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무목적적이며, 쾌를 추구하고, 심미적 표현이자 의사소통>




어렸을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님은 “목적이 없는 무목적성의 행위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서, “그것은 세련된 이론이나 논리 이전 우리의 원초의 모습 속에 남아있는 본능”이라고 했는데 동감합니다.
님은 그러한 본능이 지금까지 “남아있다면, 그것이 실용적 가치에 의해서건, 아니면 쾌락을 위해서건, 아니면 심미적인 본능에 의해서건, 단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건, 끊임없이 유전되어온 우리의 본능의 소리에 남아있다면, 바로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예술이라는 형식을 띄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했는데 역시 동감합니다.
님의 말대로 예술은 무목적적이며, 쾌를 추구하고, 심미적 표현이자 의사소통입니다.

님은 혼란 속에 빠져있습니다.
다음의 말에서 혼란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본능이 다양하게 발전하고 변모되어가면서 수없는 변형된 진실들의 홍수 속에 미아가 되어버린 원초가 우리 앞에 헐벗고 초라해진 상처투성이로 서있음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 진정 우리가 찾고 지향해야 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하는 안타까움입니다. 우리가 찾아 헤맨 그 길에서 나는 지금 미아가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글은 사고의 표현인데, 글이 비논리적이면 생각 또한 비논리적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님의 글에서 그런 점이 발견되어 몇 가지 지적하는 것으로 생각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은 나의 생각을 전달하기보다는 님의 생각 속으로 내가 들어가 님의 생각이 어디에서 걷잡을 수 없게 진전되고, 결론에 이르러서는 매우 우울한 생각으로 자책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님은 본능本能이 “다양하게 발전하고 변모되어”간다고 했는데, 본능은 선천적인 감정이나 충동을 말합니다.
칸트의 말로 하면 선험적인 것으로 후험적인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즉 본능은 발전이나 변모하는 것이 아니며, 경험이나 교육으로 조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님이 본능을 “다양하게 발전하고 변모되어”가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다 보니, “변형된 진실들의 홍수 속에 미아가 되어버린 원초가 우리 앞에 헐벗고 초라해진 상처투성이로 서있음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된 것입니다.
진실은 참되고 변하는 않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한 거짓 없는 사실로서의 진실이 변형되었다는 건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그것도 본능이 변모해서 생긴 일처럼 말하는 건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쯤해서 님은 내가 님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고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말할 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언어는 우리가 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우리의 약속입니다.
그 의미가 일치하지 않으면, 소통은 불가능해집니다.
그리고 나는 본래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님은 서두에서 우리의 무목적적 행위가 세련된 이론이나 논리 이전 우리의 원초의 모습 속에 남아있는 본능이라고 매우 논리적이며, 가치 있는 말을 했습니다.
나는 그 말에 동감한다고 했습니다.
님의 말대로 예술은 무목적적이며, 쾌를 추구하고, 심미적 표현이자 의사소통이라고도 동감했습니다.

문제는 님의 다음의 생각에 있었던 것입니다.
본능이 변질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과 그렇기 때문에 진실이 변형된다고 탄식한 데에 있습니다.
실은 본능은 달라지지 않고 달라질 수도 없으며, 따라서 진실은 참된 것으로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님을 괴롭히는 건 자신이 변화하는 세계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님은 변화를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님은 “우연이었던, 아니면 일부 사람들의 우연적 객기에 의해서건, 아니면 제도적 가치에 의해서건, 어떤 것으로 변모해왔던, 지향하던 길이 너무 멀어서 가다가 우회해버린 자들의 괴변 같은 허울 속에 세계가 같이 춤출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염려이기도합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님은 동시대 미술이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간다고 단정하고, 더욱이 “지향하던 길이 너무 멀어서 가다가 우회해버린 자들의 괴변”으로까지 판단한 것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란 생각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님에게 필요한 것은 님과 세계와의 관계입니다.
님이 고민해야 하는 것은 “가식 없는 내면으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의문에 외면할 수 없는 진실에 대한 갈증”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보상심리 상태를 표현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님이 동경에서 벽화를 그릴 때 모필을 사용하면서 “그 모필이 주는 매력에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고 했는데, 소중한 경험입니다.
유화 붓과는 차이가 있다는 말에 동감합니다.
나도 뉴욕에서 그룹전과 개인전을 통해 그림을 발표한 적이 있으므로, 안료와 도구의 사용에서 매력과 희열을 느낀 적이 있기 때문에 님의 글을 읽으면서 상당 부분 공감합니다.
님이 일본의 스기나무와 광목, 그리고 삼베에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 다양한 재료의 특성을 회화에 응용한다고 생각되어 그런 경험이 매우 가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화가는 다양한 안료와 도구, 재료에 대해서 미술사와도 같은 기술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필이 덧칠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님의 말에 동감합니다.
오랜 숙련을 거쳐야만 그 매력의 진수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에도 동감합니다.
“선조들이 요구하던 일필휘지의 경지를 본인이 답습한다는 말은 감히 못 합니다”라고 했는데, 진실한 말입니다.
스승을 능가할 수 없어 낙심한 적이 있다는 것도 진실한 말입니다.

