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물 1 ㅣ 세계신화총서 6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눈물'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흔히 이런 아주 단순한 질문을 받으면 당황해한다. 당황한다기 보다는 어이없어 한다고 말해야 정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학에서도 1에 1을 더하면 왜 2가 되는지를 증명해 보이는 것은 고난도의 문제이듯이, 이런 단순한 것을 정색을 하고 물어오면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너무 단순한 질문이어서 질문 만큼이나 단순하게, "눈에서 나오는 물이지 뭐긴 뭐야!"라고 대답해 버리면 자신이 왠지 무식해지는 것 같고, 질문자의 농간에 놀아난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단순한 질문은 우리의 예상대로 그리 단순한 대답으로 해결되는 것들이 아니다. 너무나 어렵고 길고 끝이 없는, 결국은 무어라 딱히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기에, 우리는 애써 그러한 어려움들을 피하고자 암묵적으로 이러한 것들을 아예 단순화해 버렸던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는 '눈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일단 '눈물'이라는 것은 '눈에서 나오는 물"이라는 생체 현상의 하나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이것은 '눈물'의 기본적, 중심적 의미인데, 두루뭉술한 설명말고, 좀 고지식해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생리학에서 말하는 눈물의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눈물 (생리학) [tear] 눈의 바깥쪽, 위쪽에 있는 눈물샘[淚腺]에서 나오는 분비액. 눈물샘에서 분비되는 눈물은 각막표면을 광학적으로 균일하게 유지하고, 각막과 결막 표면으로부터 세포의 노폐물이나 이물을 물리적으로 세척해내며, 각막에 영양을 공급해주고, 항균작용을 하므로 눈의 광학적 특성과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정상적으로 안검(眼瞼)이 깜박 거리는 것에 따라 눈물막의 일부인 점액층을 각막과 결막의 상피표면에 도포하게 된다.
이는 아주 일차적인 '눈물'에 대한 설명이다. 학문적이고 과학적인 이러한 '눈물'의 정의에 대해 우리는 대체적으로 동의할 수 있겠지만, 결코 이것이 '눈물'의 전부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그러니까 "눈에서 흐르는 물이 눈물이지 눈물이 별 거냐" 하기에는 우리 인간에게 '눈물'이 갖는 무언가 다른 것들이 있다는 얘기다. 백과사전에서의 위와 같은 정의를 우리가 '눈물'의 완전한 설명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면 우리는 이제 국어사전으로 넘어가 보아야겠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의외로 '눈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눈-물 「명」눈알 바깥 면의 위에 있는 눈물샘에서 나오는 분비물. 늘 조금씩 나와서 눈을 축이거나 이물질을 씻어 내는데, 자극이나 감동을 받으면 더 많이 나온다.
다른 국어사전을 하나 더 보자. 두산동아에서 나온 국어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눈-물 「명」①눈알 위쪽에 있는 누선(淚腺)에서 나와 눈알을 축이는 투명한 액체. 여러 가지 자극이나 정신적인 감동에 의하여 흘러 나옴. ②'동정'이나 '인정'의 비유.
이들 국어사전에서는 생리학에서 정의하는 눈물의 의미와 더불어 정신적 자극에 의한 '눈물' 현상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국어사전의 설명들도 무엇인가 확실한 '눈물'의 정의라고 보기 어렵다. 하나의 생리학적 현상으로서의 눈물과 정신적인 감동에 의한 눈물을 우리는 조금 구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흔히 "눈물을 흘린다."고 할 때, 어떤 정신적 감동이나 자극에 의한 눈물을 의미할 때가 많다. 생리적으로 우리는 항상 눈물을 머금지만 그것을 잘 흘리지는 않는다. 눈물을 '흘릴' 때에는 무언가 다른 자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눈물'의 대체적인 의미는 거반 '흘린다'는 행위를 동반해야 할 때 비로소 정의된다. 그러니까 생리학적 의미로서의 '눈물'의 정의와는 몇 걸음의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눈물'은 흔히 비유적 의미로도 자주 사용된다. "눈물 없이는 못 볼 장면"이라거나, "눈물 흘릴 줄을 번연히 알면서 내 어이 찾아왔던고." 등에서 처럼 '눈물'은 동정이나 슬픔을 의미한다. 이러한 동정이나 슬픔은 문학이라는 매개를 통한 곧잘 사용되곤 한다. '눈물'은 문학을 통해 보다 고차원적인 의미를 취득하게 된다. 그 일례로 다음과 같은 시를 보자.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위의 시는 김현승 시인의 「눈물」로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도 실려있어, 한번쯤 배웠을 만한 것이다. 여기서의 '눈물'은 동정이나 슬픔의 차원을 넘어 숭고해 보이기까지 하는 의미를 취득하기도 한다. 이것 말고도 눈물에 대한 언급들은 다양한 문학작품에서, 그리고 예술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대중문화에서도 '눈물'은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데,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이 '눈물'을 빼놓고는 극 진행 자체가 어려운 것들도 태반이다. 영화에서도 '눈물'은 하나의 장르를 형성했을 정도이다. 예전에 '신파극'이라는 것도 엄연히 '눈물'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눈물'은 상업화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서 눈물은 각계각소에 내재해 있는 거대한 어떤 것이 되었다는 말이다.
