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문예중앙>의 청탁을 받아 쓴 것입니다.
6월 여름호 `나의 입장`에 실렸습니다.
주어진 제목이 "예술 장르의 위기"라서 논문 형식으로 쓸 수밖에 없었고, 꼼꼼이 언급하고 다루어야 할 것들이 많아 주를 많이 달았습니다.
이런 중요한 미술의 문제를 문학잡지 <문예중앙>이 다루겠다는 데서 매우 기뻤습니다.



예술 장르의 위기


모든 양식은 동일하고 형식일 뿐이다


앙리 마티스는 테리아드와의 대화중에 말했다.

“예술은 개인에서부터뿐만 아니라 우리에 앞서는 축적된 힘, 즉 문명으로부터 비롯되는 발전을 겪는다.
우리는 단순히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게 아니다.
재능 있는 예술가는 단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할 수 없다.
그가 단순히 자신의 재능만을 이용할 경우 그는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산하는 것의 주인이 아니다.
그건 우리에게 부과되는 것이다.”1)

마티스가 한 말은 하인리히 뵐플린이 『미술사의 원리』(1922) 6판 서문에서 한 말을 상기하게 한다.

“가장 독창적인 재능조차 출생 시에 고정된 어떤 한계를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모든 시대에 모든 게 가능한 건 아니다. 특정한 사유는 특정한 발전단계에서만 생길 수 있다.”2)


마티스와 뵐플린의 말은 모더니즘이 붕괴되기 전까지, 혹은 예술 장르의 위기론이 제기되기 전까지 매우 타당하게 받아들여졌다.
예술가가 그에게 주어진 물질적, 기술적, 문화적 환경 안에서 작품을 생산한다는 건 당연해 보인다.
자신이 속한 공간적 시간적 사회에서 경험을 통해 배우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한다는 건 아주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환경이 닫혀있지 않고 매체를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경계가 없이 전 세계로 열리게 되면서 공간성은 쉽게 극복된다.
나라와 나라의 울타리가 없어지면서, 역사의 울타리가 사라지면서 매체와 인터넷이 전 세계를 하나의 환경으로 만들기 때문에 강원도의 어느 마을에 거주하는 예술가도 세계적인 환경 안에서 작품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은 시간성의 극복인데, “모든 시기에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라는 뵐플린의 주장 또한 오늘날에는 그 타당성을 상실한다.
전라도 어느 마을에 거주하는 예술가도 프랑스 바로크 시대의 예술가가 제작한 듯이 보이는 작품을, 이탈리아 매너리즘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다.
과거 어느 나라에서 사용된 양식들이라도 오늘날에는 차용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양식들이 예술작품의 공통성을 묶는 범주 또는 정체성으로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모든 양식이 동일하게 취급하며 단순한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다.
양식은 형식과 같은 말로서 양식의 차이는 예술작품 내용의 차이와는 무관하고 다만 표현의 수단으로서의 형식만이 다를 뿐이다.
반드시 취해야 할 양식도 가장 우량한 양식도 없는 이유는 형식이란 동등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취해야 할 형식도 가장 우량한 형식은 없더라도 두드러진 형식은 존재하는데, 이는 곧 유행이다.
오늘날 우리의 미술계에 팝아트 형식의 작품이 두드러진 건 하나의 유행일 뿐이다.
유행은 시간 속으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동일한 일상의 오브제와 예술의 오브제


예술 장르의 위기는 1960년대 예술이 총체적으로 엘리티즘에서 민주주의 형식의 다원주의로 개방되면서 촉발되었고 예술의 목표가 더 이상 순수성에 있지 않다는 데서 점철되었다.
동시대의 예술을 특징짓는 컨템퍼러리 예술은 어의적으로는 동시대에 제작되는 예술이지만 그보다는 극단적이며 총체적인 다양성과 개방성을 의미하며, 도덕적으로는 용인될 수 없는 가운데 예술이 불순해지거나 비순수해졌음을 의미한다.
다원주의 이전의 작품들은 양식적으로 구분이 가능했지만 컨템퍼러리 예술은 과거의 모든 양식들을 동일한 형식들로 취급하며 그런 것들에 개방되어 있다.
예술작품은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완전히 열려 있으며, 이는 예술작품이 무엇으로 보여야 한다는 선험적인 구속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라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다원주의가 용인된 뒤 팝아티스트들에 의해서 일상의 오브제와 예술의 오브제가 시각적으로 똑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컨템퍼러리 예술의 다양성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걸 시위한 것처럼 보였다.
앤디 워홀은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어느 누가 무엇을 만들어도 그것이 곧 예술작품이란 공식을 성립시키는 건 아니다.
평론가들의 시급한 과제는 일상의 오브제와 예술의 오브제를 합리적인 담론을 통해 규정하는 일이다.
로버트 모리스와 리처드 세라를 예로 들면 두 사람은 1960년대 초에 일상의 오브제인 펠트 천조각과 고무조각들을 전시장에 흩뿌리는 설치작업을 했다.
작품을 해체하는 후기미니멀리즘의 작품들로 분류되는 이런 것들은 육안으로 일상의 오브제와 같은 것들이다.
이들보다 더욱 극적인 예는 앤디 워홀이 브릴로 상자, 델몬트 상자, 하인즈 케첩 상자 등을 그대로 복제한 것들을 선보인 것으로 그것들은 시각적인 면에서 슈퍼마켓의 상자들과 같았다.
워홀의 상자와 모리스 그리고 세라의 펠트와 고무조각들 모두가 일상의 오브제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분류되지 않고 고상한 예술의 오브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사용한 오브제들이 그것들이 지닌 일상성 말고 그 밖의 무엇에 관한 것인가가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의 오브제들에 관한 것과는 다른 예술적 목적을 지녀야 한다.
이를 규명하는, 즉 예술작품과 비예술작품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로서 이는 또한 예술작품을 규정할 철학적 근거를 어디에서 발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예술작품의 정의


오늘날 철학자들 사이에서 예술작품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 혹은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를 두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몇 가지 논증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여기서 세 가지만 간략하게 숙고해 본다면
첫째, 예술작품의 정의는 정하는 건 가능하지 않다는 입장으로 이런 논증의 주지할 만한 철학자 로버트 스테커는 어떻게 정의를 내리더라도 그건 선언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3)
그는 최초 예술작품의 기능이 유일하게 정의가 될 수 있다는 기능주의를 고집하지만 이는 매우 회의적인 시각으로 궁극적으로 예술작품의 정의를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에 반해 긍정적인 태도로 오브제들에서 이해할 만한 경향성을 찾는 방법이 있는데,
이는 예술제도론으로 이런 견해의 대표적인 인물이 조지 디키이다.
디키는 1969년부터 1984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수정을 통해 일관되게 예술제도론을 주장했는데, 1969년에 첫 정의를 발표했다.

