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는 일심에서 4년 형을 받았다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발생하자 일본 관헌은 조계租界 관헌에 교섭하여 한국인 대수색을 행하였고, 안창호는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의거가 성사되자 김구는 임정 요인들에게 피신을 연락했지만 안창호는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의거가 발생한 날은 안창호는 동지 이유필의 딸 생일에 선물을 사준다던 약속을 지키러 이유필의 집에 도착하던 중 잡힌 것입니다. 그가 체포되면서 안창호와 흥사단 단원들을 중심으로 추진된 대독립당 추진 운동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안창호는 상해에 있는 일본 영사관 경찰서에 3주일 동안 유치되었다가 5월 하순에 배로 인천에 상륙했습니다. 당일 인천 부두에는 신문기자, 사진반, 친지 등이 많이 충영했으나 수명의 사법 경관들의 옹위를 받은 안창호는 거무스름한 스프링코트를 입고 자갈색 중절모를 쓰고, 포승만은 없이 경계 엄중한 속으로 묵묵히 걸어 자동차에 올라 곧 서울로 향했습니다. 신문사 사진반의 건판은 모두 압수당했습니다. 안창호는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유치되어 취조를 받았습니다. 치안유지법 위반이 그에게 주어진 죄명이었습니다.

안창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기사가 상해의 신문에 나오자 “정치범을 잡혀 보냈느냐”고 중국 인사들이 항의했으나 쓸데없었습니다.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유치된 안창호는 한 달가량 취조를 받고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갔습니다. 윤치호는 그가 사건에 관련되었을 리 없다며 조선총독부 경무국을 찾아가 설득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검찰의 심문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그는 꼿꼿한 자세로 자신은 테러사건과 무관함을 역설했습니다. 허위자백 요구에 그는 아는 사실이 없다며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민족을 위해 먹고 잤으니, 앞으로도 민족을 위해 일하고자 함은 변함이 없다”며 당당했습니다. 뚜렷한 혐의점이나 관련성이 없었는데도 조선총독부 사법부 당국은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안창호에게 징역 4년형을 구형했습니다.

안창호가 감옥으로 가던 날 새벽에 재판소 뜰에는 남녀 동지와 친지 등 100명가량이 모였습니다. 그때는 그런 자리에 오는 것만도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 하나만으로도 경찰의 요시찰인 명부에 오를 만했기 때문입니다.

안창호는 일심에서 4년 형을 받았으나 상소권을 포기하고 복역했습니다.

안창호의 재판 중의 모든 비용은 김성수 등 친우가 몰래 대었으며, 서대문 감옥 재감 중인 그의 옛 친우요 동지인 이강 부처가 일부러 감옥 옆에 집을 잡고 살면서 조석을 들였습니다. 안창호는 1년 후 대전 감옥으로 이수되었습니다.

안창호는 대전 입옥 중에 면회한 모씨에 대하여 서대문 경찰서 모 순사부장에게 인천서 서울로 압송되던 날 점심 한 그릇을 얻어먹었으니 그 값을 갚고 사의謝意를 표해달라고 부탁하므로 모씨는 실소失笑를 금치 못했습니다. 안창호는 모시가 웃는 것이 의외인 듯이 “그 사람은 내게 호의를 보였는데, 내가 그것을 몰라서 쓰겠소?” 하고 정색했습니다. 모씨도 정색하고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안창호는 자기가 남에게 대하여 아낌없는 우정을 가진 만큼 남에게서 받은 우정에 대하여 깊이 명심하고 보답할 길을 찾았습니다.

