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 시인선 333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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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김광규(金光圭, 1941~)와는 좀 이상한 악연(?)이 하나 있다. 그 악연은 2005년 12월 첫째 주 일요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6학년도 중등교사 신규임용 후보자 선정 경쟁시험>이라는 무시무시한 시험에 처음으로 응시하는 그 날, 그와의 악연은 탄생했다. 내 대학 인생을 유일하게 유의미하게 마무리하도록 해줄 수 있는 중요한 시험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유일함에 대해 대부분의 대학생활을 반항하며 지냈다. 명색이 시를 좋아한답시고 끄적거려 보기도 하고, 시집을 많이 읽는 척들도 해보고, 시 관련 서적들을 여러 권 사 모으는 것은 내 대학생활의 낙이었다. 그 중에서도 시비평서들을 읽는 것을 좋아했더랬다. 시를 쓸 만한 재능이나, 그것을 이해할 만한 어떤 철학적 이론들을 구비하지 못했었기에, 시를 읽어주고 이해시켜주는 비평들이 그나마 시를 좋아한답시고 떠벌이는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험을 보는 당일까지도 내 가방에는 시 평론 모음집만이 들어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두 가지 사실에 대해 신뢰성을 높여준다. 하나는 내가 그 중요한 시험에는 하등 아무런 준비와 관심이 없었다는 점을 반증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내가 대학 생활을 시를 좇으면서 보냈을 거라는 추측의 확실성을 높여준다는 것이다. 그 가방 속에 들어있던 책, 곧 시인 김광규와의 악연이 있게 한, 그 주인공은 바로 『대표 시 대표 평론 2』라는 책이다. 이 책은 2권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와, 그 시에 대한 대표적인 평론들을 엮은 시 평론집이다. 시험을 보는 날까지 이 책을 들고 다니면서 틈틈이 읽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험을 보기 바로 며칠 전, 우연인지 필연인지 꽤나 유명한(사실 이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들이 유명한 것이지만) 김광규의 시「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 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싶다. 김광규를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말이다.)와 그 평론(서울여대 이숭원 교수의 글이다.)을 읽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김광규를 세밀히 접한 적이 없었다.(이 리뷰를 쓰기 이전, 그러니까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을 읽기 이전까지도 유효한 진술이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나는 여러 번 읽어본 경험을 가지고 있긴 했다. 그만큼 유명했으니까. 잘 안다고 할 순 없지만, 많이 접해 본 시(詩)였기에 이 시와 그 평론에 유달리 관심을 가지고(가방에 넣고 다니는 또 하나의 물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샤프다. 책에 낙서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어지간하면 밑줄 같은 것도 치질 않았다. ‘유달리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프를 꺼내들었다는 것이다.) 집중해서 읽었다. 중요한 대목들에 밑줄도 긋고, 이숭원 교수의 설명을 착실히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상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시와 이숭원 교수의 해설은 머릿속에 뚜렷이 남아 있었다. 시험 보는 그 날에도 말이다.

  짐작들 하시겠지만, 시험 당일 나는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되는 시험시간을 어떻게 때워야 하는가를 고민하면서, 시험지를 받아들고, 그래도 찬찬히 한 문제 한 문제를 읽어내려 갔다. 알듯 말듯(사실 ‘알듯’은 ‘말듯’에 비해 극소수에 지분만을 차지한다.) 한 문제들로 가득했고, ‘알듯’한 것을 나름대로 짜내고, ‘말듯’한 것은 그럴싸하게 꾸며서 차곡차곡 빈칸들을 채워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쓰다 보니 한 장 두 장 넘어가고, 팔이 아프고, 대강 한 절반 쯤 넘어갔다 싶더니, 2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그래도 시험이어서 그런지, 30분이라는 남은 시간의 경고는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남은 문제들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풀어나갔다. 결국 30분이란 시간도 지나고 넘겨보지도 못한 시험지가 2장쯤 되었다.(시험지는 총 10장이다. 이때는 총 23문항으로 모두 서술형이다.) 감독관은 시험 종료를 알려왔고,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사로 남은 시험지를 들춰 넘겨보았다.

  아뿔싸! 시험지 마지막 장을 가득채운 한 문항이 있었으니, 그게 다름 아닌 김광규였고, 그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였고, 배점이 무려 8점이었던 것이다.(총 23문항이 출제된 이 시험의 총점은 80점이다. 이 문항 하나에 무려 총점의 10%에 해당하는 점수가 부여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거의 논술에 가까운 답안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빠르게 그 문제를 읽어본 결과, 나는 며칠 전 읽었던(이상하게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던) 이 시와 이 시의 평론을 불현듯 안타까운 마음으로 떠올렸다.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나는 시험지를 그냥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시험이 끝난 후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비공개되는 출제위원에 대한 풍문들이다.) 서울여대 이숭원 교수가 출제위원으로 들어갔었다는 것이 아닌가(이 사실이 맞는 것인지 나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럴 수가! 그 문항을 돌이켜보면, 또렷이 기억하던 그 평론을 대강 요약하여 써놓았으면 거반 만점에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려 8점을 놓쳐버린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아이고! 내 팔자야.’를 연발하진 않았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관심을 갖지도 않았던 시험에 낙방을 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 문항(결과론적이지만 내가 시간이 있어서 그 문항을 맞췄더라도 시험 합격에 영향을 주지는 못 한다.) 때문에 기분이 영 좋질 못했던 것이다. 아! 김광규. 악연이라는 데에는 의문이 들지만, 좋지 못한 인연인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 이후로 김광규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와 이숭원 교수는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나의 트라우마 같은 것이다. 며칠 전 예비군훈련(반나절짜리 훈련이다. 으레 나는 예비군훈련엘 가서 시집을 읽는다.)을 받기 전에 시집을 준비해 두어야 했다. 서점의 시집목록을 훑어보다가 눈에 확 들어온 것이 김광규, 그리고 그의 신작 『시간의 부드러운 손』이었다. 나의 정신적 외상은 나를 무의식적(?)으로 이 시집을 주문하도록 만들었다. 억하심정에서였을까? 그렇지만은 않을 무언가 아쉬움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다만, 이 시집을 며칠 전 예비군훈련에 동원했고, 읽었고, 다시 한 번 ‘아! 김광규.’를 외쳤다는 것. 그것이 나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서론이 길었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그와의 악연을 끝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는 것이다. ‘아! 김광규.’는 그런 의미에서의 감탄사다. 이 감탄사는 그와의 잘못된 만남으로 인한 반전에서 오는 것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이전의 김광규에 대한 나의 지극히 협소한 이해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겠다. 김광규란 이름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와 동일시되었고, 그 시에 대한 조악한 이해는 그대로 시인 김광규에 대한 나의 이해로 이어질 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기억되는 그의 시세계는 “자기 세대의 부끄러움과 잘못을 냉철하게 비판”한 것 이상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이 시 또한 나름의 시적 성취를 가지고는 있겠지만, 무엇보다 4 ․ 19가 전면에 배치된다는 점에서 단출하게 이해되는 것에 그칠 뿐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그러니까 ‘아! 김광규.’는 이런 맥락에서의 반전에서 오는 감탄사였다. 이전의 단조로운 김광규에 대한 인식과 한 때의 악연이 만들어낸 아주 조악한 이해를 단숨에 타파해 버린, 무엇인지 모를 흔쾌함을 그의 최근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에서 나는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보이는 그런 비판자적 모습의 김광규가 아니라, 이제는 어느덧 노년의 할아버지 김광규의 따뜻한 서정성을 감지한 덕분이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시작을 해왔고, 그 과정에서 다분히 시적 노정의 굴곡이 있었겠지만, 나는 그 노정에 동반하지 않았던 관계로, 이 시집에서의 그의 다소 신선한 모습에 나는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 가지 고백하자면, 김광규의 나이가 이렇게 많았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다. 4 ․ 19를 겪고 18년이 지나서 쓴 시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고, 또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다만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시인 김광규로만 기억할 뿐, 그의 나이 듦을 전혀 고려치 않았었던가 보다. 어쩌면 모든 시인은 시와 함께 나이 드는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백석이나 기형도를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청년기의 그들의 시적 나이로만 그들을 기억할 뿐이다.(다소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말이다.) 얼마 전 일본의 한 아나운서가 몇 달 새에 부쩍 늙어버린 모습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나도 이 시집을 통해 그런 놀라움이랄까,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경이감을 느끼게 되었다. 60대 후반의 김광규를 어느 때에도 상상한 적이 없었기에, 그의 이번 시집에 배인 그 노년의 감수성은 자못 충격이었고, 나는 그 충격 속에서 어떤 포근함 마저 느끼게 됐다. 결국 그와의 한때 악연은 멀리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혼자서 산길을 올라갑니다

길바닥에는 황토 흙과 돌멩이와 잡초 들

산비탈에는 소나무 참나무 왕벚나무 들

청설모와 다람쥐가 나는 듯이 오르내리고

멧비둘기와 산까치 들 짝을 부르고

골짜기 물소리와 그윽한 숲 냄새

멀리 산봉우리 위로 떠도는 구름

어느 산이나 오솔길은 비슷하지요

등산객이 많은 곳 아니라 해도

싫증나지 않는 한적한 산길 곳곳에

흙과 돌과 풀과 나무처럼 소박하고

정겨운 사람들 동행으로 벗 삼고

아내와 남편으로 맞이하라는

속삭임 귓전에 아련히 감돌다가

산길을 내려올 때 차츰 뚜렷하게

들려옵니다 그러나 너무 늦게서야

그 소리 알아듣지요

                      -「산길」전문




  김광규의 이번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부는 따로이 소제목을 달아놓고 있다. 위의 인용한 시는 제1부의 제목과 동명의 시다. 그렇다고 이 시가 제1부의 첫 번째 시는 아니다. 두 번째로 실린 시에 지나지 않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시집의 꾸릴 때 시인들은 각기 어떤 의도에 따라 시를 배열한다. 그 배열의 위계질서상 시집의 첫 번째가 될 시는 무엇보다도 그 시집을 대표하는 대표성을 뛰게끔 되어있다. 말하자면, 한 시집을 풀어나가는 키워드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은 그러한 시인의 의도가 다분히 강하게 느껴지는 배열이라고 보인다. 그래서 첫 번째 시는 「춘추(春秋)」가 차지하는 영광을 얻었던 것이다. 시 「춘추」는 비록 제1부에 묶여 있지만, 그것은 이 시집 전체를 대표하는 키워드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제1부에 어쩔 수 없이 있는 시라는 얘기다.

