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예술의 전당 내 한가람미술관 3층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추상표현주의에 관해 공부하기 전에 다다와 초현실주의를 미리 알아두어야 한다.

다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16년 뉴욕과 취리히에서 다다 운동이 처음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다다는 전쟁의 야만성에 환멸과 혐오감을 느끼고 전쟁을 가능하게 만든 전통적인 사회 가치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일어난 젊은 시인, 작가, 예술가, 음악가들의 운동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자살 직전에 놓인 문화를 냉소와 풍자로 비웃었다.
다다주의자들은 예술의 전통을 공격했는데 전쟁 이전의 아방가르드 경향까지도 그 대상이 되었으며, 반예술의 풍자적 패러디를 통해 예술의 개념 자체를 타도하려고 했다.
다다가 남긴 긍정적 결과는 반예술 개념이다.
이 개념은 20세기 내내 끊임없이 나타났으며, 이런 생명력이야말로 다다가 단순히 전통 예술 개념을 희화, 패러디, 조롱하며 거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정통 미술의 전당이던 화랑, 미술관 등을 대신할 새로운 무엇을 창출했다는 증거이다.

다다주의자들은 작품구성에 있어 ‘우연’의 원리를 처음으로 사용했고, 작품 제작에 있어 오토마티즘 처음으로 진지하게 실험했다.
이후 오토마티즘 원칙은 초현실주의자들과 추상표현주의의 여러 화파에 의해 발전되었다.
1922년경 다다가 붕괴되자 초현실주의가 그 뒤를 이었으며 다다를 주도한 많은 예술가들이 초현실주의를 주도했다.

초현실주의Surrealism(쉬르레알리슴)
진정한 현실은 무의식에 대한 비논리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이런 통찰은 특정한 비논리적인 오토마티즘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브르통은 1928년에 발표한 <초현실주의와 회화>에 적었다.
“어떠한 선입견이나 의도도 없이 쓰기를 재촉하는 펜과 그리기를 재촉하는 연필이, 잠깐의 유행이 아니라 최소한 시인이 자신의 내면에 감추어둔 감정적인 모든 것을 드러내줄 수 있는 매우 고귀한 내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말은 1917년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고 브르통에 의해서 규정되었다.
초현실주의 운동은 20세기 미술운동 중 가장 고도로 조직화되고 엄격하게 통제된 운동이었다.
초현실주의의 도덕적, 실천적 지도자는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불린 시인 앙드레 브르통(1896~1966)이었다.
정신장애를 공부하기 위해 낭트에서 의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경험한 정신이상자에 대한 연구가 훗날 비이성적 행위에 대한 관심의 근원이 되었다.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시만큼이나 회화를 늘 염두에 둔 브르통은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몇몇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성공으로 인해 대중이 초현실주의가 우선적으로 양식상의 문제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자 몹시 당황해 했다.
브르통은 달리를 교의상의 이유를 들어 여러 차례 초현실주의 운동으로부터 추방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유럽이 전통적인 도덕에서만 파산한 것이 아니라 예술, 문화, 과학, 철학, 그리고 정치에서까지도 파산에 도달한 것으로 인식했으므로 그들의 행위는 광적이었고, 어린아이들처럼 무책임했으며,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 사람들처럼 새로운 것을 찾았다.
초현실주의자들은 1925년 카다브르 엑스키Cadavre Exquis라는 게임을 했다.
‘아름다운 시체’라는 프랑스어의 카다브르 엑스키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한 조를 이루어 서로 다른 사람이 한 말이나 그림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차례로 문장이나 그림을 만들어가는 놀이의 일종이다.
오래된 놀이이지만 초현실주의자들이 집단 무의식을 끌어내거나 그들이 무의식적 창조의 또 다른 길이라고 여긴 우연의 요소를 개발하기 위한 고안으로 활용하면서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오토마티즘 원리를 중요하게 받아들였지만 단일한 초현실주의 양식은 나타나지 않았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행위를 크게 둘로 나누면 오토마티즘과 환상적인 꿈의 세계를 추구하는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들은 꿈에 관한 프로이트의 의견을 직접 청취했는데 프로이트는 “단지 수집만 한 꿈들은 아무것도 시사하는 바가 없으며, 그런 것을 묘사한 그림이 무엇을 말할 수 있을는지 나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고 경고했다.
프로이트가 요구하는 조건이 배제된 정신분석적인 작품들이 대부분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추구한 점이었으므로 그들의 작품에는 일정한 경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브르통은 프로이트의 잠재의식의 세계를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칼 마르크스의 정신에서의 혁명도 지지했다.
공산주의에 관심이 많은 그는 근본적인 인생의 변화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정의를 찾는 데서 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브르통은 1927년에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고 인류를 변화시키려는 공산주의의 과감한 노력에 매혹되었다.
그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 사고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공산주의에 협력하자고 권유했는데, 그는 자신의 모순된 언행을 독선으로 정당화하려고 꾀했다.
정치에 무관심한 예술가들과 전적으로 공산주의에 동조한 아라공 같은 예술가들 모두 브르통의 오만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브르통은 자신에게 반역하는 예술가들을 그룹에서 추방했으며 두 번째 <초현실주의 선언문>에서 “진실과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겠다고 장담했는데 이쯤 되면 초현실주의는 문학과 정치운동을 미술로 이루려는 것 그 이상이 아니었다.

