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대한항공 기내잡지 Beyond 2월호에 보낸 원고입니다.
한정된 지면에 쓰느라 워홀을 제대로 다루기 어려웠지만 그런대로 정리했습니다.
왜 앤디 워홀인가?
1960년대에 들어서 대중은 막강한 힘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안정을 갖춘 중산층의 폭이 넓게 형성되면서 대중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향유하게 되었다.
월남전을 반대한 반전운동은 유럽과 미국에서 대중의 힘이 정치적으로도 막강함을 증명해보였다.
대중은 문화의 소비자가 되었으며, 문학, 영화, 음악은 물론 미술에서도 대중을 위한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대중적이어야만 성공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팝아트는 한 마디로 소비주의의 산물로 소비주의의 미덕은 다수가 동일한 것을 소비하는 것이다.
팝아트는 모더니즘의 종식을 선언한 운동이며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출발을 알린 운동이다.
모더니즘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한 순수예술이다.
예술이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민족적, 양식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은 소수의 엘리트의 취향을 위한 예술이었는데, 예술의 소비자로서의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엘리트의 취향은 배척되고 다수의 대중 취향을 위한 예술이 등장한 것이다.
모든 것이 popular해야지만 했고 팝아트란 Popular Art의 약자이다.
팝아트는 영국에서 먼저 시작되었지만 꽃을 피운 곳은 미국이며 팝아티스트들 가운데 워홀이 정상에 올랐다.
팝아티스트에게는 대중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재능이 필요하고 워홀에게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영화 <내가 왜 앤디 워홀을 쏘았나>는 워홀의 인간적인 모습을 잘 표현했다.
워홀의 작업실 ‘공장’에 출입하던 발레리 솔라니스가 자신에게 지나치게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워홀을 저격한 전후 과정을 다룬 영화인데, 어눌하게 말하며 파티를 좋아하는 워홀을 보면 예술가는 매우 스마트한 모습일 거라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에게는 실망을 안겨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감독은 그를 정확하게 묘사했다.
워홀을 정상에 올려놓는 데 기여한 것들로 워홀의 개성적 헤어스타일과 의상, 실크스크린에 의한 대량복제, 슈퍼스타들을 평범한 인물로 끌어내리기, 영화제작 등을 꼽을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보다도 1964년 뉴욕의 스테이블 화랑에서 선보인 훌륭한 목공 솜씨로 제작된 400개의 유명 상품들을 포장한 상자들, 특히 <브릴로상자>가 그를 팝아트의 정상뿐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마르셀 뒤샹이 기성품을 미술품이라고 주장하며 선택도 창작의 영역임을 말하려고 한 데 반해 워홀은 기성품을 선택했을 뿐 아니라 대량으로 생산해냈다.
이는 과연 팝아트의 정신이다.
그의 브릴로상자는 슈퍼마켓에 있는 브릴로상자와 똑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슈퍼마켓에 있는 브릴로상자는 미술품이 아닌 데 비해 스테이블 화랑에 전시된 브릴로상자가 미술품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미술품은 스스로 미술품임을 지시하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워홀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복제를 하더라도 왜 복제를 하는지 그 의도가 밝혀져야 하는 것이다.
<브릴로상자>가 지닌 의미는 미술품과 실재 사물 사이의 차이를 순수 시각적 견지에서 이해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이며, 미술품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모더니즘의 패러다임이 붕괴된 것이다.
모더니즘은 19세기 중반 회화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음으로써 시작되었다.
워홀이 후세에 끼친 영향은 미술품이 어떠해야 한다는 특별한 방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브릴로상자>를 통해 보여준 것이다.
그에 의해서 모든 것이 미술품이 될 수 있게 되었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이보다 더 큰 충격적인 영향이 과거 서양미술에 없었다.
도판설명
워홀의 공장(108):
워홀은 1963년 12월 맨해튼 231 이스트 47번가에 새 작업실을 얻었는데, 과거 공장으로 사용되던 그곳에는 엘리베이터와 공중전화도 있었다.
그곳을 ‘공장’이라고 불렀다. 워홀의 조수가 벽돌로 된 벽에 은색 스프레이를 뿌려 평편하게 보이도록 하고 천정으로부터 내려온 아치 세 곳에 알루미늄 호일을 부착했으므로 방안이 온통 은색으로 빛났다.
