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드 매독스 브라운Ford Madox Brown(1821-93)>





포드 매독스 브라운Ford Madox Brown(1821-93)은 존 러스킨과 마찬가지로 라파엘전파의 구성원들보다 조금 앞선 세대에 속한다.
라파엘전파 회화에서 표현된 원리들의 초기 전개가 그의 작품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대체로 개인적이었으며 스스로의 회화를 자신이 발견해나갔다.
영국과 유럽 대륙을 이어주는 도버Dover 해협에 면한 프랑스 항구도시 칼레Calais에서 여객선 사무장의 아들로 태어난 브라운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유럽 대륙에서 보냈다.
브뤼헤Bruges와 헨트Gent에서 다비드의 제자로 벨기에 화가 알베르트 그레고리우스Albert Gregorius(1774-1853)에게서 회화를 배우고, 그 뒤 벨기에의 역사화와 장르 화가 바론 바페르스Baron Wappers(1803-74)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1837년 안트베르펜의 로열 아카데미Royal Academy(1663년에 설립)로 향했다.
1839년과 1840년에 그가 안트베르펜과 파리에 있으면서 가졌던 고국에 대한 감정은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의 처형 The Excution of Mary Queen of Scots>과 <융프라우에 있는 맨프레드 Manfred on the Jungfrau>에 표현되어 있다.
후자의 주제는 자유분방하며 유려한 정열의 시를 써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은 영국 낭만파 시인 바이런George Gordon Byron(1788-1824)의 작품에서 가져온 것이다.


브라운은 1844년에 결혼하여 딸을 얻고, 이듬해 영국에 정착한 뒤 라파엘전파 구성원들과 가깝게 지냈지만 그룹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브라운의 딸 에마 루시는 훗날 윌리엄 마이클 로제티와 결혼했다.
브라운은 낭만주의 역사화의 전통을 좇아 그리면서 색을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여러 차례의 유럽 대륙 여행, 특히 이탈리아 여행이 그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로마에서 나자렛파Nazarense 구성원들을 만났는데, 요한 프리드리히 오베르베크Johann Friedrich Overbeck(1789-1869), 프란츠 포르Franz Pforr(1788-1812), 페터 폰 코르넬리우스Peter von Cornelius(1783-1867), 빌헬름 폰 샤도Wilhelm von Schadow(1788-1862)가 이끌던 독일 화가들의 그룹으로 그들은 국외로 추방당했다.
중세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취지로 1809년 빈에서 가톨릭 계율을 지키는 교단적 그룹을 결성한 그들에게는 종교적, 문화적 의고주의Archaism를 이용하여 독일의 고유한 화화를 정화시키는 목적이 있었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1471-1528), 페루지노Perugino(1450-1523), 산치오 라파엘로Sanzio Raffaello(1483-1520) 등은 나자렛파가 추구한 새로운 미술의 표본이 되었다.
나자렛 출신의 그리스도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 나자렛파는 중세 화가들의 길드 ‘루가 형제단 Lukasbund’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주로 종교적 주제를 다룬 구성원들에게 붙여진 비웃음이 섞인 별칭이었다.
오베르베크가 그린 <화가 프란츠 포르의 초상 Portrait of the Painter Franz Pforr>을 보면 창문 너머로 북해 연안 저지대의 시장 마을이 보이는 풍경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친구 화가를 북구 르네상스 화가의 모습으로 묘사했음을 알 수 있다.
의도적으로 고졸한 양식을 사용했으며 15세기 북구 거장들의 도상뿐 아니라 기법까지도 모방했다.
나자렛파는 르네상스 이후의 미술을 지나치게 개인적, 형식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부정한 반면 중세미술을 개인의 단일한 미적 생성물이 아닌, 민중의 종교적, 정신적, 평안을 위한 공동체적 산물이라는 시각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나자렛파는 낭만주의자들의 반동과 중세 복고주의를 결합시킨 그룹이며 라파엘전파가 이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들과 유사한 목적과 방법을 공유하고 있었다.


