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전파Pre-Raphaelite>



르네상스 말기의 문화, 회화의 전통에 반대하며 라파엘로Sanzio Raffaello(1483-1520) 이전의 성실하고 소박한 화풍, 즉 아카데미즘의 원류로 간주되는 시대 이전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창한 라파엘전파Pre-Raphaelite는 왕립미술원에 재학하던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존 에버렛 밀레이, 윌리엄 홀먼 헌트 세 명이 1848년에 결성했으며 이들은 영국 회화의 정체停滯를 타파하려고 했다.
라파엘전파가 과거 회화에 보인 지속적인 관심은 중세주의를 지향하던 낭만주의 운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19세기 초반 유럽에 만연한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가 중요하게 여긴 규칙의 준수에 반대하며 개인의 감정과 정체성에 더 가치를 두었다.
낭만주의자들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서 높이 평가받은 그리스, 로마의 고전 회화보다는 중세 회화가 더 자유로운 개성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중세는 현실과 반대되는, 상실한 정신과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는 성소였다.
그들은 중세의 건축과 미술, 문학 속에서 발견한 로맨스와 꿈같은 기사들에 관한 이야기에 심취했다.


로제티는 홀먼 헌트와 밀레이를 매일 만나다시피 하면서 서로의 우정, 과거 회화에 대한 불만족 그리고 무한한 열망으로 결속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으며 이것이 라파엘전파를 결성하는 동기가 되었다.
로제티가 라파엘전파 구성원의 수를 늘리자고 제안했지만 무계획적이며 다소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추진되었다.
포드 매독스 브라운은 새 구성원으로 선택되었지만 헌트가 그를 반대했는데, 이들보다 7년 연상인 브라운은 라파엘전파 결성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새로운 구성원 대부분은 로제티의 친구들이었다.
가장 먼저 가입한 스물세 살의 토머스 울너Thomas Wollner(1825-92)는 빈약한 재능의 소유자이면서도 성공한 조각가이자 아마추어 시인이었다.
로제티가 그를 좋아했더라도 울너가 라파엘전파주의에 유일하게 해당되는 사항은 아카데미에 대한 격양된 저항뿐이었다.
로제티가 지명한 또 다른 구성원은 자신의 동생이며 시 공무원으로 미술평론가 역할을 한 윌리엄 마이클 로제티William Michael Rossetti(1829-1919)와 제임스 콜린슨James Collinson(1825-81)였다.
윌리엄은 열여섯 살 때 간접세무국(후에 내국세입청이 됨)의 사무원이 되어 연봉 80파운드를 받았고 이로써 로제티 집안의 대들보가 되었다. 윌리엄은 1874년 마흔다섯 살 때 포드 매독스 브라운의 딸인 에마 루시와 결혼했다.
노팅엄Nottingham에 있는 서적판매상의 아들 콜린슨은 왕립미술원에 수년 동안 재학하며 재능을 보인 학생이었다.
헌트는 로제티의 동생이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콜린슨이 구성원이 된 중요한 이유는 로제티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의 약혼자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헌트가 추천한 유일한 구성원은 자신의 친구 프레더릭 조지 스티븐스Frederick George Stevens(1828-1907)로서 그의 학업은 왕립미술원의 고대학교 그 이상으로 진척되지 않았으므로 유화를 그려본 적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일곱 명의 구성원이 서양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라파엘전파의 원심력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울너는 뛰어난 작품을 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입이 거의 없자 1852년에 금광을 찾아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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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마


