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유리공예가 에밀 갈레Emile Galle(1846~1904)>





낭시 태생의 프랑스 유리공예가 에밀 갈레Emile Galle(1846~1904)는 독일에서 식물학과 광물학을 공부하고 런던, 파리에 머문 뒤 1877년에 아버지가 경영하는 도자기와 유리 제조회사를 계승했다.
아버지 샤를 갈레 레느메르(1818-1902)도 자기와 크리스털 제작자로서 황제 나폴레옹 3세 때에 로렌 지방의 생클레망, 라옹레타프, 메상탈 등지에 도자기제조 작업장과 유리공예 작업장을 가지고 있었다.
갈레는 1884년에 낭시에 고급가구제조 공방을 열고 10년 뒤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유리공예 작업장을 세웠다.
1884년 가구장식에만 국한되어 열린 장식미술중앙연합 전시회에서 갈레는 첫 성공을 거두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한 그의 첫 가구 전시는 1889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시기의 디자인은 프랑스 로코코와 일본 미술에서 착안한 절충양식이었다.
그는 영민한 사업가였고 1890년대에 그의 사업은 번창했다.
그는 몇몇 부유한 고객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빙과는 달리 고객들이 아무리 부유하다고 할지라도 소수의 고객만으로는 적자를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더 많은 고객에게 다가갈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소수의 작품을 박물관을 위해 디자인했지만, 다른 것들은 모든 가정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제작되었고 서민적, 상업적, 공업적이었다.
그는 생산과정에서 기계도구의 사용도 기피하지 않았다. 가구의 다리와 그 밖의 구조적 부분들은 기본 형태를 만들기 위해 미리 틀에 맞춰 준비된 날로 자른 뒤 손으로 마무리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르누보의 복잡한 형태들을 비교적 값싸게 제작할 수 있었다.
근대 생산기술 외에 경영에서도 갈레는 근대적 방식을 도입했는데, 파리의 미적 엘리트들의 신로코코풍의 실내를 아름답게 꾸밀 미적 가구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생산방식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장은 노동 분업에 따라 조직하여 최대한의 능률과 편리한 관리감독을 가능하게 했다.
노동시간을 측정하는 두 가지 시스템을 두어 개별주문과 일반생산에 따라 달리 적용했다.
그로 인해 노동자에 대한 감독과 직무에 대한 정확한 비용의 산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가구생산뿐 아니라 유리공장에도 동일한 방식을 적용했다.

젊은 시절부터 원예학에 조예가 깊은 갈레는 풍부한 상상력과 미묘한 변환, 장식 면에서 세련된 감각을 지녔다.
그는 식물의 세계와 거리를 두면서도 절묘한 전환의 효과를 주어 새롭고 독창적인 양식을 창출했다. 풀, 꽃, 새, 곤충무늬 등을 디자인에 이용하면서 두께가 각기 다른 유리가 층을 이룬 바탕에 에나멜 채색, 금박이나 백금박을 샌드위치한 기법을 사용했다.
그는 1901년 2월 11일에 에콜 드 낭시파Ecole de Nancy의 설립을 도왔으며 낭시파의 미술가들은 유리, 가구, 도자기에서 식물패턴을 제재로 한 자연주의 표현에 특색을 두었다.
낭시파의 창시자이자 대표자인 갈레에 의하면 낭시파라는 명칭에는 프랑스 동부 지역의 산업미술인 단체와 이 단체를 특징짓는 경향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는 낭시파가 미술적 견지에서 한 유파라는 의미를 넘어 상업인들과 연합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낭시파의 목적은 고립되어 있는 힘들을 공동의 노력이 가능한 협력체제로 바꾸고, 미술 노동자들의 빈곤을 해결하며, 낭시지역 학교 학생과 장인들을 보호하고, 미술산업의 생산과 판매관계를 확립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전시회를 여는 것이었다.
미술적인 면에서 보면 낭시파는 19세기 말에 형성된 운동을 뒤늦게 체계화한 것에 불과했다.

갈레의 작품에는 아르누보에서 차지하는 자연의 중요성이 잘 나타나 있다.
그가 1902년에 제작한 전등 <잉크 뚜껑 Inkcaps> 같은 유리제품과 가구는 종종 직접적으로 식물 소재를 암시한다.
갈레에 앞서 퓨진, 러스킨, 비올레-르-뒤크, 반 데 벨데, 오르타 등이 영감의 원천으로 자연을 옹호했고, 엑토르 기마르Hector Guimard(1867-1942)가 1900년에 대담한 선적인 형태와 산업적 구성방식을 결합시킨 새로운 파리 지하철 역 입구에서도 추상화된 자연형태가 나타났지만 갈레와 낭시파의 미술가들은 아르누보와 자연의 대화를 한 단계 더 진전시켰다.
기마르는 파리의 장식미술학교를 1882-85년 우수한 성적으로 다니고 에콜 데 보자르에 진학했지만 졸업하지는 못했다.
그는 오퇴유 지구에 빌라 여러 채와 사크레쾨르 학교Sacre-Coeur School(1895)를 디자인하면서 1889년부터 본격적으로 건축가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파리 지하철 역 입구 장식을 통해 기마르의 예술은 절정에 이르렀다.
갈레와 같은 디자이너들이 엄밀한 정확성으로 자연에 접근한 태도는 프랑스 아르누보에 독특한 점이 되었다.
갈레가 크리스털 꽃병을 위해 디자인한 것을 보면 식물을 분석해 디자인에 어떻게 활용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갈레의 몇몇 작품에 나타나는 구불구불한 외형은 식물학의 영향뿐 아니라 새로운 신경학과도 관련이 있다.
그가 1900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유리제품 <손 The Hand>은 뒤얽힌 힘줄과 퍼져 있는 신경의 형태가 덧붙어 해부학의 모델을 상기시킨다.
그의 유리제품에 나타난 화려한 색채와 추상장식은 근대 시각언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같은 해 만국박람회에 함께 출품한 꽃병 <고독 속의 평온 Tranquillity in Solitude>에는 화려하고 현란한 색채와 희미하게 드러나는 추상화된 자연주의 장식이 있으며, 그의 표현은 꿈과 환희를 불러일으킨다.
그의 위상은 1900년에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의 수여로 확립되었다.
갈레가 타계한 후에도 그의 회사는 193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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