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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황석영을 읽는다는 것
얼마 전 황석영은 <무릎팍 도사>란 프로그램에 출현한 적이 있다. 그가 나왔다고 해서 그 프로그램을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해 보았다(정확히 이 행위가 불법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아주 낮은 가격을 지불하고 다운로드 받았다). 60을 훌쩍 넘긴 나이의 황석영은 한국 문단의 원로답지 않게 젊은이 못지않은 패기와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사실 이전에 출현했던 이외수와는 격이 한층 높았다고 생각된다. 이외수와 황석영을 놓고 격 자체를 따지는 것은 나에게 있어 좀 어색하긴 하다. 같은 기준을 놓고 그 격을 따져야 하지만, 기인 이외수와 소설가 황석영이란 두 대상을 가르는 기준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간 황석영이 <무릎팍 도사>에 출현한 것 자체로 내게는 다소 흥미롭고 관심 가는 일이었고, 그 흥미와 관심을 여하히 채울 수 있어서 기뻤다.
다 늙어서 애들처럼 왜 이런 프로그램에 출현했을까 황석영의 주변 여럿이 의아해하고 걱정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문단의 원로가 망신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주변의 노파심이었겠지만, 또 하나의 이외수를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노심초사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외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그는 아무래도 황석영과는 많이 다른 영역에서 기인 소설가로 존재하니까 말이다.
각종 TV 연예 프로그램에 영화 개봉이나 신작 드라마 출현, 가수의 경우 새 앨범 발매 즈음에 불이 낳게 출현하는 경우가 간혹 비판받아 왔다. 사실 좀 과한 감이 없지 않은 게, 연예가 소식을 전하는 프로그램이면 그럴 만도 하겠다 하는 것이겠으나,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에 출현해 지겹고, 자기 새 작품 홍보에 열을 내는 것 같은 모습이 조금 구역질나기도 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과한 것이 문제이지, 어느 정도는 유용한 정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황석영의 이 프로그램 출현은 고무적이라고 하겠다(이외수의 경우도 그러한 면에서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가뜩이나 책 안 읽는 세상에서, 특히나 더 소외되고 있는 문학(소설, 시 등)에 대해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기 위해서라도 많은 시인, 소설가들이 이런 대중적 프로그램에 출현하는 것을 권장하는 것도 좋겠다는 것이다.
아무튼, 황석영의 <무릎팍 도사> 출현을 계기로 그의 신작 소설의 매출이 많이 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황석영이란 이름만으로도 불황을 밥 먹듯 하는 출판사에게는 한줄기 빛이었고, 매출로 확실히 보상했겠지만, 좀 더 득을 보는 것을 마다할 것은 전혀 못 된다. 여러모로 긍정적이고 고무적인 일이지만, 특히나 나를 비롯한 황석영에 대해 관심가지고 있는 유력한 독자들이라면, 황석영의 이러한 일탈(그는 사실 일탈을 밥 먹듯 했지만)은 다분히 흥분되는 일이기도 하다. 황석영이 이 프로그램에서 고백한 고민(지식인처럼 보이고 싶다고?)은 별 볼일 없는 것이고, 그가 풀어낸 그의 살아온 인생역정은 자못 박진감 넘치고 우리를 열나게 하고, 울고 웃기는 것임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무릎팍 도사>에서 황석영이란 소설가를 멋들어지게 읽었다고 하면 이상한 것일까? 1943년(잘 모르는 분이 계실지 몰라 하는 말이지만, 이때는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를 벗어나기 이전, 그러니까 대한독립 만세의 날 1945년 8월 15일보다 2년이나 이른 시기다) 만주의 장춘에서 태어나 업둥이시절 독립을 맞고, 이어지는 전쟁, 고등학교 자퇴(혹은 중퇴?), 이런저런 방랑 혹은 방황, 소설가로서의 삶, 어머니에 대한 못난 아들의 사랑, 험난한 일탈 혹은 도전, 베트남 전쟁 참전, 북한 방문, 그야말로 역사의 곡절을 온몸으로 꺾고 꺾이어온 파란만장한 황석영이란 인간의 역사를 읽(듣)는 것은 참 값진 것이었다(그 점에서 약간의 다운로드 비용은 충분히 보상받았다). 남는 장사였던 것이 그 자체가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 4부작 중 절반에는 해당할 스펙터클 드라마틱 이야기들을 짧은 시간에 읽(들)었으니, 남기도 어지간히 남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신작은 미뤄오던 차에 구입해 두었던 것이다. 프로그램 중에서도 간간히 그의 신작 이야기들을 내비치고, 거기에 담긴 자신의 삶의 역정도 풀어놓았지만, 그래서 이 소설을 한번 읽어나 봐야겠군, 하는 생각을 더 가지게 한 듯하다. 사놓고는 시간을 조금 보내고, 엊그제야 하룻밤에 읽어내었던 것이다. 하룻밤에 읽었다는 것은 <무릎팍 도사>를 열 번 이상 볼 수 있는 시간이지만, 그래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고 해두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우리는 소설을 왜 읽을까? 문학원론적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야기의 재미를 만끽하고, 때론 그 허구적 삶에 울기도 하고, 공감도 해가면서, 한번쯤은 그러한 낭만적 삶을 꿈꾸기도 하면서, 내 삶을 돌아보고, 우리의 모자란 경험들을 한가득 채우기 위해 우리는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내가 소설을 자주 즐기지는 못하지만, 애써 지루하게도 몇 편, 몇 권의 소설을 그래도 열심히 읽어내는 것은 소설이 주는 그러한 효용들 때문인 것이다. 여기서 내가 “소설이 주는 효용”이라고 했지만, 무슨 교훈적 측면으로서의 효용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심심풀이로, 무협지를 읽어가듯이, 그렇게라도 시간 때우기 위해 읽을 때도 있는 것이다.
