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보이즈의 신화




보이즈의 신화는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의 전투기가 러시아 군인들의 포격을 맞고 크리메아에 추락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라디오 기술자로 훈련을 받았지만 1941년 코니그라츠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았다.
전투기 조종사로 전쟁에 참여한 그는 포격으로 추락한 후 의식을 잃고 눈 속에 며칠 묻히고 말았다.
독일 군인들이 그를 구출하려고 인근 지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눈 속에 처박힌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구출작전을 포기했다.
보이즈는 냉동된 상태에서 거의 저세상 사람이 되었는데 행운의 여신이 그를 살려주었다.
보이즈는 훗날 회상했다.


“그때가 1943년 겨울이었습니다.
JU-87기를 타고 정찰 중이었는데 러시아 군인이 쏜 대공포를 맞고 폭풍 속에 추락했습니다.
전투기는 곧 화염에 싸였고 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요.
눈 속 깊이 파묻혔고 온 몸이 언 상태였어요.
난 ‘이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타타르족이 나를 발견했습니다.”


타타르족은 그를 자신들의 캠프로 데려다가 그의 몸에 지방을 덮고, 펠트로 몸을 말아서 체온이 회복되도록 했다.
타타르족은 크리메아의 유목민으로 러시아와 독일 국경 부근에 거주하는 부족이다.
그는 훗날 회상했다.


“그들은 나를 가족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었어요.
그래서 난 캠프에서 그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활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독일 군인들이 날 구출하려고 독일 국경 부근을 샅샅이 뒤졌다는데 눈 속에 처박힌 날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난 의식을 잃은 상태였어요.
의식을 회복한 건 12일이 지난 후였어요.
내가 기억하는 건 전투기가 추락할 때 ‘낙하산을 펴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걸 알았어요.
포격당하고 2초 내에 낙하산을 펴고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보통 때 나는 안전벨트를 하지 않고 늘 몸이 자유로운 상태가 되게 했는데 유사시에 낙하산을 펴고 떨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안전벨트를 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어요.
난 지도를 휴대하지 않았는데 인근지역을 잘 안다고 오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의식을 잃은 나를 타타르족이 발견하여 그들 캠프로 옮겼습니다. ...
두개골이 깨어지고, 턱뼈가 부러졌어요.
눈 속에 완전히 파묻힌 상태였습니다.
타타르족이 날 발견한 건 수일이 지난 후였지요.
내가 기억하는 목소리는 ‘보다 voda'였는데 그들의 말로 ‘물’이란 뜻입니다.
펠트로 된 천막과 코를 찌를 듯한 얼얼한 냄새가 나는 치즈 그리고 기름과 우유가 보였습니다.
그들은 지방덩어리를 내 몸에 덮어 몸이 훈훈해지도록 했으며, 펠트로 몸을 둘둘 말았습니다.
훈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펠트로 만 것인데 체온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한 조치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던 때가 늘 기억에 생생하며, 내게 늘 작용한답니다.
그 후 독일 군인들이 나를 발견하여 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그때의 체험은 보이즈의 인생을 180도로 바꾸어놓았다.
예술가가 되게 한 것이며, 지방 펠트를 조각의 재료로 사용하게 한 것이다.
보이즈는 조각의 재료로서 지방과 펠트가 타타르족이 자신에게 사용한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이 스스로 사용했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말을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보이즈를 유명하게 만든 건 이 두 가지 재료였다.
그는 타타르족에게 평생 빚을 지고 말았다.


우리는 편견 없이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를 천재라고 미리 생각해서도 안 되지만 야바이꾼이나, 떠벌이로 단정해서도 안 된다.
평론가나 미술사학자들의 주장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를 바라보는 건 위험한 방법이다.
그가 한 말에서 의식구조와 미학을 알아보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다.
우리 스스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가 한 말로 충분하다.
그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자신이 처한 시대에 실존의 문제와 씨름한 진지한 인간이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며, 그가 어째서 예술이야말로 새 인생을 창조할 수 있는 자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술만이 인생의 궁극적 자원이라고 믿기까지 그에게 나름대로 다양한 방법의 탐구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예술은 당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의 산물이므로 예술가가 처한 시대를 알면 이해 못할 예술가는 없다.


어려서부터 보이즈는 시, 철학, 문학, 과학, 대중전통 문화, 연금술과 점성술 등에 관한 책을 읽었다.
특히 낭만주의의 대가들 괴테, 쉴러, 노발리스 등의 저서를 탐독했으며, 신비주의자 루돌프 스타이너의 신지학에 심취했다.
보이즈는 전통주의 예술의 개념을 버리고 철학, 문학, 과학, 종교의 합성으로서의 폭넓은 의미로서의 예술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되었는데 예술의 만능을 믿었기 때문이며, 그에게 예술은 개념이라기보다는 신념에 가까웠고, 거의 종교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새 인생의 자원으로 창조성을 꼽았으며, 창조성으로부터 존재의 상황을 확대해나갔는데 창조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창조”라는 말은 그의 미학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개념이다.