초현실주의는 다행스럽게도 정치에 무관한 예술가들에 의해서 확산되었다.
그들은 에른스트, 마송, 탕기, 마그리트, 미로, 그리고 달리였다.
특히 달리의 활약이 현저하게 눈에 띠였다.
달리는 그림으로만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과 기괴한 행위, 옷차림, 코믹한 콧수염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그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 예술가들 가운데 유럽의 대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인물은 없었다.
뉴욕이 세계적인 예술의 도시로 부상할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쟁 덕분이었다.
나치의 괴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는 모더니즘 미술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프랑스를 점령한 뒤 문화 선진국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모더니즘 미술을 소멸시키려고 했다.
한때 사실주의 화가를 꿈꾸었던 히틀러는 모더니즘 예술가들을 타락한 예술가들로 단정했으며, 그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정신병원에 보내야 한다고까지 공공연하게 말하면서 “타락한 예술가들이란 하늘을 녹색으로 칠하거나 땅을 파랗게 칠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했다.
나치 언론은 모더니즘 작품들을 “자살한 시체들”이라고 불렀고, 나치정권은 자살한 시체들을 미술관과 화랑에서 끌어내어 어두운 방에 가두었다.
수많은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많은 작품들이 그때 사라지고 지금은 없다.
유럽의 전체주의 국가들에서는 창조적 예술이 억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독일군 점령지가 확대되자 유럽의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신변에 위협을 느껴 미국으로 망명했으므로 뉴욕이 호기를 맞았던 것이다.

추상표현주의는 통일된 하나의 양식이 아니라 같은 시기에 뉴욕에서 활약하던 일련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칭하여 일컬은 용어로 일부 화가들의 작품은 추상적이지도 표현적이지도 않았다.
구상을 고집한 데 쿠닝의 작품은 전혀 추상이 아니었고 뉴먼의 작품은 추상이지만 전혀 표현적이지 않았다.
고틀리브는 상형문자와 같은 그림을 그렸으며, 윌리엄 배지오티스, 호프만, 아슐리 고르키 등의 작품에는 구상적인 요소가 있었다.
구태여 공통을 찾는다면 폴록의 푸어드poured(물감을 뿌리는 방법)와 스틸, 로스코의 컬러필드Color-Field(색면회화)는 표면으로는 다르나 공간상 그림과 바탕의 관계가 근접하다는 점, 전체적 구성all over, 다초점, 또는 무초점의 공간과 정신내용을 지녔다는 점이다.

추상표현주의라는 용어가 1940년대와 50년대 뉴욕에서 활약하던 일련의 예술가들의 작품에 나타난 공통점을 묶어서 통칭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지만 이 용어가 폭넓게 사용된 데는 예술적 목적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평론가와 화상들은 뉴욕의 새로운 미술의 경향으로 보이는 것에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미국 모더니즘의 발전을 유럽의 그것과 분리할 수단을 마련코자 했다.
그들은 미국 문화의 진정성과 창의성을 내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사무엘 쿠츠Samuel Kootz는 여태까지 미국에서 희망이 없었지만 이제 폴 세잔에서 유래한 추상과 표현주의 두 경향을 결합하는 데서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으며, 1943년 『미국 회화의 새로운 개척 New Frontiers in American Painting』에 적었다.
“오늘날 우리는 지리적으로 세계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전쟁, 참화, 만행으로 예술가들은 다른 나라에서 작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몇몇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건너왔으며, 그들은 우리의 노력에 탁월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쿠츠는 추상과 표현주의 두 경향을 결합을 강조함으로써 그가 “프랑스의 공허와 데카당스”의 구현으로 믿은 초현실주의에 대한 반발을 드러냈다.
그러나 쿠츠와 마찬가지로 화랑을 갖고 있던 시드니 재니스Sidney Janis는 1944년 『미국의 추상과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초현실주의의 장점에 관해 언급함으로써 쿠츠와는 다른 태도를 보여 당시 뉴욕화단의 상황이 유럽 모더니즘에 대해 비판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뚜렷한 선두주자도 없고 경쟁적인 예술가 그룹이 없던 1940년대 초에 미국 미술의 미래가 잠정적이나마 모호하고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은 뉴욕시나 시외에 살면서 자주 만나 예술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나누었다.
그들은 유럽으로부터 피신해온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도움을 받아 유럽이 몇 십 년 동안 이룩한 성과를 짧은 기간에 알게 되었고 그런 토대 위에 자신들의 이상을 키워나갔다.
여기에 문필가, 평론가, 시인들이 가세하여 예술에 대한 논의를 더욱 진전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귀를 기울였으며, 고대 신화에서 형이상학적 인간의 문제를 다뤘고, 자신들의 믿음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상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사상들 중에는 쇠렌 키에르케고르,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칼 구스타브 융, 키르케고르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로 시작하여 장 폴 사르트르로 이어지는 실존주의Existentialism 철학 등 유럽에서 온 것들도 있고 미국의 지방적이며 정신적인 개척정신을 반영한 것들도 있다.

