는 무엇인가가 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우석훈, 󰡔88만원세대󰡕, 레디앙, 2007, pp.25~26.) 


  상상해 보자. 아니, 상상이랄 것도 없다. 오늘날 학교에 다니는 열여덟의 남학생과 열여섯의 여학생이 서로 좋아해서 결혼을 하겠다고 춘향이와 이몽룡처럼 ‘난리부르스’를 떤다면 어떨까? 일단 열이면 열, 모든 부모는 반대하고 나설 것이다. 우선 “너희들은 아직 결혼할 나이가 아니”라며 설득하는 척이나 하면 다행이다. 거두절미하고 열의 아홉은 가위부터 찾아들고 머리끄댕이를 잘라 놓고 말리라고 덤벼들 것이다. 이 아이들은 아직 “결혼 할 나이”, 즉 과년한 나이가 아니라는 것, 이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인간들 속에 내재한 의식이다.

  잠깐 여기서 우리의 눈을 서양으로 돌려보자. 서양판 춘향이와 이몽룡이 있으니, 다름 아닌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얘들의 나이는? 놀라지 마시라, 춘향이와 이몽룡보다 어리단다. 그들의 나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줄리엣이 두 주 후 열네 살이 된다는 대목을 통해 그녀가 열세 살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로미오는 줄리엣보다 몇 살 많았을 것이다.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이 이야기의 시대배경은 대략 15~16세기로 추정된다. 춘향이와 이몽룡보다 한 세기 가량 앞선 세대인 것이다. 줄리엣의 시대를 조금 늦추어 춘향이와 동시대 인물이라고 가정한다면, 17세기의 줄리엣은 아마도 열여섯의 춘향이와 비슷한 또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당시 동서양 모두 ‘과년한 나이’가 비슷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동서양은? 현시대에 있어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의 초혼 연령은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동서양 공히 비슷한 추세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근 200년 사이에 결혼 연령이 대략 2배 가까이 늦어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과년한 나이’를 말해왔지만, 엄밀히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초혼 연령이 곧 ‘과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과년’에는 변화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결혼이 가능한 나이에 어지간하면 결혼을 한 것이고, 오늘날에는 결혼이 가능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훌쩍 넘기어 꽤나 늦게 결혼을 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왜 ‘과년’을 대략 두 번 지낼 나이를 보낼 때까지 이렇게 늦게 결혼하게 되는 것일까? 이것을 단지 “사회가 변했으니까”라고 얼버무리기에는 뭔가 부족한 감이 있다. 물론 사회변화에 의한 것이라는 대답은 맞는데, 중요한 것은 그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고, 그 변화 속에서 어떤 매커니즘을 통해 이처럼 결혼 연령을 거반 한 세대에 가깝게 늦춰 버렸는가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극단적으로 알아보자. 


결혼의 매커니즘 ― 󰡔봄 ․ 봄󰡕 혹은 조혼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자칫 장황해질 우려가 있다. 필자가 ‘극단적으로’ 알아보겠다고 한 것은 그런 우려 때문이다. 그러니까 극히 부분적 예들을 통해서 대략적으로 일반화하는 것이 “무조건적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이 글의 전체적 논지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적절한 방식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는 ‘장황’을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고, 오류를 범할 가능성은 이 글에서 그리 높지 않다는 것. 자, 그럼 이제 시작해 보자.

  사람들은 왜 결혼을 하게 되었을까? 우선 그 근원부터 추려보아야 하겠으나, 필자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다. 그렇다하더라도 일반적 재능의 소유자라면 대략 본능을 내세우는 것이 가능하다. 성적 본능이나 번식의 욕구 등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일면 타당하고 적절하다. 그러나 부족하다. 이는 같은 본능을 공유하는 범 동물류에 적용해 볼 때 그 부족함이 바로 드러난다. 범 동물적으로는 성적 본능이나 번식의 욕구를 가졌지만 결혼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결혼은 인간만의 독특한 체제 혹은 제도이다.

  이러한 설명을 결혼에 대한 본능 가설쯤으로 부른다면, 여기서 좀 더 발전된 적절한 설명은 ‘생존의 욕구’를 가져오는 것이다. 안정적 ‘먹이’의 제공, 위협적 대상에 대한 경계 및 방어 등의 필요에 의해 결혼이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는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어보인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결혼과는 매우 달랐을 테지만, 그렇게 결혼의 초기 형태가 정착되어 갔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 형식이 무리, 부족의 형태로 확장되면서 오늘날의 사회, 국가로 발전되어 갔다고 설명하는 것은 우리에게 기본 교양이다.

  일단 이것은 엉성한 형태의 결혼이라고 보여진다. 이것이 보다 근대적 결혼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노동력의 확보’라는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면서부터다. 인류가 무리와 부족의 형태를 이루면서 적에 대한 방어 체제는 보다 효율적이 되었다. 이제 남는 것은 안정적 먹이의 제공이다. 여기에 ‘농업 혁명’은 결혼이라는 제도의 정착에 획기적 계기가 되었다. 정착하여 살면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제공되는 노동력 확보가 주요해지는 것이다. 결혼은 이런 노동력 확보에 있어 가장 최상의 효율적 방법으로서의 창작품이다.

  다소간 장황했다. 수 만년의 역사를 훑는 데 있어 장황은 필요악임에 어쩔 수 없다. 자, 이제는 역사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자. 그것이 가능한 것은 산업혁명까지 별난 변화가 없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산업혁명을 맛보기 전에, 재미난 소설을 잠깐 살펴보자.  


우리 장인님이 딸이 셋이 있는데 맛딸은 재작년 가을에 시집을 갔다. 정말은 시집을 간것이 아니라 그딸도 데릴사위를 해가지고 있다가 내보냈다. 그런데 딸이 열살때부터 열아홉 즉 십년동안 데릴사위를 갈아 드리기를, 동리에선 사위부자라고 이름이 낫지마는 열네놈이란 참 너무 많다. 장인님이 아들은 없고 딸만 있는고로 그담 딸을 데릴사위를 해올때가지는 부려먹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머슴을 두면 좋지만 그건 돈이 드니까, 일 잘하는 놈을 고르누라고 연팡 바꿔드렸다. 또 한편 놈들이 욕만 줄창 퍼붓고 심히도 부려먹으니까 밸이 상해서 달아나기도 했겠지. 점순이는 둘재 딸인데 내가 일테면 그 세번째 데릴사위로 들어온 셈이다. 내담으로 네번째 놈이 들어올것을 내가 일두 참 잘하구 그리고 사람이 좀 어수룩하니까 장인님이 잔뜩 붙들고 놓질안는다. 셋재 딸이 인제여섯살, 적어두 열살은 돼야 데릴사위를 할테므로 그동안은 죽도록 부려먹어야된다. 그러니 인제는 속좀채리고 장가를 드려달라구 떼를쓰고 나자뻐저라, 이것이다.(김유정, 「봄 ․ 봄」, 전신재 편, 󰡔원본 김유정 전집󰡕, 강, 2007, p.164.) 


