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뇨병diabetes mellitus과 식이요법이 무엇입니까?

 

 

당뇨병diabetes mellitus은 우리 몸 안의 췌장pancreas(이자)에서 나오는 인슐린insulin이라는 호르몬의 분비가 부족하거나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여 혈액 중의 당이 세포 속으로 들어가서 제대로 이용되거나 저장되지 못하고, 혈액 내에 쌓이게 됨으로써 그 결과 혈액 속의 당분이 소변을 통해 빠져나오는 대사성 질환입니다.

섬이란 뜻의 인슐린은 라틴어 insula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단백질 중에서는 최초로 구조식이 밝혀진 것으로, 두 개의 아미노산사슬이 S-S결합(이황화결합)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슐린은 췌장의 β세포에서 합성, 분비되는 것으로 혈액 속의 포도당의 양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혈당량이 높아지면 분비되어 혈액 내의 포도당을 세포로 유입시켜 세포질 속에서 물에 불용상태인 과립으로 존재하는 글리코겐glycogen의 형태로 저장시키도록 하며 간세포의 글루코스glucose(탄수화물 대사의 중심적 화합물)를 억제합니다. 또한 지방조직에서 포도당의 산화 및 지방산으로의 전환을 돕습니다. 근육에서는 단백질을 합성하기 위한 아미노산의 흡수를 촉진시킵니다. 부신수질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아드레날린이라고도 하는 에피네프린epinephrine과 혈당을 올려주는 호르몬으로 췌장에서 만들어지는 글루카곤은 혈당량을 증가시키는 작용을 함으로써 인슐린과 길항작용을 합니다.

인슐린의 합성과 분비가 잘 이루어지지 않거나 충분하게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면 포도당을 함유한 오줌을 배설하게 되는 당뇨병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당뇨병 치료제로 사용되며 대량으로 주사할 경우 환자가 혼수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정신질환 치료 시 인슐린쇼크요법에 쓰이기도 합니다. 비만과 간장병 등의 치료제로도 사용됩니다. 이전에는 소와 돼지의 이자에서 추출하여 치료제로 사용했으나 1980년대 초 유전자재조합기술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생성하는데 성공했고, 1982년 엘라이릴리(LLY)사社가 사람의 인슐린이라는 뜻의 휴뮬린Humulin(human+insulin)을 제품화했습니다.

당뇨병은 제1형과 제2형으로 구분되는데, 제1형 당뇨병은 '소아당뇨'라 불리며, 인슐린을 전혀 생산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질환입니다. 인슐린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제2형 당뇨병은 인슐린 저항성insulin resistance(혈당을 낮추는 인슐린 기능이 떨어져 세포가 포도당을 효과적으로 연소하지 못하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제2형 당뇨는 식생활의 서구화에 따른 고열량, 고지방, 고단백의 식단, 운동 부족, 스트레스 등 환경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밖에 특정 유전자의 결함에 의해서도 당뇨병이 생길 수 있으며, 췌장 수술, 감염, 약제에 의해서도 생길 수 있습니다.

증상으로는 약한 고혈당에서 대부분의 환자들이 증상을 느끼지 못하거나 모호해서 당뇨병이라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혈당이 많이 올라가면 갈증이 나서 물을 많이 마시게 되고, 소변량이 늘어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됩니다. 또한 체중이 빠지게 됩니다. 오랜 기간 고혈당 상태가 유지되면 신체에서 여러 합병증이 발생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망막병증(실명할 수 있음), 신기능장애(신기능 저하로 심할 경우 투석이 필요함), 신경병증(저림, 통증)이고,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이 높아지게 됩니다.

치료방법으로는 제1형 당뇨병의 경우에 인슐린 치료가 필요합니다. 제2형 당뇨병의 경우에는 생활습관 교정을 기본으로 하며 추가로 약물 투여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먹는 약의 경우 하루 1~3회 복용하며 약의 작용 시간에 따라 먹는 시간이라든지 부작용 등이 조금씩 다릅니다.

식이요법은 당뇨병 관리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치료방법으로 운동요법, 약물요법을 하는 경우라도 꼭 병행해서 실시해야 합니다. 바른 식이요법은 음식물을 무조건 제한, 금지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의 요구량에 맞게 음식물의 양, 종류, 섭취시간을 적절히 조절함으로서 혈당의 상승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입니다.

바른 식사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열량을 섭취한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식사한다. 탄수화물은 주로 곡류에서 섭취한다. 조리시에는 적당한 양의 식물성기름을 사용한다. 콜레스테롤이 많은 음식물은 제한한다. 음식물을 싱겁게 조리한다. 술, 커피, 탄산음료 등의 기호식품을 피한다.

 

생활습관 교정을 통해서 체중을 5~7% 줄이게 되면 일부는 제2형 당뇨병의 발병을 늦추거나 예방할 수 있습니다. 100% 예방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믿을 만하고 부작용이 없는 방법이므로 적극 권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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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귀신을 속인 음식을 먹었습니다

 

 

어제 아침 지인으로부터 재래식 만두를 빚고 있으니 와서 먹고 가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만두를 좋아하는데다 재래식으로 빚었다니 참새에게 방앗간을 열어놓겠다는 말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소식이었습니다. 오라는 시각보다 30분 일찍 개포동으로 향했습니다. 자기는 미리 만두를 빚지 않고 먹기 바로 전에 빚는다면서 만두가 큰데 몇 개를 먹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잠시 생각했습니다. 몇 개를 먹을 수 있을까! 여덟 개라고 했습니다. 떡국은 조금만 넣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만두피를 직접 만드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고 결국 아홉 개를 먹으니 위가 다 찬 것 같았습니다. 후식으로 한라봉, 식혜, 다양한 차 몸무게를 2kg 늘여서 밤늦게 귀가했습니다.

