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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6월 10일이다. 경향신문에서 마련한 좌담을 옮겨온다. 차분히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서 혁명 20년 후 오늘 우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6월혁명 20년, 민주화 20년]“‘제도적 민주’쟁취한 시민혁명”
 
6월항쟁은 한때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았다. 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 민주정부를 수립했다. 정치·노동·인권 등 사회 각 분야의 민주화를 진전시켰다. 이전과는 판연히 다른 사회였다. 그 사이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했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한국사회를 뒤덮었다. 언제부터인가 그 사회를 87년 체제라고 칭했다. 87년 체제는 지난 20년간 우리 사회의 성취와 한계를 모두 담고 있다. 우리는 6월항쟁으로 무엇을 얻고, 잃었는가.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은? 진보와 보수 진영의 학자들과 함께 우리 사회를 진단했다. 좌담은 8일 오후 경향신문사 회의실에서 조운찬 문화1부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사회 = 20년전 6월항쟁은 개인의 기억 속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나.

김명인 교수 = 당시 출판사에서 근무했는데 4·13호헌조치 발표한 후 5월부터 6월까지 한달반 동안 매일 서울시청 일대에 출근했다. 6월항쟁을 경험하지 않았으면 못했을 책과 평론을 썼다. 6월 열기와 함께 평론에서 내가 제기했던 문제가 결합된 충일한 경험이었다.

조희연 교수 = 6월항쟁의 열기에 취해 따라다니던 수준이었다. 그때 느낀 건 내가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전에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예상못했던 것처럼 6월항쟁 때에도 군부정권이 붕괴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6월항쟁을 통해 국민들이 공포로부터 해방됐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국전쟁 후 정권에 가위눌린 삶, 자기규율하며 살 수밖에 없는 삶이었는데 이런 공포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김일영 교수 = 당시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으며 막 강의도 시작했다. 반(半)사회인이어서 매일 현장에 나간 건 아니었고 절반 정도 시위에 참여했다. 6월항쟁이 한창 진행중이던 어느날, 강의를 끝내고 버스 타고 집에 가다가 신세계백화점 앞에서 내려 한동안 같이 시위대를 쫓아 다니면서 걸었던 기억이 난다.

윤평중 교수 = 미국 유학중인 관계로 현장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학교에 한국신문이 하나 배달됐는데 6월항쟁 기사를 보기 위해 매일 도서관에 출근했다. 그토록 한국 소식에 목말랐다. 텔레비전 뉴스에 간헐적으로 데모 풍경이 나오는데 우리의 모국은 뜨거운데 왜 이 사회는 모든 것이 차분할까 생각하며 괴리감을 느꼈다. 80년 ‘서울의 봄’ 때에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 나이 드신 분들은 동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당시 시위 대학생들은 그분들을 설득하곤 했다. 그러나 87년에서는 설득을 통한 공감대 확산 자체가 불필요했던 것 같다. 민주화 국면에서 전체 국민이 한 몸이 됐고, 변화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정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멀리 해외에서 상상하던 경험이 새롭다.

사회 = 6월항쟁을 어떻게 평가하나.

윤평중 = 경향신문에서 ‘6월혁명’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적절하다. ‘광주사태’가 ‘광주민중항쟁’으로 바뀐 것에서 보듯, 정명(正名) 즉 이름을 정확히 정의하는 게 중요하다. 6월항쟁은 6월 시민혁명으로 불러야 한다. 6월항쟁을 추동시킨 주체는 전두환 정권에 반감을 가진 시민과 기층 민중이었다. 조직가능한 시민들과 민중이 연합해 정치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또 평화적 수단으로 이루어낸 무혈혁명이었다. 흔히 6월항쟁을 두고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르는데, 생각을 달리한다. 우리 역사를 긍정적·적극적으로 재해석한다는 측면에서도 시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조희연 = 항쟁이 아닌 혁명이라고 부르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혁명이라고 했을 때는 그것으로 정치변동이 일어나고 정치권력이 변해야 하는데 민선군부정권으로 이행했기 때문에 복합성이 있는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6월항쟁은 복합적 구성이란 관점에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진보진영에서는 6월항쟁의 실패·한계를 강조하는 측면이 있는데, 그것이 한국 사회발전에 미친 긍정적 부분은 적극 평가해야 한다. 6월항쟁은 군부정권을 역사에 묻었다는 점에서 성공했지만, 6·29선언에 의해 국민적 역동성이 크게 제한받았다. 이런 점에서 6월항쟁은 높은 수준의 성취이자 미완의 과제를 남긴 복합적 성격의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김일영 = 6월혁명이라 하면서 그 앞에 ‘미완’이라고 붙이는 것은 어폐가 있다. 미완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민주화가 됐는데도 군부 잔당이 권력을 잡았고 사회경제적 실질 민주주의가 안됐다는 의미 같은데, 그때 이룩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의미를 폄하해서는 안된다. 6월항쟁을 통해 쟁취한 민주헌법도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획득한 의의는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조희연 = 재미있는 쟁점이다. 6월항쟁을 최소주의적 요구의 관점에서 보면 완성된 혁명이라고 볼 수 있지만, 최대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미완의 혁명이다. 20년 과정을 통해 지속되고 있고 여전히 남겨져 있다.