  이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김유정의 소설 「봄 ․ 봄」의 한 대목이다. 김유정의 소설은 일제강점기 당시 가난한 농민과 도시 빈민들의 소시민적 삶을 해학적으로 형상화한 명작들로 유명하다. 특히 위에 인용된 작품은 거반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일까? 아무튼, 이 작품을 인용한 이유는 무엇보다 이 작품이 결혼이 가진 근대적 매커니즘을 아주 극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나’는 점순이와의 결혼을 빌미로 장인인 동네의 마름 ‘봉필’에게 그 노동력을 착취당한다. 공교롭게도 점순이의 나이는 춘향이와 같은 열여섯이다. 반면 주인공 ‘나’는 26살임에도 불구하고 ‘성례’도 못치르고 장인에 의해 3년을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점순이는 ‘과년’한 나이였다. 결혼할 때가 된 것이고, 당연히 결혼을 시킬 때였던 것이다. ‘봉필’은 단순히 아직 키가 자라지 않아서 결혼을 못 시키는 것이라고 핑계를 댄다. 이것은 당시의 특수한 우스갯소리지만, 오늘의 현실에서는 더욱 가관으로 재현되고 있음을 좀 뒤에서 알게될 것이다.

  자, 그럼 산업혁명을 얘기해보자. 우리는 여기서 푸코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일말의 단초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섹스가 억압되었다는 그러한 담론은 분명히 지속되고 있다. 아마 취급하기가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담론은 진지한 역사적, 정치적 보증에 의해 보호되고, 수백 년에 걸친 대담하고 자유로운 표현의 시기에 뒤이어 17세기에 억압의 시대가 출현하게 되면서 자본주의의 발전과 일치되기에 이른다. 즉, 그것은 부르주아 질서와 일체가 되었던 것 같다. …… 섹스가 그토록 엄격하게 억압당하는 것은 섹스가 전반적이고 집약적 노동력의 동원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 자체로부터 설명의 원칙이 점점 뚜렷이 드러난다. 노동력이 조직적으로 착취되는 시대에 노동력의 재생산을 허용하는 최소한으로 한정된 쾌락 이외의 다른 쾌락 때문에 노동력이 허비되는 것을 용인할 수 있었을까?(미셸 푸코, 󰡔성의 역사 1󰡕, 이규현 옮김, 나남출판, 1990, p.29.)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위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성의 억압이 다만 노동력의 착취 때문만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결혼에서는 ‘노동력 착취’의 매커니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단서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제국주의 시기에 영국에서는 남성 초혼 연령이 갑작스럽게 30대 이후로 상승한 예가 있다고 한다. 제국의 식민지 사업에 동원될 군대와 노동력은 그들에게 주어진 경제적 부와 명예라는 허울 속에 가려, 그들은 때 지난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근대적 결혼이 ‘과년’한 나이를 훌쩍 넘기게 된 것은 분명히 산업혁명 이후의 이런 매커니즘 때문이었다.

  이쯤해서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단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냐고.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산업혁명은 ‘과년’을 넘기게 한 근본적 원인이었다고 나는 단적으로 얘기할 수 있다. 산업화에 의한 자본주의의 매커니즘은 전반적 사회 의식과 구조를 변화시켰고, 이런 변화 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간혹 억압적으로 결혼은 늦추어졌다. 인간이 그리 단순한가? 성적 본능이나 욕구가 그렇게 간단하게 타에 의해서 변화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는 있다. 그러나 결혼은 다른 영역이다. 그것이 사회 변화를 얼마나 철저하게 반영하는지를 우리는 지금까지 얘기한 ‘만혼’과는 달리 ‘조혼’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는 ‘조혼’ 풍속이 대단히 많았다. 이것은 너무나도 잦았던 수난의 역사에서 기인한다. 대표적인 조혼의 예로는 고구려의 데릴사위와 민며느리 제도에까지 올라가지만, 보다 특수했던 경우도 몇 차례 있었다. 조혼 풍속이 거세게 자리잡았던 첫경험은 고려시대 때 “원나라에 공녀를 보내면서부터였다.” 많게는 천여 명에 이를 정도의 공녀를 차출하여 원나라에 보내야 했으니, “부득불 전국의 과부와 처녀까지도 공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차출되지 않기 위해서는 “딸의 나이 8~9세가 되면 울며 겨자먹기로 짝지을 남아를 물색하여 서둘러 혼례”를 시킬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식의 공녀 차출이 없었다. 그런데 간혹 조혼이 붐을 이룰 때가 있었는데, 언제고 하니, 바로 왕비 간택을 위한 ‘금혼령’이 내려졌을 때이다. 왕비 후보자의 연령이 13~18세 였으니, 간택할 쯤 되어서는 일찌감치 혼처를 정해 보내버렸던 것이다. 조혼은 이후 일제시대에서도 성행했다. 굳이 그 이유를 세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당시 상황이 어땠는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대신하도록 하자.  


조혼은 개화기 이후에도 꾸준히 지속되어 1921년부터 1930년에 이르는 10년간 당시 법정연령인 남자 17세, 여자 15세에 이르지 않는 수가 남자는 7.1%, 여자는 6.2%나 되었다. 그리고 15세 이상 20세 미만에 한 결혼이 전체 결혼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3나 되었다.

세밀히 따지면 더욱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1911년의 국세조사에서 결혼한 사람 1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세 미만에 결혼한 사람이 남자 10명, 여자 18명이었다. 그리고 5세~10세에 결혼한 사람은 남자 48명, 여자 132명, 10세에서 15세까지는 남자 159명, 여자 488명이었다. 말하자면 1천 명당 나맞는 217명, 여자는 638명이 15세 미만의 어린 나이에 이미 결혼한 유부녀 ․ 유부남이었다.(정성희, 󰡔조선의 성풍속󰡕, 가람기획, 1998, pp.56~57. 이 글에서 우리나라의 조혼 풍속에 대한 설명은 모두 이 책을 참조하였다.)
 