양식에 있어서 뉴욕의 예술가들이 주로 선호한 유럽의 양식은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였다.
두 경향은 상호배타적이지는 않더라도 정반대의 것으로 인식되었다.
착각에 기초하는 이차원의 캔버스에서 입체주의는 회화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용이했으며, 정신해방의 수단으로는 초현실주의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억압에 대한 변혁의 갈망에 용이했다.
몇몇 예술가들은 멕시코 벽화 화가들의 양식에서 영향을 받았고, 전시회에서 모네와 마티스의 작품을 직접 보고 그들의 양식에서 교훈은 얻기도 했는데, 마티스의 작품에서 평편한 색면의 사용이 공간을 느끼게 하면서도 공간 없는 애매한 상태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았으며, 모네의 <수련> 시리즈에서 커다란 화면에 명확한 형태적 구조가 드러나지 않고 넓은 표면과 뚜렷하고 표현적인 붓질이 결합되어 있는 점에 호감을 가졌다.
미술사에서 최초로 추상에 도달한 바실리 칸딘스키의 비정형회화도 그들에게 많은 걸 시사했다.
실용적인 면에서는 유럽 모더니즘에 정통한 망명예술가 호프만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이 그들에게 자신감을 고취시켰다.

페기 구겐하임의 화랑 금세기의 미술에서 자문을 맡았던 하워드 퍼첼은 1945년 자신의 67 화랑에서 ‘평론가들의 문제’라는 명칭으로 전시회를 열었는데 성공적이었다.
뉴욕에서 활약하는 호프만, 고키, 고틀리브, 폴록, 로스코의 작품을 한스 아르프, 파블로 피카소, 앙드레 마송, 호안 미로와 같은 유럽 대가들의 작품과 나란히 걸어놓은 전시회는 뉴욕에서 새로운 유파의 미술이 형성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퍼첼은 그것을 토템과 초기 그리스, 그리고 기타 고대 이미지들을 차용한 추상과 초현실주의의 결합으로 보았다.
전시 도록에서 퍼첼은 새로운 유파를 ‘새로운 변형’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그 용어가 부적절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보다 적절한 대체 용어를 언론이 고안하도록 고무시켰다.
『뉴욕 타임스』의 에드윈 올던 주얼은 “이즘이 미국 화가들 사이에서 가장 유력한 후원을 얻고 있다. ... 우리가 이제 진정한 미국회화를 보고 있다고 믿는다”고 적었다.
주얼은 이즘에 적용될 적절한 용어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분명 꿈틀대는 운동의 주요 특징을 단번에 드러낼 수 있는 간결하고 핵심적인 용어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네이션』지의 평론가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미국회화가 세계 미술계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입체주의와 그 상속자의 모든 자취를 제거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린버그는 1943년 금세기의 미술에서 열린 폴록의 첫 개인전을 격찬하면서 폴록의 작품에서 미국회화의 미래를 보았다.

추상과 표현주의라는 두 양식의 질서정연하고 이성적인 전개에 대한 쿠츠의 주장 그리고 입체주의에서 유래한 새로운 변형이라는 퍼첼의 개념에도 불구하고 뉴욕 화가들의 작품에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깊게 배어있었다.
미국회화는 유럽의 선례에 의존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평론가들은 이를 진정한 미국의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민족주의적 해석이었다.

오토마티즘
오토마티즘은 무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예술가가 손의 움직임에 대한 의식적 통제를 억제하는 방법으로 회화나 드로잉 또는 저술과 그 밖의 여러 작품의 제작에 사용되었다.
20세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으로서의 오토마티즘은 다다이스트들에 의해 우연의 효과를 노린 데서 확산되었다.
다다이스트들이 오토마티즘을 감정의 개입 없이 냉정하게 사용했던 데 반해 초현실주의자들은 오토마티즘을 통해 무의식을 탐험하여 철저하게 개인적 용도로 사용했다.
오토마티즘은 마타를 통해 추상표현주의 화가들 특히 고키와 로버트 머더웰을 통해 미국에 알려졌다.
마타에게 오토마티즘은 숨겨져 있는 인간의 잠재력과 그것의 안팎을 싸고 있는 삶의 왜곡된 구조를 지시할 수 있는 표현양식을 창출해낼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였다.