김명인 = 혁명이라고 부르는 데 동의한다. 해방직후부터 6월항쟁까지는 정상적 의미의 근대 부르주아 민족국가 형성이 지연됐다. 전쟁도 있었고 쿠데타도 있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6월혁명을 계기로 자유주의 부르주아 권력의 헤게모니가 약간 해체됐다. 군사독재 잔재가 정권을 잡았다고 하지만 큰 변화가 있었다. 봉건식민지·냉전체제를 청산했고, 기본권에도 많은 진전이 있었다. 제도적·절차적 민주주의도 확보했다. 다만 과거 유제의 청산은 현재 진행중이다. 하지만 근대 부르주아 민족국가 형성이 우리 사회가 당면한 최종의 과제인가. 그게 아니라고 생각해서 문제다. 미완이라면 6월항쟁 전개 과정 중 훨씬 높은 먼 수준의 문제제기를 추구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변신 등 세계적 전망 아래서 문제를 봐야할 필요가 있다.

사회 = 6월혁명이라고 했지만,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보면 미흡한 게 많지 않은가.

김일영 = 6월항쟁은 조직화해서 일으킨 혁명이 아니고 이전부터 계속돼 오던 힘이 분출된 것이다. 6월이 지나 7, 8월 노동자 투쟁이 있었지만 시민혁명으로서의 성격은 6·29 선언 이후에 싹 사그라들었다. 그 다음엔 주도권을 양김(김영삼·김대중)이라는 정치권에 자발적으로 위임했다. 이를 두고 시민들이 의식화가 덜 되어서 그랬다고 말하는 것은 지식인의 오만이다.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씨가 당선돼 미흡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시민들 생각에는 큰 손해 없이 길을 닦은 것으로 본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의 눈으로 봤을 땐 그 자체로서도 혁명이다.

윤평중 =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이 왜 타협할 수밖에 없었나를 보면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다. 미국의 반대라는 게 명백한 주요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당시 전두환 일당을 비롯, 군부지도자까지도 계엄령으로 시위대를 무력진압하는 것을 꺼렸다. 나는 그게 광주정신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계엄령을 발동하면 광주보다 수십배나 큰 사태가 불가피하다고 군부 핵심부도 판단했을 것이다. 광주정신의 전국적 형상화, 한국 민주화의 축적이 87년이란 분기점에서 굉장한 현실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6월항쟁은 한국 현대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조희연 = 한국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 선진국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 참여정부 실패 등에서 보이는 민주주의 위기 현상이 있는 것 같다. 이것 역시 6월과 연결된다. 6월항쟁에서 정점에 이른 반독재 투쟁을 통해 민중은 민주주의를 정립시켰다. 반면 보수세력은 6월항쟁에 이르는 동안 개발독재를 통해 자본주의를 정립했다. 나는 6월항쟁을 계기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전쟁’이 시작됐다고 본다.

이후 20년의 전쟁기간 동안 이 땅의 자본주의 세력이 민주주의를 형식화하는 속도와 민중이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속도를 볼 때 후자의 속도가 느렸던 것이 아닌지 싶다. 신자유주의 속에서 위협받고 있는 게 민주주의다. 87년 6월에 획득한 민주주의가 20년후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사회 = 6월항쟁은 87년 체제를 낳았다. 87년 이후 20년간 한국사회의 성격은.

김일영 = 민주화 20년 동안 예기치 못한 일이 두 가지 일어났다. 사회주의 붕괴와 세계화이다. 특히 97년 IMF 외환위기의 충격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조교수가 말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전쟁’도 탈냉전과 세계화 국면에서 전개됐다. 87년 체제보다 97년 체제가 더 문제다. 탈냉전과 세계화가 피부에 와닿은 것은 97년 이후다. 냉전구조는 김대중 이후에 해소됐다. 양극화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권이 집권한 후 훨씬 심각해졌다. 진보 진영은 87년 체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더 주목해 봐야 할 점은 97년 체제이다.

조희연·김일영·김명인·윤평중 교수가 지난 8일 6월항쟁을 주제로 좌담을 마친 뒤 경향신문사 인근 경희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성일기자

윤평중 = 87년 이후 한국시장자본제와 정치민주주의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전쟁으로까지 표현하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시장에 의해 왜소화됐다고 보는데 난 생각이 다르다. 6월 시민혁명은 성공했는데 7, 8월 노동자투쟁이 좌절한 이유를 다시 질문하고 싶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당시 발전 국면에 적합하지 않은, 중산층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최대치 요구였다. 기층과 시민 사이의 연대가 끊어져 버린 것이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남한 국가체제의 총체적 변혁을 지향하는 시도였다. 분단 상황에서 적절한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김명인 = 나는 견해가 좀 다르다. 돌이켜보면 당시 노동자투쟁의 요구수준은 높지 않았다. 지식인의 담론으로 치환하면 굉장히 높아 보이지만 노동기본권의 요구였다. 부르주아 체제 하에서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간 노동자계급이 방치돼 있다가 참여하고 포섭된 단계의 수준이다. 이게 노동운동의 위기를 불러왔다. 본질적이고 래디컬한 운동의 위기를 부른 것이다. 노동자들의 요구 수준에 대한 평가는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20년 동안 민중을 포함한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삶이 행복해졌는가이다.