사실 소설의 특징으로 첫째로 손꼽히는 것이 ‘허구성’이라는 것인데, 중고등학교에서는 이것을 무슨 공식이라도 되는 듯이 소설하면, ‘허구성’이란 단어가 이구동생으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교육을 시켜서 첫째 손가락에 꼽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으로는 가급적이면 이 허구라는 말을 소설이란 분야에서 제일 끝자리에나 앉히고 싶다. 왜냐하면, 문학이라는 것은 대체로 허구이기때문이고, 또한 모두가 허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을 수필과 경계 짓는 곳에 허구를 놓지만, 수필의 어느 곳에는 허구덩어리가 있지 않다고 어느 누가 장담할 것인가? 소설 어느 곳에 허구 아닌 것이 있으리라고 나는 보장하지 못한다. 둘째손가락부터 꼽히는 소설의 다른 특징들로, 서사성, 개연성, 진실성, 갈등, 사건, 플롯 등등이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것들을 다 합치면 소설이 된다고 말하기에도 좀 망설여진다. 그러니 그런 것들이라고는 우리 따지지 않는 것도 좋으리라. 서사, 곧 이야기라는 것은 소설 아닌 다른 것에도 존재하지만, 그 이야기를 이야기로서 온전히 전하는 장르가 소설일 뿐이라고 말하면 잘못일까? 아닐 것 같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래서 이야기를 듣(읽)는 것이면 족하리라고 본다. 이야기를 들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에 푹 빠져서 듣다가, 잠에 들면 꿈속에서 재현하고 재창조해내는 것일 터이다.
황석영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
소설을 읽다보면, 한 장이라도 넘기는 것이 지겹도록 무거운 것이 있고, 그렇지만 그래도 그 무거운 것을 소중히 온 힘을 다해 넘겨 읽게 만드는 마력의 소유자로서의 소설도 있다. 또는 수십 장이 후루룩 넘어가면서도 허한 것도 있을 것이고, 푸근한 것도 있을 것이고, 재미난 것도 있을 것이며, 막막하기도, 아리기도, 씁쓸하기도, 하여간 다양할 것이다. 내 기준에서 좋은 소설이란, 잘 읽히면서 재미난, 그러면서도 무언가 찡하게 남는 그런 것이다. 이것이 좋은 소설을 가리는 보편적 기준은 아닌 것이, 또 다른 내 기준에서는 내가 읽지 않은 어떤 소설에 대해, 혹은 아주 힘겹게 읽어낸 어떤 소설에 대해, 나는 이 소설 좋은 소설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석영의 소설을 놓고 보자면, 어느 정도 전자에 해당된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술술 읽히면서도 재미있고, 어느 정도 가슴 울리는 무엇이 있는 소설 말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높은 것일 터이다.
황석영의 소설을 내가 많이 읽었던 것은 아니니, 그의 소설 전반에 대한 나의 평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초기 중단편들 몇 편(등단작 「입석부근」을 비롯해 「삼포 가는 길」, 「객지」 등)을 읽었을 뿐이고, 그의 장편들은 거의 읽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중단편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 시절 그의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그리 유쾌하지 못 하였다고 어느 곳에서 고백한 바 있어, 씁쓸할 뿐이다. 요전에 그의 소설은 읽은 기억은 『바리데기』 뿐이고, 그러니까 그의 최근작인 2편의 장편소설을 읽었을 뿐이다. 문단의 평이 여러모로 갈리는 가운데, 그의 최근작에 대해 나는 확실히 다른 면을 발견한 듯하다. 호불호를 떠나서 그의 최근작은 이전의 것들과는 분명 다른 데가 있었다. 우선 호흡이 가쁘지 않다는 것이다. 쉽게 읽히고 빨리 넘어가며, 잔잔히 흥미로운 데가 있어 좋았다.