“설명할 수 있는 의미로서의 예술작품은 1) 인공물이고 2) 사회, 혹은 일부 사회의 하위 집단이 그 인공물에 진가를 위한 후보자의 지위를 수여한 것이다.”4)

디키는 1984년에 자신의 이론을 마지막으로 수정 보완한 뒤 더 이상 손보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으로 발표했다.

“예술가란 예술작품 만들기에 이해를 갖고 참여하는 사람이다.
예술작품은 예술계 일반대중에게 정식으로 소개하기 위해 창조된 일종의 인공물이다.
대중은 그들에게 소개되는 한 오브제를 어느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준비된 상태의 사람들이다.
예술계는 모든 예술계 시스템들의 전체이다.
예술계 시스템은 예술가가 예술계 일반대중에게 예술작품을 소개하기 위한 구조이다.”5)


디키는 규범적인 철학적 방식을 좇아 필요충분조건을 통해 정의를 내렸다.
이런 방식을 본질주의자의 태도라고 한다면 동일한 방식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폭넓게 수용되는 설득력 있는 또 다른 정의을 아서 단토가 제시했다.
스스로 “거듭난 헤겔주의자”라고 칭한 단토의 정의는 일찍이 예술의 종말을 예언한 헤겔의 구절6)에서 비롯된다.
단토는 1995년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행한 멜론 강연에서 예술작품을 규정할 수 있는 두 가지 기준을 제시했는데,
첫째, 그 내용이 무엇에 관한aboutness 것이어야 하고
둘째, 그 내용을 구현해야embody 한다는 것이다.
이는 헤겔이 제시한 i) 예술의 내용, ii) 예술작품의 표현수단의 조건 그 이상은 아니다.
워홀의 식료품 상자와 모리스와 세라의 펠트와 고무조각들이 일상의 오브제들과 외양이 같더라도 그것들이 예술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이 일상의 오브제들의 것들과는 달라야만 하는 것이다.


예술과 철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


예술의 종말이란 위기의 발원지는 독일과 미국이다.
독일에서 미술사학자 한스 벨팅7)이 1983년에 예술사의 종말에 관한 글을 발표했고, 이듬해 미국에서 철학자 아서 단토8)가 사례를 들어서 이를 제기했다.
서로의 생각을 모르는 상태에서 두 사람이 각각 위기론을 제기한 뒤 이는 미국과 유럽에서 가장 떠들썩한 쟁점이 되었으며, 1980년대에 종말이란 낱말이 들어간 책이 이십여 종 출간되었다.
역사의 종말, 현대성의 종말, 미술계의 종말, 지식인의 종말 등등.
종말론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 담론이 예술의 죽음으로 빗나가자 단토는 서둘러 변명하느라 진땀을 빼야했다.
그는 1995년에 자신이 발표한 논문 예술의 종말 앞에 ‘이후’라는 낱말을 덧붙이고 좀더 수정 보완한 뒤 『예술의 종말 이후』를 내놓았다.
이 책은 단토의 말로 후기역사의 시대, 토머스 S. 쿤의 말로 하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시대를 논한 것이다.
당연히 예술이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제기하고 예술이 자연의 모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오래 유지된 예술의 관념은 물론 19세기 중반에 시작된 모더니즘의 내러티브마저 종료되었음을 선언한다.
주지할 점은 예술의 종말이 벨팅과 단토에 의해서 1980년대 중반에 제기되었다고 해서 그때 예술이 종말을 맞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때에야 비로소 그런 자각이 생긴 걸 의미한다.
예술이 종말을 맞은 것은 그보다 20년 전인 1960년대 중반 팝아트의 출연에 의해서이다.


상업미술에 기반을 둔 팝아트가 미술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예술의 종말이 포착된 것이다.
상업미술가들은 상업적 디자인을 복제하면서 모종의 미적 테스트를 통과한 디자인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고 상품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걸 알았다.
1964년 봄 앤디 워홀은 그의 가장 대담한 조각들 - 나무 상자들에 실크스크린을 부착한 것들로 식품점 상자들 브릴로 패드, 하인즈 케첩, 캠벨의 토마토주스, 켈로그의 얇은 옥수수 조각, 그리고 그 밖의 생산품들을 닮게 한 것들 - 을 선보였다.
워홀의 상자들은 그것들의 큼을, 혹은 그것들이 담고 있는 그 생산품들의 거대함을 선언했다.
웨인 코스텐바움은 『앤디 워홀』(2001)에서 그 상자들을 동성애자 워홀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남성다움의 상징물로 본다.9)
팝아트를 주요한 역사적 변화인 예술의 종말로 보는 시각은 팝아트가 하나의 유행으로 종료된 시점에서 지각되지 못했는데, 예술이란 개념이 성립된 르네상스로부터 그 개념 너머로 향하는 또 다른 역사의 시작, 내러티브, 패러다임이란 걸 1960년대에 분명히 지각하기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4.19가 일어난 당시 그것을 혁명으로 지각하기 어려웠던 것처럼.
혁명으로 지각하는 데는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정한 성찰의 시간이 소요된다.
마찬가지로 워홀의 식품점 상자들이 실제의 식품점 상자들과 구별되는 그 내용과 구현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노력은 20년이 지난 1980년대 중반에야 가능했다.
과거를 돌이켜보니 워홀이 훌륭한 목공의 솜씨를 빌려 복제한 식품점 상자들이 지닌 상징적 의미가 엄청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예술의 오브제와 일상의 오브제의 차이가 시각적 견지에서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의 예술작품을 실례로 들어서 가르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그리고 예술작품이 제작되는 데는 특별한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그런 공식이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진 것이다.