  그렇게 볼 때 위의 인용한 시 「산길」은 제1부의 표제시가 되는 것이다. 제1부의 제목이 「춘추」가 아니라 「산길」인 것은 그때문인 것이다. 「산길」은 제1부에 모인 시들을 대표하는 키워드다. 이 시의 구조는 상승과 하강의 구조, 즉 ‘산길’을 오르고 내리는 구조이다. 그러면서 상승과 하강은 많은 점에서 대비된다. ‘산길’을 오를 때에는 ‘혼자’이지만, 내려올 때에는 그렇지 않음을 안다. ‘산길’을 오르면서 무심코 스치우는 것들의 의미를, 그 ‘산길’을 내려올 쯤에는 깨닫는다. 이 상승과 하강의 구조를 통해 화자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 깨달음은 ‘혼자서’ 오르는 ‘산길’이자만, 거기에는 ‘혼자’이지 않게 하는 ‘정겨운’ ‘동행’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벗 삼고’ 함께 하라는 어떤 깨달음을 화자는 “산길을 내려올 때 차츰 뚜렷하게” “그러나 너무 늦게서야” 알게 된다. 이 깨달음은 노년의 시인이 현실에서 얻은 실제적 경험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이 시에서 저무는 저녁노을의 풍취를 강하게 느끼게 하는 것은, 그리고 산길을 묵묵히 내려오는 희끗한 어느 노인의 모습을 그려보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2행과 3행에서 보이는 복수접미사 ‘-들’의 쓰임이다. 이것은 홀로 쓸 수 없는 말이다. 앞말에 항시 붙여 써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시인이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시인은 당당히 ‘들’만을 독립해 쓰고 있다. 왜일까? 2행을 보면 “길바닥에는 황토 흙과 돌멩이와 잡초”가 있다. ‘황토 흙’은 여럿이고, ‘돌멩이’도 그 크고 작음에 따라 여럿이고, ‘잡초’ 또한 그 종류를 알 수 없는 다양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 ‘흙’과 ‘돌멩이’와 ‘잡초’ 사이사이에도 무한의 다른 존재들이 상존한다. 그것을 시인은 간과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들’의 쓰임에서 우리는 시인이 ‘산길’을 오르며 본 것이 “황토 흙과 돌멩이와 잡초”, 그리고 “소나무 참나무 왕벚나무”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겨운’ ‘벗’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인의 세밀한 시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제1부에서는 이런 노년의 시적화자의 감수성을 살펴볼 수 있는 시들이 모여 있다. “죽음의 불빛들 찬란하게 반짝이는/수평선의 아름다운 야경”(「밤바다」)을 보는 한 노인은, “좁은 땅에 한갓 나무로 태어났어도” “제 몫의 삶 지켜가는/청단풍 한 그루”(「청단풍 한 그루」)에서 그 여유로운 정서를 보여준다. ‘산길’을 오르며 보았던 자연의 모든 것에서 「산 아래 동네」에 있는 모든 하찮은 것들까지도 “우리 동네 이웃들”로 삼는 시인이다. 더불어 시인은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는데, “담쟁이덩굴은 느린 속도로 넓게 퍼져가면서, 모든 땅과 벽과 지붕을 남김없이 뒤덮고, 결국 온 동네를 점령하게 되었”(「담쟁이덩굴의 승리」)다는 것이나, “못생긴 덕택에/위엄 있게 살아남아 오늘까지/달 마을 지키는 팽나무/정승 댁 송덕비보다 신령스러워”(「팽나무」)한다거나, “끈질긴 생명의 경이와 환희를 보여준 이 화초”(「이대목의 탄생」) 등에서 보이는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은 노년의 시인만이 얻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닐까?

  이 시집 전체에는 노년의 김광규 시인의 나이 듦의 짙은 애수와 더불어 삶의 성찰이 담겨 있다. “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타고 시대와 함께 흘러갈 줄 알”았던 시인도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를 한참 지나왔다. 그러나 시인은




시대와 함께 흘러가는 그 많은 동시대인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서

망연히 물가에서 바라보았다

도도한 물결을 타고 그들은 자랑스럽게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능숙하게

무자맥질하면서 순식간에

아득히 멀어져갔다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강」부분




  에서와 같은 노년의 애수 짙은 성찰을 보여준다. “초등학생처럼 앳된 얼굴”의 ‘여중생’을 보면서 “해마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봄꽃들 피어난다”(「이른 봄」)는 생의 희망을 보는 것은 노년의 김광규 시인이 가진 서정의 아름다움이다. “잃어버리며 그리고 잊어버리며”(「어느 날」) 맞이한 “한 생애의 후반기”에 그는 “젊어지는 세상으로 흘러가버리고 이제는/혼자서 쉬는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고 푸념해 보기도 한다. 때론 ‘배추꼬랑이 신세’에 비유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사뭇 대비되어 보이는 노년의 세상보기는 희망과 애수의 절묘한 교차 속에서 남은 생을 맞이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어려운 세월 악착같이 견뎌내며

여지껏 살아남아 병약해진 몸에

지저분한 세상 찌꺼기 좀 묻었겠지요

하지만 역겨운 냄새 풍긴다고

귀여운 아들딸들이 코를 막고

눈을 돌릴 수 있나요

척박했던 그 시절의 흑백

사진들 불태워버린다고

지난날이 사라지나요

그 고단한 어버이의 몸을 뚫고 태어나

지금은 디지털 지능 시대 빛의 속도를

누리는 자손들이 스스로 올라서 있는

나무가 병들어 말라죽는다고

그 밑동을 잘라버릴 수 있나요

맨손으로 벽을 타고 기어들어와

여태까지 함께 살아온

방바닥을 뚫고 마침내 땅속으로

돌아가려는 못생긴 뿌리의 고집을

치매 걸렸다고 짜증내면서

구박할 수 있나요

뽑아버릴 수 있나요

                      -「치매환자 돌보기」




  어떤가? 시인 김광규는 이렇듯 나이 듦을 차분히 관조하지만은 않는다.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오는 어떤 희망과, 나이 듦의 애수 짙은 푸념도 섞이고, 위의 시처럼 당당히 세상의 각박함에 대해 몰아친다.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노년의 김광규 시인의 다채로운 서정을 느껴볼 수 있다. 단조로운 노년의 교훈 섞인 설교가 아니라, 때론 위트 있고, 때론 신랄한 아이러니와, 생의 묵묵한 관조와 깨달음, 그리고 숙성된 삶의 성찰을 우리는 여러모로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시집의 제목이 ‘시간의 부드러운 손’인 것은 이런 시인의 짙은 서정이 그 거역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손/벽오동 잎보다 훨씬/커다란 손/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부드러운 손”을 정중히 맞이한 탓이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이번 시집의 제2부에서는 여전히 녹슬지 않은 시인의 비판적 목소리 또한 들을 수 있다. 그러니까 시인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보다 진화하여 푸근한, 그러면서도 예리한 시적 성취를 한껏 뽐내며 생의 막바지를 마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점에서 ‘아! 김광규’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노년의 김광규를 상상하는 것은 그에게는 미안한 것이지만, 사뭇 기분 좋은 일이다. 그의 정제된 성숙한 시적 성취를 이 시집은 고스란히 담아놓고 있지 않은가? 김광규란 인간은 늙었지만, 그의 시는 한층 활개 치며 그 아름다운 서정의 날개를 활짝 펼친 듯하다. 이 시집은 내게 김광규란 멋진 시인과의 악연을 단호히 끊게 만든 귀한 역할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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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02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제목만으로도 심금을 울리잖아요.

리뷰도 참 구성지고 멋지네요 :)

멜기세덱 2007-09-03 00:03   좋아요 0 | URL
ㅋㅋ, 리뷰가 구성지다?
흠흠!!!ㅋㅋㅋㅋ

마노아 2007-09-03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이 가득한 리뷰예요. 마지막 문제는 정말 안습이군요. 저는 올해 시험지 받으면 맨 뒷장까지 문제는 꼭 읽어보겠습니다(>_<)

멜기세덱 2007-09-04 00:00   좋아요 0 | URL
헉! 이번에 시험보세요? 설마 마노아님도 국어?

