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해프닝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백남준은 1959년 11월 뒤셀도르프 22번가에 소재한 장 피에르 빌헬름의 갤러리 22에서 <케이지에게 바침: 테이프레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 Homage to John Cage: Music for Tape Recorder and Piano>을 선보였는데, 깡통을 발로 차서 유리판을 깨고 그 유리가 계란과 장난감자동차를 치도록 만들고, 피아노를 공격하기 위해 돌진하고 테이프레코더에서는 재생한 다양한 소리가 나오는 음악적 해프닝이었다.
다양한 소리란 수탉의 놀라서 내는 소리, 모터사이클의 소리와 함께 베토벤의 교향곡 5번, 독일 가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 외에도 시끌벅적한 복권당첨 소리, 장난감 소리, 사이렌 소리 등이었다.
해프닝은 그가 케이지로부터 받은 영향에 대해 감사를 표한 것으로 일상생활에 존재하는 온갖 소리를 음악으로 주장하는 것이었지만, 쾰른 스튜디오의 전자음악과 케이지의 작곡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부조리하고 공격적인 행위였다.
이 작품은 백남준이 악기에 놀라운 파괴력을 가지고 공격하는 행위음악의 전기를 열었다.
케이지의 관심사가 소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었던 데 반해 백남준의 관심사는 전통 음악과 공연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가 1963년에 “피아노는 터부이다. 이것은 파괴되어야만 한다”고 말했을 때 1959년과 1962년 사이 그가 행위음악에서 파괴적인 요소를 상대화하려고 한 후기 진술보다 더 솔직한 것이었다.
당시 언론은 그를 ‘파괴 예술가’로 낙인찍었고, 그는 언론을 조소했다.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어떤 변화 형식에는 ‘파괴’라 하고 또 다른 변화 형식에는 ‘건설’이란 라벨을 붙이는데, 뉴턴의 법칙에 따르면 둘 다 같다.”

<케이지에게 바침: 테이프레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에서 백남준은 테이프레코더를 사용했는데 이것을 처음 작품에 사용한 사람은 케이지로 1952년에 <윌리엄 믹스 William Mix>에서 사용했고, 그 후 다수의 전위 음악가들이 테이프레코더를 작품에 사용했다.
<케이지에게 바침: 테이프레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은 백남준의 첫 해프닝 작품으로 그를 일약 전위예술가들 가운데 선두주자로 부상하게 만들었다.
해프닝에 케이지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작곡가 윤이상이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고, 훗날 각별한 사이로 진전될 요제프 보이스가 관전했다.

갤러리 22의 주인 장 피에르 빌헬름Jean-Pierre Wilhelm에 관해 백남준은 훗날 회상했다.

“갤러리 22는 화가들에게 동경의 꽃이었다.
그곳에서 내가 데뷔 콘서트를 가졌으므로 독일 예술계의 신진 및 중진의 다수가 온 것이다.
보이스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
빌헬름 없이 플럭서스를 말할 수는 없다.
세 번이나 나의 생애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그는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심장병은 그 집안의 내력으로 유태인인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에서 반나치 저항운동에 참가해 2년 동안 지하생활을 하느라 심장병이 악화되었고, 1966년 50대에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자각하고는 나와 샤롯이 함께 기거하고 있던 보이스의 집에 스스로 찾아온 것이다.
사진사 레베까지 데리고 온 그는 대화를 나누던 중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낸 후 미술계에서의 은퇴선언을 낭독했으며, 그 내용이 레베 박사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빌헬름이 돌아가고 ‘저 늙은이 왜 저렇게 유난을 부리느냐’고 놀렸는데, 그는 이듬해에 타계했다.”

쾰른시대의 악명 높은 작품은 그가 1960년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에서 소개한 것으로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습작 Etude for Piano Forte>은 쇼팽의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던 백남준이 갑자기 무대에서 내려와 관람하던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고 그 옆에 앉아 있던 튜더에게 샴푸 세례를 한 뒤 사라졌다가 근처 술집에서 전화로 해프닝이 종료되었음을 알린 것이었다.
넥타이를 자른 행위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남성우월주의에 손상을 가하는 것이지만, 다른 해프닝 예술가들과는 달리 익살이 내포되어 있어 그가 관람자를 선동하는 데 더 비중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객석에 앉아 있던 케이지와 튜더에게는 공격을 가했으면서도 함께 앉아 있던 슈톡하우젠은 공격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슈톡하우젠과 전자음악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남준의 해프닝을 위해 자신의 아틀리에를 공연장으로 개방한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는 나중에 슈톡하우젠의 아내가 되었다.
백남준을 이해하고 후원한 그녀는 백남준이 뉴욕으로 이주할 때는 뉴욕의 보니노 화랑을 소개하여 그로 하여금 그곳에서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관람자의 참여를 해프닝에 유도하는 것은 중요했는데, 백남준은 1963년 그의 예술운동 기관지 <전위 힌두이즘을 위한 대학>에 기고한 ‘음악의 새로운 존재론’에서 이 점을 역설했다.

