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는 도덕률, 이슬람주의는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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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문명은 한때 유럽의 선생이었다. 하버드대 경제사학자 데이비드 랜즈에 따르면 약 750년부터 1100년까지 이슬람 과학기술은 유럽을 훨씬 능가했다. 정복한 땅의 지식을 잘 흡수하고 발전시킨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슬람 황금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근대의 패권은 산업혁명을 이룬 유럽 열강의 것이었다.

우리는 오늘도 중동의 살육전과 아랍의 봄을 안방에서 지켜본다.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무슬림)이 지구촌 인구 네 명 중 한 명꼴인 17억명이나 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슬람은 아직 낯선 세계다. 우리가 이슬람의 격변과 그곳의 삶을 더 잘 이해할 수는 없을까.

이런 생각을 품었다면 40여년 동안 이슬람 정치를 연구한 바삼 티비의 책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Islamism and Islam)’가 눈에 띌 것이다. 1944년 시리아 무슬림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티비는 독일에 살면서 줄곧 이슬람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이슬람 민주화를 위한 개혁을 주문해왔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전하려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슬람교와 이슬람주의는 다르다는 것. 이슬람교는 하나의 신앙이자 도덕률이다. 이슬람주의는 이슬람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해 헷갈리는 서방 지도자와 학자들은 이슬람 세계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이슬람교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은 유일신 알라의 뜻을 구현하는 정치 질서를 만들려 한다. 이슬람법(샤리아)에 바탕을 둔 신정(神政)국가를 만들려는 것이다.

이슬람교는 무슬림의 세계관과 생활양식을 규정하지만 국가 질서를 전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슬람주의자는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말한 ‘꾸며낸 전통’을 이용한다.

저자는 샤리아를 꾸며낸 전통이라고 본다.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 본문에 샤리아는 단 한 차례 나올 뿐이다. 샤리아는 ‘물가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뜻으로 도덕적으로 바른 길을 의미한다.

티비는 “인간이 아닌 알라 신만이 세계를 통치할 자격이 있다면 국민 주권과 양립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민주사회의 다원주의를 거부하는 신정 질서는 전체주의에 가깝다. 그는 또한 “이슬람주의자들은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는 야망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이슬람교는 일찍이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공생을 비롯한 인본주의 전통을 보전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슬람주의자들은 세계 질서 재편을 놓고 경쟁하는 유대인을 ‘세계인의 원수’로 규정”했다.


저자는 전통적인 지하드(성전)와 오늘날 지하드 운동을 달리 본다. 이슬람교는 본래 지하드를 자기수련이자, 불신자와 벌이는 물리적 투쟁으로 규정했다. 오늘날 지하디스트의 테러 행위와는 다른 개념이었다.

중세의 이슬람은 헬레니즘과 만나 번영했다. 하지만 현재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외부에서 도입된 문화는 무조건 배격하고 조롱한다. 독재자는 민주정치가 아랍에 적합하지 않다고 둘러대고, 이슬람주의자는 민주정치가 이슬람교에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티비는 오랜 독재체제가 무너진 이 지역에 전체주의적인 이슬람주의 정치 질서가 깊이 뿌리내릴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는 ‘종교색을 띠지 않는 민주정치’가 이슬람 세계에 정립되기를 바란다.

그게 가능할까. 티비는 희망을 말한다. 물론 조건이 붙는다. “종교적 윤리체계이자 신앙의 원천인 이슬람교가 종교개혁의 의지와 결합된다면 얼마든지 민주정치와 양립될 수 있다. 지금 무슬림에게 필요한 것은 이슬람 전통에서 소홀히 여겼지만 존중받아 마땅한 이슬람식 합리주의다.”

