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무목적적이며, 쾌를 추구하고, 심미적 표현이자 의사소통>
어렸을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님은 “목적이 없는 무목적성의 행위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서, “그것은 세련된 이론이나 논리 이전 우리의 원초의 모습 속에 남아있는 본능”이라고 했는데 동감합니다.
님은 그러한 본능이 지금까지 “남아있다면, 그것이 실용적 가치에 의해서건, 아니면 쾌락을 위해서건, 아니면 심미적인 본능에 의해서건, 단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건, 끊임없이 유전되어온 우리의 본능의 소리에 남아있다면, 바로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예술이라는 형식을 띄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했는데 역시 동감합니다.
님의 말대로 예술은 무목적적이며, 쾌를 추구하고, 심미적 표현이자 의사소통입니다.
님은 혼란 속에 빠져있습니다.
다음의 말에서 혼란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본능이 다양하게 발전하고 변모되어가면서 수없는 변형된 진실들의 홍수 속에 미아가 되어버린 원초가 우리 앞에 헐벗고 초라해진 상처투성이로 서있음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 진정 우리가 찾고 지향해야 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하는 안타까움입니다. 우리가 찾아 헤맨 그 길에서 나는 지금 미아가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글은 사고의 표현인데, 글이 비논리적이면 생각 또한 비논리적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님의 글에서 그런 점이 발견되어 몇 가지 지적하는 것으로 생각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은 나의 생각을 전달하기보다는 님의 생각 속으로 내가 들어가 님의 생각이 어디에서 걷잡을 수 없게 진전되고, 결론에 이르러서는 매우 우울한 생각으로 자책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님은 본능本能이 “다양하게 발전하고 변모되어”간다고 했는데, 본능은 선천적인 감정이나 충동을 말합니다.
칸트의 말로 하면 선험적인 것으로 후험적인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즉 본능은 발전이나 변모하는 것이 아니며, 경험이나 교육으로 조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님이 본능을 “다양하게 발전하고 변모되어”가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다 보니, “변형된 진실들의 홍수 속에 미아가 되어버린 원초가 우리 앞에 헐벗고 초라해진 상처투성이로 서있음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된 것입니다.
진실은 참되고 변하는 않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한 거짓 없는 사실로서의 진실이 변형되었다는 건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그것도 본능이 변모해서 생긴 일처럼 말하는 건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쯤해서 님은 내가 님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고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말할 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언어는 우리가 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우리의 약속입니다.
그 의미가 일치하지 않으면, 소통은 불가능해집니다.
그리고 나는 본래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님은 서두에서 우리의 무목적적 행위가 세련된 이론이나 논리 이전 우리의 원초의 모습 속에 남아있는 본능이라고 매우 논리적이며, 가치 있는 말을 했습니다.
나는 그 말에 동감한다고 했습니다.
님의 말대로 예술은 무목적적이며, 쾌를 추구하고, 심미적 표현이자 의사소통이라고도 동감했습니다.
문제는 님의 다음의 생각에 있었던 것입니다.
본능이 변질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과 그렇기 때문에 진실이 변형된다고 탄식한 데에 있습니다.
실은 본능은 달라지지 않고 달라질 수도 없으며, 따라서 진실은 참된 것으로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님을 괴롭히는 건 자신이 변화하는 세계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님은 변화를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님은 “우연이었던, 아니면 일부 사람들의 우연적 객기에 의해서건, 아니면 제도적 가치에 의해서건, 어떤 것으로 변모해왔던, 지향하던 길이 너무 멀어서 가다가 우회해버린 자들의 괴변 같은 허울 속에 세계가 같이 춤출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염려이기도합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님은 동시대 미술이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간다고 단정하고, 더욱이 “지향하던 길이 너무 멀어서 가다가 우회해버린 자들의 괴변”으로까지 판단한 것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란 생각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님에게 필요한 것은 님과 세계와의 관계입니다.
님이 고민해야 하는 것은 “가식 없는 내면으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의문에 외면할 수 없는 진실에 대한 갈증”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보상심리 상태를 표현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님이 동경에서 벽화를 그릴 때 모필을 사용하면서 “그 모필이 주는 매력에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고 했는데, 소중한 경험입니다.
유화 붓과는 차이가 있다는 말에 동감합니다.
나도 뉴욕에서 그룹전과 개인전을 통해 그림을 발표한 적이 있으므로, 안료와 도구의 사용에서 매력과 희열을 느낀 적이 있기 때문에 님의 글을 읽으면서 상당 부분 공감합니다.
님이 일본의 스기나무와 광목, 그리고 삼베에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 다양한 재료의 특성을 회화에 응용한다고 생각되어 그런 경험이 매우 가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화가는 다양한 안료와 도구, 재료에 대해서 미술사와도 같은 기술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필이 덧칠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님의 말에 동감합니다.
오랜 숙련을 거쳐야만 그 매력의 진수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에도 동감합니다.
“선조들이 요구하던 일필휘지의 경지를 본인이 답습한다는 말은 감히 못 합니다”라고 했는데, 진실한 말입니다.
스승을 능가할 수 없어 낙심한 적이 있다는 것도 진실한 말입니다.
붓을 단숨에 사용하는 일필휘지는 오랜 숙련을 거쳐야 가능합니다.
고도의 기술이지요.
동양화를 한 지 6년이 되었을 때 그런 고도의 기술을 익히지 못해 필을 놓을까도 생각했다는데, 님이 기술을 너무 중시한 때문입니다.
회화를 기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필을 놓을까도 생각했던 것입니다.
회화는 기술이 아닙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기술을 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가지나 자신의 표현을 가능하게 해주는 정도의 기술이면 충분한 것입니다.
회화를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이 있으면, 동시대 회화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회화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없게 됩니다.
싱가포르에서 동양화의 기법으로 벽에 그림을 즉석에서 그리는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건 매우 소중한 경험입니다.
퍼포먼스는 고유한 장르로 그림보다는 그리는 행위를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앞서 님은 비논리적인 말로 자신이 혼란에 빠진 것을 드러냈는데, 글의 후미에 오면 스스로의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본인은 아직도 동양화의 독특한 특질을 극대화시키면서 다양성으로의 진화를 꿈꿉니다. 하지만 예술의 속성상 함께 공유하고 수용하고자 하는 마당이 필요한 작가의 입장에서 길은 멀기만 한데 다양한 홍보들의 홍수 속에 사라져가는 동양화의 침체는 그냥 방관만 할 수 없는 절실함도 따릅니다.”
내가 무릎팍 도사 강호동을 대신해서 님에게 말하겠습니다.
“퍼포먼스를 계속해서 하며 관람자와 직접 소통하고, 자신이 발견한 동양화의 독특한 특질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