마노아 2007-09-04 20:49   좋아요 0 | URL
설마요. 전 역사로 봐야죠. ^^;;;
 
눈물 1 세계신화총서 6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눈물'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흔히 이런 아주 단순한 질문을 받으면 당황해한다. 당황한다기 보다는 어이없어 한다고 말해야 정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학에서도 1에 1을 더하면 왜 2가 되는지를 증명해 보이는 것은 고난도의 문제이듯이, 이런 단순한 것을 정색을 하고 물어오면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너무 단순한 질문이어서 질문 만큼이나 단순하게, "눈에서 나오는 물이지 뭐긴 뭐야!"라고 대답해 버리면 자신이 왠지 무식해지는 것 같고, 질문자의 농간에 놀아난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단순한 질문은 우리의 예상대로 그리 단순한 대답으로 해결되는 것들이 아니다. 너무나 어렵고 길고 끝이 없는, 결국은 무어라 딱히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기에, 우리는 애써 그러한 어려움들을 피하고자 암묵적으로 이러한 것들을 아예 단순화해 버렸던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는 '눈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일단 '눈물'이라는 것은 '눈에서 나오는 물"이라는 생체 현상의 하나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이것은 '눈물'의 기본적, 중심적 의미인데, 두루뭉술한 설명말고, 좀 고지식해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생리학에서 말하는 눈물의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눈물 (생리학) [tear] 눈의 바깥쪽, 위쪽에 있는 눈물샘[淚腺]에서 나오는 분비액. 눈물샘에서 분비되는 눈물은 각막표면을 광학적으로 균일하게 유지하고, 각막과 결막 표면으로부터 세포의 노폐물이나 이물을 물리적으로 세척해내며, 각막에 영양을 공급해주고, 항균작용을 하므로 눈의 광학적 특성과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정상적으로 안검(眼瞼)이 깜박 거리는 것에 따라 눈물막의 일부인 점액층을 각막과 결막의 상피표면에 도포하게 된다.

이는 아주 일차적인 '눈물'에 대한 설명이다. 학문적이고 과학적인 이러한 '눈물'의 정의에 대해 우리는 대체적으로 동의할 수 있겠지만, 결코 이것이 '눈물'의 전부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그러니까 "눈에서 흐르는 물이 눈물이지 눈물이 별 거냐" 하기에는 우리 인간에게 '눈물'이 갖는 무언가 다른 것들이 있다는 얘기다. 백과사전에서의 위와 같은 정의를 우리가 '눈물'의 완전한 설명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면 우리는 이제 국어사전으로 넘어가 보아야겠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의외로 '눈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눈-물 「명」눈알 바깥 면의 위에 있는 눈물샘에서 나오는 분비물. 늘 조금씩 나와서 눈을 축이거나 이물질을 씻어 내는데, 자극이나 감동을 받으면 더 많이 나온다.

다른 국어사전을 하나 더 보자. 두산동아에서 나온 국어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눈-물 「명」①눈알 위쪽에 있는 누선(淚腺)에서 나와 눈알을 축이는 투명한 액체. 여러 가지 자극이나 정신적인 감동에 의하여 흘러 나옴. ②'동정'이나 '인정'의 비유.

이들 국어사전에서는 생리학에서 정의하는 눈물의 의미와 더불어 정신적 자극에 의한 '눈물' 현상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국어사전의 설명들도 무엇인가 확실한 '눈물'의 정의라고 보기 어렵다. 하나의 생리학적 현상으로서의 눈물과 정신적인 감동에 의한 눈물을 우리는 조금 구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흔히 "눈물을 흘린다."고 할 때, 어떤 정신적 감동이나 자극에 의한 눈물을 의미할 때가 많다. 생리적으로 우리는 항상 눈물을 머금지만 그것을 잘 흘리지는 않는다. 눈물을 '흘릴' 때에는 무언가 다른 자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눈물'의 대체적인 의미는 거반 '흘린다'는 행위를 동반해야 할 때 비로소 정의된다. 그러니까 생리학적 의미로서의 '눈물'의 정의와는 몇 걸음의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눈물'은 흔히 비유적 의미로도 자주 사용된다. "눈물 없이는 못 볼 장면"이라거나, "눈물 흘릴 줄을 번연히 알면서 내 어이 찾아왔던고." 등에서 처럼 '눈물'은 동정이나 슬픔을 의미한다. 이러한 동정이나 슬픔은 문학이라는 매개를 통한 곧잘 사용되곤 한다. '눈물'은 문학을 통해 보다 고차원적인 의미를 취득하게 된다. 그 일례로 다음과 같은 시를 보자.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위의 시는 김현승 시인의 「눈물」로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도 실려있어, 한번쯤 배웠을 만한 것이다. 여기서의 '눈물'은 동정이나 슬픔의 차원을 넘어 숭고해 보이기까지 하는 의미를 취득하기도 한다. 이것 말고도 눈물에 대한 언급들은 다양한 문학작품에서, 그리고 예술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대중문화에서도 '눈물'은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데,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이 '눈물'을 빼놓고는 극 진행 자체가 어려운 것들도 태반이다. 영화에서도 '눈물'은 하나의 장르를 형성했을 정도이다. 예전에 '신파극'이라는 것도 엄연히 '눈물'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눈물'은 상업화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서 눈물은 각계각소에 내재해 있는 거대한 어떤 것이 되었다는 말이다.

'눈물'은 그 자체로 생리적 현상과 더불어 정신적 현상이 되었고, 나아가 문학적, 예술적, 사회적, 상업적 의미들을 취득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총체적 의미의 '눈물'을 간단히 정의하기에는 너무나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눈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무엇이라 대답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눈물'에 대한 성찰도 이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여기 이 한 편의 현대화된 고대의 설화는 그러한 '눈물'의 뛰어난 성찰의 하나로 기록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것은 바로 중국 고대의 <맹강녀 설화>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장편소설 『눈물』이다.

이 소설의 저자 쑤퉁은 "중국 진나라 때에, 만리장성의 역사(役事)에 얽힌 비극적인 전설의 여주인공"인 맹강녀에 얽힌 전설, 곧 "진시황의 장성 축조에 징발(徵發)된 남편의 겨울옷을 가지고 찾아갔으나, 남편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성벽에 쓰러져 우니, 갑자기 성벽이 무너지면서 남편의 유골이 나타났다고 한다."는 설화를 각색했다. 여기에 저자는 제목을 '눈물'로 정했다. 이는 이 소설의 모태가 된 <맹강녀 설화>가 남편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에 대한 비극적 이야기라는 것과는 달리, 그 중심에 눈물이라는 소재를 부각함으로써, '눈물'에 담긴 다양한 의미들을 현대적으로 성찰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쑤퉁은 주인공 '맹강녀'를 '비누(碧奴)'라는 '눈물인간'으로 변신시킨다.

"비누(碧奴)는 도촌에서 태어났다. 꽃처럼 어여쁘고 맑고 단아한 그녀는 눈동자가 칠흑처럼 새까맣고 커다래서 눈물을 달고 살 팔자를 타고난 듯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머리가 길고 숱이 많았다. 비누의 어머니는 살아생전 딸의 머리를 쓸어올려 빗겨주며 눈물을 머리카락 속에 감추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어머니가 일찍 죽는 바람에 비법이 완전히 전수되지 않았다."(31쪽)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비누(碧奴)'라는 이름은 '눈물'과 필연적으로 관계된다. '碧(푸를 벽)'은 "눈동자가 칠흑처럼 새까맣고 커다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눈물을 달고 살 팔자"를 의미했다. 결국 '비누'는 눈물인간이 된다. 그런데 인용문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왜 "눈물을 머리카락 속에 감추"어야 하냐는 것이다. 그것을 시시콜콜 이야기하기에는 작가 쑤퉁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다. 확실한 건 이 소설에서 '눈물'은 절대적으로 금지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눈물'에 대한 금지를 보다 상징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이는 '눈물'이 생리적이면서도 정신적 작용인 것에 반해, 이에 대한 권력의 제재는 '눈물'이 가지는 인간으로서의 총체적 가치와 권리에 대한 착취와 폭력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전에 있었던 비극"에 의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행위인 '눈물' 흘리는 것에 대한 금지는 인간에 대한 억압의 기제로서도 작용하지만, 더불어 인간 사회의 물신화, 기계화, 도구화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는 작가가 이 설화를 각색하면서 의도했던 하나의 주제의식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러니까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인간에 대한 억압'과 '폭력'의 사회, 나아가 비윤리화 비도덕화 되는 현 사회와 문화, 인간의 물신화와 도구화에 대한 우려 등이 이 '눈물'에 대한 성찰 속에 형상화 되고 있는 것이다.

