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용기를 준 잭슨 폴록



다음은 Naver에서 청탁한 원고입니다. `트렌드 지식창고`를 새로이 만들면서 검색순위 1위를 차지한 잭슨 폴록에 관해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2006년 11월 2일, 뉴욕타임스는 컬러 스파게티를 엉클어놓은 듯한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56)의 회화 <넘버 5>(1948)가 멕시코의 금융인 데이브드 마르티네즈에게 1억4천만 달러에 팔린 것을 보도하면서 이는 얼마 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1907)이 1억3천5백만 달러에 팔린 기록을 갱신했음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클림트의 초상화가 기록을 세우기 전까지만 해도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1881-1973)의 <파이프를 든 소년 Garcon a la pipe>(1905)이 2004년 5월 5일 뉴욕의 소더비경매장에서 1억980만 달러에 팔려 세계 경매사상 최고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피카소는 자타가 공인한 한 세기에 나올까 말까한 미술가로 92해를 사는 장수를 누리면서 화화를 대량생산했더라도 세계경매시장을 누비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20세기 미술에 끼친 영향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클림트는 어떠한가?
주로 부유층의 아낙의 초상을 당대에 유행하는 최고의 의상을 걸친 모습에, 우아하고 성적으로 매력적인 포인트를 차고 넘치게 부여하여 아낙으로 하여금 자신의 저택 거실에 걸어놓고 방문객들에게 미모를 뽐내게 해주었다.
게다가 비싼 황금을 넉넉하게 칠해 현대판 비잔틴 성상으로 만들어 종교적인 거룩한 분위기까지 만들었다.
거의 실제 인물의 크기에 비싼 황금을 발랐으므로 불과 두 달 전인 9월 18일에 1억3천5백만 달러에 팔렸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폴록의 스파게티가 두 사람을 제치고 정상에 오른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경악해하는 분위기이다.
스파게티가 초상화를 누르다니!
피카소와 클림트의 초상화는 분명 많은 시간을 요한 그림들이다.
그러나 폴록의 스파게티는 하룻밤에 그린 것이다.
화가의 인건비로 봐도 폴록의 작품에 놀라운 비용을 지불한 것이다.
그가 네이버의 검색순위 1위를 차지한 건 당연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그의 작품을 5달러 주고 샀다는 미국 할머니의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폴록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5달러짜리 스파게티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곧 진품인지 판명 나겠지만 혹시 할머니가 끓인 스파게티는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왜냐면 피카소와 클림트의 그림을 모방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폴록의 그림을 모방하기란 너무나도 쉽기 때문이다.


잭슨 폴록의 생애를 짧게 정리하면, 1930년 가을 서부로부터 열여덟 살 시골뜨기의 모습으로 뉴욕에 왔다.
1939년에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았고 또한 정신질환 치료를 18개월 동안이나 받았다.
우수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1942년부터였으며, 운 좋게도 다음해에 개인전을 열었다.
1942년 10월 20일에 뉴욕에 금세기 미술 화랑을 연 페기 구겐하임이 행운을 그에게 선사한 것이다.
폴록의 개인전을 뉴욕의 유명 잡지들이 일제히 보도했으므로 스타의 탄생이 단번에 이루어졌다.
그는 13년 동안 작품을 제작했고 1956년 8월 11일 술에 취한 채 뚜껑을 연 올드스모빌을 운전하다가 커브길에 속력을 줄이지 못해 전복되어 죽었다.


폴록은 벌써부터 인기를 누려야 마땅했을 화가였다.
그럴 기회가 얼마 전에 우리에게 있었지만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폴락’이란 제목의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된 지 얼마 안 되어 흥행실패로 퇴출되었다.
그의 이름을 폴록이 아닌 Pollack으로 발음한 것도 문제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이름으로 소개한 것이 흥행실패의 요인이었다.


폴록의 그림을 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소묘를 할 줄 몰라도 돼. 붓을 살 필요도 없어. 물감깡통에 막대기를 넣었다가 꺼내 기분 내키는 대로 캔버스에 뿌리기만 하면 돼. 그것도 귀찮으면 깡통에 구멍을 내 이리저리 뿌리면 돼.”
그렇다, 그렇게 그리면 된다.
누구라도 폴록과 같은 그림을 결과물로 획득할 수 있다.
필자도 그런 실험을 해봤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경매장에 가서 <넘버 5>와 같은 그림을 1천3백13억 원의 돈을 지불하고 살 필요가 없다.


소묘할 줄 모른다는 소리를 폴록은 친구들로부터 들었고 그도 그 점을 인정했으므로 한때 회화를 포기하고 조각가가 되려고 했다.
인간은 불완전해야 노력하게 된다.
폴록은 소묘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적 묘사의 그림을 그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사물을 재현하는 그림 대신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기로 한 것이다.
감정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서 사실적 묘사를 할 줄 몰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격렬한 감정을 전달하는 데는 격렬한 행위가 따른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격렬한 행동을 취했다.
어려서 서부에서 본 대로 인디언이 춤을 추며 모래에 그림을 그리듯이 그런 식으로 바닥에 늘어놓은 캔버스 주위를 신명을 내 돌아가며 물감을 뿌리고 떨어뜨렸다drip-and-pour.
따라서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가 그의 그림을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이라고 명명한 건 매우 적절했다.
미리 생각을 하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목을 붙일 수 없어 <넘버 1>(1950), <넘버 7>(1951), <넘버 28>(1950) 등 숫자를 적어 단지 작품을 구분했을 뿐이다.


폴록의 그림이 왜 유명할까?
그가 처음 물감을 뿌리고 떨어뜨리는drip-and-pour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아니다.
그가 처음 실행에 옮긴 것이 아니다.
그는 말했다.

“기법에 관해 어떤 이론도 갖고 있지 않다. 기법은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 절로 생기지만 기법이 무엇을 말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내면의 감정을 화산처럼 격발시켰기 때문에 유명해진 것일까?
아니다.
그런 회화는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의 행동이 20세기 후반에 끼친 영향 때문이다.
폴록이 타계하고 3년 후 앨런 캐프로Allen Kaprow는 해프닝이란 장르를 창안해 냈는데, 그는 폴록이 캔버스 주위를 돌아가면서 그림을 그린 데서 아이디어를 이끌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그려진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의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미술작품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캐프로는 폴록의 전례를 좇아 즉흥적으로 행동했는데 그것이 해프닝의 시작이 되었다.
해프닝은 곧 퍼포먼스라는 또 다른 장르를 잉태했다.
해프닝이 즉흥적 행동으로 관람자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인 데 비해 퍼포먼스는 각본을 갖고 계획대로 행동하면서 관람자의 참여를 요구하기도 요구하지 않기도 하는 걸 말한다.


다음은 설치미술Installation에서 폴록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잡동사니들을 화랑이나 미술관 바닥에 어지럽게 흩뜨려놓는 설치는 2006년 11월 1일에 고가에 팔린 폴록의 <넘버 5>와 같은 작품을 3차원으로 한 것이다.
현대인의 복잡한 정신상태를 나타내는 그런 설치는 폴록에게서 이끌어낸 아이디어인 것이다.


폴록이 차세대 미술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소묘를 못해도 화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예이다.
소묘만이 회화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화가가 되기 위해 미술학교로 진학하여 소묘를 배우느라 고심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에 의해서 회화가 사물에 대한 모사라는 고대 그리스인으로부터 강요된 관념이 박살났고, 회화가 붓으로 물감을 칠하는 것이라는 오래된 관습도 깨졌다.
회화는 내면세계를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이므로 어떤 방법으로라도 반영하여 타자에게 보여줄 수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폴록이 이런 점을 의도했는지 아니 했는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를 통해서 후세 사람들은 그런 점을 깨달은 것이다.


폴록은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에게 말했다.

“저는 제 그림이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그저 그려질 뿐입니다.”

폴록의 회화방법에 호기심을 가진 어느 여인이 폴록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생님은 언제 그림이 완성되는지 아십니까?”

폴록이 여인에게 반문했다.

“당신은 언제 당신의 섹스가 완성되는지 아십니까?”