단토는 1964년 봄 맨해튼의 이스트 74가 스테이블 화랑에서 워홀의 식품점 상자들을 보고 “워홀이 대단히 높은 수준의 철학적 지성을 가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예술에 대해 아주 최소한의 생각 속에서 사유의 경계들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어느 것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었다”10)고 생각했다.
워홀은 “그의 예술을 공간, 시간, 그리고 구현의 문제들을 통해서” 많은 의문들을 일으켰다.11)
단토는 워홀의 주된 공헌으로 미술사에서 이전에 전혀 성취된 적이 없던 예술적 실천을 철학적 자아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을 꼽는다.
즉 예술작품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필요한 모든 사유들을 위반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예술의 본질을 열어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워홀은 1987년 담낭수술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58세의 일기를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에드먼드 화이트는 워홀의 추도사에 그가 무엇을 했던 간에 “워홀은 철학자가 했을 방식으로 미술을 했다”고 적었다.


단토는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예술과 현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독점했다고 본다.
즉 <브릴로 상자>가 그것을 예술이게 만드는 걸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이 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무엇이 예술의 본질인지를 사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워홀은 예술이 무엇인지를 관람자에게 말하지 않는 가운데 단토의 말로 “부정을 통한 a via negative” 방법으로 예술론을 위한 여지를 열어놓았다.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특정 시대의 예술과 그 시대의 철학 간의 어떤 구조적인 유사성들을 지각해야만 한다”12)고 주장했으며, 최근의 예술과 철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파노프스키가 예측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파노프스키는 한 문화의 다양한 표명들 속에 통일성이 있다고 보았는데, 예컨대 그 문화의 회화나 철학에 영향을 미치는 공통된 기미 같은 걸 말한다.
이런 파노프스키의 기본적인 직관을 확증해주는 것이 과거에는 거의 논해진 적이 없었고, 팝아트, 특히 워홀에 의해서 상징적으로 예술이 종말을 맞은 이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술이 종말을 맞았다는 자각이 생긴 1980년대 중반에서야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예술의 종말 이후, 혹은 후기역사의 시대, 혹은 유럽인의 말로 포스트모던에 와서야 예술과 철학 간의 구조적 유사성을 지각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이것의 시작은 워홀의 식품점 상자들과 같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복제가 어떻게 해서 갑자기 예술과 철학이 기반이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단토는 『브릴로 상자 너머로』(1992)13)를 비롯하여 일련의 저술을 통해서 팝아트가 집단정신을 제공하는 평범한 것들인 일상적인 문화적 경험의 대상들과 아이콘들을 미술로 변용시키면서 변용의 과정을 거쳐 그런 것들에게 선험적인 분위기를 부여한 데 주목했다.
이것 외에도 일반 대중의 해방에 대한 염원과 관련해서 단토는 “1950년대 중반의 철학과 예술은 둘 다 당시의 인간 심리 저 깊은 곳에 있던 어떤 것에 응답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 점이 그것들로 하여금 미국 장면 밖에서는 그토록 대단한 해방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었다”14)고 주장한다.
그는 파노프스키가 언급한 예술과 철학의 구조적 유사성으로 해방력을 꼽았으며, 이런 맥락에서 1960년대의 미국에서의 흑인운동과 여성운동이 절박했던 것과 소련에서 사회주의 영웅들인 레닌과 스탈린에 대한 찬양을 중단된 이유를 “팝이 의식으로 끌어올린 우리 모두 세상에 홀로 남겨져 살아간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누구라도 바랄 수 있는 훌륭한 삶이었다. 그 어떤 사회적 프로그램도 이런 삶과 양립할 수 있어야 했다”15)고 주장한다.


일상성의 찬양


워홀의 복제를 말할 때면 으레 사람들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16)를 선례로 지적한다.
이에 대해서는 우선 레디메이드에 대한 뒤샹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미술사학자 피에르 카반이 1960년대 중반 뒤샹에게 무엇이 레디메이드 사물들 중 하나를 선정하게 했느냐고 물었을 때 뒤샹은 “사물을 선정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보름만 지나면 그 사물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하게 된단 말이야. 무관심한 마음으로 미학적 감성을 가지지 않은 채 사물을 보아야 하네. 레디메이드를 선정할 경우 시각적 무관심으로 그렇게 해야 하고, 동시에 좋고 나쁘다는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선정해야 하네”17)라고 응답했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본질적으로 예술가의 행위에 대한 회의였다.
“좋고 나쁘다는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란 미학적 즐거움의 배제하고 시각적 관심의 결여를 의미한다.
그의 유명한 에피소드인 1917년 뉴욕의 그랜드 센트럴 팰리스에서 독립예술가협회 주최의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는 앙데팡당 전시회에 기어이 소변기인 <샘>을 출품하려고 한 건 선구적인 퍼포먼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가 배척받을 걸 미리 예측하고 그것을 빌미로 예술가의 행위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뒤샹이 그 소변기를 예술작품으로 보존하지 않았으므로 곧 사라졌다.
그가 반미학적anti-aesthetic 문제의식에 일치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뒤샹과 워홀의 차이는 일상사물들이 지닌 일상성에 대한 감동이다.
뒤샹은 소변기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지만 워홀은 그 어떤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했고, 워홀은 일상성을 찬양했지만 뒤샹은 그렇지 않았다.
단토는 뒤샹과 워홀의 본질적인 차이를 자신이 선정한 것 외의 그 밖의 모든 소변기는 왜 예술작품이 될 수 없는가에 대한 질문을 뒤샹이 제기하지 못한 데 반해 워홀은 그런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제기한 것에 둔다.
게다가 기성품의 선정에 대한 기준도 문제로 삼는다.18)
영화를 포함하여 워홀의 전 작품에 나타나는 특성은 반복과 무, 혹은 하찮음nothingness이다.
거기에는 반복되는 이미지 외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 이미지의 의미와 정체성을 묻는 것이다.


동시대인이 이미지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인지되는 하나의 이미지를 성취하는 것을 진정한 명성으로 간주하는 데서 예술 장르의 위기는 가속화되었다.19)
워홀 이후 진정한 명성을 얻는 조건으로 지정된 방식이 초상화이다.
이런 이미지들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이미지 주인공의 개성이 말소되었으므로 그 실제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무, 혹은 하찮은 이미지이지만 이미지의 주인공이 이미지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스타로 각광받는 그런 이미지이다.
워홀은 1967년 한 인터뷰에서 “앤디 워홀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싶다면 단지 표면만을 보라”라고 했다.
예술 장르의 위기는 이런 하찮은 이미지만을 전달하여 진정한 명성을 추구하는 데 있다.



1) Henri Matisse, "Statements to Teriade, 1929-1930", in Matisse on Art, trans. Jack Flam (London: Phaidon, 1972), 58.