브라운이 1845-48년 영국에서 그리기 시작한 첫 회화 두 점 <곤트의 존에게 번역한 성경을 읽어주는 위클리프 Wycliffe Reading his Translation of the Bible to John of Gaunt>와 <에드워드 3세의 궁에 있는 초서 Chaucer at the Court of King Edward III>는 나자렛파와 라파엘전파 사이에 연결점을 제공했다.
두 작품 모두 민족학에 대한 전형적인 낭만적 관심이라는 점에서 나자렛파의 전례를 따르고 있다.
1853년에 되어서야 완성한 <에드워드 3세의 궁에 있는 초서>를 그린 의도는 영국적 정서와 영국 시의 영광을 나타내는 훌륭한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런 의도를 너무 고풍스럽게 표현했으므로 햇빛이 가득한 곳에서 기사와 귀부인, 왕과 궁중신하들 앞에서 독서하는 초서의 환영이 되고 말았다.
첫 번째 도안은 세 폭 제단화의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이 역시 나자렛파를 따른 것이다.
양쪽 패널에는 초서가 뿌린 씨의 열매라 할 수 있는 후대의 시인들에 있는데, 왼쪽 패널에 <실낙원 Paradise Lost>의 저자로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대시인 존 밀턴John Milton(1608-74), 후세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시인 중의 시인’으로 불린 스펜서Edmund Spencer(1552?-99), 그리고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시인이자 극작가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가 있고, 오른쪽 패널에는 낭만파 시인 바이런Byron(1788-1824), 영국의 시인이며 비평가 포프Alexander Pope(1688-1744),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방언을 사용하여 시를 쓴 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스Robert Burns(1759-96)가 묘사되어 있다.
선명하게 세부를 처리한 방식은 밀레이와 헌트 같은 젊은 화가들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것이다.
규모가 컸던 원래의 작품에서는 중앙의 장면만 완성되고 양쪽 패널은 완성되지 못했다.
<에드워드 3세의 궁에 있는 초서>는 문학과 중세에 대한 취향 외에도 라파엘전파주의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조심스럽게 선택된 고고학적 세부배열, 구성의 평면성, 그리고 한 순간에 존재하는 명암을 처리한 것이 그러하다.
브라운은 종종 초기작품에서 자연적 빛의 체계를 실험했으며, 이는 몇 년 뒤 라파엘전파의 가장 중요한 신조를 예견한 것이다.
로제티는 고대학교에 재학할 때 잠시 동안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곤트의 존에게 번역한 성경을 읽어주는 위클리프>에 대한 주제는 갑자기 떠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주제를 생각해낸 그날 저녁에 그는 첫 번째 스케치를 그렸고, 다음 날에 대영박물관의 독서실에서 존 리위스John Lewis의 <위클리프의 생애 Life of Wyclif>, 영국 시인 로버트 사우디Robert Southey(1774-1843)의 <교회서 Book of the Church>를 읽었다.
영국과 교황과의 세금 등의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왕실사절로 외교임무도 수행한 적이 있는 존 위클리프John Wyclif(1320/24-84)는 로마가톨릭의 권력남용에 관한 부당성을 지적한 뒤 개혁운동에 나섰다.
그가 평생 심혈을 기울여 바친 투쟁의 목표는 신적 진리와 인간 자유의 확립이었다.
곤트의 존과 왕실, 귀족들이 그를 옹호했다.
그는 성경이 자기 고유의 언어로 읽혀지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클리프의 생애>와 <교회서> 등은 회화의 반가톨릭 내용을 위한 관념을 제공해주었다.
위클리프의 사상을 옹호함으로써 프라하의 대주교 츠비넥Zbynek과 불화하고 프라하의 성직자단에 의해 설교를 금지당한 얀 후스Jan Hus(1371-1415)와 더불어서 위클리프는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다.
성서를 처음 영어로 번역한 위클리프는 중세세계의 반전설적인 인물일 뿐만 아니라 최초의 개신교도로서 브라운의 관심을 끌었다.
브라운은 가구를 정확하게 재현하기 위해 고딕을 부활시킨 건축가 퓨진을 참조하고 고딕 알파벳을 모사했다.
나자렛파의 회화와 비슷하게 엷고 단조로운 색조와 분산된 구성으로 이루어진 <곤트의 존에게 번역한 성경을 읽어주는 위클리프>는 최종적으로 프레스코화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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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레 로제티Gabriele Rossetti>