  이런 조혼은 당대의 사회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음을 간단히 확인할 수 있겠다. 원나라의 처녀 공출 요구, 조선시대의 금혼령, 일제강점기의 시대상황 등에 의한 조혼의 성행이 그 예인 것이다. 지금의 만혼은 더욱 그러한 혐의가 짙다. 근 200년간 근대화, 산업화의 요구에 의해 결혼은 부쩍부쩍 늦어져 간 것이다. 급기야 “결혼은 미친 짓”이 돼버리기까지 했다. 이런 사회의 요구, 즉 자본주의의 매커니즘이 어떻게 결혼은 ‘미친 짓’으로까지 만들어 왔는지를 인상을 쓰고 살펴보자.  


이제 결혼은 ‘미친 짓’인가?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도발적으로 선언한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2002년 개봉되었다. 결혼이 뭔 죄가 있기에 ‘미친 짓’이라고까지 할까? 그러나 이 영화를 조곤조곤 들여다보면 괜히 그러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연희 : 평생 이렇게 데이트나 하면서…… 달콤한 말이나 실컷 듣고 살았으면 좋겠다…….

준영 : 네가 맞선에서 찾는 건 어떤 남자가 아니잖아? 어떤 조건이잖아……. 내 말 틀렸어?(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감독 : 유하, 주연 : 감우성 ․ 엄정화, 2002.) 中에서; 오영수, 󰡔경제학 갤러리󰡕, 사계절, 2008, p.13.에서 재인용.)
 

  이 영화의 도발적 주인공 연희는 이 시대의 양면적 연애관 혹은 결혼관을 잘 보여준다. 위에 인용된 준영의 말에서처럼 연희에게 결혼은 ‘조건’이 좋은 남자를 만나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준영은 연희의 결혼 상대가 못 된다. 다만, 연애 상대일 뿐이다. 이런 결혼에 대한 인식이 비단 영화 속의 연희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현대인들의 “현실적이고 냉정한 결혼관”(http://movie.naver.com/movie/bi/mi/detail.nhn?code=31893&mb=c#01)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 연희는 조건이 무척 좋은 의사와 결혼을 하고, 더불어 준영과는 딴살림을 차려 연애를 계속한다. 이런 연희의 행동이 진정 “현실적이고 냉정한” 찬찬히 따져볼 문제지만, 결혼에 대한 오늘날 현대인들의 인식 속에서 그것은 보편적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설문조사가 있어 흥미롭다. 국내의 모 결혼정보회사가 회원 1만 7천여 명을 대상으로 배우자의 조건에 관해 물었는데, 인상(외모), 학력, 수입 등을 조건에 따라, “세 조건 모두 비슷한 조건을 가진 사람들끼리 결혼하는 계층화가 두드러졌”다. 그 중에 가장 계층화가 심한 것은 학력으로 나타났다. “학력이 비슷하지 않은 남녀의 결혼은 거의 성립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여성은 자기보다 학력이 높은 남자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재밌는 것은 여성의 경우, 돈 많은 남편과 결혼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갖는 조건이 바로 외모라는 점이다. 이 조사에 의하면, “미모가 최상급인 여성은 최하급인 여성에 비해 연봉이 1,300만원 더 많은 남성과 결혼했다.” 이 조사는 전체적으로 결혼이라는 것이 외모나 학력, 수입 등의 조건에 의해 심각하게 좌우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 여성의 외모에 의해 남성의 연봉에 차등이 생긴다는 점은 현대 사회에 만연한 외모지상주의에 강한 우려를 표하게 만든다.(이상의 설문조사 내용은 오영수, 위의 책, pp.24~26. 참조.)

  이런 결혼에 대한 현대인들의 인식이 올곧이 반영된 것이 바로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다. 솔직히 결혼에 있어서 이러한 조건들을 무시할 수만은 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일 따름이지 절대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될 때, 이 영화가 ‘당돌히’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결혼은 미친 짓”이 되는 것이다. 곧, 그것을 조장하는 이 사회가 미친 것이 아닐까?

  조건을 따지는 결혼, 그것을 조장하는 사회가 빚어낸 결론이 바로 ‘결혼의 노후화’, 곧 필자가 ‘이상 인간 현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과년’을 곱절로 보내야 겨우 결혼이 가능한 이 사회에서 그 기간 동안은 결혼하기 위한 ‘조건’을 채우기 위해 허비된다. 우리는 다음에서 그 기간이 어떻게 허비되는지 눈 크게 뜨고 파헤칠 것이다.   


영화 <청춘>과 󰡔88만원세대󰡕

  현행법상, 결혼이 가능한 나이는 남자 만 18세, 여자 만 16세 이상이다. 다만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긴 하다. 오늘날 과년한 나이를 그쯤으로 보는 셈이다. 춘향이만 보더라도 16살, 즉 만 15세였던데 비해 여자의 경우 1살 많아진 셈이고, 󰡔경국대전󰡕에 “남자 15세, 여자 14세가 되면 혼인을 하는 것을 허락한다”라는 규정과 비교하면 3살이나 많아졌다.(노대환,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p. 참조.) 뭐 그 정도는 눈감아 줄만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평균 초혼 연령이 근 30세에 달한 것에 비하면 말이다. 그러나 춘향이와 이몽룡을 비롯한 조선시대 대부분의 남녀가 대개 오늘날의 법적 결혼 가능 나이쯤에 시집, 장가를 간 것과는 달리, 오늘날에 법이 정한 결혼 가능 나이가 애써 부모 동의 받아가면서 결혼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우리가 알기로는 ‘거의 없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아직 어리다.” 아니 “아직 어리다”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결혼하기 위한 ‘조건’들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분명 그들은 ‘과년’한 나이지만, 그들이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회가 요구하는 결혼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자의 경우 그 나이를 훌쩍 지나 거반 서른 살이 되어서야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10년을 훌쩍 넘는 세월 동안 그들이 갖추어야 할 결혼의 조건들이란 무엇일까?