눈물에 대한 금지는 애당초 '황족 간의 암투'에 비롯한다는 사실이 말해 주듯이, 이는 지배층에 의한 피지배층에 대한 억압과 폭력, 그리고 착취로 읽혀진다. 이는 그 안에서의 피지배층의 의식변화로도 이어지는 것이다. 피지배층의 의식변화는 '눈물이 금지된' 시대에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폭압과 전횡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적 사실로서 진시황의 만리장성 축조가 그 원인이 된다. 나라의 온갖 남자들이란 남자들은 죄다 끌고가 만리장성의 축조에 받쳐진다. 이러한 현실은 '금지된 눈물'과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모순을 만들어 내고, 급기야 인간 사회는 냉혹해지고 비인간화 되어진다. 아이를 때리면서 울지 못하게 하면, 그 아이는 정신병원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결국 이 소설에서의 현실 인식은 그러한 미쳐버린 사회에 대한 형상화이자 비판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주인공 '비누'는 앞에서의 인용문에서도 보았듯이, 이 미쳐버린 사회에서 볼 때, 반쯤 모자라고 떨어진 인간으로 나타난다. 급기야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이는 역설적으로 '비누'가 지극히 정상임을 의미하는데, 정신병원의 환자들 사이에서는 다만 의사와 간호사가 미쳐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비누'는 '눈물이 금지된' 이 사회에서 눈물을 제대로 감추지 못하는 사회의 미숙아다. 그것과 더불어 그녀는 "고아인 완치량(万豈梁)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그 둘은 모두 이 소설 안에서는 모자란 인간들이다. 사회에서 소외받고 외면당하면서 그들은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 아끼고 사랑했다. 어떻게 보면 눈물을 감출지 모르는 '비누'는 하나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을 나타낸다. 아이처럼 말이다. 어른들은 눈물을 감출 수 있는 가식이 있지만, 아이들은 울고 싶은 땐 울어야 하는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순수함이 모자람으로 인식되는 사회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라도 이 소설에 형성된 상황 자체는 하나의 현대적 사회에 대한 상징이라고 보아도 족하다.

이야기는 완치량이 사라지면서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만리장성 축조를 위해 어느날 갑자기 끌려간 것이다. 이렇다할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말이다. 완차량 뿐만이 아니라, 나라의 대부분의 남자들은 모두다 끌려가고 만다. 그러나 남편들이 끌려간 아내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처에서 '비누'와는 확연히 다르게 나타난다. '비누'는 남편을 위해 겨울옷을 마련해서 만리길의 북쪽으로 가려고 하지만, 다른 여자들은 먹고 살기 바빠, 끌려간 남편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대비에서 우리는 '비누'의 편을 들어줄 수는 있겠지만, 다른 여자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들의 말에 수긍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현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비누'의 남편에 대한 그 헌신적 사랑이 돋보이게 되는 것이다.

사회는 점점 미쳐버린다. 급기야 인간은 도구화되고 기계화된다. 왜일까? 그것은 '눈물을 금지' 했을 때부터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눈물'이라는 인간의 육체적 기본 행위에 대한 억압과 더불어 그것은 정신적, 문화적, 사회적 억압이었기에, 인간은 그 모든 것을 제지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지배층에 의한 피지배층의 도구화로 이어진다. 사회는 점점 각박해지고 인간은 더이상 인간이기 힘들어진 세상, 그 세상을 작가는 '눈물'을 빼앗긴 세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글은 그 물신화 도구화 현상의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행여 누가 됐든 우리를 사서 쟁기라도 끌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지. 큰 가축이란 바로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에요. 하지만 산지 여자를 사려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 큰 가축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못 생겨 싫다 하고, 멍청하다고 마다하니 결국 아무도 우리를 찾지 않아 여기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라우."(111~2쪽)

또한 인간성의 비윤리화와 비상식화, 비도덕화를 보여주는 대목도 있다. '비누'를 본 아이가 "저기 인간짐승 하나가 또 와요! 돌멩이 하나 주세요!" 하면서 '비누'에게 돌을 던진다. '비누'는 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그렇게 높은 곳에서 잘못하다 떨어지면 크게 다칠 테니 조심"하라며 아이를 걱정한다. 그런데 아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총에 맞고도 욕을 하기는커녕 내가 떨어져 다칠까봐 걱정을 하고 난리예요! 저 여자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해요!"(105쪽)

사회는 이렇게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그 사회 속에서 '비누'는 "머리가 어떻게 된" 인간일 수 밖에 없다. 작품 속에서 이 '비누'에 대한 이 사회의 인식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이제야 당신이 누군지 알겠네! 도촌에 웬 정신 나간 여자가 상사병에 걸려서 청개구리 한 마리 데리고 남편 찾으러 떠났다너니 바로 당신이군요!"(108쪽)

남편을 찾아 그 먼길을 떠난 '비누'는 그 사회에서는 정신나간 여자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비누'는 이런 인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내가 내 남편에게 입힐 겨울옷을 가져가는데, 상사병은 무슨 얼어죽을 상사병이야? 난 그런 병에 걸린 적 없어. 세상에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나가 노역을 하며 겨울을 보낼 남편 걱정을 안 할 여자가 어디 있어? 있다면 그게 미친년이지!"(108~9쪽)

이러한 차이 가운데, 우리는 비누의 말과 위의 다른 여자들의 말 사이에 다른 차이를 감지할 수도 있다. 곧 표면적 어조에서 여자들의 말은 점잖은 반면, 비누의 말은 단호하고 격하다. 이것은 이 사회의 잘못된 인식에 대한 순수함의 강변으로도 읽히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결국 이런 비누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비누는 "이 절망으로 가득 찬 인간시장에서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일까? 비누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녀의 눈물이 '특별한 눈물'이 된 것은. 이러한 '비누'에게 다가오는 것은 "발가락의 피 맺힌 물집 사이로 계곡물이 흐르듯 눈물이 흐르"는 것이고 "손바닥도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는 것 뿐인 것이다. "희망을 품고 있는" 단 한사람 '비누'는 그렇게 '눈물인간'이 되가는 것이다.

세상은 '눈물인간'에게 어떠한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눈물이란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말처럼 잘 뛰는 사람들을 위해 다리를 내리고, 새처럼 노래를 잘하는 사람을 위해 다리를 내리고, 일 년 내내 웃는 얼굴의 사람을 위해 다리를 내린 그들이 눈물을 를리는 사람에게는 다리를 내리지 않"(163쪽)는다. 이는 인간이 기계화된 사회에 대한 실날한 비판으로 읽히지 않는가? 눈물을 흘리는 인간의 순수함은 이 세상에서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비누라는 인물을 통해 사회의 억압과 인간의 물신화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순수한 사랑과 눈물은 부족하고 모자란 인간일 수 밖에 없게 한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비누'와 '완치량'이다. '비누'는 금지된 눈물을 '감추지 못 하는'는 어리석고 모자란 인물로 그려진다. 그에 반해 '비누'를 모자라다고 인식하는 다른 인간들은 "눈물을 감추는 방법에" 능숙한 사람들이다. 이는 현대사회와 물질문명, 그리고 자본화 된 사회 속에 완벽히 적응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은 인간의 물신화를 야기하고  순수함을 잃어버린 인간 사회의 비판으로 이 소설을 읽어볼 수 있지는 않겠는가? 적어도 작가가 이 소설의 제목을 '눈물'이라고 한 것은 '눈물'이 가지는 다양한 인간적 문맥들, 즉 인간의 생리적, 정신적, 문화적 전반에 대한 다양한 기본적인 권리와 욕구들이 어떻게 억압되고 그것이 사회를 어떻게 망쳐놓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닐까?

재밌는 것은 황제의 죽음을 두고 '비누'의 다음과 같은 생각이다. "그녀는 자신이 황제를 진쑤의 모습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작은 눈, 생쥐 수염, 손목에 새겨진 도적이라는 두 글자". 황제의 죽음을 도적이었던 진쑤의 죽음과 "나란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닌 것이다. "손목에 황제라는 두 글자가 새겨 있을까?"하는 그 의문에서 서술자는 "그녀는 평생 알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황제'와 '도적'이 동의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 이 기나긴 리뷰를 여기서 불현듯 마감하기로 하자. 이야기의 줄기야 다들 짐작하고 있지만, 작가가 '눈물'을 보는 인식은 대개 이런 쪽으로 읽어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 것이다. 그것이야 어쨌건 간에, 우리 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눈물'을 잃어버린, 어쩌면 금지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 소설이 고대의 전설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이보다 리얼한 오늘날의 현실 인식을 찾아보기도 어렵지 않을까? 오늘날 '눈물'에 대한 인식과 다음과 같은 '사내아이들'의 입을 빌린 소설의 진술은 얼마나 다르겠는가? 나는 "다르지 않다."에 걸 수 밖에 없겠다.

