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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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를 긴 이야기 속 아무데나 빠뜨렸다가 다시 재빨리 꺼내면서도 사건이 전개돼온 더 넓은 맥락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언론이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중요한 사건들을 기사화할 때 상습적으로 벌이는 일이다. (25~6쪽)

이 '사실'이 지닌 문제는 오늘날 신뢰할 만한 사실 보도를 찾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정작 문제는 우리가 더 많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접한 그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매일같이 새로운 뉴스가 쇄도한다. 우리는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가 국가신용등급을 재검토하고 있다는 사실, 정부 지출을 확대하는 법안이 가결됐다는 사실, 투표권 행사 제한이 위원회에 회부되었으며 천연가스 수송관 계획이 입안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진정 의미하는 바가 뭐란 말인가? 이 사실들은 정치적 삶의 핵심적 질문들과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이 뉴스들은 우리가 뭘 이해하도록 돕는 걸까? (32쪽)

우리는 어쩌면 편향에 대해 좀더 관대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순수한 의미에서 편향은 사건을 평가하는 방법을 뜻할 뿐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기능과 활동에 관한 일관되면서도 근본적인 논지에 의해 인도된다. 편향은 현실 위를 미끄러져들어감으로써 더 명확하게 사건을 들여다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 쌍의 렌즈다. 편향은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려 분투하고 개념이나 사건을 판단할 수 있는 가치의 척도를 제시한다. 편향을 벗어나려는 행동은 그 자체로 지나친 시도로 보인다. 오히려 우리의 임무는 편향된 시각이 생산한 더 믿을 만하고 유익한 뉴스에 올라타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33쪽)

언론이 칭찬받을 만한 지점은, 사실을 모으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그 사실들의 타당성을 알아내는 (지적 편향을 통해 갈고닦은) 기술이다. (34쪽)

현대사회는 정치적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진을 빼는 데 검열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냉소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이 힘은 사람들 대다수를 혼란스럽고, 따분하고, 정신 사납게 만들어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에 관여한다. 그리고 이는 가장 중요한 사안의 맥락을 대다수 대중이 단 한순간도 붙잡을 수 없도록 무질서하고, 복잡하고, 단속적인 방식으로 사건들을 보도하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36쪽)

정치 뉴스가 따분하다는 대중적 인식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뉴스가 프레젠테이션 기술을 통해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관심을 모으는 데 실패할 때, 사회는 자신의 딜레마를 붙들고 고심하는 일에 위험할 정도로 무능해지고, 따라서 사회를 변화시키고 개선하려는 대중적 의지도 결집될 수 없기 때문이다. (37쪽)

수없이 많은 버전의 '현실'이 존재한다. 결단력 있는 언론기관들이 포착할 수 있는 현실이란 매일 딱 한 가지밖에 없는 것처럼 굴면서 국가를 논하는 건 불가능하다. 뉴스는 스스로를 현실을 그려내는 권위 있는 초상화가라고 제시할지도 모른다. 뉴스는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는 대단히 난감한 질문에 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지 몰라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는 빼어난 능력은 없다. 뉴스는 어떤 이야기를 조명하고 어떤 이야기를 빼버릴지 선택하면서 단지 현실을 선택적으로 빚어낼 뿐이다. (50~1쪽)

뉴스가 제공하는 국가에 대한 소식들이 국가 그 자체는 아니다. (52쪽)

탐사 저널리즘은 집단과 개인을 파괴하는 모든 요인들에 대한 전방위적인 관심에서 시작해야 한다. 뉴스는 무엇보다 정신 건강, 건축, 여가, 가족 구조, 연애, 회사 경영 방식, 교육과정과 신분질서 등을 취재해야 한다. 이런 영역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의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보다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뉴스는 국가가 겪는 문제의 뿌리가 상류층의 범죄행위에 근본적인 기원을 두고 있다고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물론 언론은 개개의 썩은 사과를 겨냥할 임무를 분명 지니고 있지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합의 내부에 은폐된, 눈에는 띄지 않지만 훨씬 큰 제도적 실패에도 주의를 돌리도록 우리를 이끌어야 한다는,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책무 또한 지니고 있다. (74~5쪽)

