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문예중앙>의 청탁을 받아 쓴 것입니다.
6월 여름호 `나의 입장`에 실렸습니다.
주어진 제목이 "예술 장르의 위기"라서 논문 형식으로 쓸 수밖에 없었고, 꼼꼼이 언급하고 다루어야 할 것들이 많아 주를 많이 달았습니다.
이런 중요한 미술의 문제를 문학잡지 <문예중앙>이 다루겠다는 데서 매우 기뻤습니다.



예술 장르의 위기


모든 양식은 동일하고 형식일 뿐이다


앙리 마티스는 테리아드와의 대화중에 말했다.

“예술은 개인에서부터뿐만 아니라 우리에 앞서는 축적된 힘, 즉 문명으로부터 비롯되는 발전을 겪는다.
우리는 단순히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게 아니다.
재능 있는 예술가는 단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할 수 없다.
그가 단순히 자신의 재능만을 이용할 경우 그는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산하는 것의 주인이 아니다.
그건 우리에게 부과되는 것이다.”1)

마티스가 한 말은 하인리히 뵐플린이 『미술사의 원리』(1922) 6판 서문에서 한 말을 상기하게 한다.

“가장 독창적인 재능조차 출생 시에 고정된 어떤 한계를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모든 시대에 모든 게 가능한 건 아니다. 특정한 사유는 특정한 발전단계에서만 생길 수 있다.”2)


마티스와 뵐플린의 말은 모더니즘이 붕괴되기 전까지, 혹은 예술 장르의 위기론이 제기되기 전까지 매우 타당하게 받아들여졌다.
예술가가 그에게 주어진 물질적, 기술적, 문화적 환경 안에서 작품을 생산한다는 건 당연해 보인다.
자신이 속한 공간적 시간적 사회에서 경험을 통해 배우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한다는 건 아주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환경이 닫혀있지 않고 매체를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경계가 없이 전 세계로 열리게 되면서 공간성은 쉽게 극복된다.
나라와 나라의 울타리가 없어지면서, 역사의 울타리가 사라지면서 매체와 인터넷이 전 세계를 하나의 환경으로 만들기 때문에 강원도의 어느 마을에 거주하는 예술가도 세계적인 환경 안에서 작품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은 시간성의 극복인데, “모든 시기에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라는 뵐플린의 주장 또한 오늘날에는 그 타당성을 상실한다.
전라도 어느 마을에 거주하는 예술가도 프랑스 바로크 시대의 예술가가 제작한 듯이 보이는 작품을, 이탈리아 매너리즘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다.
과거 어느 나라에서 사용된 양식들이라도 오늘날에는 차용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양식들이 예술작품의 공통성을 묶는 범주 또는 정체성으로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모든 양식이 동일하게 취급하며 단순한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다.
양식은 형식과 같은 말로서 양식의 차이는 예술작품 내용의 차이와는 무관하고 다만 표현의 수단으로서의 형식만이 다를 뿐이다.
반드시 취해야 할 양식도 가장 우량한 양식도 없는 이유는 형식이란 동등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취해야 할 형식도 가장 우량한 형식은 없더라도 두드러진 형식은 존재하는데, 이는 곧 유행이다.
오늘날 우리의 미술계에 팝아트 형식의 작품이 두드러진 건 하나의 유행일 뿐이다.
유행은 시간 속으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동일한 일상의 오브제와 예술의 오브제