  우선 고등학교를 마쳐야 할 터이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을 해야 한다. 남자라면 한 2년간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 어림잡아 남자는 6년 이상, 여자는 4년 이상을 대학에서 허비하고, 평균 혼인 연령에 이를 때까지 3~4년을 다른 조건들을 채우기 위해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조건들이라는 것은 개인차가 있겠지만, 우선은 직장을 갖는 것이다. 직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몇 년간은 돈을 모아야 한다. 여자의 경우 외모에 ‘손질’을 가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렇게 허비되는 시간들 동안 그들은 ‘조건’을 채우기 위해 여념이 없다. 이것은 단지 개개인들의 필요에 따른 것일 뿐일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고, 또한 ‘88만원세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우석훈의 생각이기도 하다. 우석훈은 󰡔88만원세대󰡕란 책의 도입에서 “동거를 상상하지 못하는 한국의 10대”를 이야기한다. 우석훈에 의하면 “적어도 성인이라고 할 수 있는 16세 이후의 청소년들이 동거권의 형태로 별도의 가족을 꾸릴 수 있는 권리들은 우리나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확보되어 있다.” 심지어 일본도 우리나라보다는 낫다. “동거를 하나의 권리로 생각한다면, OECD 국가 중에서 18세에서 20세의 청소년들에게 실질적인 동거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우석훈은 이것을 “크게 보면 경제 시스템의 문제라고 할 수 있고, 조금 더 본격적으로 얘기를 짚어보자면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의 하나”라면서,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자연만이 아니라 10대들에게 가야할 것들을 너무 많이 당겨쓰고 있는 일종의 세대 착취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10대들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기회를 기성세대가 독점하고 허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독특한 경제 구조의 문제이면서, 10대들의 당연한 권리에 대한 일종의 억압이고 착취라는 것이다. 사회는 이러한 착취 구조를 조직적으로 형성한다. 그것은 학교교육을 통해서, 대학, 군대, 사회 경제 구조를 통해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우석훈이 ‘88만원세대’라고 부르는 현재의 20대들에게 이것은 결혼까지도 “상상하지 못하는” 세대가 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이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우석훈, 앞의 책, pp.25~72. 참조.)

  이것은 청소년들의 왜곡된 성의식을 형성하는 큰 문제을 낳는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영화 <청춘>(영화 <청춘>, 감독 : 곽지균, 주연 : 김래원 ․ 김정현, 2000.)이다. 성에 대한 자연스런 호기심이 억압된 구조 속에서 주인공들은 남몰래 첫경험을 하고, 내내 부끄러워 한다. 그들의 첫경험은 이 사회에서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급기야 여주인공의 자살로 이어진다. 이것은 남자주인공의 오랜 트라우마로 남게 되고, 사랑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얻기까지 오랜 세월 방황하게 된다. 이것이 비록 청소년들의 성의식이 어긋나고 왜곡된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것을 형성하고 구조화 한 것은 우석훈이 말하는 사회 ․ 경제 구조의 억압과 착취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닐까?

  조건을 갖추고 준비하는 시간이 단지 허송세월만은 아니겠지만, 그 기간을 보내면서 애써 조건이란 것을 갖추고 뒤늦은 결혼을 하게 만드는 이 사회의 구조는 다양한 문제를 야기한다. 영화 <청춘>에서 보여주는 것은 그 문제들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결혼이 노후화되면서 필자가 “이상 인간 현상”이라고까지 규정할 만큼 인류 공멸의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과언일까?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이 시대 ‘춘향이와 이몽룡’을 위하여

  결혼의 노후화는 지금까지 살펴 본 다양한 사회의 매커니즘에 의해 조장되어 온 것이다. 근대화와 산업화를 시초로 전 지구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경제 구조는 그러한 매커니즘의 근원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고도화 정밀화 되면서 그에 맞는 노동력 확보가 절실해 진다. 이는 고학력 전문 인력을 이 사회가 요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요구를 효과적으로 달성하는 가장 효율적 방법은 이것을 결혼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자연히 그 조건들을 갖추어 가기 위해 결혼은 ‘과년’을 훌쩍 넘기면서까지 늦추어진다. 그것이 그리 대수로운 문제인가? 사회가 변화에 따라 결혼 연령이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그게 무슨 문제될 것이 이겠는가?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것이 정말 “대수로운 문제”인 것을. 결혼의 노후화가 가져오는 문제는 사실 이 사회가 가지는 모든 문제들과 관계된다. 다만 어느 것이 닭이고, 달걀이냐의 물음이 있을 따름이다.

  우선, 결혼의 노후화는 인간의 성장 과정에 있어, 그 흐름을 인위적으로 방해한다. ‘과년’한 나이는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인간의 성장 과정에 가장 적합하게 정해진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이 열여섯이 되면 월경을 하고, 아이를 낳기에 충분하며, 성적 호기심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것을 근 10년을 넘게 유예한다. 억압하고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 자연스런 본능의 권리를 기성세대가 착취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현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고령화와 출산율 저하 등의 가장 직접적 원인이 바로 결혼의 노후화다. 예전에는 한 세대의 간격이 20년을 넘지 않았으나, 오늘날에는 30년을 훌쩍 넘는다. 남자가 평균 서른 살에 결혼을 하는 사회에서, 결혼을 하고 다음 세대를 낳기까지는 그만큼의 세월이 필요한 것이니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10년의 세월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만큼 출산의 기회는 사라지는 것이고, 출산률이 저하되는 만큼 고령화는 촉진된다.

  이것은 꼬리를 물고, 이 사회의 반윤리, 부도덕, 비인간화 현상을 야기한다. 근대 산업화를 원인으로 꼽는 핵가족화 현상은, 그 사이에 결혼의 노후화를 매개로 가진다. 3세대가 함께 살 수 있던 예전의 사회에서 2세대도 공존하기 힘들어진 것은 서른이 넘어 결혼이 가능한 오늘날의 현실을 놓고 볼 때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자연스럽게 개인주의, 이기주의로 이어지고, 이것은 비인간적 행태들을 유도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비정상적 성관계 및 성매매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홍두승이 경북대, 서울대, 서울시립대, 연세대, 전북대, 한림대 등 6개 대학교수팀과 함께 2006년 6월 이들 대학의 학생 554명을 상대로 실시한 ‘2006년 한국 대학생의 의식과 생활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성관계 경험이 있는 학생은 31.2%”로 나타났다. 1994년에 비해 17%이상 상승한 수치다. 이들의 성관계 대상자는 남학생의 경우 애인이 70.4%, 성매매 종사자가 31.6%로 나타났다.(강준만, 󰡔한국 생활문화 사전󰡕, 인물과사상사, 2006, p.314.)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성매매의 문제점이다. 이 조사가 대학생들에 국한된 것이지만, 이것을 결혼하지 않고 있는 20대 전반에 확대 적용해보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성매매 종사자를 대상으로 그들의 성적 욕구를 해결하는 남자의 수치는 높아질 것이라고 추정이 가능하다. 결혼의 노후화는 성매매를 조장하고 있다고 하면 정말 헛소리일까? 한편, 애인을 대상으로 성관계를 갖는 경우에도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이것은 일면 성적 에너지의 낭비인 셈이다. 애인과의 성관계가 보다 발전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 현실 아닌가? 이것은 또한 무분별한 낙태나 성적 문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들 외에도, 이 사회가 갖고 있는 전반적 문제들과 결혼의 노후화는 유기적으로 관련된다. 아직도 이것이 ‘과언’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쯤해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독자들이 적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다. 결혼의 노후화를 이대로 두어서는 이상 기후 현상으로 인한 지구의 멸망보다도 먼저 이것으로 인류가 공멸을 자초할 지도 모른다.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두렵다.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금 ‘과년’의 나이를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그 방법들을 찾아보도록 하자.