조희연 = 87년 체제가 확립시킨 민주주의를 97년 체제가 굴절시키고 한계지운 측면이 있다. 97년 외환위기는 개발독재 세력에게는 경제적 통치능력 고갈을 가져옴으로써 반독재 민주세력으로 하여금 집권할 수 있는 기회를 준 반면, 개발독재 세력이 내장하고 있었던 개방주의, 성장주의를 내면화시켰다. 외환위기 이후 민자당은 권력을 상실했지만, 동시에 경제위기 극복이란 이름으로 가장 급진적인 성향의 김대중정권이 친IMF적인 입장을 취한 점은 역설이다. 반독재세력이 집권하면서 오히려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된 것이다.

사회 = 민주화 이후에 민주주의는 오히려 후퇴했다는 지적이 많다.

김명인 = 민주화 됐다고 하는데 삶은 계속 팍팍하다는 게 일반 대중의 인식이다. 거기에는 대중의 이중성도 작용한다. 성장과 배분 모두를 원하는데 둘을 함께 누리기란 어렵다. 한국 자본주의가 ‘87년 6월’을 계기로 얻은 것은 규제철폐와 시장자유주의다. 분배, 복지, 경제민주화가 같이 가야 하는데 시장 시스템이 과도하게 독점적이고 배척적이어서 바람직한 경제문화 형성을 억압한 것이다.

김일영 = 일반적으로 양극화의 심화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를 꼽는데, 나는 국가 능력의 저하를 더 큰 원인으로 꼽고 싶다. 경제성장도 하지만 분배도 개선하는 국가의 기본적 능력이 민주화 이후 더 떨어졌다. 지난 5년간 특히 심했다. 진보진영에서도 ‘신자유주의의 한국적 수용’이라는 형용모순적인 말을 한다. 어떻게 보면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딜레마 해소방법은 신자유주의의 전면 거부가 아니다. 국가 통치능력을 대폭 키워야할 필요가 있다.

윤평중 =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무능과 무정견이 빚어냈다는 진단이 가능하다. 문제는 진보진영의 딜레마이기도 할 텐데, 시장의 규정력에 대항해 어떻게 자율자생적·시민사회적 공공성 지평을 확대시킬 수 있겠는가 하느냐이다. 국가 통치능력을 얘기했는데, 시장제도를 거부할 수 없다면 국가는 시장의 실패를 적극 보완할 수 있는 사회보장책 등을 최대한 강구해야 한다.

조희연 = 박정희식 경제개방 방식은 고용이나 시장의 절대적 팽창을 통해 양극화를 상쇄하는 효과가 있었다. 지금의 개방은 그 때와 다르다. 전세계적 경쟁을 기초로 하는 개방이다. 삼성전자가 잘 나간다 해도 우리 국민생활 전체에 미치는 효과는 제한적이다. 세계적인 경제 조건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현재 세계체제가 규정하는 딜레마다. 그럼에도 주체의 문제는 있다. 김영삼과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중도 자유주의세력이 집권세력이 돼서도 박정희식 개방 마인드로 접근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개방과 폐쇄의 대립구도만으로 바라본 것이다. 2000년대 개방은 1960년대 박정희식 개방과 달라야 한다. 현재의 개방은 양극화를 동반할 수 있다는 냉철한 인식위에 그걸 상쇄하는 사회경제정책, 개방과 결합되는 분배정책을 펴야 한다. 87년 6월, 당시 거리에서 싸울 때는 개방이란 고민이 없었다. 6월항쟁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에게 개방은 새로운 도전적 위기다.

김명인 = 국가능력보다는 신자유주의에 의한 문제가 더 크다. 신자유주의가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긴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무차별적이지 않다. 말레이시아부터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속에서 차폐막을 설정하며 길항하는 힘이 있었는데 우리는 지난 10년간 완전 무장해제 당했다. 한때 민주화와 신자유주의를 혼동하기도 했다.

김일영 = 준비없는 개방을 민주화로 착각해 외환위기를 맞았다. 일본을 한 번 보자. 일본은 고이즈미 총리가 집권하면서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았다. 경제가 되살아나고 실업률은 떨어졌다.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 조건 속에서 국가와 정부가 어떻게 대처했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르다. 성장에서 좋은 성과를 낳고 양극화 문제로 혜택이 흘러가게 만드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힌트를 일본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회 = 6월항쟁을 추동시킨 20년전 민중운동에 비한다면 지금의 시민운동은 위기에 처했다. 국가를 견제하는 역할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오는데.

조희연 = 87년의 시대정신으로서 민주개혁에 가장 충실한 부흥자가 90년대 시민운동이다. 97년 체제 아래에서 87년 6월이 만들어준 시민들은 계급적으로 분열·분화하며, 양극화되고 있다. 시민운동은 이를 직시하며 어떻게 시민운동의 의제로 만들어 나갈 것인가를 노력해야 한다. 무차별적 시장화에 대항하는 공공성 의제가 더 중요하게 부각돼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지역·지방의 풀뿌리 시민운동을 재발견하는 게 필요하다.

김명인 = 시민운동은 실종된 국가기능을 복원해 내는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하다. 또 시민진보세력은 포스트-캐피털리즘(자본주의 이후)을 생각해야 한다. 자본주의 이후를 대비하는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시민사회, 시민운동은 국가와 유착이 강해져 그런 탄력을 잃어버렸다. 소수자, 환경, 민중자치 등의 문제를 배부른 소리로 치부하는 게 현실이다.