예술 장르의 위기는 1960년대 예술이 총체적으로 엘리티즘에서 민주주의 형식의 다원주의로 개방되면서 촉발되었고 예술의 목표가 더 이상 순수성에 있지 않다는 데서 점철되었다.
동시대의 예술을 특징짓는 컨템퍼러리 예술은 어의적으로는 동시대에 제작되는 예술이지만 그보다는 극단적이며 총체적인 다양성과 개방성을 의미하며, 도덕적으로는 용인될 수 없는 가운데 예술이 불순해지거나 비순수해졌음을 의미한다.
다원주의 이전의 작품들은 양식적으로 구분이 가능했지만 컨템퍼러리 예술은 과거의 모든 양식들을 동일한 형식들로 취급하며 그런 것들에 개방되어 있다.
예술작품은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완전히 열려 있으며, 이는 예술작품이 무엇으로 보여야 한다는 선험적인 구속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라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다원주의가 용인된 뒤 팝아티스트들에 의해서 일상의 오브제와 예술의 오브제가 시각적으로 똑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컨템퍼러리 예술의 다양성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걸 시위한 것처럼 보였다.
앤디 워홀은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어느 누가 무엇을 만들어도 그것이 곧 예술작품이란 공식을 성립시키는 건 아니다.
평론가들의 시급한 과제는 일상의 오브제와 예술의 오브제를 합리적인 담론을 통해 규정하는 일이다.
로버트 모리스와 리처드 세라를 예로 들면 두 사람은 1960년대 초에 일상의 오브제인 펠트 천조각과 고무조각들을 전시장에 흩뿌리는 설치작업을 했다.
작품을 해체하는 후기미니멀리즘의 작품들로 분류되는 이런 것들은 육안으로 일상의 오브제와 같은 것들이다.
이들보다 더욱 극적인 예는 앤디 워홀이 브릴로 상자, 델몬트 상자, 하인즈 케첩 상자 등을 그대로 복제한 것들을 선보인 것으로 그것들은 시각적인 면에서 슈퍼마켓의 상자들과 같았다.
워홀의 상자와 모리스 그리고 세라의 펠트와 고무조각들 모두가 일상의 오브제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분류되지 않고 고상한 예술의 오브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사용한 오브제들이 그것들이 지닌 일상성 말고 그 밖의 무엇에 관한 것인가가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의 오브제들에 관한 것과는 다른 예술적 목적을 지녀야 한다.
이를 규명하는, 즉 예술작품과 비예술작품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로서 이는 또한 예술작품을 규정할 철학적 근거를 어디에서 발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예술작품의 정의


오늘날 철학자들 사이에서 예술작품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 혹은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를 두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몇 가지 논증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여기서 세 가지만 간략하게 숙고해 본다면
첫째, 예술작품의 정의는 정하는 건 가능하지 않다는 입장으로 이런 논증의 주지할 만한 철학자 로버트 스테커는 어떻게 정의를 내리더라도 그건 선언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3)
그는 최초 예술작품의 기능이 유일하게 정의가 될 수 있다는 기능주의를 고집하지만 이는 매우 회의적인 시각으로 궁극적으로 예술작품의 정의를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에 반해 긍정적인 태도로 오브제들에서 이해할 만한 경향성을 찾는 방법이 있는데,
이는 예술제도론으로 이런 견해의 대표적인 인물이 조지 디키이다.
디키는 1969년부터 1984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수정을 통해 일관되게 예술제도론을 주장했는데, 1969년에 첫 정의를 발표했다.

“설명할 수 있는 의미로서의 예술작품은 1) 인공물이고 2) 사회, 혹은 일부 사회의 하위 집단이 그 인공물에 진가를 위한 후보자의 지위를 수여한 것이다.”4)

디키는 1984년에 자신의 이론을 마지막으로 수정 보완한 뒤 더 이상 손보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으로 발표했다.

“예술가란 예술작품 만들기에 이해를 갖고 참여하는 사람이다.
예술작품은 예술계 일반대중에게 정식으로 소개하기 위해 창조된 일종의 인공물이다.
대중은 그들에게 소개되는 한 오브제를 어느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준비된 상태의 사람들이다.
예술계는 모든 예술계 시스템들의 전체이다.
예술계 시스템은 예술가가 예술계 일반대중에게 예술작품을 소개하기 위한 구조이다.”5)


디키는 규범적인 철학적 방식을 좇아 필요충분조건을 통해 정의를 내렸다.
이런 방식을 본질주의자의 태도라고 한다면 동일한 방식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폭넓게 수용되는 설득력 있는 또 다른 정의을 아서 단토가 제시했다.
스스로 “거듭난 헤겔주의자”라고 칭한 단토의 정의는 일찍이 예술의 종말을 예언한 헤겔의 구절6)에서 비롯된다.
단토는 1995년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행한 멜론 강연에서 예술작품을 규정할 수 있는 두 가지 기준을 제시했는데,
첫째, 그 내용이 무엇에 관한aboutness 것이어야 하고
둘째, 그 내용을 구현해야embody 한다는 것이다.
이는 헤겔이 제시한 i) 예술의 내용, ii) 예술작품의 표현수단의 조건 그 이상은 아니다.
워홀의 식료품 상자와 모리스와 세라의 펠트와 고무조각들이 일상의 오브제들과 외양이 같더라도 그것들이 예술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이 일상의 오브제들의 것들과는 달라야만 하는 것이다.