런던에서 태어난 이탈리아계 영국 화가이며 시인인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1828-82)는 정치적 압력에 의해 고국을 떠나 1824년에 영국에 정착한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학자 가브리엘레 로제티Gabriele Rossetti(1783-1854)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브리엘레 로제티는 1441년 헨리 6세에 의해 설립된 명문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의 이탈리아어 교수가 되었고,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가진 자식 네 명을 두었는데 로제티는 둘째였다.
로제티는 열세 살 때 사스 학교에 입학하여 4년 동안 재학했는데, 그가 이 학교에 입학하기 2년 전인 1839년에 해협제도에서 온 총명한 존 에버렛 밀레이가 이 학교에 입학했다.
총명한 밀레이와는 달리 로제티는 이 학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스스로도 다음 단계로 올라갈 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1845년 여름이 되자 그도 왕립미술원의 견습학생이 되었다.
현재 내셔널 갤러리가 있는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 안의 건물의 동쪽 반을 차지하던 왕립미술원Royal Academy of Arts은 1853년까지만 해도 수련과정이 10년 걸리는 학교로 학생들은 처음 수년 동안 고대학교Antique School에서 고전주의 조각들을 드로잉 해야 하고 그 뒤 유화를 그리며 실제 모델을 그릴 수 있었다.
건물이 비좁아 여름 전시기간에 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할 공간은 거의 없었다.
왕립미술원은 1768년 조지 3세의 칙허를 얻어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1723-92)를 초대회장으로 설립되었다.


로제티는 1848년 봄 포드 매독스 브라운에게 제자가 되게 해달라고 청했다.
당시 무명이었던 브라운은 로제티가 자신을 놀리려고 그러는 줄 알고 회초리를 준비하며 혼내주려고 했으나 사실임을 알고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불과 몇 달 동안만 배운 로제티는 여름에 브라운을 떠나 윌리엄 홀먼 헌트에게 몰입했다.
두 사람은 곧 같은 작업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작업실은 작은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다소 지저분한 런던의 웨스트엔드West End의 클리블랜드 가Cleveland Street에 위치했으며, 스티븐스에 의하면 “크고 썰렁한 방”이었다.
그 해 헌트는 빅토리아 시대의 대중작가 불워 리턴Edward Robert Bulwer Lytton(1831-91)의 14세기 로마를 배경으로 한 소설의 한 구절을 소재로 <정의를 반드시 구하겠다고 맹세하는 리엔치 Rienzi vowing to obtain Justice>를 그렸는데 로제티가 주인공의 모델이었다.
헌트가 당시 고어 가Gower Street에 있던 밀레이의 작업실에서 그린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초상 Portrait of Dante Gabriel Rossetti>을 보면 영감이 풍부한 천재의 모습이다.
천재로서의 화가라는 이미지는 낭만주의운동에서 화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개념이었으므로 헌트가 그렇게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로제티는 불규칙적으로 수업에 참가했으며 예술과 문학에 대한 취향도 일정한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
이 시기에 그는 시인이며 화가로서 왕립미술원에 재학한 적이 있는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1757-1827)를 발견했다.
블레이크는 어릴 때부터 비상한 환상력을 지녀 창가에서 천사와 대화하고 언덕에 올라 하늘을 만진 체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영박물관에서 블레이크의 원고를 우연히 본 로제티는 동생에게 빌린 10실링으로 시, 드로잉, 경구적인 산문, 그리고 <조슈아 레이놀즈의 강연에 대한 주해 Annotations to Sir Joshua Reynold's Discourses>가 수록된 원고를 구매했는데, 여기서 블레이크는 레이놀즈의 강연록을 “위선자의 속임수”로 묘사했다.
로제티는 또한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1809-92)과 더불어서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1812-89)의 활달한 시를 좋아하여 시각적으로 표현하기를 갈망했다.


