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해프닝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백남준은 1959년 11월 뒤셀도르프 22번가에 소재한 장 피에르 빌헬름의 갤러리 22에서 <케이지에게 바침: 테이프레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 Homage to John Cage: Music for Tape Recorder and Piano>을 선보였는데, 깡통을 발로 차서 유리판을 깨고 그 유리가 계란과 장난감자동차를 치도록 만들고, 피아노를 공격하기 위해 돌진하고 테이프레코더에서는 재생한 다양한 소리가 나오는 음악적 해프닝이었다.
다양한 소리란 수탉의 놀라서 내는 소리, 모터사이클의 소리와 함께 베토벤의 교향곡 5번, 독일 가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 외에도 시끌벅적한 복권당첨 소리, 장난감 소리, 사이렌 소리 등이었다.
해프닝은 그가 케이지로부터 받은 영향에 대해 감사를 표한 것으로 일상생활에 존재하는 온갖 소리를 음악으로 주장하는 것이었지만, 쾰른 스튜디오의 전자음악과 케이지의 작곡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부조리하고 공격적인 행위였다.
이 작품은 백남준이 악기에 놀라운 파괴력을 가지고 공격하는 행위음악의 전기를 열었다.
케이지의 관심사가 소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었던 데 반해 백남준의 관심사는 전통 음악과 공연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가 1963년에 “피아노는 터부이다. 이것은 파괴되어야만 한다”고 말했을 때 1959년과 1962년 사이 그가 행위음악에서 파괴적인 요소를 상대화하려고 한 후기 진술보다 더 솔직한 것이었다.
당시 언론은 그를 ‘파괴 예술가’로 낙인찍었고, 그는 언론을 조소했다.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어떤 변화 형식에는 ‘파괴’라 하고 또 다른 변화 형식에는 ‘건설’이란 라벨을 붙이는데, 뉴턴의 법칙에 따르면 둘 다 같다.”
<케이지에게 바침: 테이프레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에서 백남준은 테이프레코더를 사용했는데 이것을 처음 작품에 사용한 사람은 케이지로 1952년에 <윌리엄 믹스 William Mix>에서 사용했고, 그 후 다수의 전위 음악가들이 테이프레코더를 작품에 사용했다.
<케이지에게 바침: 테이프레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은 백남준의 첫 해프닝 작품으로 그를 일약 전위예술가들 가운데 선두주자로 부상하게 만들었다.
해프닝에 케이지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작곡가 윤이상이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고, 훗날 각별한 사이로 진전될 요제프 보이스가 관전했다.
갤러리 22의 주인 장 피에르 빌헬름Jean-Pierre Wilhelm에 관해 백남준은 훗날 회상했다.
“갤러리 22는 화가들에게 동경의 꽃이었다.
그곳에서 내가 데뷔 콘서트를 가졌으므로 독일 예술계의 신진 및 중진의 다수가 온 것이다.
보이스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
빌헬름 없이 플럭서스를 말할 수는 없다.
세 번이나 나의 생애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그는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심장병은 그 집안의 내력으로 유태인인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에서 반나치 저항운동에 참가해 2년 동안 지하생활을 하느라 심장병이 악화되었고, 1966년 50대에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자각하고는 나와 샤롯이 함께 기거하고 있던 보이스의 집에 스스로 찾아온 것이다.
사진사 레베까지 데리고 온 그는 대화를 나누던 중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낸 후 미술계에서의 은퇴선언을 낭독했으며, 그 내용이 레베 박사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빌헬름이 돌아가고 ‘저 늙은이 왜 저렇게 유난을 부리느냐’고 놀렸는데, 그는 이듬해에 타계했다.”
쾰른시대의 악명 높은 작품은 그가 1960년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에서 소개한 것으로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습작 Etude for Piano Forte>은 쇼팽의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던 백남준이 갑자기 무대에서 내려와 관람하던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고 그 옆에 앉아 있던 튜더에게 샴푸 세례를 한 뒤 사라졌다가 근처 술집에서 전화로 해프닝이 종료되었음을 알린 것이었다.
넥타이를 자른 행위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남성우월주의에 손상을 가하는 것이지만, 다른 해프닝 예술가들과는 달리 익살이 내포되어 있어 그가 관람자를 선동하는 데 더 비중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객석에 앉아 있던 케이지와 튜더에게는 공격을 가했으면서도 함께 앉아 있던 슈톡하우젠은 공격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슈톡하우젠과 전자음악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남준의 해프닝을 위해 자신의 아틀리에를 공연장으로 개방한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는 나중에 슈톡하우젠의 아내가 되었다.
백남준을 이해하고 후원한 그녀는 백남준이 뉴욕으로 이주할 때는 뉴욕의 보니노 화랑을 소개하여 그로 하여금 그곳에서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관람자의 참여를 해프닝에 유도하는 것은 중요했는데, 백남준은 1963년 그의 예술운동 기관지 <전위 힌두이즘을 위한 대학>에 기고한 ‘음악의 새로운 존재론’에서 이 점을 역설했다.
“...
음악의 존재론적 형태를 새롭게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음악회에서는 소리가 움직이고 청중은 앉아 있다.
나의 행위음악에서는 소리가 움직이고 청중은 공격당한다.
<방 스무 개를 위한 교향곡>(1961)에서는 소리도 청중도 움직인다.
<버스 음악 1번>(1961)에서는 소리가 앉아 있고 청중이 소리를 찾아간다.
