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음악적 해프닝


대한항공 기내 잡지 Beyond에서 요청한 글입니다.
A4 용지 두 장에 한정되고 백남준의 해프닝에 관한 요청이라서 내용이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경대를 졸업하고 작곡을 공부하기 위해 백남준이 뮌헨으로 향한 건 1956년이었다.
2년 뒤 그의 운명을 바꿔놓을 존 케이지이가 다름슈타트에서 매년 여름에 열리는 국제신음악 페스티벌에 연사로 초청되어 왔다.
일상에 존재하는 온갖 소음을 음악에 도입한 케이지와의 만남은 전통음악에 만족하지 못한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케이지는 강의를 통해 불확정성indeterminacy을 강조했는데, 이는 비의도적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무목적 무목적성 purposeful purposelessness’으로 작품의 완성보다는 그 과정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예측될 수 없으므로 실험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일한 것이었다.
물리적 공간과 시간만이 실재성을 띠며, 시간과 공간에 의존하는 케이지의 불확정성은 ‘지금 여기’라는 현장에 관람자를 참여시키는 해프닝의 개념이 되었다.
관람자는 방관자가 아니라 개념적으로 해프닝에 가담하는 참여자가 되며, 행위로 가담하지 않더라도 현장에 현존하는 것만으로도 참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백남준은 기상천외한 음악적 해프닝으로 유명한데 다다적 돌출행위였다.
1959년 11월 뒤셀도르프의 갤러리22에서 스승 케이지에 감사를 표한 <케이지에게 바침: 테이프리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을 선보였다.
깡통을 발로 차서 유리판을 깨고 그 유리가 계란과 장난감자동차를 치도록 만들고, 피아노를 공격하기 위해 돌진하고, 테이프리코더에서는 수탉이 놀라서 내는 소리, 모터사이클의 소리와 함께 베토벤의 <교향곡 5번>, 독일 가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 외에도 시끌벅적한 복권당첨 장면 소리, 장난감 소리, 사이렌 소리 등이 흘러나왔다.
스승은 참석하지 못했지만 작곡가 윤이상이 관람했고, 훗날 각별한 사이로 진전될 요제프 보이스도 관람했다.
전위예술가들 중 일약 선두주자로 부상하게 만든 이 해프닝으로 백남준은 놀라운 파괴력을 가지고 악기를 공격하는 행위음악의 전기를 열었다.


쾰른시대의 악명 높은 작품은 1960년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에서 선보인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습작>으로 쇼팽의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던 그가 갑자기 무대에서 내려와 관람하던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고 옆에 앉아 있던 튜더에게 샴푸세례를 한 뒤 사라졌다가, 근처 술집에서 전화로 해프닝이 종료되었음을 알린 것이었다.
넥타이를 자른 행위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남성우월주의에 손상을 가한 것이지만 익살이 내포되어 있어 관람자를 선동하는 데 더 비중을 둔 것으로 나타났다.
케이지와 튜더에게는 공격을 가했으면서도 함께 앉아 있던 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은 공격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더 이상 슈토크하우젠과 전자음악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남준의 해프닝을 위해 자신의 아틀리에를 공연장으로 개방한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는 나중에 슈토크하우젠의 아내가 되었다.


백남준은 케이지의 제자들로 구성된 플럭서스Fluxus에 가담했는데, 플럭서스는 1962년 독일에서 형성되어 1970년대 초까지 활약했다.
예술과 인생을 연결시킨 플럭서스의 강령은 “부르주아적인 병과 죽은 미술을 이 세계에서 몰아내고 혁명적인 조류를 미술에 촉진하며 살아 있는 미술과 반미술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플럭서스의 퍼포먼스는 형식과 표현이 내용과 인지와 동일해야 하고 반복될 수도 없으며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플럭서스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한 보이스는 백남준보다 11살 많았고 백남준의 성을 독일식 발음으로 ‘파이크Paik’라고 불렀다.
백남준은 1986년 보이스가 타계했을 때 추모제를 지내며 자신이 성공을 거둔 것이 무명시절 보이스를 만난 덕택이라고 말할 정도로 보이스는 그에게 동료 중 동료였다.