뉴스의 가장 고귀한 약속은 무지를 줄이고 편견을 극복하게 하여 개인과 국가의 지성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79쪽)

플로베르는 신문을 증오했다. 신문이 독자로 하여금 정직한 사람이라면 결코 타인에게 떠넘기는 데 동의하면 안 되는 어떤 임무를 그렇게 떠넘기도록 부추긴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 임무란 바로 생각하기이다. 언론은 이제 중요한 문제에 대한 복잡하면서도 지적인 논평을 생산해내는 일을 자기네 직원들에게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고, 독자들의 정신은 각자의 특별한 여정, 탐구, 성찰을 멈추고 그 일들을

개개의 뉴스들 역시 뉴스 브랜드의 비호 아래 전달됨으로써 힘을 얻는다. 탁자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제기했다면 우리가 보다 철저하게 검토하려 들었을 의견들이 특정한 언론사 이름 아래 있기만 하면 거의 신화적인 힘을 획득할 수 있다.
전쟁을 벌이는 이유에 대한 기사가 신고딕풍 첼트넘 서체의

좀 지나칠 정도로 고르게 합의된 듯 보이는 관점과 맞닥뜨릴 경우, 플로베르의 마음속에서 경종이 울렸듯 우리 마음속에도 경종이 울려야 한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서체와 가장 권위적이며 믿음직한 헤드라인 아래 숨어 있을지 모를, 잠재적으로 심각한 바보짓에 대해 항상 회의적인 태도로 경계 태세를 유지해야 한다.
플로베르가 문학적 상투어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미디어의 상투어에 눈을 부릅뜨고 대해야 한다. 전자는 소설을 파멸시키고, 후자는 국가를 파멸시킬 수 있다. (89쪽)

우리가 다른 곳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를 모두 잃은 건 아니다. 우리는 아주 예전에는 이른바 이국 땅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줄까지 섰던 생명체들이다. 문제는 현대의 뉴스 매체가 발전시킨 보도 방법론(다른 방법은 거의 모두 배제한 채, 정확하고 기술적으로 신속하지만 비인간적인데다 위기에만 초점을 맞춘 보도 방침)이 일조의 세계화된 배타적 편협함 속으로 잘못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정말 많은 것들을 알지만 실제로 그에 대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고, 잘못된 종류의 얕은 지식이 우리 호기심의 범위를 확장시키기보다는 좁혀버렸다. (108쪽)

이카로스를 주목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화가가, 그리고 이제 시인이 주못했다. 이를 통해 오든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예술가가 하는 일이다. 예술가들은 하찮은 것에 주목한다.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것, 다른 사람들(쟁기질하는 사람과 목동, 여러분과 나, 그리고 바쁜 저널리스트)이 놓치고 지나가지만 우리의 무관심과 냉담함을 거두도록 하는 데 있어 본질적인 것 말이다. (129쪽)

우리를 침묵시키는 건 경제의 규모만은 아니다. 그것이 가진 복잡성도 우리를 입다물게 할 수 있다. 선진 경제지역 인구의 극소수만이 자신들이 속한 경제 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차익거래, 바젤1과 바젤2, 주기적으로 조정된 경상예산, 주가수익률이나 양적완화 같은 핵심적 경제 용어들 속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려면 꽤나 골치 아플 것이다. (151쪽)

어른이 된다는 건 수많은 희망을 단호하게 묻어버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155쪽)

뉴스라는 렌즈를 통해 보게 되는 경제 '논쟁'은, 대중의 기대와 무엇이 가능한가에 대한 대중의 감각 모두를 엄격한 통제선 안에 가두고 그 밖으로 넘어서지 못하게 한다. 누군가 그런 의제에서 벗어나려 하면(예를 들어 주주란 무엇이고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보자고 하거나 성장과 복지의 상관관계에 의문을 품는다거나 하면) 갑작스레 '급진적'이라 간주되고 따라서 우습게 여겨지고 만다. 우리가 오늘날 당연히 여기는 것들 대부분(최저임금, 아동 보호, 환경 정책)이 처음에는 미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완전히 급진적으로 보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돼 '합리적인' 의견으로 정착된 것인데도 말이다. (159~60쪽)