뉴욕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은 여인과 같은 질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게 묻는 건 실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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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음악적 해프닝


대한항공 기내 잡지 Beyond에서 요청한 글입니다.
A4 용지 두 장에 한정되고 백남준의 해프닝에 관한 요청이라서 내용이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경대를 졸업하고 작곡을 공부하기 위해 백남준이 뮌헨으로 향한 건 1956년이었다.
2년 뒤 그의 운명을 바꿔놓을 존 케이지이가 다름슈타트에서 매년 여름에 열리는 국제신음악 페스티벌에 연사로 초청되어 왔다.
일상에 존재하는 온갖 소음을 음악에 도입한 케이지와의 만남은 전통음악에 만족하지 못한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케이지는 강의를 통해 불확정성indeterminacy을 강조했는데, 이는 비의도적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무목적 무목적성 purposeful purposelessness’으로 작품의 완성보다는 그 과정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예측될 수 없으므로 실험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일한 것이었다.
물리적 공간과 시간만이 실재성을 띠며, 시간과 공간에 의존하는 케이지의 불확정성은 ‘지금 여기’라는 현장에 관람자를 참여시키는 해프닝의 개념이 되었다.
관람자는 방관자가 아니라 개념적으로 해프닝에 가담하는 참여자가 되며, 행위로 가담하지 않더라도 현장에 현존하는 것만으로도 참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백남준은 기상천외한 음악적 해프닝으로 유명한데 다다적 돌출행위였다.
1959년 11월 뒤셀도르프의 갤러리22에서 스승 케이지에 감사를 표한 <케이지에게 바침: 테이프리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을 선보였다.
깡통을 발로 차서 유리판을 깨고 그 유리가 계란과 장난감자동차를 치도록 만들고, 피아노를 공격하기 위해 돌진하고, 테이프리코더에서는 수탉이 놀라서 내는 소리, 모터사이클의 소리와 함께 베토벤의 <교향곡 5번>, 독일 가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 외에도 시끌벅적한 복권당첨 장면 소리, 장난감 소리, 사이렌 소리 등이 흘러나왔다.
스승은 참석하지 못했지만 작곡가 윤이상이 관람했고, 훗날 각별한 사이로 진전될 요제프 보이스도 관람했다.
전위예술가들 중 일약 선두주자로 부상하게 만든 이 해프닝으로 백남준은 놀라운 파괴력을 가지고 악기를 공격하는 행위음악의 전기를 열었다.


쾰른시대의 악명 높은 작품은 1960년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에서 선보인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습작>으로 쇼팽의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던 그가 갑자기 무대에서 내려와 관람하던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고 옆에 앉아 있던 튜더에게 샴푸세례를 한 뒤 사라졌다가, 근처 술집에서 전화로 해프닝이 종료되었음을 알린 것이었다.
넥타이를 자른 행위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남성우월주의에 손상을 가한 것이지만 익살이 내포되어 있어 관람자를 선동하는 데 더 비중을 둔 것으로 나타났다.
케이지와 튜더에게는 공격을 가했으면서도 함께 앉아 있던 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은 공격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더 이상 슈토크하우젠과 전자음악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남준의 해프닝을 위해 자신의 아틀리에를 공연장으로 개방한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는 나중에 슈토크하우젠의 아내가 되었다.


백남준은 케이지의 제자들로 구성된 플럭서스Fluxus에 가담했는데, 플럭서스는 1962년 독일에서 형성되어 1970년대 초까지 활약했다.
예술과 인생을 연결시킨 플럭서스의 강령은 “부르주아적인 병과 죽은 미술을 이 세계에서 몰아내고 혁명적인 조류를 미술에 촉진하며 살아 있는 미술과 반미술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플럭서스의 퍼포먼스는 형식과 표현이 내용과 인지와 동일해야 하고 반복될 수도 없으며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플럭서스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한 보이스는 백남준보다 11살 많았고 백남준의 성을 독일식 발음으로 ‘파이크Paik’라고 불렀다.
백남준은 1986년 보이스가 타계했을 때 추모제를 지내며 자신이 성공을 거둔 것이 무명시절 보이스를 만난 덕택이라고 말할 정도로 보이스는 그에게 동료 중 동료였다.


플럭서스 후기에 백남준과 샬럿 무어맨의 해프닝은 비디오아트의 영역으로 이전되면서 좀 더 진전된 복합매체의 공연이 되었다.
<전자와 예술과 비빔밥>이란 제목의 수필에서 백남준은 복합매체를 비빔밥에 비유하면서 비빔밥의 본질은 그것이 콩나물도 숙주나물도 표고도 시금치도 아니란 점에 있다고 역설했다.
백남준과 무어맨은 1965년 보니노 갤러리에서 선보인 2인조 해프닝에서 <성인만을 위한 첼로 소나타 1번>을 소개했는데, 무어맨은 ‘첼로 조곡’을 연주하면서 거의 누드가 될 때까지 연주와 옷 벗기를 계속했다.
같은 해에 발표한 <생상스 테마의 변주곡>에서 그녀는 좀 더 과격한 행위를 보여주었는데, 생상스의 ‘백조’를 연주하다말고 옆에 준비된 물탱크로 기어 올라가 물속에 몸을 담그고 내려와 젖은 몸으로 연주를 계속했다.
이를 통해 백남준은 섹스와 연결된 음악을 보여주려고 했다.
무어맨은 백남준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우발적인 노출이 문제가 되어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음악과 섹스를 주제로 한 이 퍼포먼스에서 무어맨은 바늘이 주렁주렁 달린 비키니차림으로 무대에 나와 첼로를 연주하고, 3장 아리아에서는 머리에 헬멧, 상체에는 미식축구 유니폼을 걸치고 하반신을 완전히 벗은 채였다.
4장에서는 완전누드로 첼로를 연주했다.
이 퍼포먼스는 경찰관의 개입으로 중단되었고 백남준과 그녀는 체포되었다가 이튿날 풀려났다.
공연에 관한 외설시비를 뉴욕의 법정에서 가리게 되었다.
예술에 있어서 표현의 자유를 확보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두 사람을 적극 후원했다.
록펠러 주지사는 외설과 표현의 자유는 다르다는 최종 의견을 발표했으며 이 소식이 <뉴욕 타임스>에 대서특필되면서 두 사람은 뉴욕 화단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많은 예술가와 이론가들이 백남준의 편에 섰다.
재판에서 승소한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유흥업소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나이트클럽에 출연하신다면 현찰 5천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백남준의 해프닝은 연극적 음악, 혹은 음악적 연극으로 그는 케이지를 만난 뒤 유럽 음악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고 해프닝을 통해 음악과 인생을 연결시키는 데 앞장섰다.
“문학과 시각예술과는 달리 음악에서는 성적 영역이 개발되지 않았다”면서 그는 음악에 에로티시즘을 도입하여 음악의 시각화작업을 완수하려고 했으며, 여체의 노출과 성적 요소로 관객을 자극하여 그들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가려고 했다.
1969년 뉴욕의 하워드 와이즈 갤러리에서 선보인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에서 무어맨은 3kg이나 되는 TV브라를 걸치고 첼로를 연주했다.
그녀의 가슴에 장착된 2대의 작은 화면브라에서는 현재 방영되고 있는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이나 비디오테이프 또는 카메라가 있는 폐쇄회로 설치를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다.


2년 후 백남준은 <TV첼로와 비디오테이프를 위한 협주곡>을 발표했는데 무어맨이 3대의 모니터를 플렉시 유리상자 안에 넣은 TV첼로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백남준은 무어맨의 몸을 기계 옷으로 가리게 하고 기계의 인간화를 통해 인간과 과학과의 조화를 보여주려고 했다.
백남준은 엿보기 취미를 무어맨의 성적 매력에 주목시킴으로써 그녀를 섹스의 대상으로 이용한다는 비난을 종종 받았지만 이런 비난은 그녀가 순수 예술행위를 하다는 걸 간과한 것이었다.
퍼포먼스 기간 동안 그녀는 작곡의 일부로 정해진 틀 안에서만 행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플럭서스 전통을 좇아 예술의 표현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며, 기꺼이 백남준의 작품에서 한 요소로 연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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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대한항공 기내잡지 Beyond 2월호에 보낸 원고입니다.
한정된 지면에 쓰느라 워홀을 제대로 다루기 어려웠지만 그런대로 정리했습니다.


왜 앤디 워홀인가?


1960년대에 들어서 대중은 막강한 힘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안정을 갖춘 중산층의 폭이 넓게 형성되면서 대중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향유하게 되었다.
월남전을 반대한 반전운동은 유럽과 미국에서 대중의 힘이 정치적으로도 막강함을 증명해보였다.
대중은 문화의 소비자가 되었으며, 문학, 영화, 음악은 물론 미술에서도 대중을 위한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대중적이어야만 성공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팝아트는 한 마디로 소비주의의 산물로 소비주의의 미덕은 다수가 동일한 것을 소비하는 것이다.


