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기의 어그러져 동떨어짐>



님의 글을 읽고 <이론과 실기의 어그러져 동떨어짐>라는 제목으로 답합니다.
‘어그러져 동떨어짐’은 ‘괴리’를 말합니다.


중국 남제南齊 말기의 화가 사혁謝赫은 인물을 한 번만 봐도 생김새의 세밀한 부분들까지 그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혁의 육법六法은 유명하여 이론가로 더욱 알려졌습니다.
사혁은 『고화품록古畵品錄』에 회화의 여섯 가지 미덕으로 기를 생생하게 표현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 안정된 선으로 대상 골격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골법용필骨法用筆, 대상의 형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응물상형應物象形, 대상에 대한 채색인 수류부채隨類賦彩, 구도를 분명하게 하는 경영위치經營位置, 고화古畵를 모사하여 기술과 정신을 배우는 전이모사傳移模寫를 꼽았습니다.
헌데 그가 그린 인물화는 정작 기운정령氣韻精靈의 측면에서 볼 때 생동감이 결여되고, 필치가 섬약하여 웅장하고 아담한 맛이 없는 것으로 정평이 났습니다.
이는 ‘이론과 실기의 어그러져 동떨어짐’이라고 생각되어 이 글의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혹자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크게 드러냄으로써 동양 문화의 우수함을 은근히 주장하려고 하고, 혹은 그 차이가 극복될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폅니다.
님의 글에서도 그런 점이 발견됩니다.
우선 이런 태도는 동서양의 화합 내지는 조화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며, 무엇보다도 동서양에 대한 이해의 부족 현상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동양화를 전공하는 사람에게 사혁의 회화론은 길잡이가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회화론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회화론과 비교하면 다르지 않다는 걸 알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화가는 자연을 좇아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연을 좇는다는 건 무위적인 자연을 스승으로 삼으라는 뜻으로 사혁이 말한 내용과 정확하게 부합합니다.
서양화를 전공하는 사람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회화론은 길잡이가 되어왔습니다.
이렇듯 동서양의 회화론은 다르지 않습니다.

님은 서양화와 동양화을 차별하면서 “서양화의 특징은 즉물적이고 과학적이며 사실적이다”라고 하면서 “동양화는 물상의 과학적 설명보다도 암시적 표현을 갖고 보는 사람의 자유와 상상을 기대한다”고 했습니다.
님이 말한 “서양화의 특징은 즉물적이고 과학적이며 사실적이다”는 사혁이 말한 안정된 선으로 대상 골격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골법용필骨法用筆과 대상의 형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응물상형應物象形 그리고 대상에 대한 채색인 수류부채隨類賦彩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또한 구도를 분명하게 하는 경영위치經營位置에도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서양화에 나타나는 생동감은 사혁이 말한 기를 생생하게 표현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고화古畵를 모사하여 기술과 정신을 배우는 전이모사傳移模寫는 동서양이 같습니다.
서양의 아카데미와 동양의 화원은 같은 기능을 했습니다.
화가들로 하여금 모범적인 고화古畵를 모사하여 기술과 정신을 배우는 전이모사傳移模寫를 강조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에 시작된 에콜 데 보자르에서는 6년 동안 드로잉을 훈련시키고, 우수한 학생들을 국비로 로마로 보내 다시금 고전적인 기술과 정신을 배우게 했습니다.

님은 “동양화는 물상의 과학적 설명보다도 암시적 표현을 갖고 보는 사람의 자유와 상상을 기대한다”고 했는데, 이는 ‘암시적 표현’이 관람자의 ‘자유와 상상을’ 기대하게 만든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그 말에 동감합니다.
그러나 이런 점을 동양화에서 발견되지만 서양화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것이라면 오류라고 말하겠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명한 <모나리자>에 나타난 여인의 수수께끼 같은 미소는 ‘암시적 표현’으로 관람자의 ‘자유와 상상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암시적 표현’으로 말하면,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보다 더 한 것을 동양화에서 예로 제시할 수 있습니까?
마그리트의 작품 외에도 살바도르 달리, 이브 탕기 등의 작품에서도 ‘암시적 표현’은 쉽게 발견되며, 그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는 관람자의 ‘자유와 상상을’ 초월합니다.