2) Heinrich Wolfflin, principles of Art History: The Problem of the Development of Style in Later Art, trans. M. D. Hottinger (New York: Dover Publications, n.d.), ix.

3) No&euml;l Carroll(edited), Theories of Art Today(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2000). Robert Stecker는 “Is It Reasonable to Attempt to Define Art? 예술을 정의하려고 시도하는 게 정당한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예술작품들이 다양한 전통 안에서 다양한 기원들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주어진 전통 안에서의 관련성으로 그것들을 예술작품들로 규정하더라도 그런 정의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그 밖의 문화적 실행들로부터의 예술 전통들을 분류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최초의 예술, 예술의 전통, 예술의 기관을 규정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예술의 기능을 꼽는다.

4) George Dickie, "Defining Art", 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6 (1969): 252

5) George Dickie, The Art Circle: A Theory of Art (New York: Haven, 1984).

6) Arthur C. Danto, After the End of Art: Contemporary Art and the Pale of History, 김광우 역 (미술문화: 예술의 종말 이후), 353 G.W.F. Hegel의 Hegel`s Aesthetics: Lectures on Fine Art에서 인용 “예술작품에 의해서 이제 우리 내면에서 환기되고 있는 건 즉각적인 향유가 아니라 우리의 파단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i) 예술의 내용, ii) 예술작품의 표현수단,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서로에 대해 적합한지 적합하지 않은지의 여부를 우리의 지적 고찰에 종속시키기 때문이다.”

7) Hans Belting은 Das Ende der Kunstgeschichte?(Munich: Deutscher Kunstverlag, 1983)의 증보판인 Das Ende der Kunstgeschichte: Eine Revision nach zehn Jahre(Munich: Verlag C.H. Beck, 1995)에서 의문부호를 빼버렸다.

8) 아서 단토의 논문 “The End of Art”는 Berel Lang이 편집한 The Death of Art(New York: Haven Publishers, 1984)에 실렸고, 단토는 10년 뒤 수정 보완하여 After the End of Art: Contemporary Art and the Pale of History란 제목으로 출간했다.

9) Wayne Koestenbaum, Andy Warhol (A Lipper/Viking Book, 2001) "하인즈 상자는 `세상에서 가장 잘 팔리는 케첩`을 선전하고, 브릴로 상자들은 &#3924;개의 커다란 사이즈의 꾸러미들`을 약속한다. 워홀의 만화속의 영웅들과 같이 그 상자들은 남자다움을 풍자한다: 거대한 크기, 가장 큰 것! 그러나 실제에 있어 그것들은 단지 상자들에 불과하며 그대로 복제한 것이다. 그는 사나이다움이 허식을 부리는 사소한 (악의가 없는) 거짓말임을 시사할 것이다." 이 책은 필자가 번역을 마치고 출판사 푸른숲에 원고를 넘긴 상태이다.

10) Arthur C. Danto, Philosophizing Ar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정용도 역 (미술문화: 철학하는 예술), 93

11) Wayne Koestenbaum, Andy Warhol (A Lipper/Viking Book, 2001) 워홀은 “‘내가 나의 몸속에 존재한다고, 그 밖의 사람들이 그들의 몸속에 존재한다고 어떻게 입증할 수 있으며, 그리고 사람의 몸이 또 다른 사람의 몸에 인접할 때 그 사람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길까?’, ‘그것이 사라질까 아니면 그것의 구조를 바꿀까?’, ‘두 몸이 결합되었을 때 시간이 속도를 더할까, 그리고 몸이 홀로 있을 때 시간이 속도를 늦출까?’, ‘몸들은 죽었을 때만 부동하는 것일까?’, ‘출몰과 복제를 통해서 망자가 움직일 수 있을까?’, ‘소년이 소년을 좋아하는 것일까?’, ‘소녀가 소녀를 좋아하는 것일까?’, ‘카테고리들 - 어머니, 야바위꾼, 스타, 열광자 - 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사랑이 순간이며 내가 그것의 일부일까?’”라고 질문하는 것들을 통해서 몸을 자극한 것인지, 혹은 몸에 무관심한 것인지에 대한 그의 형이상학적 연구의 중심에서 생각하는 것으로 사용했다.

12) Erwin Panofsky, studies in Iconology: Humanistic Themes in the Art of Renaissance(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62)
파노프스키는 한 시기의 내적인 정신을 함께 규정하는 예술과 철학 간의 이런 부인할 수 없는 반향들의 연구에 ‘도상학iconology’이란 명칭을 부여했다.

13) Arthur C. Danto, Beyond the Brillo Box: The Visual Arts in Post-Historical Perspective (The Noonday Press, 1992) 이 책은 현재 필자가 번역 중이다.

14) Arthur C. Danto, After the End of Art: Contemporary Art and the Pale of History, 김광우 역 (미술문화: 예술의 종말 이후), 251

15) 같은 책, 251

16) 김광우, 뒤샹과 친구들 (미술문화, 2001), 120 레디메이드란 말이 처음 사용된 건 1916년이었다. 뒤샹은 피에르 카반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잘 들어두게. 난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만들기를 바라지 않았네. ‘레디메이드’란 말은 내가 미국으로 오던 해인 1915년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어. 그것은 재미난 말이지만 내가 자전거바퀴를 의자에 거꾸로 세울 때는 레드메이드란 말이나 그 어떤 말도 없었어. 그저 오락에 불과했지. 특별한 이유라든가, 사람들에 보여주려 하거나, 또는 무엇을 설명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었어. 전혀 그렇지 않았어.”

17) 같은 책, 121

18) Arthur C. Danto, Philosophizing Ar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정용도 역 (미술문화: 철학하는 예술), 108 “소변기는 근대사회에서 가장 견디기 힘들 정도로 방어되는 경계를 지닌 어떤 것들과 관련된 상당히 부담스러운 오브제로서, 말하자면 성적인 차이들, 삶의 나머지 부분들로부터 제거된 과정들의 분리성, 그리고 프라이버시, 위생 등의 것들과 연관되는 모든 것들이다. 반대로 <브릴로 상자>는 금지된 것들이나 피할 수 없는 것들과는 그리 관련되지 않는다. 그것은 공적이고, 지루하며, 명백하고 재미없다. 재미없는 관심과 일상성의 특별함을 발견하는 것은 워홀이 가지고 있는 인성(단지 작가로서뿐만 아니라)의 일부이다.”