추상표현주의라는 용어가 아직 정착되기 전인 1947년에 뉴욕의 베티 파슨스 화랑에서 ‘상형문자 그림’이란 명칭으로 전시회가 열렸다.
그곳에서는 바넷 뉴먼을 비롯하여 호프만, 로스코, 스틸, 라인하르트, 테오도로스 스테이모스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뉴먼은 그가 말한 미국회화에서의 새로운 힘을 규명하려고 했다.
뉴먼은 유럽의 원형과 비교하지 않는 가운데 ‘상형문자 그림’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이 “원시미술 충동의 현대적 대응물”이라고 주장했다.
뉴먼은 “최초의 인간은 미술가였다”는 말로 미술의 기원을 태초로 확립하여 서구 유럽이 미술의 원천이라는 지배적인 믿음에 대안을 제시했다.
이는 모더니즘의 권좌에서 파리를 축출하고 미국과 다른 나라에게 미술의 유산을 재평가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은 계획되지 않은 자발성을 통해 무의식 상태의 보편적인 창조력을 끌어내어 해방시킬 수 있다는 신념 아래 초현실주의로부터 즉흥적으로 마음속의 것을 끌어내는 원리와 오토마티즘을 주로 이어받았다.
추상표현주의, 즉 “뉴욕화파의 첫 세대” 예술가들은 1940년대 말에 이르러 성숙한 양식을 구사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에 이루어진 작품들이 가장 훌륭하다.
추상표현주의는 미국 미술로서는 처음으로 유럽 화단, 특히 에콜 드 파리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 미술은 추상표현주의와 더불어 비로소 국제무대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추상표현주의 회화에서 특별히 잭슨 폴록의 작품을 염두에 두고 뉴욕 브루클린 태생의 미국 작가, 강연가, 미술 행정가, 평론가 해럴드 로젠버그는 액션페인팅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했다.
로젠버그는 1952년 시각 예술에 관한 첫 번째 중요한 글을 『아트 뉴스』에 기고했는데 이 에세이에서 액션페인팅이란 새 용어를 사용했다.

추상표현주의 이론가들
디트로이트 태생의 앨프리드 바 주니어(1902~81)는 모던아트의 이해와 연구를 위한 지적 틀을 형성하는 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로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바는 프린스턴대학에서 미술과 고고학을 공부하고 1922년 졸업한 뒤 이듬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화가 피에로 디 코시모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수개월 동안 유럽을 여행한 뒤 미국으로 돌아와 배서칼리지(1923~24), 하버드대학(1924~25), 프린스턴대학(1925~26), 웰즐리칼리지(1926~27)에서 미술사를 가르쳤다.
이 시기에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20세기 미술이었다.
1929년에 새로 개관한 모마에 관장으로 임명되고 이후 40년 동안 모마의 소장품을 확보하고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피카소의 걸작이며 20세기 미술의 대표작인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도 바에 의해 모마에 소장되었다.
저술활동을 위해 1943년에 관장 직을 사임했지만 연구 책임자로서 계속해서 일했으며 1967년에 미술품 수집책임자로 은퇴했다.
은퇴 후 38년 동안의 모마 근무경험을 바탕으로 영구소장품에 해당하는 모든 회화와 조각을 담은 방대한 도록을 1977년에 편찬했는데, 이것이 『뉴욕 모마의 회화와 조각 1929~67』이다.
여기에는 999명의 예술가들의 작품 2,622점의 목록이 수록되어 있고 이중 약 삼분의 이 정도의 작품 도판이 실렸다.
바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피카소: 그의 미술 50년』(1946)과 『마티스: 그의 미술과 대중』(1951)이다.

바는 1952년 12월 14일에 발간된 잡지 『뉴욕 타임즈』에 추상표현주의에 관해 ‘새로운 미국회화’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팔을 휘두르고 커다란 제스처를 써서 그린 그림은 화가와 관람자 모두에게 도전한다.
그것들이 눈을 덮고 그것들은 내재적인 것들로 보인다.
그것들은 종종 벽화만큼이나 크지만 그것들의 환영적인 깊이의 결여와 마찬가지로 스케일도 동시 발생적으로 건축적 장식과 관련이 있다.
그것들의 평편함은 오히려 예술가의 표현에 대한 최고의 도구처럼 실질적 회화과정과 더불어 형태, 질감, 컬러, 그리고 실제 세계의 공간에 대한 모방적 암시를 배제하는 경향이 포함된 예술가의 관심의 결과이다.

