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津寬寺에 갔습니다>




어제는 장항 못미처에 있는 섬진강 메기매운탕 집에서 점심을 먹고 진관사津寬寺에 갔습니다.
돌미나리를 한소쿠리 주는 집입니다.
그러니까 절터는 역사적으로 1천 년이 되었지만, 절은 4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고찰이라고 해야 할지 신찰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암튼 북한산(혹은 삼각산三角山) 자락 밑에 둥지를 트고 있어 산보삼아 가볼만한 곳입니다.
돌미나리에 메기매운탕으로 배를 불린 후에는 특히 가볼만 합니다.

진관사는 고려 현종顯宗(992-1031) 때 건립되었지만 이조 태조 때 창건하고, 6.25동란 때 파괴된 것을 1964년에 비구니가 새로 지은 절입니다.
고려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노승 진관조사津寬祖師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지은 절로 알려졌습니다.
그곳에 숨어있던 현종을 그 절의 주지 진관조사가 방에 굴을 파고 현종을 숨기고 침상을 그 굴 위에 올려놓고 거처하면서 화를 면하게 하여 신혈사神穴寺란 이름이 생겼고 현종 즉위 후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대가람을 짓고 절 이름을 진관사라고 했답니다.
조선시대에는 수륙제의 근본 도량이었습니다.
수륙제水陸齊란 봄과 가을에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입니다.

대웅전, 나한전, 명부전, 칠성각을 둘러보았습니다.
대웅전大雄殿은 석가모니불을 보존불로 모시는 당우堂宇로서 대웅大雄이란 고대 인도의 마하비라를 한역漢譯한 말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고 일컬은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나한전羅漢殿은 말 그대로 16羅漢을 모신 곳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는 12명인데 석가모니의 수제자는 16명이었습니다.
석가모니의 제자 500명을 모신 나한전도 있습니다만, 진관사에는 16명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명부전冥府殿은 재미있는 곳입니다.
명계冥界라고 하면 저승을 말합니다.
명부전은 그러니까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시고 망자亡者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極樂往生하도록 기원하는 곳입니다.
지장은 브라마나 시대부터 일장日藏, 월장月藏, 천장天藏 등과 함께 별의 신으로 신앙되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견주면 지장보살은 포세이돈에 해당합니다.
인도의 신앙이 중국에 들어와 염마시왕閻魔十王 신앙과 결합되고 말법末法 사상이 활기를 띠면서 지장을 통한 구제를 희구하는 신앙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말법이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이나 깨달음이 없는 세상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민간신앙이 된 것입니다.
명부전에 있는 열 명의 대왕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대왕은 염라대왕閻羅大王입니다.
염마閻魔가 중국인에 의해 그 이름이 염라閻羅로 바뀐 것입니다.
열 명의 지옥 왕들 가운데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염라대왕은 죄인의 혀를 집게로 뽑는 발설拔舌 지옥을 관장하고 있습니다.
명부전冥府殿을 재미있는 곳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곳이 불교의 지옥地獄인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곳에서 열 명의 대왕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됩니다.
악독한 놈은 죽자마자 다음 생이 결정되지만, 보통 사람의 경우 심판을 받고 다음 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일종의 중국식 조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대왕부터 일곱 째 대왕까지 그들은 각각 7일마다 죽은 영혼을 심판합니다.
이래서 49제가 생긴 것입니다.
7일마다 지옥의 대왕에게 유족들이 아양을 떨고 비위를 맞춰 죽은 영혼에게 유리한 심판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 지옥의 대왕은 100일 후에 죽은 영혼을 심판하고, 아홉 번째 대왕은 1년 후에 심판하며, 열 번째 마지막 대왕은 3년 후에 심판을 하게 됩니다.
죽은 영혼의 다음 생은 3년에 걸친 열 번의 심판으로 결정됩니다.
유족들이 많은 제물을 절에 바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민간신앙에는 돈과 정성이 많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칠성각七星閣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사찰寺刹은 종합운동장과 같은 곳입니다.
칠성각은 원래 불교佛敎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도교道敎의 잔물입니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합니다.
칠성신七星神은 옛날부터 우리나라 민간에서 재능과 재물을 주고 아이들의 수명을 늘여주며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는 신입니다.
이 칠성신이 불교에 흡수되면서 처음에는 사찰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자리 잡았다가 점차 본래의 기능을 되찾아 별도의 전각殿閣인 칠성각에 모셔진 것입니다.
어느 절에 가면 칠성각 대신에 삼신각三神閣이 있는데, 이것 역시 민간신앙이 불교에 유입된 사례입니다.

나한전羅漢殿 벽면에는 신선이 장식으로 그려져 있어 도교의 또 다른 영향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도교, 민간신앙과 혼합되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요일 오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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