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
백작의 아들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는 14세와 15세에 높은 데서 떨어져 다리뼈를 부러뜨렸고 이론 인해 발육부진이 되어 키가 150cm밖에 성장하지 못했지만, 머리는 제대로 성장하여 그의 모습은 비례에 맞지 않았다.
아버지와 아저씨가 아마추어 화가였으므로 어려서부터 드로잉에 재능을 나타낸 그는 1882년에 에밀 보나Emile Bonnat의 제자가 되었고 이듬해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1845-1924)으로부터 수학했다.
그가 반 고흐를 만난 것은 코르몽의 아틀리에에서였다.
툴루즈-로트레크는 21살 되던 해 몽마르트르에 작업실을 갖고 열다섯 살 때부터 그려온 스포츠를 주제로 24살 때까지 그렸다.
그 후 극장, 뮤직홀 특히 물랭 루즈Moulin Rouge, 카페, 서커스 그리고 파리의 하류생활상, 예를 들면 홍등가의 삶을 주제로 삼기 시작했다.
그는 고야의 판화를 수집하고 에드가 드가Edgar De Gas(1834-1917)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폴 고갱Paul Gauguin(1848-1903)을 만난 것은 1888년이었고, 고갱의 평편한 채색과 서예적인 강한 외곽선 사용에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일본화에 매료되었다. 석판화를 제작하면서 선을 중시하고 포스터를 제작했으며, 그의 양식은 아르누보 디자인에 큰 기여를 했다.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Au bal du Moulin de la Galette>(1889)는 툴루즈-로트레크의 대표 작품들 중 하나이다.
그는 포스터를 그리면서 작사가, 작곡가, 가수인 아리스티드 브뤼앙Aristide Bruant(1851-1925), 캉캉 댄서 잔 아브릴Jane Avril, 이베트 길베르Yvette Guilbert(1865-), 라 굴뢰, 메 벨포르와 같은 연예인들과 여자 광대 샤우카오 등을 주제로 삼았다.
그는 1894년에 당시 유명한 여배우 길베르를 위한 판화앨범을 제작하고, 전부가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지만 그녀를 위한 포스터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회화처럼 그의 포스터는 불길하고 종종 외설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다.
작가 빅토르 요제Victor Joze의 소설 <기쁨의 여왕 Reine de Joie>을 선전하는 포스터는 동시대인들이 19세기 마지막 10년을 특징짓는 절제의 감각을 잘 보여준다.
툴루즈-로트레크의 유명한 포스터와 석판화는 아르누보 양식을 연상시키지만 19세기 파리의 명소 물랭 루즈나 그 밖의 카바레에서 그린 포스터는 미적 가치를 지닌 작품들이다.
그는 미술품수집가에게 팔릴 그림, 드로잉, 판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툴루즈-로트레크는 창녀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스스로를 사회와 격리시키며 술을 즐겨 마셨기 때문에 알코올중독이 되었고, 매독에 걸려 1901년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의 가족은 1922년에 그의 작품 600점을 그의 고향 알비Albi에 기증했고 그로 인해 툴루즈-로트레크 미술관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