의도에 의해서이기보다는 결과로서 대부분의 그림은 추상으로 보인다.
아직은 그것들이 형식적이거나 비구상은 아니다.
거기 이론에는 ‘조형적 가치 plastic values’, 구성, 선의 특질, 표면의 아름다움, 색의 조화에 대한 전통 미학과 같은 어떤 선입견도 없다.
이런 것들이 회화에서 발생할 때 - 그것들이 종종 나타나며 - 그것은 회화가 시작되는 최초의 혼돈만큼이나 거의 직관적인 질서를 위한 투쟁의 결과이다.

수준 높은 추상에도 불구하고 화가들은 자신들이 주제 문제, 혹은 내용에 깊게 관여되었음을 주장한다.
그렇지만 내용은 데 쿠닝, 배지오티스, 고틀리브의 그림에서 보듯 인지할 만한 형태들이 부상할 때 조차에도 명백해지거나 분명해지지 않는다.
좀처럼 어떤 의식연합도 이런 그림들이 전하거나 암시하려고 하는 두려움, 쾌활함, 분노, 과격함, 혹은 평온의 감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간략하게 말하면 원리의 문제와도 같이 이런 화가들은 그들의 작품에서 쉽게 ‘전달’하는 걸 만드는 데 있어 사변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비타협적인 태도에 불구하고 그들의 추종자들이 크게 늘고 있는데 그림 자체가 심미적이며, 감성적이고, 미학적 그리고 보는 순간 거의 신비적인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예술가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신들의 그림이 완고하고, 어려우며, ‘자아’나 ‘실재’를 발견하는 데 있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기조차 한다고 느낀다.
여기서 말하는 필사적인 노력이란 자신의 전체를 던지는 무모한 시도로서 ‘나는 그린다 고로 존재한다’에 해당한다.
빈 캔버스를 직면해서 그들은 칼 야스퍼스)의 실존적 구절 “행위, 결정, 믿음의 도약으로 궁극적인 존재를 파악하기를” 시도한다.
...
초현실주의는 이 그룹의 화가들에게 철학적 기술적인 면 모두에서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운동 초기인 전쟁 중에 몇몇 화가들은 앙드레 브르통의 프로그램인 ‘이성과 밖에 있는 모든 미학적 도덕적 선입견에 의해 조절되는 모든 것이 부재하는 가운데 순수한 정신적 오토마티즘’의 영향을 받았다.
오토마티즘은 당시, 그리고 여전히 지금에도 하나의 기술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지만 조절이나 더불어서 일어나는 개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처음 브르통이 의존했던 프로이트와 막스주의는 융의 신화와 고대의 상징에 대한 관심보다는 덜 영향을 끼쳤다.

1919년 베를린에서 단명하게 사용된 추상표현주의란 용어는 (나에 의해서) 1929년경 칸딘스키의 초기 추상에 적용해 사용되었고, 미국인의 운동을 예고했고, 미국인의 운동에 처음 적용된 건 1946년이었다.
그렇지만 이 전시회에 참여한 화가들은 적어도 순수, 실용주의적 의미에서 자신들의 작품이 추상이라는 걸 부인한다.
그리고 타당하게도 근래 미국에서 자주 전시된 하나의 운동으로서의 독일 표현주의와 어떠한 관련도 부정한다.

클레먼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1909~94)는 당대 프랑스 미술이 모더니즘의 양식적 어휘들을 일련의 세련된 장식으로 퇴보시켰다는 생각에 근거하여 입체주의의 쇠퇴를 주장했다.
그의 비평적 분석은 작품의 내용, 은유, 그리고 공명하는 주관을 제쳐놓고 미술의 형식적 속성에 근거하게 되었다.
실존주의를 중시한 로젠버그와는 달리 미국회화의 새로운 우월성을 부각시키려는 그린버그의 관심은 작품의 독창성과 화면의 제거에 집중되었다.
구성의 평면성과 ‘전면 균질성’으로 인해 그는 폴록과 그 밖의 화가들의 작품을 특징짓는 것이 본래의 ‘순수성’이라고 믿었다.
한때 장 뒤비페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가들 중 하나”라고 주장했던 그는 이제 폴록이 “프랑스 화가들보다 훨씬 다양하고 궁극적으로 할 말이 더 많다”고 주장했다.

