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로서의 안창호
대전 감옥에서 가출옥한 안창호가 투숙한 삼각정 김병찬의 여관 현관에는 그를 찾는 사람들의 신발이 가득했고, 시골서 그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로 객실이 만원이었습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은 당시 경찰 법규상 안창호의 동정을 가까스로 조그맣게 보도했을 뿐이었지만 안창호의 출옥 보도는 전국에 전해졌습니다. 신민회 시절 이래의 안창호의 친지와 동지들은 물론 평소에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도 경찰의 주목을 꺼리면서 여관으로 그를 찾았습니다. 하루에 오육십 명, 어느 날은 백여 명의 방문자들이 있었으나 안창호는 일일이 접대했습니다.
일본 관헌은 안창호가 많은 사람들을 접하는 것을 꺼려하여 그가 불근신임을 자주 경고했습니다. 안창호는 서울을 떠나 용강온천에서 정양했으나 그곳으로 매일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오자 일본 경찰이 그곳 여관에 투숙한 사람들을 검문하여 안창호를 찾아온 사람이라면 트집을 잡아 주재소로 호출하여 밤 깊도록 힐난했습니다. 용강온천에서 30리 되는 곳에 있는 김치호의 집에서 안창호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일이 있었습니다. 안창호와 여러 명의 친지들은 세 대의 자동차에 나누어 타고 그가 사는 동리를 찾았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길가에 몇 십 명씩 안창호의 통과를 기다리는 무리가 많아서 안창호 일행이 탄 차는 몇 십번이나 정거했습니다. 무리 중에는 노인과 부녀자들도 있어 안창호가 차에서 내리면 그 앞에 와서 절하고 눈물을 떨어뜨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가 다시 차에 올라서 멀리 지나갈 때까지 그들은 꼼짝도 안하고 안창호가 탄 차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자동차가 김치호의 집에 닿을 때에는 수백 명의 촌민이 모여서 환영하려고 했으나, 주재소 경관에게 해산당하여 집집에 쫓겨 들어가 숨어서 담 너머로 안창호의 얼굴을 보려고 했습니다.
안창호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시찰한 뒤 평안북도로 갔습니다. 가는 곳마다 동포들이 그를 환영했습니다. 안창호가 국내 순회할 때 일본 관헌은 몇 가지를 제한했는데, 안창호의 말을 듣는 회합을 금했고, 안창호를 포함하여 20인 이상의 회식을 금했습니다. 정주에서 50여 명이 회식할 준비를 할 때에는 20명 이상 금지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식사를 두 곳에 나누어서 하는 희극도 있었습니다. 선천에서는 20인의 제한을 지키는 회식에까지도 경찰관이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신의주에서만은 도지사의 특별 허가로 100여 명의 환영만찬과 한 번의 강연을 허락했습니다. 개성의 인사들은 지혜로워서 각 가정에서 4, 5인씩 회식하기를 매일 삼차 수차로 일주일나 계속했습니다.
안창호는 동포에게 폐가 되는 것을 근심하여 국내 순회를 중단했습니다. 그는 평안남도 강서군 대보면 대보산大寶山 송태松苔에 집 한 채를 짓고 그곳에 숨어버렸습니다. 그 집은 농가 건축의 모범시안으로 심혈을 경주하여 설계했고, 친히 공사를 감독했으나 목수와 이장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고 또 말을 듣지 않아서 퍽 고심했습니다.
송태는 평양에서 50리 떨어진 곳입니다. 평양은 그의 고향입니다. 그는 서른 살 내외에 고향을 방문하고 대동강변의 한 낡은 절을 찾았습니다. 그는 이 절에서 묵은 일이 있었던 어릴 때를 회구懷舊했으며 그 아침과 저녁의 종소리를 그리워했습니다. 그는 일행을 향해 “여기다가 집을 짓고 동지들이 수양하는 처소를 삼고 싶소”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그곳에 수양처를 짓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선인들이 경치 좋은 곳에 사원을 짓고 정자를 짓고 누각을 지은 총명함을 찬양했습니다. 그는 풍경이 사람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중요시하여 사람이 웅장한 풍경 속에 있으면 웅장한 기상이 생장하고 우미한 속에 있으면 우미한 취미가 배양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학교의 위치, 기숙사의 위치와 건축 그리고 정원과 장식이 교육에 미치는 효과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는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의 최고봉인 모란봉牡丹峯의 타고난 아름다움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모란봉 꼭대기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최승대最勝臺가 가장 큰 파경破景이라고 말했고, 몸이 작은 모란봉에 키 큰 나무를 심어 봉의 기묘한 윤곽을 감추는 것은 무식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최승대는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21호입니다. 원래는 최승대 자리에 평양성의 북장대가 있었는데, 숙종 40년, 즉 1714년에 성을 보수하면서 그 자리에 10m 가량 돋우어 봉화대를 설치하고, 2년 후에는 약 60m가량 내려와 양지바른 곳에 오승대라는 정자를 세웠습니다. 1940년경 봉화대가 있던 현재의 자리로 오승대를 옮겨지으면서 최승대라 명칭을 바꾸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대동강 한복판의 능라도가 한눈에 들어오고, 강 건너 동평양과 서평양의 모습이 바라보이는 곳입니다. 최승대는 평양성의 전체 경치를 바라보는 데 전망이 제일 좋다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입니다.