붓을 단숨에 사용하는 일필휘지는 오랜 숙련을 거쳐야 가능합니다.
고도의 기술이지요.
동양화를 한 지 6년이 되었을 때 그런 고도의 기술을 익히지 못해 필을 놓을까도 생각했다는데, 님이 기술을 너무 중시한 때문입니다.
회화를 기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필을 놓을까도 생각했던 것입니다.
회화는 기술이 아닙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기술을 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가지나 자신의 표현을 가능하게 해주는 정도의 기술이면 충분한 것입니다.
회화를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이 있으면, 동시대 회화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회화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없게 됩니다.

싱가포르에서 동양화의 기법으로 벽에 그림을 즉석에서 그리는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건 매우 소중한 경험입니다.
퍼포먼스는 고유한 장르로 그림보다는 그리는 행위를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앞서 님은 비논리적인 말로 자신이 혼란에 빠진 것을 드러냈는데, 글의 후미에 오면 스스로의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본인은 아직도 동양화의 독특한 특질을 극대화시키면서 다양성으로의 진화를 꿈꿉니다. 하지만 예술의 속성상 함께 공유하고 수용하고자 하는 마당이 필요한 작가의 입장에서 길은 멀기만 한데 다양한 홍보들의 홍수 속에 사라져가는 동양화의 침체는 그냥 방관만 할 수 없는 절실함도 따릅니다.”

내가 무릎팍 도사 강호동을 대신해서 님에게 말하겠습니다.

“퍼포먼스를 계속해서 하며 관람자와 직접 소통하고, 자신이 발견한 동양화의 독특한 특질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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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실기의 어그러져 동떨어짐>



님의 글을 읽고 <이론과 실기의 어그러져 동떨어짐>라는 제목으로 답합니다.
‘어그러져 동떨어짐’은 ‘괴리’를 말합니다.


중국 남제南齊 말기의 화가 사혁謝赫은 인물을 한 번만 봐도 생김새의 세밀한 부분들까지 그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혁의 육법六法은 유명하여 이론가로 더욱 알려졌습니다.
사혁은 『고화품록古畵品錄』에 회화의 여섯 가지 미덕으로 기를 생생하게 표현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 안정된 선으로 대상 골격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골법용필骨法用筆, 대상의 형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응물상형應物象形, 대상에 대한 채색인 수류부채隨類賦彩, 구도를 분명하게 하는 경영위치經營位置, 고화古畵를 모사하여 기술과 정신을 배우는 전이모사傳移模寫를 꼽았습니다.
헌데 그가 그린 인물화는 정작 기운정령氣韻精靈의 측면에서 볼 때 생동감이 결여되고, 필치가 섬약하여 웅장하고 아담한 맛이 없는 것으로 정평이 났습니다.
이는 ‘이론과 실기의 어그러져 동떨어짐’이라고 생각되어 이 글의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혹자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크게 드러냄으로써 동양 문화의 우수함을 은근히 주장하려고 하고, 혹은 그 차이가 극복될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폅니다.
님의 글에서도 그런 점이 발견됩니다.
우선 이런 태도는 동서양의 화합 내지는 조화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며, 무엇보다도 동서양에 대한 이해의 부족 현상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동양화를 전공하는 사람에게 사혁의 회화론은 길잡이가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회화론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회화론과 비교하면 다르지 않다는 걸 알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화가는 자연을 좇아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연을 좇는다는 건 무위적인 자연을 스승으로 삼으라는 뜻으로 사혁이 말한 내용과 정확하게 부합합니다.
서양화를 전공하는 사람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회화론은 길잡이가 되어왔습니다.
이렇듯 동서양의 회화론은 다르지 않습니다.

님은 서양화와 동양화을 차별하면서 “서양화의 특징은 즉물적이고 과학적이며 사실적이다”라고 하면서 “동양화는 물상의 과학적 설명보다도 암시적 표현을 갖고 보는 사람의 자유와 상상을 기대한다”고 했습니다.
님이 말한 “서양화의 특징은 즉물적이고 과학적이며 사실적이다”는 사혁이 말한 안정된 선으로 대상 골격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골법용필骨法用筆과 대상의 형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응물상형應物象形 그리고 대상에 대한 채색인 수류부채隨類賦彩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또한 구도를 분명하게 하는 경영위치經營位置에도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서양화에 나타나는 생동감은 사혁이 말한 기를 생생하게 표현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고화古畵를 모사하여 기술과 정신을 배우는 전이모사傳移模寫는 동서양이 같습니다.
서양의 아카데미와 동양의 화원은 같은 기능을 했습니다.
화가들로 하여금 모범적인 고화古畵를 모사하여 기술과 정신을 배우는 전이모사傳移模寫를 강조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에 시작된 에콜 데 보자르에서는 6년 동안 드로잉을 훈련시키고, 우수한 학생들을 국비로 로마로 보내 다시금 고전적인 기술과 정신을 배우게 했습니다.