로제티는 시인과 화가 모두 되고자 했으며 왕립미술원에서의 공부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비개성적이고 틀에 박힌 수업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는 학업을 도중에 그만두었다. 그가 영감을 얻기 위해 선택한 사람은 포드 매독스 브라운이었다.
브라운에게 끌린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아카데미와 무관한 데 있었다.
로제티는 브라운으로부터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써의 색채방법을 배우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자 그를 떠났다.
그는 헌트를 통해 그의 친구 밀레이를 만났다.
밀레이는 헌트의 생각에 공감했는데, 그것은 레이놀즈의 가르침이 영국 회화에 해악이 되고 있으며, 아카데미 화가들의 존경을 가장 많이 받는 라파엘로는 <그리스도의 변모 Transfiguration>에서 “진실의 단순함을 무시하고, 열두 제자를 호화스런 자태로, 그리스도를 세속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로제티가 스무 살의 나이에 처음 그린 라파엘전파주의 작품은 <성모 마리아의 소녀시절 The Girlhood of Mary Virgin>로 1848년 늦은 여름 내내 헌트의 지속적인 지도하에 그린 것이다.
마리아의 모델은 여동생 크리스티나 조지나 로제티이다.
이 작품은 PRB라는 글자를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린 것으로 런던의 자유전The Free Exhibition에 출품되어 1849년 3월 24일에 소개되었다.
그는 좌측 하단에 서명한 뒤 그 아래에 붉은색으로 PRB라고 적었다.
이 작품이 선보였을 때 어느 누구도 아카데미에 대한 반동의 의미를 지녔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최초의 라파엘전파 작품으로 아카데미의 관습을 거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복고양식이 사용되었다.
이 종교화는 원래 세 폭으로 구상되었다.
종교적 주제는 14세기 양식의 회화에 매우 적합했으며 로제티의 성향과도 잘 맞았다.
그를 매혹시킨 것은 <성모 마리아의 소녀시절>이 관람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보다는 깊은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이 작품은 종교적 주제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장치가 배제되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자연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로제티의 기법이 미숙했으므로 사실적 회화라고 할 수는 없다.
주목할 점은 그가 상징적인 세부에 매료된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소녀시절>은 상징적 의미를 무겁게 지니고 있으며, 로제티는 그림의 액자에 붙여놓은 소네트에 이를 자세히 설명해놓았다.
예를 들면 책은 성모 마리아의 미덕을, 백합은 순결함을, 일곱 개의 가시가 있는 찔레와 일곱 개의 잎이 있는 종려나무는 성모 마리아의 ‘크나큰 슬픔과 이에 대한 큰 보답’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부 평론가들은 성가족을 신의 모습보다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내려고 한 데 대해 비난했다.


<성모 마리아의 소녀시절>은 라파엘전파의 개혁의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특정한 효과를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거의 어색한 듯한 양식을 차용했다는 점에서 전통주의 작품이다.
여기에는 중세와 초기 르네상스 회화에서 볼 수 있는 많은 회화적 장치들이 사용되었는데, 어색한 구성, 중세 필사본의 한정된 공간과 대담한 배열방식이 돋보인다.
기법에서 보면 캔버스의 표면이 판지처럼 매끄럽게 될 때까지 애벌칠을 한 뒤 수채화 붓으로 유채를 칠해 모든 색조가 투명해졌다.
양식에서 보면 일종의 소박한 참신함이 나타나 있지만 어느 부분이 계산에 의한 것인지 혹은 능력의 부족 때문에 그렇게 표현된 것인지를 구분하기 어렵다.
헌트와 브라운은 로제티에게 원근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원근법은 로제티에게는 지루하고 성가신 것이었다. 그가 원근법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모든 인물이 화면에 빽빽하게 구성되고 말았다.
성 요아킴St. Joachim이 혼란스럽게도 관람자 가까이 불쑥 나타나 있으며, 왼편 마루와 오른편 마루의 소실점이 일치하지 않는다.
카탈로그에 실린 로제티의 시를 통해 상징물들의 의미를 알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난간 위에 걸쳐져 있는 붉은색 옷은 그리스도가 수난 때 입었던 옷을 상징한다.
성 안나St. Ann 뒤 담쟁이덩굴로 감겨 있는 수평선과 수직선의 고안물의 형태가 십자가인데 이는 십자가를 상징한다.
그리고 정원의 황금빛 후광 속의 비둘기는 전통을 좇아 성령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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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시덜Elizabeth Siddall(1829-62)