  지난 2007년 대선에서 화제가 된 인물은 대통령 당선자만이 아니었다. 이름하여 ‘허본좌’. 이색적이고 허무맹랑한 공약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후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최근 구속된 허경영이다. 여기서 그를 언급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의 이색 공약 중에 많은 이들의 관심을 얻은 대목 때문이다. 그는 결혼을 하면 남녀 각각 5,000만원씩 1억을 주고 출산을 하면 3,000만원을 준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사람들은 이 공약이 실현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쏠깃해 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그다지 실현불가능한 것으로 보진 않는다.

  허경영의 이 공약은 어쩌면 여기서 말하는 결혼 노후화의 대책으로 적절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공약처럼 결혼을 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를 주는 것보다 근본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책이 필요하다. 우석훈이 󰡔88만원세대󰡕에서 말하는 유럽 선진국들의 지원책들을 배워오는 것도 좋겠다. 우석훈의 말대로 우리의 10대, 20대는 세대 간 착취로 인해 너무 가난하지 않은가? 그들이 결혼을 꿈꾸기에는 말이다.

  이러한 경제적 지원 외에 더욱 필요한 것은, 결혼에 대한 사회의 인식 전반을 뜯어 고치는 것이다. 경제적 논리, 자본주의의 악질 매커니즘으로 형성된 왜곡된 결혼관이 전제된 상태에서 아무리 지원을 해봐도 결혼 노후화를 막을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것은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셈이니까. 아무튼 다양한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없으면 어떻게든 만들어 내야한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또한 필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혼의 노후화’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자는 것이다.

  이 시대에 ‘춘향이와 이몽룡’ 커플은 축복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해서가 문제다. 이 문제는 계속 말하지만, 이상 기후 현상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시급하고도 심각한 것이다. 지금까지 주도면밀하지 못하고, 체계와 두서없이, 말 그대로 엉성하게나마 살펴본 것은 그 때문이다. 2006년 평균 초혼 연령 남자 30.9세, 여자 27.8세의 수치를 차츰차츰이 아닌 시급하게 낮추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이 결혼의 노후화, 즉 이상 인간 현상을 막을 수 있다. 이 시대 ‘춘향이와 이몽룡’을 위하여 이 글을 바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9-12-11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론. 멜기님 장가 보내기 프로젝트.

순오기 2010-03-21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님 안부가 궁금한 봄이다~
혹시 청첩이라도 올라 올까 싶어 기웃거리는 봄!^^

근황이 궁금한 팬심을 외면한 멜기님은 반성하라!!

멜기세덱 2010-03-22 09:37   좋아요 0 | URL
곧, 좋은 소식으로 전함이 옳겠으나....요원한지라....ㅎㅎ

순오기 2010-03-24 00:21   좋아요 0 | URL
무소식이 희소식...^^
 

지금 이 글을 시작하는 시점, 그러니까 내게 표시된 시간의 지표는 12시 48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 시간은 달리 표기하면 0시 48분이다. 그래서 지금은 2008년 12월 20일이다. 좀 전에 나는 얼마전 편의점에서 사온 식빵과 딸기잼을 합체해 분해시켰다. 식빵에 딸기잼을 발라 먹었다는 말씀이 되겠다. 윤도현이 물러나고 어느 여자 연예인이 진행하는 음악 프로에 박정현이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출출한 뱃속에 식빵과 딸기잼은 내가 좋아하는 가수 박정현의 노래 덕분에 좀더 맛있었다.

식빵. 설마 이것은 '식은 빵'일까? 역시 설마였다. 빵도 실상은 저 멀리서 들어온 말이지만, 여기에 붙은 '식'도 순수하게 우리말은 아니다. 이 '식'은 '식다'의 그 '식'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가 먹은 빵은 아무래도 '식은 빵'이 맞다. 내가 이것을 산 것은 며칠 전의 일이다. 12월 19일까지라는 유통기한이 비교적 잘보이는 이 식빵은 10가 가지런히 들어가 있는 상태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때에도 역시 이 식빵은 식은 빵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食빵'이었다. 먹는 빵이라는 뜻이 되겠는데, 먹지 못하는 빵이 있었던가? 먹지 못하는 빵은 감빵 정도가 될 것인데, 이것과 구분키 위해 먹는 빵이라고 친절히 밝혀 놓지는 않았을 성 싶다. '먹을 수 있는 빵'이라는 소리일까? 아무튼 식빵이 어떻게해서 나오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참 딱한 이름이다. 빵에는 '먹는 것'이란 의미가 현재로서는 내포되어 있는 상태다. 그러니 굳이 '食'을 붙일 이유는 없다. '역전 앞'과 같다. '食=빵'이란 등식이 성립되면서, 달리 말하면 식빵은 '빵빵'이 된다. 우리말에서 반복은 흔히 강조의 기능을 한다. '빵빵하다'가 좋은 예다. 정말로 맛있는 빵이라고 강조하기 위해 식빵이었던 것일까?

그래도 내가 먹은 빵은 '식은 빵'이다. 여기에 역시 차가운 딸기잼을 발라 먹는 것은 출출할 때 나쁘지 않다. 그런데 내가 이 빵을 먹으면서 다시 그 유통기한에 눈이 박혀버렸다. 19일은 몇 십여분 전이었다. 내가 지각하는 시간의 오차를 고려해도 내가 이 식빵을 먹을 시점은 분명 유통기한을 오바해버렸다. 그렇다. 난 분명히 유통기한을 몇 십여분 지난 빵을, 불량한 빵을 먹은 것이다.

이 식빵을 며칠 전에 사면서, 과연 이 유통기한 내에 내가 이 식빵을 적절히 소화시킬 수 있을까? 그럴 듯 싶었다. 늘 언제나 이 야심한 밤에는 출출했으므로. 그러나 그 이후로 나는 아무리 출출했었도 그 출출함의 허기짐을 달래줄 맘이 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기어코 그 식은 빵이 불량해지기를 기다려 내가 좋아하는 박정현의 노래에 맞추어 붉은 딸기잼을 정성껏 발라 리듬가득히 실어 입속으로 넣었던 것일까?