이 책은 논쟁적이고 민감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슬람 입문서들보다 어렵고, 매끄럽게 읽히지도 않는다. 하지만 격변의 이슬람 세계를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은 새로운 관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장경덕 매일경제신문 논설위원 gdjang@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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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지하드와 현대 지하드의 테러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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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거론하지 않고는 이슬람주의를 말할 수 없다. 이슬람주의는 테러리즘과 별개의 개념이므로 나는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를 폭력과 결부시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현대전에서 폭력을 일삼는 지하드에는 테러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으며 이슬람주의의 주요한 특징을 띤다.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차이는 폭력의 정당화를 거론할 때에 특히 부각되는 개념이다. 이슬람교는 지하드를 “자기수련” 이자, 코란에 따르면, 포교의 일환으로 불신자와 벌이는 물리적 투쟁(키탈)의 실천으로 규정한다. 7~17세기 사이에 이슬람문명이 고도로 발전하자 무슬림은 국제적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이슬람교의 확산을 위해 지하드를 감행했다. 저명한 이슬람 역사학자 마셜 G. S. 호지슨은 무슬림이 그때 “국제 정치질서를 형성” 했다고 주장한다. 이슬람문명은 서방세계가 득세하자 주춤하고 결국 쇠퇴하고 말았다.
이와 관련된 역사는, 세계를 “베스트팔렌식 논리” 가 규정한 국제 시스템에 맞춰 그리는 식으로 2장에서 요약했다. 오늘날 이슬람주의는 문화적 근대화와 서양의 패권주의 간의 경계가 흐릿해진 상황에서 “서방세계에 항거하는 반란” 중 으뜸으로 꼽힌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근대의 국제 시스템이 진화하고 국제사회가 확대되면서 쇠락해가는 이슬람문명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될 것이다. 그중 꾸며낸 전통의 이슬람식 “샤리아 논리”는 계속 이어갈 것이다. 이 같은 맥락감안한다면, 문화적 근대화와 반계몽사상에 나타난 전도현상 또한 근대화에서 비롯된 위기에 봉착한 이슬람문명에는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다. 이른바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 라는 베스트팔렌식 국제 시스템을 거부함으로써 이 같은 문제를 해소하려는 이슬람세계 학자들의 노력은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방어 문화” 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식 세계관은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적응했을까?
수니파 이슬람교에서 가장 유력한 교육기관으로는 1천 년이라는 유구한 세월을 보낸, 카이로에 소재하는 알아즈하르 대학٧을 꼽을 수 있다. 알아즈하르 대학에서 나온 교재는 『휴머니티의 선언Bayan li al-Nas』으로, “무장지하드”를 포기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쉐이크 알아즈하르가 공포한 판결fatwa(파트와)은 수니파 이슬람교의 종교기관에서 최우선으로 여긴다. 1989년 9월, 쉐이크 자두울 하크는 타계하기 전, 나와의 회동에서 “무장 지하드” 를 규탄하며 판결(파트와)을 재차 강조했다. 그렇지만 이슬람세계의 정치지도자들은 이를 이슬람교의 원수에 굴복하는 작태라고 일축했다.
전통 성전이 현대 성전주의로 진화된 데는 하산 알반나의 공이 컸다. 사이드 쿠틉이 주창한 “이슬람세계의 혁명” 은 훗날 “글로벌 성전” 의 일환으로 추가된 것으로, 여기서 혁명이란 칼리프 시대가 아니라 이슬람교의 지배siyadat al-Islam(시야다트 알이슬람)를 회복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알반나와٧ al-Azhar University: 국립 종합대학으로 이슬람 학문의 중심이며 수니파 이슬람교의 교육 중심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의 하나로, 시아파인 파티마 왕조가 970년에 알아즈하르 사원을 건립한 뒤 선교요원을 양성하기 위해 988년 사원 안에 대학을 개교했다. 그 후 아유브 왕조의 시조 살라딘이 파티마 왕조를 쓰러뜨렸을 때 파괴되었다가 수니파의 학부로 재건되었으며 맘루크 시대에 중수되었다.
쿠틉은 폭력의 정당성뿐 아니라, 이슬람국가의 정규전인 전통 성전이 이슬람의 비국가적 주동세력이 자행하는 테러로 탈바꿈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 성전주의는 단순한 테러리즘이나 폭동, 그 이상을 예고한 것으로 샤리아에 따라 세계를 재편하는 데 필요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서양에서 속출하는 성전 관련 문헌이나 부시와 오바마 행정부의 대외정책에는 이 같은 맥락이 대체로 누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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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 분포해 있었던 아리라