팝아트는 모더니즘의 종식을 선언한 운동이며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출발을 알린 운동이다.
모더니즘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한 순수예술이다.
예술이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민족적, 양식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은 소수의 엘리트의 취향을 위한 예술이었는데, 예술의 소비자로서의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엘리트의 취향은 배척되고 다수의 대중 취향을 위한 예술이 등장한 것이다.
모든 것이 popular해야지만 했고 팝아트란 Popular Art의 약자이다.
팝아트는 영국에서 먼저 시작되었지만 꽃을 피운 곳은 미국이며 팝아티스트들 가운데 워홀이 정상에 올랐다.
팝아티스트에게는 대중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재능이 필요하고 워홀에게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영화 <내가 왜 앤디 워홀을 쏘았나>는 워홀의 인간적인 모습을 잘 표현했다.
워홀의 작업실 ‘공장’에 출입하던 발레리 솔라니스가 자신에게 지나치게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워홀을 저격한 전후 과정을 다룬 영화인데, 어눌하게 말하며 파티를 좋아하는 워홀을 보면 예술가는 매우 스마트한 모습일 거라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에게는 실망을 안겨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감독은 그를 정확하게 묘사했다.


워홀을 정상에 올려놓는 데 기여한 것들로 워홀의 개성적 헤어스타일과 의상, 실크스크린에 의한 대량복제, 슈퍼스타들을 평범한 인물로 끌어내리기, 영화제작 등을 꼽을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보다도 1964년 뉴욕의 스테이블 화랑에서 선보인 훌륭한 목공 솜씨로 제작된 400개의 유명 상품들을 포장한 상자들, 특히 <브릴로상자>가 그를 팝아트의 정상뿐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마르셀 뒤샹이 기성품을 미술품이라고 주장하며 선택도 창작의 영역임을 말하려고 한 데 반해 워홀은 기성품을 선택했을 뿐 아니라 대량으로 생산해냈다.
이는 과연 팝아트의 정신이다.
그의 브릴로상자는 슈퍼마켓에 있는 브릴로상자와 똑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슈퍼마켓에 있는 브릴로상자는 미술품이 아닌 데 비해 스테이블 화랑에 전시된 브릴로상자가 미술품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미술품은 스스로 미술품임을 지시하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워홀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복제를 하더라도 왜 복제를 하는지 그 의도가 밝혀져야 하는 것이다.


<브릴로상자>가 지닌 의미는 미술품과 실재 사물 사이의 차이를 순수 시각적 견지에서 이해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이며, 미술품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모더니즘의 패러다임이 붕괴된 것이다.
모더니즘은 19세기 중반 회화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음으로써 시작되었다.
워홀이 후세에 끼친 영향은 미술품이 어떠해야 한다는 특별한 방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브릴로상자>를 통해 보여준 것이다.
그에 의해서 모든 것이 미술품이 될 수 있게 되었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이보다 더 큰 충격적인 영향이 과거 서양미술에 없었다.


도판설명

워홀의 공장(108):
워홀은 1963년 12월 맨해튼 231 이스트 47번가에 새 작업실을 얻었는데, 과거 공장으로 사용되던 그곳에는 엘리베이터와 공중전화도 있었다.
그곳을 ‘공장’이라고 불렀다. 워홀의 조수가 벽돌로 된 벽에 은색 스프레이를 뿌려 평편하게 보이도록 하고 천정으로부터 내려온 아치 세 곳에 알루미늄 호일을 부착했으므로 방안이 온통 은색으로 빛났다.
책상, 의자, 복사기, 화장실, 마네킹, 공중전화까지 모두 쇠붙이 같은 은색으로 통일하고 바닥까지도 은색을 칠했으므로 그곳에 들어서면 다른 차원의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을 주었다.

<내가 왜 앤디 워홀을 쏘았나>(154, 156):
워홀은 1968년 6월 3일에 저격당해 콜럼버스 병원으로 옮겨졌다.
워홀은 7월 28일에야 퇴원했다. 사실주의 화가 앨리스 닐은 워홀을 문병 갔다가 총상을 입은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구두>(7):
영화배우 자자 가보의 신발을 그린 것으로 워홀은 여배우가 신는 굽이 높고 장식적인 구두를 환상적인 느낌을 주도록 묘사했다.
선의 유용함을 누구보다도 잘 안 그는 순수미술에서 느끼는 고상한 감각을 상업미술에서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라벤더 빛 재난(전기의자)>(107):
이 작품은 사람을 살해하는 의자가 두려운 물체임에도 불구하고 붉은색으로 인해 관람자에게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이런 아이러니는 워홀의 작품에 흔히 나타나는 요소이다.

<브릴로상자>(124):
워홀은 슈퍼마켓에서 가져온 브릴로 비누, 모트 사과주스, 켈로그 콘플레이크, 델몬트 복숭아통조림, 캠벨 토마토주스, 하인즈 케첩 등 유명 상품들의 상자를 목수로 하여금 같은 크기로 수백 개 만들도록 했다.
상자가 만들어지자 실크스크린으로 상표를 제작해 겉면에 붙였다.
이렇게 만든 상자들을 한곳에 쌓아놓으니 식품도매상이라도 차린 것 같았다.

<롤링 스톤즈>(153):
실제 지퍼가 달린 도발적인 재킷이다.
이 앨범은 4월에 시판되어 2주 만에 50만 장이나 팔렸다.
워홀은 돈을 조금밖에 받지 못했다고 투덜대면서 다음부터는 한 장에 50센트를 받아야겠다고 말했다.

<꽃>(160):
워홀은 실크스크린으로 다량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고 동일한 작품을 다량으로 생산하는 것도 팝아트 정신에 속한다.
<꽃>을 250점 만들어 한 점에 3천 달러에 팔았다.
이 가격은 마를린의 초상화 가격에 비해 여섯 배나 비쌌다.
1970년에는 판화가 붐이라서 워홀도 이때 꽃그림을 다시 제작했다.
그래서 미술시장에 그의 꽃그림이 흔한 것이다.

<자화상>(205, 206):
요제프 보이스의 초상화에 사용한 카무플라즈를 자화상에도 사용했다.
<자화상>은 1986년 8월 런던 앤소니 도파이 화랑에서 선보였다.

<캠벨 수프통조림>(75):
워홀은 어렸을 적에 늘 캠벨 수프를 먹었다.
캠벨 수프의 수프통조림 시장점유율은 80%에 달했다.
워홀이 1962년 로스앤젤레스의 페러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시한 32점 모두 캠벨 수프통조림이었다.
페러스의 라이벌 화랑은 진열장에 80-90개의 실제 캠벨 수프통조림을 쌓아놓고 “여기서 통조림을 사십시오. 1달러에 5개 드립니다”라고 선전하여 워홀의 전시회를 망치려고 했지만 오히려 전시회를 널리 알리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캠벨 수프통조림>은 1997년 뉴욕의 소더비 경매에서 예상 낙찰가 150-250만 달러를 훨씬 넘어 352만 달러에 팔렸다.

<2달러 지폐>(91):
여자 화상 일레노는 워홀에게 2달러 지폐를 주며 그것을 그린다면 전시회를 열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작품은 <캠벨 수프통조림>, <코카콜라 병>, <마를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과 마찬가지로 반복해서 그린 것이지만 고의로 엷은 색조를 사용하여 하나하나를 개별적인 물체로 존재하도록 조금씩 다르게 그림으로써 반복효과를 회화적 요소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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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예술의 전당 내 한가람미술관 3층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추상표현주의에 관해 공부하기 전에 다다와 초현실주의를 미리 알아두어야 한다.

다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16년 뉴욕과 취리히에서 다다 운동이 처음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다다는 전쟁의 야만성에 환멸과 혐오감을 느끼고 전쟁을 가능하게 만든 전통적인 사회 가치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일어난 젊은 시인, 작가, 예술가, 음악가들의 운동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자살 직전에 놓인 문화를 냉소와 풍자로 비웃었다.
다다주의자들은 예술의 전통을 공격했는데 전쟁 이전의 아방가르드 경향까지도 그 대상이 되었으며, 반예술의 풍자적 패러디를 통해 예술의 개념 자체를 타도하려고 했다.
다다가 남긴 긍정적 결과는 반예술 개념이다.
이 개념은 20세기 내내 끊임없이 나타났으며, 이런 생명력이야말로 다다가 단순히 전통 예술 개념을 희화, 패러디, 조롱하며 거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정통 미술의 전당이던 화랑, 미술관 등을 대신할 새로운 무엇을 창출했다는 증거이다.

다다주의자들은 작품구성에 있어 ‘우연’의 원리를 처음으로 사용했고, 작품 제작에 있어 오토마티즘 처음으로 진지하게 실험했다.
이후 오토마티즘 원칙은 초현실주의자들과 추상표현주의의 여러 화파에 의해 발전되었다.
1922년경 다다가 붕괴되자 초현실주의가 그 뒤를 이었으며 다다를 주도한 많은 예술가들이 초현실주의를 주도했다.

