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랄리크Rene Lalique(1860~1945)>




마른 데파르트망Department 태생의 프랑스의 보석세공사, 유리공예가 르네 랄리크Rene Lalique(1860~1945)는 파리의 루이 오코크Louis Aucoc 밑에서 금세공 도제수업을 받고 국립장식미술학교에서 수학한 뒤 1878년부터 1880년까지 런던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파리로 돌아온 뒤 1년 동안 보석상이자 금세공가인 오귀스트 프티Auguste Petit를 위해 일했으며, 유명한 파리의 보석상들을 위해 장신구를 디자인했는데 그 중에는 네덜란드의 루이 프랑수와 카르티에Louis Francois Cartier(1819-1904)도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에콜 베르나르 팔리시를 다니며 조각가 뷔스티앵 르키앵으로부터 배웠다.
1884년 프랑스 공예품 전시와 연계하여 루브르에서 열린 ‘프랑스 왕관 보석 전시회’를 계기로 랄리크는 독자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그는 벨 에포크Belle Epoque(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아름다운 시절) 풍조 아래 화려한 장식작품을 제작하여 명성을 얻고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1885년에 파리의 보석세공 공방인 쥘 데스타프Jules Destape를 인수했다.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파리의 일류 보석상들을 위해 보석장식을 만들었으며, 사업은 새로운 공방을 물색해야 할 만큼 빠르게 성장했다.
1890년 그는 30명의 직원을 거느리게 되었다.

1890년 이전의 랄리크 보석디자인의 모티프는 당시 파리에서 일반적이던 자연주의적 보석세공과 차이가 없었다.
그는 파리 보석상들에게 납품하는 동안 그들의 취향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1895년 더 이상 납품하지 않게 되자 랄리크는 비로소 새로운 형식과 모티프의 세계로 향했다.
그가 새로운 형식과 모티프에 대한 영감을 얻은 곳은 상징주의로, 여성 인물, 여인의 머리, 곤충, 물고기, 백조, 딱정벌레, 꽃 등 도약하는 운동감이 가득한 세계였다.
그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전통 원료를 거부하고 선명한 색채의 준보석을 선호하여 보석디자인에 혁신을 일으켰다.
요정이나 꽃과 같은 모티프는 랄리크의 아르누보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그가 1897-98년에 제작한 머리띠 <사이렌 Siren>은 아르누보 디자이너들이 선호한 여성으로 보석세공인들에게 인기 있는 모티프였다.
그는 1895년부터 1909년까지 프랑스 미술가 전시회에서 정기적으로 보석과 공예품을 선보였다.
그는 일본 공예에 관심이 많아 칠보자기 기술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가 1895년과 1907년 사이에 디자인한 보석세공품 중 칠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미묘하게 변화하도록 처리한 차갑고 혼탁한 색조를 선호했다.
진주와 자개 외에 상아 그리고 색을 가미해 세련된 효과를 낼 수 있었던 뿔을 선호했다.
돌 가운데서는 무지개빛을 내는 신비한 오팔과 황옥, 월장석을 선호했다.

아르누보 시기에 보석으로 유명해진 랄리크는 자신의 보석디자인을 값싸게 복제하는 데 점차 관심을 기울이다가 1901년경부터는 유리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1909년에 유리 제조업체를 인수해 1918년부터는 유리세공에 몰두했다.
1908년과 1910년 사이 틀에 부어 제작한 장신구를 연속적으로 생산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가 1904-06년에 제작한 브로치 <키스 The Kiss>는 그의 첫 유리공예품이다.
<키스>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연인들이 화관을 쓰고 사랑스럽게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상징적 이미지의 사용은 아르누보의 모호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미술가들은 분명한 도덕적 태도를 취하는 과학자, 심리학자, 정치가 그리고 평론가들과는 달리 종종 시대의 도덕적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고객과 시장은 그들의 작품에 보수적 가치를 부여했다.