첼리스트 요요 마가 유명하기 전,
그가 시카고의 한 호텔에 묵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는 룸서비스를 받으려고 프론트데스크에 전화했다.
그에게 이름을 묻자 그는 “요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론트데스크에서는 장난전화인 줄 알고 끊었다.
그가 다시 전화를 걸어 항의하자 이번에는 last name을 물었다.
그가 “마”라고 말하자 프론트데스크에서는 다시 장난전화를 건 것으로 알고 끊었다.
요요 마는 프론트데스크로 직접 내려가 자신의 여권을 보여주고 자신의 이름이 요요 마임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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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라파엘전파를 주도한 인물은 화가로서 활약하기보다는 시인으로 각광을 받은 로제티였다.
그는 기관지를 발행해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그래서 <기원 The Germ>이 탄생했다.
<기원>은 그 자체로 대단치 않은 것이지만 자의식이 강한 전위미술가들 그룹의 첫 번째 정기간행물이란 점에서 그리고 뒤를 이어서 출현한 이런 종류의 간행물들의 일반적 본보기, 즉 초반의 엄청난 열의, 훌륭한 기사거리의 부족, 인쇄업자들과의 갈등, 판매부진, 단명 등과 같은 선례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회화가 주요업무가 아니었던 울너, 스티븐스, 윌리엄 마이클 로제티는 기관지에 대한 로제티의 취지를 후원했다.
기관지는 구성원들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매체이자 아카데미와 같이 기존에 설립된 체제에 내재하는 제약을 전혀 받을 필요가 없는 매체였다.
울너의 친구로서 유능하지만 거의 무명이었던 시인 코번트리 팻모어Coventry Patmore(1823-96)가 여기에 동참했고, 그 밖에도 크리스티나 로제티, 포드 매독스 브라운, 윌리엄 벨 스콧William Bell Scott(1811-90), 월터 하우얼 데버럴Walter Howell Deverell(1827-54), 윌리엄 케이브 토머스William Cave Thomas(1820-84) 등이 참여했다.
로제티의 친구 벨 스콧은 1846년부터 1863년까지 뉴캐슬Newcastle의 공립미술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라파엘전파의 구성원들은 65개나 되는 기관지 명칭을 목록으로 만들고 그것들 중에서 최종적으로 ‘기원’을 선택했다.


팻모어는 1854년에 장편시 <집안의 천사 The Angel in the House>를 출간했는데,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1819-1901)이 통치(1837-1901)하던 영국 역사상 가장 번영의 시기에 여성에 대한 당대의 보편적인 개념을 정의한 것으로 희생적이고 가정적인 여성을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꼽았다.
팻모어는 시에서 가정은 최고의 안식처요, 여성은 가정을 편안한 휴식처로 만드는 존재이며, 또한 여성은 지상에 내려온 천상의 안내자로 묘사했다.
‘집안의 천사’라는 용어는 당대에는 인기가 높았으나 그 뒤 수동적이고 나약한 여성이란 부정적 의미로 정의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빅토리아 시대의 경직되고 가부장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비판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영국의 중요한 여류시인들 가운데 하나인 크리스티나 조지나 로제티Christina Georgina Rossetti(1830-94)는 오빠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스케치에서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지만 매력적이다.
그녀는 콜린스의 약혼녀였으나 콜린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종교적 갈등으로 파혼했다.
평생 독신으로 산 크리스티나는 때때로 세속적인 열정의 요구와 거룩한 신앙 사이에 붙잡혀 있는 자신을 발견했는데, 이런 분열이 크리스티나의 시의 중심을 이루었으며, 그녀는 자연으로부터 정신적 영향을 받는 ‘종교적 광인’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그녀가 1862년에 발표한 <도깨비 시장 Goblin Market>과 그 밖의 시들은 라파엘전파의 첫 번째 문학적 성공으로 기록되었다.
크리스티나는 1872년 오빠 로제티의 건강악화로 인한 신경질적이고 격정적인 성격에 의해 물리적 고통을 받았고, 1882년 오빠가 타계한 뒤 그녀의 인생 마지막 12년은 평온한 삶이었다.


<기원>의 창간호는 1850년 1월에 발행되었고, 표지에 헌트의 에칭작품과 기관지 발행이 의도하는 정신을 표현하고자 했던 윌리엄 마이클 로제티의 모호하고 나약한 시가 실렸다.
제2호는 다음 달에 발행되었으며 로제티의 시 <은총 받은 처녀 The Blessed Damozel>가 실린 점에서 주목할 만했다.
<기원>은 판매가 부진하여 <미술과 시 Art and Poetry>라는 새로운 명칭과 <자연에 대한 사고 Being Thoughts towards Nature>라는 부제가 붙은 제4호 이후에는 계속 발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기관지의 보급이 한정되었지만 기관지를 발행하는 일은 라파엘전파의 활동영역을 확장시켜주고, 로제티가 시인으로서 경력을 시작한 곳이라는 의미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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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




라파엘전파가 등장한 시기는 인류와 자연과의 관계가 급격히 변화하던 시기였다.
1851년 인구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잉글랜드와 웨일즈Wales 인구의 대다수가 소도시와 대도시에서 살았다.
산업화와 도시의 성장 그리고 이에 따른 대기오염이 이 시기에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러스킨은 제조공장의 짙은 연기를 ‘19세기의 먹구름’으로 표현했다.
당시 빅토리아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많은 사람이 산업화와 번영을 국가의 진보로 보았지만 러스킨은 이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는 경제발전을 위해 자연환경의 파괴와 도시의 사회적 문제라는 대가 톡톡히 치르고 있다고 보았다.