예술과 철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


예술의 종말이란 위기의 발원지는 독일과 미국이다.
독일에서 미술사학자 한스 벨팅7)이 1983년에 예술사의 종말에 관한 글을 발표했고, 이듬해 미국에서 철학자 아서 단토8)가 사례를 들어서 이를 제기했다.
서로의 생각을 모르는 상태에서 두 사람이 각각 위기론을 제기한 뒤 이는 미국과 유럽에서 가장 떠들썩한 쟁점이 되었으며, 1980년대에 종말이란 낱말이 들어간 책이 이십여 종 출간되었다.
역사의 종말, 현대성의 종말, 미술계의 종말, 지식인의 종말 등등.
종말론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 담론이 예술의 죽음으로 빗나가자 단토는 서둘러 변명하느라 진땀을 빼야했다.
그는 1995년에 자신이 발표한 논문 예술의 종말 앞에 ‘이후’라는 낱말을 덧붙이고 좀더 수정 보완한 뒤 『예술의 종말 이후』를 내놓았다.
이 책은 단토의 말로 후기역사의 시대, 토머스 S. 쿤의 말로 하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시대를 논한 것이다.
당연히 예술이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제기하고 예술이 자연의 모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오래 유지된 예술의 관념은 물론 19세기 중반에 시작된 모더니즘의 내러티브마저 종료되었음을 선언한다.
주지할 점은 예술의 종말이 벨팅과 단토에 의해서 1980년대 중반에 제기되었다고 해서 그때 예술이 종말을 맞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때에야 비로소 그런 자각이 생긴 걸 의미한다.
예술이 종말을 맞은 것은 그보다 20년 전인 1960년대 중반 팝아트의 출연에 의해서이다.


상업미술에 기반을 둔 팝아트가 미술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예술의 종말이 포착된 것이다.
상업미술가들은 상업적 디자인을 복제하면서 모종의 미적 테스트를 통과한 디자인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고 상품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걸 알았다.
1964년 봄 앤디 워홀은 그의 가장 대담한 조각들 - 나무 상자들에 실크스크린을 부착한 것들로 식품점 상자들 브릴로 패드, 하인즈 케첩, 캠벨의 토마토주스, 켈로그의 얇은 옥수수 조각, 그리고 그 밖의 생산품들을 닮게 한 것들 - 을 선보였다.
워홀의 상자들은 그것들의 큼을, 혹은 그것들이 담고 있는 그 생산품들의 거대함을 선언했다.
웨인 코스텐바움은 『앤디 워홀』(2001)에서 그 상자들을 동성애자 워홀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남성다움의 상징물로 본다.9)
팝아트를 주요한 역사적 변화인 예술의 종말로 보는 시각은 팝아트가 하나의 유행으로 종료된 시점에서 지각되지 못했는데, 예술이란 개념이 성립된 르네상스로부터 그 개념 너머로 향하는 또 다른 역사의 시작, 내러티브, 패러다임이란 걸 1960년대에 분명히 지각하기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4.19가 일어난 당시 그것을 혁명으로 지각하기 어려웠던 것처럼.
혁명으로 지각하는 데는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정한 성찰의 시간이 소요된다.
마찬가지로 워홀의 식품점 상자들이 실제의 식품점 상자들과 구별되는 그 내용과 구현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노력은 20년이 지난 1980년대 중반에야 가능했다.
과거를 돌이켜보니 워홀이 훌륭한 목공의 솜씨를 빌려 복제한 식품점 상자들이 지닌 상징적 의미가 엄청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예술의 오브제와 일상의 오브제의 차이가 시각적 견지에서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의 예술작품을 실례로 들어서 가르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그리고 예술작품이 제작되는 데는 특별한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그런 공식이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진 것이다.


단토는 1964년 봄 맨해튼의 이스트 74가 스테이블 화랑에서 워홀의 식품점 상자들을 보고 “워홀이 대단히 높은 수준의 철학적 지성을 가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예술에 대해 아주 최소한의 생각 속에서 사유의 경계들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어느 것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었다”10)고 생각했다.
워홀은 “그의 예술을 공간, 시간, 그리고 구현의 문제들을 통해서” 많은 의문들을 일으켰다.11)
단토는 워홀의 주된 공헌으로 미술사에서 이전에 전혀 성취된 적이 없던 예술적 실천을 철학적 자아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을 꼽는다.
즉 예술작품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필요한 모든 사유들을 위반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예술의 본질을 열어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워홀은 1987년 담낭수술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58세의 일기를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에드먼드 화이트는 워홀의 추도사에 그가 무엇을 했던 간에 “워홀은 철학자가 했을 방식으로 미술을 했다”고 적었다.


