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르누보>




19세기 말의 미국은 팽창하고 번영하던 광대한 국가였다.
1865년 남북전쟁의 종식은 급속한 경제성장의 시기를 예고했다.
1869년에 동부와 서부 해안을 연결한 대륙횡단철도의 건설이 중요한 계기였다.
이런 성장으로 신흥부유층인 중상류계층이 생겨났으며 이들의 과소비와 여가생활은 전설적이었다.
값비싼 물건에 대한 과시적 소비가 유한계급의 신사들이 평판을 얻는 수단이 될 정도였다.
미국은 유럽과 유럽의 문화전통에 대해 복잡하고 모순적인 관계에 있었는데, 대체로 유럽에서 경험한 가난과 당파적 민족주의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했던 이민자들의 나라였다.
부를 얻은 미국인들은 유럽을 미술과 문화의 원천으로 보았다.

산업노동자들이 여전히 이민 1세였다는 점에서 그들이 미국 미술에 끼친 영향은 주목할 만하다.
루이스 컴포트 티퍼니의 도자기와 1853년에 설립된 덴마크 회사인 빙 앤 그뢴달Bing & Grondahl 제품 사이의 유사성은 티퍼니의 도자기부 부장이 덴마크 이민자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빙은 설립자의 이름에서 그뢴달은 디자이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빙 앤 그뢴달은 세계 최초로 매년 크리스마스 플레이트Christmas Plate를 제작했다.
플레이트에 쓰인 Juleaften은 덴마크어로 ‘크리스마스이브’라는 뜻이다.

1904년과 1910년 사이에 티퍼니Tiffany에서 생산된 제품 가운데 투각으로 된, 뚫고나올 듯한 식물 형태는 빙 앤 그뢴달의 제품과 유사하다.
빙도 프랑스 이민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미국 산업디자인계에서 프랑스의 특성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울퉁불퉁한 표면과 다채로운 색채를 띤 유리판제조에 뛰어난 프랑스의 유리판제조 기술자들이 1880년대에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티퍼니와 라 파지La Farge 밑에서 일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미국산 제품들에는 미국산 점토가 사용되고 거기에 강하게 나타난 미국의 특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윌리엄 헨리 그루비William Henry Grueby(1867-1925)의 <꽃병>에 미국의 고유 식물이 사용되었더라도 그가 1894년부터 자신의 보스턴 공장에서 생산한 도자기제품에 나타난 밀랍처럼 윤기 없는 녹색의 유약과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연꽃잎 모양은 프랑스 도예가 오귀스트 들라에르슈Auguste Delaherche(1857-1940)의 작품과 유사했다.
들라에르슈는 이미 수년 전에 이와 비슷한 윤기 없는 유약을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루비가 후에 자기화한 유기적인 구근 형태도 종종 사용했다.
그루비의 두 꽃병에서 이런 영향관계가 발견되며 모두 1898년 <스튜디오 Studio>에 게재된 들라에르슈의 꽃병과 유사한 형태와 장식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유럽 도자기술의 영향을 받은 것은 그루비의 회사뿐이 아니었다.
아르투스 반 브리글Artus van Briggle(1869-1904)은 룩우드 도자기Rookwood Pottery 회사의 가장 유능한 디자이너로 프랑스 아르누보를 매우 좋아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유동적인 상징주의는 당대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1900년경 제작된 아르투스 반 브리글Artus van Briggle(1869-1904)의 <두 머리 Dos Cabezas>는 작자미상의 프랑스 금속 꽃병을 닮았다.
티퍼니의 <꽃병>도 덴마크 회사에서 생산된 꽃병과 흡사하다.

미국의 건축에서 아르누보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과 함께 그 이론적인 절정에 도달했다.
미국의 아르누보는 어느 정도 스스로 생산해낸 것이었다.
라이트의 유기적인 건축은 그의 스승인 설리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며, 설리번은 프랭크 퍼니스의 고딕 양식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와 비슷하게 티퍼니와 그 아버지의 회사인 티퍼니 상사는 프랑스 아르누보를 무작정 따랐다기보다는 아르누보와 동일한 원천에 토대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