내가 앞서 좋은 소설을 가리는 내 기준을 밝혔는데, 그에 따르면, 황석영의 최근작은 분명 전자, 그러니까 잘 읽히면서 재미있고, 무언가 남는 그런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의 『바리데기』에서 2% 이상의 부족함을 느낀다. 그에 대하여는 다른 리뷰에서 밝힌바 있어 재론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밥바리기 별』은 어떨까? 황석영의 최근 소설 경향을 내 나름대로 판단했을 경우, 이번의 작품도 그 경향을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내 기준으로서 좋은 소설에 해당하기는 한다는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 『개밥바리기 별』을 읽는다는 것
‘신비평’이라는 근대적 비평의 조류를 세운 I. A. 리처즈는 1929년에 『실제비평』이란 뛰어난 업적을 토해놓는다. 이 책은 “사 년 동안의 강의를 바탕으로 한 읽기이론과 이론의 적용을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리처즈는 저자를 밝히지 않고 시를 캠브리지 대학의 약 60명의 대학생들에게 나누어준 뒤 일 주일 후에 시를 읽은 횟수를 기입하고 시감상을 써오라는 과제물을 매번 제시”하는 실험(?)의 결과를 정리했다. 여기에 그의 장차 ‘신비평’이라고 불리는 이론이 실제적으로 적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를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학생들의 감상 결과는 많이 달라졌다. 결국 이 실험을 통해 리처즈는 ‘신비평’의 다른 이름이랄 수 있는 내재적 비평이 중요함을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리처즈의 신비평은 후대에 와서 비판 혹은 부정되지만, 현대 비평에 미친 영향은 크다고 하겠다.
문학 비평 이론사를 떠벌일 능력이 못 되어 절미하면서, 내가 왜 이 이야기를 꺼냈는가를 말하자면, 이런 가정을 제시해보기 위해서다. 황석영의 최근 소설에서 “저자 황석영”을 거세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확실히 『바리데기』는 ‘황석영’이란 이름을 거세했을 때 지금보다는 저평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개밥바리기 별』은 어떨까?
황석영이 스스로 밝혔듯이(방송에 나와서까지) 자전적 소설에서 이 ‘자전’을 거세하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나 ‘자전적’을 거세했다고 해도 ‘소설’은 남는다. 그러니까 ‘황석영’이라는 ‘자전적’을 거세하고 『개밥바리기 별』이라는 소설만을 볼 때, 이 소설은 어떻게 평가될까? 남의 평가에 연연해하지 않고 내 기준에서 볼 때, 우선, 나는 이 소설을 읽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평가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겠다. 그러나 어찌어찌해서 읽었다고 보고 말하자면, 사실 조금 아닌 데가 있다.
『개밥바리기 별』에서는 ‘준’을 중심으로 그를 둘러싼 친구들(‘영길, 인호, 상진, 정수, 선이, 미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의 2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자칭 ‘성장소설’이다. ‘준’의 “베트남 파견이 결정”되고 며칠간의 휴가를 틈타 예전 여자 친구를 찾으면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그런 시작에 이어서 회상 비슷한 형식으로 돌입한다. ‘준’이의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회상 형식의 작품과는 달리 특이한 것은 각 장에서 ‘준’의 시점을 사이에 두고 각각의 친구들의 시점이 교차되며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점은 뒤에서 논하기로 하고, 그렇게 ‘준’의 사춘기 시절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홀어머니와 누이, 동생과 함께 어렵게 살아가는 ‘준’이는 그 즘의 시각이나 오늘날의 시각에서나 다소 삐딱한 아이, 그러나 책 읽기를 즐기고,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던 아이였다. 학교를 때려치우기까지 그의 불우하다면 불우한 이야기가 끝나고,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방황하다가, 어느 일용직 막노동자를 따라 몇 년을 전국을 떠돌며 산 이야기를 끝으로, 회상(?)은 끝난다. 끝끝내 옛 여자친구(‘미아’)를 만나지 못하고 베트남 파병을 앞두고 부대로 복귀하는 열차에 오른다. 이게 대강의 줄거리다.
