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아르누보인 유겐트슈틸Jugendstil>





1871년 발트해Baltic Sea 남쪽 연안에서 비슬라 강Weichsel River과 니멘 강Niemen River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한 프로이센Preussen 공국이 주도하여 독일을 제국으로 통합했지만 세기 말에도 여러 지역에서는 옛 소국가들이 지배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파리가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였던 프랑스와 달리 독일에서는 아직 크고 작은 제후국들의 권력관계를 인지할 수 있었다.
제국 최남단의 뮌헨에서는 적극적인 예술후원자로 등장한 통치자가 있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유입된 미술혁명 분위기는 가장 시민적이며 가장 혁명적이지 않던 섭정시대에 뮌헨에 도달했다.
미술에 열광한 ‘독일인의 왕’으로 불린 루트비히 2세Ludwig II(1845-86)가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뒤 그의 삼촌이자 루트비히 1세의 아들인 루이트폴트Luitpold(1821-1912)가 통치자로 결정되었다.

독일에서는 수도인 베를린뿐만 아니라 뮌헨, 다름슈타트, 드레스덴과 같은 여러 아르누보의 중심지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프랑스와는 대조적으로 독일에서는 이 양식이 재생과 낙관주의 정신에서 비롯했다.
낙관주의는 프러시아가 보불전쟁을 통해 1871년에 프랑스에 군사적 타격을 입힌 뒤 빌헬름 1세Wilhelm I가 스스로 황제Kaiser임을 선포한 데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해 불명예스럽게 끝나기는 했으나 왕국시대의 독일은 근대 독립국가의 모든 형식을 신속하게 갖추고 있었다.
세계 강국으로서의 독일의 지위는 1883년과 1885년 사이 일련의 식민지 활동으로 강화되었다.
빌헬름 2세가 왕위에 오른 1898년까지 독일은 막강한 힘을 과시했다.
1890년대와 1900년대에 베를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태도를 취한 뮌헨에서는 다원주의가 육성되었으며, 자유주의와 자신감에 찬 독재적 민족주의라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독일의 아르누보인 유겐트슈틸Jugendstil에는 젊은이들의 영웅주의, 인종의 순수성 그리고 신비주의와 같은 사상이 배어있었으므로 독일에 긍정적이며 혁명적인 세기말 적 사고가 유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겐트슈틸은 새로운 관점에서만 바라본 독일어 유겐트jugend에 근거해 ‘젊은 양식’으로 번역된다.
이는 유겐트슈틸이 단지 새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1896년에 창간한 정기간행물 <유겐트 Die Jugend>가 육성하려고 한 활력적인 젊은 에너지의 표출이었기 때문이다.
<유겐트>에는 젊음과 자연의 정신을 찬미하는 이미지가 많이 실렸고, 젊음의 자유와 에너지는 종종 구시대의 반동적인 세력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1896년 3월호 <유겐트> 표지에는 루트비히 폰 춤부슈Ludwig von Zumbusch(1861-1927)가 디자인한 두 소녀가 심술궂게 생긴 눈먼 노인을 초월을 가로질러 강제로 끌고 가는 모습이 실렸다.
한 해 전에 출간된 간행물 <판 Pan>(1895-1900)이 1900년까지 5백 명의 구독자만 확보한 고급 잡지인 데 반해 <유겐트>는 1896년 발행 당시부터 매주 3만 부를 발행했다.
인기가 높았을 때의 <유겐트>는 20만 명의 독자를 확보할 정도로 문화적 중요성을 지녔다.
<유겐트> 창간호는 젊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동시대인들이 젊음의 이상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에 대한 좀 더 유용한 통찰력을 제공했다.
매주의 <유겐트>의 표지는 잡지의 주제가 변덕스럽고 일시적인 부르주아 유행보다 더 진지한 문제인 ‘미술과 삶 Kunst und Leben’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유겐트슈틸의 중심적 주제는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과 정신주의, 합리와 비합리의 융합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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