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津寬寺에 갔습니다>




어제는 장항 못미처에 있는 섬진강 메기매운탕 집에서 점심을 먹고 진관사津寬寺에 갔습니다.
돌미나리를 한소쿠리 주는 집입니다.
그러니까 절터는 역사적으로 1천 년이 되었지만, 절은 4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고찰이라고 해야 할지 신찰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암튼 북한산(혹은 삼각산三角山) 자락 밑에 둥지를 트고 있어 산보삼아 가볼만한 곳입니다.
돌미나리에 메기매운탕으로 배를 불린 후에는 특히 가볼만 합니다.

진관사는 고려 현종顯宗(992-1031) 때 건립되었지만 이조 태조 때 창건하고, 6.25동란 때 파괴된 것을 1964년에 비구니가 새로 지은 절입니다.
고려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노승 진관조사津寬祖師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지은 절로 알려졌습니다.
그곳에 숨어있던 현종을 그 절의 주지 진관조사가 방에 굴을 파고 현종을 숨기고 침상을 그 굴 위에 올려놓고 거처하면서 화를 면하게 하여 신혈사神穴寺란 이름이 생겼고 현종 즉위 후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대가람을 짓고 절 이름을 진관사라고 했답니다.
조선시대에는 수륙제의 근본 도량이었습니다.
수륙제水陸齊란 봄과 가을에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입니다.

대웅전, 나한전, 명부전, 칠성각을 둘러보았습니다.
대웅전大雄殿은 석가모니불을 보존불로 모시는 당우堂宇로서 대웅大雄이란 고대 인도의 마하비라를 한역漢譯한 말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고 일컬은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나한전羅漢殿은 말 그대로 16羅漢을 모신 곳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는 12명인데 석가모니의 수제자는 16명이었습니다.
석가모니의 제자 500명을 모신 나한전도 있습니다만, 진관사에는 16명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명부전冥府殿은 재미있는 곳입니다.
명계冥界라고 하면 저승을 말합니다.
명부전은 그러니까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시고 망자亡者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極樂往生하도록 기원하는 곳입니다.
지장은 브라마나 시대부터 일장日藏, 월장月藏, 천장天藏 등과 함께 별의 신으로 신앙되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견주면 지장보살은 포세이돈에 해당합니다.
인도의 신앙이 중국에 들어와 염마시왕閻魔十王 신앙과 결합되고 말법末法 사상이 활기를 띠면서 지장을 통한 구제를 희구하는 신앙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말법이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이나 깨달음이 없는 세상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민간신앙이 된 것입니다.
명부전에 있는 열 명의 대왕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대왕은 염라대왕閻羅大王입니다.
염마閻魔가 중국인에 의해 그 이름이 염라閻羅로 바뀐 것입니다.
열 명의 지옥 왕들 가운데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염라대왕은 죄인의 혀를 집게로 뽑는 발설拔舌 지옥을 관장하고 있습니다.
명부전冥府殿을 재미있는 곳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곳이 불교의 지옥地獄인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곳에서 열 명의 대왕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됩니다.
악독한 놈은 죽자마자 다음 생이 결정되지만, 보통 사람의 경우 심판을 받고 다음 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일종의 중국식 조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대왕부터 일곱 째 대왕까지 그들은 각각 7일마다 죽은 영혼을 심판합니다.
이래서 49제가 생긴 것입니다.
7일마다 지옥의 대왕에게 유족들이 아양을 떨고 비위를 맞춰 죽은 영혼에게 유리한 심판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 지옥의 대왕은 100일 후에 죽은 영혼을 심판하고, 아홉 번째 대왕은 1년 후에 심판하며, 열 번째 마지막 대왕은 3년 후에 심판을 하게 됩니다.
죽은 영혼의 다음 생은 3년에 걸친 열 번의 심판으로 결정됩니다.
유족들이 많은 제물을 절에 바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민간신앙에는 돈과 정성이 많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칠성각七星閣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사찰寺刹은 종합운동장과 같은 곳입니다.
칠성각은 원래 불교佛敎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도교道敎의 잔물입니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합니다.
칠성신七星神은 옛날부터 우리나라 민간에서 재능과 재물을 주고 아이들의 수명을 늘여주며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는 신입니다.
이 칠성신이 불교에 흡수되면서 처음에는 사찰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자리 잡았다가 점차 본래의 기능을 되찾아 별도의 전각殿閣인 칠성각에 모셔진 것입니다.
어느 절에 가면 칠성각 대신에 삼신각三神閣이 있는데, 이것 역시 민간신앙이 불교에 유입된 사례입니다.