경제 뉴스는 덜 불안하고 덜 파괴적이면서 더 안전하고 의미 있는 노동이 가능한 세상을 향한 큰 꿈에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160~1쪽)

기자들은 숫자 뒤에 감춰진 세상을 보아야 하고, 자본주의를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현상으로 인식해야 하며, 오싹할 정도로 질서정연한 사무실과 제조 시설의 살균된 아름다움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169쪽)

기억해야 할 것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이 제품들은 (당연히) 무척 싸지만, 그건 찬쿤 실업이 엄청 대단하거나 똑똑해서가 아니고, 또한 현대 기술이 굉장히 기발해서도 아니라는 것이다. 제품 가격이 싼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학자들이 '가격결정권 결여'라고 점잖게 표현하지만 절망이라고 규정짓는 것이 더 솔직하게 느껴지는, 샤먼 시 노동자들을 처절한 고통 속에 몰아넣은 노동 조건에 있다. (173쪽)

우리가 선망하는 대상에서 정확히 어떤 점이 흥미로운지 좀더 분명하게 알도록 노력해야 한다. (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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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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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관계는 모든 매력, 모든 활기를 잃어버린 죽은 관계이다. 완전히 투명한 것은 오직 죽은 자뿐이다.-19쪽

투명성의 강제는 기존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투명성은 그 자체로 이미 긍정적이다. 투명성 속에는 기존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의문시하는 부정성이 들어 있지 않다. 투명성은 시스템의 외부를 보지 못하고,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고 최적화할 뿐이다. 따라서 투명사회는 포스트정치와 일치한다. 완벽하게 투명한 것은 오직 탈정치화된 공간뿐이다.-25~26쪽

아감벤의 테제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는 원죄 이전에 벌거벗지 않았다. "은총의 옷" "빛의 옷"이 그들의 몸을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죄로 인해 그들은 신성한 옷을 빼앗기고 만다. 완전히 벌거숭이가 된 아담과 이브는 몸을 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벌거벗음이란 곧 신이 내린 옷의 상실을 의미하는 셈이다.-49~50쪽

아무것도 덮거나 숨겨두지 않고 시선에 내던지는 투명성은 외설적이다. 오늘날 모든 미디어의 이미지들은 어느 정도 포르노적이다.-59쪽

오늘의 사회를 지배하는 긍정성의 과잉은 이 사회에서 서사성이 사라졌음을 방증한다.-69쪽

투명사회 역시 시인이 없는 사회, 유혹도 변신도 없는 사회이다. 시인이란 누구인가? 시인은 연극적 환상, 가상의 형태, 제의적, 의식적 기회를 생산하는 자, 적나라한 사실에 예술작품Artefakten(인공물), 반反사실Antifakten을 맞세우는 자인 것이다.-81~82쪽

투명사회는 정보사회다. 정보는 어떤 부정성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투명성의 현상이다. 정보는 긍정화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어진 언어다.-83쪽

존경할 줄 모르는 사회, 거리의 파토스가 없는 사회는 스캔들 사회로 전락한다.-116쪽

투명성의 독재 속에서는 주류에서 벗어나는 의견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아이디어는 아예 입 밖으로 꺼내기도 어려워진다. 과감한 도전은 거의 시도되지 않는다. 투명성의 명령은 강력한 순응에의 강제는 낳는다. 사람들은 카메라의 지속적인 감시 속에 있을 때처럼 관찰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투명성의 명령에는 파놉티콘적 효과가 있다. 그것은 결국 커뮤티케이션의 획일화와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귀결된다.-141쪽

커뮤니케이션의 소음을 만들어내는 디지털 매체의 가산적 특징은 정신의 걸음걸이와는 거리가 멀다.-143쪽

스마트폰은 즉흥성과 근시안적인 태도를 장려하고 긴 것과 느린 것을 소외시킨다.-146쪽

오늘날 우리는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고 착취하던 산업 시대의 기계에서 해방되었지만, 디지털 기기가 낳은 새로운 강제, 새로운 노예제에 직면하고 있다. 디지털 기기는 이동성을 무기로 모든 곳을 일터로, 모든 시간을 일의 시간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착취한다. 이동성이 가져온 자유는 어디서나 일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강제로 돌변한다.-163쪽

