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이 정치, 문화, 경제, 사회에서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선 님의 생각은, 님 한 사람만의 생각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저의 답변은 님뿐 아니라 유사한 생각을 가진 분들에게도 해당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님의 의견을 다섯 가지로 요약하여 답변하겠습니다.
1. 님은 “현대 예술의 방향을 모색하는 지성인들의 지적 이기심의 발로가 특이한 현상의 틈새를 공략하는 또 다른 의미의 부르주아적 발상”이라고 했습니다.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는 한 ‘부르주아적 발상’이란 말은 그렇게 거부감이 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데올로기에 관해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기 때문에 ‘부르주아’란 말에 예민하고, 극단적인 이익 추구의 자본주의가 인간의 보편적 자유를 희생하게 하므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르주아’란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주의를 기울이지만,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술가가 부와 명예를 노리는 걸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현대 미술의 방향이 일부 지성인들의 지적 이기심에 의해서 정해졌다는 논리는 오류입니다.
님은 1960년대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 이전까지 서양은 정치, 문화, 경제, 사회에서 소수의 이기심에 의해 주도되었고, 다수에게는 반발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당했습니다.
특히 정치에서 미국의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단일 민족국가에게는 큰 힘이 되었지만, 소수민족들로 구성된 국가에서는 한 민족의 우월주의로 나타났습니다.
역시 님의 말대로 “소수의 이기심의 발로가 특이한 현상의 틈새를 공략한” 것입니다.
월남전에 반대하는 다수의 시위는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에서의 1968년 혁명은 다음해에 드골 내각의 실각을 초래했습니다.
하루에 백만 명이 넘는 학생과 일반인이 거리에서 시위한 건 과거 역사에 없었던 일입니다.
반전운동은 미국에서도 강렬했으며, 마틴 루터 킹의 인종차별 반대운동 또한 매우 강렬했습니다.
다수가 자유와 해방을 위해 투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이 형성되어 그들이 문화의 소비자가 된 것도 특기할 만합니다.
결론으로 말하면 허울 좋은 민주주의가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로 자리매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민중이 더 이상 정신적, 물리적으로 소수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민중이 정치, 문화, 경제, 사회에서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서 단토라든가 어느 철학자들의 사상을 모두 잊고 단순하게 그러나 진정으로 생각해봅시다.
민중이 정치, 문화, 경제, 사회에서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 1960년대부터란 제 말에 동의하십니까?
팝아트, 팝뮤직 등 팝Pop(popular)이란 말이 들어간 문화 현상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문화의 주체가 민중이 되었다는 건 얼마나 신이 나는 일입니까?
미술의 주체가 민중이 되었다는 건 얼마나 신이 나는 일입니까?
정치의 주체가 민중이 되었다는 건 얼마나 신이 나는 일입니까?
민중을 위한 문화, 미술, 정치는 당연히 과거에 비해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중적이란 보편적이란 의미입니다.
아무리 지적이고 철학적이며 전통적이더라도 대중이 원하지 않으면 그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끝으로 님이 언급한 현대 미술의 방향을 소수의 지성인들이 정했다는 생각은 오류입니다.
오히려 대중이 정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1960년대의 시대적 요청이었고, 그러한 요청이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2. 님은 “역사가 또 다른 동질성들이 변형된 모습을 띠고 같은 패러다임을 반복”한다고 했는데, 잘못된 논리입니다.
토머스 쿤의 『과학의 혁명』에 패러다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패러다임이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하게 되는 건 새로운 문제들이 부상할 때 그것이 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때입니다.
두 번째의 해답도 첫 번째 저의 답변에 있습니다.
과거의 정치, 과거의 문화, 과거의 미술이 대중 혹은 민중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대두된 것입니다.
정부의 미국과의 소고기 협상에 대한 촛불시위가 새로운 협상을 가능하게 했던 것처럼 대중 혹은 민중이 정치의 방향을 정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번 국무총리의 자진 사퇴도 여론의 압박에 의한 것이 아닙니까?
팝아트를 그런 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패러다임은 반복될 수 없습니다.
혹시 복고풍의 유행을 염두에 두고 반복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이라면, 복고풍은 유행일 뿐입니다.
유행과 패러다임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3. 님은 “예술이 일부 소외계층까지 영향력을 공유해야 한다는 건 허울 좋은 명목으로 오류”라고 했는데, 님도 다시금 님의 말을 신중하게 읽어보면 스스로 그 말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 것입니다.
예술이 어느 계층을 소외시킨다면, 그것은 본질적인 존재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소외계층이 공유했던 문화가 지하에서 위로 올라와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습니까?
무당, 사당패, 술집을 전전하던 창이 오늘날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대중적인 문화도 소외계층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예술에서 차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4. 님은 “뒤샹과 워홀의 추종자들이 만든 미술을 과연 대중이 이해하느냐?”고 했는데, 이해한다고 생각됩니다.
눈으로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마구 칠해진 추상화보다는 팝아트가 훨씬 이해가 쉽습니다.
우선 그들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중이 다가가기 쉽습니다.
물론 작품에 내재된 작가의 독특한 메시지를 대중 모두가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살리기와 운하를 만들지 않겠다는 매우 단순한 말도 많은 국민들이 이해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말로는 운하를 만들지 않겠다고 했지만, 국민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언어도 그러하거늘 팝아트가 대중 모두에게 이해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장르에 비하면 그리 어렵게 느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님은 “예술은 기술”이라는 그리스인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예술이 어원적으로 기술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1960년대에 그토록 오래된 그리스 미술의 영향이 깨졌습니다.
예술이 기술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술이 곧 기술이라는 패러다임은 붕괴되었습니다.
님처럼 고도의 기술을 구사하는 화가들에게는 기술이 조금밖에 사용되지 않았거나 전혀 사용되지 않은 작품에 거부감이 생길 것입니다.
작품이 너무 쉽게 생산되는 것에 대해 반감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고도의 기술이 요하는 작품을 관람자는 다른 장르에서 즐길 수 있습니다.
영화 <아바타> 같은 것이 하나의 예입니다.
컴퓨터 그래픽에 의한 작품들은 우릴 놀라게 합니다.
아직도 사실주의 초사실주의 혹은 극사실주의 작업을 하는 화가들이 있습니다.
카메라와 경쟁하려는 고도의 기술을 가진 화가들이 있으며, 그들의 작품이 주는 놀라움이 또한 있습니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단순 재현이 주는 감동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관람자는 화가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화가가 무엇을 그렸느냐 하는 걸 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왜 그렸느냐 하는 걸 알기를 원합니다.
그림을 통해서 단순한 재현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화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기를 원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재현에 충실한 그림을 그렸다면, 또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전통적인 주제를 그린 것이라면 그런 그림은 솜씨 혹은 기술을 보여준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직도 기술에 감탄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그런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는 있지만, 보편적인 사랑 혹은 대중의 사랑을 받기에는 매우 부족합니다.
앞선 글에서 대중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한 건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소통한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여간 노력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한 건 그런 지식을 가져야 소통하는 기술을 익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술만이 능사라면 그 사람은 전통 공예로 향하는 것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