단토는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예술과 현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독점했다고 본다.
즉 <브릴로 상자>가 그것을 예술이게 만드는 걸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이 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무엇이 예술의 본질인지를 사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워홀은 예술이 무엇인지를 관람자에게 말하지 않는 가운데 단토의 말로 “부정을 통한 a via negative” 방법으로 예술론을 위한 여지를 열어놓았다.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특정 시대의 예술과 그 시대의 철학 간의 어떤 구조적인 유사성들을 지각해야만 한다”12)고 주장했으며, 최근의 예술과 철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파노프스키가 예측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파노프스키는 한 문화의 다양한 표명들 속에 통일성이 있다고 보았는데, 예컨대 그 문화의 회화나 철학에 영향을 미치는 공통된 기미 같은 걸 말한다.
이런 파노프스키의 기본적인 직관을 확증해주는 것이 과거에는 거의 논해진 적이 없었고, 팝아트, 특히 워홀에 의해서 상징적으로 예술이 종말을 맞은 이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술이 종말을 맞았다는 자각이 생긴 1980년대 중반에서야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예술의 종말 이후, 혹은 후기역사의 시대, 혹은 유럽인의 말로 포스트모던에 와서야 예술과 철학 간의 구조적 유사성을 지각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이것의 시작은 워홀의 식품점 상자들과 같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복제가 어떻게 해서 갑자기 예술과 철학이 기반이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단토는 『브릴로 상자 너머로』(1992)13)를 비롯하여 일련의 저술을 통해서 팝아트가 집단정신을 제공하는 평범한 것들인 일상적인 문화적 경험의 대상들과 아이콘들을 미술로 변용시키면서 변용의 과정을 거쳐 그런 것들에게 선험적인 분위기를 부여한 데 주목했다.
이것 외에도 일반 대중의 해방에 대한 염원과 관련해서 단토는 “1950년대 중반의 철학과 예술은 둘 다 당시의 인간 심리 저 깊은 곳에 있던 어떤 것에 응답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 점이 그것들로 하여금 미국 장면 밖에서는 그토록 대단한 해방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었다”14)고 주장한다.
그는 파노프스키가 언급한 예술과 철학의 구조적 유사성으로 해방력을 꼽았으며, 이런 맥락에서 1960년대의 미국에서의 흑인운동과 여성운동이 절박했던 것과 소련에서 사회주의 영웅들인 레닌과 스탈린에 대한 찬양을 중단된 이유를 “팝이 의식으로 끌어올린 우리 모두 세상에 홀로 남겨져 살아간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누구라도 바랄 수 있는 훌륭한 삶이었다. 그 어떤 사회적 프로그램도 이런 삶과 양립할 수 있어야 했다”15)고 주장한다.


일상성의 찬양


워홀의 복제를 말할 때면 으레 사람들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16)를 선례로 지적한다.
이에 대해서는 우선 레디메이드에 대한 뒤샹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미술사학자 피에르 카반이 1960년대 중반 뒤샹에게 무엇이 레디메이드 사물들 중 하나를 선정하게 했느냐고 물었을 때 뒤샹은 “사물을 선정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보름만 지나면 그 사물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하게 된단 말이야. 무관심한 마음으로 미학적 감성을 가지지 않은 채 사물을 보아야 하네. 레디메이드를 선정할 경우 시각적 무관심으로 그렇게 해야 하고, 동시에 좋고 나쁘다는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선정해야 하네”17)라고 응답했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본질적으로 예술가의 행위에 대한 회의였다.
“좋고 나쁘다는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란 미학적 즐거움의 배제하고 시각적 관심의 결여를 의미한다.
그의 유명한 에피소드인 1917년 뉴욕의 그랜드 센트럴 팰리스에서 독립예술가협회 주최의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는 앙데팡당 전시회에 기어이 소변기인 <샘>을 출품하려고 한 건 선구적인 퍼포먼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가 배척받을 걸 미리 예측하고 그것을 빌미로 예술가의 행위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뒤샹이 그 소변기를 예술작품으로 보존하지 않았으므로 곧 사라졌다.
그가 반미학적anti-aesthetic 문제의식에 일치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뒤샹과 워홀의 차이는 일상사물들이 지닌 일상성에 대한 감동이다.
뒤샹은 소변기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지만 워홀은 그 어떤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했고, 워홀은 일상성을 찬양했지만 뒤샹은 그렇지 않았다.
단토는 뒤샹과 워홀의 본질적인 차이를 자신이 선정한 것 외의 그 밖의 모든 소변기는 왜 예술작품이 될 수 없는가에 대한 질문을 뒤샹이 제기하지 못한 데 반해 워홀은 그런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제기한 것에 둔다.
게다가 기성품의 선정에 대한 기준도 문제로 삼는다.18)
영화를 포함하여 워홀의 전 작품에 나타나는 특성은 반복과 무, 혹은 하찮음nothingness이다.
거기에는 반복되는 이미지 외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 이미지의 의미와 정체성을 묻는 것이다.