19) 같은 책, 118 “진정한 불명성은 인간을 능가해 지속되는 이미지를 성취하는 것이며, 무한히 일상적인 정서의 부분으로 지속되는 - 찰리 채플린, 존 F. 케네디, 혹은 워홀 자신처럼 - 이미지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의 자화상들은 그의 이미지의 초상화들이며, 그런 면에서 그의 초상화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마릴린 초상화들이 거의 ‘실제의‘ 그녀라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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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주간조선에 글을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거꾸로 건 그림은 거꾸로 보일 뿐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게오르그 바젤리츠(1938-)의 ‘러시안 페인팅’ 시리즈를 전시하고 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그린 41점이 7월 15일까지 전시될 예정이다.
과거에 그린 것들을 변형하거나 사진을 기초로 그린 것들이다.
테마가 된 이미지들 모두 과거 러시아에 대한 것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예를 들면
수세식 변기도 사용할 줄 모르는 러시아 병사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은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군을 지적이며 감성적임을 선전하기 위해 사회주의 화가로 하여금 그리게 한 이미지이지만 바젤리츠가 이를 조야한 이미지로 변형하여 냉소하고,
러시아의 영웅 레닌을 반누드의 평범한 늙은이 모습으로 편지, 혹은 연설문을 작성하는 이미지로 격하했으며,
정치 선전 그림만 그리던 화가가 사회주의 몰락 이후 빈 캔버스 앞에 앉아 무엇을 그릴지 알지 못하는 모습 등을 보여준다.
바젤리츠는 독일 경제전문지 <캐피탈>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 중 6위에 오른 인물이다.
1위, 3위, 4위 모두 독일 미술가들이 차지하여 선정에 객관성이 없다는 느낌이지만 그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신경향의 국제적 명성을 얻은 화가들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는 독일 신표현주의의 선두주자들 중 하나다.
1970년대 말에 등장한 신표현주의를 신야수주의, 혹은 격렬하고 폭력적 회화라고도 하는데, 재료 처리방식이 매우 거칠며 짧은 기간에 제작하여 격렬함을 작가의 주관으로 두드러지도록 표현하는 회화이다.
그래서 ‘나쁜 회화 Bad Painting’로 불리기도 한다.
1969년부터 그림을 거꾸로 걸기 시작했으며 ‘거꾸로 된 그림의 화가’로 불린다.
거꾸로 건 그림은 거꾸로 보일 뿐이다.
미술관에 가서 그의 작품을 바로 감상하려고 목을 45도로 갸우뚱해보았지만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오른편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목을 90도가 되게 갸우뚱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180도 거꾸로 걸었기 때문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목을 뒤로 제치고 보다가 결국 제대로 보지 못하고 목만 아팠던 기억이 새롭다.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에 호기심을 갖고 오랫동안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 거꾸로 건 바젤리츠는 “거꾸로 된 이미지는 더 잘 보일 뿐만 아니라 보는 이의 눈을 향하게 된다”면서 “거꾸로 그려진 이미지는 오브제로 부적합하므로 오히려 회화에 적합하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고 오랫동안 주목받기 위해 바젤리츠 식 튀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
연예인과 정치인들 중에 많으며 심지어 지식인들 중에도 있다.
이들은 말을 돌리기 때문에 그 진의를 파악하기 몹시 어렵다.
고개를 90도로 갸우뚱해도 그 진의를 알 수 없는 까닭은 180도로 돌려서 말하기 때문이다.
포퓰러리즘popularism(대중주의, 혹은 인기주의)을 타고 유명해지기를 바라는 이들의 목적은 매우 불순하다.
광고는 거의 거꾸로 된 이미지와 말이다.
미국의 어느 제약회사가 “이것은 100퍼센트 비타민 C이다”라고 광고했다가 당국으로부터 저지당한 적이 있다.
100퍼센트 사과가 있을 수 없듯이 100퍼센트 비타민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숨기려는 화가는 그림을 거꾸로 건다.
진의를 숨기려는 사람은 말을 거꾸로 한다.
거꾸로 건 그림을 바로 보기 위해서 우리는 물구나무를 서야 한다.
미술관으로 와서 물구나무를 서라고 요구하는 건 너무하다.
거꾸로 말을 하면 상대방을 속이는 궤변이 된다.
‘둥근 사각형’, 혹은 ‘네모난 원형’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림을 바로 걸어야 하고 말은 돌리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세상이 매우 어지러워진다.
목에 통증이 오고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어느 연예인의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진 적이 있었다.
그것도 말이라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니 머릿속이 복잡해진 것이다.
FTA에 재협상이란 있을 수 없다고 큰소리치던 정부가 추가 협상에 나섰다.
국민은 재협상이 곧 추가 협상인 줄 알기 때문에 속임수에 분노하는 것이다.
노무현 씨가 대통령이 되자 의기양양하여 민주당을 탈당한 의원들이 얼마 전 탈당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표명했다.
그들 말의 진의를 알 수 없다.
필히 탈당해야 했다면 유감을 표명할 일이 아니고 유감을 표명할 거라면 그때 잘못했다고 시인해야 궤변이 안 된다.
안희정 씨는 노무현 대통령을 가리켜서 “나라의 왕이고, 집안의 가장이 돼야 할 대통령이 연일 선관위로부터 경고장을 받고 있다”고 궤변을 뱉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왕에 비유하는 건 민주 정체를 부정하고 왕정을 주장하는 것이라서 도무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궤변인 것이다.
그림을 바로 걸고 말을 바로 해야 세상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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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예술의 전당 강의 내용입니다.