님은 “동양화는 물상의 과학적 설명보다도 암시적 표현을 갖고 보는 사람의 자유와 상상을 기대한다”고 했는데, 이는 ‘암시적 표현’이 관람자의 ‘자유와 상상을’ 기대하게 만든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그 말에 동감합니다.
그러나 이런 점을 동양화에서 발견되지만 서양화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것이라면 오류라고 말하겠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명한 <모나리자>에 나타난 여인의 수수께끼 같은 미소는 ‘암시적 표현’으로 관람자의 ‘자유와 상상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암시적 표현’으로 말하면,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보다 더 한 것을 동양화에서 예로 제시할 수 있습니까?
마그리트의 작품 외에도 살바도르 달리, 이브 탕기 등의 작품에서도 ‘암시적 표현’은 쉽게 발견되며, 그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는 관람자의 ‘자유와 상상을’ 초월합니다.

님의 글에서 수묵화에 대한 찬탄이 발견됩니다.
수묵화는 그야말로 동양화의 진수입니다.
그리고 여백은 단연 동양화가 지닌 미덕입니다.
그것들이 절대미를 추구하는 수단이라는 데에도 동감합니다.
절대미가 “인간 본연의 회복과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란 주장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서양 미술이 추구한 절대미도 “인간 본연의 회복과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자연을 좇는 것이 곧 절대미를 따르는 것이며, “인간 본연의 회복과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수묵화가 동양의 특징적인 회화의 장르라는 데는 동감하고, 그 장르가 가진 장점이 여백을 통해 관람자에게 자유와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한다는 데는 이의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수묵화만이 절대미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심각한 오류입니다.
이는 다른 장르들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님은 “인위적이고 외형적인 색채와 형상이 인간의 소박한 감각을 해침에 본연의 원천으로 돌아가 기운의 색인 묵색으로 돌아가야 함을 의미함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양한 농도를 보여줌으로써 묵색이 회화의 재료로서 그 가치가 탁월하다는 데는 공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다채로운 회화의 장르를 추구해서는 안 되는 하위의 것인 양 말하는 건 다른 장르에 대한 몰이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개니 소와 같은 동물들의 눈에는 자연이 흑백으로 보이지만, 인간의 눈에는 다양한 컬러의 세계로 보입니다.
반드시 흑백의 세계로 환원해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흑백의 세계로 환원함으로써, 혹은 다채로운 색을 배제함으로써 묵색의 다양한 농도를 통해 자연의 단일함과 무위를 표현하는 건 바람직하지만, 그런 회화가 우위를 점한다는 주장은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장르에 우위의 개념을 도입하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모든 색 가운데 묵색이 가장 우위에 있다고 말하는 것도 색에 대한 불공평한 태도입니다.

전 지금 창가에서 마당을 바라보며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붉은색 장미와 마로니에의 가을을 타는 갈색이 여간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잎이 다양한 초록색으로 빛에 발하는 것도 아름다우며, 강아지의 그라데이션 갈색도 매우 아름답게 보입니다.
오늘은 하늘이 유난히 맑아 푸릅니다.
푸른 하늘이 햇빛에 잠겨 그 끝이 가늠되지 않습니다.