동시대인이 이미지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인지되는 하나의 이미지를 성취하는 것을 진정한 명성으로 간주하는 데서 예술 장르의 위기는 가속화되었다.19)
워홀 이후 진정한 명성을 얻는 조건으로 지정된 방식이 초상화이다.
이런 이미지들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이미지 주인공의 개성이 말소되었으므로 그 실제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무, 혹은 하찮은 이미지이지만 이미지의 주인공이 이미지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스타로 각광받는 그런 이미지이다.
워홀은 1967년 한 인터뷰에서 “앤디 워홀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싶다면 단지 표면만을 보라”라고 했다.
예술 장르의 위기는 이런 하찮은 이미지만을 전달하여 진정한 명성을 추구하는 데 있다.



1) Henri Matisse, "Statements to Teriade, 1929-1930", in Matisse on Art, trans. Jack Flam (London: Phaidon, 1972), 58.

2) Heinrich Wolfflin, principles of Art History: The Problem of the Development of Style in Later Art, trans. M. D. Hottinger (New York: Dover Publications, n.d.), ix.

3) No&euml;l Carroll(edited), Theories of Art Today(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2000). Robert Stecker는 “Is It Reasonable to Attempt to Define Art? 예술을 정의하려고 시도하는 게 정당한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예술작품들이 다양한 전통 안에서 다양한 기원들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주어진 전통 안에서의 관련성으로 그것들을 예술작품들로 규정하더라도 그런 정의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그 밖의 문화적 실행들로부터의 예술 전통들을 분류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최초의 예술, 예술의 전통, 예술의 기관을 규정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예술의 기능을 꼽는다.

4) George Dickie, "Defining Art", 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6 (1969): 252

5) George Dickie, The Art Circle: A Theory of Art (New York: Haven, 1984).

6) Arthur C. Danto, After the End of Art: Contemporary Art and the Pale of History, 김광우 역 (미술문화: 예술의 종말 이후), 353 G.W.F. Hegel의 Hegel`s Aesthetics: Lectures on Fine Art에서 인용 “예술작품에 의해서 이제 우리 내면에서 환기되고 있는 건 즉각적인 향유가 아니라 우리의 파단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i) 예술의 내용, ii) 예술작품의 표현수단,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서로에 대해 적합한지 적합하지 않은지의 여부를 우리의 지적 고찰에 종속시키기 때문이다.”

7) Hans Belting은 Das Ende der Kunstgeschichte?(Munich: Deutscher Kunstverlag, 1983)의 증보판인 Das Ende der Kunstgeschichte: Eine Revision nach zehn Jahre(Munich: Verlag C.H. Beck, 1995)에서 의문부호를 빼버렸다.

8) 아서 단토의 논문 “The End of Art”는 Berel Lang이 편집한 The Death of Art(New York: Haven Publishers, 1984)에 실렸고, 단토는 10년 뒤 수정 보완하여 After the End of Art: Contemporary Art and the Pale of History란 제목으로 출간했다.

9) Wayne Koestenbaum, Andy Warhol (A Lipper/Viking Book, 2001) "하인즈 상자는 `세상에서 가장 잘 팔리는 케첩`을 선전하고, 브릴로 상자들은 &#3924;개의 커다란 사이즈의 꾸러미들`을 약속한다. 워홀의 만화속의 영웅들과 같이 그 상자들은 남자다움을 풍자한다: 거대한 크기, 가장 큰 것! 그러나 실제에 있어 그것들은 단지 상자들에 불과하며 그대로 복제한 것이다. 그는 사나이다움이 허식을 부리는 사소한 (악의가 없는) 거짓말임을 시사할 것이다." 이 책은 필자가 번역을 마치고 출판사 푸른숲에 원고를 넘긴 상태이다.