님의 글에서 수묵화에 대한 찬탄이 발견됩니다.
수묵화는 그야말로 동양화의 진수입니다.
그리고 여백은 단연 동양화가 지닌 미덕입니다.
그것들이 절대미를 추구하는 수단이라는 데에도 동감합니다.
절대미가 “인간 본연의 회복과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란 주장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서양 미술이 추구한 절대미도 “인간 본연의 회복과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자연을 좇는 것이 곧 절대미를 따르는 것이며, “인간 본연의 회복과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수묵화가 동양의 특징적인 회화의 장르라는 데는 동감하고, 그 장르가 가진 장점이 여백을 통해 관람자에게 자유와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한다는 데는 이의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수묵화만이 절대미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심각한 오류입니다.
이는 다른 장르들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님은 “인위적이고 외형적인 색채와 형상이 인간의 소박한 감각을 해침에 본연의 원천으로 돌아가 기운의 색인 묵색으로 돌아가야 함을 의미함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양한 농도를 보여줌으로써 묵색이 회화의 재료로서 그 가치가 탁월하다는 데는 공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다채로운 회화의 장르를 추구해서는 안 되는 하위의 것인 양 말하는 건 다른 장르에 대한 몰이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개니 소와 같은 동물들의 눈에는 자연이 흑백으로 보이지만, 인간의 눈에는 다양한 컬러의 세계로 보입니다.
반드시 흑백의 세계로 환원해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흑백의 세계로 환원함으로써, 혹은 다채로운 색을 배제함으로써 묵색의 다양한 농도를 통해 자연의 단일함과 무위를 표현하는 건 바람직하지만, 그런 회화가 우위를 점한다는 주장은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장르에 우위의 개념을 도입하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모든 색 가운데 묵색이 가장 우위에 있다고 말하는 것도 색에 대한 불공평한 태도입니다.

전 지금 창가에서 마당을 바라보며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붉은색 장미와 마로니에의 가을을 타는 갈색이 여간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잎이 다양한 초록색으로 빛에 발하는 것도 아름다우며, 강아지의 그라데이션 갈색도 매우 아름답게 보입니다.
오늘은 하늘이 유난히 맑아 푸릅니다.
푸른 하늘이 햇빛에 잠겨 그 끝이 가늠되지 않습니다.

님은 카시미르 말레비치의 <흰색 바탕에 흰색 정사각형>을 보셨습니까?
동양화의 여백에 대한 장점을 이야기했는데, 이 작품은 전체가 여백입니다.
묵색을 찬탄하셨는데, 이것은 온통 흰색입니다.
말레비치는 관람자가 끝없는 순백의 세계에 빠지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님이 말한 절대미가 이 작품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레비치의 작품을 가리켜서 절대주의라고 말합니다.
절제와 여백으로 말하면 피트 몬드리안의 작품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자연을 세 가지 색으로 한정했으며, 자연의 선을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한정했고, 여백을 조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님에게 묻습니다.
님이 찬탄하는 동양화의 미학을 두루 갖춘 작품이 어떤 것인지 제시하십시오.
우리는 언어로는 매우 고상한 사상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화와 관련해서 노장사상을 말하거나 동양철학을 길게 늘어놓더라도 그러한 내용이 내재된 작품을 예로써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는 <이론과 실기의 어그러져 동떨어짐>이라는 것입니다.
이론은 매우 고상하지만 그것이 실기에서 가능하냐 하는 걸 묻는 것입니다.
저는 전에 『교수신문』에 가나아트에서 개인전을 연 어느 화가에 관해 글을 쓰는 청탁을 받고, 가나아트에서 그 화가의 추상화들을 감상했습니다.
그 화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노장사상을 말했습니다.
그 화가의 말을 들으면 그 화가는 매우 고고한 위치에서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얕잡아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헌데 정작 그의 그림을 보고는 그의 작품이 그의 이론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란 걸 알았습니다.
전 『교수신문』에 화가가 노장사상을 말하는 건 자유이지만, 그 화가의 작품에 그런 요소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가 말하는 미학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적었습니다.
이론은 실기와 동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실재하는 작품과 이론을 연결시키지 못하면 그건 어그러져 동떨어짐, 즉 ‘괴리’입니다.
님이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예증할 수 있는 작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사혁의 인물화를 예로 들었지만, 그의 작품은 그가 말한 이론과는 달리 정작 기운정령의 측면에서 볼 때 생동감이 결여되고, 필치가 섬약하여 웅장하고 아담한 맛이 없는 것으로 정평이 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론과 실기의 어그러져 동떨어짐>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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