더 많은 자유를 약속하는 스마트폰에서 하나의 치명적인 강제가 생겨난다. 커뮤니케이션에의 강제. 사람들은 최근 들어 디지털 기기와 거의 강박적 관계에 빠져들었다. 여기서도 자유는 강제로 전도된다. 소셜네트워크는 커뮤니케이션에의 강제를 엄청나게 강화한다. 결국 그러한 강제는 자본의 논리로 소급된다.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더 많은 자본을 의미한다.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순환이 가속화되면 자본의 순환도 가속화된다.-164쪽

셀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165쪽

우리는 오늘날 자유 자체가 강제를 촉발하는 특수한 역사적 단계에 처해 있다. 자유는 본래 강제의 반대 형상이다. 그런데 강제의 반대 형상이 강제를 낳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자유는 더 많은 강제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유의 종말일 것이다.-181쪽

이 사회는 우리를 따로따로 떼어놓는 성과사회다. 성과주체는 쓰러질 때까지 스스로를 착취한다.-182쪽

우리는 디지털 매체로 인해 실제로 멀리 있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을 만지는 법을 잊어버리지 않을까?-189쪽

투명사회에도 이면이 있다. 투명사회란 어떤 의미에서 표면적 현상이다. 투명사회의 뒤편, 또는 그 아래에서, 모든 투명성을 벗어나는 유령들의 공간이 생겨난다.-193쪽

내가 한 모든 클릭은 저장된다. 내가 디딘 모든 발걸음은 역추적될 수 있다. 우리는 도처에서 디지털 발자취를 남긴다. 우리의 디지털적 삶은 네트워크 안에 정확히 모사된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이 남겨질 수 잇는 가능성으로 인해, 신뢰는 완전히 통제로 대체된다. 빅데이터가 빅브라더의 자리를 차지한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화는 투명사회를 완성한다.-211쪽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수감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유롭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전시하고 훤히 비추어줌으로써 디지털 파놉티콘에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 ~ 자유와 통제의 구별이 불가능해질 때 통제사회는 완성에 이른다.-212쪽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은 우리를 관찰한다.-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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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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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figure), 그것은 작업중에 있는 연인이다.

각 문형마다 그 깊숙이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구조 안에서만 용도를 갖는 하나의 문장, 대개는 미지의(혹은 무의식적인?) 문장이 잠들고 있다.

문형은 사랑하는 동안 내내 주체의 머릿속에 순서 없이 떠오르는 그런 것이다.

사랑 이야기(또는 '모험')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과 화해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공물(貢物)이다.-14~21쪽

그 사람의 부재를 말하는 남자에게는 모두 여성적인 것이 있음을 표명하는 결과가 된다. 기다리고 있고, 또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남자는 놀랍게도 여성화되어 있다. 성도착자여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여성적인 것이다.

그리스어에는 욕망에 대한 두 단어가 있다. 부재하는 이에 대한 욕망에는 '포토스(Pothos)'가, 현존하는 이에 대한 욕망에는 보다 격렬한 '히메로스'가.

부재는 지속되고, 나는 그것을 견디어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부재를 조작하려 한다.-31~4쪽

어떤 괴상한 논리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하나의 전체로 인지한다(가을날의 파리마냥). 동시에 이 전체는 말로는 할 수 없는 어떤 여분의 것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 사람의 전부가 미학적인 영상을 산출한다. 그는 그 사람이 완벽하다는 사실에 찬미하며, 또 그렇게 완벽한 사람을 선택한 자신을 찬미한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 욕망에 꼭 들어맞는 이미지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우연과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그리고 어쩌면 얼마나 많은 탐색이) 필요했던가!-39~41쪽

이미지의 변질은 내가 그 사람을 부끄럽게 생각할 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지는 부패한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갑자기 목격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더 이상 나의 그 사람이 아닌), 한 낯선 사람(미치광이?)이기 때문이다.