유리작업에서의 랄리크의 혁신은 프랑수아 코티Francois Coty(1874-1934)로부터 향수병 디자인을 주문받은 1908년에 이루어졌다.
전등이 보급되기 시작하자 그는 가장 먼저 유리를 조명기구에 활용하여 전기스탠드, 샹들리에 등을 제작했으며, 1910년대에 유리그릇 제작에 몰두하면서 작풍에 변화가 1920년대의 화려한 아르데코Art Deco(Style Moderne이라고도 한다) 양식을 구현하게 되었다.
아르데코는 1910년경에 파리 살롱전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그 명칭은 새로운 양식이 출현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1925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장식미술 및 현대산업 박람회’의 명칭에서 유래했다.
아르데코는 1930년대에 서유럽과 미국의 건축과 장식미술에서 주된 양식이 되었다.
아르누보가 수공예적인 것에 의해 나타나는 연속적인 곡의 선율을 강조하여 공업과의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반면 아르데코는 공업적 생산방식을 미술과 결합시킨 기능적이며 고전적인 직선미를 추구했다.
아르데코 양식의 특징은 단순함, 깔끔한 형태, 유선형 같은 외양, 구상주의 형태에서 나온 기하학적이고 양식화된 장식과 매우 다양하며 값비싼 재료로 이중에는 천연재료와 인조재료도 종종 포함되었다.
그러나 아르누보와의 경계선이 희미했는데, 슈토클레트 저택과 같은 프로젝트는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두 양식 모두의 예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양식의 연속성의 예를 1920년대까지 활동한 많은 아르누보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의 작품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가장 성공적인 전환은 랄리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랄리크의 유리 제조 사업은 번창하여 192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그의 반짝이는 유리분수가 광고포스터에 등장하는 등 박람회를 대변하게 되었으며, 이는 그 후 아르데코의 아이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20년대부터 제작된 그의 유리제품들은 아르누보와의 장식적 연속성을 보여주는데, 예를 들어 1925년경에 제작한 큰 병 모양의 전등은 자연주의의 유기적 형태가 음각으로 장식되어 있고, <불새 The Firebird>라고 명명된 같은 시기의 다른 전등은, 그와 비슷하지만 1880년대 상징주의 화가들의 정신에 가까운, 변신하는 새-여인을 모티프로 하여 디자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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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유리공예가 에밀 갈레Emile Galle(1846~1904)>





낭시 태생의 프랑스 유리공예가 에밀 갈레Emile Galle(1846~1904)는 독일에서 식물학과 광물학을 공부하고 런던, 파리에 머문 뒤 1877년에 아버지가 경영하는 도자기와 유리 제조회사를 계승했다.
아버지 샤를 갈레 레느메르(1818-1902)도 자기와 크리스털 제작자로서 황제 나폴레옹 3세 때에 로렌 지방의 생클레망, 라옹레타프, 메상탈 등지에 도자기제조 작업장과 유리공예 작업장을 가지고 있었다.
갈레는 1884년에 낭시에 고급가구제조 공방을 열고 10년 뒤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유리공예 작업장을 세웠다.
1884년 가구장식에만 국한되어 열린 장식미술중앙연합 전시회에서 갈레는 첫 성공을 거두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한 그의 첫 가구 전시는 1889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시기의 디자인은 프랑스 로코코와 일본 미술에서 착안한 절충양식이었다.
그는 영민한 사업가였고 1890년대에 그의 사업은 번창했다.
그는 몇몇 부유한 고객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빙과는 달리 고객들이 아무리 부유하다고 할지라도 소수의 고객만으로는 적자를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더 많은 고객에게 다가갈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소수의 작품을 박물관을 위해 디자인했지만, 다른 것들은 모든 가정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제작되었고 서민적, 상업적, 공업적이었다.
그는 생산과정에서 기계도구의 사용도 기피하지 않았다. 가구의 다리와 그 밖의 구조적 부분들은 기본 형태를 만들기 위해 미리 틀에 맞춰 준비된 날로 자른 뒤 손으로 마무리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르누보의 복잡한 형태들을 비교적 값싸게 제작할 수 있었다.
근대 생산기술 외에 경영에서도 갈레는 근대적 방식을 도입했는데, 파리의 미적 엘리트들의 신로코코풍의 실내를 아름답게 꾸밀 미적 가구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생산방식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장은 노동 분업에 따라 조직하여 최대한의 능률과 편리한 관리감독을 가능하게 했다.
노동시간을 측정하는 두 가지 시스템을 두어 개별주문과 일반생산에 따라 달리 적용했다.
그로 인해 노동자에 대한 감독과 직무에 대한 정확한 비용의 산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가구생산뿐 아니라 유리공장에도 동일한 방식을 적용했다.