"빗물이야 논밭을 비옥하게 하고, 강물은 사람을 이롭게 하고, 도랑물은 들풀을 자라게 하고, 연못의 물은 물고기를 잘 자라게 한다지만 사람의 눈물은 대체 어디에 쓰느냐 이 말이야. 세상에서 제일 값어치 없는 게 바로 눈물이라고!"(5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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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8-27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도 여전히 새벽에 글을 쓰시는군요..ㅎㅎ

멜기세덱 2007-08-27 01:45   좋아요 0 | URL
오늘까지 써야하는 거라서요...부랴부랴....아 써놓긴 했는데,,,완전 뒤범벅이에요....ㅋㅋ

짱꿀라 2007-08-27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새롭게 다가 오는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프레이야 2007-08-27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의억압, 인간의 물신화, 눈물이 막혀버린 세상..
뭐든 제대로 흘러나와야 바람직하다 생각해요. 554쪽 글귀는 반어법이라 믿어요^^
성실한 리뷰 오랜만에 읽었습니다. 감사^^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낱말편 2
김경원.김철호 지음, 최진혁 그림 / 유토피아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대학 입시에서 본격적으로 논술 평가가 도입되고 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우리나라 교육정책, 특히 대학 입시 정책은 정책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들쑥날쑥 날림 정책이다. 대학 입시에서 논술 평가를 반영하겠다는 논의는 전부터 있어 왔지만, 이번 입시부터는 본격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대학 입시에 목맨 사람들은 또 난리다. 고3들은 논술학원까지 다니느라 난리고,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학원에서 논술을 배운다고 난리다. 이 난리의 중심에는 학부모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야 어쩌겠는가? 날림 정책으로 인해 이리 날리고 저리 날릴 뿐이다. 학부모들은 논술에 좋다는 학원이니, 과외니 찾기 여념없다. 그도 부족해서 논술에 좋다고 나오는 책들은 죄다들 꿰고 있다. 고3들은 물론이거니와, 중학생, 심지어 멋 모르고 놀아도 될 초등학생들까지 그들 부모들의 열화와 같은 논술 열기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니, 이 아니 불쌍한가?

최근에 글쓰기 관련 도서들이 붐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이런 경향을 교묘히 반영한다. 논술에 가장 기본은 '글쓰기'겠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기본적인 것이어서 대학 입시에서의 논술 평가에는 그다지 실효를 주지는 못 한다. 그러나 이 기본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은 우리나라 국어교육의 현실이니, 이 맹점을 출판사들이 간파하지 못했을 리 만무하다. 게대가 무슨 논술 특효약처럼 선전을 해대니 이런 시류와 더불어 잘 팔릴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글쓰기 관련 도서들과 함께 '국어학' 관련 도서들도 이 시류에 편승하고 있다. 대부분이 문법, 그 중에서도 맞춤법 등의 어문규정과 어휘, 문장론 등을 다루는 그야말로 문법책이다. 이것들 또한 '글쓰기'에 있어서는 기본적인 사항이겠다. 그러나 이것들의 홍보전략 또한 그 기본됨의 불과함을 넘어 무슨 논술의 지름길인냥 한다는 데에 문제가 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런 문법책들이 이른바 대한민국의 대표 '국어책'이란 이름을 내걸고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어느 국어책이 달랑 '문법' 만을 다룬단 말인가? 말하자면, 이들 '국어책'들은 다분히 사기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기성을 가장 많이 내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이하 『국밥』)가 아닐까 한다. 정말로 대한민국에서 '국어 실력'만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다. 대한민국 국어 선생도 '국어 실력'이 있어 밥 먹고 산다기에는 좀 어폐가 있어 보인다. 그 선생들이 다분히 '국어 실력'으로 밥 먹고 사는 것이었다면, 애초에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는 어렵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시류에 편승하는 교묘함과 아울러 제목의 이 다분한 사기성은 열 달 만에 나온 두 번째 책 『국밥 - 낱말편2』에 이런 띠지를 하나 달게 했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국어책"이는 자랑이 보락색 띠지에 세로로 걸려있다. 앞서도 말했거니와 이 책이 엄밀히 '국어책'은 아니기에 이 자랑 또한 거짓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아울러 이 책의 이런 상업적 전략이 얼마나 성공했고, 논술과 글쓰기에 대한 관심과 열기에 찬 학부모, 학생들이 얼마나 우롱당했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의 이런 사기성과 거짓말이 애당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올해 초에 이 책 첫 권을 사보게 된 것은, 과연 얼마나 잘 써놓았기에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고 떠벌리고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호기심을 씁쓸함으로 마감했지만, 뭔가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다.(『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 - 낱말편1』리뷰 참조 http://blog.aladin.co.kr/criticahn/1048754) 그 가능성은 '뉘앙스 사전'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어에 대한 연구는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미치지 못했기에 이렇다할 만한 사전도 변변치 않다. 거기에 '뉘앙스 사전'에 대한 기대는 가소로운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은 그 기대에 한 줄기 빛을 주는 의외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두 번째 책을 나오자마자 사들고 읽었던 것이다.

이 책의 상업적 전략에 대한 허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의외의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기에 나는 과감히 별 4개를 주었었고 이번 책에서도 예의 별 4개를 선뜻 주고 있다. 이 책이 분명하게 '뉘앙스 사전'을 표방했더라면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리기는 힘들었겠으나, 나에게 별 5개를 받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나한테 별 5개 받자고 출판사가 '뉘앙스 사전'으로 제목을 바꿀 것은 만무할 것이다. 하여간에 이 책은 '국어책'이라고 보기에는 협소하고, "밥 먹여준다"는 뻥은 너무 지나치더라도, 그 담고 있는 내용인즉 한국어에 있어 아주 귀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시다'와 '들이켜다'의 뉘앙스는 사뭇 다르다. '들이켜다'의 어감이 '마시다'보다 급하고 강하다. 대부분의 언중들은 이 미묘한 차이를 자연적으로 감지하여 무의식적으로 구분해 사용하고 있지만, 간혹 이 구분이 모호해지기도 한다. 이런 뉘앙스 사전이 필요한 부분이 되겠다. 미묘한 말의 차이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은 보다 명확하고 효과적인 의미 전달을 가져오게 한다. 이것은 곧 우리의 언어생활은 보다 명쾌하고 풍요롭게 하는 첩경이 된다. '두렵다'와 '무섭다'의 구분도 자못 모호해지고 있는 것이 언중의 현실이다. 이 둘의 의미차이는 대단히 크다. '두렵다'가 "공포의 원인이 내재"해 있는 것이라면 '무섭다'는 그 원인이 "외부의 사물"에 있다. 이도저도 아니고 다만 '무섭다'로 통일하는 것은 언어 안에 담긴 인간의 사고작용을 무시하는 것이다. 즉 현실의 문제에 대한 그 원인에 대한 사고의 판단이 내포된 의미 자체가 무시되고 획일화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를 궁핍하게 만들고 만다.

'좇다'와 '쫓다'의 심각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결같이 '쫓다'를 '좇는다'. '좇다'는 어떤 것을 "추구하거나 따르는 일"이고, '쫓다'는 잘 알듯이 무엇을 "몰아내거나 추적하는 일"을 말한다. 이 심각한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발음의 유사에 천착해 우리는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 무분별함을 줄여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뉘앙스 사전'인 것이다.

이런 '뉘앙스 사전'으로써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작고 아담한 사이즈의 이 책은 지금까지 2권이 나왔지만, 그 두 권을 통들어도 다루고 있는 낱말이 그리 많지 못하다. 이 점은 사전으로서의 기대에 못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뉘앙스 사전'으로서 쉽고 간결한 설명과 다양한 삽화와 깔끔한 정리, 그리고 재밌게 풀어볼 수 있는 문제까지, 말의 '뉘앙스'를 익히고 연습하기에 아주 유효적절하다. 그래서 이 책이 좀 큼직한, 그야말로 '사전'이라고 부르기에 족한 책으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한 것이기도 하다. 현재 이 책까지 두 권이 나와 있으나, 10권까지는 나와야 좋은 '뉘앙스 사전'이 마련될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

이 책이 왜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면서 '국어책'을 표방했는지는 저자 중 한 명인 김철호의 글을 보고 알게 되었다. "『국밥』은 스무 권까지 쓰는 게 목표다."라는 그의 얘기에서 이 책의 원대한 구상이 '뉘앙스 사전'에 있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국밥』이 두 권까지 나오면서 '낱말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듯이, 앞으로 '문장편', '맞춤법', '말소리' 등의 시리즈로 계속 출간될 것이라 예상이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총 20권을 만들어서 제대로 된 '문법책'을 내겠다는 심산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좀 아쉽다. 이 책이 애당초 『국밥』이 아니었으면 좋았겠다 싶기도 하다. 『국밥』인 이상 앞으로 제대로 된 '뉘앙스 사전'을 가질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도 이제 마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20권으로 된 '문법책' 만들겠다는 저자의 가상함에 다소 호기심이 생기기도 한다. 지금까지 '국어책'이라면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문법책'들이 다들 거기서 거기였던데 반해, 20권까지 찍어내면서 얼마나 제대로 된 '문법책' 만들 수 있을지 좀 의심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쨌든 제대로만 만든다면 20권짜리 '문법책'도 나름 의미가 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저자들이 좀 생각을 바꿔보는 것이 좋겠다 싶다. 지금까지 해온 작업들이 너무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권으로는 미미하기에 역량이 허락된다면 이 작업을 꾸준히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쉬움 남으면서 다음편이 아직은 '낱말편3'이었으면 하는 바람가지면서 리뷰를 마친다.

 

* 저자들이 뒷부분으로 가면서 좀 꼼꼼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오자나 비문법적 표현이 있어 여기에 적어둔다. 앞부분은 내가 대강대강 빠르게 읽어서 이런 것들을 세밀히 찾아보지는 않았다. 뒷부분은 읽다가 확연히 눈에 띄는 것들이어서 이 책을 읽는 뒤의 독자제현들께 알려드리고자 한다.

296쪽의 예문 중에 "다음 신호등에서 좌회선 차선으로 붙어."에서 '좌회선'은 '좌회전'의 오자로 보인다.