초현실주의Surrealism(쉬르레알리슴)
진정한 현실은 무의식에 대한 비논리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이런 통찰은 특정한 비논리적인 오토마티즘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브르통은 1928년에 발표한 <초현실주의와 회화>에 적었다.
“어떠한 선입견이나 의도도 없이 쓰기를 재촉하는 펜과 그리기를 재촉하는 연필이, 잠깐의 유행이 아니라 최소한 시인이 자신의 내면에 감추어둔 감정적인 모든 것을 드러내줄 수 있는 매우 고귀한 내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말은 1917년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고 브르통에 의해서 규정되었다.
초현실주의 운동은 20세기 미술운동 중 가장 고도로 조직화되고 엄격하게 통제된 운동이었다.
초현실주의의 도덕적, 실천적 지도자는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불린 시인 앙드레 브르통(1896~1966)이었다.
정신장애를 공부하기 위해 낭트에서 의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경험한 정신이상자에 대한 연구가 훗날 비이성적 행위에 대한 관심의 근원이 되었다.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시만큼이나 회화를 늘 염두에 둔 브르통은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몇몇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성공으로 인해 대중이 초현실주의가 우선적으로 양식상의 문제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자 몹시 당황해 했다.
브르통은 달리를 교의상의 이유를 들어 여러 차례 초현실주의 운동으로부터 추방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유럽이 전통적인 도덕에서만 파산한 것이 아니라 예술, 문화, 과학, 철학, 그리고 정치에서까지도 파산에 도달한 것으로 인식했으므로 그들의 행위는 광적이었고, 어린아이들처럼 무책임했으며,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 사람들처럼 새로운 것을 찾았다.
초현실주의자들은 1925년 카다브르 엑스키Cadavre Exquis라는 게임을 했다.
‘아름다운 시체’라는 프랑스어의 카다브르 엑스키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한 조를 이루어 서로 다른 사람이 한 말이나 그림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차례로 문장이나 그림을 만들어가는 놀이의 일종이다.
오래된 놀이이지만 초현실주의자들이 집단 무의식을 끌어내거나 그들이 무의식적 창조의 또 다른 길이라고 여긴 우연의 요소를 개발하기 위한 고안으로 활용하면서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오토마티즘 원리를 중요하게 받아들였지만 단일한 초현실주의 양식은 나타나지 않았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행위를 크게 둘로 나누면 오토마티즘과 환상적인 꿈의 세계를 추구하는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들은 꿈에 관한 프로이트의 의견을 직접 청취했는데 프로이트는 “단지 수집만 한 꿈들은 아무것도 시사하는 바가 없으며, 그런 것을 묘사한 그림이 무엇을 말할 수 있을는지 나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고 경고했다.
프로이트가 요구하는 조건이 배제된 정신분석적인 작품들이 대부분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추구한 점이었으므로 그들의 작품에는 일정한 경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브르통은 프로이트의 잠재의식의 세계를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칼 마르크스의 정신에서의 혁명도 지지했다.
공산주의에 관심이 많은 그는 근본적인 인생의 변화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정의를 찾는 데서 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브르통은 1927년에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고 인류를 변화시키려는 공산주의의 과감한 노력에 매혹되었다.
그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 사고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공산주의에 협력하자고 권유했는데, 그는 자신의 모순된 언행을 독선으로 정당화하려고 꾀했다.
정치에 무관심한 예술가들과 전적으로 공산주의에 동조한 아라공 같은 예술가들 모두 브르통의 오만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브르통은 자신에게 반역하는 예술가들을 그룹에서 추방했으며 두 번째 <초현실주의 선언문>에서 “진실과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겠다고 장담했는데 이쯤 되면 초현실주의는 문학과 정치운동을 미술로 이루려는 것 그 이상이 아니었다.

초현실주의는 다행스럽게도 정치에 무관한 예술가들에 의해서 확산되었다.
그들은 에른스트, 마송, 탕기, 마그리트, 미로, 그리고 달리였다.
특히 달리의 활약이 현저하게 눈에 띠였다.
달리는 그림으로만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과 기괴한 행위, 옷차림, 코믹한 콧수염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그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 예술가들 가운데 유럽의 대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인물은 없었다.
뉴욕이 세계적인 예술의 도시로 부상할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쟁 덕분이었다.
나치의 괴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는 모더니즘 미술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프랑스를 점령한 뒤 문화 선진국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모더니즘 미술을 소멸시키려고 했다.
한때 사실주의 화가를 꿈꾸었던 히틀러는 모더니즘 예술가들을 타락한 예술가들로 단정했으며, 그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정신병원에 보내야 한다고까지 공공연하게 말하면서 “타락한 예술가들이란 하늘을 녹색으로 칠하거나 땅을 파랗게 칠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했다.
나치 언론은 모더니즘 작품들을 “자살한 시체들”이라고 불렀고, 나치정권은 자살한 시체들을 미술관과 화랑에서 끌어내어 어두운 방에 가두었다.
수많은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많은 작품들이 그때 사라지고 지금은 없다.
유럽의 전체주의 국가들에서는 창조적 예술이 억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독일군 점령지가 확대되자 유럽의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신변에 위협을 느껴 미국으로 망명했으므로 뉴욕이 호기를 맞았던 것이다.

추상표현주의는 통일된 하나의 양식이 아니라 같은 시기에 뉴욕에서 활약하던 일련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칭하여 일컬은 용어로 일부 화가들의 작품은 추상적이지도 표현적이지도 않았다.
구상을 고집한 데 쿠닝의 작품은 전혀 추상이 아니었고 뉴먼의 작품은 추상이지만 전혀 표현적이지 않았다.
고틀리브는 상형문자와 같은 그림을 그렸으며, 윌리엄 배지오티스, 호프만, 아슐리 고르키 등의 작품에는 구상적인 요소가 있었다.
구태여 공통을 찾는다면 폴록의 푸어드poured(물감을 뿌리는 방법)와 스틸, 로스코의 컬러필드Color-Field(색면회화)는 표면으로는 다르나 공간상 그림과 바탕의 관계가 근접하다는 점, 전체적 구성all over, 다초점, 또는 무초점의 공간과 정신내용을 지녔다는 점이다.

추상표현주의라는 용어가 1940년대와 50년대 뉴욕에서 활약하던 일련의 예술가들의 작품에 나타난 공통점을 묶어서 통칭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지만 이 용어가 폭넓게 사용된 데는 예술적 목적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평론가와 화상들은 뉴욕의 새로운 미술의 경향으로 보이는 것에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미국 모더니즘의 발전을 유럽의 그것과 분리할 수단을 마련코자 했다.
그들은 미국 문화의 진정성과 창의성을 내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사무엘 쿠츠Samuel Kootz는 여태까지 미국에서 희망이 없었지만 이제 폴 세잔에서 유래한 추상과 표현주의 두 경향을 결합하는 데서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으며, 1943년 『미국 회화의 새로운 개척 New Frontiers in American Painting』에 적었다.
“오늘날 우리는 지리적으로 세계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전쟁, 참화, 만행으로 예술가들은 다른 나라에서 작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몇몇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건너왔으며, 그들은 우리의 노력에 탁월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쿠츠는 추상과 표현주의 두 경향을 결합을 강조함으로써 그가 “프랑스의 공허와 데카당스”의 구현으로 믿은 초현실주의에 대한 반발을 드러냈다.
그러나 쿠츠와 마찬가지로 화랑을 갖고 있던 시드니 재니스Sidney Janis는 1944년 『미국의 추상과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초현실주의의 장점에 관해 언급함으로써 쿠츠와는 다른 태도를 보여 당시 뉴욕화단의 상황이 유럽 모더니즘에 대해 비판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뚜렷한 선두주자도 없고 경쟁적인 예술가 그룹이 없던 1940년대 초에 미국 미술의 미래가 잠정적이나마 모호하고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은 뉴욕시나 시외에 살면서 자주 만나 예술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나누었다.
그들은 유럽으로부터 피신해온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도움을 받아 유럽이 몇 십 년 동안 이룩한 성과를 짧은 기간에 알게 되었고 그런 토대 위에 자신들의 이상을 키워나갔다.
여기에 문필가, 평론가, 시인들이 가세하여 예술에 대한 논의를 더욱 진전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귀를 기울였으며, 고대 신화에서 형이상학적 인간의 문제를 다뤘고, 자신들의 믿음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상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사상들 중에는 쇠렌 키에르케고르,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칼 구스타브 융, 키르케고르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로 시작하여 장 폴 사르트르로 이어지는 실존주의Existentialism 철학 등 유럽에서 온 것들도 있고 미국의 지방적이며 정신적인 개척정신을 반영한 것들도 있다.