나한전羅漢殿 벽면에는 신선이 장식으로 그려져 있어 도교의 또 다른 영향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도교, 민간신앙과 혼합되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요일 오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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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르누보>




19세기 말의 미국은 팽창하고 번영하던 광대한 국가였다.
1865년 남북전쟁의 종식은 급속한 경제성장의 시기를 예고했다.
1869년에 동부와 서부 해안을 연결한 대륙횡단철도의 건설이 중요한 계기였다.
이런 성장으로 신흥부유층인 중상류계층이 생겨났으며 이들의 과소비와 여가생활은 전설적이었다.
값비싼 물건에 대한 과시적 소비가 유한계급의 신사들이 평판을 얻는 수단이 될 정도였다.
미국은 유럽과 유럽의 문화전통에 대해 복잡하고 모순적인 관계에 있었는데, 대체로 유럽에서 경험한 가난과 당파적 민족주의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했던 이민자들의 나라였다.
부를 얻은 미국인들은 유럽을 미술과 문화의 원천으로 보았다.

산업노동자들이 여전히 이민 1세였다는 점에서 그들이 미국 미술에 끼친 영향은 주목할 만하다.
루이스 컴포트 티퍼니의 도자기와 1853년에 설립된 덴마크 회사인 빙 앤 그뢴달Bing & Grondahl 제품 사이의 유사성은 티퍼니의 도자기부 부장이 덴마크 이민자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빙은 설립자의 이름에서 그뢴달은 디자이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빙 앤 그뢴달은 세계 최초로 매년 크리스마스 플레이트Christmas Plate를 제작했다.
플레이트에 쓰인 Juleaften은 덴마크어로 ‘크리스마스이브’라는 뜻이다.

1904년과 1910년 사이에 티퍼니Tiffany에서 생산된 제품 가운데 투각으로 된, 뚫고나올 듯한 식물 형태는 빙 앤 그뢴달의 제품과 유사하다.
빙도 프랑스 이민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미국 산업디자인계에서 프랑스의 특성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울퉁불퉁한 표면과 다채로운 색채를 띤 유리판제조에 뛰어난 프랑스의 유리판제조 기술자들이 1880년대에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티퍼니와 라 파지La Farge 밑에서 일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미국산 제품들에는 미국산 점토가 사용되고 거기에 강하게 나타난 미국의 특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윌리엄 헨리 그루비William Henry Grueby(1867-1925)의 <꽃병>에 미국의 고유 식물이 사용되었더라도 그가 1894년부터 자신의 보스턴 공장에서 생산한 도자기제품에 나타난 밀랍처럼 윤기 없는 녹색의 유약과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연꽃잎 모양은 프랑스 도예가 오귀스트 들라에르슈Auguste Delaherche(1857-1940)의 작품과 유사했다.
들라에르슈는 이미 수년 전에 이와 비슷한 윤기 없는 유약을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루비가 후에 자기화한 유기적인 구근 형태도 종종 사용했다.
그루비의 두 꽃병에서 이런 영향관계가 발견되며 모두 1898년 <스튜디오 Studio>에 게재된 들라에르슈의 꽃병과 유사한 형태와 장식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유럽 도자기술의 영향을 받은 것은 그루비의 회사뿐이 아니었다.
아르투스 반 브리글Artus van Briggle(1869-1904)은 룩우드 도자기Rookwood Pottery 회사의 가장 유능한 디자이너로 프랑스 아르누보를 매우 좋아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유동적인 상징주의는 당대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1900년경 제작된 아르투스 반 브리글Artus van Briggle(1869-1904)의 <두 머리 Dos Cabezas>는 작자미상의 프랑스 금속 꽃병을 닮았다.
티퍼니의 <꽃병>도 덴마크 회사에서 생산된 꽃병과 흡사하다.