312쪽 두 번째 단락 세 번째 줄 중간에 "발음이 비슷하면서 느낌이 훨씬 강한"에서 '발음'은 '의미'로 바꿔야 한다. '틀리다'와 '다르다'는 '발음'이 비슷한 것이 아니라 '의미'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책 뒤 저자들의 말 중 <김철호가 김철호를 말한다>의 첫째쪽 밑에서 7번째 줄의 "한국어에 대한 관심을 한층 깊여주기도 했다."에서 '깊여주다'라는 말은 비문이다. 저자는 "깊게 해 주다"는 의미로 "깊여(이어)주다"를 쓴 듯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동을 쓰지 않는다. 이 문장은 "한국어에 대한 관심을 한층 깊게 해 줬다."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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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8-24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어실력이 밥을 안 먹여주죠. 크흑... 슬퍼요!

멜기세덱 2007-08-24 09:51   좋아요 0 | URL
그것이 그닥 슬픈 일은 아닌거 같아요.ㅎㅎ 말 잘하면 좋을 때가 많으니깐, 어데가서도 국밥 한그릇을 얻어먹을 수 있겠죠...ㅎㅎㅎ
그러면 또 밥 먹여 주는 게 되네....ㅎㅎ 크흑...슬퍼요!

비로그인 2007-08-24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리뷰 ^^/

멜기세덱 2007-08-24 09:56   좋아요 0 | URL
아, 좋은 사람 ^^/

나무하나 2007-10-11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한 저의 생각과 비슷하군요^^반가워라!
 
무례한 기독교 - 다원주의 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시민교양
리처드 마우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한국의 기독교는 코너에 몰렸다. 언론에 의해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대형교회들의 비리가 폭로된 데다가, 아프간에서의 피랍사건까지, 이른바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한국 기독교는 현재 비난의 ‘윤간(輪姦)’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판을 넘어 비난으로 향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비난이라는 행위가 항상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비난의 당위가 인정될 때, 우리는 충분히 비난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최근 한국 기독교에 대한, 정확히 말하자면 주류 한국 기독교 지도층에 대한 비난은 얼핏 그 당위가 인정되는 상황으로 보인다. 어디까지는 감내해야할 것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터넷 상에서 많은 네티즌들(엄밀히 그들을 네티즌, 즉 인터넷 상의 시민이라고 부르기 민망하기조차 한)에 의해 무자비한 폭력적 비난의 세례를 받고 있는 것을 볼 때는 좀 지나치다 싶기도 하다. 비판과 비난을 넘어, 앞서 표현한바 ‘윤간’을 당하고 있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하는 소리다.

  우리 사회에서 ‘윤간’은 어떤 경우에라도 긍정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 윤간의 피해자에 대해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동정되어진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난의 현상들에서 이런 ‘윤간’적 막심(莫甚)함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동정적 목소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왜 그럴까? 최근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들이 그 거대한 내막을 들어낸 것도 있겠지만, 이는 길고도 오랜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의 잘못들이 한국 사회 일반에 뿌리 깊게 각인된 것에서 기인하는 바 크다.

  현대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 복음주의의 산실인 미국의 풀러 신학교 총장인 리처드 마우의 저서 『Uncommon Decency』(InterVarsity Press, 1992.)가 최근 번역되어 『무례한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는 그간의 한국 기독교의 문제를 여실히 인식한 산물이라고 하겠다. 한국 교회가 이 사회에서 그간 부단히도 ‘무례’했다는 인식이 이 책의 번역을 촉진한 것은 아닐까? 고려신학대학원 신원하 교수는 추천사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현재 한국 교회에는 마우가 요구하는 기독교적 교양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왜 ‘요구’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그와는 조금 다른 맥락 가운데에 적용해 볼 수도 있으리라. 변하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의 한국 기독교가 얼마나 이 사회에 대해 '무례'했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무례함을 기독교 일반으로 싸잡아 이야기 하지만, 그 중심에는 ‘개신교(改新敎)’가 존재한다. 사람들이 무례하게 느끼는 것은, 기독교로 대표되는 천주교와 개신교 중에서 개신교가 한 역할이 훨씬 크다는 소리다. 그런 점에서 개신교의 발자취를 되살려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왜 한국 개신교가 그렇게 무례했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 기독교가 전해진 것은 천주교에 의해서였다. 잘 알다시피 천주교에 대한 극심한 박해로 인해 잠시 쇠퇴하다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이번엔 개신교가 침투하기 시작한다. 이 침투의 대다수는 미국 선교사들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들은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는데, 당시 국제사회의 힘의 논리가 작용하게 되면서 이전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 같은 것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이는 개신교가 급속히 퍼질 수 있었던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다. 그것과 함께 천주교와는 다른, 아니 여타의 종교와는 다른 수법이 개신교에는 있었는데, 그것은 이 개신교가 “찾아가는 종교”였다는 점이다. 천주교의 성당과 불교의 사찰과는 달리 개신교의 교회당은 산골짝 마을 곳곳까지 찾아간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빨간불의 십자가는 이 “찾아가는 종교”로서의 개신교의 신(新)포교전략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개신교의 전략은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급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보편 종교로서의 이러한 포교 전략을 탓할 바는 아니지만, 이는 ‘기독교의 복음’과 함께 역설적이지만 ‘종교적 무례함’이라는 두 양상으로 찾아왔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찾아가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그 모토와 함께 세속화라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다. 종교의 세속화는 질적 성장보다는 양적 성장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매우 상업적이고 기업적인 행각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밑도 끝도 없는 “안 믿으면 지옥불”식의 협박은 사람들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한국의 뿌리 깊은 민간 신앙의 중추자(中樞者) 무당들의 신(神) 들린 모습들까지 개신교의 종교 행태에서 보게 됨으로써 이 기독교라는 종교의 비루함에 대한 혐오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울며불며, 두 팔을 휘저어대며, 머리를 쥐어뜯고 가슴을 치는 그들의 모습에 일종에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행태들을 초심자들에게까지 강요하는 것은 지나친 것인데다가, 지하철을 타고 가는 죄 없는 어린양들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외침은 그 자체로 비호감일 따름이다.

  “찾아가는 종교”로서의 개신교의 복음주의의 목표의식은, 그 연원을 신약 성경에 두고 있다. “땅 끝까지 이러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성경 말씀에 따라 기독교는 선교를 그 절대적 사명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기독교(基督敎), 즉 그리스도교(敎)로서의 존재 목적인 것이다. 따라서 말씀은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길”의 행렬을 이루게 한다. 산과 강도 그들을 막지는 못한다. 이것을 우리는 ‘세속화(世俗化)’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는데, 세속화라는 어휘가 가지는 부정적 의미는 다소간 배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는 그 복음을 들고 세상 곳곳으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쩌면 “찾아가는 종교” 전략은 필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문제는 포교 전략적 ‘세속화’ 뿐만이 아니라, 부정적 함의로서의 ‘세속화’도 함께 일어났다는 데에 있다. “세상 만방이 주의 이름을 알게 되는 그날 세상의 종말이 오리라”고 여기는 이 포교자(布敎者)들은, 그 ‘끝날’에 자신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 확실한 관계로 잃었던 양을 다시금 찾아오는 것보다는 단지 ‘예수’란 존재가 있었다는 단순한 알림만으로 그들의 선교를 지속해 왔다. 그들이 믿건 안 믿건 크게 개의(介意)치 않았던 것이다. 이는 단지 양적 성장만을 목표로 하게 되었던 것이고,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가지는 거대한 오류의 원인자(原因子)가 된 것이다.

  이들에게 복음의 알림은 시급한 문제였을까? 이 기독교 전도자들은 너무 급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물불을 가리지 않고, 흔히들 말하는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포교전략을 구사해 왔던 것이다. 여기에 비기독교인, 즉 그들의 포교대상자에 대한 배려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리처드 마우가 최근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복음의 진리가 영향력 있게 전파되게 하자면 성도들은 타인을 향해 일반적인 정중함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닮은 정중함을 지녀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전도자들에게는 지금까지 이런 정중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 그대로 “무례한 기독교”였던 것이다.

  공자(孔子)는 이런 말을 했다. “恭而無禮則勞(공이무례즉노), 愼而無禮則諰(신이무례즉시), 勇而無禮則亂(용이무례즉란), 直而無禮則絞(직이무례즉교).” 곧,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 수고롭고, 조심하되 예가 없으면 두렵고, 용맹스럽되 예가 없으면 혼란하고, 강직하되 예가 없으면 너무 급하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 그대로 적용된다. 공손해 보이고, 조심하는 것처럼 보이고, 용감한 것처럼 보이며, 때론 강직해 보이지만, 거기에는 어떤 예의도 없었다. 그러니 괜한 헛수고만 한 것이고, 세상이 두렵게 여겨지고, 혼란스럽기만 하고, 또 너무 급한 것이 아닌가? 몇 천 년 전의 공자가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문제들에 예견하듯이 이런 일침을 놓고 있는 것이 참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기독교의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해법으로서 나는 이 책 리처드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가 충분한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리처드 마우가 이 책에서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세상과 기독교인이 공존하기 위해서, 즉 그 둘이 다른 상황가운데서 분리되지 않고 세상가운데서 하나가 되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품의와 신앙을 가지고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나아가 보다 효과적인 복음전파의 한 방식으로서 대안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에 있다. 그 적절한 해결책으로서 “기독교적 시민교양”, 즉 ‘Uncommon Decency’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원하 교수의 소개를 들어보자.