성장 소설은 인정하자. ‘준’이와 함께 그의 친구들은 각자의 삶에서 이래저래 살아가며, ‘성장’한다. 그러나 초점은 ‘준’이에 맞춰져야 한다. 우선 그는 반쯤 문제아다. 가족으로부터, 학교로부터, 사회로부터, 그리고 진정 자신으로부터 방황하고 떠나고자 한다. 그러나 글을 잘 썼던 아이였다. 그런 그에게 가족은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렇다고 그가 열심히 어울리는 친구들은 그저 도우미 정도일 뿐이다(노래방 도우미를 연상하자!). 그래서 그는 혼자 열심히 이 모든 것을 떠나고자 방황하고 도망(?)친다. 그가 사랑을 살짝 느꼈던 것 같은 ‘미아’로부터도 말이다.(왜 갑자기 ‘미아’를 베트남 파병을 앞두고 찾은 것일까? 그저 회포라도 풀 작정이었을까? 이런 쯧쯧. 사랑이라도 진하게 했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워했으련만.)
그 방황의 과정에서 ‘준’은 무언가를 찾은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의 힘은 아니었다. 하긴 세상은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싶다. ‘대위’라는 일용직 떠돌이 노동자를 만나서 말이다. 그를 만난 것은 이 작품의 후반부쯤이지 싶다. 작품을 끝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싶기도 한데, 그에게 친구들이 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 부분에서 ‘준’의 어떤 깨달음을 보자.
대위가 헛기침을 하고 나서 노래를 흥얼거리면 나는 좀 가만있으라고 짜증을 냈다. 땅거미 질 무렵의 아름다운 고즈넉함을 더욱 연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라, 저놈 나왔네.
대위가 중얼거리자 나는 두리번거렸다. 그가 손가락으로 저 물어버린 서쪽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개밥바리기 보이지?
비어 있는 서쪽 하늘에 지고 있는 초승달 옆에 밝은 별 하나가 떠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잘 나갈 때는 샛별, 저렇게 우리처럼 쏠리고 몰릴 때면 개밥바라기.
나는 어쩐지 쓸쓸하고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방황 끝에서, 글쓰기를 통해서도 아니고, 막노동꾼을 따라 유랑하며 노동하면서, 깨달은 것 치고는 좀 허하다.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것뿐이다. ‘개밥바리기’를 보며 ‘준’이는 “쓸쓸하고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희망 하나를 새기는 문구 “잘 나갈 때는 샛별”이 왜 이리 공허한지 모르겠다. ‘개밥바리기’가 ‘준’을 비롯해 그의 친구들과 동일시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들이 언젠가는 ‘잘 나갈’ 것이라는 헤픈 희망이 새겨진다. 왜? 단지 ‘개밥바라기’는 ‘샛별’과 같은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게 다인가? 온갖 방황과 고생 끝에 얻어진 것 치고는, 밤새 놀음을 하고 나와 초승달을 보며 느끼는 그 싸늘한 희망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것은 비단 나뿐인가? 아무튼 황석영을 거세하고 보자면 그렇다.
그런데 여기에 ‘황석영’을 첨가하자면, 읽는 재미는 한층 나아진다. 그가 <무릎팍 도사>에서 풀어낸 인생역정, 파란만장의 썰을 대비하며 읽는 재미는 엄청나다. 그런데 이것은 ‘소설적’ 재미와는 다른 것이 아닐까?
국제극장 골목에 줄지어 있던 어느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두주전자쯤 마신 날, 둘이서 시청 쪽으로 걷다가 부민관 건물의 화단 뒤로 움푹 들어간 그늘 앞에서 선이가 나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나를 차가운 벽에 밀어붙이면서 입술을 댔다. 첫키스를 했는데 나는 처음에는 얼떨결의 일이라 두 팔을 낙지처럼 늘어뜨리고 섰다가, 나도 모르게 한 팔은 그녀의 등을 감고 다른 한 손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그러자 선이가 그냥 내버려둔 채로 입술을 떼고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종알거렸다.
작지?
이런 뭔가 올 듯 말 듯 한 어린 시절의 첫 키스의 찝찔 짜릿한 추억의 재미가 재미라면 재미고 ‘준’의 어설픈 첫 여자경험의 그 못남의 어처구니없음이 웃음이라면 웃음이다. 그러나 할 건 다 하면서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는, 그래서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의 우리 소희의 키스보다는 찌릿함이 떨어지고, 널브러진 포르노보다는 그 노골함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황석영’을 거세하고는 말이다.