라파엘전파가 탄생한 해에 영국에서는 1840년대의 마지막 대격변인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이 일어났는데, 차티즘Chartism은 최초의 공장 노동계급운동으로 그들은 남성들의 보통 선거권을 비롯한 일련의 정치개혁을 요구했다.
차티스트들이 런던 중심부에서 케닝턴 코먼Kennington Common으로 비폭력 행진을 했을 때 밀레이와 헌트가 호기심으로 대열에 참가했다.
그러나 라파엘전파는 차티스트와 같은 정치적 노선을 걷지는 않았다.
1850년대에는 대중적인 시위가 점차 줄고 중산계급이 부상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근대화의 자랑스러운 상징인 철도교통망이 완성됨으로써 전례 없는 이동의 자유가 이루어졌다.
영국 대륙과 그 식민지, 그 밖의 세계들로부터 유입된 자원과 기계제품들은 만국박람회에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경제적 부흥을 예고했다.
이 시기에 중산계급은 신념에 차 있었으며 경제적 부의 축적으로 인해 미술은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라파엘전파 구성원들 중에 특히 헌트와 밀레이가 직접적으로 이득을 보았는데, 헌트는 1860년 화상 어니스트 갬버트Ernest Gambart에게 자신의 작품 <성전에서 그리스도를 찾다 The Finding of the Saviour in the Temple>를 5,500파운드라는 엄청난 돈을 받고 팔았다.
이 작품은 누가복음 2장 45-46절 가운데 마리아와 요셉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어린 예수를 찾는 장면이다.
생생한 현실장면을 재현한 화면은 두 개의 대립되는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왼편에 혼란스럽고 그로테스크한 성서학자 랍비들의 무리가 있고, 오른편에는 성가족이 피라미드 형태를 이루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관람자가 보기에 대립적인 두 요소는 옛 섭리와 새로운 섭리의 만남, 구약의 유대세계와 신약의 기독교세계와의 만남이란 의미를 지닌다.
랍비들의 믿음을 시대에 뒤떨어진 답답한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왼편 끝의 늙은 랍비가 율법 두루마리를 부여잡은 채 율법의 정신보다는 문구에 매달린 모습으로 표현한 의도는 19세기 중엽 영국 문화에서 일반화되어 있던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반영한 것이다.
화려한 사원의 형태는 예루살렘에서 새로 발굴된 유물을 참고로 했지만 대부분의 디자인은 런던 남부의 수정궁에 있던 그라나다Granada의 알함브라 궁전Alhambra Palace을 도해한 오웬 존스Owen Jones의 책을 참고로 한 것이다.
라파엘전파의 작품을 구입한 사람들은 대부분 주식중개인, 직물제조업자, 선박계의 부호들이었다.