'눈물'은 그 자체로 생리적 현상과 더불어 정신적 현상이 되었고, 나아가 문학적, 예술적, 사회적, 상업적 의미들을 취득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총체적 의미의 '눈물'을 간단히 정의하기에는 너무나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눈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무엇이라 대답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눈물'에 대한 성찰도 이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여기 이 한 편의 현대화된 고대의 설화는 그러한 '눈물'의 뛰어난 성찰의 하나로 기록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것은 바로 중국 고대의 <맹강녀 설화>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장편소설 『눈물』이다.
이 소설의 저자 쑤퉁은 "중국 진나라 때에, 만리장성의 역사(役事)에 얽힌 비극적인 전설의 여주인공"인 맹강녀에 얽힌 전설, 곧 "진시황의 장성 축조에 징발(徵發)된 남편의 겨울옷을 가지고 찾아갔으나, 남편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성벽에 쓰러져 우니, 갑자기 성벽이 무너지면서 남편의 유골이 나타났다고 한다."는 설화를 각색했다. 여기에 저자는 제목을 '눈물'로 정했다. 이는 이 소설의 모태가 된 <맹강녀 설화>가 남편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에 대한 비극적 이야기라는 것과는 달리, 그 중심에 눈물이라는 소재를 부각함으로써, '눈물'에 담긴 다양한 의미들을 현대적으로 성찰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쑤퉁은 주인공 '맹강녀'를 '비누(碧奴)'라는 '눈물인간'으로 변신시킨다.
"비누(碧奴)는 도촌에서 태어났다. 꽃처럼 어여쁘고 맑고 단아한 그녀는 눈동자가 칠흑처럼 새까맣고 커다래서 눈물을 달고 살 팔자를 타고난 듯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머리가 길고 숱이 많았다. 비누의 어머니는 살아생전 딸의 머리를 쓸어올려 빗겨주며 눈물을 머리카락 속에 감추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어머니가 일찍 죽는 바람에 비법이 완전히 전수되지 않았다."(31쪽)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비누(碧奴)'라는 이름은 '눈물'과 필연적으로 관계된다. '碧(푸를 벽)'은 "눈동자가 칠흑처럼 새까맣고 커다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눈물을 달고 살 팔자"를 의미했다. 결국 '비누'는 눈물인간이 된다. 그런데 인용문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왜 "눈물을 머리카락 속에 감추"어야 하냐는 것이다. 그것을 시시콜콜 이야기하기에는 작가 쑤퉁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다. 확실한 건 이 소설에서 '눈물'은 절대적으로 금지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눈물'에 대한 금지를 보다 상징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이는 '눈물'이 생리적이면서도 정신적 작용인 것에 반해, 이에 대한 권력의 제재는 '눈물'이 가지는 인간으로서의 총체적 가치와 권리에 대한 착취와 폭력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전에 있었던 비극"에 의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행위인 '눈물' 흘리는 것에 대한 금지는 인간에 대한 억압의 기제로서도 작용하지만, 더불어 인간 사회의 물신화, 기계화, 도구화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는 작가가 이 설화를 각색하면서 의도했던 하나의 주제의식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러니까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인간에 대한 억압'과 '폭력'의 사회, 나아가 비윤리화 비도덕화 되는 현 사회와 문화, 인간의 물신화와 도구화에 대한 우려 등이 이 '눈물'에 대한 성찰 속에 형상화 되고 있는 것이다.
