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소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강구하세요>



님의 글을 읽고 몇 자 적습니다.
우선 ‘종언end’ 혹은 ‘종말’의 개념은 아서 단토에 한정된 건 아닙니다.
1980년대에 ‘종언’이란 단어가 들어간 책의 제목이 많은데, 특히 미술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이 두드러집니다.
종말이란 세계의 환경이 변했다는 걸 말합니다.
새로운 출발을 자각하는 걸 말합니다.
새로운 미술, 새로운 역사를 의미합니다.
세계의 환경을 주도하는 건 세계화입니다.
지역의 울타리, 나라의 울타리가 혹은 각 개념 혹은 관념 혹은 전통의 울타리가 사라지는 겁니다.
인간을 관념이나 개념적으로, 그리고 지역적으로 구속하는 것이 사라지는 걸 말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인간의 자유가 확대되는 걸 말합니다.
미래와 관련해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계획할 수 없는 걸 말합니다.
다만 우리가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우선 ‘미술의 종말’은 미국과 독일에서 먼저 제기되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미술사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양미술사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동양미술사는 종말을 고하지 않은 것이냐고 묻고 싶겠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과거와 같은 유형의 미술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겠지만 세계화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지역적이고, 전통적이고, 동일한 유형의 미술을 고집하는 것이 됩니다.
세계화란 전 세계 사람들을 관람자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걸 말합니다.
한국, 혹은 동양의 관람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을 상대로 작업하는 걸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화의 환경에서 활동하고 싶은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성을 띠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미국의 경우, 미술의 종말은 1960년대 말 뉴욕에 거주하던 예술가들이 술집에 모여서 미술이란 무엇인가, 미술품이란 무엇인가 하는 주제로 토론하면서 그 영향이 파급되었습니다.
왜냐면 팝아트가 예상외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팝아트는 대중의 취향에 눈높이를 맞춘 미술입니다.
물론 질을 한참 떨어뜨렸습니다.
소수의 지성인들을 위한 미술에서 다수의 대중을 위한 미술로 변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된 데는 중산층의 형성이 원인이었습니다.
문화의 소비 주체가 소수의 부자에서 다수의 중산층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작품 하나를 제작해서 부자에게 파는 것보다는 한 작품을 판화로 수백 점을 만들어 좀 더 싼값으로 다수의 중산층에게 파는 것이 수익성이 있을 뿐 아니라 유명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님도 예술가의 한 사람이라면, 돈과 명성 중 하나 혹은 둘 다 얻기를 원할 것입니다.

미술의 종말은 1970년대 개념주의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예술가들은 작품을 더 이상 눈으로 감상하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머리로 감상하는 대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님의 말로 하면 해석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볼거리로 말하면 그림이나 조형물 말고도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미술품이 해석의 대상이 되자, 개념 파괴적인 작품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없게 되자, 어느 누구라도 예술가가 될 수 있게 되었으며, 실제로 미대 출신이 아닌 사람들도 미술에서 성공을 거뒀습니다.
미술이 손을 사용하는 기술의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에 미대에 들어가 훈련을 받을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미술품으로 동굴 벽화를 꼽는데, 그 벽화를 원시인 가운데 미술 훈련을 받은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닙니다.
원시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라도 그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미술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누구라도 예술가가 될 수 있습니다.
소묘를 잘해야만 되는 것도 아니고 오랜 훈련을 거쳐서 안료를 잘 다뤄야만 되는 건 아닙니다.
왜냐면 미술은 기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고도의 기술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런 유형의 작품을 우수하다고 생각하지만, 관람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르셀 뒤샹 이후 많은 예술가들이 스스로 작품을 제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문 생산하고 있습니다.
기술을 차용하는 것입니다.
기술은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미술품은 아이디어이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정교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진처럼 보일 정도로 그린 그림이 있다면, 그 그림이 관람자에게 빼어난 화가의 기술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내용에서 아이디어가 없거나 빈곤하다면, 즉 과거의 진부한 구성이나 주제라고 한다면 관람자가 그것에 존경심을 표하겠습니까?
관람자는 화가가 얼마나 빼어난 기술을 발휘하는지를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관람자는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을 보길 원합니다.
예술가가 그림으로 관람자와 소통하려면, 관람자의 눈만을 자극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도록 해야 합니다.
동양화에서 전통적인 주제나 구성의 작품은 얼마나 진부합니까?
같은 유형의 그림을 보고 또 본다면 감동이 있겠습니까?

이제 예술가들은 수준 높은 관람자를 의식해야 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단지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대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해방감을 주고 더 큰 세계로 나아가는 교두보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술가들은 현재의 정신적 흐름을 읽어내야 합니다.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고, 많은 예술가들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작품은 소통의 대상입니다.
스스로 훌륭하다고 생각되더라도 그 작품이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작품으로서 가치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대에 소통되지 않다가 훗날에야 소통 가능했던 작품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소통되어야 합니다.

님도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소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강구하세요.
이기적인 생각이란 자신의 생각에 빠져서 보편적이지 못한 판단을 하는 걸 말합니다.
관람자가 내 작품을 반드시 이해해한다고 주장하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관람자가 내 작품의 우수함을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소통하려는 태도가 아닙니다.
예술가는 관람자보다 더 나은 생각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작품을 통해 표현해야 합니다.
예술가가 정신적으로 관람자의 수준보다 낮으면 그렇게 해서 생산된 작품은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미술에 관한 책 말고도 많은 인문학적, 자연과학적 책을 읽어야 합니다.
오늘날 무엇이 우리의 고민인지 알아야 합니다.
수요를 알아야 공급을 결정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관람자를 더욱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너무 쉽게 수준 낮다고 평가하지 말고 관람자들이 어떤 이유에서 그런 작품들을 받아들이는지 이해하려는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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