라파엘전파가 결성된 지 7년 후인 1855년에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은 사라지기 시작했고 각각 자신의 길을 걸었다.
헌트는 중동으로 여행을 떠났다.
에피 그레이가 러스킨과 이혼하고 밀레이와 재혼한 사건은 러스킨이 밀레이와 반목하는 이유가 되었으며, 그 밖에도 구성원들 간에는 성향의 차이가 있었다.
로제티는 자연 그대로를 묘사하는 작업을 하지 않았고 그런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오히려 공상적인 중세의 이야기였다.
밀레이는 1853년 왕립미술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자 이전의 급진적인 태도를 버렸다.
그러나 라파엘전파의 중요하고 개성적인 작품 대부분은 1850년대 후반에 나왔다.
로제티, 헌트, 브라운은 비록 독자적으로 작업했으나 나름대로 풍부한 이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있었다.
밀레이는 1855년 이후 풍경화에 인물화를 접목시켜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그리게 되었다.
초기의 어지러울 정도로 세밀하던 극사실주의 대신 색채들 간의 조화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이야기 서술에서 벗어나 감각에 호소하는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로제티는 초기의 라파엘전파 양식을 떠나 점차 전위적인 미술가 그룹을 주도했는데, 이 그룹에 윌리엄 모리스와 그의 아내 제인 모리스, 번-존스, 엘리자베스 시덜, 프레더릭 샌디스Frederic Sandys(1829-1904), 시미언 솔로몬Simeon Solomon(1840-1905) 등이 포함되었다.
1860년대 로제티와 관계한 그룹의 작품들을 라파엘전파 양식으로 묶을 수 없는데 자연에 대한 묘사에 충실하는 것과 풍자적인 서술 구조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로제티의 상상력을 자극한 중세주의 같은 몇몇 주제는 이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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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뛰어난 독창적 사상가이며 미술평론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은 라파엘전파의 절박한 상황을 해결해준 일종의 구세주처럼 나타난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라파엘전파의 목표를 공유하고 있었다.
러스킨은 해설자라기보다는 동지로서 라파엘전파에 결속되었는데, 그의 생애 대부분이 라파엘전파의 운명과 함께 뒤얽혀 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과 같은 해인 1819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셰리주酒Sherry의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엄격한 칼뱅주의에 기반을 둔 복음교회파 신도였다.
그의 가족은 런던 근교의 헌 힐Herne Hill에 있는 안락하고 커다란 저택에서 살았으며, 근처 덜리치 대학Dulwich College에는 당대에 흔치 않던 일반인을 위한 갤러리가 있었다.
러스킨은 한 번도 학교에 가지 않았지만 부모와 여러 명의 개인교사들에 의해 강도 높고, 당대의 관점에서 볼 때 독특한 교육을 받았다.
그에게 완고한 도덕성을 처음 고취시킨 것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부모의 엄격한 종교였다.
개인교사를 통해 러스킨은 킹 제임스 영역 성경King James Bible을 공부했다.
빅토리아 시대 대부분의 부유층 자녀들이 그랬듯이 그도 어린 시절부터 회화를 익혔고 당시 유명한 스코틀랜드의 화가 알렉산더 러시먼Alexander Runciman(1736-85), 잉글랜드의 화가 앤토니 반다이크 코플리 필딩Antony Vandyke Copley Fielding(1787-1855), 복음주의자이면서 잉글랜드의 화가, 사진작가 제임스 더필드 하딩James Duffield Harding(1798-1863)에게서 전통 스케치를 배웠다.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인 러스킨은 회화에서도 재능을 나타냈다.
재능은 열여섯 살 때에 그린 드로잉 <옥스퍼드의 성 메리 교회와 올 소울스 대학 St. Mary's and All Souls, Oxford>(1835)에서 발견된다.
허물어져 가는 석조건축의 느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부드러운 연필의 단속적인 선에서 그리고 대학과 성 메리 교회의 중세적인 형태와 세속적인 세부를 혼합하는 방식에서 그가 회화의 건축적 양식에 숙달했음을 본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화가가 되기를 포기했다.


러스킨의 정신이 형성된 과정은 복잡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숭배하던 세 영웅에게서 중요한 영향을 이끌어낼 수 있다.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Edinburgh 출신의 역사소설가, 시인 월터 스콧Walter Scott(1771-1832)에게서 낭만적 중세주의를, 잉글랜드 북부 컴벌랜드의 코커머스 출신의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1770-1850)로부터 자연의 아름다움에 담긴 의미에 대한 신념을 배웠다.
프랑스와 알프스 지방을 도보로 여행한 워즈워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러스킨은 알프스 산을 워즈워스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고, 산에 대한 시를 썼다. 알프스 산은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러스킨은 낭만주의 풍경화가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그가 터너의 작품에 집요하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830년대 후반 옥스퍼드 대학에 재학할 때부터였다.
당시 사람들이 터너가 미쳤고 말년의 작품들은 자연에 대해 충실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분개하여 그는 터너를 옹호하는 책을 쓰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설득해 터너의 후원자로 만들었다.
아버지가 구입한 터너의 많은 수채화와 로저스Rogers의 <이탈리아 Italy>에 실린 터너의 삽화는 러스킨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러스킨은 터너에게서 도상과 재현에 대한 열정, 그리고 회화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열정을 배웠다.
그가 터너를 처음 만난 건 1840년이었으며 그 뒤 두 사람은 특이한 우정관계를 지속해갔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843년에 터너를 변호하기 위해 <근대 화가론 Modern Painters>(5권)의 제1권을 익명으로 발표하여 예술미의 순수감상을 주장하고 예술의 기초가 민족 및 개인의 성실성과 도의에 있음을 역설했다.
그는 시각적 인상을 이와 반대되는 개념적 지식보다 우위에 놓고 훈련된 감수성에 바탕을 둔 관찰을 중시했다.
제3권과 제4권을 1856-57년에, 제5권을 1860년에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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