눈물에 대한 금지는 애당초 '황족 간의 암투'에 비롯한다는 사실이 말해 주듯이, 이는 지배층에 의한 피지배층에 대한 억압과 폭력, 그리고 착취로 읽혀진다. 이는 그 안에서의 피지배층의 의식변화로도 이어지는 것이다. 피지배층의 의식변화는 '눈물이 금지된' 시대에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폭압과 전횡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적 사실로서 진시황의 만리장성 축조가 그 원인이 된다. 나라의 온갖 남자들이란 남자들은 죄다 끌고가 만리장성의 축조에 받쳐진다. 이러한 현실은 '금지된 눈물'과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모순을 만들어 내고, 급기야 인간 사회는 냉혹해지고 비인간화 되어진다. 아이를 때리면서 울지 못하게 하면, 그 아이는 정신병원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결국 이 소설에서의 현실 인식은 그러한 미쳐버린 사회에 대한 형상화이자 비판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주인공 '비누'는 앞에서의 인용문에서도 보았듯이, 이 미쳐버린 사회에서 볼 때, 반쯤 모자라고 떨어진 인간으로 나타난다. 급기야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이는 역설적으로 '비누'가 지극히 정상임을 의미하는데, 정신병원의 환자들 사이에서는 다만 의사와 간호사가 미쳐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비누'는 '눈물이 금지된' 이 사회에서 눈물을 제대로 감추지 못하는 사회의 미숙아다. 그것과 더불어 그녀는 "고아인 완치량(万豈梁)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그 둘은 모두 이 소설 안에서는 모자란 인간들이다. 사회에서 소외받고 외면당하면서 그들은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 아끼고 사랑했다. 어떻게 보면 눈물을 감출지 모르는 '비누'는 하나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을 나타낸다. 아이처럼 말이다. 어른들은 눈물을 감출 수 있는 가식이 있지만, 아이들은 울고 싶은 땐 울어야 하는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순수함이 모자람으로 인식되는 사회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라도 이 소설에 형성된 상황 자체는 하나의 현대적 사회에 대한 상징이라고 보아도 족하다.
이야기는 완치량이 사라지면서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만리장성 축조를 위해 어느날 갑자기 끌려간 것이다. 이렇다할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말이다. 완차량 뿐만이 아니라, 나라의 대부분의 남자들은 모두다 끌려가고 만다. 그러나 남편들이 끌려간 아내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처에서 '비누'와는 확연히 다르게 나타난다. '비누'는 남편을 위해 겨울옷을 마련해서 만리길의 북쪽으로 가려고 하지만, 다른 여자들은 먹고 살기 바빠, 끌려간 남편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대비에서 우리는 '비누'의 편을 들어줄 수는 있겠지만, 다른 여자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들의 말에 수긍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현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비누'의 남편에 대한 그 헌신적 사랑이 돋보이게 되는 것이다.
사회는 점점 미쳐버린다. 급기야 인간은 도구화되고 기계화된다. 왜일까? 그것은 '눈물을 금지' 했을 때부터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눈물'이라는 인간의 육체적 기본 행위에 대한 억압과 더불어 그것은 정신적, 문화적, 사회적 억압이었기에, 인간은 그 모든 것을 제지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지배층에 의한 피지배층의 도구화로 이어진다. 사회는 점점 각박해지고 인간은 더이상 인간이기 힘들어진 세상, 그 세상을 작가는 '눈물'을 빼앗긴 세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글은 그 물신화 도구화 현상의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행여 누가 됐든 우리를 사서 쟁기라도 끌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지. 큰 가축이란 바로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에요. 하지만 산지 여자를 사려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 큰 가축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못 생겨 싫다 하고, 멍청하다고 마다하니 결국 아무도 우리를 찾지 않아 여기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라우."(111~2쪽)
또한 인간성의 비윤리화와 비상식화, 비도덕화를 보여주는 대목도 있다. '비누'를 본 아이가 "저기 인간짐승 하나가 또 와요! 돌멩이 하나 주세요!" 하면서 '비누'에게 돌을 던진다. '비누'는 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그렇게 높은 곳에서 잘못하다 떨어지면 크게 다칠 테니 조심"하라며 아이를 걱정한다. 그런데 아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총에 맞고도 욕을 하기는커녕 내가 떨어져 다칠까봐 걱정을 하고 난리예요! 저 여자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해요!"(105쪽)
사회는 이렇게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그 사회 속에서 '비누'는 "머리가 어떻게 된" 인간일 수 밖에 없다. 작품 속에서 이 '비누'에 대한 이 사회의 인식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이제야 당신이 누군지 알겠네! 도촌에 웬 정신 나간 여자가 상사병에 걸려서 청개구리 한 마리 데리고 남편 찾으러 떠났다너니 바로 당신이군요!"(108쪽)
남편을 찾아 그 먼길을 떠난 '비누'는 그 사회에서는 정신나간 여자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비누'는 이런 인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내가 내 남편에게 입힐 겨울옷을 가져가는데, 상사병은 무슨 얼어죽을 상사병이야? 난 그런 병에 걸린 적 없어. 세상에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나가 노역을 하며 겨울을 보낼 남편 걱정을 안 할 여자가 어디 있어? 있다면 그게 미친년이지!"(108~9쪽)
이러한 차이 가운데, 우리는 비누의 말과 위의 다른 여자들의 말 사이에 다른 차이를 감지할 수도 있다. 곧 표면적 어조에서 여자들의 말은 점잖은 반면, 비누의 말은 단호하고 격하다. 이것은 이 사회의 잘못된 인식에 대한 순수함의 강변으로도 읽히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결국 이런 비누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비누는 "이 절망으로 가득 찬 인간시장에서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일까? 비누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녀의 눈물이 '특별한 눈물'이 된 것은. 이러한 '비누'에게 다가오는 것은 "발가락의 피 맺힌 물집 사이로 계곡물이 흐르듯 눈물이 흐르"는 것이고 "손바닥도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는 것 뿐인 것이다. "희망을 품고 있는" 단 한사람 '비누'는 그렇게 '눈물인간'이 되가는 것이다.