보이즈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이다”라고 했다.
그의 말을 많은 사람이 비평했는데 창조의 개념을 이해하면 그의 말을 오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가 “모든 사람이 예술가이다”라고 했다고 해서 미쟁이 이모 씨가 화가이고, 목수 서모 씨가 조각가라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본 청소부가 웬만한 시인보다도 훌륭한 시인이었다고 말했는데 시를 한 줄도 쓰지 않은 청소부, 어쩜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청소부를 가리켜 훌륭한 시인이라고 말한 데서 그가 시인을 시의 범주가 아닌 일반적 의미의 예술의 범주 안에서 이해했음을 본다.
일반적 의미의 예술이란 물론 창조가 가능한 모든 영역을 뜻하는 것이다.
보이즈는 예술을 기존의 관념을 넘어서 창조에 근거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미쟁이 이모씨의 벽돌 쌓는 기술과 목수 서모씨의 나무 다루는 솜씨는 예술가의 작품 만드는 기술과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분야에서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다.
보이즈는 창조성 여부에 따라서 예술가의 자격을 판단하려고 했다.
그는 예술가의 90% 가량이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말했는데 기회주의자 예술가들에 비한다면 미쟁이, 목수, 또는 청소부의 창조성이 뛰어난 예술을 칭찬하지 못할 이유가 없고, 그들을 예술가라고 부르는 것이 문제될 것도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는 그의 주장은 개인의 잠재적 창조성의 개발이 시급함을 의미한 것이지 말 그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로서의 예술가라는 뜻은 아니다.
마드리드의 청소부가 시인이라고 말할 때, 감자를 재배하는 농부가 예술가라고 말할 때, 그는 청소부와 농부의 창의력을 지적한 것이며, 반면 대부분 기회주의자 예술가들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보이즈는 감자 껍질을 벗기는 것조차 의식 있는 행위라면 예술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만큼 창조성이 중요하다는 걸 역설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창조성이 있다고 믿었으며, 문제는 창조성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도록 그들을 교육시키느냐 하는 데 있었다.
그는 예술가들이 주장하는 자신들의 특수계급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특수계급이 사회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며, 창조성을 발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술가이기 때문에 특수계급이 있을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창조성과 자유는 동일한 의미였다.
자유는 그에게 첫째, 개인이 스스로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행동이었고, 둘째, 주변 사람들 행동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의미했다.
그는 조화로운 관계를 더욱 강조했다.
개인과 대중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가치 있는 사회적 관계로서 보이즈는 개인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대중에게 소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그는 개인의 자유는 늘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병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자유가 창조이고, 창조가 곧 자유였다.
그는 창조성을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생각, 느낌, 그리고 의지였다.
이 세 가지는 그의 조각이론이 되었다. 그에게 창조성이란 이 세 가지를 성취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첨가해야 할 중요한 점은 그가 창조성을 사람에게 한정된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고 동물과 식물에게도 적용한 것인데 창조성을 에너지로 이해한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신비주의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이 그를 현대판 무당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그의 폭넓은 창조성의 개념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에게 정신은 에너지였으며, 에너지 혹은 정신을 늘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논리적으로 유물론을 비난하게 된 것이다.


보이즈는 정신적 진화를 강조하면서 관념적 유물론을 비판했고, 대신 현상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사람들이 지혜로워지기를 바랐으며, 이런 일이 교육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는 전통으로부터 유산 받은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전통이 유물론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교육방법은 혁신적이었다.
그는 선생은 다 안다는 듯이 가르치기만 하고 학생은 아무 것도 모르는 듯이 그지 앉아서 선생의 가르침을 듣는 전통주의 방법을 배척하면서 선생과 학생이 함께 토론하고 탐구하는 새로운 교육을 주장했다.
이는 그에게 조각을 가르친 에발트 마타레Ewald Matare(1887-1965)가 제안해서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물의를 일으킨 방법이기도 한데 보이즈는 마타레의 혁신적인 교육방법을 받아들였다.
보이즈는 197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소설가 하인리흐 뵐Heinrich Boll(1917-85)과 함께 창조성과 상호징계 연구를 위한 자유 국제대학Free International University for Creativity and Interdisciplinary Research을 창설하고 공동명의로 선언문을 발표했다.
두 사람은 창조성이 사회를 바꾸고 진화시키는 열쇠라고 주장하면서 창조성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예술가라고 주장했다.
보이즈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예술을 행할 수 있으며, 새 사회 조직을 위해서 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창조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는데 창조성이 국가의 수입이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