미국의 건축에서 아르누보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과 함께 그 이론적인 절정에 도달했다.
미국의 아르누보는 어느 정도 스스로 생산해낸 것이었다.
라이트의 유기적인 건축은 그의 스승인 설리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며, 설리번은 프랭크 퍼니스의 고딕 양식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와 비슷하게 티퍼니와 그 아버지의 회사인 티퍼니 상사는 프랑스 아르누보를 무작정 따랐다기보다는 아르누보와 동일한 원천에 토대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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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컴포트 티퍼니Louis Comfort Tiffany(1848-1933)>




19세기말에 열린 전시회와 만국박람회에서 주목을 받은 미국의 디자이너 루이스 컴포트 티퍼니Louis Comfort Tiffany(1848-1933)는 양식화된 자연적 형태로 장식한 화려한 색채의 유리전등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레지옹 도뇌르 5등 수훈자로 지명 받고, 1902년 토리노에서 열린 제1회 국제근대장식미술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티퍼니란 이름은 장식미술에서 혁신의 전통이 되었다.
티퍼니의 아버지인 찰스 루이스 티퍼니Charles Louis Tiffany(1812-1902) 소유의 은과 보석회사인 티퍼니 상사는 일찍이 1870년대부터 일본과 이슬람의 디자인에서 영향을 받은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었다.
티퍼니 상사의 제품은 파리의 가장 우수한 작품들과 경쟁하여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찬사를 받았으며, 프랑스의 훌륭한 아르누보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준 원천들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었다.
잠자리와 잉어로 장식된 티퍼니 상사의 물주전자는 이 회사가 나중에 전기 아르누보 양식으로 널리 알려지는 일종의 자포니즘Japonism 양식의 디자인 제작에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이 회사의 제품에는 시부이치四分一와 주석, 금, 은으로 만든 사큐도우(적동赤銅)는 일본의 합금 그리고 나뭇결을 의미하는 모쿠르네mokurne 장식기법을 사용하여 독특하며 값비싼 장식을 이용했다.

루이스 컴포트 티퍼니는 1892년 1900년에 티퍼니 스튜디오로 개칭한 티퍼니 유리장식 회사를 세웠다.
그는 유리를 소재로 작업하는 존 라 파지John La Farge(1835-1910)와 경쟁하면서 1894년에 그의 특허품인 손으로 불어 만드는 무지개빛 파브릴 유리Favrile Glass를 개발했다.
파브릴은 ‘손으로 만든’이란 의미의 옛 영어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뉴욕의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한 라 파지는 일본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화가로 명성을 쌓았으나 나중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했다.
티퍼니의 파브릴 유리는 상업생산품이었으나 손으로 만든 유리제품의 미와 광택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티퍼니는 파브릴 유리로 전등과 꽃병을 포함한 여러 제품을 제작했으며, 자연스러운 기법과 아름다움을 빙이 깊은 인상을 받았다.
1891년과 1894년 사이에 뉴욕을 포함하여 미국의 여러 도시들을 방문한 빙은 티퍼니 작품의 특성을 장식의 목적을 위해 사용된 아무리 수단이 풍부하고 복잡하더라도 그것이 유리 자체에서 찾아진 데 있다면서 이를 미술에서 발전으로 칭찬했다.
빙은 미국에서 근대적 감각을 발전시킨 주요 인물들을 언급하면서 티퍼니를 포함시켰다.
그는 1894-95년에 보나르, 랑송, 툴루즈 로트레크를 포함하는 열한 명의 주요 프랑스 미술가들이 디자인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의 제작을 티퍼니에게 의뢰함으로써 미국 산업의 힘과 혁신을 프랑스의 미술과 결합시켰다.
이런 합작의 결과물은 빙에게 미국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빙에게 티퍼니는 새로운 운동의 중심에 서 있는 열정적인 혁신가였다.

티퍼니는 1902년에 집안의 은과 보석회사인 티퍼니 상사의 디자인 감독이 되었고, 1904년부터 보석 디자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의 보석은 가장 넓은 구매층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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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Egon Schiele(1890~1918)>
(고려대학 신문에 기고한 글)


요절한 천재화가
에곤 실레는 1918년 10월 31일 28세의 나이로 스페인 독감Spanish influenza에 걸려 요절했다. 임신한 아내가 사흘 전에 죽고 그도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 스페인 독감은 1918년 전 세계를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는데, 2년 동안 무려 2천5백만-5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미국에서 50만 명이, 한국에서는 14만 명이 죽었다. 실레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구스타프 클림트도 실레에 앞서 독감으로 생명을 잃었다.