책상, 의자, 복사기, 화장실, 마네킹, 공중전화까지 모두 쇠붙이 같은 은색으로 통일하고 바닥까지도 은색을 칠했으므로 그곳에 들어서면 다른 차원의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을 주었다.
<내가 왜 앤디 워홀을 쏘았나>(154, 156):
워홀은 1968년 6월 3일에 저격당해 콜럼버스 병원으로 옮겨졌다.
워홀은 7월 28일에야 퇴원했다. 사실주의 화가 앨리스 닐은 워홀을 문병 갔다가 총상을 입은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구두>(7):
영화배우 자자 가보의 신발을 그린 것으로 워홀은 여배우가 신는 굽이 높고 장식적인 구두를 환상적인 느낌을 주도록 묘사했다.
선의 유용함을 누구보다도 잘 안 그는 순수미술에서 느끼는 고상한 감각을 상업미술에서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라벤더 빛 재난(전기의자)>(107):
이 작품은 사람을 살해하는 의자가 두려운 물체임에도 불구하고 붉은색으로 인해 관람자에게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이런 아이러니는 워홀의 작품에 흔히 나타나는 요소이다.
<브릴로상자>(124):
워홀은 슈퍼마켓에서 가져온 브릴로 비누, 모트 사과주스, 켈로그 콘플레이크, 델몬트 복숭아통조림, 캠벨 토마토주스, 하인즈 케첩 등 유명 상품들의 상자를 목수로 하여금 같은 크기로 수백 개 만들도록 했다.
상자가 만들어지자 실크스크린으로 상표를 제작해 겉면에 붙였다.
이렇게 만든 상자들을 한곳에 쌓아놓으니 식품도매상이라도 차린 것 같았다.
<롤링 스톤즈>(153):
실제 지퍼가 달린 도발적인 재킷이다.
이 앨범은 4월에 시판되어 2주 만에 50만 장이나 팔렸다.
워홀은 돈을 조금밖에 받지 못했다고 투덜대면서 다음부터는 한 장에 50센트를 받아야겠다고 말했다.
<꽃>(160):
워홀은 실크스크린으로 다량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고 동일한 작품을 다량으로 생산하는 것도 팝아트 정신에 속한다.
<꽃>을 250점 만들어 한 점에 3천 달러에 팔았다.
이 가격은 마를린의 초상화 가격에 비해 여섯 배나 비쌌다.
1970년에는 판화가 붐이라서 워홀도 이때 꽃그림을 다시 제작했다.
그래서 미술시장에 그의 꽃그림이 흔한 것이다.
<자화상>(205, 206):
요제프 보이스의 초상화에 사용한 카무플라즈를 자화상에도 사용했다.
<자화상>은 1986년 8월 런던 앤소니 도파이 화랑에서 선보였다.
<캠벨 수프통조림>(75):
워홀은 어렸을 적에 늘 캠벨 수프를 먹었다.
캠벨 수프의 수프통조림 시장점유율은 80%에 달했다.
워홀이 1962년 로스앤젤레스의 페러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시한 32점 모두 캠벨 수프통조림이었다.
페러스의 라이벌 화랑은 진열장에 80-90개의 실제 캠벨 수프통조림을 쌓아놓고 “여기서 통조림을 사십시오. 1달러에 5개 드립니다”라고 선전하여 워홀의 전시회를 망치려고 했지만 오히려 전시회를 널리 알리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캠벨 수프통조림>은 1997년 뉴욕의 소더비 경매에서 예상 낙찰가 150-250만 달러를 훨씬 넘어 352만 달러에 팔렸다.
<2달러 지폐>(91):
여자 화상 일레노는 워홀에게 2달러 지폐를 주며 그것을 그린다면 전시회를 열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작품은 <캠벨 수프통조림>, <코카콜라 병>, <마를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과 마찬가지로 반복해서 그린 것이지만 고의로 엷은 색조를 사용하여 하나하나를 개별적인 물체로 존재하도록 조금씩 다르게 그림으로써 반복효과를 회화적 요소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