요제프 보이즈의 삶과 예술

요제프 보이즈(Joseph Beuys, 1921-86)는 과연 누구인가?
그에 대한 평가는 어째서 분분한 것인가.
1960년대와 70년대에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가 1974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아방가르드의 아버지”라고 극찬했다.
본래 아방가르드의 아버지 파블로 피카소가 타계한 1973년 이듬해에 피카소에 대한 찬사가 그에게로 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에 대한 비평이 거세어졌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십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비평은 엇갈려 있는 상태이다.
그를 가리켜 천재였다고 말하는 후하게 대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사기꾼에 불과했다고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를 예술의 제단 위에 올려놓고 마냥 존경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야바위꾼, 병든 설교자, 무당, 또는 교활한 익살광대라고 비난하면서 아예 병든 예술가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 이런 상반되는 비평이 그에게 쏟아지는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많은 사람이 그에게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예술가의 특별한 인생을 마치 심포니를 연주하듯이 적나라하게 시위한 예술가들로 우리는 뒤샹과 보이즈 그리고 앤디 워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세 사람 모두 대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있었으며, 그들에게는 신화로 보일만한 인생이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작품보다는 사상이 두드러졌으며 그들의 회고전이 별로 열리지 않는 것도 작품보다 사상이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1964년 11월 11일 보이즈는 서독 TV에 출연하여 <마르셀 뒤샹의 침묵은 과대평가되었다 The Silence of Marcel Duchamp is Overrated>라는 제목으로 말했다.
훗날 왜 뒤샹의 침묵이 과대평가되었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르셀 뒤샹의 반예술 태도와 최근의 태도 두 가지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뒤샹은 플럭서스 예술가들을 비판하면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고, 자신이 모든 걸 이미 창조했다고 호언했어요.
그의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이해가 다를 수 있어요.
내가 한 말은 각기 다른 충동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물론 수수께끼 같은 말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나의 아이디어는 뒤샹의 반예술 개념을 거부한 데 있었습니다.
반예술 개념에 관한 나의 견해를 대신 피력했는데 문제를 크게 부각시키려는 방법론적 의도였습니다.
그것은 예술 전체에 광범위하게 걸친 새로운 요소가 플럭서스 예술가들에게 있다는 점을 홍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지요.
반예술 안에 있는 ‘반 Anti'이란 말은 예술의 풍부한 개념과 극도로 한정된 고립 속에 있는 은신처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수학과 반수학, 물리학과 반물리학 같은 쌍을 짓는 말에서처럼 단지 같은 분야의 제한된 부분을 표현한 것으로 무의미한 말이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폭넓은 개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극단 모두를 필요로 합니다.”

뒤샹이 준 영향에 관해 묻자 말했다.
“뒤샹을 존경하지만 그의 침묵은 배척합니다.
그는 쉽게 끝나고 말았어요.
아이디어가 고갈된 것이지요.
중요한 어떤 것도 그는 제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를 매우 존경하지만 침묵에 관해서는 아니며, 그의 침묵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침묵 외에 뒤샹에 관해 비판할 만한 것이 있느냐고 묻자 말했다.
“그의 침묵이 지나치게 높게 평가된 것 외에도 그의 작품에는 성나게 만드는 형태가 있고, 의도적인 보헤미안 습성과 부르주아 경향의 요소가 있는 것을 지적할 수 있어요.
뒤샹은 부르주아에게 충격을 주려고 했으며 이런 의도 때문에 창조적 힘을 감퇴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나의 견해로는 마르셀 뒤샹의 침묵은 대단한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아는 대로 그는 젊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것을 이미 한 것이라네.
우리가 이미 모든 걸 했다니까.
행위, 해프닝, ... 그것들은 낡은 것이야’라고 말했어요.
어째서 우리 모두가 마르셀 뒤샹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지요?
왜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쉴러, 혹은 니체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지요?”

뒤샹의 관점이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답했다.
“뒤샹의 침묵은 잠재의식을 활기 없도록 남겨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관점으로 초현실주의와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잠재의식으로 살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실재 그 위에 있다고 믿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실재 아래에 있었던 것입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진흙투성이 물에서도 낚시를 할 수 있으며, 많은 이미지를 낚아챌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것들은 억압된 것들의 분출에 불과했습니다.
사실 방법론으로 말하면 뒤샹은 의식에도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지한 분석과 연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그가 반대방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작업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도달한 것이지요.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그저 억압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뒤샹의 침묵은 ‘언어의 절대적 부재 absolute absence of language’란 개념으로 대치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침묵하기 전 뒤샹은 어떠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답했다.
“침묵하기 전 뒤샹에게는 언어가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침묵하기보다 토론을 했어야 마땅했는데 침묵이 공헌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어떤 것도 해결하지도, 성취하지도 못하고 말았어요.
특히 젊은이들과 더불어 토론했어야 마땅했는데 만약 그렇게만 했다면 그의 작품들은 생산적이었을 테고, 그의 개념들은 오늘날 유용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미학적으로 뒤샹의 위상은 없습니다.
그가 참여를 거부한 것입니다.
왜냐구요?
언어가 부재했기 때문이지요.
어째서 할 말이 없다는 겁니까? 언어가 없기 때문에?
이야기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당신의 신랄한 비판을 뒤샹 본인이 알고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말했다.
"몇 사람이 와서 내게 말하기를 뒤샹이 ‘독일에서 어떤 자가 나의 침묵에 관해서 말하기를 과대평가라고 하던데 그 말이 무슨 뜻이냐?’ 하고 물었다더군요.
난 뒤샹이 내 말 뜻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믿어요.
만약 분명한 뜻을 알지 못한다면 내게 편지를 보내 내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물었어야 하지 않았겠어요?
왜 안 그렇습니까?”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뒤샹은 미술품이란 부르주아 구매자의 손에 넘어가기 전 창조과정에서만 존재할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라고 하자 그는 말했다.
“왜 그렇습니까?
렘브란트의 그림을 예로 들어 봅시다.
렘브란트의 그림이 미술관 벽에 걸리던, 부르주아의 집 벽에 걸리던 무엇이 다르단 말이지요?
그림을 지하실에 넣어두었다 손치더라도 그것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일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림의 절대적인 기능은 보존되는 것 아닙니까?
그림이 꼭 벽에 걸려있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왜 그림이 미술관 벽에 걸려있는 것보다 부르주아 집 벽에 걸려있을 때 덜 아름답다고 말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어째서 그림 자체의 성질이나, 가치가 감소된다는 겁니까?
성질과 가치는 당연히 부식될 수 없는 것들이에요.
좀벌레가 부식시킬 때까지 그림은 남아있는 것이고, 혹 부식되었다 손치더라도 그것에 관한 사진이나 문서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 아닙니까?”

뒤샹에 관해서는 그만 이야기합시다.
“그러는 편이 그에게 이익이 되는 일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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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보이즈의 신화




보이즈의 신화는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의 전투기가 러시아 군인들의 포격을 맞고 크리메아에 추락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라디오 기술자로 훈련을 받았지만 1941년 코니그라츠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았다.
전투기 조종사로 전쟁에 참여한 그는 포격으로 추락한 후 의식을 잃고 눈 속에 며칠 묻히고 말았다.
독일 군인들이 그를 구출하려고 인근 지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눈 속에 처박힌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구출작전을 포기했다.
보이즈는 냉동된 상태에서 거의 저세상 사람이 되었는데 행운의 여신이 그를 살려주었다.
보이즈는 훗날 회상했다.