윤평중 = 87년 체제를 시민혁명의 결과라고 규정한 것과 접맥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적 세계시장의 규정력이 파도처럼 휩쓸면서 한국 시민사회의 대응능력을 왜소화시키는 걸 본다. 김대중 정부 이후 특히 노무현 정권에서 진보적 시민운동 진영이 소수정권의 확대전략에 적극 동참, 또는 부역하면서 시민없는 시민운동으로 전락했다. ‘시민이 부재한 시민단체’라는 고질적인 문제점을 확대 재생산했다. 시민단체의 자생성이 크게 훼손됐다. 보수든 진보든 시민사회 자율성과 공동성을 최대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프로그램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국가기능을 복원하고, 시민사회 지평을 21세기 맥락에서 시민의 현실적 피부에 와닿는 실천프로그램으로 조직화해야 한다.

사회 = 노무현 정부는 87년 체제의 정점에서 태어났다. 87년 체제 속에서 노무현 정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김일영 = 87년 이후 잃은 것은 자유주의에 대한 존중이다. 민족, 민중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개인에 대한 존중으로서의 자유주의가 설 자리가 없어졌다. 지난 20년동안 민주화 이후에 어떻게 민주주의를 발전시킬까 하는 문제에만 사로잡혔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정말 잘 하려면 ‘민주화 이후의 자유주의’를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겠나.

김명인 = 6월혁명을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 점이다. 모더니티(근대성)가 결핍돼 있다. 자유주의적 감각은 굉장히 중요하다. 90년대 문학에서 개인을 발견했는데 이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는 그것을 변질시켰다. 모처럼 발견한 ‘개인’이 무한경쟁의 주체로만 규정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철학이 빈곤하다는 점이다. 한국사람이 현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비전이 없다. 남은 것은 신자유주의적 경쟁뿐이다.

윤평중 = 노무현 정권은 앞뒤가 맞지 않는 날림정권이다. 평가대상이 된다는 자체가 부끄럽다.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폐해가 막대하다보니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시장도 단일한 실체가 아니다. 나의 이익이 당신의 이익이 되는 기반이 확대재생산되고 절차주의적 형평성이 시장주의의 성숙과 더불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시장이 갖는 순기능까지 눈을 감는 것은 곤란하다.

조희연 = 나는 노무현 정권을 타자화된 문제로 보기보다는 진보적 지혜를 풍부하게 하는 타산지석으로 삼고 싶다. 20년전 6월항쟁의 한 구성요소였던 중도자유주의 저항주체가 집권했을 때 나타나는 문제가 노정권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독재세력과는 다른 개방전략을 고민하지 못했다. 최근에는 자폐적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노정권이 성찰적 정치세력이 되기를 바라고 기대했는데 그렇게 못해 안타깝다.

〈정리 임영주·김기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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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민주항쟁이 올해로 20주면을 맞았다. 20년 전 나는 9살이었을게다. 기억나는 것은 티비에 나온 노태우를 보며 그 사람을 대통령으로 점찍었다는 사실 하나다. 왠지 모르게 노태우가 대통령이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후보들의 이름도 또렷이 기억하지만, 9살의 나는 쪽집게처럼 대통령을 맞췄다. 하지만 어쩌랴, 왜 하필 노태우를 대통령감으로 점찍었느냐고 그 어릴 적 나에게 혼구멍을 내줄 수도 없는 모릇이다. 그렇게 역사는 흐른다. 그때의 내가 무슨 염력이 있어서 노태우를 대통령되게 한 것도 아니고, 노태우 아닌 다른 후보를 대통령감으로 보았다고 해서 그렇게 되라는 법도 전혀 없었을 것이다. 역사는 저 나름의 흐름을 가지고 산다. 이 안에서 인간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무기력할 뿐이다. 하지만, 여기 아직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의 몸부림이 다만 그렇게 무기력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민주화가 20주년을 맞이했다고 들썩인다. 어제 100분토론에 당시 민주화운동의 주역들이라는 사람들이 나와 설전을 벌였다. 그 주역들이라는 사람들이 죄다들 국회의원인지, 그게 옳은 건지 아닌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 민주화세력들의 모습은 20년이란 세월을 실감케하기에 충분했다. 서로들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지는 않을까?

이 시점에서 역사와 함께 영원할 것 같은 '민주주의'란 성지는, 역사와 함께 많은 부분 변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그러니 해마다 오는 기념일이란 어쩌면 반성일인지도 모르겠다. 20주년인 만큼 더 큰 반성과 성찰이 필요할 때다. 그럴때에 역사에 발전이 있다면, 그것이 발전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김명인 교수도 그 주역의 한 사람으로서 20년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음미해 볼 만 하다.