엘리자베스 시덜Elizabeth Siddall(1829-62)은 수채화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고 중세 기법을 이용하여 낭만적인 주제를 표현했다.
라파엘전파의 지지자 존 러스킨은 시덜의 작업을 존중했으며 그녀의 작품을 여러 점 구입했다.
러스킨은 쿼더당 150파운드를 준다는 조건으로 시덜에게 <샬롯 The Lady of Salott> 같은 중세적인 드로잉과 수채화에 대한 선매권을 요구했다.
여성 화가로서의 독립적인 정체성을 드러낸 <샬롯>은 1832년 테니슨이 아서 왕 시대를 주제로 처음 발표한 시 <샬롯>의 한 구절을 토대로 한 것이다.
샬롯은 저주를 받아 실제 세상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거울에 비친 모습만을 태피스트리로 짜야 했다.
시덜 자신이 옷 만드는 일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고달프고 인정도 받지 못하는 직조작업에 숙달된 여성의 이미지에 개인적으로 공감했을 것이다.
중세의 여성 노동은 가정 내부에 국한되어 있었다. 동일한 제목의 헌트의 작품에서 남성성을 대표하는 것은 무장하고 말을 탄 채 거울에 비쳐진 랜슬롯 경이다.
그 순간 샬롯은 창문너머 카멜롯을 직접 보고 결국 절망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시덜의 드로잉에는 거울이 깨졌고 직기가 부서진 장면은 없다.
시에서 샬롯은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힘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시덜은 자신의 운명을 제어하는 순간을 주제로 삼았다.
헌트의 작품에서는 샬롯이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고급 매춘굴을 연상시키는 방에는 여기저기 이국적인 물건들이 흩어져 있으며 그 속에 서 있는 샬롯은 점잖은 부인으로서의 역할에 실패한 여자이다.
헌트의 샬롯과는 반대로 시덜의 샬롯은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통제하는 자제력과 품위를 지니고 있다.


시덜의 또 다른 드로잉 <방탕한 여인들 곁을 지나가는 피파 Pippa Passing the Loose Women>는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1812-89)의 시를 위한 삽화로 배경은 르네상스 도시 아솔로Asolo이다. 창녀들이 계단에 앉아 애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처녀인 피파가 그들 곁을 지나가고 있다.
매춘은 1850년대에 상당한 사회적인 문제였다.
시덜은 낮은 계급 출신이었으므로 모델이라는 그녀의 직업도 점잖은 이들의 눈에는 비천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덜은 누드모델을 하지 않는 등 빅토리아 시대의 예의범절을 고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로제티가 후기에 가까이 한 사람들 중에는 가정부이자 정부였던 퍼니 콘포스를 비롯하여 매춘과 관련된 여자들이 있었다.
<방탕한 여인들 곁을 지나가는 피파>에서 시덜은 비난의 여지가 없는 피파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으며 지나치게 꼼꼼할 정도로 정확한 드로잉을 통해 이런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로제티가 “숙달된 작품은 아니지만 천재적인 재능으로 가득하다”고 말한 이 드로잉을 시인 브라우닝이 매우 좋아했다.


시덜은 1857년에 <클럭 손더스 Clerk Saunders>를 그렸는데 수채화인 이 작품의 주제와 시적 양식은 로제티의 영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로제티의 걸작들 중 몇 점은 시덜에게서 받은 영감을 그린 것들이다.
그는 회화와 시의 주제를 단테와 중세의 로맨스에서 취해 이를 가상현실로 묘사했다.
여성 한 사람 혹은 그룹을 통한 이상화되고 관능적인 이미지는 로제티의 주요 모티프였다.
여성들은 사치스러운 액세서리에 둘러싸여 있으며 대부분은 그가 첼시의 집을 가득 채운 동양적 공예품이나 중세 골동품이었다.


시덜과 벽덕스러운 로제티와의 관계는 1860년 결혼을 전후로 매우 불안정했다.
시덜은 1861년에 사산死産으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아편중독에 걸리게 되었다.
당시 런던에서 아편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1862년 아편 과다복용으로 죽었으며 자살로 추정된다. 전기 연구자들은 로제티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시덜의 관에 자신의 원고를 모두 넣고 묻었다가 1869년 다시 관에서 원고를 끄집어내기 위해 시신을 드러낸 기괴한 이야기에 지면을 많이 할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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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1827-1910)>