양식에 있어서 뉴욕의 예술가들이 주로 선호한 유럽의 양식은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였다.
두 경향은 상호배타적이지는 않더라도 정반대의 것으로 인식되었다.
착각에 기초하는 이차원의 캔버스에서 입체주의는 회화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용이했으며, 정신해방의 수단으로는 초현실주의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억압에 대한 변혁의 갈망에 용이했다.
몇몇 예술가들은 멕시코 벽화 화가들의 양식에서 영향을 받았고, 전시회에서 모네와 마티스의 작품을 직접 보고 그들의 양식에서 교훈은 얻기도 했는데, 마티스의 작품에서 평편한 색면의 사용이 공간을 느끼게 하면서도 공간 없는 애매한 상태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았으며, 모네의 <수련> 시리즈에서 커다란 화면에 명확한 형태적 구조가 드러나지 않고 넓은 표면과 뚜렷하고 표현적인 붓질이 결합되어 있는 점에 호감을 가졌다.
미술사에서 최초로 추상에 도달한 바실리 칸딘스키의 비정형회화도 그들에게 많은 걸 시사했다.
실용적인 면에서는 유럽 모더니즘에 정통한 망명예술가 호프만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이 그들에게 자신감을 고취시켰다.

페기 구겐하임의 화랑 금세기의 미술에서 자문을 맡았던 하워드 퍼첼은 1945년 자신의 67 화랑에서 ‘평론가들의 문제’라는 명칭으로 전시회를 열었는데 성공적이었다.
뉴욕에서 활약하는 호프만, 고키, 고틀리브, 폴록, 로스코의 작품을 한스 아르프, 파블로 피카소, 앙드레 마송, 호안 미로와 같은 유럽 대가들의 작품과 나란히 걸어놓은 전시회는 뉴욕에서 새로운 유파의 미술이 형성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퍼첼은 그것을 토템과 초기 그리스, 그리고 기타 고대 이미지들을 차용한 추상과 초현실주의의 결합으로 보았다.
전시 도록에서 퍼첼은 새로운 유파를 ‘새로운 변형’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그 용어가 부적절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보다 적절한 대체 용어를 언론이 고안하도록 고무시켰다.
『뉴욕 타임스』의 에드윈 올던 주얼은 “이즘이 미국 화가들 사이에서 가장 유력한 후원을 얻고 있다. ... 우리가 이제 진정한 미국회화를 보고 있다고 믿는다”고 적었다.
주얼은 이즘에 적용될 적절한 용어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분명 꿈틀대는 운동의 주요 특징을 단번에 드러낼 수 있는 간결하고 핵심적인 용어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네이션』지의 평론가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미국회화가 세계 미술계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입체주의와 그 상속자의 모든 자취를 제거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린버그는 1943년 금세기의 미술에서 열린 폴록의 첫 개인전을 격찬하면서 폴록의 작품에서 미국회화의 미래를 보았다.

추상과 표현주의라는 두 양식의 질서정연하고 이성적인 전개에 대한 쿠츠의 주장 그리고 입체주의에서 유래한 새로운 변형이라는 퍼첼의 개념에도 불구하고 뉴욕 화가들의 작품에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깊게 배어있었다.
미국회화는 유럽의 선례에 의존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평론가들은 이를 진정한 미국의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민족주의적 해석이었다.

오토마티즘
오토마티즘은 무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예술가가 손의 움직임에 대한 의식적 통제를 억제하는 방법으로 회화나 드로잉 또는 저술과 그 밖의 여러 작품의 제작에 사용되었다.
20세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으로서의 오토마티즘은 다다이스트들에 의해 우연의 효과를 노린 데서 확산되었다.
다다이스트들이 오토마티즘을 감정의 개입 없이 냉정하게 사용했던 데 반해 초현실주의자들은 오토마티즘을 통해 무의식을 탐험하여 철저하게 개인적 용도로 사용했다.
오토마티즘은 마타를 통해 추상표현주의 화가들 특히 고키와 로버트 머더웰을 통해 미국에 알려졌다.
마타에게 오토마티즘은 숨겨져 있는 인간의 잠재력과 그것의 안팎을 싸고 있는 삶의 왜곡된 구조를 지시할 수 있는 표현양식을 창출해낼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였다.

추상표현주의라는 용어가 아직 정착되기 전인 1947년에 뉴욕의 베티 파슨스 화랑에서 ‘상형문자 그림’이란 명칭으로 전시회가 열렸다.
그곳에서는 바넷 뉴먼을 비롯하여 호프만, 로스코, 스틸, 라인하르트, 테오도로스 스테이모스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뉴먼은 그가 말한 미국회화에서의 새로운 힘을 규명하려고 했다.
뉴먼은 유럽의 원형과 비교하지 않는 가운데 ‘상형문자 그림’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이 “원시미술 충동의 현대적 대응물”이라고 주장했다.
뉴먼은 “최초의 인간은 미술가였다”는 말로 미술의 기원을 태초로 확립하여 서구 유럽이 미술의 원천이라는 지배적인 믿음에 대안을 제시했다.
이는 모더니즘의 권좌에서 파리를 축출하고 미국과 다른 나라에게 미술의 유산을 재평가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은 계획되지 않은 자발성을 통해 무의식 상태의 보편적인 창조력을 끌어내어 해방시킬 수 있다는 신념 아래 초현실주의로부터 즉흥적으로 마음속의 것을 끌어내는 원리와 오토마티즘을 주로 이어받았다.
추상표현주의, 즉 “뉴욕화파의 첫 세대” 예술가들은 1940년대 말에 이르러 성숙한 양식을 구사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에 이루어진 작품들이 가장 훌륭하다.
추상표현주의는 미국 미술로서는 처음으로 유럽 화단, 특히 에콜 드 파리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 미술은 추상표현주의와 더불어 비로소 국제무대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추상표현주의 회화에서 특별히 잭슨 폴록의 작품을 염두에 두고 뉴욕 브루클린 태생의 미국 작가, 강연가, 미술 행정가, 평론가 해럴드 로젠버그는 액션페인팅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했다.
로젠버그는 1952년 시각 예술에 관한 첫 번째 중요한 글을 『아트 뉴스』에 기고했는데 이 에세이에서 액션페인팅이란 새 용어를 사용했다.

추상표현주의 이론가들
디트로이트 태생의 앨프리드 바 주니어(1902~81)는 모던아트의 이해와 연구를 위한 지적 틀을 형성하는 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로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바는 프린스턴대학에서 미술과 고고학을 공부하고 1922년 졸업한 뒤 이듬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화가 피에로 디 코시모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수개월 동안 유럽을 여행한 뒤 미국으로 돌아와 배서칼리지(1923~24), 하버드대학(1924~25), 프린스턴대학(1925~26), 웰즐리칼리지(1926~27)에서 미술사를 가르쳤다.
이 시기에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20세기 미술이었다.
1929년에 새로 개관한 모마에 관장으로 임명되고 이후 40년 동안 모마의 소장품을 확보하고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피카소의 걸작이며 20세기 미술의 대표작인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도 바에 의해 모마에 소장되었다.
저술활동을 위해 1943년에 관장 직을 사임했지만 연구 책임자로서 계속해서 일했으며 1967년에 미술품 수집책임자로 은퇴했다.
은퇴 후 38년 동안의 모마 근무경험을 바탕으로 영구소장품에 해당하는 모든 회화와 조각을 담은 방대한 도록을 1977년에 편찬했는데, 이것이 『뉴욕 모마의 회화와 조각 1929~67』이다.
여기에는 999명의 예술가들의 작품 2,622점의 목록이 수록되어 있고 이중 약 삼분의 이 정도의 작품 도판이 실렸다.
바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피카소: 그의 미술 50년』(1946)과 『마티스: 그의 미술과 대중』(1951)이다.

바는 1952년 12월 14일에 발간된 잡지 『뉴욕 타임즈』에 추상표현주의에 관해 ‘새로운 미국회화’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팔을 휘두르고 커다란 제스처를 써서 그린 그림은 화가와 관람자 모두에게 도전한다.
그것들이 눈을 덮고 그것들은 내재적인 것들로 보인다.
그것들은 종종 벽화만큼이나 크지만 그것들의 환영적인 깊이의 결여와 마찬가지로 스케일도 동시 발생적으로 건축적 장식과 관련이 있다.
그것들의 평편함은 오히려 예술가의 표현에 대한 최고의 도구처럼 실질적 회화과정과 더불어 형태, 질감, 컬러, 그리고 실제 세계의 공간에 대한 모방적 암시를 배제하는 경향이 포함된 예술가의 관심의 결과이다.

의도에 의해서이기보다는 결과로서 대부분의 그림은 추상으로 보인다.
아직은 그것들이 형식적이거나 비구상은 아니다.
거기 이론에는 ‘조형적 가치 plastic values’, 구성, 선의 특질, 표면의 아름다움, 색의 조화에 대한 전통 미학과 같은 어떤 선입견도 없다.
이런 것들이 회화에서 발생할 때 - 그것들이 종종 나타나며 - 그것은 회화가 시작되는 최초의 혼돈만큼이나 거의 직관적인 질서를 위한 투쟁의 결과이다.