망가뜨림에 대한 공포는 잃어버림에 대한 고뇌보다 더 강렬하다.-48~52쪽

독창적인 관계일 때에는 상투적인 것은 모두 흔들리며, 초월되고, 철수한다.-62~3쪽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기다리게 하는 것, 그것은 모든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이요, "인류의 오래된 소일거리이다."-68쪽

언어의 힘, 나는 내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특히 말하지 않는 것조차도. 내 언어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나, 내 몸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내가 내 언어로 감추는 것을 몸은 말해 버린다. 메시지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그럴 수 없다. 내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든간에, 그 사람은 내 목소리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나는 거짓말쟁이이지(역언법에 의해), 배우는 아니다. 내 몸은 고집 센 아이이며, 내 언어는 예의바른 어른이다.-74쪽

절망의 두 체제: 부드러운 절망, 능동적인 개념("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사랑해야만 하듯이 절망 속에서 당신을 사랑한다")과 격렬한 절망-79쪽

'가우디움'은 "현재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거나 장차 소유할 것이 확실시될 때 영혼이 느끼는 즐거움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어, 그리하여 우리 세력하에 있어 우리가 원할 때면 언제나 그것을 즐길 수 있다." 이에 반해 '래티시아'는 보다 경쾌한 즐거움, 즉 "우리 마음속에 즐거움이 지배적인 상태"(때로 모순되는 여러 다른 감각들 중에서)를 가리킨다.-82~3쪽

최고선을 믿는 것은 최고악을 믿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89쪽

조금 떨어져 있자. 거리감을 쌓는 훈련을 하자. 타자의 죽음 뒤에 홀로 살아남는 그 순간부터 모든 주체의 입에서 나오는 저 억압된 말, 살자(Vivons!)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자.-91쪽

"나는 나를 이해하고 싶고, 나를 이해시키고 싶고, 알리고 싶고, 포옹받게 하고 싶고, 누군가가 와서 나를 데려가기를 바란다."-95쪽

언어는 살갗이다. 나는 그 사람을 내 언어로 문지른다. 마치 손가락 대신에 말이란 걸 갖고 있다는 듯이, 또는 내 말 끝에 손가락이 달려 있기라도 하듯이. 내 언어는 욕망으로 전율한다. 이 동요는 이중의 접촉에 기인한다. 한편으로는 모든 담론 행위가 "나는 너를 욕망한다"란 유일한 시니피에를 은밀히 간접적으로 가리키면서 그것을 풀어주고, 양분을 주고, 가지를 치며 폭발하게 하는 것이라면(언어는 스스로 만지는 것을 즐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그 사람을 내 말 속에 둘둘 말아 어루만지며, 애무하며, 이 만짐을 얘기하며, 우리 관계에 대한 논평을 지속하고자 온 힘을 소모한다.-110쪽

"우리가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좀 알기나 하니" 혹은 "우린 너에게 생명을 주었는데"(-"하지만 그 생명으로 도대체 제가 어쩌란 말입니까!" 등등). 선물을 말하는 것은 곧 선물을 침묵 속의 소비와는 대립되는, 교환 경제(희생의, 경매의)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115~6쪽

나는 '고통'이란 말이 그 어떤 고통도 표현하지 못하며, 따라서 그 말을 사용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짜증나게 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우스꽝스럽다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지 않으며,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이 결코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게 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그 어떤 것도 보상하거나 승화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당신이 없는 바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곧 글쓰기의 시작이다.-146~8쪽

나는 찾으며, 시작하며, 시도하며, 더 멀리 나아가며, 달려간다. 그러나 내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불사조가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지 죽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그렇다면 나 또한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충족되지도 못하며, 그렇다고 자살하지도 않는 내게 있어 사랑의 방황은 숙명적이다. 베르테르 자신도 '저 가엾은 레오노레'에게서 로테로 옮아가며 그 사실을 체험했었다. 비록 그 움직임은 중단되었지만, 베르테르가 살아남았더라면, 그는 똑같은 편지를 다른 여인에게 다시 썼을 것이다.-150~1쪽

나는 모성적인 것과 생식기적인 것을 원하는, 동시에 두 명의 주체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어린 에로스가 그랬던 것처럼 발기된 아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154쪽