혼자서 생활을 감내한 것이 곧 3년을 꽉 채운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는 누군가에게나 있는 생활력이 없다. 이 생활력을 누구들은 아나바다쯤으로 여기니, 내겐 그런 생활력이 없는 것이다. 식은 밥을 버리기 아까워 애써 고추장 간장 김치 한 조가리 얹어 먹는 우리 어머니들의 옛모습은 생활력이다. 그러나 나의 오늘 이 행위가 3년이란 혼자만의 생활에서 터득한, 혹은 자연 발생한 그 생활력의 발동인가? 그렇지 않다, 고 나는 주장하련다. 왜 그랬을까?

유통기한이 몇 십여분이 지난 식은 빵에도 딸기잼은 여실히 고루고루 달라붙어 입속으로 넘어가면 맛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버리기 아까웠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런데 왜, 2008년 12월 19일까지라고 이 식빵을 제조한 강양곤씨는 진한 검은색 글씨로 써놓았는데, 도대체 왜? 출출함을 달래줄 내가 가진 유일한 야식거리가 이 식은 빵이기 때문일까? 날은 춥지만 조금만 걸어나가 신선한 먹을거리를 사먹을 수도 있다. 이 식빵을 산 그 편의점이 지척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러하기까지 조금은 고생도 마다하는 나이기때문일까? 그런 고생을 할 정도로 출출하지 않았던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겸사겸사 괜찮겠지 안도하면서 이 불량한 식은 빵을 먹어도 될 것이라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다.

이 식은 빵에도 딸기잼은 아주 잘 어울렸고, 나는 박정현의 노래가 들려오는 것이 좋았고, 야심한 밤에 느끼는 출출함은 내겐 익숙한 낭만이고, 그리고, 어쩌면 내 유통기한이 이렇게 몇 십여분이 지난 것은 아닐까하는 우수와 어느 곳에는 있을만한 식은 빵 같이 되어버린 내게 어울린 어떤 딸기잼이 있을까하는 멋진 상상이,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아닐까?

식빵과 딸기잼을 꺼내 먹으려할 때 문득, 나는 이 식은 빵이 몇 십여분을 지난 유통기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각했고, 어쩜 이것을 먹고는 무엇인가를 써야겠다고,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그것을 쓰면서, 자꾸자꾸, 난 이 '食빵'이 식은 빵의 식빵이 되어야 옳다고 생각했고, 이것을 먹은 나의 행위를 내겐 어울리지 않은 생활력과 분리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나, 이 비루하고 불량한,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는 어떤 점에서 유통기한이 조금 전에 지난 나, 나라는 존재의 쓸쓸한 우수에 젖어들어, 그래 이것은 내 우울함이야, 잔잔히 이 식은 빵에 딸기잼을 골고루 친절히 발라서 꾸역꾸역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써야만 했던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식빵과 딸기잼은 우연찮게 내가 좋아하는 여가수를 만났지만, 이것은 자못 좋지 아니한가? 그리고 오렌지주스 생각에 냉장고에서 꺼내 들고는, 지금 책상옆에 놓여 있는 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이 오렌지주스가 그 콜드함을 다 제하여지기까지 나는 그것을 마실 여가를 곧잘 만들지 못하도록, 이렇게 잡스럽게 말의 글을 배설해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각. 2008년 12월 20일 오전 1시 22분에 말이다. 40여분이 지난 오렌지 주스는 아직 차가울까? 차가웁지 않으면 다시 냉장고에 넣어버려야 할까? 나의 생활력은 그것을 마시라고 할 정도로 강하지 아니하다. 식은 빵을, 그것도 유통기한을 몇 십여분 지난 빵을 먹게한 나의 허접한 우수는 이제 끝난지 2분여가 되었으니 말이다. 물이나 마시고, 그것도 찬물, 속을 다스려야하겠다. 오늘은 잠이 안오니, 속까지 쓰리면 고되기만 할 뿐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L.SHIN 2008-12-20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식사 대용 빵'의 줄임말이 아닐까요? ^^ 食자니까.
전에 얼핏 들은건데 '빵'은 원래 불어 '팡'에서 따왔다고 하네요.
저도 유통기한 얼마 안 남은 것을 굳이 사 놓고 - 그것도 엄청 긴 녀석 -_- -
'유통기한 끝나기 전에 먹어치워야 해' 라는 강박강념으로 미친듯이 먹죠.
단, 제 경우엔 달콤한 딸기잼이 아니라 케찹의 신 맛에 몸부림 치면서. ㅋㅋㅋ

하지만 멜기님의 '식빵은 식은 빵이다' 라는 공식에 무릎을 탁! 쳤습니다. ㅡ_ㅡb

멜기세덱 2008-12-2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럴 수 있겠네요.
근데, 저는 식빵을 식사대용으로 먹어본 역사가 없어서...ㅎㅎ

아주 오래 전에 외국어가 들어와서 우리말처럼 여겨지는 단어들을 '귀화어'라고 하는데요, 빵을 포함해서 답배, 수수, 탑, 거위 등등이 그러한 예죠.
빵은 포르투갈이던가요?

L.SHIN 2008-12-21 05:57   좋아요 0 | URL
아? 포트투칼인가요?
그럼..그걸 프랑스어라고 가르쳐준 놈은 뭐냐..ㅡ.,ㅡ

멜기세덱 2008-12-21 12:40   좋아요 0 | URL
나쁜 '놈'이죠.ㅎㅎ
전 착한 '놈'이고....ㅋㅋ

L.SHIN 2008-12-22 00:41   좋아요 0 | URL
으하하하하!
(이거~이거~ 댓글에는 [추천] 기능 없나..ㅋㅋ)

심술 2008-12-20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르투갈 말 맞아요. 프랑스가 아니라.

eppie 2008-12-22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어원은 일본어의 食パン이겠지요, 하고 일본어 위키페디아를 좀 찾아보니...옛날에도 목탄 데생을 지울 때 빵을 사용했는데 그때는 지우개용의 빵(유분이 적은)이 따로 있었고, 이와 구별하기 위해 먹는 빵을 '食パン' 이라고 불렀다는 설, 메이지 초기 외국인들의 '주식(主食)용 빵'에서 왔다는 설, 서양요리의 '本食' 이 빵이라는 데서 왔다는 설 등등이 있는데...어느 것이 확실하다는 정설은 없다네요. :] '주식' 설이 좀 일반적이고, 즉 L.SHIN 님의 짐작이 대략 일반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겠다 되겠습니다.