님은 카시미르 말레비치의 <흰색 바탕에 흰색 정사각형>을 보셨습니까?
동양화의 여백에 대한 장점을 이야기했는데, 이 작품은 전체가 여백입니다.
묵색을 찬탄하셨는데, 이것은 온통 흰색입니다.
말레비치는 관람자가 끝없는 순백의 세계에 빠지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님이 말한 절대미가 이 작품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레비치의 작품을 가리켜서 절대주의라고 말합니다.
절제와 여백으로 말하면 피트 몬드리안의 작품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자연을 세 가지 색으로 한정했으며, 자연의 선을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한정했고, 여백을 조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님에게 묻습니다.
님이 찬탄하는 동양화의 미학을 두루 갖춘 작품이 어떤 것인지 제시하십시오.
우리는 언어로는 매우 고상한 사상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화와 관련해서 노장사상을 말하거나 동양철학을 길게 늘어놓더라도 그러한 내용이 내재된 작품을 예로써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는 <이론과 실기의 어그러져 동떨어짐>이라는 것입니다.
이론은 매우 고상하지만 그것이 실기에서 가능하냐 하는 걸 묻는 것입니다.
저는 전에 『교수신문』에 가나아트에서 개인전을 연 어느 화가에 관해 글을 쓰는 청탁을 받고, 가나아트에서 그 화가의 추상화들을 감상했습니다.
그 화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노장사상을 말했습니다.
그 화가의 말을 들으면 그 화가는 매우 고고한 위치에서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얕잡아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헌데 정작 그의 그림을 보고는 그의 작품이 그의 이론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란 걸 알았습니다.
전 『교수신문』에 화가가 노장사상을 말하는 건 자유이지만, 그 화가의 작품에 그런 요소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가 말하는 미학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적었습니다.
이론은 실기와 동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실재하는 작품과 이론을 연결시키지 못하면 그건 어그러져 동떨어짐, 즉 ‘괴리’입니다.
님이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예증할 수 있는 작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사혁의 인물화를 예로 들었지만, 그의 작품은 그가 말한 이론과는 달리 정작 기운정령의 측면에서 볼 때 생동감이 결여되고, 필치가 섬약하여 웅장하고 아담한 맛이 없는 것으로 정평이 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론과 실기의 어그러져 동떨어짐>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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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 정치, 문화, 경제, 사회에서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선 님의 생각은, 님 한 사람만의 생각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저의 답변은 님뿐 아니라 유사한 생각을 가진 분들에게도 해당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님의 의견을 다섯 가지로 요약하여 답변하겠습니다.
1. 님은 “현대 예술의 방향을 모색하는 지성인들의 지적 이기심의 발로가 특이한 현상의 틈새를 공략하는 또 다른 의미의 부르주아적 발상”이라고 했습니다.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는 한 ‘부르주아적 발상’이란 말은 그렇게 거부감이 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데올로기에 관해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기 때문에 ‘부르주아’란 말에 예민하고, 극단적인 이익 추구의 자본주의가 인간의 보편적 자유를 희생하게 하므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르주아’란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주의를 기울이지만,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술가가 부와 명예를 노리는 걸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현대 미술의 방향이 일부 지성인들의 지적 이기심에 의해서 정해졌다는 논리는 오류입니다.
님은 1960년대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 이전까지 서양은 정치, 문화, 경제, 사회에서 소수의 이기심에 의해 주도되었고, 다수에게는 반발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당했습니다.
특히 정치에서 미국의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단일 민족국가에게는 큰 힘이 되었지만, 소수민족들로 구성된 국가에서는 한 민족의 우월주의로 나타났습니다.
역시 님의 말대로 “소수의 이기심의 발로가 특이한 현상의 틈새를 공략한” 것입니다.
월남전에 반대하는 다수의 시위는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에서의 1968년 혁명은 다음해에 드골 내각의 실각을 초래했습니다.
하루에 백만 명이 넘는 학생과 일반인이 거리에서 시위한 건 과거 역사에 없었던 일입니다.
반전운동은 미국에서도 강렬했으며, 마틴 루터 킹의 인종차별 반대운동 또한 매우 강렬했습니다.
다수가 자유와 해방을 위해 투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이 형성되어 그들이 문화의 소비자가 된 것도 특기할 만합니다.
결론으로 말하면 허울 좋은 민주주의가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로 자리매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민중이 더 이상 정신적, 물리적으로 소수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민중이 정치, 문화, 경제, 사회에서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서 단토라든가 어느 철학자들의 사상을 모두 잊고 단순하게 그러나 진정으로 생각해봅시다.
민중이 정치, 문화, 경제, 사회에서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 1960년대부터란 제 말에 동의하십니까?
팝아트, 팝뮤직 등 팝Pop(popular)이란 말이 들어간 문화 현상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문화의 주체가 민중이 되었다는 건 얼마나 신이 나는 일입니까?
미술의 주체가 민중이 되었다는 건 얼마나 신이 나는 일입니까?
정치의 주체가 민중이 되었다는 건 얼마나 신이 나는 일입니까?
민중을 위한 문화, 미술, 정치는 당연히 과거에 비해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중적이란 보편적이란 의미입니다.
아무리 지적이고 철학적이며 전통적이더라도 대중이 원하지 않으면 그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끝으로 님이 언급한 현대 미술의 방향을 소수의 지성인들이 정했다는 생각은 오류입니다.
오히려 대중이 정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1960년대의 시대적 요청이었고, 그러한 요청이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2. 님은 “역사가 또 다른 동질성들이 변형된 모습을 띠고 같은 패러다임을 반복”한다고 했는데, 잘못된 논리입니다.
토머스 쿤의 『과학의 혁명』에 패러다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패러다임이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하게 되는 건 새로운 문제들이 부상할 때 그것이 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때입니다.
두 번째의 해답도 첫 번째 저의 답변에 있습니다.
과거의 정치, 과거의 문화, 과거의 미술이 대중 혹은 민중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대두된 것입니다.
정부의 미국과의 소고기 협상에 대한 촛불시위가 새로운 협상을 가능하게 했던 것처럼 대중 혹은 민중이 정치의 방향을 정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번 국무총리의 자진 사퇴도 여론의 압박에 의한 것이 아닙니까?
팝아트를 그런 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패러다임은 반복될 수 없습니다.
혹시 복고풍의 유행을 염두에 두고 반복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이라면, 복고풍은 유행일 뿐입니다.
유행과 패러다임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3. 님은 “예술이 일부 소외계층까지 영향력을 공유해야 한다는 건 허울 좋은 명목으로 오류”라고 했는데, 님도 다시금 님의 말을 신중하게 읽어보면 스스로 그 말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 것입니다.
예술이 어느 계층을 소외시킨다면, 그것은 본질적인 존재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소외계층이 공유했던 문화가 지하에서 위로 올라와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습니까?
무당, 사당패, 술집을 전전하던 창이 오늘날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대중적인 문화도 소외계층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예술에서 차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4. 님은 “뒤샹과 워홀의 추종자들이 만든 미술을 과연 대중이 이해하느냐?”고 했는데, 이해한다고 생각됩니다.
눈으로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마구 칠해진 추상화보다는 팝아트가 훨씬 이해가 쉽습니다.
우선 그들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중이 다가가기 쉽습니다.
물론 작품에 내재된 작가의 독특한 메시지를 대중 모두가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살리기와 운하를 만들지 않겠다는 매우 단순한 말도 많은 국민들이 이해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말로는 운하를 만들지 않겠다고 했지만, 국민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언어도 그러하거늘 팝아트가 대중 모두에게 이해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장르에 비하면 그리 어렵게 느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님은 “예술은 기술”이라는 그리스인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예술이 어원적으로 기술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1960년대에 그토록 오래된 그리스 미술의 영향이 깨졌습니다.
예술이 기술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술이 곧 기술이라는 패러다임은 붕괴되었습니다.