“...
음악의 존재론적 형태를 새롭게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음악회에서는 소리가 움직이고 청중은 앉아 있다.
나의 행위음악에서는 소리가 움직이고 청중은 공격당한다.
<방 스무 개를 위한 교향곡>(1961)에서는 소리도 청중도 움직인다.
<버스 음악 1번>(1961)에서는 소리가 앉아 있고 청중이 소리를 찾아간다.
<음악의 전시회>(1961)에서는 청중이 소리를 만든다.
길거리에서 공연한 <움직이는 극장>(1962)에서는 소리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은 우연히 소리를 만난다.
<움직이는 극장>의 매력은 ‘선험적 경이’에 있다.
즉 사람들은 초대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슨 곡인지, 왜 그 곡을 듣는지, 작곡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방 스무 개를 위한 교향곡 Symphony for 20 Rooms>은 스무 개의 방에서 발생할 음악적, 비음악적 해프닝에 대한 지침을 명기한 악보로 제시된 것으로 실현될 수도 있고 악보로만 존재할 수도 있다.
한 방에서는 수도꼭지에서 물이 흐르고 벽에 골동시계가 똑딱거리는 가운데 테이프레코더에서는 갖가지 소리가 재생되었다.
또 다른 방에서는 우리에 갇힌 수탉이 꼬꼬댁거리거나 여러 개의 텍스트가 낭독되거나 ‘장치된 피아노 prepared piano’가 설치된다.
초대된 참여자는 스무 개의 방을 순회하면서 다양한 소리의 사건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 작품은 캐프로의 1959년 작품 <여섯 부분으로 나뉜 18개의 해프닝>을 상기하게 하는데, 두 작품 모두 독립된 방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비논리적인 해프닝으로 구성되고 참여자로 하여금 방들을 순회하면서 다양한 상황들을 직접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백남준은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에서의 두 번째 해프닝 공연에서 불가리아계 미국 조각가, 실험예술가 크리스토Christo(본명은 흐리스토 야바체프Christo Javacheff, 1935-)를 처음 만났다.
크리스토는 1952-56년 소피아 소재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뒤 프라하, 빈, 제네바에서 잠시 체류하다가 1958-64년에는 파리에서 지냈다.
그는 백남준과 같은 해인 1964년에 뉴욕에 정착하고 1973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포장 empaquetage’으로 캔버스천이나 반투명 비닐 같은 물질로 포장한 물체와 그 결과를 미술이라고 주장하는 행위였다.
백남준은 훗날 크리스토에 관해 회상했다.

“내가 처음 크리스토를 만난 건 1960-61년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에서였다.
나는 29살이었고 그는 24살이었을 것이다.
(백남준은 그가 자신보다 5살 아래라고 잘 못 알고 있었다)
크리스토는 불로 누룽지처럼 반소시킨 종이를 콜라주한 오브제를 보여주었다.
그 다음 해 그는 쾰른의 하로 라우하우스의 갤러리에서 데뷔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에 갔더니 그 크리스토 놈이 내 피아노 두 점을 포장하고 흰색 물감을 철덕철덕 칠해 놓은 것이 아닌가.
피아노는 내가 친구 벤야민 패터슨의 콘서트를 위해 빌려주었던 것으로 다음 전시회를 맡은 크리스토가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나 보따리처럼 광목으로 싸버렸던 것이다.
훌륭한 전시회였지만 작품은 한 점도 안 팔렸고, 전시회가 끝난 뒤 모든 작품은 고철상에 팔렸다.
전시회가 끝나는 날 나는 내 피아노를 돌려받고 투덜거리면서 크리스토의 광목을 길가에서 벗겼다.
광목을 벗길 때 나의 ‘장치된 피아노’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주인 하로 라우하우스는 ‘아, 백의 개인적 거리 콘서트이다’라고 웅얼거렸다.
우리 두 사람은 10년 후 억대가 될 크리스토의 초기 명작을 부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여하튼 비엔에 소장되어 있는 나의 피아노에는 그때 크리스토가 남긴 흰색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에서의 백남준의 두 번째 해프닝에는 우려할 점이 있었다.
그것은 케이지의 예술철학에 대한 곡해가 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관람한 후 케이지는 자신이 과연 젊은 예술가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다.
케이지에 의하면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으므로 개인의 소망이나 욕망을 배제함으로써만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젊은 예술가들이 무nothing라는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알고는 그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포기했다.