멜기세덱 2008-12-22 22:50   좋아요 0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ㅎㅎ
지우개용 빵이 있었군요....고건 몰랐넹...ㅎㅎ
 

10月 중순이라 하기엔 다소간 미안한 날의 밤이다. 시간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그 '마지막 밤'을 향해 맹렬히 질주중이다. 어떻게 질주하든, 그것은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것만 같다.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하고. 어중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선한 날의 가을을 난 소망한다. 가을 남자라 외롭고 고단해도, 선선하게 외롭고, 선선하게 고단하고 싶은, 그래서 이 외로운 가을을 만끽하고 싶은 남자가 바로 나다. "그게 바로 나야!"

서재의 명명을 고민했다. 이건 이내 내가 가을이 된 걸 모르는 모양으로, 여전히 봄타령이다. 시의적절치 못하면, 요즘에는 비루해지기 십상이다. 정지되고 연착된 서재는 곧 나이기도 할 터이다. 시간은 종잡을 수 없이 맹렬히 질주하건만, 나는 이 사이버 공간에서 여전히 봄에 멈춰 서 있다. 그리고 내 머릿속은 아무 계절도 없던 것처럼, 그저 한 동안 멍해 있었다. '아차!' 한 것은, 그래서 고민한 것은 이 때문이다.

내가 10년을 채우고도 여전히 적을 두고 있는 곳은 학교였고, 지금은 비정규 직장이다. 올해만 하고는 제깍 그만둘 예정이다. 어느 학교에나 밝고 넓은 문이 아닌 곳으로 통하는 이들은 있게 마련인가 보다. 으리으리 널찍한 정문은 차들을 위한 문이다. 원래 태생이 그러했다. 사람들은 죄다들 후문으로 다닌다. 그러나 정문으로 다녀야할 인간들도 있는 법이다.

이 학교가 작으면 작은 것이요, 크면 크다고 할 수도 있겠다. 제법 그 쪽에서는 넓은 축이 든다. 그 동네에서는 말이다. 이 학교를 끼고 몇몇 노선이 흘러 다닌다. 그런데, 그 몇몇 노선을 타고 다니는 이들 중에는 밝고 당당하게 다니기 위해서 정문으로 출입하여야 하나, 그러기 위해서는 에둘러 먼길을 돌아야만 하는 딱한 사정이 있었다. 그리하여, 월담을 해야 했으니, 이 학교에도 문이 아닌 통로가 생긴 셈이다.

한동안은 이 통로는 그저 담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여교수(라고 알려진)가 이곳을 범하다가 그만 다리를 삐끗하고야 말았다. 그러고는 얼마 후, 이곳에 담사이로 간이 문이 달렸다. 그 여교수의 희생에 감사를 표해야 할 사람은 나 말고도 제법 많을 것이다.

아무튼 이 새로이 생긴 문을 통과하고도 문제는 돌아야 한다는 것이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 길을 건너기 위해서 등등으로 대로로 나가기 위해서는, 한 가운데 조성된 둥글넙적한 화단을 에둘러 돌아야 한다는 사실. 그 애처로운 사실은 담 한 켠을 헐어내고 비록 초라하게나마 문을 낸 이들에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 둘, 시나브로, 영웅적으로 그 화단을 가로질렀다. 처음에는 조심조심이었을 것이다. 행여나 꽃을 밟을까? 키작은 나무들(?)로 장식된 울타리에 조심스레 벌리고서는, 그러했을 것이다. 조심스레 발길을 옮겼을 것이다. 그 조심으로는 꽃 한 송이송이 모두를 다 보호하지는 못하였다. 바닥에 깔렸던 잔디들은 어느새 그 뿌리마저 사리지고 없다. 이제는 어엿한 길이 되었다. 단단하게 굳은 흙길이 생겼으니, 모두들 그 길로 다닌다. 울타리는 뻥뚤리고 이도 어엿한 문처럼 되었다. 아 경이로운 인간들의 힘.

두 말이 필요없이 『페다고지』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교육사상가 파울로 프레이리와 미국의 교육활동가 마일스 호튼의 대담을 엮은 『We Make the Road by Walking』이란 책이 있다. 제목이 참 그럴싸하지 않은가? 아침이슬에서 나온 한국어판도 이 영문 제목을 번역한 그대로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로 나와 있다.

이 책을 보면서 불현듯 무서운 생각에 잠긴다. 정말이지 "우리가 걸어"갔더니 '길이'되었잖은가? 놀아운가? 난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을 잡고 더 들어가보았더니,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이 우리가 걸어가서 길이 된 것들은 너무나 많지 않은가? 하는 회의를 품게 되었다. 태고적에는 허허벌판이었을 지도 몰랐다. 숲으로 우거져있었을지도 몰랐다. 이상야릇한 동물과 식물들로 가득한. 어느냥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생각되었을지 모를 우리 인간들이 걸어가더니, 하나씩 길이되고, 그 길이 넓어지고, 다니기 좋게 포장되고, 철도가 깔리고, 건물도 서고, 빼곡하게 채워졌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도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된다는 신념으로 뭉친 사람들이 차고도 넘친다.

프레이리의 교육사상에 내가 딴지를 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난 무서워진다. 인간이 이 지구를 온통 이 자랑스런 길들로 도배를 하고야 말 것이다. 인간들이 걸어온 길은 창조의 길이었으되, 파괴를 동반한 길이었다. 인간적인 길도 제법 그러하지 않았을까? 인간이 살기위해 동물을 죽이고 쫓은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저 아메리카에서도 동물들은 죽어나갔다. 콜럼버스에게는 그 죽어나간 것들은 단지 동물이었을게다. 여전히 이 사회는 80%의 동물들이 죽어나간다. 인간적인 길. 점점더 혐오스러워진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명명해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非인간적인 길은 아름답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이제부터는 그 생각의 지평을 넓혀보자. 생각을 넓히고 사고를 충만하게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걷는 길에서는 우리는 인간이 아닌 비인간을 생각하고, 내가 사는 이 사회에서도 인간이 아닌 비인간의 길을 생각하고 추구해볼까? 망상에 그쳐야만 할 욕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는 "비인간적"이라는 수식을 자못 욕으로 사용한다. '인간적'이 긍정되는 세상, 바로 인간세상에서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좀 바뀌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언뜻 잘못된 것이 아닐 것 같다. 여하간 '비인간적' 이길, 그렇게 살아보길 작정해본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8-10-18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컴백하신건가요? ^^

멜기세덱 2008-10-18 21:43   좋아요 0 | URL
전 떠난 적이 없사와요...ㅎㅎ

순오기 2008-10-20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처녀는 어디로 가고 가을 남자 혼자 외로운지요?
비인간적으로 살아보길 작정한다니~~~~ 여튼 응원을 해볼랍니다.^^
 

미국과의 망국적 쇠고기 협상으로 발발한 촛불은 꽤 오래도 탔다. 촛불은 심지를 태우고 초를 녹이면서 탄다. 심지는 다 타고, 초는 죄다 녹아내리고 있는데, 우리 국민들은 애타는 마음은 꺼질 기미가 안 보인다. 이 마음 어디다가 달래나 주라고 하소연할 곳도 보이질 않는다. 종로, 아니 시청 갔더니 닭장차에 막히고 명박산성에 막혀서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다. 이들이 든 촛불은 점점 스러져가지만, 지친 시민들은 저마다 집으로 가지만, 그래서 모인 이들이 몇 천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이제는 촛불은 꺼도 돼"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참 의문이다.