10) Arthur C. Danto, Philosophizing Ar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정용도 역 (미술문화: 철학하는 예술), 93

11) Wayne Koestenbaum, Andy Warhol (A Lipper/Viking Book, 2001) 워홀은 “‘내가 나의 몸속에 존재한다고, 그 밖의 사람들이 그들의 몸속에 존재한다고 어떻게 입증할 수 있으며, 그리고 사람의 몸이 또 다른 사람의 몸에 인접할 때 그 사람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길까?’, ‘그것이 사라질까 아니면 그것의 구조를 바꿀까?’, ‘두 몸이 결합되었을 때 시간이 속도를 더할까, 그리고 몸이 홀로 있을 때 시간이 속도를 늦출까?’, ‘몸들은 죽었을 때만 부동하는 것일까?’, ‘출몰과 복제를 통해서 망자가 움직일 수 있을까?’, ‘소년이 소년을 좋아하는 것일까?’, ‘소녀가 소녀를 좋아하는 것일까?’, ‘카테고리들 - 어머니, 야바위꾼, 스타, 열광자 - 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사랑이 순간이며 내가 그것의 일부일까?’”라고 질문하는 것들을 통해서 몸을 자극한 것인지, 혹은 몸에 무관심한 것인지에 대한 그의 형이상학적 연구의 중심에서 생각하는 것으로 사용했다.

12) Erwin Panofsky, studies in Iconology: Humanistic Themes in the Art of Renaissance(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62)
파노프스키는 한 시기의 내적인 정신을 함께 규정하는 예술과 철학 간의 이런 부인할 수 없는 반향들의 연구에 ‘도상학iconology’이란 명칭을 부여했다.

13) Arthur C. Danto, Beyond the Brillo Box: The Visual Arts in Post-Historical Perspective (The Noonday Press, 1992) 이 책은 현재 필자가 번역 중이다.

14) Arthur C. Danto, After the End of Art: Contemporary Art and the Pale of History, 김광우 역 (미술문화: 예술의 종말 이후), 251

15) 같은 책, 251

16) 김광우, 뒤샹과 친구들 (미술문화, 2001), 120 레디메이드란 말이 처음 사용된 건 1916년이었다. 뒤샹은 피에르 카반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잘 들어두게. 난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만들기를 바라지 않았네. ‘레디메이드’란 말은 내가 미국으로 오던 해인 1915년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어. 그것은 재미난 말이지만 내가 자전거바퀴를 의자에 거꾸로 세울 때는 레드메이드란 말이나 그 어떤 말도 없었어. 그저 오락에 불과했지. 특별한 이유라든가, 사람들에 보여주려 하거나, 또는 무엇을 설명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었어. 전혀 그렇지 않았어.”

17) 같은 책, 121

18) Arthur C. Danto, Philosophizing Ar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정용도 역 (미술문화: 철학하는 예술), 108 “소변기는 근대사회에서 가장 견디기 힘들 정도로 방어되는 경계를 지닌 어떤 것들과 관련된 상당히 부담스러운 오브제로서, 말하자면 성적인 차이들, 삶의 나머지 부분들로부터 제거된 과정들의 분리성, 그리고 프라이버시, 위생 등의 것들과 연관되는 모든 것들이다. 반대로 <브릴로 상자>는 금지된 것들이나 피할 수 없는 것들과는 그리 관련되지 않는다. 그것은 공적이고, 지루하며, 명백하고 재미없다. 재미없는 관심과 일상성의 특별함을 발견하는 것은 워홀이 가지고 있는 인성(단지 작가로서뿐만 아니라)의 일부이다.”

19) 같은 책, 118 “진정한 불명성은 인간을 능가해 지속되는 이미지를 성취하는 것이며, 무한히 일상적인 정서의 부분으로 지속되는 - 찰리 채플린, 존 F. 케네디, 혹은 워홀 자신처럼 - 이미지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의 자화상들은 그의 이미지의 초상화들이며, 그런 면에서 그의 초상화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마릴린 초상화들이 거의 ‘실제의‘ 그녀라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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