수준 높은 추상에도 불구하고 화가들은 자신들이 주제 문제, 혹은 내용에 깊게 관여되었음을 주장한다.
그렇지만 내용은 데 쿠닝, 배지오티스, 고틀리브의 그림에서 보듯 인지할 만한 형태들이 부상할 때 조차에도 명백해지거나 분명해지지 않는다.
좀처럼 어떤 의식연합도 이런 그림들이 전하거나 암시하려고 하는 두려움, 쾌활함, 분노, 과격함, 혹은 평온의 감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간략하게 말하면 원리의 문제와도 같이 이런 화가들은 그들의 작품에서 쉽게 ‘전달’하는 걸 만드는 데 있어 사변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비타협적인 태도에 불구하고 그들의 추종자들이 크게 늘고 있는데 그림 자체가 심미적이며, 감성적이고, 미학적 그리고 보는 순간 거의 신비적인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예술가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신들의 그림이 완고하고, 어려우며, ‘자아’나 ‘실재’를 발견하는 데 있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기조차 한다고 느낀다.
여기서 말하는 필사적인 노력이란 자신의 전체를 던지는 무모한 시도로서 ‘나는 그린다 고로 존재한다’에 해당한다.
빈 캔버스를 직면해서 그들은 칼 야스퍼스)의 실존적 구절 “행위, 결정, 믿음의 도약으로 궁극적인 존재를 파악하기를” 시도한다.
...
초현실주의는 이 그룹의 화가들에게 철학적 기술적인 면 모두에서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운동 초기인 전쟁 중에 몇몇 화가들은 앙드레 브르통의 프로그램인 ‘이성과 밖에 있는 모든 미학적 도덕적 선입견에 의해 조절되는 모든 것이 부재하는 가운데 순수한 정신적 오토마티즘’의 영향을 받았다.
오토마티즘은 당시, 그리고 여전히 지금에도 하나의 기술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지만 조절이나 더불어서 일어나는 개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처음 브르통이 의존했던 프로이트와 막스주의는 융의 신화와 고대의 상징에 대한 관심보다는 덜 영향을 끼쳤다.

1919년 베를린에서 단명하게 사용된 추상표현주의란 용어는 (나에 의해서) 1929년경 칸딘스키의 초기 추상에 적용해 사용되었고, 미국인의 운동을 예고했고, 미국인의 운동에 처음 적용된 건 1946년이었다.
그렇지만 이 전시회에 참여한 화가들은 적어도 순수, 실용주의적 의미에서 자신들의 작품이 추상이라는 걸 부인한다.
그리고 타당하게도 근래 미국에서 자주 전시된 하나의 운동으로서의 독일 표현주의와 어떠한 관련도 부정한다.

클레먼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1909~94)는 당대 프랑스 미술이 모더니즘의 양식적 어휘들을 일련의 세련된 장식으로 퇴보시켰다는 생각에 근거하여 입체주의의 쇠퇴를 주장했다.
그의 비평적 분석은 작품의 내용, 은유, 그리고 공명하는 주관을 제쳐놓고 미술의 형식적 속성에 근거하게 되었다.
실존주의를 중시한 로젠버그와는 달리 미국회화의 새로운 우월성을 부각시키려는 그린버그의 관심은 작품의 독창성과 화면의 제거에 집중되었다.
구성의 평면성과 ‘전면 균질성’으로 인해 그는 폴록과 그 밖의 화가들의 작품을 특징짓는 것이 본래의 ‘순수성’이라고 믿었다.
한때 장 뒤비페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가들 중 하나”라고 주장했던 그는 이제 폴록이 “프랑스 화가들보다 훨씬 다양하고 궁극적으로 할 말이 더 많다”고 주장했다.

그린버그는 폴록의 작품에 나타난 활달한 선과 뿌려진 물감을 미국 화가에 의한 최초의 혁신으로 보았으며, 시각적 선례가 없던 일로 보았다.
시애틀에 거주하면서 1940년대에 지속적으로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그린버그가 한때 옹호한 마크 토비와 같은 화가조차 폴록의 탁월한 구성에 비견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린버그는 한때 작은 하얀 선들이 이룬 복잡한 망에서 모든 위계적 배열도 사라진 토비의 1940년대 초기 작품에 나타난 혁신적 특징을 칭찬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런 특징에서 스위스 화가 클레의 느낌이 난다고 했다.
폴록의 등장과 더불어 그린버그는 토비의 작품을 지나치게 편협하고 한정된 것으로 인식했다.
그는 토비를 오히려 시대에 뒤쳐진 인물로 간주했다.
새로운 미국회화의 진정성을 정의하려는 노력이 가속화되어 경쟁의 상태에 이르자 재빠르게 비평적인 열정과 오만 그리고 도전적인 민족주의의 색채를 띤 배제의 정치가 작동된 것이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56)
1929년 뉴욕으로 와서 아트스튜던츠리그에서 지방주의 화가 토머스 하트 벤턴의 지도를 받으며 회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폴록은 지방주의 양식으로 작업하면서 동시에 멕시코 벽화화가들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1940년대 중반까지 다소 틀에 박힌 우아함을 지닌 선적인 양식과 풍부한 임파스토를 강조한 낭만적 양식이라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를 유명하게 만들고 추상표현주의 운동의 기수이자 당대의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알려지게 한 ‘뿌리고 튀기는 drip and splash’ 기법은 1947년 무렵 다소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폴록은 이젤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방법 대신에 캔버스를 바닥이나 벽에 고정시키고 통에 든 물감을 붓고 뿌렸다.
그 다음 붓이 아니라 막대기, 흙손, 나이프로 물감을 다뤘고 때로는 모래, 유리조각, 혹은 이물질을 혼합하여 임파스토 효과를 내기도 했다.
이런 방식은 화가의 무의식을 드러내거나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 이론과 공통점이 있다.
동일한 이유에서 이는 제스처 회화로 불렸으며 미국에서는 액션페인팅이라는 신조어가 사용되었다.

폴록은 1958년 윌리엄 롸잇William Wright이 진행하는 라디오에 출연하여 말했다.

롸잇: 미스터 폴록, 모던아트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폴록: 모던아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컨템퍼러리 목표에 대한 표현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롸잇: 고전적 예술가들도 자신들의 시대에 대한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까?

폴록: 그랬습니다. 그들은 매우 잘 해냈습니다. 모든 문화 중국, 르네상스 등 모든 문화가 당대의 신급한 목표들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방법과 기교를 갖고 있었습니다. 내게 흥미를 끄는 건 오늘날의 화가들이 자신들 밖에서 주제를 발견하려고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모던 화가들은 각기 다른 출처에서 작업합니다. 그런 출처 내에서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롸잇: 모던 미술가들은 고전 미술품의 가치가 되는 특성과는 어느 정도 격리되어 있고 그런 특성을 좀더 순수한 형상 안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폴록: 아, 훌륭한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요.

롸잇: 미스터 폴록, 선생의 회화방법에 관해 많은 논평과 논란거리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선생이 들려줄 말이 있습니까?

폴록: 새로이 요구되는 것은 새 기교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모던 미술가들은 자신들의 진술을 새 방법으로 알리는 새 길을 알고 있습니다. 모던 화가는 이 시대, 비행기, 원자폭탄, 라디오 등을 르네상스의 낡은 형태나 과거 문화의 어떤 형태로 표현해서는 안 됩니다. 각 시대는 각 시대에 걸 맞는 기교를 발견하게 됩니다.

롸잇: 선생의 말은 문외한과 비평가들은 새로운 기교를 해석하는 자신들의 능력을 개발해야만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까?

폴록: 당연합니다. 낯설음은 마멸되며 우리가 모던아트의 좀더 깊은 의미를 발견할 거라는 뜻입니다.

롸잇: 문외한이 선생의 작품을 대하게 되면 그들은 폴록의 그림이나 모던 회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느냐고 묻고 또한 모던아트를 감상하는 방법을 어떻게 배워야 하느냐고 묻곤 합니다.

폴록: 어떤 식으로 바라보기보다는 피동적으로 바라보고 그림이 제시하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며 자신들이 찾는 미리 정해놓은 아이디어나 주제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롸잇: 화가는 무의식으로 그림을 그리며 캔버스는 반드시 그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의 무의식처럼 작용해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폴록: 내가 사용하는 물감 대부분은 흐르는 류의 액체입니다. 나는 붓을 붓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막대기처럼 사용할 때가 많고 붓은 캔버스 표면에 닿지 않고 바로 그 위에만 있게 됩니다.