플럭서스 후기에 백남준과 샬럿 무어맨의 해프닝은 비디오아트의 영역으로 이전되면서 좀 더 진전된 복합매체의 공연이 되었다.
<전자와 예술과 비빔밥>이란 제목의 수필에서 백남준은 복합매체를 비빔밥에 비유하면서 비빔밥의 본질은 그것이 콩나물도 숙주나물도 표고도 시금치도 아니란 점에 있다고 역설했다.
백남준과 무어맨은 1965년 보니노 갤러리에서 선보인 2인조 해프닝에서 <성인만을 위한 첼로 소나타 1번>을 소개했는데, 무어맨은 ‘첼로 조곡’을 연주하면서 거의 누드가 될 때까지 연주와 옷 벗기를 계속했다.
같은 해에 발표한 <생상스 테마의 변주곡>에서 그녀는 좀 더 과격한 행위를 보여주었는데, 생상스의 ‘백조’를 연주하다말고 옆에 준비된 물탱크로 기어 올라가 물속에 몸을 담그고 내려와 젖은 몸으로 연주를 계속했다.
이를 통해 백남준은 섹스와 연결된 음악을 보여주려고 했다.
무어맨은 백남준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우발적인 노출이 문제가 되어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음악과 섹스를 주제로 한 이 퍼포먼스에서 무어맨은 바늘이 주렁주렁 달린 비키니차림으로 무대에 나와 첼로를 연주하고, 3장 아리아에서는 머리에 헬멧, 상체에는 미식축구 유니폼을 걸치고 하반신을 완전히 벗은 채였다.
4장에서는 완전누드로 첼로를 연주했다.
이 퍼포먼스는 경찰관의 개입으로 중단되었고 백남준과 그녀는 체포되었다가 이튿날 풀려났다.
공연에 관한 외설시비를 뉴욕의 법정에서 가리게 되었다.
예술에 있어서 표현의 자유를 확보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두 사람을 적극 후원했다.
록펠러 주지사는 외설과 표현의 자유는 다르다는 최종 의견을 발표했으며 이 소식이 <뉴욕 타임스>에 대서특필되면서 두 사람은 뉴욕 화단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많은 예술가와 이론가들이 백남준의 편에 섰다.
재판에서 승소한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유흥업소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나이트클럽에 출연하신다면 현찰 5천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백남준의 해프닝은 연극적 음악, 혹은 음악적 연극으로 그는 케이지를 만난 뒤 유럽 음악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고 해프닝을 통해 음악과 인생을 연결시키는 데 앞장섰다.
“문학과 시각예술과는 달리 음악에서는 성적 영역이 개발되지 않았다”면서 그는 음악에 에로티시즘을 도입하여 음악의 시각화작업을 완수하려고 했으며, 여체의 노출과 성적 요소로 관객을 자극하여 그들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가려고 했다.
1969년 뉴욕의 하워드 와이즈 갤러리에서 선보인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에서 무어맨은 3kg이나 되는 TV브라를 걸치고 첼로를 연주했다.
그녀의 가슴에 장착된 2대의 작은 화면브라에서는 현재 방영되고 있는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이나 비디오테이프 또는 카메라가 있는 폐쇄회로 설치를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다.


2년 후 백남준은 <TV첼로와 비디오테이프를 위한 협주곡>을 발표했는데 무어맨이 3대의 모니터를 플렉시 유리상자 안에 넣은 TV첼로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백남준은 무어맨의 몸을 기계 옷으로 가리게 하고 기계의 인간화를 통해 인간과 과학과의 조화를 보여주려고 했다.
백남준은 엿보기 취미를 무어맨의 성적 매력에 주목시킴으로써 그녀를 섹스의 대상으로 이용한다는 비난을 종종 받았지만 이런 비난은 그녀가 순수 예술행위를 하다는 걸 간과한 것이었다.
퍼포먼스 기간 동안 그녀는 작곡의 일부로 정해진 틀 안에서만 행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플럭서스 전통을 좇아 예술의 표현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며, 기꺼이 백남준의 작품에서 한 요소로 연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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