[시론] ‘6·10항쟁’ 성찰과 실천/김명인 인하대 교수·황해문화 주간

 
▲ 김명인 인하대 교수·황해문화 주간
6월 민주항쟁이 벌써 스무돌이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4·13 호헌발언을 거쳐 6·10 대투쟁,6·29선언,7∼8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다가 12월16일 대통령선거에서 예기치 못한 결말로 일단락된 6월 민주항쟁. 그후 20년동안 한국사회는 ‘1987년 체제’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이 6월 민주항쟁이 이룬 것과 남긴 것들을 축으로 하여 움직여 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민주화라고 부르든 분단체제의 변동이라고 부르든 한국사회가 이를 계기로 결정적인 질적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질적 변화를 ‘시민민주혁명의 성취’라고 불러도 좋다.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악조건에서도 남한의 시민계급은 비약적 경제성장으로 독자적인 물적 토대를 구축해 왔고 마침내 6월 민주항쟁과 그후 ‘민주정권’들의 실천을 통해 상부구조로서의 민주적 정치제도를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분단체제의 탈냉전화와 연성화에도 영향을 미쳐 이제는 통일, 혹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이라는 오랜 과제 역시 가시권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표면적 성취에 눈이 어두워 그 이면에서 진행되는 역사의 흐름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군사독재의 오랜 사슬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사실에 도취하고 만족해 질적 변화의 본질을 올바로 꿰뚫어보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성취했다고 믿었던 시민민주혁명은 우리의 오랜 투쟁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세계사적 변화의 한반도적 부산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1970년대를 휩쓴 오일쇼크에 의해 순조로운 확장을 저지당한 세계자본주의가 마련한 돌파구는 보호무역주의로 대표되는 국가중심적 경제체제를 붕괴시키고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무한대로 보장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지구적 관철이었다. 이에 따라 전세계의 ‘민족주의적’ 보호경제는 연쇄적으로 붕괴되었으며 보호경제를 지탱했던 정치적 권위주의 역시 전세계적으로 설 자리를 잃었다. 그것이 중남미의 민주화 도미노이고,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군사독재체제의 붕괴와 민주화 역시 그러한 세계사적 외압의 작용을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높은 파고 앞에서 심각한 동요를 겪고 있다. 문민정부에서 참여정부로 이어지는 역대 민주정부는 한편으로는 시민민주혁명을 추진해온 ‘민주화권력’이었지만 동시에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신자유주의 권력’이기도 했다. 20년 전 우리가 그토록 갈망했던 민주주의가 단지 대통령 직선제나 하는 형식적 민주제도를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과 연대와 사랑을 실천하는 본질적이고 전면적인 민주주의였다면 지금 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승자독식의 개인주의와 경쟁주의, 야만적 시장주의의 무한한 확장과 사회적 양극화는 우리가 갈망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배반이자 모욕이 아닐 수 없다.

6월 민주항쟁 20년, 올해는 기념식에 대통령까지 참석하는 명실상부한 국가기념일 대우를 받게 된다고 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모든 혁명기념일은 곧 혁명의 무덤이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흥청망청한 기념행사가 아니라 어긋난 혁명의 행로를 다시 돌이키는 전면적 성찰과 실천에 다시 불을 지피는 일이다.

김명인 인하대 교수·황해문화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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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항쟁 20년 기념 대토론회  '민주화 20년, 문화 20년 상상변주곡' 여섯 번째 시간, 김명인 교수의 발제와 토론에 대한 오마이뉴스 보도기사를 옮겨온다.

 

프라이팬에서 탈출, 화덕에 뛰어든 '한국'
[상상변주곡 ⑥] 다시 민중을 부른다. 신자유주의 시장 독재에 맞서

  이정환(bangzza) 기자  

"프라이팬에서 탈출했다 싶었더니, 화덕 속으로 뛰어든 셈이다."

김명인 교수(인하대, '황해문화' 주간)의 '전주'는 우울했다. 23일 열린 6월 민주항쟁 20년 기념 대토론회 '민주화 20년, 문화 20년 상상변주곡' 여섯 번째 시간, 김명인 교수(아래 호칭 생략)는 '다시 민중을 부른다'는 제목의 주제 발표를 통해 "우리가 함께 지향했던 아름다운 민주적 공동체는 간 데 없이, 신자유주의 시장 독재만 눈앞에 아득하게 펼쳐진 시대"라고 '현재'를 진단했다.

그래서 "20년 전 뜨거웠던 시절, 지금보다 분명히 더 가난했고 더 억압받았지만, 변화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에 지금보다는 행복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장 독재 시대에도 희망이 있는가"는 질문과 함께 '본 공연'이 시작됐다.

 
▲ 여섯 번째 '상상변주곡' 주제 발표를 맡은 인하대 김명인 교수
ⓒ 이정환
 
민주주의 정착 과정으로 알고 있던 지난 20년

먼저 김명인은 "우리가 세계사적 반동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했기에", 화덕 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비록 "1987년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이 혁명적 변화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주의 정착 과정으로 알고 있던 지난 20년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체제'가 남한 사회에 관철된 시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70년 오일 쇼크로 결정적 위협을 감지한 세계자본은 이미 당시부터 공공부문 등 사회 전 영역을 상품화하는 새로운 노선을 개발하고 실현시키고자 했다"고 전제한 김명인은 박정희의 죽음에서 참여 정부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통해 "부르주아 민주혁명을 성취"했지만, 동시에 "신자유주의 드라이브에 의해 부르주아 민족국가가 해체될 운명에 놓이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김명인은 '문민정부'를 "OECD와 WTO 가입을 통해 신자유주의 체제 정착을 위한 지반을 다진 정권", "경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지 못하고, 결국 정치적 민주주의조차 불구로 만들어버린 국민의 정부",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밀어붙임으로써 시장 독재 체제를 완성시킨 지금의 참여 정부"라고 각각을 규정했다.

