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타협으로서의 신간회
1927년 2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서울에서 창립한 민족협동전선. 국내 민족유일당운동의 구체적인 좌우합작 모임 신간회新幹會는 1923년경부터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진 국내의 민족해방운동 진영이 1925년경부터 함께 보조를 취할 필요성을 상호 인식하다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자극을 받아 마침내 좌우합작 조직체로 태어났습니다. 1927년 2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존속한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2만~4만 명에 이른 일제강점기에 가장 규모가 컸던 반일사회운동단체였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1926년 11월 사회주의 단체인 정우회가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과의 협동전선을 제창한 정우회선언正友會宣言을 통해 계급운동에서 정치운동에로의 방향 전환을 천명하고 이 과정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의 공동전선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정우회선언의 주요 내용은 첫째, 과거의 분열에서 벗어나 사상단체를 통일하고 구체적으로 전위적 운동을 할 것, 둘째, 교육을 통해 대중을 조직화하고 질적, 양적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여 그것을 기초로 일상 투쟁을 할 것, 셋째, 종래에 국한되었던 경제적 투쟁에서 계급적, 대중적, 의식적 정치형태로 전환할 것 등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일시적 공동전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조선일보」계통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도 신간회 결성 움직임을 본격화하여 1927년 2월 창립대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간회의 초대 회장에는 이상재李商在(1850~1927)가 추대되었습니다. 고종황제의 부탁으로 의정부 참찬을 맡았던 이상재는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을 준비하면서 한규설과 이상설의 집을 오가던 중 일제의 통감부에 구속되었다가 2개월 후에야 풀려났습니다. 1908년 황성 YMCA 종교부 총무가 되었고, 1910년 전국기독학생회 하령회를 조직하여 학생운동에 불을 지폈습니다. 1913년 105인 사건이 일어나자 YMCA 총무 질레트가 국외 추방을 당했으며, 후임으로 총무 직을 맡은 이상재는 총독부의 집요한 매수공작을 뿌리쳤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상재가 배후 인물로 활약했다는 점을 파악하여, 3개월간 옥살이를 시켰습니다. 이상재는 1920년에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을 맡았으며, 그 해 6월에는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는데, 최규동崔奎東, 김병로金炳魯가 창립에 참여했습니다. 조선교육협회는 장차 국권 회복을 위해 한국인의 민족적인 자각을 촉구하고, 교육을 통해 민족적 힘을 기르자는 뜻에서 만든 단체였습니다. 1927년 2월에 신간회가 결성되자 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상재는 고령과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 있었지만 이를 수락했는데, 이는 민중을 위해 사회운동가로서 마지막으로 봉사를 krl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다음 달인 3월 29일에 타계했습니다.
이상재가 타계하자 부회장 권동진이 뒤를 이어 통수 체계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신간회의 주요 간부는 민족주의자들이 맡았습니다. 간사는 35명을 선출하기로 하고 권동진 등 11명을 위원으로 뽑았습니다. 창립총회에서 35인을 선출해 간사회를 소집, 총무·재무·출판·정치문화·조사연구·조직·선전의 7개 부서를 두었으며, 사무실은 이갑수李甲洙의 집을 이용했습니다. 창립 당시 중앙 본부의 회장단을 민족주의 진영에서 독점, 사회·공산주의계의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습니다.
신간회는 강령을 통해 타협적인 정치운동, 즉 자치운동自治運動 등에 적극 반대한다는 점을 표명했으며, 식민지 지배정책 전반에 대한 반대투쟁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신간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支會를 두었는데, 먼저 일본 동경에 지회를 설치하여 지회장에 조헌영趙憲泳을 임명했습니다. 7월 10일에는 서울 지회를 설치, 지회장에 한용운韓龍雲을 임명했습니다. 이와 같이 활발히 지회를 두어 1928년 말에는 국내외에 143개의 지회와 3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습니다.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조직이 커지자 위협을 느낀 일제는 서서히 신간회를 탄압하기 시작해, 한 번도 대규모의 전체대회를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지회는 특히 경상남북도, 전라남도, 함경남북도에 가장 많았는데, 이 지역은 당시 농민ㆍ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하던 곳이었습니다. 신간회 활동은 이들 지회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각 지회에서는 식민교육정책 반대, 조선인 착취기관의 철폐, 이민정책 반대, 각종 농민ㆍ노동운동의 지원활동 등을 펼쳤습니다.
신간회는 1927년 7월 1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열린 전국복대표대회全國複代表大會를 통해 허헌許憲을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하고 좌익계의 중앙집행위원 45명과 중앙검사위원 10여 명이 선출되는 등 점차 좌경화되었습니다. 서울 지회장에 선출된 조병옥이 허헌 중앙집행위원장의 취임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광주·목포 등의 지회가 여기에 참여했습니다.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투쟁 목표는 뚜렷했는데, 이는 구호와 실천 강령 등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나며 타협주의를 배격한다는 점을 먼저 천명한 뒤, 언론·집회·결사·출판 등의 자유를 쟁취할 것과 청소년·부인 형평 운동을 지원할 것도 아울러 투쟁의 방향으로 삼았습니다.
1930년 11월에 열린 제3차 중앙위원회가 김병로를 집행위원장에 선출함에 따라 이번에는 우경화가 두드러졌고, 일부 간부들은 자치운동에 관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중에 좌파 내부에서는 점차 신간회 해소론解消論이 등장했는데, 1920년대 말 이후의 코민테른의 좌경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막스 레닌의 첫 글자 이니설을 딴 한국 공산당의 한 파인 ML파 공산당(제3차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당원들은 1929년까지만 해도 신간회의 잠정적 존재가치를 인정하여 신간회를 '민족협동전선에의 매개 형태'로 규정하더니, 1930년 5월부터는 신간회 자체로서는 민족협동전선으로 변조될 가능성이 없다면서 그 해소를 주장한 것입니다. 좌파의 해소론은 1930년 12월 부산 지회에서 표면화되었고, 1931년 5월 신간회 제2차 전체대회에서 해소안이 가결됨으로써 신간회는 해체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