불과 28해의 생애를 산 실레의 회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를 우선 알아야 한다. 당시 유럽에서의 빈의 상황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실레가 받은 영향과 그의 회화에 대한 평가이다.


문화의 중심지 빈
20세기가 시작되기 전 유럽의 주요 도시들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고, 건축의 붐으로 여기저기 공사가 한창이었다. 다양한 도시의 삶이 처음 나타나기 시작했다. 빈부의 격차와 함께 문화적으로도 극심한 양상이 나타나 세대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 다양한 분야에서 진취적으로 나타났으며, 회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빈Vienna은 동서뿐만 아니라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정치, 문화적으로 중요한 도시였고,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1898년 즉위 50주년을 기념하여 디자인과 기술에 관한 전시회를 빈에서 성대하게 개최한 데서 빈이 명실상부하게 문화의 중심지였음 알 수 있다. 그해 3월 비 분리파는 제1회 전시회를 개최했는데, 오스트리아 미술의 수준을 한층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분리파를 창설하고 회장이 되어 이끈 인물은 클림트였다.

빈은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였다. 상류층 여성들은 자신들의 미모를 과장하여 거실에 걸어놓고 남성들의 사랑을 받기를 원했다. 클림트는 그런 상류층 여성들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그들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과장하여 묘사해주고 심지어는 비싼 금을 사용하여 중세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성상의 이미지로까지 과대하게 표현해서 인기를 끌었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신경과의사로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히스테리환자를 관찰하고, 최면술을 행하며, 인간의 마음에는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은 1900년 서점에 진열되어 팔리고 있었다. 프로이트에게 꿈은 자아활동이 저하됨으로써 억압된 욕망이나 불안이 변형된 의식으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여성들의 허영심을 부추긴 클림트와 달리 실레는 모델의 장점을 미화하기보다는 추한 면을 왜곡시키려고 했으며, 프로이트가 말한 잠재의식을 표출시킴으로써 자아의 활동을 더욱 고취시키는 독창적 회화를 추구했다. 이는 내면의 느낌을 과장해 드러내는 것으로 곧 표현주의 회화였다.


회화는 색이냐, 선이냐
회화에서 선과 색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는 19세기 중반 프랑스 화단에서 이미 논란이 되어 왔는데, 이런 상반된 견해는 클림트와 실레의 회화에서도 나타났다. 클림트는 색을 중시한 반면 실레는 선을 회화의 생명으로 삼았다. 표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예리하고 분명한 선은 결국 캐리커처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실레는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의 영향 하에 모델의 몸가짐과 특성을 데생으로 포착하고 데생에 의해 정리된 전체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로서 색을 사용했다. 캐리커처는 모델과 닮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실레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본질적 행위를 과장함으로써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된 욕망이나 불안을 표현하려고 했다. 따라서 실레의 초상화들은 추한 면을 과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런 것이 인간의 본질이므로 영구성을 지니게 되며,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자아활동이 저하됨으로써 억압된 욕망이나 불안이 변형된 실레의 회화
실레의 회화를 요약하면, 세 가지이다.

첫째, 화가들이 일반적으로 여성의 누드를 인생을 표현하는 고상한 상징물로 보고, 특히 클림트의 경우 자유와 평화의 여신을 의미하며 에로스 자체로 본 데 반해 그는 억압된 성적 충동을 병적으로 나타내는 도구로 보고 인간의 동물성을 강조했다. 이런 점은 실레의 작품 <검정 스타킹을 신은 여자 누드>(1910)에서 소녀의 이른 성적 호기심으로 표현되고, <두 여인>(1912)에서는 당시 터부시한 레즈비언의 사랑으로, 혹은 <꿈속에서 보다>(1911)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모습으로 섹스에 대한 호기심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표현으로 나아갔다.

둘째,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성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 II>(1911)와 <수행자들>(1912)에서는 그림자처럼 뒤에 따라 다니는 실레 자신의 불안에 사로잡힌 모습이 표현된다. 이중자화상 외에도 그의 모델들은 한결같이 무의식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은밀히 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을 그는 보편적인 주제로 표현함으로써 이중성에서 자유롭기를 바랐다.