만두를 귀신을 속인 음식이라고 한 것은 만두와 관련하여 전하는 말이 재미있어서 붙인 제목입니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 겸 전략가 제갈량諸葛亮이 남만南蠻을 정벌하고 회군하면서 노수라는 강가에 이르렀을 때, 그의 군사들이 강을 막 건너려는 참인데 홀연 일진광풍이 닥쳐 사람은 물론 말과 수레까지도 날려버렸다고 합니다. 대낮에 먹장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데다 큰비가 내려 강물이 순식간에 불어나는 바람에 군마는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차에 현지사정에 밝은 남만인 하나가 공명에게 아뢰기를 거듭된 전란으로 숱한 인명이 죽어갔으니 하늘이 노한 것이라며, 사람의 머리를 바쳐 진노한 하늘을 달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개진했다고 합니다. 승전고를 울리면서 회군하는 길에 또다시 부하들의 목을 바쳐 희생을 더한다면 이는 군사軍師가 할 노릇이 아니라고 생각한 제갈량은 생각한 끝에 묘안을 내놓았습니다. 사람의 고기 대신 양이나 돼지고기를 소로 넣어 밀가루 반죽에 싸되, 사람의 머리모양으로 빚어 제사를 지내라고 했습니다. 만두饅頭에서 두頭는 머리모양을 가리키고 만饅은 기만欺瞞하다의 瞞과 같은 음에서 따온 것입니다. 만두는 귀신을 속여먹은 음식이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만두가 들어온 건 고려 시대였으며 상화로 발효시킨 찐빵과 비슷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상화는 가루에 술을 넣어 부풀린 반죽을 찐 것으로 중국의 만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려사>에는 충혜왕 때 궁 주방에 들어가 만두를 훔쳐 먹은 자를 처벌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우리의 만두가 처음 기록된 것은 <영접도감의궤>(1643)로 중국 사신들을 대접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었으며, 그 후 궁중의 잔치에도 종종 차렸다고 합니다. 궁중잔치 기록에는 생치만두, 골만두, 생복만두, 진계만두, 생합만두 등이 나옵니다. <이순록>에는 "인조가 전복만두를 좋아했는데 생신날에 왕자가 비와 함께 동궁에서 직접 만두를 빚고 새벽에 문안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800년대에는 만두소를 녹말에 묻혀 데친 후 초간장에 찍어 먹었고, 병시를 먹었다고 하는데, 장국에 넣어 끓인 만둣국을 말합니다.

만두의 유래가 이러하므로 제사상에 만두를 올렸다가는 조상이 크게 진노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어려서 신김치에 두부 소고기 갈은 것 등을 넣고 주전자 뚜껑으로 찍어낸 만두피에 쌓던 일이 생각납니다. 만둣국을 먹을 때마다 몇 개를 먹어야 할까 궁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늘 양보다 하나나 둘을 더 먹게 됩니다.

어제는 귀신을 속인 음식을 두둑하게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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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로서의 안창호

 

 

대전 감옥에서 가출옥한 안창호가 투숙한 삼각정 김병찬의 여관 현관에는 그를 찾는 사람들의 신발이 가득했고, 시골서 그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로 객실이 만원이었습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은 당시 경찰 법규상 안창호의 동정을 가까스로 조그맣게 보도했을 뿐이었지만 안창호의 출옥 보도는 전국에 전해졌습니다. 신민회 시절 이래의 안창호의 친지와 동지들은 물론 평소에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도 경찰의 주목을 꺼리면서 여관으로 그를 찾았습니다. 하루에 오육십 명, 어느 날은 백여 명의 방문자들이 있었으나 안창호는 일일이 접대했습니다.

일본 관헌은 안창호가 많은 사람들을 접하는 것을 꺼려하여 그가 불근신임을 자주 경고했습니다. 안창호는 서울을 떠나 용강온천에서 정양했으나 그곳으로 매일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오자 일본 경찰이 그곳 여관에 투숙한 사람들을 검문하여 안창호를 찾아온 사람이라면 트집을 잡아 주재소로 호출하여 밤 깊도록 힐난했습니다. 용강온천에서 30리 되는 곳에 있는 김치호의 집에서 안창호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일이 있었습니다. 안창호와 여러 명의 친지들은 세 대의 자동차에 나누어 타고 그가 사는 동리를 찾았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길가에 몇 십 명씩 안창호의 통과를 기다리는 무리가 많아서 안창호 일행이 탄 차는 몇 십번이나 정거했습니다. 무리 중에는 노인과 부녀자들도 있어 안창호가 차에서 내리면 그 앞에 와서 절하고 눈물을 떨어뜨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가 다시 차에 올라서 멀리 지나갈 때까지 그들은 꼼짝도 안하고 안창호가 탄 차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자동차가 김치호의 집에 닿을 때에는 수백 명의 촌민이 모여서 환영하려고 했으나, 주재소 경관에게 해산당하여 집집에 쫓겨 들어가 숨어서 담 너머로 안창호의 얼굴을 보려고 했습니다.