  “현대는 문화 전쟁 시대라고 할 만큼 각종 문화와 사조가 공존하면서 때로 충돌하고 부침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런 시대에서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진리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신념과 문화를 지닌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리스도인이 전해야 할 ‘무엇’(what)에 대해서보다는 ‘어떻게’(how) 전달해야 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마우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문화와 종교를 가진 자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중하고 친절하며 관용하는 태도 즉 기독교적 교양과 예절(Christian Civility)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점점 사나워지고 전투적이 되어 가는 사회에서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비일상적인 정중함”(Uncommon Decency)을 갖추고 일반 시민들을 대하고 살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결국 이는 그간의 복음주의의 대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다변화된 현대사회에서의 전략적 수정, 즉 포교의 방법론적 측면에 대한 해법인 것이다. 이러한 마우의 주장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불만적일 수도 있다. 그간의 자신들의 ‘헌신적’ 선교가 무의미한 것이 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마우는 여러 장을 할애(割愛)하면서 이러한 오해에 대해 해명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전략적 수정에 대한 주장은 일면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경청해야할 시대적 필요성과 부합한다. 21세기 세계는 변화했고, 다원화 사회가 되면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해야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는 서로 다른 것은 폭력적으로 자기화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지금은 그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재 그런 폭력적 자기화에 대한 부작용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그렇다고 기독교적 존재 목적인 복음 자체에 대한 변화를 마우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신용하 교수의 말처럼 그들의 진리를 간직한 채, 그 진리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하느냐, 즉 방법적 측면에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기독교인들에게 타당한 방법이다. 또한 그들의 포교대상인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좋은 소식임에 분명하다. 어떤 종교에 대한 혐오감은 현대를 살아가는 무신론적 인간들에게는 불행이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불교건 천주교건 개신교이건 이슬람이건, 현대인들에게 이들은 하나의 도움의 목소리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을 교화시키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이다. 어떤 종교에 대해 호감을 갖게 하는 것이 우선시될 때, 교화가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비판적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기독교적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이것은 어느 상황에서는 항상 열기를 띄기 마련이다. 그런데, 비기독교인들과는 어느 정도 대화가 되지만, 기독교인들과는 대화의 성립 자체가 불가능할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진리(=복음)가 곧 자신들의 모든 것을 합리화 해 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진리에 대한 비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타협하려 하지 않는 오만함을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 마우는 “불신자에게 배우”라고 주장한다. “주님은 때때로 이상한 교사들을 보내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에 열려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시 한 번 공자의 말을 생각하게 한다. “三人行(삼인행), 必有我師焉(필유아사언). 擇其善者而從之(댁기선자이종지), 其不善者而改之(기불선자이개지).” 곧, “세 사람이 길을 갈 때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있으니, 그 중에 선한 사람을 가려서는 그를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는 자신 속의 그런 잘못을 고쳐야 한다.”는 『論語』「述而」편의 이야기인데, 이는 마우의 조언과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즉, 누구를 막론하고 누구든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 존중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우는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무신론적 사상가 니체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당당히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고사성어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당연스러운 교훈마저도 한국의 기독교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려우니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마우의 주장이 특이한 것이 아니면서도 놀라운 것은 이런 한국 기독교의 기초적 태도의 문제를 적실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은 바로 마우가 인용한 다음과 같은 글에서의 자세다.




  “그리스도인의 과업은 [타인의] 눈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들은 그분을 볼 수 없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삶 속에서 그분을 볼 수 없다면 그분을 결코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요구되는 만큼 다른 이들과 차별성 있게 살아간다면, 그를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에는 의문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그런 의문들을 예리하게 다듬어 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의문에 대해 힌두교가 제공하는 대답이 아주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제시하게 하며, 기꺼이 듣고자 하는 이들에게 인간의 모든 의문에 대해 흡족한 대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분,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는 모범적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때에, 세상의 많은 이들로부터 칭찬받고 존경받게 될 때에, 자연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 그렇지는 않더라도, 기독교인으로서 ‘예수의 향기’를 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모범적 교양 시민으로 살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어느 사회에서건 기독교인들이 모범적일 때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칭송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많은 기독교인들이 간혹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이 사회에서 욕먹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서 볼 때, 마우의 이런 지적이 너무나도 소름끼칠 정도이기까지 하다.

  리처드 마우가 펼치는 ‘시민교양’의 논리에서 다소간 나와는 그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정당한 전쟁’론에 대한 시각이다. 그는 ‘정당한 전쟁’론을 옹호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기독교적 원리에 근거할 때 이는 타당한 처사가 아니라는 것이 내 견해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적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에서나, 그리고 성서에 입각해서나 자명한 논리인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우의 “어떤 상황에서는 시민교양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 반복하건대 그 기본적인 요건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친절과 온유함을 제쳐놓을 권리가 없다”는 언급은 우리 모두가 경청해야만 하겠다.

  마지막으로 마우는 “하나님의 인내의 시대에 공적인 존재로서 사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자질”을 언급한다. ‘융통성’을 가질 것, ‘잠정적인 입장’에 설 것, ‘겸손함’의 태도, ‘경외감’, ‘소박함’ 등이 그것이다. 이 5가지는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 그대로이다. 그런 점에서 앞서 언급한 ‘예수 그리스도적 삶의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함을 마우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마우는 ‘기독교적 시민교양’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살펴보면, 마우가 언급한 저 5가지 원칙이 얼마나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마우의 이 처방이 한국 기독교에 잘 먹혀들기 힘들어 보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마우의 이런 지적들은 한국 기독교에 적합한 ‘양약(良藥)’임에 분명하다. 그것이 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될 때에 기독교 복음주의는 보다 합리적 보수주의의 길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복음주의의 수장격인 리처드 마우의 지적을 한국 보수주의의 절대 기반인 한국 기독교가 자기 것으로 실천할 때, 한국 기독교는 존경받을 수 있고, 기독교의 존재목적을 충실히 이행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욕먹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아파한다. 그러나 먹을 욕은 먹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 한국 기독교가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 변화의 행동강령이 이 책 『무례한 기독교』에 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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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8-17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스도인의 과업은 눈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말에 큰 울림이 남네요. 최근 기독교에 대한 비난의 세례가 일말의 예의없이(?) 자행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었는데, 이 책이 문제의 올바른 해답을 제시해주는 것 같군요. 다만 멜기세덱님의 견해처럼, '정당한 전쟁'이란 허상을 찬성하는데에는 마뜩치 않지만 말이죠.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멜기세덱 2007-08-17 17:28   좋아요 0 | URL
최근 한국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초례한 한국기독교의 '예의 없음'을 지적한 것인데요. 그 점에서 있어서 리처드 마우의 기독교적 시민교양은 적절한 해법이 될 수 있겠다 싶어요. 바람결님과는 첨인 것 같네요. 반갑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Jade 2007-08-1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멜기님은 항상 리뷰를 너무 열심히 쓰셔서 읽기가 힘들어요 ㅎㅎ 그래도 항상 읽고나면 생각을 많이 한다는...멜기님, 밤새 책읽고 글만 쓰시나봐 ㅎㅎ 책 말고 연애를..ㅎㅎ

멜기세덱 2007-08-17 17:30   좋아요 0 | URL
책과 하는 연애도 영~ 시덥잖네요...ㅎㅎ 리뷰 쓰기도 일주일에 하나 쓸까 말까 하구요....ㅎㅎ 저도 말이죠, 다른 걸 해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답니다...
ㅠㅠ;;

웽스북스 2007-09-05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 리뷰(당신들의 예수)를 읽으며 이 책을 추천해드려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이 언급되서 깜짝 놀랐어요- 근데 스크롤을 내리니 리뷰까지 있네요 ㅎㅎ 기독교인들보다 비기독교인들과 대화가 더 잘된다는 말에 저도 공감을 해요- 사실 내가 너무 쿨한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게 아닌가 싶어 잠깐 이 모드 벗어났는데, 결국 본성은 어쩔 수 없는건가, 싶기도 하고요
아프간 사건을 겪으며 답답한 마음에 다시 집어든 책이었어요- 작년에 읽었을 때보다 훨씬 와닿는 부분이 더 많았고요- 초기미국 선교사 쪽에 관심이 많으신 듯하여 대학시절 은사님께서 쓰신 '초기미국 선교사 연구'라는 책을 추천해드리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절판이네요 ㅠ
멜기세덱님 내공 따라가려면 아직 먼 길인 것 같지만 차근차근 걸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HOW TO READ 성경 How To Read 시리즈
리처드 할로웨이 지음, 주원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성경, 흔히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즉 "전 세계 최고의 스테디셀러"라고들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면 여기에도 '맹점'은 있는 듯 하다. '셀러'라는 의미에서의 성경의 존재는 르네상스 시기, 즉 인쇄술이 발달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서구권에서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당대 서구지역의 지배적 종교인 기독교의 유일무이의 경전인 성경이 일반 대중(여기서는 일반 기독교도들)들에게 읽히는 책, 그럼으로써 팔리는 책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일단 '서구'라는 지역적 제한이 붙어야만 한다. 이런 기독교가 서구의 산업적 경제적, 그리고 무력적 발달과 함께 비서구 지역에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성경도 함께 그 소비 구역을 넓혀가게 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전 세계 인구의 1/3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 '스테디셀러'는 전 세계 인구 1/3에 의해 달성된 것이 된다.

