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스파와 푸생파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기운 속에서 아카데미 회원이 누리던 귀족주의적인 특권은 신랄한 비판을 받았으며 다비드를 지도자로 한 많은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의 해산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아카데미는 1816년 아카데미 데 보자르Academie des Beaux-Arts로 재출발했다.
실질적으로 아카데미를 위협한 것은 예술가를 천재로 본 낭만주의적인 작가 개념이었다.
즉 예술가는 가르쳐질 수도 없고 규범에 종속될 수도 없는 영감의 빛으로 걸작을 창조하는 천재라는 관점이었다.
예술가가 곧 천재라는 개념은 18세기 영국의 저술가들 사이에서 처음 생겼다.
이 개념을 칸트가 공식화했으며 괴테와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등장으로 촉진되었다.


푸생은 고대의 신화적 세계를 목가적·시적 분위기로 다루었으며, 인물의 몸짓·자세·얼굴 표정 등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열중했고, 회화에서의 문학적·심리적 묘사에 심사숙고했다.
이 같은 그의 감정 표현은 미술 아카데미의 교칙으로 명문화되었다.
그 결과 베네치아파는 색채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경시되었으며 플랑드르파와 네덜란드 파는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과 사실성이 그랜드 매너의 장중한 테마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낮게 평가되었다.
르 브룅은 푸생의 이론에 따라 감정의 표현법에 관한 논문을 간행하고 일정한 정서와 심리적인 상황을 나타내는 방법을 규칙화하고자 시도했다.
결국 아카데미는 서기관 앙리 테스트랭을 통해 회화의 모든 측면을 포함하는 엄밀하고 총괄적인 법칙집을 1680년에 간행했다.
이것은 국내에서의 반대뿐만 아니라 미술사에서 푸생 파와 루벤스파 사이의 논쟁으로 알려진 사건을 야기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미술사가·이론가 드 필과, 화가 라 포스가 이끈 개혁파는 베네치아파와 루벤스 작품에 나타난 색채의 중요성과 일정한 사실성을 주장했다.
푸생과 루벤스는 동시대 화가지만 서로 다른 경향의 그림을 그렸는데, 푸생은 고대와 르네상스로 회귀하려고 한 데 반해 루벤스는 감정을 중요시하는 바로크 풍의 그림을 그렸다.
두 사람의 차이는 이성과 감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성을 중시한 푸생의 추종자들에게 바로크 회화는 기괴하고 혼란스러운 취향의 타락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는 또한 소묘를 중요시한 푸생과 색채를 중요시한 루벤스와의 차이이기도 해서 선과 색의 대립으로 나타났으며, 이런 대립은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추종자들에 의해 더욱 커졌다.


드 필은 루이 14세의 외교사절로 유럽의 여러 나라를 방문했으며 각 나라의 미술을 현지에서 직접 연구했다.
루벤스를 숭배한 그는 ‘루벤스파’와 ‘푸생파’의 논쟁에서 아카데믹한 드로잉의 강조에 반대하고 색채와 명암법이 회화에서 가장 중요하다며 루벤스파의 편에 섰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가장 높이 평가한 장르인 역사화의 개념을 확대하여 모든 종류의 테마를 이에 적용했다.
그는 『색채에 관한 대화』(1673), 『루벤스의 생애를 포함한 유명 화가들의 작품론』(1681), 『화가들의 생애론 - 화가의 완전한 이상』(1699), 『화가들의 원리와 균형에 의한 회화 강연』(1708) 등을 출간했는데, 이중 마지막 저서는 그의 이론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책이다.


샤를 라 포스는 1658~60년 이탈리아에 체류했고, 1670년대에는 주로 르 브룅의 조수로 활동했으며, 베르사유 궁전의 다이아나 회랑과 아폴로 회랑 장식을 부분적으로 담당했다.
1680년대의 그의 작품에서는 북부 이탈리아의 화파, 특히 베로네세와 코레조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는 드 필의 친구로서 색채와 소묘의 우열 논쟁에서 색채가 중요하다고 한 드 필의 주장을 지지했다.
라 포스는 1680년대 프랑스 화단에 루벤스의 영향을 도입한 사람들 중 하나이다.
17세기 말 프랑스 회화의 쇠퇴기에 많은 예술가들 가운데 최대의 독창성을 발휘한 그의 작품에는 차세대의 경쾌하고 우아한 로코코 미술을 앞서는 것도 있다.


르 브룅은 1672년 ‘루벤스파’와 ‘푸생파’의 논쟁에서 소묘에 찬성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것이 아카데미의 공식 견해가 되어 다음 세기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리하여 17세기 중엽의 프랑스는 고전주의가 곧 아카데미즘이 되었다.
그리고 예술에서 교육과 비평이라는 개념에 정식으로 권위가 주어졌으며 이후 이 개념은 아카데미의 관점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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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적이며 낙천적인 로코코

우아한 경박함이 유행하다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17세기가 왕의 세기라고 한다면 18세기는 귀족의 세기였다.
콜베르가 타계한 지 2년 후 1685년에 낭트 칙령의 폐지로 위그노의 종교적·시민적 자유를 전면적으로 박탈하였다.
이에 독일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강렬한 반감이 고개를 들었고 신교 국가에서 낭트 칙령의 폐지와 초기 위그노 망명객의 도착이 여론을 부추겼다.
17세기 말의 암울했던 정치적 실패에 대한 반동은 도덕적 규범의 완화와 예술의 경쾌함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자유주의적인 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섭정시대(1715-23)에 완전히 실현되었다.