“그때가 1943년 겨울이었습니다.
JU-87기를 타고 정찰 중이었는데 러시아 군인이 쏜 대공포를 맞고 폭풍 속에 추락했습니다.
전투기는 곧 화염에 싸였고 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요.
눈 속 깊이 파묻혔고 온 몸이 언 상태였어요.
난 ‘이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타타르족이 나를 발견했습니다.”


타타르족은 그를 자신들의 캠프로 데려다가 그의 몸에 지방을 덮고, 펠트로 몸을 말아서 체온이 회복되도록 했다.
타타르족은 크리메아의 유목민으로 러시아와 독일 국경 부근에 거주하는 부족이다.
그는 훗날 회상했다.


“그들은 나를 가족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었어요.
그래서 난 캠프에서 그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활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독일 군인들이 날 구출하려고 독일 국경 부근을 샅샅이 뒤졌다는데 눈 속에 처박힌 날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난 의식을 잃은 상태였어요.
의식을 회복한 건 12일이 지난 후였어요.
내가 기억하는 건 전투기가 추락할 때 ‘낙하산을 펴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걸 알았어요.
포격당하고 2초 내에 낙하산을 펴고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보통 때 나는 안전벨트를 하지 않고 늘 몸이 자유로운 상태가 되게 했는데 유사시에 낙하산을 펴고 떨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안전벨트를 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어요.
난 지도를 휴대하지 않았는데 인근지역을 잘 안다고 오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의식을 잃은 나를 타타르족이 발견하여 그들 캠프로 옮겼습니다. ...
두개골이 깨어지고, 턱뼈가 부러졌어요.
눈 속에 완전히 파묻힌 상태였습니다.
타타르족이 날 발견한 건 수일이 지난 후였지요.
내가 기억하는 목소리는 ‘보다 voda'였는데 그들의 말로 ‘물’이란 뜻입니다.
펠트로 된 천막과 코를 찌를 듯한 얼얼한 냄새가 나는 치즈 그리고 기름과 우유가 보였습니다.
그들은 지방덩어리를 내 몸에 덮어 몸이 훈훈해지도록 했으며, 펠트로 몸을 둘둘 말았습니다.
훈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펠트로 만 것인데 체온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한 조치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던 때가 늘 기억에 생생하며, 내게 늘 작용한답니다.
그 후 독일 군인들이 나를 발견하여 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그때의 체험은 보이즈의 인생을 180도로 바꾸어놓았다.
예술가가 되게 한 것이며, 지방 펠트를 조각의 재료로 사용하게 한 것이다.
보이즈는 조각의 재료로서 지방과 펠트가 타타르족이 자신에게 사용한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이 스스로 사용했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말을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보이즈를 유명하게 만든 건 이 두 가지 재료였다.
그는 타타르족에게 평생 빚을 지고 말았다.


우리는 편견 없이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를 천재라고 미리 생각해서도 안 되지만 야바이꾼이나, 떠벌이로 단정해서도 안 된다.
평론가나 미술사학자들의 주장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를 바라보는 건 위험한 방법이다.
그가 한 말에서 의식구조와 미학을 알아보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다.
우리 스스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가 한 말로 충분하다.
그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자신이 처한 시대에 실존의 문제와 씨름한 진지한 인간이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며, 그가 어째서 예술이야말로 새 인생을 창조할 수 있는 자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술만이 인생의 궁극적 자원이라고 믿기까지 그에게 나름대로 다양한 방법의 탐구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예술은 당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의 산물이므로 예술가가 처한 시대를 알면 이해 못할 예술가는 없다.


어려서부터 보이즈는 시, 철학, 문학, 과학, 대중전통 문화, 연금술과 점성술 등에 관한 책을 읽었다.
특히 낭만주의의 대가들 괴테, 쉴러, 노발리스 등의 저서를 탐독했으며, 신비주의자 루돌프 스타이너의 신지학에 심취했다.
보이즈는 전통주의 예술의 개념을 버리고 철학, 문학, 과학, 종교의 합성으로서의 폭넓은 의미로서의 예술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되었는데 예술의 만능을 믿었기 때문이며, 그에게 예술은 개념이라기보다는 신념에 가까웠고, 거의 종교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새 인생의 자원으로 창조성을 꼽았으며, 창조성으로부터 존재의 상황을 확대해나갔는데 창조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창조”라는 말은 그의 미학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개념이다.


보이즈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이다”라고 했다.
그의 말을 많은 사람이 비평했는데 창조의 개념을 이해하면 그의 말을 오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가 “모든 사람이 예술가이다”라고 했다고 해서 미쟁이 이모 씨가 화가이고, 목수 서모 씨가 조각가라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본 청소부가 웬만한 시인보다도 훌륭한 시인이었다고 말했는데 시를 한 줄도 쓰지 않은 청소부, 어쩜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청소부를 가리켜 훌륭한 시인이라고 말한 데서 그가 시인을 시의 범주가 아닌 일반적 의미의 예술의 범주 안에서 이해했음을 본다.
일반적 의미의 예술이란 물론 창조가 가능한 모든 영역을 뜻하는 것이다.
보이즈는 예술을 기존의 관념을 넘어서 창조에 근거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미쟁이 이모씨의 벽돌 쌓는 기술과 목수 서모씨의 나무 다루는 솜씨는 예술가의 작품 만드는 기술과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분야에서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다.
보이즈는 창조성 여부에 따라서 예술가의 자격을 판단하려고 했다.
그는 예술가의 90% 가량이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말했는데 기회주의자 예술가들에 비한다면 미쟁이, 목수, 또는 청소부의 창조성이 뛰어난 예술을 칭찬하지 못할 이유가 없고, 그들을 예술가라고 부르는 것이 문제될 것도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는 그의 주장은 개인의 잠재적 창조성의 개발이 시급함을 의미한 것이지 말 그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로서의 예술가라는 뜻은 아니다.
마드리드의 청소부가 시인이라고 말할 때, 감자를 재배하는 농부가 예술가라고 말할 때, 그는 청소부와 농부의 창의력을 지적한 것이며, 반면 대부분 기회주의자 예술가들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보이즈는 감자 껍질을 벗기는 것조차 의식 있는 행위라면 예술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만큼 창조성이 중요하다는 걸 역설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창조성이 있다고 믿었으며, 문제는 창조성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도록 그들을 교육시키느냐 하는 데 있었다.
그는 예술가들이 주장하는 자신들의 특수계급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특수계급이 사회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며, 창조성을 발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술가이기 때문에 특수계급이 있을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창조성과 자유는 동일한 의미였다.
자유는 그에게 첫째, 개인이 스스로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행동이었고, 둘째, 주변 사람들 행동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의미했다.
그는 조화로운 관계를 더욱 강조했다.
개인과 대중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가치 있는 사회적 관계로서 보이즈는 개인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대중에게 소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그는 개인의 자유는 늘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병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자유가 창조이고, 창조가 곧 자유였다.
그는 창조성을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생각, 느낌, 그리고 의지였다.
이 세 가지는 그의 조각이론이 되었다. 그에게 창조성이란 이 세 가지를 성취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첨가해야 할 중요한 점은 그가 창조성을 사람에게 한정된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고 동물과 식물에게도 적용한 것인데 창조성을 에너지로 이해한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신비주의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이 그를 현대판 무당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그의 폭넓은 창조성의 개념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에게 정신은 에너지였으며, 에너지 혹은 정신을 늘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논리적으로 유물론을 비난하게 된 것이다.


