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과 비디오아트의 교황 백남준>

(다음은 어느 기관지에서 청탁해와 보낸 글입니다.)


1963년, 앤디 워홀Andy Warhol(1928~87)이 뉴욕에서 만화와 광고, 신문기사를 캔버스에 아크릴로 재현하거나 실크스크린으로 떠 다량 생산함으로써 팝아트의 독보적인 위상을 나타낼 때, 백남준(1932~2006)은 독일의 서부 도시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전’ 전시회를 열고 새로운 장르 비디오아트를 선보였다.

워홀은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기회의 나라’ 미국으로 이주해온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이었고, 백남준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한국이란 나라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을 때 일본을 거쳐 1956년 독일로 간 예술가였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과 가난한 나라의 사람으로 서양 미술세계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최고의 고지에 오른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극찬을 받았는데, 워홀은 팝아트의 황제,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교황으로 불리었다.

팝아트와 비디오아트를 이해하기 위해선 1960년대가 지닌 시대의 정신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1960년대는 평화와 부의 시대였지만 이는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고 그 이면에는 정치적·사회적 병폐의 기미가 있었다.
1960년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데모하던 학생들이 무장한 경찰관들의 공격을 받았고, 1963년에는 20만 명의 시민이 수도 워싱턴에 모여 백인과 흑인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 온 밥 딜런의 저항적 노래는 불평에 가득 찬 젊은이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 정부는 더 많은 군사적 조력자들을 은밀히 남베트남으로 보내 북쪽의 공산주의 침략자들에 대항하게 했다.
베를린에는 1961년 장벽이 세워져 독일을 둘로 나눴다. 팝아트와 비디오아트는 이런 평화와 부, 그리고 분노의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으며, 실재와 외양의 불일치는 그 시대의 특징이었다.

표면상의 경박함을 보고 팝아트와 비디오아트를 비지성적인 것으로 판단하거나 표면상의 초탈함을 보고 참여의식의 결여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둘 다 고도의 자의식 운동이었으며, 새로운 미술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전통 미술 개념을 풍자하고 동시대 일상문화의 평범함과 통속성을 미술의 재료로 끌어들여 격상시킨 팝아트와 비디오아트 작품의 평범함과 통속성이라는 외관 뒤에 숨겨진 고도의 솜씨와 디자인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워홀은 어린 시절의 영웅주의 인물이나 자신이 즐겨 먹고 마시던 상품을 회화의 주제로 선택했는데, 그것들은 뽀빠이, 낸시, 딕 트레이시, 배트맨, 슈퍼맨, 코카콜라, 브릴로 패드, 하인즈 케첩, 캠벨의 토마토주스, 켈로그의 얇은 옥수수 조형물 등이었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그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새로운 양식으로 디자인했다.
그는 1962년 8월에 야구선수들을 시작으로 영화배우들의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뜨는 작업을 시작했다.
8월 5일 매력적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치명적으로 약을 과량 복용하여 죽자 바로 다음날 그녀의 초상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100개의 마릴린이 하나보다 낫다>에서처럼 많은 수로 반복하기도 했다.
마릴린과 리즈의 초상화가 그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다.
오브제들이나 개체들은 미술품 내에서의 반복되고 그리고 하나가 복제들을 대량 생산한다. 반복과 복제는 의미의 대상, 혹은 기호를 소멸시키는 걸 의미했다.

워홀은 스텐실에 기초하는 판화 기법인 실크스크린Silkscreen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상업 디자인에 사용되던 실크스크린은 1960년대 들어서 예술가들의 판화 작업에 사용되었다.
이 방법은 나무틀에 가는 망으로 된 스크린을 팽팽히 잡아당겨 씌우고, 이것을 종이 위에 올려놓고 고무롤러를 이용해 물감이 망으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스크린이 주로 실크로 되어 있었으므로 실크스크린이란 용어가 생긴 것이다.

워홀의 작업 시기를 1950년대와 1960년대 둘로 구분할 수 있다.
레코드와 책 표지 그리고 광고는 돈을 위해서이고 팝 회화와 영화는 훌륭한 예술가라는 불멸의 명성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이런 구분은 단순하지 않은데 그가 팝 시기인 1960년대에 상업적 작업을 비밀에 붙여 계속했기 때문이며, 1968년 이후 그가 비지니스아트라고 명명한 위임받은 프로젝트들을 돈을 위해 노골적으로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다.

워홀은 명백한 자아의식이나 억제 없이 끊임없이 생산했다.
예술이 용이하기를 바랐고 오로지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더 많이 만들 수 있으며 더 신속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더욱 접근하기 쉬우며, 대중적이고, 그리고 숨김없는 행동의 영역이 되는 구조물을 만드는 걸 용이하게 하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워홀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다.
그는 그 자신의 사례, 제스처와 희극적 행동, 영웅적 삶을 남겼다.