루이 14세는 1715년 8월 다리에 통증을 느꼈다.
의사들은 암당나귀의 젖에 목욕할 것을 처방했다. 그는 열병에 걸렸고 회저병에 걸린 다리는 검게 변했다.
그는 죽음을 준비하여 왕세자를 오게 하고 1715년 9월 1일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베르사유 궁전은 해산되었으며 다섯 살의 나이로 즉위한 루이 15세(1715-74년 재위)는 튈르리 궁전으로 옮겨졌다.
루이 14세가 타계한 1715년부터 1815년까지의 한 세기는 명확한 근대사적 특징을 갖는 혁명의 시대였다.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의 대혁명은 비단 두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전 유럽에 걸쳐 폭발적인 영향을 미쳤다.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하여 유럽 각국 및 세계 여러 나라에까지 영향을 주어 현대인의 물질적 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 동시에 빈부 격차·시장 개척·노동 문제·제국주의적 침략 및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초래했다.
그러나 이 같은 과학기술과 산업의 발전은 세계사의 과정에서 유럽 문명 특히 대서양 문명권의 우위를 확립시켜 놓았다.


루이 15세 즉위 이후 사회풍조가 변하면서 예술과 일상생활에서 새로운 취향이 발전했으며 우아한 경박함이 유행했다.
미술품 감정에 대한 열기가 높아졌고 미술품 컬렉터들도 늘었다.
호화롭고 장대한 과거의 취향 대신에 작고 장식적인 미술품이 유행했으며 이런 수요에 부응해서 체계화된 상업이 발달했다.


루이 14세 치하의 베르사유 궁의 웅장함과 그의 치세 동안 유행한 바로크 양식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로코코 양식은 가볍고 정교하며 우아하고 고상하나 곡선과 자연 형상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여러 명의 실내장식가·화가·조각가들이 파리 귀족의 새로운 주택을 경쾌하고 보다 아늑하게 장식했으며 이 양식이 동판화에 의해 프랑스 전역에 퍼졌다.
로코코 양식에서는 벽면과 천장, 소조 등을 조개나 자연물 형상뿐 아니라 ‘C’나 ‘S’자 같은 기본형태 위에 교차곡선과 역곡선을 그린 문양으로 장식했는데, 대칭보다는 비대칭을 기본으로 삼았다.


로코코 양식은 본질적으로 실내장식의 혁명이었고 이 혁명은 회화와 조각으로 부차적인 개혁을 가져왔다.
17세기의 실내를 일련의 엄숙한 틀처럼 보이게 한 태피스트리와 천장화, 코니스cornice(벽 윗부분에 장식으로 두른 돌출부)와 엔태블러처entablature(기둥 위에 걸쳐놓은 수평 부분)는 사라졌다.
18세기의 회랑은 흰색 타원형으로 되었으며 거울, 패널화, 중국풍 커튼 등이 장식되었다.
코니스는 수비즈 저택63의 타원형 살롱에서처럼 벽면에 드리우거나 천장의 코브cove에 들어가는 것이 모두 아라베스크 모양이다.
이런 회랑에 장식된 회화는 소형이며 색조는 밝고 모티브도 경쾌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반적 규모의 축소가 회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로코코 화가들은 바로크의 복잡한 구성은 받아들이면서도 화면의 복잡함·칙칙한 색·지나친 허식 대신 밝은 핑크색·파란색·초록색을 사용하며 때로는 흰색을 두드러지게 사용했다.
당시 사람들은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의 지나치게 과대한 장식에 진력을 내고 우아하면서도 편리한 점을 요구했다.
로코코는 이런 요구에 부응해서 처음에는 주로 장식적이었다.
로코코의 대표적인 화가는 장-안트완 바토이고 로코코의 성숙된 낙천적 정신을 잘 표현한 화가들로는 프랑수아 부셰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가 있다.
궁정 화가들의 영향은 매우 컸으며 부셰의 작품은 당시 보편적인 미적 취향이 되었고 화가 지망생들에게 규범이 되었다.
로코코 회화의 전형적인 모티브는 남신과 여신의 호색적 기질에 관해 전래된 신화와 님프, 목자가 있는 목가적 장면들이었다.
신과 목자는 도자기 인형에도 사용될 만큼 흔한 주제였으며 파스텔 핑크·노란색·파란색·초록색 등을 주로 사용하여 화사하게 나타났다.
프라고나르의 <큐피드에게서 받은 선물을 자매들에게 보여주는 사이키>65는 한 예이다.