안창호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시찰한 뒤 평안북도로 갔습니다. 가는 곳마다 동포들이 그를 환영했습니다. 안창호가 국내 순회할 때 일본 관헌은 몇 가지를 제한했는데, 안창호의 말을 듣는 회합을 금했고, 안창호를 포함하여 20인 이상의 회식을 금했습니다. 정주에서 50여 명이 회식할 준비를 할 때에는 20명 이상 금지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식사를 두 곳에 나누어서 하는 희극도 있었습니다. 선천에서는 20인의 제한을 지키는 회식에까지도 경찰관이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신의주에서만은 도지사의 특별 허가로 100여 명의 환영만찬과 한 번의 강연을 허락했습니다. 개성의 인사들은 지혜로워서 각 가정에서 4, 5인씩 회식하기를 매일 삼차 수차로 일주일나 계속했습니다.

안창호는 동포에게 폐가 되는 것을 근심하여 국내 순회를 중단했습니다. 그는 평안남도 강서군 대보면 대보산大寶山 송태松苔에 집 한 채를 짓고 그곳에 숨어버렸습니다. 그 집은 농가 건축의 모범시안으로 심혈을 경주하여 설계했고, 친히 공사를 감독했으나 목수와 이장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고 또 말을 듣지 않아서 퍽 고심했습니다.

송태는 평양에서 50리 떨어진 곳입니다. 평양은 그의 고향입니다. 그는 서른 살 내외에 고향을 방문하고 대동강변의 한 낡은 절을 찾았습니다. 그는 이 절에서 묵은 일이 있었던 어릴 때를 회구懷舊했으며 그 아침과 저녁의 종소리를 그리워했습니다. 그는 일행을 향해 “여기다가 집을 짓고 동지들이 수양하는 처소를 삼고 싶소”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그곳에 수양처를 짓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선인들이 경치 좋은 곳에 사원을 짓고 정자를 짓고 누각을 지은 총명함을 찬양했습니다. 그는 풍경이 사람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중요시하여 사람이 웅장한 풍경 속에 있으면 웅장한 기상이 생장하고 우미한 속에 있으면 우미한 취미가 배양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학교의 위치, 기숙사의 위치와 건축 그리고 정원과 장식이 교육에 미치는 효과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는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의 최고봉인 모란봉牡丹峯의 타고난 아름다움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모란봉 꼭대기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최승대最勝臺가 가장 큰 파경破景이라고 말했고, 몸이 작은 모란봉에 키 큰 나무를 심어 봉의 기묘한 윤곽을 감추는 것은 무식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최승대는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21호입니다. 원래는 최승대 자리에 평양성의 북장대가 있었는데, 숙종 40년, 즉 1714년에 성을 보수하면서 그 자리에 10m 가량 돋우어 봉화대를 설치하고, 2년 후에는 약 60m가량 내려와 양지바른 곳에 오승대라는 정자를 세웠습니다. 1940년경 봉화대가 있던 현재의 자리로 오승대를 옮겨지으면서 최승대라 명칭을 바꾸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대동강 한복판의 능라도가 한눈에 들어오고, 강 건너 동평양과 서평양의 모습이 바라보이는 곳입니다. 최승대는 평양성의 전체 경치를 바라보는 데 전망이 제일 좋다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입니다.

안창호의 마음에 평양은 단군왕검이 계시던 곳이며, 고구려 전성시대의 큰 서울이었습니다. 평양은 우리나라의 발상지이자 최대 문화의 개화지였습니다. 수나라, 당나라 대군을 격파한 고구려의 영웅들이 호기를 기른 곳도 평양입니다. 안창호는 평양이 우리 민족의 고향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가 신민회의 교육사업의 첫 걸음을 평양에서 발족한 것도 이런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평양에 대성학교와 태극서관을 설치했습니다. 그는 평양에 총명하고 준수한 젊은이들을 모아서 단군과 고구려의 민족정신을 함양하기를 바랐습니다. 반만 년 전 민족창업의 기개를 조상들의 피와 살로 된 이 강산에서 감득, 체득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송태는 대보산이라는 평양 부근에서는 유수한 명산으로 그가 젊었을 때 수양처를 짓고자 하던 곳입니다. 고구려 시대에 대보산 남녘 기슭에 큰 절이 있었고 산 중 형승지形勝地에 암자가 있었습니다. 산 최고봉에 감천암甘泉菴이란 암자가 있어 고구려의 흔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안창호가 자리 잡은 송태는 송태사의 옛터로 반 세기 전까지만 해도 전당과 고탑이 있었으나 전당은 화재로 타버리고 천 년 묵은 석탑은 아이들의 장난으로 파괴되어 그 명장의 솜씨로 다듬은 석판은 동구에 있는 사싯집에 혹은 우물돌로, 혹은 구들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대보산은 용문산과 더불어 고구려 불교의 중요한 영장靈場이었습니다.