세상은 이렇게 내가 더불어 그 사람을 공유해야만 하는 염치없는 이웃들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이란 '공유의 구속'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세속적인 것)은 내 적수이다. 나는 끊임없이 이런 불쾌한 것들로 방해받는다. 어쩌다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 억지로 우리 식탁에 와 앉거나, 또는 그 사람이 옆에 앉은 사람들의 저속한 대화에 정신이 팔려 내가 말하는지 어떤지도 알지 못할 때, 또는 하나의 물건, 이를테면 한 권의 책조차도 모두 불쾌한 것이다. 쌍수적인 관계를 순식간에 말소하고, 공범 관계를 변질시키며, 소속을 해체하는 것은 전부 그러하다. 세상은 "당신은 나에게도 또한 속해 있다"라고 말한다.-160~1쪽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닮아야 한다. 나는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어떤 본질과 일치가 있다고 가정한다(바로 이 점이 나를 기쁘게 한다). 이미지·모방: 나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다 그 사람처럼 하려 한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 똑같은 살갗의 자루에 갇혀 있다는 듯이, 나는 그 사람이며 그 사람은 나이기를 열망한다.-186쪽

반전(retournment): "아무리 해도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은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라는 뜻이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해독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 역시 당신을 해독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체득하게 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명백함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지의 누군가를,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남아 있을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신비주의자적인 움직임: 나는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한다.-196~7쪽

모든 연적은 처음에는 스승·안내자·흥행사·중개자였다.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을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면, 결코 사랑하지 않았을 사람도 많다."

"사랑이 시작되기 전 아름다움은 그 표지로서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하게 될 사람을 칭찬하게 함으로써 그 사랑을 좌우하게 된다."-199쪽

합리적인 감정: 모든 것은 잘 되어 나가지만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랑의 감정: 잘 되어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것은 지속된다.

지금의 나로서는 자기 희생을 하나의 고결하고도 연극적인 형태로만 파악하고 있으며, 이것은 여전히 희생을 상상계의 영역 안에 붙잡아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205쪽

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 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213쪽

아무리 그 대답이 긍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저도 그래요') 그 사람이 하나의 단순한 시니피에로만 대답한다면 그건 충분치 않다. 그는 내가 그에게 보낸 "난 널 사랑해"란 말을 다시 발화해야 하며, 그래서 공식화해야 한다. 펠레아스가 "사랑하오"라고 말하자, "저도 역시 사랑해요"라고 멜리장드는 대답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정면에서, 어떤 새어나감도 없이, 완전하게, 문자 그대로, 사랑의 말의 원형을, 그 공식적인 표현을 받고자 함이다.-222~3쪽

물건 OBJETS. 사랑의 대상이 만졌던 물건이면 모두 그 몸의 일부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이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것.-251쪽

어쩌면 '울음'은 너무 투박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모든 종류의 눈물을 동일한 의미로 간주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여러 명의 주체가 있어,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우는 게 아닐까? '눈에 눈물이 나 있는' 이 '나'는 과연 누구일까? 혹은 어떤 날 '거의 눈물까지 날 뻔했던' 또 다른 나는 누구일까? '내 몸의 모든 눈물을 쏟으며 우는' 나, 또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홍수 같은 눈물을' 퍼붓는 나는 누구일까? 이토록 다양한 울음의 방식을 가진 까닭은 아마도 내가 울 때면 언제나 누군가를 대상으로 하며, 또 그 수신자는 항상 동일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내 눈물을 가지고 주변에 행사하려는 공갈협박의 유형에 따라 내 울음의 방식을 조정하는 것이다.-262~쪽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누군가를 감동시키려 하고, 또 압력을 가하고자 한다.

내 고통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내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나는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표현이 아닌 기호이다. 나는 내 눈물로 하나의 이야기를 하며, 고통의 신화를 만든다. 그렇게 하여 나는 고통에 적응할 수 있으며, 또 그 고통과 더불어 살아나갈 수 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가장 '진실한' 메시지, 혀의 메시지가 아닌 몸의 메시지를 거두어 주는 한 과장된 대화 상대자를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말, 그것은 무엇인가? 한 방울의 눈물도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얘기하리라."-~263쪽

내게서 그 사람은 결코 지시물이 될 수 없다. 당신은 결코 당신일 뿐이며, 나는 타인이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267쪽

'주체'란 우리에게(기독교가 생긴 이래) 괴로워하는 자를 의미하며, 그러므로 상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체가 존대한다는.