이 1/3의 사람들을 가만히 놓고 보면, 대다수 서구인과 일부 아시아인이 그 대부분을 구성한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경제력이란 무기가 구비되어 있다. 따라서 인쇄술의 발달과 그 산물들을 소비할 수 있는 여건, 즉 경제력이 다른 어느 지역(비기독교인들의 지역) 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성경을 무한히 소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은 "전 세계 최고의 스테디셀러"라는 월계관은 거반 자작극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내가 책을 썼는데, 우리 가족과 친인척들과 사돈에 팔촌들이 가산을 털어 수십, 수만권을 사서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놓은 것과 매 한 가지 아니면 두 가지라는 소리다. 이 맹점을 무시하고 흔히 기독교인들은 이 "전 세계 최고의 스테디셀러"를 드리밀며 성경이 최고의 책이라고 자찬한다. 이건 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여기서 내가 성경이 '최고의 책'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성경은 '최고의 책'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스테디셀러'적 맹점이 또 다른 측면에서 '최고의 책'을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는 데에 있다. 그 다른 측면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성경이 기독교인들만의 스테디셀러로서 절대적 '경전화' 되고 있는 것이고, 이것과 밀접히 관련이 되겠지만 진정한 스테디셀러로서의 성경의 비기독교인화가 그 다른 하나이다.

성경이 기독교인들만의 소유는 아니다. 기독교인이건 비기독교인이건 간에,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 아닌가?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허락된 것일진대,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절대화해서 자신들만의 특권적 소유물로 만드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생각건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다만 글씨를 써내려갔을 뿐이라는 영감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영감을 내리실 때, 성경이 '경전'으로 떠받들라고 하시려는 의도는 거의 없을 것이 아닌가 한다. 성경이 경전화되고 의식화(儀式化) 될 때, 읽는 책으로써의 활용도는 떨어질 뿐이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에게 성경이 교회갈 때에나 사용되어지고 있는 점에서 매우 잘 드러난다. 나는 이것이 일부 기독교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 오히려 성경을 매일같이 읽는 기독교인들이 그 일부에 해당될 것이라 생각한다. 경솔한 판단일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성경의 무오류를 주장하는 복음주의도 여기에 한 몫을 충분히 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영감에 따라 기록된 이 성경은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인데, 이는 달리 하면 함부로 해석하는 행위를 죄악시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는 성도들에게 성경 읽기를 적극 권장(달리 표현하면 강요) 하고 있지만, 적극적인 '해석'은 암묵적으로 금하고 았다. 성경에 숨겨진 단 하나의 진리, 곧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고 읽고, 또 읽고, 심지어 외울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이 진리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주일 예배의 설교 시간에 목사의 말씀인 이 진리를 해석해 전해주는 것이다. 그 결과 일반 기독교 신자들에게 성경은 절대화, '외경화'되고, 일부 목회자들 및 교회지도자 들에게는 성경 해석의 '특권'이 부여되는 것이다. 이 특권은 배타적이어서 비기독교인들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일반 성도들의 나름의 '해석'까지도 배척될 뿐이다.

르네상스 이후 성경에 대해 일반 대중들의 접근권을 허용했다면, 오늘날에는 그 해석의 권리를 허용해야 한다. 나아가 두번째 측면, 곧 성경의 비기독교인화의 가능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 가능성의 추구란 현재의 1/3에게 제한된 스테디셀러로서의 성경이 나머지 2/3에게도 스테디셀러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하는 것이다. 이는 우선 앞선 말한 성경의 '절대화'와 '외경화'의 배타성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달리 말하면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성경의 '문학'화로 이어진다. 즉 2가지의 필수적 과정이 동시에 해결되야 하는데, 정리하면 성경의 '절대화'로부터의 해방과 '문학화'로서의 지향이다.

이는 성경이 진정한 '전 세계 최고의 스테디셀러'가 되게 하는 길이고, 성경이 진정 오늘날 최고의 책이 되게 하는 길이다. 나아가 비기독교인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최선의 선교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여기에 이러한 해법으로서의 유효적절한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 있으니 바로 『HOW TO READ 성경』이다. 이 책은 'HOW TO READ' 시리즈로, "세계적 석학들의 안내를 받으며 사상가들의 저작 중 핵심적인 부분을 직접 읽는 방식으로 구성"한 "우리시대 교양인을 위한 고품격 마스터클래스" 기획의 하나이다. 즉, 이 책의 기획의도는 비기독교인에게 오히려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기독교인들에게도 유용하겠지만, 그러한 구분에 관계없이, 어떻게 하면 성경을 "제대로 읽을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 리처드 할로웨이가 말하는 성경 읽기의 유효적절한 방법은 바로 성경을 통해 "현재 삶의 조건을 반영하고 해석"해 내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성경을 읽는 가장 나은 길"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 말은 바로 해석의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개인에게 있어서 성경이 가질 수 있는 의미는 바로 그 개개인의 "삶의 조건을 반영하고 해석"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오늘날 '문학'을 대하는 자세와 궁극적으로 동일한 방법이다. 그러니까 저자의 말을 절반쯤 곡해하면 성경의 '문학적 읽기'를 말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성경은 자타가 공인하는 뛰어난 문학성을 내포하고 있다. 저자의 표현을 따오면 "내부에 이미 강력한 힘이 깃든 거룩한 책"이 성경이라고 하는데, 그 강력한 힘의 원천은 바로 이 뛰어난 문학성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시작, 약속, 연관, 유배, 고통, 구원자, 도전, 비유, 사도, 종말"이란 10가지의 테마를 선정하여 성경을 읽는 모범적 포석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테마들은 하나의 흥미만점의 대하장편소설의 기본 테마들의 모범적 구성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흥미로움에서 시작하여 곳곳에 내포된 다양한 의미들을 오늘날의 상황과 여건 가운데서 시의적절하게 해석해 낸다면, 성경이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최고의 책, 최고의 문학, 최고의 고전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읽기 방법들을 살짝 하나만 엿보도록 하자. 저자는 신명기를 읽으면서 '연관, 종교적 사회와 윤리'라는 테마를 뽑아낸다. 거기에서 오늘날 "성경은 일종의 연대성을 명령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더 큰 안목과 상상력으로 마음을 써야 한다"는 의미를 추출한다. 나아가 "성경이 묘사하는 하느님은 정치적으로 통화주의보다는 분배주의를 지지하는 분임이 뚜렷하다. 하느님은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닌 것 같지만, 무한경쟁보다는 사회적 상호의존성을 늘리려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띠셨음도 분명하다."라는 위험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저자의 성경 읽기 방법은 얼마나 흥미로운가? 성경이 오늘날 그 자체가 가지는 뛰어난 이야기성과 흥미성을 모두 내어 버리고 다만 딱딱한 절대 '경전'의 어두운 세계로 치닫고 있는 것은 기독교인에게나 비기독교인에게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이 그 질 낮은 문학으로 취급받는 것을 혐오하는 이들이 분명 있을 수 있겠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문학의 효과적 기법인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구약의 다양한 장들에서 웅장한 역사 이야기가, 아름답고 감미로운 시적 언어가, 고통과 번민의 언어가, 슬픔과 분노의 언어가 쓰이고 있음도 주지할 필요가 있겠다. 오늘날 서양의 모든 예술의 모태에는 성경이 있음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런데 그 성경의 '문학성'을 배제하는 것은 성경을 죽이는 행위, 곧 불경이 되는 것은 아닐까?

기독교인에게나 비기도교인에게나 성경은 최고의 책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는 그것을 버릴 수 없다. 그러기에는 성경이 가지고 있는 그 "강력한 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 높은 곳에서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구원의 사역을 이룰 수 있었던 것처럼, 성경도 이제는 '문학'으로 낮아져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 책 『HOW TO READ 성경』에서 이러한 문학적 읽기가 충분히 의미있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성경의 가진 그 강력한 힘을 전달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인류에게 '말씀'을 주셨다. 이 '말씀'은 곧 '문학'이다. 인류 최고의 문학 작품으로 성경은 불려져야 한다.

(이 책의 아쉬움이 몇 가지 있다. 참고문헌이 제시되어 있는데 좀 부실하다는 점, 대부분이 외국서적이라는 점, 우리말 번역본의 정보가 전무하다는 점 등이다. 이는 번역자나 편집자들이 좀 보완해 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하나님'과 '하느님'의 용어 사용 문제다. 개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점에서 개신교인들이 읽는데에 거슬릴 수 있을 법도 하다. 그리고 인용된 성경이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한글성경본이고, 그에 따른 각 성서의 제목이 조금씩 달라 약간 읽는데 더딘 감을 주었다. 뭐 그거야 내가 감수할 사항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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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1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잘 다녀오셨나요 멜기님? ^^

그나저나 재도전! 혹시...
헌법의 풍경, 면장선거!!!
-.-;;;

멜기세덱 2007-08-12 00:05   좋아요 0 | URL
오늘이요? 하루 종일 자느라...못 갔어요...흐미...ㅎㅎ

그나저나, 또 틀리셨어요...ㅋㅋㅋ
체셔님에게는 이제 도전권이 없으세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