안창호가 송태에 더욱 애착을 느낀 것은 송태가 불찰이 되기 전에 송태선인松苔仙人들의 은거지였다는 점입니다. 신라에서 국선國仙이 있었던 것처럼 고구려에는 조의선인皁衣仙人이란 것이 있었으므로 송태선인이 바로 조의선인이었던 것입니다. 조의선인이란 '검은 빛깔의 조복皁服을 입은 선인'이란 뜻으로 선배 혹은 선비라 불리었습니다. 조의선인은 고구려의 10월 제사에 모인 군중 앞에서 무예를 선보인 데서 비롯되었고 선인(仙人혹은 先人 )은 선배의 이두吏讀식 표기입니다. 사냥과 가무, 무예 등의 여러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을 선배라 불렀고 이들은 국가에서 급료를 받아 생활하면서 무예와 학문을 갈고 닦았습니다. 전시에는 이들이 자체부대를 조직하고 전장에 나가 정예군으로 활동했습니다. 조의선인은 머리를 박박 깎고 검은 옷을 입었으므로 전형적인 무사를 연상시켰습니다. 조의선인은 화랑보다도 훨씬 더 오래되었습니다.

송태선인들은 산에 숨어 유교나 불교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순수한 신도神道로 심신을 수련하고 천문, 지리, 정치, 문학, 의술, 복점 등의 학문을 연구하면서 문하에 모여드는 제자들에게 경천敬天, 숭조崇祖, 충군忠君, 효친孝親의 인륜과 정치, 용병, 무예 등을 전수할 뿐더러 그 중에도 고명한 선인은 왕자나 대신의 자문에 응하여 정치, 군사에 대한 계책을 주었습니다. 모든 점에서 신라의 국선과 다름이 없습니다.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몰래 대동강을 건너 송태선인에게 도道를 물었다고 하며,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연개소문淵蓋蘇文 모두 조의선인에게서 수학, 수도했다고 합니다.

안창호가 송태선인들의 수도장이 있었다는 이유로 송태를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곳에 7, 8칸 되는 작은 집을 지었습니다. 그는 동지의 수양처로 수십 명이 거처할 수 있는 건물을 건축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안창호 자신이 거처한 집은 그의 평생사업 계획 중에 중요한 한 가지인 모범 농촌의 농민주택의 모형으로 그 자신의 연구로 설계되었습니다. 모든 방과 부엌 그리고 광이 한 평면에 연했지만 안채, 사랑채, 대문, 안마당, 마루, 퇴, 솟을마루 등 한국 가옥의 모든 전통을 살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재목과 기와 그리고 터를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들인 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몇 가지 종류의 개량가옥 설계가 있었습니다. 그가 계획한 이상촌은 한 가지만의 가옥 건축양식으로 하려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개성을 존중했으므로 모든 사람이 저마다 좋아하는 대로 독특한 설계의 주택을 자유가 있을뿐더러 그렇게 천대만양千態萬樣 가옥의 집단이야말로 부락 혹은 도시의 아름다움을 발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지켜야 할 것으로 부락 전체의 설계에 배치되지 않을 것, 위생적일 것, 사치하지 않을 것, 아름다움을 고려할 것 등을 꼽았습니다.

안창호가 설계한 이상촌에는 공회당, 여관, 학교, 욕장, 운동장, 우편국, 금융과 협동조합의 업무를 하는 기관이 설치되는 것입니다. 공회당에는 집회실, 오락실, 담화실, 도서실 그리고 부락 사무소가 있는 것입니다. 집단생활과 사교생활의 훈련은 그가 생각하는 민족 훈련에 매우 중요한 과목이었습니다. 집단적인 회식과 오락은 그에게 중요한 일이었는데, 공회당과 그 안에서 하는 모든 설비는 부락을 한 가족으로 화하는 힘을 가진 것이어서 모두가 그곳을 아름답게 꾸미고 재미있게 하기를 힘씀으로써 애향애린愛鄕愛隣의 공동생활의 정신을 함양하는 것이며, 그는 이것을 애국정신의 기초로 보았습니다.

안창호는 오락을 인생의 양식으로 보았습니다. 안창호는 모임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희락회喜樂會라고 하여 함께 노래를 부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흥사단과 같은 수양단체의 대회의 절차에도 강론회, 운동회와 아울러 희락회를 정했습니다. 각 사람은 남을 즐겁게 할 오락거리 한두 가지 재주를 닦아둘 것이라고 안창호는 말했습니다. 그의 중국인 연설 흉내는 실물과 다름없을 정도로 몹시 비슷하여 포복절도抱腹絶倒(몹시 우스워서 배를 안고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웃음)할 만했으며, 이것은 집회의 경우 남을 웃기고 즐겁게 하기 위해 그가 연구, 연습한 것입니다. 단체생활에는 지知를 모으고 덕德을 모으고 재財를 모으고 일을 분담하는 것처럼 웃음과 기쁨도 분담하여 전체가 다 함께 크게 웃고 즐거워하자는 것입니다.