캐프로는 성행하는 해프닝에 대한 우려를 지적했다.

“젊은 예술가들이 주도하고 있는 해프닝은 대부분 케이지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미리 계획하지 않으면서도 연극적으로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정작 케이지 자신은 최근에 유행하는 해프닝과 볼거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젊은 예술가들이 우연과 불확정성의 개념을 잘못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캐프로의 말은 “우연을 추구하는 방법의 전반적 개념이 너무 방대하므로 세심하게 주의하지 않으면 이미 알고 있는 개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한 케이지의 충고를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케이지는 해프닝과 이벤트가 점차 과격해지는 것에 대한 우려를 토로한 적이 있었다.

“우연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영역에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쉽게만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원래 의도했던 기본정신이 사라지고 있다.”

1962년을 전후한 백남준의 해프닝은 주로 악보를 발표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다분히 개념적이었다.
“노란색 팬티를 벗어 벽에 걸어라”로 시작되는 1962년의 선정적 음악 <앨리슨을 위한 세레나데 Serenade for Alison>, "월경의 피로 각 나라 국기를 물들여 화랑에 전시하라“는 외설적 내용의 <아름다운 여류화가의 연대기 Chronicle of a Beautiful Paintress> 또한 단순반복적인 방법으로 개념화한 작품이다.
특기할 점은 케이지의 음악적 해프닝에 비해 백남준의 쾰른시대의 작품에는 볼거리가 많아 훨씬 시각적이라는 것과 에로티시즘이며 이는 플럭서스에서의 활동에서도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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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것이 흙손일까?


화분을 갈 것이 몇 개 있어 동네 앞 만물점에 갔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흙손'을 달라고 했더니 주인이 미쟁이들이 시멘트를 고르게 하는 것을 들고 나왔다.
그게 아니라 화분을 갈려고 한다고 설명하니 내가 원하는 조그만 삽을 가져다 주었다.
집으로 오면서 생각하니 흙을 다듬는 것도 아닌데 미쟁이가 사용하는 것을 왜 흙손이라고 부르는지 궁금해졌다.
암만 생각해도 적절하지 않은 명칭 같다.

다들 어떻게 지내십니까?
저는 요즘 신화와 서양역사를 새삼스럽게 혼자 공부하며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제우스 신이 너무 바람둥이라서 제우스의 아들들이 너무 많아 머릿속에 기억해서 정리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바람둥이는 제우스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신들의 취향이라서 이놈도 저놈도 같은 아비의 자식들이라 인명을 구별하기가 제일 어렵습니다.
제우스를 왕으로 그 밖의 신들을 제후들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지요?
아폴로도로스, 호메로스, 오비디우스, 그리고 저명한 저자의 서양고대사를 열심히 읽으면서 가을을 보람있게 보내고 있습니다.
십수년 미술 관련 서적만 읽다보니 지성의 절름발이가 된 것 같아 집필을 당분간 접고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독서를 시작한 것입니다.

동생의 아내 헬레네를 파리스에게 빼앗기고 아가맘논과 아킬레우스가 그리스 연합군을 결성하여 트로이를 쳐들어가는 영화를 전에 본 적이 있는데, 아폴로도로스와 호메로스에 의하면 그 영화도 신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알았습니다.
제수를 빼앗긴 복수를 하는 데 우선 2년이 걸려 원정을 시작했고, 더 웃기는 건 트로이인 줄 알고 엉뚱한 곳으로 쳐들어가 많은 인명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트로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쳐들어간 것이지요.
그때만 해도 터키로 가는 길이 알려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기원전 1250년경의 이야깁니다.
영화에서는 목마를 이용해 단번에 트로이를 함락하지만 10년이 걸린 끈질긴 싸움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역시 고전을 읽은 재미입니다.