‘황석영’이 가세하면 상황은 보다 흥미로워진다. 가령 자살의 경험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본다거나, 어떻게 하다가 어린 시절 작가의 꿈을 키웠다거나(이 대목은 확인이 어렵다), 혹은 학교를 무엇 하다가 관뒀다거나, 학교 관두고 무엇하고 놀았다거나, 하는 대목이 황석영과 매치시키지 않고는 별반 재미날 것은 없는 에피소드일 뿐이다. 혹은 이런 대목에서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게 되는데,
담임은 황새라는 별명의 국어선생이었는데 좀 독특한 데가 있었다. 키가 크고 얼굴도 길쭉하고 팔과 손가락도 가늘고 길었다. 말씨는 느릿느릿했고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언행을 보이면 입 양편에 비웃는 주름살을 지으며 냉소적인 말로 상처를 주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글도 일단은 가차 없이 씹고 나서 한 줄씩 짚어주는 식이었다.
낙엽을 태우면서라는 제목도 그렇지만, 가을을 슬픈 계절이라고 보는 게 어쩐지 통속적이지 않나? 낙엽 태우는 연기에서 갓 볶은 커피 냄새가 난다는 대목도 겉멋이라구 보이는데, 정서는 생활과 연결이 되어야 하겠지. 그러지 않으면 귀에서 목덜미까지 소름이 돋아요. 어떤 글이든 남에게 자기 생각을 전달하려는 수단이고 통로일 뿐이다. 감정을 아끼고 담담하게 냉정하게 쓰되, 문장과 문장 사이가 중요하지. 독자는 이 사이에서 자신의 상상력으로 나머지를 채우고 글을 함께 완성해준다.
여기서 ‘황새’는 혹여 황석영이 아닐까 하는 호기심, 정말 ‘황새’가 황석영의 국어 선생님이었다면 황석영이 그에게 글쓰기에 대한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겠구나 하는 추측, 그러면서 여기서 남모르게 담아 놓은 황석영의 문학론을 살피는 것 등이 재미라면 재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씨발…… 누구든지 오늘을 사는 거야.”라는 ‘씨발’ 때문에 ‘맨숭맨숭하지’는 않은, 쓸데없어 보이는 아포리즘이 별다른 감동은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황석영이 이 말을 듣고 “거기 씨발은 왜 붙여요?” 물으면서 개운한 웃음을 웃었을 것을 생각하는 것이 더 재밌을 거란 생각, 나만 그런가?
황석영은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에서 사춘기 때부터 스물한 살 무렵까지의 길고 긴 방황에 대하여 썼다.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다만 자기가 작정해둔 귀한 가치들을 끝까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잊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다 이 소설은 사춘기 시절의 방황을 썼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사춘기 아이들에게 일말의 공감은 형성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걸 ‘소설’로서 잘 풀어냈느냐는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이 소설이 소설로서 가지는 어떤 장점이라는 것은 앞서서 언급한 형식적인 면일 것이다. ‘준’이를 중심으로 번갈아 교체되는 여럿의 1인칭의 시점들은 다양한 인물들의 사춘기 모습을 그리면서, 한 인물의 사춘기 시절을 총체적으로 서술하는, 그러한 방법을 통해 ‘준’이라는 인물과, 그를 둘러싼 삶의 모습들, 사춘기의 일상과 정서를 보다 깊고 넓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가치를 어느 정도 상승시켜 준다고 볼 수 있다. 독특한 면이지만, 이것이 ‘준’이의 회상 형식과 중복될 때, 다소 부조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된다. ‘준’이라는 인물의 총체적 삶의 모습(성장)과 동시에 다양한 인물 군상의 또 다른 성장이 중첩되면서 그 폭이 넓어졌다고 할 때, 이것이 ‘준’을 중심으로 열리고, 다시 ‘준’에 의해서 닫힐 때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듯 한 허함이 남는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일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 소설은 황석영이 소설이 아닌 일종의 자서전적 수필로 담아내었다면, 그래서 그의 어린 시절의 이러한 삶은 보다 사실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려냈다면, 보다 유효하과 적절했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황석영’이라는 이름과 ‘소설’이라는 장르는 일종의 금상첨화와 같은 만남이지만, 때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개밥바리기 별』이 주는 교훈일수도 있겠지만, 황석영의 입장에서 그 소재들을 버리기 아까웠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아무튼 황석영이 앞으로도 그의 “문학적 연대기의 기술”을 이어나간다고 할 때, 이 “작품이 하나의 새로운 표지석이 되”기는 될 것이다. 그의 남은 생애 건필을 빌며, 졸렬한 이 글을 마치지만, 아쉬움은 다시 ‘황석영’에게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실 분들에게 권하자면, <무릎팍 도사>를 먼저 보시고,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그 역도 가능하지 싶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