여관은 부락 공동의 객실을 의미했습니다. 부락을 방문하는 공동의 손님들을 편하게 숙식하게 하는 것은 부락의 예의이며 자랑일뿐더러, 개인 혹은 한 집을 찾아온 손님도 제 집에서 불편하게 재울 것이 아니라 여관에서 접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집집에 객실이나 손님을 위한 이부자리를 설비할 필요가 없게 되고, 묵는 손님도 남의 가정에서 폐를 끼치는 것보다는 여관에서 자는 것이 자유롭고 유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융기관은 저금과 융자를 업무로 하고 협동조합은 생산품의 공동 판매와 일상 용품의 공동 구매, 배급을 담당하게 됩니다.

운동장에는 아동 유희장을 부설하는 까닭은 부란 전원인 남녀노소가 모두 체육의 이利와 낙樂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체조와 각종 기계운동도 하고 무거운 것 들기, 재주넘기, 날파람, 태견, 태극권, 검술, 그네, 널뛰기, 달음박질 등 무릇 체위體位를 향상하고, 활발하고 모험적인 정신을 기르며, 몸을 보호하는 것과 군인이 되기에 필요한 재주도 배우게 됩니다. 안창호는 덱, 체, 지 3육이라 하여 늘 지육知育을 앞세웠습니다. 덕이 없는 자의 지知는 불평밖에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부락에 설립하게 되는 학교는 일반 교육의 학교 외에 직업학교를 세우자는 것이 안창호가 특히 역점을 두어 계획한 것입니다. 직업학교는 농農, 잠蠶, 임林, 원예園藝, 목축牧畜, 공工 등의 여러 과목을 두되, 공에는 농가 건축, 농촌 토목, 요업窯業, 식료품가공, 농구제조의 목, 철공, 농촌상업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학과를 교수하되 실습을 주로 농촌에서는 전田, 답畓, 채소원菜蔬園, 과수원, 상원桑園, 조림造林을 실지로 행하고, 토목에서는 도로, 치산治山, 배수排水, 관개灌漑를 직접 경영하고 공업 부분에 있어서도 그렇게 해서, 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소자본과 약간의 연장으로 독립한 직업을 가져서 한 지방의 한 부문을 담당할 수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재학 중에 모범촌 생활을 견습하고 또 실제로 그 생활습관을 길러서 고향에 돌아가면 그것을 모범촌에 의거하여 개조하고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상으로 말하면, 이런 모범촌과 직업학교를 각 도에 설립하여 적어도 전국 각 면面에 한 사람씩 선발하여 이 교육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안창호는 농촌의 농민주택을 지으면서 한국 가옥의 특징은 살리되 주부의 노고를 덜도록 된 부엌과 지하실의 구조, 냄새와 바람과 파리가 없는 변소, 통풍, 채광 그리고 우리 민간 보통 건축 재료와 보통 목수, 이장으로 할 수 있는 것 등을 설계했습니다. 이광수의 말로는 부엌과 뒷간은 독특한 구조여서 누가 보아도 마음에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건축비도 보통 한국 가옥의 건축비와 다름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안창호는 후원 마당의 설계와 정리도 몸소 했습니다. 그는 목수나 기타 장색匠色, 인부가 추호만큼도 설계에 어그러지는 것을 용서치 않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번 잘못되면 그 잘못이 언제까지나 남는 것이오.”

“얼렁얼렁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였소.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최선이 되기 어렵거든 하물며 얼렁뚱땅으로 천 년 대업을 이룰 수가 있겠소?”

“대소간 역사에 관용한 것은 관용이 아니요 무책임이니, 관용하는 자가 잘못하는 일꾼보다 더욱 죄라.”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송태 기지에 십수 정보의 송림이 부속되어 있었으니 이것은 기지와 아울러 도산을 위하여 어떤 친구가 사서 증여한 것이나, 물론 도산이 자기의 명의로 소유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도산은 자기 소유의 재산은 하나도 없었고 있으려고 하지도 아니하였다. 그는 오직 조국을 위하여서 전 생애를 바치려는 조의선인이었다.

안창호가 송태에 은거할 때에도 일본 관헌은 늘 그를 괴롭게 했습니다. 거의 매일 경관이 올 뿐더러 안창호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검문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을 보려고 평양 등지에서 오는 청년들은 일요일이나 휴일에 대보산 등산을 핑계로 큰길을 피하여 송태를 찾았습니다. 청년들 더러는 안창호를 찾아서 말을 걸기도 하고, 더러는 안목을 꺼려서 안창호가 땅을 파거나 돌을 줍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거나 또는 묵묵히 거들고 갔습니다. 여인들도 10인분, 20인분 음식물을 가지고 송태로 와서 안창호를 위로했습니다. 이리하여 평양과 강서간의 버스에는 송태에 오는 승객이 없을 때가 없었습니다.

평양에서 신사참배 문제로 말썽이 되었을 때 평안남도 도지사 가미우치 시코사쿠는 관찰부觀察府의 경찰 사무를 맡은 관리 하나를 보내 안창호에게 평안남도를 떠나기를 권고했습니다. 그 이유로 말한 바는 안창호가 송태에 있기 때문에 평안남도의 사상이 악화되고 치안이 문란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안창호가 산중에 숨어 있어서 아무 것도 책동이나 음모함이 없거늘 무슨 연유냐고 말하자 관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여기 있으므로 교회와 학교 대표자들이 모여서 신사참배를 의논하다가도 안 도산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서는 반대의 태도를 취하오. 당신은 음모를 하거나 선동을 하거나 하지 아니할 줄 믿지마는 당신이 여기 있다는 사실이 선동이 되는 것이오. 도지사의 말이, 그러니까 당신이 평안남도를 떠나주기를 바라고 될 수 있으면 미국으로 가기를 바란다 하오. 당신만 미국으로 갈 의향이 있다면 여행권은 곧 도지사가 주선해드린다 하오.