 

 

이승훈이 건립한 정주의 오상학교에 들른 신채호의 모습을 당시 교사를 재직하던 춘원 이광수는 1936년 4월 <조광>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 주필이나 되는 단재는 풍채가 초라한 샌님이나 이상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세수할 때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물을 찍어다 바르는 버릇 때문에 마룻바닥, 저고리 소매와 바지가랑이가 온통 물투성이가 됐다. 누가 핀잔을 주려 하면 ‘그러면 어때요’라고 하였다. 남의 말을 듣고 소신을 고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웃고 얘기할 땐 다정스러웠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조선족이 얼마나 넓게 분포하고 살았는지를 이두문을 풀어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우리 고어에서는 오리鴨를 ‘아리’라 하고, 강江을 ‘라’라 했는데, 압록강鴨綠江, 대동강大同江, 두만강豆滿江, 한강漢江, 낙동강洛東江과 길림성吉林省의 송화강松花江, 봉천성奉天省의 요하遼河, 영평부永平府의 난하灤河 등을 이두자로 쓴 옛 이름을 찾아보면 아례강阿禮江, 아리수阿利水, 욱리하郁利河, 오열하烏列河, 열수列水, 무열하武列河, 압자하鴨子河라 하여 아례阿禮, 아리阿利, 오열烏列, 무열武列의 열列은 모두 ‘아리’의 음역音譯이며, 압자鴨子(고어에서 오리를 아리라 했음)는 ‘아리(=오리)’의 의역意譯이고, 강江, 하河, 수水는 모두 ‘라’의 의역意譯이다. 위의 각 큰 강들은 모두 조선족 선조들이 지은 이름들이고, 조선 고대의 문화는 거의 다 위의 큰 강의 강변에서 발생했으므로,『삼국지三國志』에도 구려작국句麗作國, 의대수이거依大水而居(고구려高句麗는 나라를 세우면서 큰 물가에 터를 잡고 살았다)라고 했던 것이다.

‘나라’는 고어에서 ‘라라’라 했으니, ‘라라’는 본래 ‘나루津渡(진도)’를 가리키던 명사로서 후에 와서 국가國家를 가리키는 명사로 된 것이다. 그리고 고대 지명의 끝에 붙은 나那, 라羅, 노奴, 루婁, 누耨, 량良, 랑浪, 양穰, 양陽, 강岡, 아牙, 야邪 등은 모두 ‘라’의 음역이고, 천川, 원原, 경울京, 국國 등은 모두 다 ‘라’의 의역이다. 이들 양자는 다 ‘라라’의 축역縮譯인바, 강江은 어렵漁獵의 밑천이 되고 배로써 오고 갈 수 있는 편리함을 제공하므로, 상고의 문명은 거의 대부분 강가에서 발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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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의학形象醫學이란 무엇입니까?

 

 

한의학은 보통 증상과 맥을 위주로 진단이 이뤄집니다. 우리나라 한의학의 고전인 <동의보감東醫寶鑑> ‘내경’편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귀가 든든하면 신장도 든든하고 귀가 얇고 든든하지 못하면 신장도 연약하다. 귀가 앞에 있는 하악골下顎骨(아래턱뼈mandibula) 부위에 잘 붙어있으면 신장의 위치와 모양이 똑바르고 한쪽 귀가 올려 붙었으면 한쪽 신장이 쳐져 있다.

