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




라파엘전파가 등장한 시기는 인류와 자연과의 관계가 급격히 변화하던 시기였다.
1851년 인구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잉글랜드와 웨일즈Wales 인구의 대다수가 소도시와 대도시에서 살았다.
산업화와 도시의 성장 그리고 이에 따른 대기오염이 이 시기에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러스킨은 제조공장의 짙은 연기를 ‘19세기의 먹구름’으로 표현했다.
당시 빅토리아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많은 사람이 산업화와 번영을 국가의 진보로 보았지만 러스킨은 이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는 경제발전을 위해 자연환경의 파괴와 도시의 사회적 문제라는 대가 톡톡히 치르고 있다고 보았다.


라파엘전파가 탄생한 해에 영국에서는 1840년대의 마지막 대격변인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이 일어났는데, 차티즘Chartism은 최초의 공장 노동계급운동으로 그들은 남성들의 보통 선거권을 비롯한 일련의 정치개혁을 요구했다.
차티스트들이 런던 중심부에서 케닝턴 코먼Kennington Common으로 비폭력 행진을 했을 때 밀레이와 헌트가 호기심으로 대열에 참가했다.
그러나 라파엘전파는 차티스트와 같은 정치적 노선을 걷지는 않았다.
1850년대에는 대중적인 시위가 점차 줄고 중산계급이 부상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근대화의 자랑스러운 상징인 철도교통망이 완성됨으로써 전례 없는 이동의 자유가 이루어졌다.
영국 대륙과 그 식민지, 그 밖의 세계들로부터 유입된 자원과 기계제품들은 만국박람회에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경제적 부흥을 예고했다.
이 시기에 중산계급은 신념에 차 있었으며 경제적 부의 축적으로 인해 미술은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라파엘전파 구성원들 중에 특히 헌트와 밀레이가 직접적으로 이득을 보았는데, 헌트는 1860년 화상 어니스트 갬버트Ernest Gambart에게 자신의 작품 <성전에서 그리스도를 찾다 The Finding of the Saviour in the Temple>를 5,500파운드라는 엄청난 돈을 받고 팔았다.
이 작품은 누가복음 2장 45-46절 가운데 마리아와 요셉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어린 예수를 찾는 장면이다.
생생한 현실장면을 재현한 화면은 두 개의 대립되는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왼편에 혼란스럽고 그로테스크한 성서학자 랍비들의 무리가 있고, 오른편에는 성가족이 피라미드 형태를 이루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관람자가 보기에 대립적인 두 요소는 옛 섭리와 새로운 섭리의 만남, 구약의 유대세계와 신약의 기독교세계와의 만남이란 의미를 지닌다.
랍비들의 믿음을 시대에 뒤떨어진 답답한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왼편 끝의 늙은 랍비가 율법 두루마리를 부여잡은 채 율법의 정신보다는 문구에 매달린 모습으로 표현한 의도는 19세기 중엽 영국 문화에서 일반화되어 있던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반영한 것이다.
화려한 사원의 형태는 예루살렘에서 새로 발굴된 유물을 참고로 했지만 대부분의 디자인은 런던 남부의 수정궁에 있던 그라나다Granada의 알함브라 궁전Alhambra Palace을 도해한 오웬 존스Owen Jones의 책을 참고로 한 것이다.
라파엘전파의 작품을 구입한 사람들은 대부분 주식중개인, 직물제조업자, 선박계의 부호들이었다.


라파엘전파가 결성된 지 7년 후인 1855년에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은 사라지기 시작했고 각각 자신의 길을 걸었다.
헌트는 중동으로 여행을 떠났다.
에피 그레이가 러스킨과 이혼하고 밀레이와 재혼한 사건은 러스킨이 밀레이와 반목하는 이유가 되었으며, 그 밖에도 구성원들 간에는 성향의 차이가 있었다.
로제티는 자연 그대로를 묘사하는 작업을 하지 않았고 그런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오히려 공상적인 중세의 이야기였다.
밀레이는 1853년 왕립미술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자 이전의 급진적인 태도를 버렸다.
그러나 라파엘전파의 중요하고 개성적인 작품 대부분은 1850년대 후반에 나왔다.
로제티, 헌트, 브라운은 비록 독자적으로 작업했으나 나름대로 풍부한 이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있었다.
밀레이는 1855년 이후 풍경화에 인물화를 접목시켜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그리게 되었다.
초기의 어지러울 정도로 세밀하던 극사실주의 대신 색채들 간의 조화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이야기 서술에서 벗어나 감각에 호소하는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로제티는 초기의 라파엘전파 양식을 떠나 점차 전위적인 미술가 그룹을 주도했는데, 이 그룹에 윌리엄 모리스와 그의 아내 제인 모리스, 번-존스, 엘리자베스 시덜, 프레더릭 샌디스Frederic Sandys(1829-1904), 시미언 솔로몬Simeon Solomon(1840-1905) 등이 포함되었다.
1860년대 로제티와 관계한 그룹의 작품들을 라파엘전파 양식으로 묶을 수 없는데 자연에 대한 묘사에 충실하는 것과 풍자적인 서술 구조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로제티의 상상력을 자극한 중세주의 같은 몇몇 주제는 이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다루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