안창호는 물끄러미 그 관리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띠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도지사에게 전하시오. 만일 안창호의 존재가 민심을 악화한다 하면 평안남도에 있거나 미국에 갔거나 마찬가지라고. 아마 감옥에 잡아놓거나 죽이더라도 마찬가지라고. 2천만 한국인이 다 안창호와 같은 사람인데 일개 안창호를 송태에서 내쫓았다는 것이 불명예나 될 뿐이지 무슨 효과가 있는가고. 그리고 미국 가는 여행권 주선에 대한 후의에 대하여서는 감사하오. 그러나 아직 송태를 떠날 생각은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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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르기성 결막염allergic conjunctivitis이 무엇입니까?

 

 

알레르기allergy란 항원이 특정 항체와 반응하여 생기는 일종의 과민반응입니다. 아토피atopic와 알레르기는 종종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데, 우리 몸의 방어역할을 하는 여러 면역세포들 가운데 천식, 고초열, 아토피성 습진 등의 즉시형 알레르기반응을 유발하는 세포인 비만세포mast cell나 염기성 염색에 푸른빛을 띤 검정색으로 염색되는 핵을 갖는 식세포성 림프구로 분절된 핵을 지닌 호염기구basophil 혹은 말초혈액 백혈구의 1~3%를 차지하고 있는 과립구의 일종인 호산구eosinophil가 특정 외부 항원을 인식하게 되어 나타나는 일종의 과민 반응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알레르기 유발 항원이 눈의 결막에 접촉하여 결막에 과민반응을 유발하여 발생한 결막의 염증 질환을 알레르기성 결막염allergic conjunctivitis이라 합니다.

알레르기성 결막염이란 염증반응으로서, 눈의 흰자위에 발생하면 결막염conjunctivitis이 됩니다. 결막conjunctiva은 눈(안구)을 외부에서 감싸고 있는 조직이며, 눈의 흰자위인 구결막과 윗눈꺼풀을 뒤집거나 아래눈꺼풀을 당겼을 때 진한 분홍색으로 보이는 검결막으로 나뉩니다. 결막염이란 이 결막에 염증이 생긴 것을 말합니다.

결막염은 원인에 따라 감염성과 비감염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감염성 결막염은 세균, 바이러스, 진균(곰팡이균) 등의 여러 가지 병원균에 감염되어 발생하며, 비감염성 결막염은 외부 물질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으로 발생하는 알레르기성 결막염과 같이 비감염성 요인에 의해 발생합니다. 본인이 느낄 수 있는 자각증상으로 통증, 이물감(눈에 무엇인가 들어있는 느낌), 눈곱, 눈물, 가려움증(알레르기성 결막염) 등이 있고,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으로는 충혈, 결막부종, 결막하출혈, 여포, 위막(가성막) 등이 있습니다.

알레르기성 결막염을 일으키게 하는 물질은 매우 다양하고 많은데, 봄철의 꽃가루, 공기 중 먼지, 동물의 비듬, 집안에서의 먼지진드기, 곰팡이, 풀, 음식물, 비누, 화장품 등이 대표적인 원인물질입니다. 이런 알레르기 유발물질들이 눈의 결막에 접촉하여 비만세포, 호산구 또는 호염기구 등의 면역세포를 통한 알레르기 반응을 유발하게 되면, 히스타민과 같은 여러 염증유발물질이 분비되어 결막의 염증 반응을 유발하게 됩니다. 특정 계절에 심해질 수 있고, 피로, 스트레스 혹은 환경적인 원인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린이의 경우 사춘기 이후에는 발병 횟수가 줄고 증상이 가벼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며 시력과는 관계가 없으며, 다만 불편함을 느낄 뿐입니다.

급성의 경우에는 눈이 매우 가렵고, 충혈이 심하게 나타나며, 눈꺼풀이 붓고, 눈물이 많이 나옵니다. 심하면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이물감, 눈물흘림, 눈곱, 결막하 출혈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만성의 경우에는 큰 통증은 없으나 가렵고 가벼운 충혈이 지속되며 건조증이 동반되어 이물감, 눈물흘림 등이 나타나고 눈이 부셔서 밝은 빛을 잘 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또 실 같은 점성의 분비물이 나오기도 합니다.