님처럼 고도의 기술을 구사하는 화가들에게는 기술이 조금밖에 사용되지 않았거나 전혀 사용되지 않은 작품에 거부감이 생길 것입니다.
작품이 너무 쉽게 생산되는 것에 대해 반감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고도의 기술이 요하는 작품을 관람자는 다른 장르에서 즐길 수 있습니다.
영화 <아바타> 같은 것이 하나의 예입니다.
컴퓨터 그래픽에 의한 작품들은 우릴 놀라게 합니다.

아직도 사실주의 초사실주의 혹은 극사실주의 작업을 하는 화가들이 있습니다.
카메라와 경쟁하려는 고도의 기술을 가진 화가들이 있으며, 그들의 작품이 주는 놀라움이 또한 있습니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단순 재현이 주는 감동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관람자는 화가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화가가 무엇을 그렸느냐 하는 걸 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왜 그렸느냐 하는 걸 알기를 원합니다.
그림을 통해서 단순한 재현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화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기를 원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재현에 충실한 그림을 그렸다면, 또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전통적인 주제를 그린 것이라면 그런 그림은 솜씨 혹은 기술을 보여준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직도 기술에 감탄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그런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는 있지만, 보편적인 사랑 혹은 대중의 사랑을 받기에는 매우 부족합니다.

앞선 글에서 대중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한 건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소통한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여간 노력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한 건 그런 지식을 가져야 소통하는 기술을 익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술만이 능사라면 그 사람은 전통 공예로 향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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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소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강구하세요>