그린버그는 폴록의 작품에 나타난 활달한 선과 뿌려진 물감을 미국 화가에 의한 최초의 혁신으로 보았으며, 시각적 선례가 없던 일로 보았다.
시애틀에 거주하면서 1940년대에 지속적으로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그린버그가 한때 옹호한 마크 토비와 같은 화가조차 폴록의 탁월한 구성에 비견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린버그는 한때 작은 하얀 선들이 이룬 복잡한 망에서 모든 위계적 배열도 사라진 토비의 1940년대 초기 작품에 나타난 혁신적 특징을 칭찬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런 특징에서 스위스 화가 클레의 느낌이 난다고 했다.
폴록의 등장과 더불어 그린버그는 토비의 작품을 지나치게 편협하고 한정된 것으로 인식했다.
그는 토비를 오히려 시대에 뒤쳐진 인물로 간주했다.
새로운 미국회화의 진정성을 정의하려는 노력이 가속화되어 경쟁의 상태에 이르자 재빠르게 비평적인 열정과 오만 그리고 도전적인 민족주의의 색채를 띤 배제의 정치가 작동된 것이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56)
1929년 뉴욕으로 와서 아트스튜던츠리그에서 지방주의 화가 토머스 하트 벤턴의 지도를 받으며 회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폴록은 지방주의 양식으로 작업하면서 동시에 멕시코 벽화화가들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1940년대 중반까지 다소 틀에 박힌 우아함을 지닌 선적인 양식과 풍부한 임파스토를 강조한 낭만적 양식이라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를 유명하게 만들고 추상표현주의 운동의 기수이자 당대의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알려지게 한 ‘뿌리고 튀기는 drip and splash’ 기법은 1947년 무렵 다소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폴록은 이젤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방법 대신에 캔버스를 바닥이나 벽에 고정시키고 통에 든 물감을 붓고 뿌렸다.
그 다음 붓이 아니라 막대기, 흙손, 나이프로 물감을 다뤘고 때로는 모래, 유리조각, 혹은 이물질을 혼합하여 임파스토 효과를 내기도 했다.
이런 방식은 화가의 무의식을 드러내거나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 이론과 공통점이 있다.
동일한 이유에서 이는 제스처 회화로 불렸으며 미국에서는 액션페인팅이라는 신조어가 사용되었다.

폴록은 1958년 윌리엄 롸잇William Wright이 진행하는 라디오에 출연하여 말했다.

롸잇: 미스터 폴록, 모던아트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폴록: 모던아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컨템퍼러리 목표에 대한 표현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롸잇: 고전적 예술가들도 자신들의 시대에 대한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까?

폴록: 그랬습니다. 그들은 매우 잘 해냈습니다. 모든 문화 중국, 르네상스 등 모든 문화가 당대의 신급한 목표들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방법과 기교를 갖고 있었습니다. 내게 흥미를 끄는 건 오늘날의 화가들이 자신들 밖에서 주제를 발견하려고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모던 화가들은 각기 다른 출처에서 작업합니다. 그런 출처 내에서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롸잇: 모던 미술가들은 고전 미술품의 가치가 되는 특성과는 어느 정도 격리되어 있고 그런 특성을 좀더 순수한 형상 안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폴록: 아, 훌륭한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요.

롸잇: 미스터 폴록, 선생의 회화방법에 관해 많은 논평과 논란거리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선생이 들려줄 말이 있습니까?

폴록: 새로이 요구되는 것은 새 기교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모던 미술가들은 자신들의 진술을 새 방법으로 알리는 새 길을 알고 있습니다. 모던 화가는 이 시대, 비행기, 원자폭탄, 라디오 등을 르네상스의 낡은 형태나 과거 문화의 어떤 형태로 표현해서는 안 됩니다. 각 시대는 각 시대에 걸 맞는 기교를 발견하게 됩니다.

롸잇: 선생의 말은 문외한과 비평가들은 새로운 기교를 해석하는 자신들의 능력을 개발해야만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까?

폴록: 당연합니다. 낯설음은 마멸되며 우리가 모던아트의 좀더 깊은 의미를 발견할 거라는 뜻입니다.

롸잇: 문외한이 선생의 작품을 대하게 되면 그들은 폴록의 그림이나 모던 회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느냐고 묻고 또한 모던아트를 감상하는 방법을 어떻게 배워야 하느냐고 묻곤 합니다.

폴록: 어떤 식으로 바라보기보다는 피동적으로 바라보고 그림이 제시하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며 자신들이 찾는 미리 정해놓은 아이디어나 주제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롸잇: 화가는 무의식으로 그림을 그리며 캔버스는 반드시 그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의 무의식처럼 작용해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폴록: 내가 사용하는 물감 대부분은 흐르는 류의 액체입니다. 나는 붓을 붓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막대기처럼 사용할 때가 많고 붓은 캔버스 표면에 닿지 않고 바로 그 위에만 있게 됩니다.