치료방법으로는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항원을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정확한 항원을 찾기가 어려워 대부분 증상 치료에 중점을 둡니다. 치료는 다른 알레르기 질환들과 마찬가지로 회피요법과 약물치료의 두 가지 방법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회피요법은 원인이 되는 물질을 알고 있는 경우 적극적으로 생활환경에서 원인 항원에 노출되는 것을 피하는 것으로, 알레르기 결막염의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원인물질은 피부항원접촉검사로 알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생활환경에서 증상 발생 혹은 악화의 경험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약물치료로는 심한 가려움증을 없애기 위해 얼음찜질을 하고, 예방효과가 있는 크로몰린제제 등의 안약을 투여하여 재발률을 낮추며, 소염제나 항히스타민제antihistamines를 사용함과 동시에 결막이 많이 부었거나 충혈이 심한 경우에는 혈관수축제를 국소점안하기도 합니다. 항히스타민제는 알레르기 질환의 한 원인인 히스타민의 작용에 길항拮抗하는 약제이지만, 그 밖에도 국소마취, 교감신경차단, 부교감신경차단, 진정, 진토작용이 있습니다. 주로 알레르기증, 기관지천식, 두드러기, 약물진藥物疹, 혈청병 외에, 감기의 초기나 차멀미에도 사용됩니다. 또 연고제로서 알레르기성 피부병에도 사용됩니다. 내복을 할 때는 졸음이 오거나 소화불량, 흥분 등의 부작용이 있습니다.

주의해야 할 사항으로는 눈이 가렵다고 심하게 비비면 눈 흰자위가 무섭게 부풀어 오르고 가려움증은 더 심해지는 악순환을 부르므로 비비지 말아야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부신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주로 탄수화물과 무기질 대사에 관여하는 부신피질호르몬adrenal cortical hormone을 국소적 혹은 전신적으로 사용하는데, 부신피질호르몬은 효과가 좋을 수도 있지만 오랜 기간 사용하면 녹내장, 백내장, 각막염 등의 치명적인 합병증이 생길 수 있으므로 안과의사의 진찰과 처방에 의해 사용해야만 합니다.

식이요법이 알레르기 결막염의 치료 및 예방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규칙적이고 균형된 식생활 및 충분한 수분의 섭취가 기본적으로 필요합니다. 비타민과 미네랄을 충분히 보충해주고, 이를 위해 야채나 과일 주스를 자주 섭취하거나, 야채나 해조류 반찬을 많이 먹거나, 종합 비타민제제를 꾸준히 복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가공식품에 함유된 발색제, 보존제 등의 식품첨가물이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가공식품은 섭취를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쇠고기, 귤, 바나나, 콜라, 옥수수, 달걀 흰자위, 발효치즈, 생선, 조개, 우유, 땅콩, 딸기, 토마토, 흰 밀가루가 알레르기를 유발하기 쉬우므로 알레르기 환자는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우유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많이 있으므로 아이들은 우유 대신 두유를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해산물 중에는 낙지, 게, 새우 등은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는 음식이므로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름에 볶거나 튀긴 음식(치킨, 라면, 과자 등)은 유리기(활성산소)를 발생시켜 염증 상태를 만들기 쉬우므로 되도록 섭취를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섬유질은 알레르기의 원인이 되는 금속이나 독성 물질 제거에 도움이 되므로 충분히 섭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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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는 일심에서 4년 형을 받았다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발생하자 일본 관헌은 조계租界 관헌에 교섭하여 한국인 대수색을 행하였고, 안창호는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의거가 성사되자 김구는 임정 요인들에게 피신을 연락했지만 안창호는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의거가 발생한 날은 안창호는 동지 이유필의 딸 생일에 선물을 사준다던 약속을 지키러 이유필의 집에 도착하던 중 잡힌 것입니다. 그가 체포되면서 안창호와 흥사단 단원들을 중심으로 추진된 대독립당 추진 운동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안창호는 상해에 있는 일본 영사관 경찰서에 3주일 동안 유치되었다가 5월 하순에 배로 인천에 상륙했습니다. 당일 인천 부두에는 신문기자, 사진반, 친지 등이 많이 충영했으나 수명의 사법 경관들의 옹위를 받은 안창호는 거무스름한 스프링코트를 입고 자갈색 중절모를 쓰고, 포승만은 없이 경계 엄중한 속으로 묵묵히 걸어 자동차에 올라 곧 서울로 향했습니다. 신문사 사진반의 건판은 모두 압수당했습니다. 안창호는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유치되어 취조를 받았습니다. 치안유지법 위반이 그에게 주어진 죄명이었습니다.

안창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기사가 상해의 신문에 나오자 “정치범을 잡혀 보냈느냐”고 중국 인사들이 항의했으나 쓸데없었습니다.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유치된 안창호는 한 달가량 취조를 받고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갔습니다. 윤치호는 그가 사건에 관련되었을 리 없다며 조선총독부 경무국을 찾아가 설득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검찰의 심문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그는 꼿꼿한 자세로 자신은 테러사건과 무관함을 역설했습니다. 허위자백 요구에 그는 아는 사실이 없다며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민족을 위해 먹고 잤으니, 앞으로도 민족을 위해 일하고자 함은 변함이 없다”며 당당했습니다. 뚜렷한 혐의점이나 관련성이 없었는데도 조선총독부 사법부 당국은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안창호에게 징역 4년형을 구형했습니다.

안창호가 감옥으로 가던 날 새벽에 재판소 뜰에는 남녀 동지와 친지 등 100명가량이 모였습니다. 그때는 그런 자리에 오는 것만도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 하나만으로도 경찰의 요시찰인 명부에 오를 만했기 때문입니다.

안창호는 일심에서 4년 형을 받았으나 상소권을 포기하고 복역했습니다.

안창호의 재판 중의 모든 비용은 김성수 등 친우가 몰래 대었으며, 서대문 감옥 재감 중인 그의 옛 친우요 동지인 이강 부처가 일부러 감옥 옆에 집을 잡고 살면서 조석을 들였습니다. 안창호는 1년 후 대전 감옥으로 이수되었습니다.