프라고나르는 한동안 샤르댕과 부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752년에 로마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역사화 <칼리로에를 구출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코로에수스>를 그려 1765년에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고 에로틱한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뒤 바리를 여러 점 그렸으며, 마담 뒤 바리가 새로 지은 루브시엔의 별장을 장식하기 위해 1770년에 그녀의 요청으로 그린 네 점의 대형 작품 〈사랑의 과정〉(뉴욕 프릭컬렉션)은 유명하다.
그렇지만 마담 뒤 바리는 더 이상 명랑한 분위기가 아닌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에게 되돌려 보냈다.
프라고나르는 새로이 부상한 신고전주의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다비드의 도움과 후원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희생자가 되어 빈곤 속에서 세상을 떠난다.


프라고나르는 바토와 더불어 18세기의 단조로운 프랑스 미술계에서 중요한 시적 화가로 평가받는다.
놀랄 만큼 활동적이었던 그는 550점이 넘는 회화와 수천 점의 소묘 및 35점의 에칭을 제작했다.
그의 양식은 동시대의 화가들처럼 꽉 차거나 지나치게 장식적이지 않았으며 민첩하고 활기차고 유연했다.
활동기간의 상당 부분이 신고전주의시기에 속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로코코 양식으로 그렸다.


로코코는 바로크의 마지막을 장식한 양식이자 르네상스 최후에 만개한 꽃이라 할 수 있다.
로코코 양식이 프랑스에 소개된 것은 1700년경이었고 18세기에 유럽 전역에서 성행했다.
로코코는 회화와 건축에 나타난 양식으로 밝고 우아하며, 우스꽝스럽거나 쾌활하고, 친밀한 느낌을 준다.
로코코는 바로크Baroque(포르투갈어 바로코Barocco에서 온 말로 ‘불규칙한 진주나 돌’을 의미)에 반발하여 생긴 양식이지만 동시에 바로크로부터 진전된 양식이다.
로코코Rococo라는 말은 바로코Barocco와 조약돌이란 뜻의 프랑스어 로카이유Rocaille의 합성어이다.
18세기 중반부터 로카이유는 바로크와 유사한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불규칙하고 유연한 선으로 장식된 형상들을 로카이유라고 불렀다.
로코코의 어원적 의미는 ‘비속하게 현란하거나 잘 꾸민’이란 뜻이다.
그러나 현재는 이런 경멸적인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18세기 말에 다비드의 제자들 사이에서 바로크와 로코코라는 말은 혼용되었으나, 19세기에 들어서 로코코는 18세기 미술에 국한하여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17세기 미술을 바로크라 부르면서 약 1700년부터 프랑스 혁명까지의 로코코와 구분하기도 하고, 로코코를 단지 바로크 후기의 프랑스 미술에 국한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바토가 지닌 시적인 경향과 우울함은 프라고나르의 작품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그 시대의 경박함과 대조를 이룬다.
오늘날 샤르댕과 더불어 대혁명 이전의 18세기 프랑스 화가들 가운데 최고로 평가받는 바토가 다룬 테마는 상상적이며 환상적인 세계였다.


생전에 그가 플랑드르 화가로 알려진 건 그의 화풍 때문이 아니라 태어난 지역에 대한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그의 고향 발렌시엔느는 그가 태어나기 6년 전 스페인 령 네덜란드에서 프랑스령으로 이양된 지역이었다.
지붕기와공의 아들로 태어난 바토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소설을 탐독하고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
18세에 파리로 갔으며 1703년경 클로드 질로를 만났는데, 질로는 그로테스크한 장면과 목신이나 사티로스의 그림 및 오페라 장면 등 무대배경을 그리는 뛰어난 장식가였다.
질로는 유려하고 여성적인 우아함을 갖춘 16세기 퐁텐블로 파의 양식을 선호했는데, 그의 소묘 방식과 주제 선택이 바토의 작품에도 나타나 있다.
바토는 극장의 2층 발코니에 앉아 무대를 관찰하면서 실재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모든 분장과 도구 및 무대장치를 연구했다.
그는 분장한 얼굴, 화려한 의상, 그려진 배경막과 짙은 그림자에 비치는 다양한 인공조명의 반사광을 통해 빛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얻었다.
그는 연극계와 뤽상부르 대정원, 미술품 연구 등 파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했다.
루벤스가 30여 년 전 마리 데 메디치에게 바친 일련의 승리를 축하하는 그림들을 연구했으며 생기 있고 기쁨이 넘치는 루벤스의 대작들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명성은 점점 높아졌지만 바토는 여전히 수줍어하며 사람을 싫어하고 자기 자신을 불만스럽게 여겼으며, ‘정신은 자유분방했지만 행실은 신중했다’.