최근 한나라당은 여론이 반전되고 있다는 자체 조사 및 몇몇 신뢰받지 못할 언론의 보도 등을 인용해 촛불을 좀들 끄시라고 협잡을 부리고 있다. 어제 이명박 대통령도 수그러들었던 불법시위 근절, 단호하고 강력하게 대응, 등등의 단어들을 씨부리고 있다. 얼마 전부터 뉴라이트 단체 등 (수구)보수 단체들이 거짓 시위 그만두라, 불법 선동, 빨갱이 타령하면서 으르렁 대더니, 이에 힘입은 우리 이명박 정부 똘마니들이 촛불 이제 끄시라고 한다. 그럼, 이쯤하면 되었으니 하고 우리 촛불을 꺼봄은 어떨까?

"이제는 촛불은 꺼도 된다"며 정부를 믿으라고 하는 소리를 믿건 말건, 지치기도 했으니, 촛불을 한 번 꺼보면 어떨까? 이 끝없이 타는, 지치고 지친 가운데서도 여전히 타오르는 촛불은 끄면, 과연 그렇게 촛불 끄라고 요구하는 이 정부 인사들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내가 볼 때, 우리는 이 촛불은 꺼도 좋을 것이다. 미심쩍은 미국산 쇠고기를 그냥 주는 대로 받아 먹기는 찜찜하지만, 의료비가 좀 비싸지는 것이 찝찝하지만, 좋지도 않은 수돗물값이 올라 물 좀 들 먹고 사는 것이 갑갑하지만, 매일처럼 들려오는 땡박뉴스는 티비를 꺼버리면 될 것이지만, 자 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도 촛불은 끈다면, 나는 우리가 이 촛불은 이제 꺼도 좋을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촛불은 지금, 당장 끈다면, 그걸 이 정부, 이 여당이, 저 발발대는 뉴라이트들이, 가스통 들이대며 알아듣지 못할 소리, 괴성을 짖는 것들의 소리 그대로 받아들여 이 촛불은 끈다면, 난 단호히 말하건데, 그들은 더 무서운 불을 볼 것이다.

나는 "이제 우리 촛불을 한 번 꺼보입시다"고 말하고, 이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잠시 이 촛불은 껐다가, 장작을 모으고, 작대기를 모으고, 헝겁을 휘감고, 기름을 부어서 거대하고 커다란 횃불을 만들어, 우리 언제고 이 자리에 다시 모일 날 있을 것이라고. 그 날이 오면, 이를 잡고 쥐를 잡자고 초가산간이 아니라, 저 푸른 지붕 달린 집을 태울 것이라고. 그래서 난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이제 횃불은 들 때가 온 것이다."

얼마 전 어떤 글에서 박노자 선생은 이명박이 하야할 때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나도 이전부터 그런 비슷한 생각을 했다. 하야가 편할 것이라고. 국민의 신뢰를 잃은 대통령은 탄핵대상이기 이전에, 하야의 주체일 것이라고. 그게 본인한테 득될 것이라고. 하야하면 감옥은 안 보낸다고.

앞으로 이명박 정권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많은 것을 할 수는 있으되, 모래위에 쌓은 토성, 그야말로 하루만에 철거될 명박토성일 따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가 할 많은 이들이, 이렇게 스리살짝 꺼진 촛불을 횃불이 되서 살려낼 것임을 경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촛불이 수그러드는 것같으니, 기어이 좌파선동이니, 빨갱이니, 반국가단체의 조작이니, 국가정체를 뒤흔든다느니, 한미동맹에 위협이라느니, 기타등등, 별 같지도 않은 말들은 또다시 붙여댄다. 든든한 우군 할아버지 병사들을 얻어 기세가 등등해진 것인지, 21세기 국민과의 전쟁에서 가스불 들이대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는지, 다시금 그 생각 모자란 잔머리를 굴려대기 시작하니 참 가소롭다. 자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그 잔머리가 원하시는 대로, 난 이 촛불을 꺼 주어도 좋겠다 싶다. 머지 않아 횃불을 들고 달려나올 그날이 보고싶다.

이명박은 국가정체성을 흔드는 불법시위를 엄단하시겠단다. 그 불법시위가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니까 저 할아버지의 가스통 각목들고 나온 시위가 꼭 그 불법시위인 것만도 아니겠지만, 여하간 촛불시위가 주 타겟인 것은 분명해 보이는 상황에서, 정말 이 촛불시위가 국가정체성을 흔드는 것인지를 생각해본다. 그런데, 이명박이 말하는 국가정체성은 무엇일까? 아니 그 국가정체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나라당에? 뉴라이트에? 청와대에? 고엽제피해자분들께? HID 단체에? 아니면 미국에?

잘 들으시길 바란다. 우리나라 국가정체성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노래하며 부르짖는 저 촛불에 있단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신중히 하라는 대다수 국민들에게 그놈의 정체성이 있음이다. 그 정체성을 마구잡이로 흔들어 미국에 갖다받치는 저 푸르디 푸른 집에 있는 사람들은, 분명 엄단해야할 것이다. 엄단은 촛불처럼 미지근한, 그리고 아름다운 불로는 좀 싱겁다. 그래서 촛불은 꺼도 좋음이 있다. 그들에게 이제 횃불을 던질 차례가 곧 올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께서는 나의 충언을 듣지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난 대통령께서 두 번째 하야하는 대통령이 되셔야 한다고 전하고 싶다. 그게 아름답지 않겠는가? 아니 아름답지는 않겠지만 모양새는 좀 낫다. 신뢰를 잃은 정부, 이 정권은 더 이상 갈 데를 내 알지 못한다. 그땐, 온 국민들이 횃불을 들 때에는, 당신들이 저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08-06-25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이 미련한 인간이 그렇게 할 리가 없지요~~~ ㅠㅠ

마늘빵 2008-06-25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멜기님 화났다. 명박이 너 큰일났다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