특히 "국민의 정부가 최대 치적으로 삼는 햇볕 정책"에 대해서도 김명인은 "이미 남북 관계는 군사적 긴장을 통한 적대적 의존 관계에서 교류 협력을 통한 비적대적 의존관계 단계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며 "훌륭하긴 하나 정말 엄청난 것은 아니라는 말"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김명인은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20년 전에 가졌던 인간 해방에 대한 희망을 신자유주의의 주구가 되어 버린 제도권 민주화세력들에게 도매금으로 팔아 넘겨 버리고 대부분 공동체에서 개인의 영역 속으로, 신자유주의 경쟁 체제 속으로 도피하고 투항했다"는 말로 지난 20년 동안 일어난 일을 정리했다.

"이른바 '운동권'도 신자유주의 세력과 유착"

이제는 '화덕 속에서 펄펄 뛰는 오늘의 현실'과 마주 할 차례다. 김명인은 "1997년 IMF 사태를 계기로 완전히 신자유주의 세계 체제의 일부분이 된 한국은 이제 세계적 자본 각축이 일어나는 하나의 지역 시장에 불과하다"며 "미국은 자국 출신 초국적 자본이나 자국 자본의 이익을 보장하는 시장으로서만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객관적 조건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소설가 방현석 씨
ⓒ 이정환
이어 김명인은 "다만 미국 자본 이익 실현에 있어 경제적, 경제외적 기득권이 살아 있는 특수 지역이 한국 시장"이라며 "중국 등의 영향력을 독점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미국의 노력이 한미FTA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한미FTA 체결을 "균질화(성분이나 특성이 고루 같게 됨)-미국화 프로젝트의 구조적 정착"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적 조건은? 그는 "정치 엘리트에서부터 자칭 진보 인사들까지 모두 한 편으로는 분배정의와 복지를 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성장동력 발굴론, 사회 전 부문 경쟁력 강화론, 개방 불가피론 등을 말하고 있다"면서 "이렇게 뒤섞여 헝클어진 현실 인식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시장독재 대항 주체 구성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압도적 우위 속에서"는 "변혁적인 정치 역량 형성 역시 기대하기 어려우며", 이런 현실에서 "시민사회운동·노동계급운동 영역 또한 신자유주의 세력과 이데올로기적·제도적 유착 상태에 빠져 있다"고 이른바 '운동권'을 함께 비판했다.

"운동권이란 말이 나오면서 변혁운동 혹은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이 대중으로부터 분리되어 타자화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 김명인은 '신자유주의 세력과 유착의 예'로 "민주화 이후 운동의 준 국가기구화와 관료화, 자기 재생산을 위한 보수화, 대중으로부터의 고립"등을 꼽았다.

김명인은 지식인 사회에도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나 스스로도 '선진대안론'에 참여한 것처럼, 한국 지식인 사회가 본래의 변혁성을 잃고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며 "이제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신자유주의 시장독재를 용인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선을 그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덕분에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이민자, 실업자 등 각종 소수자들은 아무런 조직도 대변 세력도 없이 맨몸으로 신자유주의 시장 독재 체제에 맞서고 있는 형편"이라며 "신자유주의 경쟁 대열에 합류할 수 없었던 민중들은 양극화라는 길고 어두운 터널 속에서 불안과 공포 속에 떠돌고 있다"고 못박았다.

민중의 이름으로, 하나의 연합으로

암울한 진단은 끝났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시장 독재의 시대에도 희망이 있는가"란 물음의 대답을 찾기 시작했다.

김명인은 "자기 영역 확장에 필요하다면 낡은 이데올로기 대립이나 적대적 분단 체제도 얼마든지 붕괴시킬 힘이 있는 체제가 신자유주의"라며 "이에 대한 저항이라는 맥락에서 본다면, 민족국가의 자주성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로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민족적 자주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정통 맑시즘이든 비정통이든, 환경·생태주의든 근본주의 페미니즘이든, "신자유주의 시장독재로부터 삶의 자유를 지키려는 모든 움직임들은 복수의 대안, 복수의 세계를 인정하고 가능성을 열어놔야 한다"고 반 신자유주의 시장 독재 세력의 '연대'를 이야기했다.

 
▲ 토론자로 나선 한국예술종합학교 이동연 교수. 그는 주제 발표에 "전반적으로 동의한다"며 '민중론'에 대해서는 "실천 주체로서의 민중이 누구를 말하는지 다소 모호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 이정환
이처럼 '자주'와 '연대'를 신자유주의 체제 극복을 위한 '과제'로 제시한 김명인은 이를 위해 "반신자유주의 투쟁 주체의 구성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맥락에서 민중 개념을 다시 복원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70~80년대적 민중 개념은 근대 부르주아 사회와 세계 체제의 한계와 모순을 극복하는 이념형적 주체 개념이었다"면서 "이는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장 독재 체제에 반대하는 지구상의 모든 지역 인민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개념으로 상당한 적합성을 지닌다"고 민중 개념 귀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끝으로 김명인은 "신자유주의 시장독재 체제의 현재적·잠재적 희생자들이 민중의 이름으로 하나의 '연합'을 이뤄 전면적으로 또 세계적 규모로 저항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최대치의 전망이자 희망"이라며 "저항 투쟁은 동원이 아닌 참여로, 중심화가 아닌 탈중심화로, 위계화가 아닌 평등화로, 동일성이 아닌 차이의 힘으로, 그러면서도 긴밀한 네트워크적 연대를 통해 전개되어야 할 것"이라는 말로 '희망이 있는가'란 질문의 대답을 마무리했다.