바토의 작품에 강한 영향을 끼친 것은 엄숙한 비극이 아니라 가장 생명이 짧은 극형식들이었는데, 특히 희곡을 인용하기보다 배우가 즉흥적으로 연기함으로써 말보다 가면이나 제스처를 중요하고 등장인물이 항상 전형화되어 있는 코메디아 델아르테comedia dell’arte였다.
바토를 사로잡은 또 다른 주제는 댄스·노래·의상·장식물로 구현된 순간적인 상을 보여주는 오페라 발레였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전前시대의 고전주의에 반발을 일으킨 시기였으며, 예술 여러 장르와 양식적 조류들이 각기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열등한 것으로 생각되던 장르들 소극·즉흥희극·소설을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시·음악·회화·무용이 융합되어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진 것처럼 여러 분야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대체로 바토의 회화는 오페라를 색채로 치환한 것 같은 효과를 보여준다.
그는 모든 형태의 회화적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덧없는 것들에 전념했으며, 회화에서 여인들에게 보다 많은 비중을 두었다.
호위 기사나 어릿광대 같은 남자들은 화려한 비단옷을 두르고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여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공원에 있는 조각상도 대부분이 여인상이며 또 자연조차도 여성적인데, 나무는 줄기가 가늘며 윤곽이 부드럽고 흐릿한 잎으로 무성하다.


바토는 이탈리아화 된 아카데미의 규범으로부터 프랑스 회화를 해방시켰으며 루벤스와 파올로 베로네세의 여러 요소를 채용하면서도 진정한 ‘파리풍’ 양식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하다.
이 양식은 다비드의 신고전주의가 등장할 때까지 18세기 프랑스 미술의 일반적 경향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테마가 외견상 경박함으로 흐르지 않게 하는 우수가 감돌고 있으며 그의 깊은 시정에 찬 화풍 앞에서는 그 어떤 작품도 평범해졌다.
그의 명성은 대혁명과 함께 한때 빛을 잃었지만 공쿠르 형제와 월터 호레티오 페이터 등에 의해 재평가되었다.


베로네세는 자신의 양식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출생지인 베로나의 전통과 함께, 줄리오 로마노와 파르미자니노 등의 매너리즘 화가들과 당시 베네치아의 티치아노, 틴토레토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유행한 급진적인 매너리즘이 지닌 무절제한 표현의 과잉을 피했다.
그는 틴토레토보다 아홉 살 어렸는데, 이 두 대가는 어느 정도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런 점은 두 화가의 작품 분위기가 상당히 유사한 우의화에서 특히 눈에 띈다.
티에폴로의 밝은 색상, 당당한 인물 표현 등은 그에게서 받은 영향이다.


일화적인 풍속화의 창시자 장-밥티스트 그뢰즈의 작품에서는 지나친 감상적 요소가 결점으로 지적되지만 일련의 극적인 그림에는 고결한 농민의 모습이 있다.70
그뢰즈는 풍속적인 정경에 도덕적·사회적 의미를 불어넣었으며 시골의 순박한 미덕과 바르비종 파의 지도자 테오도르 루소의 화풍처럼 감상에 호소하는 작품을 제작했다.
관능적 도덕주의자 드니 디드로는 그의 작품을 “회화로 나타낸 도덕”이라고 칭송하면서 당대 회화의 최고 이상을 대표한다고 극찬했다.
그뢰즈는 다비드와 심지어 제리코의 일면을 예견하는 뛰어난 화가지만 작위성과 위선, 그리고 대중 취향에 영합하려는 어울리지 않는 관능성의 암시 때문에 실패했다.
취향이 신고전주의로 변화되는 것과 더불어 그의 작품은 유행에 뒤쳐지게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후에는 세상에서 잊혀졌다.


로코코 양식을 완벽하게 표현한 프랑수아 부셰는 레이스 디자이너인 아버지에게서 미술을 배웠으며, 1723년에 로마상을 수상했다.
티에폴로, 루벤스 그리고 스승 프랑수아 르 무안의 영향을 받은 그가 주문받은 첫 주요 작품은 앙투안 바토가 그린 125점의 드로잉을 판화로 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 감각적이고 명랑한 분위기의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과 목가적 풍경화로 명성을 얻었다.
1734년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며 그 후 고블랭 태피스트리 공장의 책임자이자 왕립 자기공장의 주요 도안가가 되었다.
1765년 왕립 아카데미 회장이 되었으며 루이 15세의 수석화가로 임명되었다.
1740년대와 1750년대 동안 부셰의 우아하고 세련되면서도 경쾌한 양식은 루이 15세 왕실의 특징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미묘한 색채의 사용과 품위 있는 형태, 뛰어난 기교, 평범한 주제 등을 특징으로 한다.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퐁파두르71의 후원을 받은 가장 전형적인 로코코 화가 부셰는 신화를 매력적인 내용으로 표현했다.
<목욕하는 다이아나>73에서는 남신과 여신 모두 영웅이 아닌 16세의 젊은이들처럼 행동한다.


마담 드 퐁파두르를 파스텔화로 그린 모리스-켄탱 드 라 투르는 페로노와 더불어 18세기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파스텔 초상화가였다.
라 투르는 이 기법의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했다.
그의 예술의 본질은 빠르고 정확한 소묘에 있으며, 결코 깊지 않은 색채와 화려하면서 매끄러운 마감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종종 통속적인 부분도 보이지만 그의 초상화는 모델의 표정을 잘 포착한 생기 넘치는 작품이다.