젊은 시절부터 원예학에 조예가 깊은 갈레는 풍부한 상상력과 미묘한 변환, 장식 면에서 세련된 감각을 지녔다.
그는 식물의 세계와 거리를 두면서도 절묘한 전환의 효과를 주어 새롭고 독창적인 양식을 창출했다. 풀, 꽃, 새, 곤충무늬 등을 디자인에 이용하면서 두께가 각기 다른 유리가 층을 이룬 바탕에 에나멜 채색, 금박이나 백금박을 샌드위치한 기법을 사용했다.
그는 1901년 2월 11일에 에콜 드 낭시파Ecole de Nancy의 설립을 도왔으며 낭시파의 미술가들은 유리, 가구, 도자기에서 식물패턴을 제재로 한 자연주의 표현에 특색을 두었다.
낭시파의 창시자이자 대표자인 갈레에 의하면 낭시파라는 명칭에는 프랑스 동부 지역의 산업미술인 단체와 이 단체를 특징짓는 경향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는 낭시파가 미술적 견지에서 한 유파라는 의미를 넘어 상업인들과 연합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낭시파의 목적은 고립되어 있는 힘들을 공동의 노력이 가능한 협력체제로 바꾸고, 미술 노동자들의 빈곤을 해결하며, 낭시지역 학교 학생과 장인들을 보호하고, 미술산업의 생산과 판매관계를 확립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전시회를 여는 것이었다.
미술적인 면에서 보면 낭시파는 19세기 말에 형성된 운동을 뒤늦게 체계화한 것에 불과했다.

갈레의 작품에는 아르누보에서 차지하는 자연의 중요성이 잘 나타나 있다.
그가 1902년에 제작한 전등 <잉크 뚜껑 Inkcaps> 같은 유리제품과 가구는 종종 직접적으로 식물 소재를 암시한다.
갈레에 앞서 퓨진, 러스킨, 비올레-르-뒤크, 반 데 벨데, 오르타 등이 영감의 원천으로 자연을 옹호했고, 엑토르 기마르Hector Guimard(1867-1942)가 1900년에 대담한 선적인 형태와 산업적 구성방식을 결합시킨 새로운 파리 지하철 역 입구에서도 추상화된 자연형태가 나타났지만 갈레와 낭시파의 미술가들은 아르누보와 자연의 대화를 한 단계 더 진전시켰다.
기마르는 파리의 장식미술학교를 1882-85년 우수한 성적으로 다니고 에콜 데 보자르에 진학했지만 졸업하지는 못했다.
그는 오퇴유 지구에 빌라 여러 채와 사크레쾨르 학교Sacre-Coeur School(1895)를 디자인하면서 1889년부터 본격적으로 건축가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파리 지하철 역 입구 장식을 통해 기마르의 예술은 절정에 이르렀다.
갈레와 같은 디자이너들이 엄밀한 정확성으로 자연에 접근한 태도는 프랑스 아르누보에 독특한 점이 되었다.
갈레가 크리스털 꽃병을 위해 디자인한 것을 보면 식물을 분석해 디자인에 어떻게 활용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갈레의 몇몇 작품에 나타나는 구불구불한 외형은 식물학의 영향뿐 아니라 새로운 신경학과도 관련이 있다.
그가 1900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유리제품 <손 The Hand>은 뒤얽힌 힘줄과 퍼져 있는 신경의 형태가 덧붙어 해부학의 모델을 상기시킨다.
그의 유리제품에 나타난 화려한 색채와 추상장식은 근대 시각언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같은 해 만국박람회에 함께 출품한 꽃병 <고독 속의 평온 Tranquillity in Solitude>에는 화려하고 현란한 색채와 희미하게 드러나는 추상화된 자연주의 장식이 있으며, 그의 표현은 꿈과 환희를 불러일으킨다.
그의 위상은 1900년에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의 수여로 확립되었다.
갈레가 타계한 후에도 그의 회사는 193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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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밀레바 마리치>




부유한 가정에서 세르비아 농부의 큰딸로 태어난 밀레바 마리치Mileva Maric(1875~1948)는 어린 시절을 당시 헝가리가 점령하고 있던 세르비아 항구도시인 노비사드Novi Sad에서 보냈다.
그녀는 여러 학교에 다녔고 어디에서나 1등을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그레브에 있는 남자 학교인 클래식 김나지움으로부터 입학허가를 얻어냈다.
물리학과 수학에서 최고성적을 받고 졸업한 그녀는 취리히로 가서 스물한 살이 되기 직전에 폴리테크닉의 아인슈타인 학급에서 유일한 여학생이 되었다.