왕립미술원에서 만난 밀레이와 더불어 회화의 전통적인 규칙과 동시대 미술의 천박함에 반발한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1827-1910)는 런던에 있는 도매상점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화가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꿈은 아버지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그는 사스 학교Sass's School로 진학하지 못했다.
로제티가 이탈리아에서 온 지식인 가문의 출신이고, 밀레이가 면화 도매업자의 아들로 경제적 후원을 받은 데 반해 가장 경제적인 혜택을 받지 못한 헌트는 왕립미술원에 입학하기 전 4년 동안 부동산회사에서 일했으며 후에는 내셔널 갤러리에 복제화를 팔아 생활을 해야 했다.
그가 왕립미술원에 입학했을 때 아무런 선입견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학생시절 작품에서 특별히 급진적인 성격을 보이지 않던 헌트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847년 미술이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존 러스킨의 <근대 회화론> 1,2권을 읽은 후부터였다.
풍경화의 미학을 정립하기 위해 과학적, 종교적 논의들을 모두 동원한 이 책에서 러스킨은 젊은 화가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자연으로 가자’고 하면서 미술의 개혁을 주장했다.
러스킨은 1843년에 『근대 회화론』 1권을 발간한 뒤 이내 유명해졌다. 터너의 회화를 옹호하기 위해 소책자로 출간하려고 했던 『근대 회화론』은 이런 과정에서 계획이 바뀌어 17년에 걸쳐 다섯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젊은 화가들을 위해 쓴 결론 부분은 압권이었다.
이 부분에서 러스킨은 클로드 로랭이나 렘브란트Harmenszoon van Rijn Rembrandt(1606-69)를 좇거나 터너를 흉내 내는 것으로는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고 충고했다.
영국에서 조슈아 레이놀즈가 1769년에서 1790년까지 한 강의들을 모아 출판하여 널리 읽혀진 『강론』 이래 이 분야에서 그와 같이 진지하게 기존의 시각에 문제를 제기한 경우가 없었다. 레이놀즈는 역사화가 가장 우월하며 초상화와 풍경화는 열등한 장르로 취급해온 르네상스식 장르구분의 질서를 영국 내에 확립했다.
러스킨은 이 모든 것을 돌려놓았는데, 이론적 측면에서 그가 시도한 공격이 바로 라파엘전파가 실제 회화에서 반동을 일으킬 수 있도록 만든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
러스킨의 『근대 회화론』은 헌트와 밀레이로 하여금 왕립미술원에서 배우는 레이놀즈의 기법과 양식을 버리고 자연을 직접 사생하며 자세하게 관찰하여 생생한 그림을 그리게 만들었다.


헌트와 로제티는 이전에 서로 본적이 있었지만, 1848년 초여름 왕립미술원의 전시회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친구이자 동료가 되었다.
로제티는 홀본Holborn에 있는 헌트의 집을 방문하고 둘은 공통된 관심사를 이야기하면서 회화에 대한 자신들의 접근방식을 통일시켜나갔다.
헌트는 로제티에게 밀레이를 소개하고 세 사람이 작업을 함께 하는 일이 잦았다.
그들은 매일 저녁에 만났으며 피사Pisa에 있는 캄포 산토Campo Santo의 프레스코화들을 복제한 조반니 파올로 라시니오Giovanni Paolo Lasinio(1796-1855)의 판화들을 연구했으며, 특히 메디치 궁전Palazzo Medici에 있는 예배당에 벽화를 그려 유명한 초기르네상스의 피렌체 화가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1420-97)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러스킨은 이런 작품들이 공식적이고 완성된 후기르네상스 회화와는 다르지만 위대한 종교미술의 특징을 지녔다고 했는데, 헌트, 로제티, 밀레이 모두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헌트는 양식에 있어서 밀레이와 유사했는데, 이는 두 사람이 새로운 초기기독교 회화를 함께 작업하고, 1849년 왕립미술원에서의 전시 성공에 의해 고무되어 있었으며 영국 미술의 미래가 곧 자신들의 미래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루이드 성직자들을 피해 기독교 선교사를 숨겨주는 개종한 영국 가족’을 위한 습작 Study for "A Converted British Family Sheltering a Christian Missionary from the Persecution of the Druids'>(1849)은 헌트의 초기작품 <성 아그네스 축일 전야 The Eve of St. Agnes>(1848년경)에서 나타나는 폐쇄적인 공간으로 돌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레이의 작품과 유사하다.
선교사 뒤에 있는 두 여인은 밀레이의 작품을 상기시킨다.
이 작품에도 상징적 소재들이 사용되었고 포도나무와 옥수수는 야만인을 교화시키는 신성한 종교의 영향을 암시한다.
오두막 문에 걸려 있는 그물은 두 가지 이유에서 도입된 것으로 하나는 성서에 언급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드루이드 성직자들이 물고기를 두려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활기찬 주제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동작을 표현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인상을 준다.
신선하고 깨끗하며 선명한 유채의 처리는 성공적인데, 이는 젖은 흰색 바탕을 사용한 라파엘전파의 특징적인 유화기법의 승리 가운데 하나이다.