EBS에서 사마천의 '사기' 강의를 들으며 춘추전국시대에 이 나라가 십만 대군을 끌고 원정에 나가고 저나라도 십만 대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저건 뻥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청나라 초기에 중국 인구가 1억 명이었다는데, 그것도 한참 전인 춘추전국시대에 예사로 한 지역에서 십만, 혹은 수십만의 병사를 이끌고 싸웠다니 엉뚱하지 않습니까?
중국이나 그리스나 그때만해도 숫자 개념이 없어 그렇게 황당한 숫자를 나열한 것입니다.
그리스군이 트로이를 치는 데 1013척의 함선을 동원했다는 것도 뻥이지요.
역사를 공부하면서 무엇이 뻥인지 가려내는 것도 재미랍니다.
그러나보니 어디까지가 진정한 역사인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요즘 MBC의 수목 드라마 광개토대왕에 관한 드라마를 재미 있게 보는데, 100퍼센트 뻥 아닙니까?
뻥을 재미 있게 감상하는 건 별 문제가 없지만 이러다가 역사의 실체가 모두 사라질까 염려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역사의 참 모습을 원하지 않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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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가져가서 뭐하게?" 하고 말해야 합니까?



아이를 데리고 엄마가 친구에 집에 놀러왔다가 있었던 일입니다.
아이가 그 집에 있는 장난감을 보더니,
"엄마, 나 이거 가질래" 하고 말하니까 그 엄마가 아이더러,
"그건 가져가서 뭐하게?" 하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됩니까?
엄마는 마치 가져가도 되지만 그 따위를 어따 쓰게? 하고 반문하는 듯 말한 것입니다.
"그건 우리 것이 아니잖아, 가지겠다고 말하면 안 되지" 하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식당에서 뛰어다니는 아이에게 엄마가 "그러다 다쳐!" 하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이런 데서 뛰어다니는 거 아냐" 하고 말해야 하지 않습니까?

제 자식 보호하는 것도 좋고 예뻐하는 것도 좋지만, 그래야 하는 상황에서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얼마 전에는 우리집 주차 입구에 이웃의 차가 주차되어 있길래 나중에 치우겠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 친구가 차를 갖고 왔습니다.
그래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차를 옮겨달라고 했더니 젊은이가 나와서 하는 말이 "이 땅이 개인 땅입니까? 시 땅 아닙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대문과 주차장 문이 시 땅을 향해 열려있지 개인 땅 안으로 열려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젊은이는 곧 차를 옮겼지만, 그렇게 말하면 곤란하지요.
그 후 다른 차들은 종종 주차 입구에 차를 세워도 그 사람은 다시는 차를 세우지 않습니다.
급할 때 차를 세울 수 있고 그런 정도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양해를 구하는 태도를 취해야지 시비를 거는 태도는 곤란합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이기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어느날 우리 집앞에 소파가 버려져 있었습니다.
전에는 타이어를 갖다 버려 동회에 가서 말해 치운 적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누가 소파를 우리집 앞에 버렸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저녁에 앞집 사람이 와서는 "사장님, 소파를 버린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사장이 아닌데 그 사람은 종종 나를 사장님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사장이 아니라고 말해주지 못하는 건 그 사람만 날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이 동네 몇 사람이 그렇게 부르기 때문입니다.
부를 만한 적당한 호칭이 없어서겠지만, 사실 난 사장하고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입니다.
암튼 그 사람의 말은 자기가 우리집 앞에 서있었는데, 두 아이가 우리집 앵두나무에서 앵두를 따면서 나눈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이거 우리 소파다. 그런데 왜 껍데기를 벗기고 버렸지?"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 아이가 우리집 맞은편 4층에 사는 중국집 하는 사람의 자식이라는 걸 안다는 것입니다.
전에 타이어를 버린 사람이 앞집 4층에 사는 사람이라고 옆집 노인이 말해준 적이 있었지만, 그 노인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였다가 혹시 사실이 아니면 어쩌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헌데 이번에는 매우 정확한 바탕에 근거한 고자질이라서 받아들여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소파를 앞집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 후 또 다른 유사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외출을 하면서 몇 집 건너편 빌라 앞에 헌 골프채가 버려진 걸 보았습니다.
속으로 "여기 살면서도 골프를 치는 모양이지?" 하고 생각했더랬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니 그 골프채가 우리집 앞에 와있는 것입니다.
전날 저녁 쓰레기로 치워지지 않자 우리집 앞에 갖다 놓은 것이 분명합니다.
난 그것을 전날 있었던 곳에 도로 갖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우리집 앞에서 그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쓰레기를 이리로 가져오면 안 됩니다"라고 써서 벽에 두어 차례 붙여둔 적도 있는데도 종종 사람들은 쓰레기를 가져다 놓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인데, 왜 자신의 쓰레기를 자신의 집앞에 놓지 않고 들고오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일요일 저녁 홍대 앞에는 쓰레기가 엄청납니다.
길에다 마구 버립니다.
쓰레기 백에 넣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버리는 것입니다.
왜들 그럽니까?
시 땅이라서 그러는 겁니까?