로코코 회화는 사람들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해주었지만 정신적인 면은 결여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로 계몽주의 철학자와 작가들은 회화가 단지 장식적이거나 감각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디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먼저 날 동요시켜라. 날 놀라게 하라. 날 공격하고, 전율하게 하며, 울게 만들고 조바심 나게 하고, 화나게 하라. 그러고 나서 할 수만 있다면 나의 눈을 진정시켜라.


디드로의 말에서 로코코 회화가 결여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시각적으로만 요란한 로코코 회화에는 관람자의 정신 혹은 영혼에 호소하는 요소가 결여되어 있었다.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술이론을 추구한 디드로는 매년 개최되는 살롱전을 통해 동시대인에게 알려졌는데, 1759년부터 1781년까지 살롱전에 계속 참여했다.
프랑스의 첫 미술비평가로 알려진 디드로는 자신의 글을 묶어 책으로 출간했고 그의 저서는 훗날 작가이면서 미술비평가 테오필 고티에·샤를 보들레르·에밀 졸라 등에게 규범이 되었다.
그의 이론은 철학자의 것이라기보다는 저널리스트의 어조로 일시적인 인상이나 주제에 대한 문학적 흥미나 충분한 성찰 없이 내려진 판단 등에 기인한 자가당착적인 면도 있지만, 미술비평이라는 장르를 마련하여 작품을 구체적으로 비판하고 프랑스에서 미술비평을 활성화시켜 미술 발전에 기여한 데 의의가 있다.
그는 살롱전 비평에 덧붙여 「회화, 건축예술, 시작詩作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합리적 측면으로만 경직된 예술관의 결과에 대해 경고했다.


규칙은 예술가를 상투적으로 만든다. 나는 규칙이 이익이 되기보다는 해가 되지 않을까 저으기 의심한다.
규칙이란 평범한 예술가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천재에게는 해가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내게 바르게 이해시켜준다.


디드로는 화가들이 화실에서 모델을 사용하여 인위적인 제스처를 그리는 것을 비난하고 아카데미 회화에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성당에 가서 고해실 근처를 서성거리도록 하라. 그러면 경건함과 참회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
술집에 가라. 그러면 성난 남자의 참 제스처를 보게 될 것이다.
대중이 모이는 곳을 찾고 거리에서 정원에서 시장에서 관망하도록 하라.
그러면 삶의 약동 안에서 자연적 운동의 적절한 아이디어들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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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주의의 선두자 자크-루이 다비드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로코코가 극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1780년 이후, 특히 다비드가 등장한 후였다.
다비드는 <안티오코스의 병의 원인을 밝혀낸 에라시스트라토스>77로 1774년 로마대상을 수상한 후 스승과 함께 로마로 갔다.
로마에서 다비드는 고대 미술에 탐닉했고 스코틀랜드 출신의 화가 개빈 해밀턴을 포함한 새로운 고전 부흥의 선구자들과 교류했다. 해밀턴은 화가이면서 고고학자였고 또한 유명한 화상이었다.
해밀턴은 역사화를 그릴 때 대부분 호메로스에서 주제를 얻었으며, 고대 미술뿐 아니라 푸생의 영향도 받았다.
그의 작품은 복제 판화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동시대 화가들과 다비드를 포함한 젊은 세대에게 영향을 미쳐 신고전주의 양식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영국보다는 유럽에서 더 유명했다.
그는 독일의 화가 안톤 라파엘 멩스의 견해에 공감했는데, 멩스는 완벽한 미를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구상 위에 라파엘로의 표현성과 코레조의 명암법 그리고 티치아노의 색채를 결합시켜야 한다는 절충주의를 주장했다.
드레스덴 궁정 화가였던 멩스의 아버지 이스마엘 멩스(1764년에 사망)는 멩스를 훌륭한 화가로 만들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시켰으며 코레조와 라파엘로의 작품을 주로 모사하게 했다.
멩스는 빙켈만의 친구이며 그로부터 이론적 영향을 많이 받아 작품에 적용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고대 그리스는 모든 예술 창조의 정점으로 받아들여졌다.
『회화에 있어 미와 취미에 대한 사상』에서 멩스는, 그것은 사람들이 라파엘로의 표현과 코레조의 우아미, 그리고 티치아노의 색채를 하나의 새로운 전체로 결합시킬 수 있다는 절충주의적 견해에서 절정에 이른다고 적었다.


자연은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세 위대한 거장은 동일한 사실을 공유했다.
그들 모두 자신의 몫이 모든 예술을 포함하는 것인 양 진중한 노력으로 자신의 분야를 이루어낸 것이다.
라파엘로는 구성과 소묘에서 자신이 발견한 표현을 선택했다.
코레조는 확실한 형상과 특히 명암법에 있는 우아미를 얻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티치아노는 색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은 진리를 추구했다.