처음 우리는 하나의 정경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첫눈에 반하기 위해서는(운명과도 같은 그 무엇에 휩싸여 넋을 잃는, 그리하여 내 책임이 아닌) 갑작스러움의 기호 작체가 필요하며, 또 이런 모든 대상의 배열 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정경이기 때문이다.

나를 매혹하고 황홀케 하는 것은 어떤 상황 속에 있는 육체의 이미지이다. 내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작업하는 모습이 나를 흥분케 한다.

내가 매혹되었던 그 처음의 장면은 단지 나중에 재구성된 것일 뿐이다. 현재 시제로 체험하지만 과거 시제로 변형시키는 충격적인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이렇듯 항상 단순 과거로 표현된다.-272~9쪽

사랑의 행로는 세 단계(또 삼막)를 거치는 것처럼 보인다. 첫번째 단계는 즉각적인 사로잡힘의 단계이다(나는 이미지에 매혹된다). 이어서 일련의 만남이 그 뒤를 따른다(데이트·전화·편지·짧은 여행 등).

다음 단계란 고통·상처·고뇌·비탄·원한·절망·당혹·함정의 긴 행로로서, 그것의 희생물인 나는 끊임없이 그 사람, 나 자신, 그리고 우리 서로를 발견하게 해준 그 경이로운 만남마저도 실추하게 될지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 속에 산다.-282~3쪽

사랑의 근심은 육체적인 노동만큼이나 육체를 혹사시키고 소모한다. "나는 너무도 괴로워했다. 하루 종일 사랑하는 이의 이미지와 싸웠더니 밤에는 잠이 잘 왔다"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베르테르 또한 자살하기 바로 직전 침대에 드러누워 오랫동안 잠을 잤다.-290쪽

결국 내가 매달려 있는 질문은, 그리하여 내가 그 사람의 얼굴에서 끈질기게 그 대답을 요구하는 것은 난 당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죠?라는 질문이 아닐까?-305쪽

반과거는 매혹의 시제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움직이지 않는다. 불완전한 현존, 볼완전한 죽음. 망각도 부활도 아닌, 기억의 기진맥진한 미끼. 그 기원에서부터 하나의 역할을 하기를 열망하는 장면은 추억 속에 자리한다.-309쪽

그대로 TEL.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정의해야만 하는 그 끊임없는 요청 앞에 자신이 내리는 정의의 불확실성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모든 형용사가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를 꿈꾼다.-314쪽

성적인 쾌락은 환유적인 것이 아니다. 일단 얻고 나면 끝이 나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닫힌 축제, 잠시 열린다 해도 금지에 의해 통제를 받는 그런 축제이다. 반대로 다정함은 무한한, 충족될 줄 모르는 환유이다. 다정한 몸짓이나 에피소드(어느 날 저녁의 그 감미로운 조화)가 중단될 때 내 마음은 찢어지는 듯하다.-319~20쪽

완전한 결합일나 "유일하고도 단순한 즐거움이요" "흠도 불순물도 없는 기쁨이자 꿈의 완벽함이며, 모든 희망의 종착역이요" "신과 같은 찬연함이다." 그것은 분리되지 않는 휴식이자, 또는 소유권의 충족이다. 우리는 서로를 절대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어 즐길 수 있기를 꿈꾼다. 그것은 결실(fruitif)의 결합이자 사랑의 향유(fruition)이다

"예전의 완전한 것을 그리워하고 욕망하는 마음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릅니다."

미치광이 같은 커플에서 부부의 외설스러움이 생긴다(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을 위해 평생 음식을 만든다.)-321쪽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라는 속담은 거짓말이다. 사랑은 오히려 눈을 크게 뜨게 하며, 명석하게 만든다. "나는 당신에 대해, 당신에 관해 절대적인 앎을 갖고 있다."