백남준이 파르나스 화랑에서 선보인 작품은 13대의 TV와 피아노로 구성되었다.
TV의 출현은 새로운 시각예술의 장르가 되는 미술사에 구두점을 찍는 전시회였다.
장치된 TV는 TV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방송 이미지를 왜곡시키거나 브라운관을 조작하여 스크린에 추상적 선묘를 창출하는 기능을 지녔다.
백남준은 조작과정에서 예술적 의도나 기술을 배제하고 순전히 기계적 과정에만 의존하여 우연적이며 무작위적인 이미지를 얻어냈다.
무작위로 얻어진 이미지는 예측할 수 없는 시각적 비결정성과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13대의 TV 수상기들은 생방송 이미지를 왜곡시켜 일그러진 저명인사의 얼굴을 만들거나 흑백 이미지의 명암을 도치시키거나 혹은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화면에 추상적 주사선을 만들었다.

1964년 뉴욕에 정착한 백남준은 이듬해 소니사의 휴대용 비디오 녹화기가 뉴욕에서 판매되자마자 이를 구입하고 즉시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그 날 저녁 예술가 클럽 카페 고고에서 선보였다.
백남준은 TV 스크린 위에 자석을 놓아 방영되는 이미지를 일그러뜨렸다.
비디오 작업으로 전환한 후 백남준은 종종 첼리스트 샤롯 무어만과 공동으로 작업했다.
1965년에 소개한 <성인만을 위한 첼로 소나타 제1번>은 에로틱한 작품이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의 무어만은 <첼로 조곡>을 연주하면서 거의 누드가 될 때까지 연주와 옷 벗기를 교대로 계속했다.
같은 해 발표한 <생상스 테마의 변주곡>에서 그녀는 좀 더 과격한 행위를 보여주었는데, 카미유 생상스의 「백조」를 연주하다 말고 옆에 준비된 물탱크로 기어 올라가 물속에 몸을 담그고 내려와 젖은 몸으로 연주를 계속했다.
특히 무어만은 두 개의 축소된 TV 스크린으로 된 브라를 착용하고 첼로를 연주하는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1969)로 유명하다.
무어만은 백남준의 다른 퍼포먼스 작업에서 우발적 노출이 문제가 되어 체포된 적도 있었다.

백남준에 의해 미술에서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장르가 1960년대 초 자리 잡은 뒤 백남준의 제자들에 의해 이 장르가 크게 확장되어 오늘날 전시회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비디오아트에 사용되는 영상물 대부분은 레디메이드ready made이다.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수집, 편집한 것이다.

팝아트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레디메이드를 사용한다.
진부한 이미지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여주거나 편집을 통해 무심하게 대했던 이미지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기교적 특징은 복제와 반복인데, 복제는 예술의 개념이 한정되지 않음을 시위하는 것이고, 동일한 것이 반복되면 관람자는 그것이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정말 사랑 해”보다는 “정말 정말 정말 사랑 해”가 더 중요한 표현처럼 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일상의 평범하고 통속적인 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두 장르에는 공통점이 있다.
드러나는 평범함과 통속성 이면에 숨겨진 예술가의 고도한 솜씨와 디자인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관람자는 팝아트와 비디오아트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작품
도판 1: 앤디 워홀의 <푸른 코카콜라 병 Green Coca-Cola Bottles>, 1963, 캔버스에 아크릴, 145×209cm.
워홀은 112개의 코카콜라 병을 가로세로로 반복해 대량생산품의 기계적 이미지를 조형적 요소로 사용했다.
동시에 병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물체로 존재하도록 조금씩 다르게 그렸다.
같은 이미지가 반복되지만 같은 건 없다.
우리의 일상 행위도 반복되지만 같은 건 없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그리고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을 이 작품에서 느낄 수 있다.

도판 2: 엔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 1962, 캔버스에 아크릴, 41×51cm.
워홀은 여배우의 사진으로 초상화를 만들면서 회화적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색이 일부러 밖으로 삐져나오도록 했다.
머리보다 노란색 면적을 더 크게 칠했고, 붉은 색은 입술 밖으로 번지게 했다.
고도한 솜씨와 디자인이다.
코카콜라 병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레디메이드를 사용한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에 인위적인 솜씨와 디자인을 가해 새로운 이미지로 탈바꿈하게 한 것이다.
진부한 것을 변용시킨 것이다.
팝아트와 비디오아트 작품을 ‘진부한 것의 변용’이란 시각으로 바라보면 이해가 수월해진다.
예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을 관람자가 예술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건 진부한 이미지가 미술관이나 화랑에서 변용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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