아인슈타인보다 세 살 많은 마리치는 선천적 장애 때문에 절룩거렸고 결핵과 우울증에 잘 걸렸다.
그녀는 매우 총명했지만 작고 약하고 가무잡잡했다.

아인슈타인과 마리치는 폴리테크닉에 입학하던 1896년 10월에 처음 만났다.
친구들은 아인슈타인 같은 멋진 청년이 작고 평범한 세르비아 여성과 교제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아인슈타인은 마리치에게 “우리는 서로의 어두운 영혼과 거피를 마시고, 소시지를 먹는 것 등을 너무 잘 이해한다”고 했다.
몇 주 동안 떨어져 있던 아인슈타인은 마리치와 함께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을 만들었다.
“이제 곧 다시 사랑하는 당신과 함께 키스하고, 안아주며, 함께 커피를 끓이고, 나무라며, 함께 공부하고, 함께 웃으며, 함께 산책하고, 함께 대화하며 그리고 무한히!”
두 사람은 똑같이 변덕스러운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은 적었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변덕과 장난기가 넘치고 여전히 시무룩한 그 옛날의 장난꾸러기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마리치를 “나의 길들지 않은 작은 악당”, “나의 동네 개구쟁이”라고 불렀고, 마리치는 그를 “나의 심술궂은 당신”이라고 불렀다.

아인슈타인이 그녀를 사랑한 것은 그녀의 정신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작은 철학박사를 연인으로 가진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라고 했다.
두 사람이 나눈 편지에는 낭만과 함께 과학적 관심이 뒤섞여 있었으며 후자가 강조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어느 편지에서 그는 특수상대성이론에 대한 논문 제목과 개념을 암시하기도 했다.

“나는 오늘날 움직이는 물체에 대한 기존의 전기동력학은 현실과 일치하지 않고, 훨씬 더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신하고 있습니다. 전기이론에 에테르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내 생각에 물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도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 매체의 개념으로 이어질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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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





백작의 아들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는 14세와 15세에 높은 데서 떨어져 다리뼈를 부러뜨렸고 이론 인해 발육부진이 되어 키가 150cm밖에 성장하지 못했지만, 머리는 제대로 성장하여 그의 모습은 비례에 맞지 않았다.
아버지와 아저씨가 아마추어 화가였으므로 어려서부터 드로잉에 재능을 나타낸 그는 1882년에 에밀 보나Emile Bonnat의 제자가 되었고 이듬해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1845-1924)으로부터 수학했다.
그가 반 고흐를 만난 것은 코르몽의 아틀리에에서였다.

툴루즈-로트레크는 21살 되던 해 몽마르트르에 작업실을 갖고 열다섯 살 때부터 그려온 스포츠를 주제로 24살 때까지 그렸다.
그 후 극장, 뮤직홀 특히 물랭 루즈Moulin Rouge, 카페, 서커스 그리고 파리의 하류생활상, 예를 들면 홍등가의 삶을 주제로 삼기 시작했다.
그는 고야의 판화를 수집하고 에드가 드가Edgar De Gas(1834-1917)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폴 고갱Paul Gauguin(1848-1903)을 만난 것은 1888년이었고, 고갱의 평편한 채색과 서예적인 강한 외곽선 사용에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일본화에 매료되었다. 석판화를 제작하면서 선을 중시하고 포스터를 제작했으며, 그의 양식은 아르누보 디자인에 큰 기여를 했다.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Au bal du Moulin de la Galette>(1889)는 툴루즈-로트레크의 대표 작품들 중 하나이다.
그는 포스터를 그리면서 작사가, 작곡가, 가수인 아리스티드 브뤼앙Aristide Bruant(1851-1925), 캉캉 댄서 잔 아브릴Jane Avril, 이베트 길베르Yvette Guilbert(1865-), 라 굴뢰, 메 벨포르와 같은 연예인들과 여자 광대 샤우카오 등을 주제로 삼았다.
그는 1894년에 당시 유명한 여배우 길베르를 위한 판화앨범을 제작하고, 전부가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지만 그녀를 위한 포스터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회화처럼 그의 포스터는 불길하고 종종 외설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다.
작가 빅토르 요제Victor Joze의 소설 <기쁨의 여왕 Reine de Joie>을 선전하는 포스터는 동시대인들이 19세기 마지막 10년을 특징짓는 절제의 감각을 잘 보여준다.
툴루즈-로트레크의 유명한 포스터와 석판화는 아르누보 양식을 연상시키지만 19세기 파리의 명소 물랭 루즈나 그 밖의 카바레에서 그린 포스터는 미적 가치를 지닌 작품들이다.
그는 미술품수집가에게 팔릴 그림, 드로잉, 판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툴루즈-로트레크는 창녀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스스로를 사회와 격리시키며 술을 즐겨 마셨기 때문에 알코올중독이 되었고, 매독에 걸려 1901년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의 가족은 1922년에 그의 작품 600점을 그의 고향 알비Albi에 기증했고 그로 인해 툴루즈-로트레크 미술관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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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아르누보인 유겐트슈틸Jugendstil>