<성 아그네스 축일 전야>는 존 키츠의 시 <성 아그네스 축일 전야>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헌트는 키츠의 시에서 “정직하고 책임 있는 사랑의 신성함과 방종의 나약함”을 발견했다.
이는 도덕적 문제들의 유형을 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그의 의도로 이런 점은 그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클라우디오와 이사벨라 Claudio and Isabella>(1850)와 <프로테우스에게서 실비아를 구하는 발렌타인 Valentine Rescuing Sylvia from Proteus>(1851)에서도 발견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그림으로 그리려는 시도는 라파엘전파 모두에게 특징적이었지만, 밀레이가 동시대 연극의 새로운 조류와 방향을 함께 하며 새로운 자연주의에 관심을 기울인 데 반해 헌트는 셰익스피어를 통해서 도덕적 문제들을 다루려고 했다.
이런 의도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클라우디오와 이사벨라>로 라파엘전파의 초기 양식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러스킨의 <근대 회화론>의 영향 하에 전경에 극도로 세밀하게 잎들을 하나하나 그린 이 작품에서는 감옥의 창밖으로 화사한 봄꽃이 보이지만 상황은 음울하다.
젊은 청년은 누이에게 그녀의 동정童貞과 자신의 목숨을 바꾸어줄 것을 간청한다.
헌트는 이와 유사한 상황을 찾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가장 덜 알려진 <베로나의 두 신사 The Two Gentlemen of Verona>에서 가장 도리에 어긋나는 장면을 묘사했다.
성욕을 주제로 한 <프로테우스에게서 실비아를 구하는 발렌타인>는 주인공 발렌타인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프로테우스가 실비아를 겁탈하려는 순간에 나타나 “악당 같으니! 무례하고 야만적인 행동을 그만둬”라고 소리치며 이를 막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마지막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프로테우스의 옛 애인인 줄리아가 남자로 변장한 채 지켜보고 있다.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는 예전에 프로테우스가 그녀에게 준 것이지만 이제는 가치를 상실한 애정의 상징이다.
희곡의 내용이 실제 야외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된 이 작품의 배경은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에 인접한 켄트Kent의 숲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며 인물들이 셰익스피어 시대의 의상을 하고 있다.
헌트는 밀레이와 로제티처럼 문학적, 종교적 사건들을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리면서 여기에서는 자극적인 색상과 색조를 거침없이 결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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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버렛 밀레이Sir John Everett Millais(1829-96)>






존 에버렛 밀레이Sir John Everett Millais(1829-96)가 어려서 미술에 재능을 보이자 그의 부모는 그의 재능을 키워주기 위해 런던으로 이주했다.
밀레이는 저지Jersey 지방의 부유한 지주가문이었다.
아버지는 맨체스터 하우스Manchester House의 경영자이자 면화 도매업자로서 아들에게 경제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들의 작품을 왕립미술원의 관장이던 마틴 아처 시Sir Martin Archer Shee에게 보여주자 그가 감명을 받았다.
사스 학교 과정을 매우 짧은 시간에 끝낸 밀레이는 1840년에 전례 없이 어린 나이인 열한 살에 왕립미술원의 견습학생이 되었고, 재학 중에 아카데미의 모든 상을 휩쓸었다.
사스 학교는 왕립미술원에 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준비단계로서 어린 예술가들이 기초 기술을 배우는 곳이었다.