 

<동의보감>이 쓰인 때와 그 이전에는 사람의 형색形色을 보고 병을 진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목구비耳目口鼻의 하나인 귀가 오장육부五臟六腑 가운데 신장 혹은 콩팥kidney의 상태를 반영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아래쪽 배의 등 부위에 쌍으로 위치하는 콩팥은 노폐물을 배설하고 산염기 및 전해질 대사 등 체내 항상성을 유지하는 기능을 하는 중요한 장기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양쪽 콩팥의 총 무게는 전체 체중의 약 0.4%에 지나지 않지만 콩팥의 기능이 심하게 저하되거나 소실되면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동의보감>은 형색을 보고 한쪽 귀가 올려 붙었으면 한쪽 신장이 쳐져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산芝山 박인규朴仁圭(1927~2000)는 <동의보감>을 형상의학形象醫學이라는 새로운 이론의 틀로 재해석했습니다. 형상의학은 사람의 형상을 보고 생리병리를 규명하여 치료에 응용하며 나아가 양생법을 찾는다는 이론입니다. 해방 후 민청에서 일하던 중 사상범으로 몰려 9개월간 복역하면서 독립운동가 김남철을 만나 그에게서 주역周易과 선도술仙道術을 배웠습니다. 그의 형상의학에 역학적 색채가 강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1971년에 한의사가 되었고, 1976년에 대한정통한의학회를 만들어 한의사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시작했는데, 이 단체는 1981년 그 명칭을 대한형상의학회로 바꾸었습니다. 2000년 6월에 다시금 대한형상의학회로 개칭했습니다.

박인규는 1996년부터 1999년까지 모두 7권에 걸쳐 쓴 <지산선생芝山先生 임상학특강臨床學特講>을 남겼습니다.

<동의보감>에서는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오장과 연결시켰습니다. 귀를 신장으로, 눈을 간으로, 입을 비위로, 코를 폐로, 혀를 심장과 이어지는 신체 부위로 연결시켰습니다. 형색으로 오장육부의 상태를 어느 정도 측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콧구멍이 유난히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환자는 방광이 좋지 못한 증거이므로 “어릴 적에 소변을 늦게 가리셨지요? 요즘에도 많이 피곤하면 소변 실수를 하실 대가 있지 않습니까?” 하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자신들이 말하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알았을까 하고 놀라워한답니다.

한의학에서 행하는 진료는 환자의 생긴 모습形, 얼굴빛과 피부색色, 맥脈의 상태,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症입니다. 많은 한의사들이 맥의 상태에 치우쳐있는데 형상의학은 사람의 형색을 진료에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진맥을 하거나 환자로부터 호소하는 증상을 듣지 않아도 형색으로 환자의 병증病症을 어느 정도 맞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형상의학은 관상학physiognomy과는 다릅니다. 중국에서 발생한 관상학觀相學은 생김새를 가지고 그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이나 운명을 점치는 반면 형상의학은 질병을 치료하고 보양保養을 목적으로 형색을 살피는 것입니다. 관상학에서는 귀가 크고 귓불이 축 늘어져있는 것을 좋은 상으로 보지만 형상의학에서는 귀가 큰 것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귀가 크면 신장 또한 큰데, 신장이 크면 허리가 잘 아프고 나쁜 기운에 상하기 쉬우므로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여깁니다. 귀는 작으면서 단단해야 좋다고 말합니다.

형상의학에서는 입술이 크고 힘이 없으면 비장이 약한 것으로 보고, 피부색이 희면 폐 기능이 약한 것으로 보며, 지나치게 비만이면 습濕에 약하므로 병에 걸리기 쉬운 것으로 보고, 눈가의 주름은 마음이 허한 것으로 보며, 콧등의 주름은 간이 허한 것으로 봅니다. 형상의학에서는 관골(광대뼈)이 나온 사람을 뼈가 굵은 체질로 봅니다. 뼈가 굵은 사람은 원래 타고난 골격이 튼튼하므로 강단이 있으며 웬만한 일에는 그다지 힘들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열심히 일하는 편이며 쉽게 지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특성 때문에 과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뼛골 빠지게 일합니다. 뼈가 굵은 사람은 뼛골 빠지게 일하기 때문에 뼈 쪽으로 병이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한번 병이 오면 쉽게 고치기 어렵습니다. 건강한 체질이 오히려 병이 되는 경우입니다.