대전 감옥 복역 중에 안창호는 소화불량증이 심해졌습니다. 그는 그물을 뜨고 대그릇을 씻었습니다. 날마다 자기의 감방을 깨끗이 청소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복역 중 폐와 간이 더 나빠졌는데 그가 임종시 밝혀진 병명은 ‘간경화증 겸 만성기관지염 겸 위하수증’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늘 담배를 입에 물고 있을 정도로 담배를 많이 피웠습니다. 비서 구익균이 그에게 “선생님은 왜 다른 건 다 실천하시면서 담배 끊는 것만은 못 하십니까”라고 말해도 끝내 못 끊다가 감옥에 가서야 끊었습니다. 그러나 금단현상 역시 옥중의 그를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1935년 2월 질병의 악화로 병보석을 신청하고 윤치호, 김성수, 이광수 등이 보석금을 지불하여 대전 감옥에서 2년 6개월 만에 가출옥했습니다.

안창호가 대전 감옥에서 나온 때는 봄이라지만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상해에서부터 안창호의 사랑과 신임을 받던 외과의사 유상규劉相奎(1897~1936)는 자기가 강사로 시무하고 있던 경성의학 전문병원에 병실을 잡고 안창호를 그리로 영접하려고 했으나, 웬일인지 안창호는 그 호의를 받지 않고 삼각정 김병찬의 여관에 투숙했습니다.

유상규는 1916년 3월 경신중학교를 11회로 졸업하고 그해 4월에 새로 설립된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에 제1회로 입학했으며 1919년 3·1운동에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을 모으고 동원하는 등 3.1 독립 운동의 주된 역할을 했습니다. 졸업을 1년 앞둔 3학년 말에 학업을 포기하고 상해로 망명했으며 경성의학전문학교에는 25년 초까지 퇴교상태였습니다. 유상규는 임시정부 교통국에 근무했습니다. 그 뒤 임시정부에서 조직한 임정조사원 강계지역 책임자가 되어 독립운동 자료조사 및 수집 등 활동을 했습니다. 1919년 5월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을 지낸 안창호의 비서관이 되었으며, 흥사단에 입단하여 흥사단 원동지부에 가입했습니다. 1925년 안창호의 주창으로 서울에 조직된 수양동우회에도 가입하여 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한민족은 인재가 필요한 민족이니 고국에 돌아가 학업을 마치라는 안창호의 권고로 1924년에 귀국하고 1925년 다시 경성의학전문학교 3학년으로 복학했습니다. 학업을 계속하면서도 수양동맹회, 수양동우회에서 독립 운동을 계속했습니다. 1927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입학 동기들 보다 7년을 늦게 졸업한 그는 경성의전 부속병원 외과의사로서 경성의전의 강사로 근무하면서 후배 양성과 환자치료에 전념했으며, 박사학위를 준비하며 동아일보사 등 여러 출판물에 대중의 보건위생 계몽과 강연회에 꾸준히 연사로 활동하면서도 1930년 조선의사협회 그리고 조선위생협회 창설도 주도했고, 또 임원으로서 활동하는 등 잠시도 일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치료비를 받지 않는 왕진에도 열심이었고, 휴가에도 친구의 병간호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환자를 치료하던 중 단독丹毒에 전염되어 193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외과 강사로 근무 중 순직했습니다. 그의 장례는 마침 대전에서 출옥하고 국내에 체류하던 안창호가 주관했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유상규의 장례식은 불법집회로 의심받을 만큼 많은 친지와 동지들이 모였고, 그의 은사 오사와 마사루 교수도 슬픔에 떨리는 음성으로 조사를 낭독했다고 합니다.

안창호는 출옥한 뒤 어느 일본 순사를 찾았습니다. 그 순사는 안창호가 경기도 경찰부에 유치되어 있을 때에 간수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순사는 제가 차례가 되는 날이면 안창호를 밤에 불러내어 산보도 시키고, 별 구경도 시키고, 또 그에게 냉면을 대접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창호가 4년이나 감옥에 있는 동안에 그 순사는 벌써 경찰부를 떠났습니다. 안창호는 2, 3일이나 두루 찾아서 그의 주소를 안 뒤 과자 한 상자를 가지고 그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순사는 안창호가 운명하기 바로 4, 5시간 전에도 대학 병원의 병실을 찾아와서 담화했고, 안창호의 영구 앞에 와서는 울고 분향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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