님의 글을 읽고 몇 자 적습니다.
우선 ‘종언end’ 혹은 ‘종말’의 개념은 아서 단토에 한정된 건 아닙니다.
1980년대에 ‘종언’이란 단어가 들어간 책의 제목이 많은데, 특히 미술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이 두드러집니다.
종말이란 세계의 환경이 변했다는 걸 말합니다.
새로운 출발을 자각하는 걸 말합니다.
새로운 미술, 새로운 역사를 의미합니다.
세계의 환경을 주도하는 건 세계화입니다.
지역의 울타리, 나라의 울타리가 혹은 각 개념 혹은 관념 혹은 전통의 울타리가 사라지는 겁니다.
인간을 관념이나 개념적으로, 그리고 지역적으로 구속하는 것이 사라지는 걸 말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인간의 자유가 확대되는 걸 말합니다.
미래와 관련해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계획할 수 없는 걸 말합니다.
다만 우리가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우선 ‘미술의 종말’은 미국과 독일에서 먼저 제기되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미술사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양미술사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동양미술사는 종말을 고하지 않은 것이냐고 묻고 싶겠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과거와 같은 유형의 미술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겠지만 세계화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지역적이고, 전통적이고, 동일한 유형의 미술을 고집하는 것이 됩니다.
세계화란 전 세계 사람들을 관람자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걸 말합니다.
한국, 혹은 동양의 관람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을 상대로 작업하는 걸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화의 환경에서 활동하고 싶은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성을 띠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미국의 경우, 미술의 종말은 1960년대 말 뉴욕에 거주하던 예술가들이 술집에 모여서 미술이란 무엇인가, 미술품이란 무엇인가 하는 주제로 토론하면서 그 영향이 파급되었습니다.
왜냐면 팝아트가 예상외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팝아트는 대중의 취향에 눈높이를 맞춘 미술입니다.
물론 질을 한참 떨어뜨렸습니다.
소수의 지성인들을 위한 미술에서 다수의 대중을 위한 미술로 변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된 데는 중산층의 형성이 원인이었습니다.
문화의 소비 주체가 소수의 부자에서 다수의 중산층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작품 하나를 제작해서 부자에게 파는 것보다는 한 작품을 판화로 수백 점을 만들어 좀 더 싼값으로 다수의 중산층에게 파는 것이 수익성이 있을 뿐 아니라 유명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님도 예술가의 한 사람이라면, 돈과 명성 중 하나 혹은 둘 다 얻기를 원할 것입니다.

미술의 종말은 1970년대 개념주의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예술가들은 작품을 더 이상 눈으로 감상하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머리로 감상하는 대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님의 말로 하면 해석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볼거리로 말하면 그림이나 조형물 말고도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미술품이 해석의 대상이 되자, 개념 파괴적인 작품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없게 되자, 어느 누구라도 예술가가 될 수 있게 되었으며, 실제로 미대 출신이 아닌 사람들도 미술에서 성공을 거뒀습니다.
미술이 손을 사용하는 기술의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에 미대에 들어가 훈련을 받을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미술품으로 동굴 벽화를 꼽는데, 그 벽화를 원시인 가운데 미술 훈련을 받은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닙니다.
원시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라도 그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미술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누구라도 예술가가 될 수 있습니다.
소묘를 잘해야만 되는 것도 아니고 오랜 훈련을 거쳐서 안료를 잘 다뤄야만 되는 건 아닙니다.
왜냐면 미술은 기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고도의 기술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런 유형의 작품을 우수하다고 생각하지만, 관람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르셀 뒤샹 이후 많은 예술가들이 스스로 작품을 제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문 생산하고 있습니다.
기술을 차용하는 것입니다.
기술은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미술품은 아이디어이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정교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진처럼 보일 정도로 그린 그림이 있다면, 그 그림이 관람자에게 빼어난 화가의 기술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내용에서 아이디어가 없거나 빈곤하다면, 즉 과거의 진부한 구성이나 주제라고 한다면 관람자가 그것에 존경심을 표하겠습니까?
관람자는 화가가 얼마나 빼어난 기술을 발휘하는지를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관람자는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을 보길 원합니다.
예술가가 그림으로 관람자와 소통하려면, 관람자의 눈만을 자극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도록 해야 합니다.
동양화에서 전통적인 주제나 구성의 작품은 얼마나 진부합니까?
같은 유형의 그림을 보고 또 본다면 감동이 있겠습니까?

이제 예술가들은 수준 높은 관람자를 의식해야 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단지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대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해방감을 주고 더 큰 세계로 나아가는 교두보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술가들은 현재의 정신적 흐름을 읽어내야 합니다.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고, 많은 예술가들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작품은 소통의 대상입니다.
스스로 훌륭하다고 생각되더라도 그 작품이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작품으로서 가치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대에 소통되지 않다가 훗날에야 소통 가능했던 작품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소통되어야 합니다.

님도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소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강구하세요.
이기적인 생각이란 자신의 생각에 빠져서 보편적이지 못한 판단을 하는 걸 말합니다.
관람자가 내 작품을 반드시 이해해한다고 주장하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관람자가 내 작품의 우수함을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소통하려는 태도가 아닙니다.
예술가는 관람자보다 더 나은 생각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작품을 통해 표현해야 합니다.
예술가가 정신적으로 관람자의 수준보다 낮으면 그렇게 해서 생산된 작품은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미술에 관한 책 말고도 많은 인문학적, 자연과학적 책을 읽어야 합니다.
오늘날 무엇이 우리의 고민인지 알아야 합니다.
수요를 알아야 공급을 결정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관람자를 더욱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너무 쉽게 수준 낮다고 평가하지 말고 관람자들이 어떤 이유에서 그런 작품들을 받아들이는지 이해하려는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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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과 비디오아트의 교황 백남준>

(다음은 어느 기관지에서 청탁해와 보낸 글입니다.)