‘골골팔십’이란 말이 있습니다. 형색形色으로 보아서 몸이 약한 사람인데 약한 몸을 보충하여 살기 때문에 더 오래 산다는 뜻입니다. 이와 반대로 매우 건강한 사람들 가운데 요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건강하기 때문에 과로, 과식, 과음을 하기 때문에 불행한 결과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형색을 역이용하면 오히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므로 자신의 형색을 스스로 보고 취약한 부분을 보충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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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朝鮮族의 동래東來

 

 

우리의 고어에 왕의 성씨王姓를 해解라 했습니다.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의 아버지 해모수解慕潄는 태양에서 그 뜻을 취한 것입니다. 고구려 건국신화에 의하면 해모수는 천제天帝의 아들로서 천제의 명령에 따라 서기전 58년 다섯 마리의 용이 끄는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세상을 다스렸는데, 세상에서는 그를 천왕랑天王郎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하루는 웅심산熊心山(백두산) 부근으로 사냥을 나왔다가 하백河伯의 세 딸 중에서 맏딸 유화柳花를 발견하고 유인하여 관계를 맺었고, 이어 하백을 찾아가 자신이 천제의 아들임을 입증함으로써 정식으로 유화와 혼인했습니다. 그러나 딸을 버릴까 두려워한 나머지 옳지 못한 행동을 한 하백의 처사에 분개하여 유화를 버리고 하늘로 올라가버렸습니다. 그 후 유화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낳았다고 합니다. 한편, 해모수는 직접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는 곳으로 내려와 북부여를 세웠으며 부루扶婁를 낳았다는 전승도 있습니다.

흘승골성은 오늘날의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환런현桓仁縣 오녀산에 있는 산성을 말한다고 합니다. 환런현 중심에서 8km 떨어져 있으며, 해발 820m에 있습니다. 200m 높이에 이르는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장벽을 만들고 동쪽과 남쪽의 산세가 완만한 곳만 성벽을 쌓았다고 합니다. 오녀산성의 전체 평면은 직사각형에 가까우며 남북길이 600m, 동서너비 130~300m입니다. 1996년부터 1998년 발물터가 남아 있습니다. 성안은 넓고 평평하며 중앙부에는 천지天池라고 하는 샘이 있습니다. 2004년 다른 고구려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성卒本城으로 비정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왕호王號를 불구내弗矩內라 했는데, 태양의 빛光輝(불그스름함)에서 그 뜻을 취한 것입니굴조사에서 고구려 시대 유물 2천여 점이 발굴되었으며, 저수지, 망대, 병영 등의 건다. 불구내는 신라의 말로 '밝은 빛으로 누리를 다스린다'는 뜻이며,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의 또 다른 명칭입니다. 혁赫은 석독표기釋讀表記 로 ‘-~븕-’이며 거居는 '~그'를 적은 것이고, 세世는 ‘누리’, 내內는 음독표기로 'ㅣ'를 적은 것이므로 /*뉘/로 해독하여 불구내를 말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천국天國을 환桓(환국桓國)이라 했는데, 광명光明(환함)에서 그 뜻을 취한 것입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는 조선족이 최초에 서방 파미르 고원the Pamirs Plateau 혹은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서 동방으로 나와 불함산不咸山(지금의 백두산)을 바라보고 명월明月이 출입하는 곳, 곧 광명신光明神이 쉬고 잠자는 곳으로 알고 그 부근의 토지를 ‘조선’이라 불렀다고 했습니다. 조선은 고어로 광명光明이란 뜻으로, 후세에 와서 이두자吏讀字로 조선朝鮮이라 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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