다비드는 1783년에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그가 모티브로 삼은 것은 자기희생·의무에 대한 헌신·정직·금욕 등 시민이 지켜야 할 미덕이었다.
이런 미덕은 역사적 사실로서 낭만적으로 해석되어 고대 로마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비드의 작품 중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80, <브루투스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호위병들>82, <소크라테의 죽음>81은 한 시대의 감정을 완벽하게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호라티우스 삼형제는 기원전 7세기의 로마 왕국 사람들이다.
로마 왕국이 이웃의 알바 왕국과 영토 문제로 분쟁하던 중 두 왕국은 각각 세 용사를 뽑아 싸우게 해 분쟁을 해소하기로 합의했다.
호라티우스 삼형제 중 하나는 알바의 쿠리아티 가의 딸 사비나와 결혼한 몸이었고 알바의 삼형제 중 하나는 호라티우스 가의 딸 카밀라와 결혼한 몸이었다.
어느 편이 이겨도 두 집안에는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호라티우스 삼형제가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카밀라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큰오빠를 저주했고 그는 누이동생마저 칼로 쳐 죽였다.
장남은 살인죄로 기소되었는데 아버지가 변호해 아들의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주제는 조국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비극은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브루투스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호위병들>은 1787년의 살롱전에 소개하도록 왕이 주문한 것으로 1789년에 완성되었다.
작품의 원제목은 <브루투스, 제1 집정관, 로마의 자유에 대항해 타르퀴니우스의 음모에 가담한 두 아들을 죽게 하고 귀가하다; 장사를 지낼 수 있도록 아들들의 시신을 가져온 호위병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브루투스는 로마의 마지막 전제군주 타르퀴니우스에 맞서 로마를 구하는 데 공헌한 인물로, 그보다 500년 후 율리우스 시저를 살해한 마르쿠스 브루투스와는 다른 인물이다.
사건은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섹스투스가 브루투스의 동료 콜라티누스의 정숙한 아내 루크레티아를 강간하는 데서 시작된다.
정조를 잃은 루크레티아가 남편과 브루투스 눈앞에서 자살하자 브루투스는 그녀의 몸에 꽂힌 칼을 뽑아 그녀의 피에 대한 복수와 더불어 부패한 독재자를 몰아내겠다고 맹세한다.
결국 타르퀴니우스는 추방되고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는 기원전 508년에 세워진 로마 공화국의 최초의 집정관으로 선출된다.
그런데 브루투스의 두 아들 티투스와 티베리우스가 타르퀴니우스의 복귀에 가담하자 부르투스는 두 아들을 사형에 처한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브루투스의 행위가 가장 칭찬받을 만하거나 아니면 가장 비난받을 만하다면서 부르투스는 신과 같은 존재인 동시에 야수와도 같은 존재라고 했다.
이 작품은 1789년 8월 말에 완성되어 살롱전에 소개된 후 문제의 작품이 되었다.
이듬해 11월 19일 볼테르의 작품 『브루투스』가 공연되자 수많은 갈채를 받았는데, 배우들은 다비드 작품의 구성에 따라 그룹을 지어 연기했다.


1785년 살롱전에서 인기를 한몸에 받은 후부터 다비드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그 가운데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기원전 399년 신성불경죄와 아테네 청년들을 선동한 죄로 기소되어 사형에 처해진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최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의 순간까지도 평소와 다름없이 제자들과 철학적 대화를 했다.
이런 소크라테스는 계몽주의자들에게 가장 모범이 되는 위인으로 받들어졌다.


이 세 작품으로 다비드는 프랑스의 새로운 상징이자 프랑스 국경 너머까지 널리 확산된 신고전주의의 선두가 되었다.
영국 화가 조수아 레이놀즈 경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시스티나 예배당과 바티칸 궁전을 장식한 르네상스 대가들의 그림과 나란히 평가하면서 이 작품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살롱전을 관전한 영국 언론인 존 보이델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뛰어난 걸작이라고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보이델은 열흘 동안이나 이 작품을 감상한 결과 고대 그리스 전성기였던 페리클레스시대의 소크라테스에게 경의를 표하는 듯한 작품으로 샅샅이 살펴봐도 결함이라고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적었다.
당시 프랑스 대사로 주재하던 미국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역시 살롱전을 관전한 후 다비드의 소크라테스가 가장 탁월한 작품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주목할 점은 신고전주의는 과거의 어떤 고전주의보다도 더욱 엄격하고 냉철하며 계획적이었고, 종래의 어떤 고전주의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형식을 압축하여 직선적인 것과 구성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을 추구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전형적인 것과 규범적인 것을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고고학적 고전주의”라고도 불리는 신고전주의는 여태까지의 예술경향들에 비해 더욱 직접적으로 그리스·로마 예술의 고전 체험에 의존했다.
고대에 대한 학문적 흥미가 먼저 생겨 그것이 새로운 사조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취미의 변화가 있었으며 또 이런 취미의 변화 역시 삶의 가치의 변화를 바탕으로 일어난 것이다.
18세기 예술가들이 고대 예술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그들이 너무 유연하고 유동적이 되어버린 회화기술이나 색채와 음조의 지나친 유희적 자극을 맛보고 난 후 좀 더 엄숙하고 진지하며 객관적인 예술적 표현 방식에 끌린 것에도 기인한다.
그러나 다비드에 의해 추구된 신고전주의는 윤리적인 문제 내지는 단순성과 진실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순수하고 명확하며 단순한 선, 법칙성과 규율, 조화와 평온, 빙켈만이 말한 이른바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 이런 것들에 대한 동경은 무엇보다도 로코코의 불성실성과 지나칠 정도의 세련성, 공허한 기교와 화려함에 대한 반항인데, 사람들은 로코코를 타락하고 부패한 것, 병적이며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공식 화가가 되었고 이들은 협력하여 이전의 아카데미를 폐지하고 대신 앵스트튀 나시오날(국립 학사원)의 일부분으로서 아카데미 데 보자르(미술학교)를 창설하게 된다. 다비드를 지도자로 많은 예술가들이 1793년부터 아카데미의 해산을 요구했고 아카데미를 대신한 새로운 조직이 여러 차례 결성되었지만, 결국 아카데미는 1816년에 아카데미 데 보자르로 재출발하게 된 것이다.
취향에까지 미쳤던 나폴레옹의 영향력은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강력했다.


