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Egon Schiele(1890~1918)>
(고려대학 신문에 기고한 글)
요절한 천재화가
에곤 실레는 1918년 10월 31일 28세의 나이로 스페인 독감Spanish influenza에 걸려 요절했다. 임신한 아내가 사흘 전에 죽고 그도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 스페인 독감은 1918년 전 세계를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는데, 2년 동안 무려 2천5백만-5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미국에서 50만 명이, 한국에서는 14만 명이 죽었다. 실레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구스타프 클림트도 실레에 앞서 독감으로 생명을 잃었다.
불과 28해의 생애를 산 실레의 회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를 우선 알아야 한다. 당시 유럽에서의 빈의 상황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실레가 받은 영향과 그의 회화에 대한 평가이다.
문화의 중심지 빈
20세기가 시작되기 전 유럽의 주요 도시들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고, 건축의 붐으로 여기저기 공사가 한창이었다. 다양한 도시의 삶이 처음 나타나기 시작했다. 빈부의 격차와 함께 문화적으로도 극심한 양상이 나타나 세대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 다양한 분야에서 진취적으로 나타났으며, 회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빈Vienna은 동서뿐만 아니라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정치, 문화적으로 중요한 도시였고,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1898년 즉위 50주년을 기념하여 디자인과 기술에 관한 전시회를 빈에서 성대하게 개최한 데서 빈이 명실상부하게 문화의 중심지였음 알 수 있다. 그해 3월 비 분리파는 제1회 전시회를 개최했는데, 오스트리아 미술의 수준을 한층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분리파를 창설하고 회장이 되어 이끈 인물은 클림트였다.
빈은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였다. 상류층 여성들은 자신들의 미모를 과장하여 거실에 걸어놓고 남성들의 사랑을 받기를 원했다. 클림트는 그런 상류층 여성들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그들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과장하여 묘사해주고 심지어는 비싼 금을 사용하여 중세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성상의 이미지로까지 과대하게 표현해서 인기를 끌었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신경과의사로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히스테리환자를 관찰하고, 최면술을 행하며, 인간의 마음에는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은 1900년 서점에 진열되어 팔리고 있었다. 프로이트에게 꿈은 자아활동이 저하됨으로써 억압된 욕망이나 불안이 변형된 의식으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여성들의 허영심을 부추긴 클림트와 달리 실레는 모델의 장점을 미화하기보다는 추한 면을 왜곡시키려고 했으며, 프로이트가 말한 잠재의식을 표출시킴으로써 자아의 활동을 더욱 고취시키는 독창적 회화를 추구했다. 이는 내면의 느낌을 과장해 드러내는 것으로 곧 표현주의 회화였다.
회화는 색이냐, 선이냐
회화에서 선과 색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는 19세기 중반 프랑스 화단에서 이미 논란이 되어 왔는데, 이런 상반된 견해는 클림트와 실레의 회화에서도 나타났다. 클림트는 색을 중시한 반면 실레는 선을 회화의 생명으로 삼았다. 표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예리하고 분명한 선은 결국 캐리커처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실레는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의 영향 하에 모델의 몸가짐과 특성을 데생으로 포착하고 데생에 의해 정리된 전체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로서 색을 사용했다. 캐리커처는 모델과 닮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실레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본질적 행위를 과장함으로써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된 욕망이나 불안을 표현하려고 했다. 따라서 실레의 초상화들은 추한 면을 과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런 것이 인간의 본질이므로 영구성을 지니게 되며,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자아활동이 저하됨으로써 억압된 욕망이나 불안이 변형된 실레의 회화
실레의 회화를 요약하면, 세 가지이다.
첫째, 화가들이 일반적으로 여성의 누드를 인생을 표현하는 고상한 상징물로 보고, 특히 클림트의 경우 자유와 평화의 여신을 의미하며 에로스 자체로 본 데 반해 그는 억압된 성적 충동을 병적으로 나타내는 도구로 보고 인간의 동물성을 강조했다. 이런 점은 실레의 작품 <검정 스타킹을 신은 여자 누드>(1910)에서 소녀의 이른 성적 호기심으로 표현되고, <두 여인>(1912)에서는 당시 터부시한 레즈비언의 사랑으로, 혹은 <꿈속에서 보다>(1911)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모습으로 섹스에 대한 호기심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표현으로 나아갔다.
둘째,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성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 II>(1911)와 <수행자들>(1912)에서는 그림자처럼 뒤에 따라 다니는 실레 자신의 불안에 사로잡힌 모습이 표현된다. 이중자화상 외에도 그의 모델들은 한결같이 무의식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은밀히 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을 그는 보편적인 주제로 표현함으로써 이중성에서 자유롭기를 바랐다.
셋째, 실레는 평범한 인간의 행위보다는 무대에서의 연기처럼 어떤 목적을 갖고 강렬하게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에 관심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퍼포먼스라는 장르가 따로 있어 몸을 예술의 재료로 삼을 수 있지만, 실레는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이런 부류의 작품들을 ‘퍼포먼스의 초상화’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실레의 퍼포먼스의 초상화들은 잠재의식의 표현이다. 그는 이런 그림을 1910년부터 주로 그렸는데, 모델은 정상적인 사람들이지만, 자신이 원하는 병적인 제스처를 취하게 했으며, 더러는 거의 미친 사람의 모습을 취하게 했다. 친구의 초상화 <칼 자코브섹>(1910)과 <검정색 꽃병이 있는 자화상>(1911)에서 이런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실레는 1910년부터 기괴한 제스처 특히 성적 제스처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깡마르고 뼈마디가 불쑥 튀어나온 모델을 선호했는데, 그런 육체에서 강렬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레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삼인방으로 불리는 클림트와 오스카르 코코슈카도 서커스에 등장하는 인물과 광대로부터 제스처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지만, 실레는 더욱 더 파격적인 제스처를 통해 표현의 강렬함을 고조시키려고 정신분열환자들의 몸짓도 연구했다. 그는 병적 제스처를 통해 인간의 보편적인 잠재의식을 나타내려고 했다. 그의 초상화에서 모델의 표정, 손짓, 몸짓이 중요하고 배경은 여백으로 열어놓아 그런 점들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실레의 에로티시즘은 빈의 사회적 환경 그리고 잠재의식의 확장과 관련이 있다. 그는 1910년에 관람자가 여성의 음부를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모델의 포즈를 달리 해서 그렸다. 당시만 해도 누드는 화가들의 본편적인 주제였더라도 모델의 음부를 관람자가 직접 볼 수 없도록 몸을 옆으로 틀게 한다든지, 손으로 가리게 하는 등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을 피했다. 실레는 이런 금기를 깨고 과감하게 관람자의 호기심을 충족시킴으로써 그런 욕망을 보편화했다. 1911년에는 자위행위를 하는 모습마저 폭로하여 관람자를 경악시켰다. 그는 결국 외설로 기소되어 21일 동안 구금되는 수모를 겪어야했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하는 논란이 그에 의해 처음 법정에서 다뤄졌다. 실레는 유치장에서 쓴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런 일이 예술가의 조국 오스트리아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