안창호의 마음에 평양은 단군왕검이 계시던 곳이며, 고구려 전성시대의 큰 서울이었습니다. 평양은 우리나라의 발상지이자 최대 문화의 개화지였습니다. 수나라, 당나라 대군을 격파한 고구려의 영웅들이 호기를 기른 곳도 평양입니다. 안창호는 평양이 우리 민족의 고향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가 신민회의 교육사업의 첫 걸음을 평양에서 발족한 것도 이런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평양에 대성학교와 태극서관을 설치했습니다. 그는 평양에 총명하고 준수한 젊은이들을 모아서 단군과 고구려의 민족정신을 함양하기를 바랐습니다. 반만 년 전 민족창업의 기개를 조상들의 피와 살로 된 이 강산에서 감득, 체득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송태는 대보산이라는 평양 부근에서는 유수한 명산으로 그가 젊었을 때 수양처를 짓고자 하던 곳입니다. 고구려 시대에 대보산 남녘 기슭에 큰 절이 있었고 산 중 형승지形勝地에 암자가 있었습니다. 산 최고봉에 감천암甘泉菴이란 암자가 있어 고구려의 흔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안창호가 자리 잡은 송태는 송태사의 옛터로 반 세기 전까지만 해도 전당과 고탑이 있었으나 전당은 화재로 타버리고 천 년 묵은 석탑은 아이들의 장난으로 파괴되어 그 명장의 솜씨로 다듬은 석판은 동구에 있는 사싯집에 혹은 우물돌로, 혹은 구들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대보산은 용문산과 더불어 고구려 불교의 중요한 영장靈場이었습니다.
안창호가 송태에 더욱 애착을 느낀 것은 송태가 불찰이 되기 전에 송태선인松苔仙人들의 은거지였다는 점입니다. 신라에서 국선國仙이 있었던 것처럼 고구려에는 조의선인皁衣仙人이란 것이 있었으므로 송태선인이 바로 조의선인이었던 것입니다. 조의선인이란 '검은 빛깔의 조복皁服을 입은 선인'이란 뜻으로 선배 혹은 선비라 불리었습니다. 조의선인은 고구려의 10월 제사에 모인 군중 앞에서 무예를 선보인 데서 비롯되었고 선인(仙人혹은 先人 )은 선배의 이두吏讀식 표기입니다. 사냥과 가무, 무예 등의 여러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을 선배라 불렀고 이들은 국가에서 급료를 받아 생활하면서 무예와 학문을 갈고 닦았습니다. 전시에는 이들이 자체부대를 조직하고 전장에 나가 정예군으로 활동했습니다. 조의선인은 머리를 박박 깎고 검은 옷을 입었으므로 전형적인 무사를 연상시켰습니다. 조의선인은 화랑보다도 훨씬 더 오래되었습니다.
송태선인들은 산에 숨어 유교나 불교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순수한 신도神道로 심신을 수련하고 천문, 지리, 정치, 문학, 의술, 복점 등의 학문을 연구하면서 문하에 모여드는 제자들에게 경천敬天, 숭조崇祖, 충군忠君, 효친孝親의 인륜과 정치, 용병, 무예 등을 전수할 뿐더러 그 중에도 고명한 선인은 왕자나 대신의 자문에 응하여 정치, 군사에 대한 계책을 주었습니다. 모든 점에서 신라의 국선과 다름이 없습니다.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몰래 대동강을 건너 송태선인에게 도道를 물었다고 하며,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연개소문淵蓋蘇文 모두 조의선인에게서 수학, 수도했다고 합니다.