셋째, 실레는 평범한 인간의 행위보다는 무대에서의 연기처럼 어떤 목적을 갖고 강렬하게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에 관심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퍼포먼스라는 장르가 따로 있어 몸을 예술의 재료로 삼을 수 있지만, 실레는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이런 부류의 작품들을 ‘퍼포먼스의 초상화’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실레의 퍼포먼스의 초상화들은 잠재의식의 표현이다. 그는 이런 그림을 1910년부터 주로 그렸는데, 모델은 정상적인 사람들이지만, 자신이 원하는 병적인 제스처를 취하게 했으며, 더러는 거의 미친 사람의 모습을 취하게 했다. 친구의 초상화 <칼 자코브섹>(1910)과 <검정색 꽃병이 있는 자화상>(1911)에서 이런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실레는 1910년부터 기괴한 제스처 특히 성적 제스처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깡마르고 뼈마디가 불쑥 튀어나온 모델을 선호했는데, 그런 육체에서 강렬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레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삼인방으로 불리는 클림트와 오스카르 코코슈카도 서커스에 등장하는 인물과 광대로부터 제스처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지만, 실레는 더욱 더 파격적인 제스처를 통해 표현의 강렬함을 고조시키려고 정신분열환자들의 몸짓도 연구했다. 그는 병적 제스처를 통해 인간의 보편적인 잠재의식을 나타내려고 했다. 그의 초상화에서 모델의 표정, 손짓, 몸짓이 중요하고 배경은 여백으로 열어놓아 그런 점들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실레의 에로티시즘은 빈의 사회적 환경 그리고 잠재의식의 확장과 관련이 있다. 그는 1910년에 관람자가 여성의 음부를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모델의 포즈를 달리 해서 그렸다. 당시만 해도 누드는 화가들의 본편적인 주제였더라도 모델의 음부를 관람자가 직접 볼 수 없도록 몸을 옆으로 틀게 한다든지, 손으로 가리게 하는 등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을 피했다. 실레는 이런 금기를 깨고 과감하게 관람자의 호기심을 충족시킴으로써 그런 욕망을 보편화했다. 1911년에는 자위행위를 하는 모습마저 폭로하여 관람자를 경악시켰다. 그는 결국 외설로 기소되어 21일 동안 구금되는 수모를 겪어야했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하는 논란이 그에 의해 처음 법정에서 다뤄졌다. 실레는 유치장에서 쓴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런 일이 예술가의 조국 오스트리아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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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제는 독일에서 온 출판사 사람을 만나기 위해 도서전이 열리고 있는 코엑스에 갔습니다.
금년 주빈국이 일본이라서 일본 출판사 대표들과 우리나라 여성편집자들의 모임이 주최한 회의에도 참석했습니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상황은 비슷한데, 책이 잘 팔리지 않아 이에 대한 대책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e-book, mobil 등 책의 활용에 관해서도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내 생각은 출판의 현황이 인문학의 위기와 같다는 생각입니다.
모든 책이 팔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 그리고 인문적인 책들이 팔리지 않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관광가이드, 요리방법, 컴퓨터기술 관련, 몇몇 소설가와 시인들의 책 등은 여전히 잘 팔리고 있습니다.
다만 인문학 그리고 인문적인 책들이 팔리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며, 이는 비단 일본과 우리나라만의 현상이라기보다는 전 세계적인 현실로서 이미 많은 학자들이 우려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독자들은 인문학 내지는 인문적인 지식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매우 우려되는 점입니다.

인간은 잘 먹고 잘 살기만 하면 되는 동물이 아닙니다.
너무 잘 먹어서 몸을 살찌운 뒤 다이어트 책을 읽으면서 살 빼느라 고심하는 동물이 아닙니다.
평수가 많은 아파트에 살면서 명품으로 온몸을 도배하기 위해 사는 동물은 아닙니다.
특별히 세계관, 인생관을 가지지 않고 자기에게 유익하기만 하면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하면서 기회주의자로 사는 동물도 아닙니다.