보이즈는 정신적 진화를 강조하면서 관념적 유물론을 비판했고, 대신 현상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사람들이 지혜로워지기를 바랐으며, 이런 일이 교육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는 전통으로부터 유산 받은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전통이 유물론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교육방법은 혁신적이었다.
그는 선생은 다 안다는 듯이 가르치기만 하고 학생은 아무 것도 모르는 듯이 그지 앉아서 선생의 가르침을 듣는 전통주의 방법을 배척하면서 선생과 학생이 함께 토론하고 탐구하는 새로운 교육을 주장했다.
이는 그에게 조각을 가르친 에발트 마타레Ewald Matare(1887-1965)가 제안해서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물의를 일으킨 방법이기도 한데 보이즈는 마타레의 혁신적인 교육방법을 받아들였다.
보이즈는 197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소설가 하인리흐 뵐Heinrich Boll(1917-85)과 함께 창조성과 상호징계 연구를 위한 자유 국제대학Free International University for Creativity and Interdisciplinary Research을 창설하고 공동명의로 선언문을 발표했다.
두 사람은 창조성이 사회를 바꾸고 진화시키는 열쇠라고 주장하면서 창조성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예술가라고 주장했다.
보이즈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예술을 행할 수 있으며, 새 사회 조직을 위해서 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창조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는데 창조성이 국가의 수입이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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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주간조선에 기고한 글입니다.


문화는 반드시 이해되어야 한다.




모 출판사의 의뢰로 문화비평가 웨인 코스텐바움의 저서를 번역하면서 문화는 반드시 이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동성애자로서 독특한 성욕을 타고난 앤디 워홀과 어머니의 등 뒤로 몸을 숨기는 아동과 같이 매우 내성적 성격을 지닌 그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쓴 책으로 최근 미국 문화의 일면을 정확하게 짚어준다.
성적 묘사를 직접적인 방법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어 소위 더러운 낱말들(dirty words)이 많이 등장하고, 섹스에 관한 속어가 많이 사용되었다.
그렇게 해야만 적확하게 사실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기도 한 저자의 매우 유려하고 재기 넘치는 언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데 적잖이 어려움을 겪었는데,
영어의 문법을 어떻게 비트는 것이 역효과를 내고, 분수에 넘치지 않는 위트가 오히려 독자의 이해의 폭을 한층 더 넓혀준다는 사실을 잘 아는 저자는 검투사가 자유자재로 칼을 휘두르듯이 역설적인 표현과 은유적인 속어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유려한 문장과 위트를 의역으로 전달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며, 특히 은유적인 속어를 의역으로 전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미국 대중문화의 참 모습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반드시 그대로 전달되어야 할 속성을 지니고 있다.
최근 미국 문화와 우리 문화 사이에는 태평양만한 거리가 있어 미국 문화, 특히 동성애자의 문화를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한국인으로 미국 모 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는 분이 황진이의 시를 영어로 번역했다.
‘자는다 누웠는다’라는 구절을 영어로 ‘자고 있거나 누워있다’라고 번역한 데서 고소를 금치 못했다.
황진이의 시에서 ‘서리서리 넣는다’, ‘구비구비 편다’와 같은 서정적 표현은 도저히 영어로 전달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 문화와 미국 문화의 차이인 것이다.
이런 문화의 차이는 이해하려는 노력에 의해서만 극복된다.
미국인이 우리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의 삶에 나타나는 서정적 언어의 표현에 관해 많은 연구를 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외국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에 나타나는 서정적 언어의 표현에 관해 많은 연구를 해야 한다.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문화는 충돌한다.
문화의 충돌이 인명의 살상을 부르는 화를 자초한다.
그만큼 문화의 힘이 큰 것이다.


종교는 문화의 일부분이다.
문화 안에 다양한 유형의 종교들이 있다.
한 종교인은 다른 종교인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
그들을 포교의 대상으로 삼거나 그들의 종교를 자신들의 종교보다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는 건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 종교에 대한 침입, 혹은 공격이다.
특히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에 침입, 혹은 공격이 자행되는 걸 본다.
두 종교의 믿음의 조상은 한 분 아브라함이다.
한 조상에서 분파된 종교들이다.
이슬람교의 정경 <코란>에는 구약성서에 있는 많은 이야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난 이야기도 있다.
두 종교가 한 뿌리에서 나왔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에 치열한 침입과 공격이 발발했으며 그로 인해 생명을 잃은 사람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지 않은 독선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이 오늘날에도 가시지 않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입, 혹은 공격은 오일을 점령하는 데 바탕을 두고 있지만 아랍인들은 이를 부분적으로 종교에 대한 침입과 공격으로 보고 있다.
일부 지식인들이 미국의 중동 개입을 문화적 충돌로 표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국제사회에서의 처신의 일환으로 우리나라는 아랍권에 파병하고 있다.
많은 아랍인은 우리의 파병 목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침입의 한 유형이다.
자신들의 땅을 점령한 나라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나라에 와서 선교까지 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마저 말살하려는 악의로 받아들일 수 있다.
충돌이 불가피한 것이다.
더위를 무릅쓰고 번역에 매진하면서 미국 문화, 특히 동성애자의 문화를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된 필자는 외국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여간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말하고 싶다.
문화의 우위를 논하는 사람은 바보다.
문화가 각 지역의 최선이라는 걸 우리는 반드시 수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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