그는 에메트(Emeth), 즉 진실이라 불렸으나 사람들이 한 글자를 지워 버리자 메트(Meth), 즉 '그는 죽었다(il est mort)가 된다.-3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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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12-25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반딧불이 2008-12-25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도 여전히 가슴을 치는군요. 메리크리스마스요~

Alicia 2008-12-25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에 읽는 사랑의 단상. 좋아요. :)

Arch 2008-12-26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멜기님!
사랑의 단상을 다 읽은거랍니까? 오호! 전 맨날 들고 다녀도 거북이 걸음만큼도 못나갔는데.(거북이 미안) 같은 책인데도 나와 밑줄이 다르시네요. 우리 성실한 멜기님. 메리 크리스마스셨죠?
 
중국신화전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
위앤커 지음, 전인초.김선자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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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제보다 조금 뒤에 나타난 대신이 바로 황제(黃帝)이다. 고서에는 <황제(皇帝)>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황천상제(皇天上帝)>라는 의미이다. 황제의 <제(帝)>라는 글자는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그리고 갑골문(甲骨文)과 종정문(鐘鼎文)에도 나타나는데 본래는 상제(上帝)를 지칭하는 글자이다. 또 <황(皇)>자는 <제(帝)>의 형용사로서, <제>의 빛나는 위대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예는 <<시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대아(大雅)편>, <황의(皇矣)편>에 <위대한 상제[皇矣上帝]>라는 구절이 있고 <소아(小雅)편>, <정월(正月)편>에도 <위대한 상제>라는 의미의 <유황상제(有皇上帝)>, <황황후제(皇皇后帝)>라는 말이 보인다. 이것은 모두가 상제의 장엄하고 위대함을 찬미하는 말들이다. 본래 고대에는 나라의 군주를 <제>라고 부르지 않았다. 주(周)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왕(王)>이라 칭하기 시작했으며, 문왕(文王), 무왕(武王) 때부터 시작해 진(秦)나라에게 멸망당한 난왕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만 <왕>으로 불려졌을 뿐이다. 그러던 것이 전국시대 말기에 이르면 야심에 찬 제후의 무리들이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다투어 <제>라 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秦)은 서제(西帝), 조(趙)는 중제(中帝), 연(燕)은 북제(北帝)라 칭하였다. 후에 진나라의 시황(始皇)이 중국을 통일하게 되자 성품이 더욱 나빠져서는 <황제(皇帝)>라는 두 글자를 자신에게 갖다붙였다. 그래서 자칭 <황천상제>라 하였는데 그것이 후대에 계속 전해져 내려와 인간 세상 제왕의 통칭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145~6쪽

상고시대에 한 차례의 무시무시한 홍수가 있었던 것은 아마도 사실인 것 같다. 갑골문을 보면 옛날이라는 의미의 <석(昔)>자를 ..., 그것은 태양의 위나 아래에 물결이 굽이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 뜻은 아마도 예전에 아주 무서운 홍수가 범람한 때가 있었으니 모두들 그날을 잊지 말라는 의미인 것 같다. 또 기록에 의하면 세계의 많은 민족들이 홍수에 관계된 전설을 갖고 있는데 그것으로 보아 고대에는 자연계의 변화로 인한 홍수가 전세계에 범람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인류는 그 대홍수로 인한 참담했던 기억을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홍수가 범람했던 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히 추정할 수가 없다. 중국 역사에 있어서는 4천 몇백 년 전의 요순시대라고 하기도 하지만 정말 그러했는지는 단언할 수가 없다.-3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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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 - 현대사상신서 6, 개정증보판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품절


"오리엔탈리즘이란 오리엔트 곧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 서양인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하는 것이다."-15쪽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대체로) '서양'이라고 하는 것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인 구별 ontological and epistemological distinction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방식이다."-17쪽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다."

결국 그것은 제국주의, 식민지 건설에 봉사한 것이다.-18쪽

"오리엔탈리즘은, 영국 및 프랑스 그리고 19세기초까지는 실제로 오직 인도와 성서관련국만을 의미한 동양 사이에서 경험된 특수한 근접관계 closeness에 그 기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근접관계의 역학은 모두 서양(영국, 프랑스, 미국)의 동양에 대한 우월을 시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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