밀레이가 제작한 완벽하게 라파엘전파주의에 합당한 첫 작품은 <이사벨라 Isabella>(1848-49)로 주제는 이 공동체의 계획에서 시작되었다.
이 작품은 1849년 로제티의 첫 라파엘전파 작품보다 한 달 늦게 왕립미술원의 전시회를 통해 소개되었는데, 환각적일 정도로 사실적이어서 관람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화면 속의 형제들은 라파엘전파의 구성원 일곱 명과 비슷해서 그가 라파엘전파 구성원들에 대한 자신의 형제애를 표명이라도 하듯 이사벨라의 의자 가장자리에 PRB라는 이니셜을 새겼다.
왼편에 포도주잔을 들고 있는 인물이 프레더릭 조지 스티븐스로 화가로 출발했지만 나중에 유명한 평론가가 되었다.
인물들의 얼굴표정에서 그가 모델들을 철저하게 관찰했음을 본다.
이사벨라의 아버지로 보이는 냅킨을 머리에 두른 노인의 모델은 밀레이의 노망든 아버지였다.
밀레이는 직업모델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친한 친구나 지인을 모델로 함으로써 충실한 묘사를 통해 각 인물의 특징을 살릴 수 있었으며 생동감을 부여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주의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전통주의를 적극적으로 표방한 것이다.
인물들이 매우 좁은 공간에 자리 잡고 있어 왕립미술원의 우등생이었던 밀레이가 원근법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이 분명하다.
존 키츠의 시 <이사벨라, 혹은 바질 단지 Isabella: or the Pot of basil>는 라파엘전파 구성원들로 하여금 새로운 원칙을 완전히 실행하게 될 회화로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키츠는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등장하는 이사벨라와 로렌초Lorenzo의 이야기를 시의 소재로 다루었다.
따라서 주제와 모델들의 의상이 라파엘로 이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키츠의 시에서 이사벨라는 오빠들의 하인이었던 로렌초와 사랑에 빠진다.
<이사벨라>는 오빠들이 여동생을 정략적으로 결혼시키려던 계획이 방해받자 매우 화가 난 모습을 나타낸 작품이다.
불운한 운명의 연인을 주제로 한 이 작품에서 이사벨라와 로렌초가 운명의 핏빛 오렌지를 나눠먹는다.
후에 로렌초의 머리를 벤 뒤 숲속에 묻어버리는 오빠들 가운데 하나가 호두를 거칠게 까면서 오른발을 앞으로 쭉 뻗어 이사벨라의 개를 괴롭히고 있다.
이로 인해 수평적 화면이 극적 효과를 자아낸다. 밀레이의 작품은 자연에 대한 충실과 의식적인 의고주의 양식 모두를 보여준다.
<이사벨라>는 사실적이면서도 매우 양식화되어 있으며 계획된 신선함이 있다.
인물들의 빈틈없고 다양한 묘사, 어느 정도 시대착오적이기는 하지만 세부에 대한 고고학적이며 정확한 관찰, 멍청한 두 형제의 악의를 포착하는 화가의 방법 등이 잘 나타나 있다.
개를 걷어차기 위해 다리를 뻗치는 모티프는 계획적이다.
개를 쓰다듬는 이사벨라의 자연스러운 우아함은 로렌초에게서 오렌지 반쪽을 힘들게 받아들이는 상징적인 동작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치밀한 세부묘사는 전체적인 구도의 비현실과 충돌한다. 배경에 보이는 항아리는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는 상징물로 존재하는데, 로렌초가 살해당한 뒤 그의 영혼이 이사벨라에게 나타나 진실을 밝히자 그녀는 시체를 파내어 그의 머리를 항아리 속에 담아둔다.


밀레이는 자신의 많은 작품에서의 선례가 되는 <최후의 만찬>과 같이 열세 명의 사람이 식탁에 둘러앉는 전통을 무시했다.
아카데미에서 훈련받은 화가로서는 이런 구도를 만들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구도는 화면의 테마가 되는 중심사건에서 급격하게 왼편으로 기울어져 있다.
관람자의 눈은 천천히 왼편을 향하면서 울퉁불퉁하게 나열되어 있는 인물들의 얼굴을 보게 되며, 이는 다시 건너편에 앉아 있는 인물들의 초상을 훑어보다가 불운한 여인의 부드러운 태도에 머물게 된다.
뒤쪽 벽을 덮고 있는 태피스트리의 평면성과 바깥쪽 풍경이 보이는 인접 벽면 사이의 관계 설정이 쉽지 않았음을 보는데, 공간이 애매모호하며, 풍경이 보이는 벽면은 테이블의 오른쪽 선과 평행을 이루면서 뒷면의 태피스트리로부터 오른쪽으로 꺾이는 각도로 설정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태피스트리와 나란하게 옆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밀레이는 회화 공간을 재편성하려고 시도했지만, 자연주의적 관점의 요구에 구성의 대담함을 적용시키는 일이 자신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파엘전파는 피사의 캄포 산토에 있는 15세기 프레스코를 본뜬 조반니 파올로 라시니오의 석판화집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동일한 양식으로 일련의 드로잉을 재작했는데, 이는 구성원들 모두가 동일한 양식을 구사한 유일한 예였다.
밀레이가 1848년에 그린 드로잉 <장미덩굴 곁의 연인들 Lovers by a Rosebush>은 <이사벨라>를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두 연인은 물론 개까지도 <이사벨라>와 동일한 모델로 보인다.
꽃에 대한 묘사에서 밀레이가 자연을 철저하게 관찰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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