1963년, 앤디 워홀Andy Warhol(1928~87)이 뉴욕에서 만화와 광고, 신문기사를 캔버스에 아크릴로 재현하거나 실크스크린으로 떠 다량 생산함으로써 팝아트의 독보적인 위상을 나타낼 때, 백남준(1932~2006)은 독일의 서부 도시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전’ 전시회를 열고 새로운 장르 비디오아트를 선보였다.

워홀은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기회의 나라’ 미국으로 이주해온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이었고, 백남준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한국이란 나라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을 때 일본을 거쳐 1956년 독일로 간 예술가였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과 가난한 나라의 사람으로 서양 미술세계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최고의 고지에 오른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극찬을 받았는데, 워홀은 팝아트의 황제,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교황으로 불리었다.

팝아트와 비디오아트를 이해하기 위해선 1960년대가 지닌 시대의 정신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1960년대는 평화와 부의 시대였지만 이는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고 그 이면에는 정치적·사회적 병폐의 기미가 있었다.
1960년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데모하던 학생들이 무장한 경찰관들의 공격을 받았고, 1963년에는 20만 명의 시민이 수도 워싱턴에 모여 백인과 흑인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 온 밥 딜런의 저항적 노래는 불평에 가득 찬 젊은이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 정부는 더 많은 군사적 조력자들을 은밀히 남베트남으로 보내 북쪽의 공산주의 침략자들에 대항하게 했다.
베를린에는 1961년 장벽이 세워져 독일을 둘로 나눴다. 팝아트와 비디오아트는 이런 평화와 부, 그리고 분노의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으며, 실재와 외양의 불일치는 그 시대의 특징이었다.

표면상의 경박함을 보고 팝아트와 비디오아트를 비지성적인 것으로 판단하거나 표면상의 초탈함을 보고 참여의식의 결여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둘 다 고도의 자의식 운동이었으며, 새로운 미술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전통 미술 개념을 풍자하고 동시대 일상문화의 평범함과 통속성을 미술의 재료로 끌어들여 격상시킨 팝아트와 비디오아트 작품의 평범함과 통속성이라는 외관 뒤에 숨겨진 고도의 솜씨와 디자인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워홀은 어린 시절의 영웅주의 인물이나 자신이 즐겨 먹고 마시던 상품을 회화의 주제로 선택했는데, 그것들은 뽀빠이, 낸시, 딕 트레이시, 배트맨, 슈퍼맨, 코카콜라, 브릴로 패드, 하인즈 케첩, 캠벨의 토마토주스, 켈로그의 얇은 옥수수 조형물 등이었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그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새로운 양식으로 디자인했다.
그는 1962년 8월에 야구선수들을 시작으로 영화배우들의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뜨는 작업을 시작했다.
8월 5일 매력적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치명적으로 약을 과량 복용하여 죽자 바로 다음날 그녀의 초상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100개의 마릴린이 하나보다 낫다>에서처럼 많은 수로 반복하기도 했다.
마릴린과 리즈의 초상화가 그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다.
오브제들이나 개체들은 미술품 내에서의 반복되고 그리고 하나가 복제들을 대량 생산한다. 반복과 복제는 의미의 대상, 혹은 기호를 소멸시키는 걸 의미했다.

워홀은 스텐실에 기초하는 판화 기법인 실크스크린Silkscreen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상업 디자인에 사용되던 실크스크린은 1960년대 들어서 예술가들의 판화 작업에 사용되었다.
이 방법은 나무틀에 가는 망으로 된 스크린을 팽팽히 잡아당겨 씌우고, 이것을 종이 위에 올려놓고 고무롤러를 이용해 물감이 망으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스크린이 주로 실크로 되어 있었으므로 실크스크린이란 용어가 생긴 것이다.

워홀의 작업 시기를 1950년대와 1960년대 둘로 구분할 수 있다.
레코드와 책 표지 그리고 광고는 돈을 위해서이고 팝 회화와 영화는 훌륭한 예술가라는 불멸의 명성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이런 구분은 단순하지 않은데 그가 팝 시기인 1960년대에 상업적 작업을 비밀에 붙여 계속했기 때문이며, 1968년 이후 그가 비지니스아트라고 명명한 위임받은 프로젝트들을 돈을 위해 노골적으로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다.

워홀은 명백한 자아의식이나 억제 없이 끊임없이 생산했다.
예술이 용이하기를 바랐고 오로지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더 많이 만들 수 있으며 더 신속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더욱 접근하기 쉬우며, 대중적이고, 그리고 숨김없는 행동의 영역이 되는 구조물을 만드는 걸 용이하게 하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워홀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다.
그는 그 자신의 사례, 제스처와 희극적 행동, 영웅적 삶을 남겼다.