안창호는 대전 입옥 중에 면회한 모씨에 대하여 서대문 경찰서 모 순사부장에게 인천서 서울로 압송되던 날 점심 한 그릇을 얻어먹었으니 그 값을 갚고 사의謝意를 표해달라고 부탁하므로 모씨는 실소失笑를 금치 못했습니다. 안창호는 모시가 웃는 것이 의외인 듯이 “그 사람은 내게 호의를 보였는데, 내가 그것을 몰라서 쓰겠소?” 하고 정색했습니다. 모씨도 정색하고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안창호는 자기가 남에게 대하여 아낌없는 우정을 가진 만큼 남에게서 받은 우정에 대하여 깊이 명심하고 보답할 길을 찾았습니다.

대전 감옥 복역 중에 안창호는 소화불량증이 심해졌습니다. 그는 그물을 뜨고 대그릇을 씻었습니다. 날마다 자기의 감방을 깨끗이 청소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복역 중 폐와 간이 더 나빠졌는데 그가 임종시 밝혀진 병명은 ‘간경화증 겸 만성기관지염 겸 위하수증’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늘 담배를 입에 물고 있을 정도로 담배를 많이 피웠습니다. 비서 구익균이 그에게 “선생님은 왜 다른 건 다 실천하시면서 담배 끊는 것만은 못 하십니까”라고 말해도 끝내 못 끊다가 감옥에 가서야 끊었습니다. 그러나 금단현상 역시 옥중의 그를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1935년 2월 질병의 악화로 병보석을 신청하고 윤치호, 김성수, 이광수 등이 보석금을 지불하여 대전 감옥에서 2년 6개월 만에 가출옥했습니다.

안창호가 대전 감옥에서 나온 때는 봄이라지만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상해에서부터 안창호의 사랑과 신임을 받던 외과의사 유상규劉相奎(1897~1936)는 자기가 강사로 시무하고 있던 경성의학 전문병원에 병실을 잡고 안창호를 그리로 영접하려고 했으나, 웬일인지 안창호는 그 호의를 받지 않고 삼각정 김병찬의 여관에 투숙했습니다.

유상규는 1916년 3월 경신중학교를 11회로 졸업하고 그해 4월에 새로 설립된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에 제1회로 입학했으며 1919년 3·1운동에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을 모으고 동원하는 등 3.1 독립 운동의 주된 역할을 했습니다. 졸업을 1년 앞둔 3학년 말에 학업을 포기하고 상해로 망명했으며 경성의학전문학교에는 25년 초까지 퇴교상태였습니다. 유상규는 임시정부 교통국에 근무했습니다. 그 뒤 임시정부에서 조직한 임정조사원 강계지역 책임자가 되어 독립운동 자료조사 및 수집 등 활동을 했습니다. 1919년 5월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을 지낸 안창호의 비서관이 되었으며, 흥사단에 입단하여 흥사단 원동지부에 가입했습니다. 1925년 안창호의 주창으로 서울에 조직된 수양동우회에도 가입하여 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한민족은 인재가 필요한 민족이니 고국에 돌아가 학업을 마치라는 안창호의 권고로 1924년에 귀국하고 1925년 다시 경성의학전문학교 3학년으로 복학했습니다. 학업을 계속하면서도 수양동맹회, 수양동우회에서 독립 운동을 계속했습니다. 1927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입학 동기들 보다 7년을 늦게 졸업한 그는 경성의전 부속병원 외과의사로서 경성의전의 강사로 근무하면서 후배 양성과 환자치료에 전념했으며, 박사학위를 준비하며 동아일보사 등 여러 출판물에 대중의 보건위생 계몽과 강연회에 꾸준히 연사로 활동하면서도 1930년 조선의사협회 그리고 조선위생협회 창설도 주도했고, 또 임원으로서 활동하는 등 잠시도 일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치료비를 받지 않는 왕진에도 열심이었고, 휴가에도 친구의 병간호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환자를 치료하던 중 단독丹毒에 전염되어 193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외과 강사로 근무 중 순직했습니다. 그의 장례는 마침 대전에서 출옥하고 국내에 체류하던 안창호가 주관했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유상규의 장례식은 불법집회로 의심받을 만큼 많은 친지와 동지들이 모였고, 그의 은사 오사와 마사루 교수도 슬픔에 떨리는 음성으로 조사를 낭독했다고 합니다.

안창호는 출옥한 뒤 어느 일본 순사를 찾았습니다. 그 순사는 안창호가 경기도 경찰부에 유치되어 있을 때에 간수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순사는 제가 차례가 되는 날이면 안창호를 밤에 불러내어 산보도 시키고, 별 구경도 시키고, 또 그에게 냉면을 대접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창호가 4년이나 감옥에 있는 동안에 그 순사는 벌써 경찰부를 떠났습니다. 안창호는 2, 3일이나 두루 찾아서 그의 주소를 안 뒤 과자 한 상자를 가지고 그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순사는 안창호가 운명하기 바로 4, 5시간 전에도 대학 병원의 병실을 찾아와서 담화했고, 안창호의 영구 앞에 와서는 울고 분향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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