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는 과연 사랑을 해보았을까요?
영화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파스칼이 그녀의 코가 한 치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거라도 말한 것으로 미루어 미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그녀는 안토니우스와 사랑에 빠지고 전쟁에서 패하자 모두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두 사람이 최후를 함께 하기 위해 동반자살한 그래서 영원한 사랑을 꾀한 매우 낭만적인 여인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녀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을까요?
클레오파트라는 과연 사랑을 해보았을까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은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이 이집트에서 애용한 여성의 이름입니다.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 VII(BC 69-30, BC 51-30 재위)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둘째 딸로, BC 51년 이후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이집트를 공동 통치했습니다.
정략적인 결혼입니다.
그 후 한때 그녀는 왕위에서 쫓겨났으며, BC 48년 이집트에 와있던 카이사르를 농락하여 인연을 맺고 복위했습니다.
카이사르를 유혹하여 그의 정부가 된 것이지요.
로마법에는 아내와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고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을 수 없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카이사르와 싸우고 죽은 뒤인 BC 47년에는 막내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재혼하여 공동 통치했습니다.
이번에도 정략적인 근친 결혼입니다.
그녀는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낳아,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라 불렀으며, 그녀는 한때 빈객으로서 로마에 가 있었으나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이집트로 돌아왔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BC 41-40년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BC 83-30, 카이사르 휘하의 장군)와 소아시아의 타르소스 및 알렉산드리아에서 인연을 맺었습니다.
BC 37년 옥타비아누스와의 협조가 결렬된 안토니우스는 재차 그녀 앞에 나타나 결혼함으로써 두 사람의 정치적, 인간적 유대가 심화되었습니다.
BC 34년 안토니우스는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에게 로마의 전체 속주(알렉산드리아)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와의 대립은 BC 31년의 악티움Actium 해전으로 번졌으며, 이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연합군이 패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노예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 노예는 칼을 빼어 자신의 몸을 베고 자살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노예보다 용기가 없는 것에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칼을 빼어 자신의 몸을 찔렀지만 이내 숨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모두 그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때 클레오파트라가 보낸 몸종이 그에게 와서 그녀가 모시고 오라고 했다는 전갈을 전했습니다.
피를 흘리며 안토니우스는 그녀를 따라 클레오파트라에게 갔고 그녀의 품에 안겨 죽었습니다.
그때가 BC 30년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독사로 가슴을 물게 하여 자살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녀의 죽음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300년의 종말이었습니다.
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과연 사랑을 한 것일까요?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군대를 빌려 옥타비아누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무너져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창녀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몸을 석은 것뿐입니다.
그런데 훗날 두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들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