우리는 언행을 돌아보고 반성해야 합니다.
엄마는 특히 아이에게 "그건 가져가서 뭐하게?"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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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는 과연 사랑을 해보았을까요?



영화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파스칼이 그녀의 코가 한 치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거라도 말한 것으로 미루어 미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그녀는 안토니우스와 사랑에 빠지고 전쟁에서 패하자 모두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두 사람이 최후를 함께 하기 위해 동반자살한 그래서 영원한 사랑을 꾀한 매우 낭만적인 여인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녀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을까요?
클레오파트라는 과연 사랑을 해보았을까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은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이 이집트에서 애용한 여성의 이름입니다.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 VII(BC 69-30, BC 51-30 재위)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둘째 딸로, BC 51년 이후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이집트를 공동 통치했습니다.
정략적인 결혼입니다.
그 후 한때 그녀는 왕위에서 쫓겨났으며, BC 48년 이집트에 와있던 카이사르를 농락하여 인연을 맺고 복위했습니다.
카이사르를 유혹하여 그의 정부가 된 것이지요.
로마법에는 아내와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고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을 수 없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카이사르와 싸우고 죽은 뒤인 BC 47년에는 막내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재혼하여 공동 통치했습니다.
이번에도 정략적인 근친 결혼입니다.
그녀는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낳아,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라 불렀으며, 그녀는 한때 빈객으로서 로마에 가 있었으나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이집트로 돌아왔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BC 41-40년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BC 83-30, 카이사르 휘하의 장군)와 소아시아의 타르소스 및 알렉산드리아에서 인연을 맺었습니다.
BC 37년 옥타비아누스와의 협조가 결렬된 안토니우스는 재차 그녀 앞에 나타나 결혼함으로써 두 사람의 정치적, 인간적 유대가 심화되었습니다.
BC 34년 안토니우스는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에게 로마의 전체 속주(알렉산드리아)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와의 대립은 BC 31년의 악티움Actium 해전으로 번졌으며, 이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연합군이 패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노예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 노예는 칼을 빼어 자신의 몸을 베고 자살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노예보다 용기가 없는 것에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칼을 빼어 자신의 몸을 찔렀지만 이내 숨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모두 그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때 클레오파트라가 보낸 몸종이 그에게 와서 그녀가 모시고 오라고 했다는 전갈을 전했습니다.
피를 흘리며 안토니우스는 그녀를 따라 클레오파트라에게 갔고 그녀의 품에 안겨 죽었습니다.
그때가 BC 30년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독사로 가슴을 물게 하여 자살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녀의 죽음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300년의 종말이었습니다.

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과연 사랑을 한 것일까요?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군대를 빌려 옥타비아누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무너져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창녀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몸을 석은 것뿐입니다.
그런데 훗날 두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들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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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현대미술관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1960년대 미술



현재 전 세계적으로 성행하는 미술은 미국의 1960년대 미술의 답습이다.
이런 추세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그 이유는 다양한 대중미술이 그 시기에 이루어졌고, 아티스트들이 대중이 원하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그 시기에 유행한 안전한 방법에서 탈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티스트들은 더 이상 모험하려고 하지 않는다.
디자이너가 고객의 만족을 위해서 일하듯이 아티스트들도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창작한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미술의 질이 저하되었다.
대중의 취향이 1960년대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도 미국의 1960년대 미술이 답습되는 이유가 된다.
미국의 1960년대 미술을 알면 현재 전 세계적으로 성행하는 미술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팝 아트Pop art

1960년대 초는 평화와 부의 시대였지만 이는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고 그 이면에는 정치적·사회적 병폐의 기미가 있었다.
1960년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데모하던 학생들이 무장한 경찰관들의 공격을 받고, 1963년에는 20만 명의 시민이 수도 워싱턴에 모여 백인과 흑인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밥 딜런Bob Dylan(1941~)의 저항적인 노래는 불평에 가득 찬 젊은이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 정부는 은밀히 더 많은 군사적 조력자들을 남베트남으로 보내 북쪽의 공산주의 침략자들에 대항하게 했다.
베를린에는 1961년 장벽이 세워져 독일을 둘로 나눴다.
미국의 팝 아트는 이런 평화와 부 그리고 분노의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으며, 실재와 외양의 불일치는 그 시대의 특징이었다.