<음악의 전시회>(1961)에서는 청중이 소리를 만든다.
길거리에서 공연한 <움직이는 극장>(1962)에서는 소리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은 우연히 소리를 만난다.
<움직이는 극장>의 매력은 ‘선험적 경이’에 있다.
즉 사람들은 초대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슨 곡인지, 왜 그 곡을 듣는지, 작곡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방 스무 개를 위한 교향곡 Symphony for 20 Rooms>은 스무 개의 방에서 발생할 음악적, 비음악적 해프닝에 대한 지침을 명기한 악보로 제시된 것으로 실현될 수도 있고 악보로만 존재할 수도 있다.
한 방에서는 수도꼭지에서 물이 흐르고 벽에 골동시계가 똑딱거리는 가운데 테이프레코더에서는 갖가지 소리가 재생되었다.
또 다른 방에서는 우리에 갇힌 수탉이 꼬꼬댁거리거나 여러 개의 텍스트가 낭독되거나 ‘장치된 피아노 prepared piano’가 설치된다.
초대된 참여자는 스무 개의 방을 순회하면서 다양한 소리의 사건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 작품은 캐프로의 1959년 작품 <여섯 부분으로 나뉜 18개의 해프닝>을 상기하게 하는데, 두 작품 모두 독립된 방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비논리적인 해프닝으로 구성되고 참여자로 하여금 방들을 순회하면서 다양한 상황들을 직접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백남준은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에서의 두 번째 해프닝 공연에서 불가리아계 미국 조각가, 실험예술가 크리스토Christo(본명은 흐리스토 야바체프Christo Javacheff, 1935-)를 처음 만났다.
크리스토는 1952-56년 소피아 소재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뒤 프라하, 빈, 제네바에서 잠시 체류하다가 1958-64년에는 파리에서 지냈다.
그는 백남준과 같은 해인 1964년에 뉴욕에 정착하고 1973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포장 empaquetage’으로 캔버스천이나 반투명 비닐 같은 물질로 포장한 물체와 그 결과를 미술이라고 주장하는 행위였다.
백남준은 훗날 크리스토에 관해 회상했다.
“내가 처음 크리스토를 만난 건 1960-61년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에서였다.
나는 29살이었고 그는 24살이었을 것이다.
(백남준은 그가 자신보다 5살 아래라고 잘 못 알고 있었다)
크리스토는 불로 누룽지처럼 반소시킨 종이를 콜라주한 오브제를 보여주었다.
그 다음 해 그는 쾰른의 하로 라우하우스의 갤러리에서 데뷔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에 갔더니 그 크리스토 놈이 내 피아노 두 점을 포장하고 흰색 물감을 철덕철덕 칠해 놓은 것이 아닌가.
피아노는 내가 친구 벤야민 패터슨의 콘서트를 위해 빌려주었던 것으로 다음 전시회를 맡은 크리스토가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나 보따리처럼 광목으로 싸버렸던 것이다.
훌륭한 전시회였지만 작품은 한 점도 안 팔렸고, 전시회가 끝난 뒤 모든 작품은 고철상에 팔렸다.
전시회가 끝나는 날 나는 내 피아노를 돌려받고 투덜거리면서 크리스토의 광목을 길가에서 벗겼다.
광목을 벗길 때 나의 ‘장치된 피아노’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주인 하로 라우하우스는 ‘아, 백의 개인적 거리 콘서트이다’라고 웅얼거렸다.
우리 두 사람은 10년 후 억대가 될 크리스토의 초기 명작을 부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여하튼 비엔에 소장되어 있는 나의 피아노에는 그때 크리스토가 남긴 흰색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에서의 백남준의 두 번째 해프닝에는 우려할 점이 있었다.
그것은 케이지의 예술철학에 대한 곡해가 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관람한 후 케이지는 자신이 과연 젊은 예술가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다.
케이지에 의하면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으므로 개인의 소망이나 욕망을 배제함으로써만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젊은 예술가들이 무nothing라는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알고는 그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포기했다.
캐프로는 성행하는 해프닝에 대한 우려를 지적했다.
“젊은 예술가들이 주도하고 있는 해프닝은 대부분 케이지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미리 계획하지 않으면서도 연극적으로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정작 케이지 자신은 최근에 유행하는 해프닝과 볼거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젊은 예술가들이 우연과 불확정성의 개념을 잘못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캐프로의 말은 “우연을 추구하는 방법의 전반적 개념이 너무 방대하므로 세심하게 주의하지 않으면 이미 알고 있는 개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한 케이지의 충고를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케이지는 해프닝과 이벤트가 점차 과격해지는 것에 대한 우려를 토로한 적이 있었다.
“우연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영역에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쉽게만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원래 의도했던 기본정신이 사라지고 있다.”
1962년을 전후한 백남준의 해프닝은 주로 악보를 발표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다분히 개념적이었다.
“노란색 팬티를 벗어 벽에 걸어라”로 시작되는 1962년의 선정적 음악 <앨리슨을 위한 세레나데 Serenade for Alison>, "월경의 피로 각 나라 국기를 물들여 화랑에 전시하라“는 외설적 내용의 <아름다운 여류화가의 연대기 Chronicle of a Beautiful Paintress> 또한 단순반복적인 방법으로 개념화한 작품이다.
특기할 점은 케이지의 음악적 해프닝에 비해 백남준의 쾰른시대의 작품에는 볼거리가 많아 훨씬 시각적이라는 것과 에로티시즘이며 이는 플럭서스에서의 활동에서도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