인터넷이 무척 발달되어 있어 인터넷에서 무상으로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으므로 독서의 필요성이 줄어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 그리고 인문적인 책에 등을 돌리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인문학자, 작가, 인문주의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인문학의 영역을 더욱 넓혀서 자연과학과 영역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자연과학의 지식으로 인문적인 문제를 푸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학문이 세분되다 보니 학문들 간의 소통이 부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연과학에서도 생물학자와 두뇌과학자 간에 소통이 부재합니다.
예술 전공자와 사회학자 혹은 경제학자 간에 소통이 부재합니다.
철학자와 물리학자 혹은 화학자 간에 소통이 부재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전합니다.
MIT 대학의 철학교수가 식당에서 물리학 교수를 만나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철학교수가 물리학교수에게 물었습니다.
“철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리학교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타 학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학문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세분화된 지식에 평생을 거는 삶이란 무슨 의미가 되겠습니까?
“나는 평생 악어의 생태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이 온당한 것일까요?
악어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이 인류에게 중요한 지식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세상에는 악어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생태에 관한 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이란 바로 인간의 생태에 관한 학문입니다.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악어 전공자는 인간에 관해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인문학 전공자는 인간과 관련해서 악어의 생태에도 관심을 가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학문 간의 소통이 절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산되는 문화상품으로서의 책이 출간된다면 출판의 불황이 타개될 것이라고 봅니다.
철학자, 문인, 예술가는 물리학, 생물학, 화학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물리학자, 생물학자, 화학자는 철학과 문학 그리고 예술을 말할 수 있어야 학문 간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건축가와 종교인이 인류학에 관해 말하고 인류학자는 건축과 종교에 관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학문 간에 소통이 발생하지 않으면 세분화된 지식들은 인류에게 능률적으로 기여할 수 없습니다.
악어의 생태에 관한 지식이 악어 전공자들에게만 만족을 준다면 얼마나 효율성이 떨어지는 지식이겠습니까?
지식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앞으로 지식인들이 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독자들도 편식을 하지 말고 지식을 골고루 섭취해야 합니다.
게임을 잘 하고 영화를 많이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밖의 지식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컴퓨터에 관한 지식을 알아야 컴퓨터를 잘 활용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식은 생활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지식은 삶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많은 음악을 들은 사람이 음악을 더 잘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은 지식을 더 잘 즐길 수 있습니다.

인문학의 위기가 곧 출판의 불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출판사는 사람들이 독서하지 않는다고 푸념만 할 것이 아니라 독서하는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책을 출간해야 합니다.
그러한 책은 학문 간의 소통이 있는 책이라고 생각되며,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책들이 서점에 즐비하게 꽂힐 때 독서하는 사람들이 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 독일인을 만나 독일 교과서를 여러 권 보았습니다.
독일의 초등학생, 중고등학생들은 참 훌륭한 책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독일의 초등학생들의 교과서라면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이 읽을 수 있고, 독일의 중고등학생들의 교과서라면 우리나라 성인들이 읽을 수 있으며, 독일의 대학생들의 교과서라면 우리나라 전공자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불행하지만 문화의 현주소입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오로지 진학하기 위해 공부할 뿐입니다.
최종적으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를 위한 공부를 합니다.
그러다보니 입시공부 외에는 아무런 공부도 되어있지 않습니다.
독일뿐 아니라 선진국의 교과서에는 다양한 지식들이 쌓여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그렇게 해서 풍요로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지식들이 쌓여진 책들이 출간되기 바랍니다.
학문 간의 소통이 활발한 책들이 출간되기 바랍니다.
독자들도 편식하지 말고 다양한 지식을 섭취하기 바랍니다.
관심의 폭을 넓히고 궁극적으로 인문학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기 바랍니다.
인문학의 영역은 철학, 종교, 역사, 언어, 문학, 예술뿐만 아니라 사회학, 경제학, 법학, 정치학, 인류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으로까지 확대되어야 합니다.
우주의 기원, 인류의 기원은 물리학, 생물학, 화학, 인류학 등의 관심일 뿐 아니라 철학과 종교의 관심이기도 하고, 문학과 예술의 관심이기도 해야 합니다.
학문의 징검다리가 놓이지 않으면 지식은 불구가 됩니다.

어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하루였습니다.
코엑스를 나오니 비가 부슬부슬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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