나폴레옹의 영향은 여성의 의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품위와 위엄을 갖추는 제국주의적 요소가 여성의 의상에 나타난 것이다.
나폴레옹 제1 제정기(1804-14)의 앙피르 양식(독일에서는 비더마이어 양식, 영국에서는 섭정 양식이라고도 부른다)에서 실내장식은 약간 단조로웠으며 무게와 힘을 강조했다.
색채는 회색을 띤 주황과 암적색, 어두운 노랑이었으며, 가죽·호두나무·청동 장식을 많이 사용했다.
이는 한가지의 중요한 차이점을 제외하고 루이-필리프시대의 중산층의 실내장식을 예고했다.
중요한 차이점은 나폴레옹이 안락한 의자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폴레옹 퇴위 후 부르봉 왕가의 왕정복고시대는 좌석을 푹신하게 하기 위한 소재를 처음으로 사용한 시기이다.
이는 실내장식의 발전에서 19세기 최대의 공헌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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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의 정의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낭만주의라는 말은 르네상스시대부터 사용된 말로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 국경에 있는 로마냐Romagna(로마냐는 로마Roma에서 온 말이므로 굳이 말하면 로마에서 파생된 말이라 하겠다), 즉 라틴어의 방언 로망스어로 쓰인 이야기라는 의미이면서 공상적 혹은 경이적이란 뜻도 내포하게 되었다. .


이 낭만적romantic이란 말의 근대적 기원은 17세기 영국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말은 통속어로 전래된 중세의 목인소설이나 기사에 관한 이야기, 예를 들면 아서 왕이나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 사용했다고 믿어지는 성배를 찾으려고 한 원탁기사의 이야기와 같은 중세 모험담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이를 전형으로 근대에 창작된 괴담에서 고딕·낭만 류의 황당무계한 바보 같음을 야유한 것을 기원으로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로망스라고 부른 이유는 그것들이 라틴어가 아닌 낭만적인 언어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기사도 정신에 입각한 이야기를 프랑스어로 로망스romance라고 하는데, 전기적인 이야기란 뜻으로 이것이 낭만이 되었다.


‘낭만적’이란 말은 ‘기발한 또는 환상적인’ 혹은 ‘있을 법 하지 않은’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미술의 한 양식으로 불린 것은 1798년으로 독일 평론가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과 그의 형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슐레겔 그리고 노발리스가 관여한 기관지 『아테네움』(1798-1800)에서 낭만적 시를 가리켜서 이 말을 사용한 후 슐레겔 형제가 후원하는 환상적인 내용의 문학과 중세 미술 그리고 거칠고 원시적인 내용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미술에 사용되었다.


슐레겔은 낭만주의를 넓은 의미에서 근대의 특징을 지적하는 말로 사용했는데 근대 문학이 고전 문학과 다른 한에 있어서 ‘낭만적’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그 특질로 개별적인 모티브의 우위, 철학적 모티브의 우위, ‘충만과 생명력’에서 얻어지는 쾌감, 형식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 규칙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 기괴하고 추한 것 속에 있는 평정함, 환상적인 형식으로 나타나는 감상적인 내용 등을 꼽았다.
그는 ‘낭만적’이란 명칭을 근대 문학 전체에 적용시켰으며 낭만주의는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에게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작가들에게서도 낭만주의를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괴테와 실러같이 걸출한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낭만주의의 선구자 괴테는 『독일 건축에 관하여』(1773)에서 스트라스브루크의 대성당을 예로 들어 고딕적 예술을 내면적 정신 혹은 감정에서 생겨난 주관적 원리를 좇는 예술로 보았다.
다시 말하면 낭만주의는 이교적 고대의 미에 반하는 기독교적 근대의 미로 본 것이다.


낭만주의라는 말이 독일 밖에서도 사용된 것은 프랑스의 여류작가 스탈 부인(1766-1817)의 『독일론』(1813)에서 소개된 후였다.
18세기 사람들은 사회적·정치적으로 유행하는 기존 가치관에 반발하면서 이성적·감정적 경험에 만족할 만한 것에 근거하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성적·감정적 경험의 일반적인 공통점은 “자연으로 돌아가자 Return to Nature”였다.
이성주의자들은 자연을 이성의 궁극적 근원으로 존중한 데 비해서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을 경계가 없고 거칠며 늘 변하는 것으로 숭배했다.
이들 모두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행위하는 한 악은 사라질 것으로 믿었으며 욕구에 자유를 부여했다.
이런 이상을 마음에 품은 낭만주의자들은 감정을 강렬하게 하는 것을 그 자체 목적으로 삼았다.