롸잇: 붓으로 캔버스를 칠하기보다는 막대기로 액체 물감을 사용하는 것이 왜 유익한지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폴록: 음, 그렇게 하는 것이 좀더 자유로우며 캔버스 주위로 움직일 수 있고 매우 편해서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롸잇: 음, 막대기가 붓보다 다루기 더 어렵지 않습니까? 너무 많은 물감을 사용하거나 뿌리게 되거나 그 밖의 단점이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붓을 사용하게 되면 선생이 원하는 바로 그곳에 색을 칠할 수 있고 원하는 대로 정확하게 그릴 수 있지 않느냐 하는 말입니다.

폴록: 그렇지 않습니다. 경험으로 봐서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으며 ... 물감이 흐르는 것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되고, 좀더 말하자면 나는 우연을 사용하지 않는데 우연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롸잇: 제가 알기로는 프로이트가 말하기를 우연이란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것입니까?

폴록: 그런 일반적인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롸잇: 그렇다면 선생은 실질적으로 캔버스에 그려질 이미지를 미리 마음에 두지 않는군요?

폴록: 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왜냐면 그것은 창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방법으로 말하자면 정물을 그릴 때 오브제들을 놓고 그것들을 보면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그리는 그런 것과는 매우 다른 방법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관념을 가지게 됩니다.

롸잇: 그렇지만 캔버스에 그려지게 될 미리 구상한 이미지를 실제로 갖고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폴록: 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창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새롭다는 건 작업하는 것, 예를 들면 오브제들을 장치하고 그것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리는 정물화를 그리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나는 내가 하는 작업에 대해서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롸잇: 미리 스케치를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지요?

폴록: 그래요.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 드로잉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직접 하는 것이지요. 난 드로잉을 하고 작업하지는 않으며 최종적인 그림을 위해 스케치하거나 드로잉하거나 컬러스케치를 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오늘날 좀더 긴급하게, 좀더 직접적으로 하는 것이 더욱 더 진술을 직접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롸잇: 음, 자, 미스터 폴록, 모던회화 전반에 관해 말해주시겠습니까? 선생과 동시대 사람들의 회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폴록: 음, 오늘날의 회화는 확실히 매우 활력이 넘치고, 매우 생기가 있으며, 매우 자극적입니다. 뉴욕에 있는 다섯 혹은 여섯 명의 화가들은 매우 활력적인 작품을 제작하고 있으며 캔버스에 직접 그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크 토비Mark Tobey(1890~1976)
토비는 1925-27년에 유럽과 근동 지역을 여행했다.
그는 1931년 영국 데번셔 다팅턴 홀Dartington Hall에 상주하며 정기적으로 작품을 소개했고, 상하이에서 중국 서예를 배운 뒤 데번셔로 돌아와 소위 ‘하얀 서체 white writing’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서체를 연상시키는 선과 형태가 올오버 구도로 캔버스를 메운 것이다.
개별 부분들의 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회화 구성법을 탈피한 것이었다.
토비는 이런 종류의 올오버 구성의 선구자이며, 그 후 폴록이 그 뒤를 이었다.

토비는 미국에서 확산되고 있던 비개성주의에 관심을 가지며 이를 과도한 산업화와 물질주의의 산물로 보았다.
그는 가느다란 필선을 겹쳐나가는 하얀 서체 기법을 통해 “현대 도시의 광기 어린 리듬을 그릴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르네상스적 기법으로는 접근되지 않는 것이었다”고 했다. 액션페인팅 화가들과는 달리 토비는 “회화는 행위라는 운하보다는 명상이라는 오솔길을 통과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토비는 바하이즘Bahaism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바하이즘이란 이슬람교 종파의 하나인 바비즘에서 전화한 새로운 종교운동 및 그 교의를 말한다.
바브Bab의 제자 미르자 후사인 알리Mirza Hussain Ali가 스스로 ‘신의 광휘’란 뜻으로 ‘바하 알라Baha Allah’라고 칭하고 1863년에 창시했으며, 모든 종교의 근원은 같다고 하며 그 통일을 주장했고, 나아가 남녀평등과 국제 평화를 강조했다.
바하이즘은 세계에는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커다란 힘이 존재하며 이를 통해 인간은 점차 세계의 통일성과 인류의 하나 됨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토비는 말했다.
“여러 종류의 종교가 있지만 그것들은 여러 종류의 명칭들에 불과하고 오로지 하나의 종교가 있을 따름이다. 모든 종교의 뿌리는 바하이의 견지에서 볼 때 세계와 인류가 하나라고 하는 이론에 기초한다.”