세상은 '눈물인간'에게 어떠한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눈물이란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말처럼 잘 뛰는 사람들을 위해 다리를 내리고, 새처럼 노래를 잘하는 사람을 위해 다리를 내리고, 일 년 내내 웃는 얼굴의 사람을 위해 다리를 내린 그들이 눈물을 를리는 사람에게는 다리를 내리지 않"(163쪽)는다. 이는 인간이 기계화된 사회에 대한 실날한 비판으로 읽히지 않는가? 눈물을 흘리는 인간의 순수함은 이 세상에서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비누라는 인물을 통해 사회의 억압과 인간의 물신화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순수한 사랑과 눈물은 부족하고 모자란 인간일 수 밖에 없게 한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비누'와 '완치량'이다. '비누'는 금지된 눈물을 '감추지 못 하는'는 어리석고 모자란 인물로 그려진다. 그에 반해 '비누'를 모자라다고 인식하는 다른 인간들은 "눈물을 감추는 방법에" 능숙한 사람들이다. 이는 현대사회와 물질문명, 그리고 자본화 된 사회 속에 완벽히 적응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은 인간의 물신화를 야기하고 순수함을 잃어버린 인간 사회의 비판으로 이 소설을 읽어볼 수 있지는 않겠는가? 적어도 작가가 이 소설의 제목을 '눈물'이라고 한 것은 '눈물'이 가지는 다양한 인간적 문맥들, 즉 인간의 생리적, 정신적, 문화적 전반에 대한 다양한 기본적인 권리와 욕구들이 어떻게 억압되고 그것이 사회를 어떻게 망쳐놓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닐까?
재밌는 것은 황제의 죽음을 두고 '비누'의 다음과 같은 생각이다. "그녀는 자신이 황제를 진쑤의 모습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작은 눈, 생쥐 수염, 손목에 새겨진 도적이라는 두 글자". 황제의 죽음을 도적이었던 진쑤의 죽음과 "나란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닌 것이다. "손목에 황제라는 두 글자가 새겨 있을까?"하는 그 의문에서 서술자는 "그녀는 평생 알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황제'와 '도적'이 동의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 이 기나긴 리뷰를 여기서 불현듯 마감하기로 하자. 이야기의 줄기야 다들 짐작하고 있지만, 작가가 '눈물'을 보는 인식은 대개 이런 쪽으로 읽어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 것이다. 그것이야 어쨌건 간에, 우리 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눈물'을 잃어버린, 어쩌면 금지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 소설이 고대의 전설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이보다 리얼한 오늘날의 현실 인식을 찾아보기도 어렵지 않을까? 오늘날 '눈물'에 대한 인식과 다음과 같은 '사내아이들'의 입을 빌린 소설의 진술은 얼마나 다르겠는가? 나는 "다르지 않다."에 걸 수 밖에 없겠다.
"빗물이야 논밭을 비옥하게 하고, 강물은 사람을 이롭게 하고, 도랑물은 들풀을 자라게 하고, 연못의 물은 물고기를 잘 자라게 한다지만 사람의 눈물은 대체 어디에 쓰느냐 이 말이야. 세상에서 제일 값어치 없는 게 바로 눈물이라고!"(5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