한편 '풀로엮은집'이 기획·진행하는 '상상변주곡'은 '아름다운 저항' 등의 방현석 소설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이동연 교수 등이 토론자로 참여했으며,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와 6월민주항쟁 20년사업추진위원회가 주최했다.

7회 토론회는 '세계화 시대에 구상하는 진보 운동의 문화 전략'을 주제로 5월 31일(목) 저녁 7시에 서울 배재정동빌딩 B동 1층에서 열린다. 조정환 문학평론가가 주제 발표를 맡을 예정이다.

 
  방현석 "민족문학작가회의 하루 빨리 해산해야"  
  "최소한의 연대 틀만 남기고 분화 바람직"  
 
 
주제 발표에 이어 토론에 나선 방현석 소설가(아래 호칭 생략)는 "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되돌아 볼만한 주제 발표였다"며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방현석은 "지나치게 주체적인 역량과 역할이 과소 평가된 측면이 있는 역사 해석이란 생각이 든다"면서 "자칫 주체적인 노력들까지 미국의 세계 질서 재편 과정의 부속물로 취급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김명인의 '87보다 못한 후퇴' 주장에도 방현석은 "광주 항쟁이나 6월 항쟁에서 나타난 대중들의 요구는 혁명적·변혁적 이데올로기 수준에 이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라며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핵심 사안이 노조 결성 등 최소한의 권리였던 것을 감안하면, 87년 이후 민주노총 합법화 등을 통해 노동 대중의 요구 역시 거의 실현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방현석은 "이른바 '운동권'에게 갖고 있는 '민주화를 위해 희생된 세력들'이란 대중들의 부채 의식 역시 노 정권 당선 등을 통해 해소됐다고 본다"며 "이미 몫을 성취하고 부채를 청산했다고 생각하는 대중에게 그 이상을 요구한다면, 바로 그것은 그 이상 꿈을 꾸는 사람들의 몫 아니겠냐"는 반문으로 '운동권'에 대한 비판으로 눈을 돌렸다.

방현석의 비판은 "민중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다음 단계로 상정할 수 있도록 과연 어떤 작업을 해왔나. 아무도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오늘의 현실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라는, "90년대 저쪽이 신자유주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세력을 재편하는 동안, 이쪽은 진영 개편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뼈아픈 자성으로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최근 '민족문학작가회의' 단체 이름 변경을 둘러싼 논란으로 화제가 옮겨갔다. 방현석은 "정체성이나 지향성 등에서 동일성을 찾기 어려워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작가회의란 '조합'은 명칭 논란을 벌일 것이 아니라 하루 빨리 해산해야 한다"며 "각 분야로 나뉘어 활발한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연대 틀만 남겨 놓는 형태로 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끝으로 방현석은 "주제 발표 덕분에 '운동권'이란 말이 한참 뒤에 나온 것을 깨닫게 됐다"며 "운동권이란 말이 나오면서 '망했구나', 그런 '딱지'를 받아들인 순간에 이미 운명을 다했던 것"이라고 이른바 '운동권' 호칭 문제에 공감을 표시했다.

당연히 '386'이란 호칭에 대한 문제 제기도 나왔다. 방현석은 대학생이 아닌 노동 계급은 80년대 세대가 아니라는, 그런 민중 배제적인 규정이 어디 있느냐"면서 "386이란 용어를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순간, 80년대 운동권은 끝이 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386이란 개념을 수용하지 말았어야 한다. 광주항쟁 세대가 가장 정확한 표현이라 생각한다"며 "이것도 양보한다면, 적어도 80년대 세대라 불러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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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확산 민중이 대항하자”/김명인 인하대 교수

“1987년은 부르주아민주혁명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형성된 부르주아민족국가는 신자유주의 드라이브에 의해 사실상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6월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열린 대토론회 ‘민주화 20년, 문화 20년 상상변주곡’의 여섯번째 토론회가 23일 서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강당에서 개최됐다.

발제자로 나선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다시 민중을 부른다’라는 발표문에서 1987년 6월항쟁 이후 20년을 한국이 신자유주의 세계체제로 편입되는 과정으로 분석하고 반신자유주의 운동을 펼치기 위해 민중 개념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지배를 받는 사회에서 자본화되지 않는 모든 인간은 사회 밖으로 내몰린다.”며 “오늘날의 극단적 양극화와 불평등, 경쟁주의는 신자유주의 시장독재의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대항하기 위해 시민사회와 노동계급의 분발이 무엇보다 요구되는 상황”이라며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주체를 구성한다는 맥락에서 민중개념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0년대 탄생해 1970,80년대에 발전한 ‘민중’ 개념은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 개념이면서도 억압적인 사회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포함한 개념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1970∼80년대의 민중개념은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장독재체제에 반대하는 지구상의 모든 지역 인민들을 아우를 수 있는 개념으로 상당한 적합성을 지닌다.”고 평가했다. 이어 “정규·비정규 노동자계급, 농민, 도시빈민, 이민자 등 신자유주의 시장독재체제의 희생자들이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반신자유주의 연합을 이뤄 세계적 규모의 저항운동을 펼치는 것이 지금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전망이고 희망”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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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후면, 5.18 광주항쟁 27주년이다. 김명인 교수의 칼럼을 묵묵히 읽어본다.