롸잇: 붓으로 캔버스를 칠하기보다는 막대기로 액체 물감을 사용하는 것이 왜 유익한지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폴록: 음, 그렇게 하는 것이 좀더 자유로우며 캔버스 주위로 움직일 수 있고 매우 편해서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롸잇: 음, 막대기가 붓보다 다루기 더 어렵지 않습니까? 너무 많은 물감을 사용하거나 뿌리게 되거나 그 밖의 단점이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붓을 사용하게 되면 선생이 원하는 바로 그곳에 색을 칠할 수 있고 원하는 대로 정확하게 그릴 수 있지 않느냐 하는 말입니다.

폴록: 그렇지 않습니다. 경험으로 봐서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으며 ... 물감이 흐르는 것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되고, 좀더 말하자면 나는 우연을 사용하지 않는데 우연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롸잇: 제가 알기로는 프로이트가 말하기를 우연이란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것입니까?

폴록: 그런 일반적인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롸잇: 그렇다면 선생은 실질적으로 캔버스에 그려질 이미지를 미리 마음에 두지 않는군요?

폴록: 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왜냐면 그것은 창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방법으로 말하자면 정물을 그릴 때 오브제들을 놓고 그것들을 보면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그리는 그런 것과는 매우 다른 방법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관념을 가지게 됩니다.

롸잇: 그렇지만 캔버스에 그려지게 될 미리 구상한 이미지를 실제로 갖고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폴록: 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창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새롭다는 건 작업하는 것, 예를 들면 오브제들을 장치하고 그것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리는 정물화를 그리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나는 내가 하는 작업에 대해서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롸잇: 미리 스케치를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지요?

폴록: 그래요.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 드로잉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직접 하는 것이지요. 난 드로잉을 하고 작업하지는 않으며 최종적인 그림을 위해 스케치하거나 드로잉하거나 컬러스케치를 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오늘날 좀더 긴급하게, 좀더 직접적으로 하는 것이 더욱 더 진술을 직접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롸잇: 음, 자, 미스터 폴록, 모던회화 전반에 관해 말해주시겠습니까? 선생과 동시대 사람들의 회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폴록: 음, 오늘날의 회화는 확실히 매우 활력이 넘치고, 매우 생기가 있으며, 매우 자극적입니다. 뉴욕에 있는 다섯 혹은 여섯 명의 화가들은 매우 활력적인 작품을 제작하고 있으며 캔버스에 직접 그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크 토비Mark Tobey(1890~1976)
토비는 1925-27년에 유럽과 근동 지역을 여행했다.
그는 1931년 영국 데번셔 다팅턴 홀Dartington Hall에 상주하며 정기적으로 작품을 소개했고, 상하이에서 중국 서예를 배운 뒤 데번셔로 돌아와 소위 ‘하얀 서체 white writing’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서체를 연상시키는 선과 형태가 올오버 구도로 캔버스를 메운 것이다.
개별 부분들의 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회화 구성법을 탈피한 것이었다.
토비는 이런 종류의 올오버 구성의 선구자이며, 그 후 폴록이 그 뒤를 이었다.

토비는 미국에서 확산되고 있던 비개성주의에 관심을 가지며 이를 과도한 산업화와 물질주의의 산물로 보았다.
그는 가느다란 필선을 겹쳐나가는 하얀 서체 기법을 통해 “현대 도시의 광기 어린 리듬을 그릴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르네상스적 기법으로는 접근되지 않는 것이었다”고 했다. 액션페인팅 화가들과는 달리 토비는 “회화는 행위라는 운하보다는 명상이라는 오솔길을 통과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토비는 바하이즘Bahaism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바하이즘이란 이슬람교 종파의 하나인 바비즘에서 전화한 새로운 종교운동 및 그 교의를 말한다.
바브Bab의 제자 미르자 후사인 알리Mirza Hussain Ali가 스스로 ‘신의 광휘’란 뜻으로 ‘바하 알라Baha Allah’라고 칭하고 1863년에 창시했으며, 모든 종교의 근원은 같다고 하며 그 통일을 주장했고, 나아가 남녀평등과 국제 평화를 강조했다.
바하이즘은 세계에는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커다란 힘이 존재하며 이를 통해 인간은 점차 세계의 통일성과 인류의 하나 됨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토비는 말했다.
“여러 종류의 종교가 있지만 그것들은 여러 종류의 명칭들에 불과하고 오로지 하나의 종교가 있을 따름이다. 모든 종교의 뿌리는 바하이의 견지에서 볼 때 세계와 인류가 하나라고 하는 이론에 기초한다.”

모던아트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의 공식 명칭은 휘트니 미국 미술 뮤지엄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이다. 상류층에서 태어난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Gertrude Vanderbilt Whitney(1875~1942)는 1900년에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907년에 그리니치빌리지에 작업장을 차렸다.
아버지는 대단한 부호인 철도왕 코닐리어스II 밴더빌트이다.
그녀는 1896년에 금융가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폴로 선수인 해리 페인 휘트니와 결혼했다.
결혼 후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게 되었으며, 뉴욕 아트스튜던츠리그와 파리에서 조각을 배웠다.
그녀는 1929년에 500여 점의 미국 회화, 조각, 소묘로 이루어진 자신의 컬렉션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결과로 이듬해에 휘트니 미술관을 설립할 것을 공표했으며 1931년에 8번가 웨스트 10번지에 적갈색 사암으로 개조된 건물에 미술관을 개관했다.
1954년에 모마MoMA(Museum of Modern Art)에서 제공한 54번가 웨스트 22번지의 세 건물로 이전했고, 1966년 매디슨 애비뉴 945번지에 있는 마르셀 브로이어가 설계한 건물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휘트니 미술관은 로버트 헨라이 밑에서 공부하고 도시생활의 고독, 공허함, 정체감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린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의 미망인이 기증한 2천 점의 작품을 비롯하여 20세기 미국 미술에 관한 세계적으로 가장 크고 훌륭한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MoMA(Museum of Modern Art)
예술가가 아닌 미술 후원자들도 모던아트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1929년에 모마가 릴리 블리스Lillie Bliss, 애비 록펠러Abby Rockefeller, 메리 퀸 설리번Mary Quinn Sullivan의 주도로 개관했다.
애비 록펠러는 로드아일랜드의 상원의원 넬슨 앨드리치의 딸이자 19세기 석유재벌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1839~1937)의 아들 존 D. 록펠러 주니어의 아내였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가 1937년에 사망했을 때 그의 재산은 14억 달러로 1937년 GDP의 1.54퍼센트에 해당했다.
모마는 휘트니 미술관과는 달리 회화와 조각뿐 아니라 모든 시각예술에 관심을 보였다.
필립 굿윈Philip Goodwin과 에드워드 더렐스톤이 설계한 1939년의 미술관 건물은 후에 필립 C. 존슨Philip Cortelyou Johnson(1906~2005)의 설계에 따라 증축되었고, 존슨은 1953년에 미술관의 정원도 설계했다.
모마는 2004년에 1조원을 들여 일본인 건축가 다니구치 요시오谷口吉生에게 증축, 리모델링을 하게 했는데, 요시오는 12만 점이나 되는 소장품을 효율적으로 전시할 수 있도록 1만7천 평의 넓이로 증축하면서 재료로 유리, 알루미늄, 화강암을 사용했다.
“도시 속의 도시, 도시 속의 미술관을 디자인하겠다”는 요시오는 “건축물이 눈에 띄지 않고 단지 마시듯 느낄 수 있도록 했다”면서 “우리가 좋은 집을 원한다면 집에서 편안하면 되는 것이다.
건축물은 잊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1939년에는 광산 투자로 재산을 모은 실업가 솔로몬 R. 구겐하임Solomon R. Guggenheim이 특히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와 파울 클레Paul Klee(1879-1940),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1884~1920)의 작품을 전시하는 비구상회화 미술관Museum of Non-Objective Painting에서 모은 자신의 수집품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이 미술관은 1952년에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개명했으며, 1959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1867~1959)의 설계로 뉴욕의 ‘영적 전당 Temple of Spirit’을 상징하는 둥근 로툰다Rotunda(원형이나 타원형 평면 위에 둥근 지붕을 올린 건물) 형식으로 건립했다.
달팽이 모양의 외관과 나선형 계단으로 건축사에 획을 그은 이 건축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로 올라간 관람객이 경사로를 걸어 내려오면서 벽에 걸린 전시작품들을 볼 수 있게 만든 파격적인 양식이다.