안창호가 송태선인들의 수도장이 있었다는 이유로 송태를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곳에 7, 8칸 되는 작은 집을 지었습니다. 그는 동지의 수양처로 수십 명이 거처할 수 있는 건물을 건축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안창호 자신이 거처한 집은 그의 평생사업 계획 중에 중요한 한 가지인 모범 농촌의 농민주택의 모형으로 그 자신의 연구로 설계되었습니다. 모든 방과 부엌 그리고 광이 한 평면에 연했지만 안채, 사랑채, 대문, 안마당, 마루, 퇴, 솟을마루 등 한국 가옥의 모든 전통을 살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재목과 기와 그리고 터를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들인 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몇 가지 종류의 개량가옥 설계가 있었습니다. 그가 계획한 이상촌은 한 가지만의 가옥 건축양식으로 하려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개성을 존중했으므로 모든 사람이 저마다 좋아하는 대로 독특한 설계의 주택을 자유가 있을뿐더러 그렇게 천대만양千態萬樣 가옥의 집단이야말로 부락 혹은 도시의 아름다움을 발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지켜야 할 것으로 부락 전체의 설계에 배치되지 않을 것, 위생적일 것, 사치하지 않을 것, 아름다움을 고려할 것 등을 꼽았습니다.
안창호가 설계한 이상촌에는 공회당, 여관, 학교, 욕장, 운동장, 우편국, 금융과 협동조합의 업무를 하는 기관이 설치되는 것입니다. 공회당에는 집회실, 오락실, 담화실, 도서실 그리고 부락 사무소가 있는 것입니다. 집단생활과 사교생활의 훈련은 그가 생각하는 민족 훈련에 매우 중요한 과목이었습니다. 집단적인 회식과 오락은 그에게 중요한 일이었는데, 공회당과 그 안에서 하는 모든 설비는 부락을 한 가족으로 화하는 힘을 가진 것이어서 모두가 그곳을 아름답게 꾸미고 재미있게 하기를 힘씀으로써 애향애린愛鄕愛隣의 공동생활의 정신을 함양하는 것이며, 그는 이것을 애국정신의 기초로 보았습니다.
안창호는 오락을 인생의 양식으로 보았습니다. 안창호는 모임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희락회喜樂會라고 하여 함께 노래를 부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흥사단과 같은 수양단체의 대회의 절차에도 강론회, 운동회와 아울러 희락회를 정했습니다. 각 사람은 남을 즐겁게 할 오락거리 한두 가지 재주를 닦아둘 것이라고 안창호는 말했습니다. 그의 중국인 연설 흉내는 실물과 다름없을 정도로 몹시 비슷하여 포복절도抱腹絶倒(몹시 우스워서 배를 안고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웃음)할 만했으며, 이것은 집회의 경우 남을 웃기고 즐겁게 하기 위해 그가 연구, 연습한 것입니다. 단체생활에는 지知를 모으고 덕德을 모으고 재財를 모으고 일을 분담하는 것처럼 웃음과 기쁨도 분담하여 전체가 다 함께 크게 웃고 즐거워하자는 것입니다.
여관은 부락 공동의 객실을 의미했습니다. 부락을 방문하는 공동의 손님들을 편하게 숙식하게 하는 것은 부락의 예의이며 자랑일뿐더러, 개인 혹은 한 집을 찾아온 손님도 제 집에서 불편하게 재울 것이 아니라 여관에서 접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집집에 객실이나 손님을 위한 이부자리를 설비할 필요가 없게 되고, 묵는 손님도 남의 가정에서 폐를 끼치는 것보다는 여관에서 자는 것이 자유롭고 유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융기관은 저금과 융자를 업무로 하고 협동조합은 생산품의 공동 판매와 일상 용품의 공동 구매, 배급을 담당하게 됩니다.