백남준이 파르나스 화랑에서 선보인 작품은 13대의 TV와 피아노로 구성되었다.
TV의 출현은 새로운 시각예술의 장르가 되는 미술사에 구두점을 찍는 전시회였다.
장치된 TV는 TV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방송 이미지를 왜곡시키거나 브라운관을 조작하여 스크린에 추상적 선묘를 창출하는 기능을 지녔다.
백남준은 조작과정에서 예술적 의도나 기술을 배제하고 순전히 기계적 과정에만 의존하여 우연적이며 무작위적인 이미지를 얻어냈다.
무작위로 얻어진 이미지는 예측할 수 없는 시각적 비결정성과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13대의 TV 수상기들은 생방송 이미지를 왜곡시켜 일그러진 저명인사의 얼굴을 만들거나 흑백 이미지의 명암을 도치시키거나 혹은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화면에 추상적 주사선을 만들었다.

1964년 뉴욕에 정착한 백남준은 이듬해 소니사의 휴대용 비디오 녹화기가 뉴욕에서 판매되자마자 이를 구입하고 즉시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그 날 저녁 예술가 클럽 카페 고고에서 선보였다.
백남준은 TV 스크린 위에 자석을 놓아 방영되는 이미지를 일그러뜨렸다.
비디오 작업으로 전환한 후 백남준은 종종 첼리스트 샤롯 무어만과 공동으로 작업했다.
1965년에 소개한 <성인만을 위한 첼로 소나타 제1번>은 에로틱한 작품이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의 무어만은 <첼로 조곡>을 연주하면서 거의 누드가 될 때까지 연주와 옷 벗기를 교대로 계속했다.
같은 해 발표한 <생상스 테마의 변주곡>에서 그녀는 좀 더 과격한 행위를 보여주었는데, 카미유 생상스의 「백조」를 연주하다 말고 옆에 준비된 물탱크로 기어 올라가 물속에 몸을 담그고 내려와 젖은 몸으로 연주를 계속했다.
특히 무어만은 두 개의 축소된 TV 스크린으로 된 브라를 착용하고 첼로를 연주하는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1969)로 유명하다.
무어만은 백남준의 다른 퍼포먼스 작업에서 우발적 노출이 문제가 되어 체포된 적도 있었다.

백남준에 의해 미술에서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장르가 1960년대 초 자리 잡은 뒤 백남준의 제자들에 의해 이 장르가 크게 확장되어 오늘날 전시회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비디오아트에 사용되는 영상물 대부분은 레디메이드ready made이다.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수집, 편집한 것이다.

팝아트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레디메이드를 사용한다.
진부한 이미지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여주거나 편집을 통해 무심하게 대했던 이미지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기교적 특징은 복제와 반복인데, 복제는 예술의 개념이 한정되지 않음을 시위하는 것이고, 동일한 것이 반복되면 관람자는 그것이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정말 사랑 해”보다는 “정말 정말 정말 사랑 해”가 더 중요한 표현처럼 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일상의 평범하고 통속적인 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두 장르에는 공통점이 있다.
드러나는 평범함과 통속성 이면에 숨겨진 예술가의 고도한 솜씨와 디자인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관람자는 팝아트와 비디오아트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작품
도판 1: 앤디 워홀의 <푸른 코카콜라 병 Green Coca-Cola Bottles>, 1963, 캔버스에 아크릴, 145×209cm.
워홀은 112개의 코카콜라 병을 가로세로로 반복해 대량생산품의 기계적 이미지를 조형적 요소로 사용했다.
동시에 병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물체로 존재하도록 조금씩 다르게 그렸다.
같은 이미지가 반복되지만 같은 건 없다.
우리의 일상 행위도 반복되지만 같은 건 없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그리고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을 이 작품에서 느낄 수 있다.

도판 2: 엔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 1962, 캔버스에 아크릴, 41×51cm.
워홀은 여배우의 사진으로 초상화를 만들면서 회화적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색이 일부러 밖으로 삐져나오도록 했다.
머리보다 노란색 면적을 더 크게 칠했고, 붉은 색은 입술 밖으로 번지게 했다.
고도한 솜씨와 디자인이다.
코카콜라 병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레디메이드를 사용한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에 인위적인 솜씨와 디자인을 가해 새로운 이미지로 탈바꿈하게 한 것이다.
진부한 것을 변용시킨 것이다.
팝아트와 비디오아트 작품을 ‘진부한 것의 변용’이란 시각으로 바라보면 이해가 수월해진다.
예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을 관람자가 예술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건 진부한 이미지가 미술관이나 화랑에서 변용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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