신속하게 생기는 경험을 영원한 형태로 남기기 위해서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이에 걸 맞는 양식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기존의 질서에 반발했으므로 자신들의 시대에 유행하는 로코코 양식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과거에 경시했거나 냉소한 형태들을 재발견하고 채택하여 그것들 자체를 원리로 진전시켰으므로 재활된 양식들이 낭만주의 양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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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한 낭만주의 개념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아르놀트 하우저는 낭만주의를 서양 정신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의 하나로 보며 낭만주의자들은 스스로 역사적 역할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고딕 이래 감수성의 발달이 그때처럼 강한 자극을 받고 자신의 감정과 본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예술가의 권리가 철저히 강조된 적이 일찍이 없었음을 지적했다.


낭만주의자들이 묘사한 예술감정과 세계감정의 특징에는 늘 향수 아니면 고향상실이라는 사고가 나타나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스스로 목적도 끝도 없는 방랑을 했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것을 찾고자 했으며, 찾은 후에는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고독을 택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세상으로부터의 소외를 괴로워하면서도 이런 소외를 긍정하고 소망했다.
그래서 노발리스는 낭만주의 시를 “쾌적한 방식으로 사물을 소외시키는 예술, 즉 사물을 낯설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친숙하고 매력 있게 만드는 예술”로 규정하며 모든 것은 “그것을 먼 곳으로 옮겨놓을 때” 낭만적·시적으로 되고 또한 “평범한 것에 신비스러운 외관을, 잘 알려진 것에 미지의 위엄을, 유한한 것에 무한한 의미를 부여할 때” 모든 것은 낭만화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노발리스가 삶을 낭만적으로 묘사했을 뿐 아니라 삶을 예술에 적응시키고 미학적·유토피아적 생존의 착각 속에 잠기게 했다.
이런 낭만화는 인생을 단순화시키고 통일화하며, 모든 역사적 존재의 고통스러운 변증법으로부터 인생을 해방하는 것을 뜻하며, 해결될 수 없는 모순을 인생으로부터 제거하고 소원성취의 꿈과 환상에 대한 합리적 저항을 약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 이후의 시대는 한마디로 환멸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현재를 무미건조하고 공허한 것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지식인층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다른 사회계층들로부터 유리되었으며 정신적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그들만의 고립된 삶을 영위했다.
속물이라는 개념과, 시민과 대비되는 부르주아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예술가와 시인들이 자기들의 물질적·정신적 생존을 힘입어왔던 바로 그 계급에 대해 경멸과 증오를 퍼붓는 유례가 없던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초기 낭만주의가 시도한 것처럼 자기들의 유미주의를 통해 다른 세계로부터 단절된 그리고 자기들만이 지배할 수 있는 하나의 영역을 구축하려고 했다.


예술가들에게 낭만주의는 자의로 그리고 타의로 붙여졌다.
낭만주의와 유사한 경향을 띤 과거 예술가들도 낭만주의에 속하게 되었다.
낭만주의의 선조인 디드로는 『극적 시에 관하여』(1758)에서 시는 “무지막대하고 야만적이며 미개한 것을 목표로 삼는다”라고 했는데, 이는 낭만적 속성들 중 하나이지만 낭만주의가 시작된 시기에 비하면 40년 전의 선언이었다.
원래는 작가들에게만 한정되었던 ‘낭만적’이란 명칭이 유사한 사고를 가진 당대의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붙여지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면 화가로는 들라크루아·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조각가로는 당제르, 작곡가로는 슈만·베버·베를리오즈 등이었다.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상의 유사성만으로 계보를 이루게 된 것이다.
심지어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이 계보에 속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타칭으로 분류된 예술가들 사이에 유대가 없었으므로 하나의 계보에 속했다 하더라도 공통된 권리를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낭만주의자라고 하면 매우 다양하고 서로 이질적인 인물들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 결과 낭만주의에 대한 정의가 애매모호하게 되어버렸다.


타타르키비츠는 낭만주의에 대한 무수한 정의 가운데 25개를 선별하여 저서 『미학의 기본개념사』에 소개했다.
타타르키비츠는, 이 모든 정의들은 다양하지만 어느 면에서 서로 관련이 있음을 지적했는데, 우선 낭만주의가 고전주의의 반대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정의들에서 낭만적인 미를 다음과 같이 종합적으로 요약했다.
강력한 열정의 미, 상상력의 미, 시적인 것의 미, 서정적인 것의 미, 형식이나 규칙에 종속되지 않는 정신적이고 무정형인 미, 이상야릇함, 무한함, 심오함, 신비, 상징, 다양성의 미, 힘, 갈등, 고통의 미일 뿐 아니라 환상, 소원함, 그림같이 생생함의 미, 강력한 효과의 미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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