모던아트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의 공식 명칭은 휘트니 미국 미술 뮤지엄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이다. 상류층에서 태어난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Gertrude Vanderbilt Whitney(1875~1942)는 1900년에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907년에 그리니치빌리지에 작업장을 차렸다.
아버지는 대단한 부호인 철도왕 코닐리어스II 밴더빌트이다.
그녀는 1896년에 금융가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폴로 선수인 해리 페인 휘트니와 결혼했다.
결혼 후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게 되었으며, 뉴욕 아트스튜던츠리그와 파리에서 조각을 배웠다.
그녀는 1929년에 500여 점의 미국 회화, 조각, 소묘로 이루어진 자신의 컬렉션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결과로 이듬해에 휘트니 미술관을 설립할 것을 공표했으며 1931년에 8번가 웨스트 10번지에 적갈색 사암으로 개조된 건물에 미술관을 개관했다.
1954년에 모마MoMA(Museum of Modern Art)에서 제공한 54번가 웨스트 22번지의 세 건물로 이전했고, 1966년 매디슨 애비뉴 945번지에 있는 마르셀 브로이어가 설계한 건물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휘트니 미술관은 로버트 헨라이 밑에서 공부하고 도시생활의 고독, 공허함, 정체감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린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의 미망인이 기증한 2천 점의 작품을 비롯하여 20세기 미국 미술에 관한 세계적으로 가장 크고 훌륭한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MoMA(Museum of Modern Art)
예술가가 아닌 미술 후원자들도 모던아트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1929년에 모마가 릴리 블리스Lillie Bliss, 애비 록펠러Abby Rockefeller, 메리 퀸 설리번Mary Quinn Sullivan의 주도로 개관했다.
애비 록펠러는 로드아일랜드의 상원의원 넬슨 앨드리치의 딸이자 19세기 석유재벌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1839~1937)의 아들 존 D. 록펠러 주니어의 아내였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가 1937년에 사망했을 때 그의 재산은 14억 달러로 1937년 GDP의 1.54퍼센트에 해당했다.
모마는 휘트니 미술관과는 달리 회화와 조각뿐 아니라 모든 시각예술에 관심을 보였다.
필립 굿윈Philip Goodwin과 에드워드 더렐스톤이 설계한 1939년의 미술관 건물은 후에 필립 C. 존슨Philip Cortelyou Johnson(1906~2005)의 설계에 따라 증축되었고, 존슨은 1953년에 미술관의 정원도 설계했다.
모마는 2004년에 1조원을 들여 일본인 건축가 다니구치 요시오谷口吉生에게 증축, 리모델링을 하게 했는데, 요시오는 12만 점이나 되는 소장품을 효율적으로 전시할 수 있도록 1만7천 평의 넓이로 증축하면서 재료로 유리, 알루미늄, 화강암을 사용했다.
“도시 속의 도시, 도시 속의 미술관을 디자인하겠다”는 요시오는 “건축물이 눈에 띄지 않고 단지 마시듯 느낄 수 있도록 했다”면서 “우리가 좋은 집을 원한다면 집에서 편안하면 되는 것이다.
건축물은 잊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1939년에는 광산 투자로 재산을 모은 실업가 솔로몬 R. 구겐하임Solomon R. Guggenheim이 특히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와 파울 클레Paul Klee(1879-1940),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1884~1920)의 작품을 전시하는 비구상회화 미술관Museum of Non-Objective Painting에서 모은 자신의 수집품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이 미술관은 1952년에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개명했으며, 1959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1867~1959)의 설계로 뉴욕의 ‘영적 전당 Temple of Spirit’을 상징하는 둥근 로툰다Rotunda(원형이나 타원형 평면 위에 둥근 지붕을 올린 건물) 형식으로 건립했다.
달팽이 모양의 외관과 나선형 계단으로 건축사에 획을 그은 이 건축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로 올라간 관람객이 경사로를 걸어 내려오면서 벽에 걸린 전시작품들을 볼 수 있게 만든 파격적인 양식이다.

화랑 금세기의 미술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1898~1979)이 신생 화랑 금세기의 미술을 개관한 것은 1942년이었다.
“여성 카사노바”로 불린 그녀는 솔로몬 R. 구겐하임의 조카딸이다.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성공한 구리재벌가에서 태어난 페기는 런던에서 화랑을 연 경험이 있었다.
페기는 1943년에 최초로 잭슨 폴록의 개인전을 열었다.
폴록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떨어뜨리는 기법으로 인해 곧 “드리퍼 잭”이란 별명을 얻었다. 페기와 폴록은 빠르게 성공을 거두었다.
액션페인팅의 대표적인 화가 폴록의 드리핑, 컬러필드의 선두 마크 로스코의 채색된 직사각형, 프란츠 클라인과 그 밖의 화가들의 추상표현주의 작품이 몇 년 사이에 뉴욕을 서양 모던아트의 수도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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