1871년 발트해Baltic Sea 남쪽 연안에서 비슬라 강Weichsel River과 니멘 강Niemen River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한 프로이센Preussen 공국이 주도하여 독일을 제국으로 통합했지만 세기 말에도 여러 지역에서는 옛 소국가들이 지배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파리가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였던 프랑스와 달리 독일에서는 아직 크고 작은 제후국들의 권력관계를 인지할 수 있었다.
제국 최남단의 뮌헨에서는 적극적인 예술후원자로 등장한 통치자가 있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유입된 미술혁명 분위기는 가장 시민적이며 가장 혁명적이지 않던 섭정시대에 뮌헨에 도달했다.
미술에 열광한 ‘독일인의 왕’으로 불린 루트비히 2세Ludwig II(1845-86)가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뒤 그의 삼촌이자 루트비히 1세의 아들인 루이트폴트Luitpold(1821-1912)가 통치자로 결정되었다.

독일에서는 수도인 베를린뿐만 아니라 뮌헨, 다름슈타트, 드레스덴과 같은 여러 아르누보의 중심지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프랑스와는 대조적으로 독일에서는 이 양식이 재생과 낙관주의 정신에서 비롯했다.
낙관주의는 프러시아가 보불전쟁을 통해 1871년에 프랑스에 군사적 타격을 입힌 뒤 빌헬름 1세Wilhelm I가 스스로 황제Kaiser임을 선포한 데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해 불명예스럽게 끝나기는 했으나 왕국시대의 독일은 근대 독립국가의 모든 형식을 신속하게 갖추고 있었다.
세계 강국으로서의 독일의 지위는 1883년과 1885년 사이 일련의 식민지 활동으로 강화되었다.
빌헬름 2세가 왕위에 오른 1898년까지 독일은 막강한 힘을 과시했다.
1890년대와 1900년대에 베를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태도를 취한 뮌헨에서는 다원주의가 육성되었으며, 자유주의와 자신감에 찬 독재적 민족주의라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독일의 아르누보인 유겐트슈틸Jugendstil에는 젊은이들의 영웅주의, 인종의 순수성 그리고 신비주의와 같은 사상이 배어있었으므로 독일에 긍정적이며 혁명적인 세기말 적 사고가 유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겐트슈틸은 새로운 관점에서만 바라본 독일어 유겐트jugend에 근거해 ‘젊은 양식’으로 번역된다.
이는 유겐트슈틸이 단지 새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1896년에 창간한 정기간행물 <유겐트 Die Jugend>가 육성하려고 한 활력적인 젊은 에너지의 표출이었기 때문이다.
<유겐트>에는 젊음과 자연의 정신을 찬미하는 이미지가 많이 실렸고, 젊음의 자유와 에너지는 종종 구시대의 반동적인 세력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1896년 3월호 <유겐트> 표지에는 루트비히 폰 춤부슈Ludwig von Zumbusch(1861-1927)가 디자인한 두 소녀가 심술궂게 생긴 눈먼 노인을 초월을 가로질러 강제로 끌고 가는 모습이 실렸다.
한 해 전에 출간된 간행물 <판 Pan>(1895-1900)이 1900년까지 5백 명의 구독자만 확보한 고급 잡지인 데 반해 <유겐트>는 1896년 발행 당시부터 매주 3만 부를 발행했다.
인기가 높았을 때의 <유겐트>는 20만 명의 독자를 확보할 정도로 문화적 중요성을 지녔다.
<유겐트> 창간호는 젊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동시대인들이 젊음의 이상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에 대한 좀 더 유용한 통찰력을 제공했다.
매주의 <유겐트>의 표지는 잡지의 주제가 변덕스럽고 일시적인 부르주아 유행보다 더 진지한 문제인 ‘미술과 삶 Kunst und Leben’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유겐트슈틸의 중심적 주제는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과 정신주의, 합리와 비합리의 융합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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