  그 부끄러움은 아직 무덤에 가지 못한다
  [김명인 칼럼]5.18광주학살/항쟁 27주년을 맞으며

  며칠 뒤면 5.18 광주학살/항쟁 27주년이 돌아온다. 내 기억 속의 광주는 아직도 늘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한 세대 이전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80년대 후반생들이 대부분인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5.18은 너무 오래 전 일이라 3.1절이나 4.19 등과 구별이 잘 안 되는 교과서 속의 아스라한 옛일로 받아들여진다. 하긴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1977년은 6.25가 27주년을 맞았던 해인데 그때 내게도 6.25는 조금 과장하자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일로 받아들여졌으니까 그러지 않아도 정보의 과잉 속에 살고 있는 요즘 세대들이 그저 5.18이 대강 무엇이었다 정도만 알고 있어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그나마 6.25는 우리가 자라던 내내 '상기하자 6.25!'라는 반복되는 냉전적 훈육과 주입을 통해 늘 강박적으로 호명되던 기호였지만 '상기하자 5.18!'식의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는 요즘 세대들에게 5.18도 모르냐고 퉁박을 주는 것조차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거대한 기념공원과 연례적인 국가의례와 보상과 교과서 수록 등으로 이미 국가적으로 전유된 공식기념일이 됨으로써 5.18은 그 본연의 선연한 핏빛 아우라조차 안전하게 박제처리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얼마 전 5.18민중항쟁 서울시 기념사업회라는 단체가 주최한 5.18 민중항쟁 기념 서울시 청소년 백일장 및 사생대회 운문부 장원을 차지한 한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의 작품을 인터넷에서 보게 되었다. 이미 많은 네티즌들이 그 작품을 각자의 블로그에 퍼 담았고 게시판마다 화제가 된 듯했다. <그날>이라는 제목의 그 작품 전문을 일단 인용해 본다.
  
  그날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제.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얘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제.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 있데. 어린 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 보고야, 라디오도 안 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시적 화자의 '그날'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이 능숙한 전라도 사투리의 막힘없는 흐름 속에서 (물론 '놈'보다는 '아그'라는 아랫사람에 대한 전라도식 애칭을 사용했으면 더 완벽했겠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훌륭한 산문시다. 서울 강남에서 여고 3학년에 다니는 18세의 여학생이 어떻게 해서 이런 구체적 서사성을 획득한 시를 써낼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여학생의 부모나 부모세대의 친지가 들려준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시위를 하다가 계엄군에 쫓겨 다급하게 지나가던 시적 화자의 자전거 뒤에 올라탄 고등학생과 그를 잡아가기 위해 둘 사이의 관계를 묻는 계엄군, 겁이 나서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말해버린 화자, 결국 그 학생 '어린 놈'은 끌려가고 아직도 그날 그 부끄러운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는 화자…. 상황의 급박한 속도감과 전라도 사투리의 느린 전달감이 절묘한 엇박자를 이루는 가운데 "갑시다 갑시다"라는 절박한 청유가 지금까지도 긴 여운을 남긴다.
  
  이제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 불리는 그 학살과 항쟁의 기억은 수많은 학술대회와 추도사와 공식 기록 속에서 이제 한국민주주의의 권화로, 민중항쟁의 기념비로 남게 되었지만, 사실 그 순간을 함께 살았던 구체적인 인간들에게는 그날 생사의 기로에 선 희생자들이 내뻗은 "갑시다"라는 간절한 연대의 손짓을 받아들이지 못한 부끄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 어떤 기념비도 호사한 무덤도 교과서도 결코 덮지 못한다.
  
  더구나 그 시절 한때 그 기억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훈장처럼 특권화하고 그것을 한갓 '저항의 추억'으로 화석화하는, 배에 기름 낀 운동베테랑들의 그 어떤 회고담도 그 부끄러움을 장송할 수는 없다. 설사 학살원흉이 밝혀져 그날의 구호처럼 그 원흉을 '찢어 죽일' 수 있게 되더라도 그 부끄러움의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광주학살/항쟁을 27년이 지나도록 현재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쉽게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부끄러움은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렇게 절망적 상황에서 고립된 채로 고통받거나 죽어가서는 안 된다는 자각과 실천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존재들은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다. 800만 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인권사각지대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그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서 고투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 온갖 투기적 개발에 의해 생존의 경계 밖으로 떠밀려 나가는 사람들….
  
  사실은 다수이면서도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타자화되고 주변화되어 소수성을 강제당하고 있는 수많은 민중들에게 그때 광주에서 처절하게 고립되어 오직 자신들의 힘만으로 살아 남았어야 했던 광주시민들은 지금도 생생한 메타포가 아닐 수 없다. 그날이 남긴 부끄러움을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지속되고 있는 이 저강도의 제노사이드에 대한 치열한 저항정신으로 전환시키지 않는 한 광주학살/항쟁의 기억은 그저 '추억'으로 남아 연례적 기념행사 속에서 서서히 묻혀갈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 우리가 몰고 가고 있는 자동차 뒷좌석에 황급히 뛰어들어 '갑시다, 같이 갑시다'하고 울면서 절박하게 외치고 있는데 우리는 당신 누구냐고 빨리 내 차에서 내리라고, 나는 당신 아는 바 없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 한 어린 여학생의 시 한 편을 읽으며 나는 진땀을 흘리면서 자꾸 내 등 뒤를 돌아본다.

   
 
  김명인/인하대 교수,<황해문화>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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