화랑 금세기의 미술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1898~1979)이 신생 화랑 금세기의 미술을 개관한 것은 1942년이었다.
“여성 카사노바”로 불린 그녀는 솔로몬 R. 구겐하임의 조카딸이다.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성공한 구리재벌가에서 태어난 페기는 런던에서 화랑을 연 경험이 있었다.
페기는 1943년에 최초로 잭슨 폴록의 개인전을 열었다.
폴록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떨어뜨리는 기법으로 인해 곧 “드리퍼 잭”이란 별명을 얻었다. 페기와 폴록은 빠르게 성공을 거두었다.
액션페인팅의 대표적인 화가 폴록의 드리핑, 컬러필드의 선두 마크 로스코의 채색된 직사각형, 프란츠 클라인과 그 밖의 화가들의 추상표현주의 작품이 몇 년 사이에 뉴욕을 서양 모던아트의 수도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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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뉴욕으로 떠나기 전 기고한 것인데 지난 주에 실렸습니다.



게오르그 바젤리츠와 ‘러시안 페인팅’


1. 그림을 거꾸로 건 것은 익살일 뿐이다.

주요 일간지를 비롯하여 다양한 매체가 바젤리츠를 ‘거꾸로 된 그림의 작가’로 소개하고 있다.
작품을 거꾸로 건 것이 사건이라도 되는 양 국립현대미술관의 보도자료에도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바젤리츠는 “거꾸로 된 이미지는 더 잘 보일 뿐 아니라 보는 이의 눈을 향하게 된다”면서 “거꾸로 그려진 대상은 오브제로는 부적합하기 때문에 오히려 회화에 적합하다”는 역설적인 말을 했다.
거꾸로 된 이미지는 제대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회화에 적합하다는 건 억지주장이다.
작품을 90도 혹은 180도 돌려서 거는 건 주목받기 위한 수단이다.
비구상과 언어를 작품의 재료로 삼는 개념주의가 성행하던 시기인 1969년에 구상을 옹호하기 위해 이미지를 거꾸로 구성하는 것으로 구상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그건 새로운 방법이랄 수 없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는 거꾸로 보인다.
시스티나 예배당을 방문한 사람은 경험하겠지만 목을 뒤로 오래 제쳐야 하기 때문에 작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1940년대 후반 잭슨 폴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주위를 돌아가면서 그렸다.
한지에 수묵화를 그리는 화가들도 유사한 경험을 할 것이다.
바젤리츠의 익살은 이런 경험에서 착안된 것이다.
회화에 적합하게 하기 위해 이미지의 좌우를 바꾸고 식물을 공중에 매단 것을 파울 클레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거꾸로 된 그림의 작가’로서의 바젤리츠의 명성은 미술관과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며 우리의 관심 밖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다시 거꾸로 돌려놓고 회화의 적합성을 따져보아야 한다.



2. 신표현주의의 실상

바젤리츠는 독일 신표현주의의 선두주자들 중 하나다. 1970년대 말에 등장한 신표현주의를 신야수주의 혹은 격렬하고 폭력적인 회화라고도 하는데, 재료 처리방식이 매우 거칠며 짧은 기간에 제작하여 격렬함을 작가의 주관성으로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회화다.
독일과 미국에서는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란 용어로, 프랑스에서는 자유구상Figuration Libre으로, 이탈리아에서는 트랜스아방가르드Transavantgarde로 성행했으며, 공통점은 추상에 대한 반발로 구상을 고집하며 폭력과 죽음을 테마로 한 것들이 많다.
갤러리스트와 미술품수집가들은 신표현주의를 반겼으나 일부 평론가들은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해 관습적 기법을 일부러 무시하여 형편없게 만드는 걸 두고 비난했다.
일부 신표현주의 작품을 ‘배드 페인팅 Bad Painting’, ‘어리석은 페인팅 Stupid Painting’이라고 불렀다.


신표현주의가 부상한 배경을 둘로 꼽으면 하나는 개념주의 이후 회화의 위기를 맞아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몸부림이며, 다른 하나는 미술품을 소장하는 것이 삶을 향상시킨다는 것과 투자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수요가 급격히 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미술품의 가격이 앙등하기 시작했다.
1979년의 미술품 가격과 1980년의 가격을 비교하면 서너 배는 보통이고 어느 화가의 경우는 다섯, 여섯 배까지도 상승했다.
오일과 다이아몬드에 쏠렸던 투자가들이 미술품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구입하지 못해 투자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의 구매수요가 급증한 것이 신표현주의가 성행하는 걸 용인했다.
신표현주의는 1980년대 들어서 회화가 위기를 맞았을 때, 다시 말하면 모더니즘이 종말을 고하고 모더니스트 회화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 아서 단토의 말로 하면 예술이 종말에 이르렀을 때 약간의 지엽적인 변화를 일으킨 사건에 불과한 것이다.
신표현주의들은 자신들의 주관적 표현의 한 수단으로 회화를 사용한 것이며 그것은 모더니즘의 종말 이후에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었더라도 그럴 수는 있었다고 이해되어진다.
1980년대에 신표현주의자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화가들은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을 잃었다.
자신들이 무엇을 그려야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양식과 주제에 있어서 고갈되었다.
미술계의 심층구조에는 예술의 종말을 특징짓는 구조적 다원주의가 자리 잡았다.
미술활동 전 영역에 매체들의 연접성이 두드러졌다.
회화뿐 아니라 퍼포먼스, 설치, 사진, 대지미술, 개념적 구조물, 섬유작품, 온갖 장식적 패턴의 작품 등이 회화의 동료가 되었다.
유행을 선도하는 개인이나 그룹이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미술가들은 모더니즘의 억압에서 해방되어 다양한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건 한스 리히터가 반동이라고 말한 신표현주의들에 의해서 방대한 양의 대형화가 쏟아져 나왔으며, 그것들이 수요에 의해서 미술시장에서 소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젤리츠가 있었다.


3. ‘러시안 페인팅’(1998-2002)

바젤리츠의 명성은 1968년까지의 작품으로 족하다. 1957년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이주한 뒤 마르크스주의 예술과 미학을 공식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수용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반발하여 그린 그림들은 민속까지도 이데올로기의 이용되는 철저한 미술 말살에 반기를 든 것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1969년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고부터 그의 회화는 독창성을 잃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의 얼굴을 거꾸로 그려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고 했으며, 그런 작품들이 1995년 미국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시작으로 하여 대대적으로 소개되었다.
거꾸로 그려진 초상은 에밀 놀데를 상기하게 하는 감성적 표현이었다.
추상표현주의 양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양식에 있어서 ‘러시안 페인팅’은 바젤리츠의 새로운 시도이지만 주제에 있어서는 과거 그가 집착했던 것들에 대한 변형일 뿐이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회화와 정치선전용 사진을 소재로 삼아 그것들을 매우 거칠게 신표현주의 특유의 배드 페인팅으로 만들면서 해학을 곁들였다.
사회주의의 우수성을 선전했던 이미지들의 허구성을 새삼스럽게 드러내려고 한 것으로 개인적 향수가 벤 작품들이다.
또한 그의 창작의 한계를 보여주는 시리즈이기도 하다.
69세로 그가 명성을 되찾기에는 너무 늙었다.


작품
<전쟁의 나날들 I>(1998):
화가가 빈 캔버스 앞에 앉아 있다.
사회주의가 붕괴된 사회에서 화가는 자신이 무엇을 그려야할지 알지 못한다.
과거에는 레닌이나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렸겠지만 이제는 그려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젤 앞에 앉아 있는 화가는 바젤리츠 자신이다.

<베를린의 승전일>(1998):
피아노를 치고 있는 군인의 모습이다.
소련군이 무식하고 좌변기도 쓸 줄 모르는 야만인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선전용으로 그려진 이미지를 변형한 것이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화가는 소련군이 피아노도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을 사랑하는 감성적인 남자라는 걸 선전하기 위해 그렸다.
그것을 바젤리츠가 기억 속의 희미한 이미지로 재생산했다.

<스몰니의 레닌>(1998):
레닌을 누드로 그리면서 평범한 노인으로 묘사한 것이다.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레닌은 편지를 쓰는지 연설문을 작성하는지 열심히 적고 있다.

<연단 위의 레닌>(1999):
이것은 연단 위에서 연설하는 유명한 사진을 새로운 이미지로 변형시킨 것이다.
험상궂은 작은 얼굴에 몸집만 크게 부각시킨 작품이다.

<멕시코 혁명 II>(2001): 이것은 다섯 명의 공산주의자 초상이다.
왼편부터 ‘공산당선언’을 발표하여 각국에 혁명의 불을 지핀 마르크스, 마르크스의 이론적, 실천적 활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한 엥겔스, 스탈린과 대립하여 국외로 추방된 뒤 멕시코에서 암살된 트로츠키, 러시아에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혁명이론가, 사상가 레닌, 레닌의 후계자로 소련공산당 서기장, 수상, 대원수를 지낸 스탈린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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