운동장에는 아동 유희장을 부설하는 까닭은 부란 전원인 남녀노소가 모두 체육의 이利와 낙樂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체조와 각종 기계운동도 하고 무거운 것 들기, 재주넘기, 날파람, 태견, 태극권, 검술, 그네, 널뛰기, 달음박질 등 무릇 체위體位를 향상하고, 활발하고 모험적인 정신을 기르며, 몸을 보호하는 것과 군인이 되기에 필요한 재주도 배우게 됩니다. 안창호는 덱, 체, 지 3육이라 하여 늘 지육知育을 앞세웠습니다. 덕이 없는 자의 지知는 불평밖에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부락에 설립하게 되는 학교는 일반 교육의 학교 외에 직업학교를 세우자는 것이 안창호가 특히 역점을 두어 계획한 것입니다. 직업학교는 농農, 잠蠶, 임林, 원예園藝, 목축牧畜, 공工 등의 여러 과목을 두되, 공에는 농가 건축, 농촌 토목, 요업窯業, 식료품가공, 농구제조의 목, 철공, 농촌상업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학과를 교수하되 실습을 주로 농촌에서는 전田, 답畓, 채소원菜蔬園, 과수원, 상원桑園, 조림造林을 실지로 행하고, 토목에서는 도로, 치산治山, 배수排水, 관개灌漑를 직접 경영하고 공업 부분에 있어서도 그렇게 해서, 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소자본과 약간의 연장으로 독립한 직업을 가져서 한 지방의 한 부문을 담당할 수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재학 중에 모범촌 생활을 견습하고 또 실제로 그 생활습관을 길러서 고향에 돌아가면 그것을 모범촌에 의거하여 개조하고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상으로 말하면, 이런 모범촌과 직업학교를 각 도에 설립하여 적어도 전국 각 면面에 한 사람씩 선발하여 이 교육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안창호는 농촌의 농민주택을 지으면서 한국 가옥의 특징은 살리되 주부의 노고를 덜도록 된 부엌과 지하실의 구조, 냄새와 바람과 파리가 없는 변소, 통풍, 채광 그리고 우리 민간 보통 건축 재료와 보통 목수, 이장으로 할 수 있는 것 등을 설계했습니다. 이광수의 말로는 부엌과 뒷간은 독특한 구조여서 누가 보아도 마음에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건축비도 보통 한국 가옥의 건축비와 다름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안창호는 후원 마당의 설계와 정리도 몸소 했습니다. 그는 목수나 기타 장색匠色, 인부가 추호만큼도 설계에 어그러지는 것을 용서치 않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번 잘못되면 그 잘못이 언제까지나 남는 것이오.”
“얼렁얼렁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였소.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최선이 되기 어렵거든 하물며 얼렁뚱땅으로 천 년 대업을 이룰 수가 있겠소?”
“대소간 역사에 관용한 것은 관용이 아니요 무책임이니, 관용하는 자가 잘못하는 일꾼보다 더욱 죄라.”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송태 기지에 십수 정보의 송림이 부속되어 있었으니 이것은 기지와 아울러 도산을 위하여 어떤 친구가 사서 증여한 것이나, 물론 도산이 자기의 명의로 소유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도산은 자기 소유의 재산은 하나도 없었고 있으려고 하지도 아니하였다. 그는 오직 조국을 위하여서 전 생애를 바치려는 조의선인이었다.
안창호가 송태에 은거할 때에도 일본 관헌은 늘 그를 괴롭게 했습니다. 거의 매일 경관이 올 뿐더러 안창호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검문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을 보려고 평양 등지에서 오는 청년들은 일요일이나 휴일에 대보산 등산을 핑계로 큰길을 피하여 송태를 찾았습니다. 청년들 더러는 안창호를 찾아서 말을 걸기도 하고, 더러는 안목을 꺼려서 안창호가 땅을 파거나 돌을 줍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거나 또는 묵묵히 거들고 갔습니다. 여인들도 10인분, 20인분 음식물을 가지고 송태로 와서 안창호를 위로했습니다. 이리하여 평양과 강서간의 버스에는 송태에 오는 승객이 없을 때가 없었습니다.
평양에서 신사참배 문제로 말썽이 되었을 때 평안남도 도지사 가미우치 시코사쿠는 관찰부觀察府의 경찰 사무를 맡은 관리 하나를 보내 안창호에게 평안남도를 떠나기를 권고했습니다. 그 이유로 말한 바는 안창호가 송태에 있기 때문에 평안남도의 사상이 악화되고 치안이 문란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안창호가 산중에 숨어 있어서 아무 것도 책동이나 음모함이 없거늘 무슨 연유냐고 말하자 관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여기 있으므로 교회와 학교 대표자들이 모여서 신사참배를 의논하다가도 안 도산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서는 반대의 태도를 취하오. 당신은 음모를 하거나 선동을 하거나 하지 아니할 줄 믿지마는 당신이 여기 있다는 사실이 선동이 되는 것이오. 도지사의 말이, 그러니까 당신이 평안남도를 떠나주기를 바라고 될 수 있으면 미국으로 가기를 바란다 하오. 당신만 미국으로 갈 의향이 있다면 여행권은 곧 도지사가 주선해드린다 하오.
안창호는 물끄러미 그 관리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띠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도지사에게 전하시오. 만일 안창호의 존재가 민심을 악화한다 하면 평안남도에 있거나 미국에 갔거나 마찬가지라고. 아마 감옥에 잡아놓거나 죽이더라도 마찬가지라고. 2천만 한국인이 다 안창호와 같은 사람인데 일개 안창호를 송태에서 내쫓았다는 것이 불명예나 될 뿐이지 무슨 효과가 있는가고. 그리고 미국 가는 여행권 주선에 대한 후의에 대하여서는 감사하오. 그러나 아직 송태를 떠날 생각은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