미국 팝 아트의 특징은 표면상의 냉정함으로 인해 주제에 대한 참여의식이 결여되어 보이는 점이다.
일견 거기에는 다다의 기교와 다다의 수법이 재생된 듯 보이나 그 이면에서 다다의 정신을 발견하기란 어려운데, 아티스트들이 반미술을 표방한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 새로운 미술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표면상의 경박함을 보고 팝 아트를 비지성적인 것으로 판단하거나 표면상의 초탈함을 보고 참여의식의 결여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팝 아트는 고도의 자의식 운동이었으며, 개념이 아티스트들에 의해 해체되었다.
앤디 워홀은 미술품이 수공의 산물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제거했다.
많은 그의 작품이 형판 인쇄를 통해 캔버스에 직접 옮겨졌다.


미국 팝 아트의 뿌리는 존 케이지를 거쳐 다다와 마르셀 뒤샹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진부한 것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에서 1930년대의 정경회화American Scene Painting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전통 미술 개념을 풍자하고 동시대 일상문화의 평범함과 통속성을 미술의 재료로 끌어들여 격상시킨 건 앞서 일어난 영국 팝 아트와 공유하는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팝 아트는 1960년대에 만연한 정신에 대한 진정한 표명이었으며 1970년대의 가장 특징적인 여러 장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미술사의 관점에서 볼 때 팝 아트의 주요 특징은 특히 리히텐슈타인과 존스의 작품에서와 같이 통속성과 평범함이라는 외관 뒤에 숨겨진 고도의 솜씨와 디자인이다.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1923~97)은 상업미술, 만화주인공, 광고, 풍선껌과 아이스크림소다 등의 포장에 등장하는 통속적인 이미지들을 사용했다.
또한 세잔, 피카소, 몬드리안을 위시하여 모더니즘 대가들의 작품과 그리스 신전, 일몰광경, 풍경 등을 찍은 그림엽서, 변형된 1920년대의 아르데코 디자인을 풍자적으로 개작했으며, 키치를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뛰어난 형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빼어난 팝 아티스트로 꼽힌다.


재스퍼 존스Jasper Johns(1930~)가 25살 때 그린 <국기 Flag>는 전설적인 작품이 되었는데, 미국 국기지만 특수한 디자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능적으로 볼 때 그것은 휘날리는 국기가 아니며 오히려 뛰어난 솜씨와 물감의 사용을 통해 훌륭한 회화적 특질을 지녔다.
<국기>, <과녁판>, <지도>, <숫자>, <색판> 등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이미지들이지만 존스는 그것들을 새로운 형태들로 창조하면서 그림이 사물의 모방이 아니라 사물 자체임을 제시했다.
상징적 이미지가 그의 손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자 르네 마그리트가 담배파이프를 그린 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적어 넣었듯이 그런 효과를 작품에 응용했다.
마그리트는 “사물은 사물이 지닌 명칭이나 이미지대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으며, “그림에서 글자는 이미지와 같은 물질이다”라고 했는데, 존스가 그림에 사용한 글자는 마그리트의 미학과 관련이 있다.


앤디 워홀Andrew Warhola(1928~87)은 리히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만화와 광고를 선택했다.
어린 시절의 영웅이나 자신이 즐겨 먹고 마시던 상품을 선택했는데, 그것들은 뽀빠이, 낸시, 딕 트레이시, 배트맨, 슈퍼맨, 코카콜라, 브릴로 패드, 하인즈 케첩, 캠벨 토마토주스, 켈로그 콘푸로스트 등이었다.
그는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새로운 양식으로 디자인했다.
1962년 8월에 야구선수를 시작으로 영화배우 트로이 도나휴와 워렌 비티를 다음으로 그들의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뜨는 작업을 시작했다.
8월 5일 섹스 심벌인 마릴린 먼로가 약을 과량 복용하여 죽자 다음날 그녀의 초상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100개의 마릴린이 하나보다 낫다 A Hundred Marilyns are Better than One>에서처럼 많은 수로 반복하기도 했다.
마릴린과 리즈의 초상화가 그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 밖에도 캠벨수프 깡통, 코카콜라 병, 모나리자, 엘비스 프레슬리, 재키 케네디 등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오브제나 개체들은 미술품 내에서의 반복되고 그리고 하나가 복제들을 대량 생산한다.
반복과 복제는 의미의 대상, 혹은 기호를 소멸시키는 걸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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