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식적이며 낙천적인 로코코
우아한 경박함이 유행하다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17세기가 왕의 세기라고 한다면 18세기는 귀족의 세기였다.
콜베르가 타계한 지 2년 후 1685년에 낭트 칙령의 폐지로 위그노의 종교적·시민적 자유를 전면적으로 박탈하였다.
이에 독일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강렬한 반감이 고개를 들었고 신교 국가에서 낭트 칙령의 폐지와 초기 위그노 망명객의 도착이 여론을 부추겼다.
17세기 말의 암울했던 정치적 실패에 대한 반동은 도덕적 규범의 완화와 예술의 경쾌함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자유주의적인 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섭정시대(1715-23)에 완전히 실현되었다.
루이 14세는 1715년 8월 다리에 통증을 느꼈다.
의사들은 암당나귀의 젖에 목욕할 것을 처방했다. 그는 열병에 걸렸고 회저병에 걸린 다리는 검게 변했다.
그는 죽음을 준비하여 왕세자를 오게 하고 1715년 9월 1일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베르사유 궁전은 해산되었으며 다섯 살의 나이로 즉위한 루이 15세(1715-74년 재위)는 튈르리 궁전으로 옮겨졌다.
루이 14세가 타계한 1715년부터 1815년까지의 한 세기는 명확한 근대사적 특징을 갖는 혁명의 시대였다.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의 대혁명은 비단 두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전 유럽에 걸쳐 폭발적인 영향을 미쳤다.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하여 유럽 각국 및 세계 여러 나라에까지 영향을 주어 현대인의 물질적 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 동시에 빈부 격차·시장 개척·노동 문제·제국주의적 침략 및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초래했다.
그러나 이 같은 과학기술과 산업의 발전은 세계사의 과정에서 유럽 문명 특히 대서양 문명권의 우위를 확립시켜 놓았다.
루이 15세 즉위 이후 사회풍조가 변하면서 예술과 일상생활에서 새로운 취향이 발전했으며 우아한 경박함이 유행했다.
미술품 감정에 대한 열기가 높아졌고 미술품 컬렉터들도 늘었다.
호화롭고 장대한 과거의 취향 대신에 작고 장식적인 미술품이 유행했으며 이런 수요에 부응해서 체계화된 상업이 발달했다.
루이 14세 치하의 베르사유 궁의 웅장함과 그의 치세 동안 유행한 바로크 양식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로코코 양식은 가볍고 정교하며 우아하고 고상하나 곡선과 자연 형상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여러 명의 실내장식가·화가·조각가들이 파리 귀족의 새로운 주택을 경쾌하고 보다 아늑하게 장식했으며 이 양식이 동판화에 의해 프랑스 전역에 퍼졌다.
로코코 양식에서는 벽면과 천장, 소조 등을 조개나 자연물 형상뿐 아니라 ‘C’나 ‘S’자 같은 기본형태 위에 교차곡선과 역곡선을 그린 문양으로 장식했는데, 대칭보다는 비대칭을 기본으로 삼았다.
로코코 양식은 본질적으로 실내장식의 혁명이었고 이 혁명은 회화와 조각으로 부차적인 개혁을 가져왔다.
17세기의 실내를 일련의 엄숙한 틀처럼 보이게 한 태피스트리와 천장화, 코니스cornice(벽 윗부분에 장식으로 두른 돌출부)와 엔태블러처entablature(기둥 위에 걸쳐놓은 수평 부분)는 사라졌다.
18세기의 회랑은 흰색 타원형으로 되었으며 거울, 패널화, 중국풍 커튼 등이 장식되었다.
코니스는 수비즈 저택63의 타원형 살롱에서처럼 벽면에 드리우거나 천장의 코브cove에 들어가는 것이 모두 아라베스크 모양이다.
이런 회랑에 장식된 회화는 소형이며 색조는 밝고 모티브도 경쾌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반적 규모의 축소가 회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로코코 화가들은 바로크의 복잡한 구성은 받아들이면서도 화면의 복잡함·칙칙한 색·지나친 허식 대신 밝은 핑크색·파란색·초록색을 사용하며 때로는 흰색을 두드러지게 사용했다.
당시 사람들은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의 지나치게 과대한 장식에 진력을 내고 우아하면서도 편리한 점을 요구했다.
로코코는 이런 요구에 부응해서 처음에는 주로 장식적이었다.
로코코의 대표적인 화가는 장-안트완 바토이고 로코코의 성숙된 낙천적 정신을 잘 표현한 화가들로는 프랑수아 부셰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가 있다.
궁정 화가들의 영향은 매우 컸으며 부셰의 작품은 당시 보편적인 미적 취향이 되었고 화가 지망생들에게 규범이 되었다.
로코코 회화의 전형적인 모티브는 남신과 여신의 호색적 기질에 관해 전래된 신화와 님프, 목자가 있는 목가적 장면들이었다.
신과 목자는 도자기 인형에도 사용될 만큼 흔한 주제였으며 파스텔 핑크·노란색·파란색·초록색 등을 주로 사용하여 화사하게 나타났다.
프라고나르의 <큐피드에게서 받은 선물을 자매들에게 보여주는 사이키>65는 한 예이다.
프라고나르는 한동안 샤르댕과 부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752년에 로마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역사화 <칼리로에를 구출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코로에수스>를 그려 1765년에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고 에로틱한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뒤 바리를 여러 점 그렸으며, 마담 뒤 바리가 새로 지은 루브시엔의 별장을 장식하기 위해 1770년에 그녀의 요청으로 그린 네 점의 대형 작품 〈사랑의 과정〉(뉴욕 프릭컬렉션)은 유명하다.
그렇지만 마담 뒤 바리는 더 이상 명랑한 분위기가 아닌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에게 되돌려 보냈다.
프라고나르는 새로이 부상한 신고전주의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다비드의 도움과 후원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희생자가 되어 빈곤 속에서 세상을 떠난다.
프라고나르는 바토와 더불어 18세기의 단조로운 프랑스 미술계에서 중요한 시적 화가로 평가받는다.
놀랄 만큼 활동적이었던 그는 550점이 넘는 회화와 수천 점의 소묘 및 35점의 에칭을 제작했다.
그의 양식은 동시대의 화가들처럼 꽉 차거나 지나치게 장식적이지 않았으며 민첩하고 활기차고 유연했다.
활동기간의 상당 부분이 신고전주의시기에 속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로코코 양식으로 그렸다.
로코코는 바로크의 마지막을 장식한 양식이자 르네상스 최후에 만개한 꽃이라 할 수 있다.
로코코 양식이 프랑스에 소개된 것은 1700년경이었고 18세기에 유럽 전역에서 성행했다.
로코코는 회화와 건축에 나타난 양식으로 밝고 우아하며, 우스꽝스럽거나 쾌활하고, 친밀한 느낌을 준다.
로코코는 바로크Baroque(포르투갈어 바로코Barocco에서 온 말로 ‘불규칙한 진주나 돌’을 의미)에 반발하여 생긴 양식이지만 동시에 바로크로부터 진전된 양식이다.
로코코Rococo라는 말은 바로코Barocco와 조약돌이란 뜻의 프랑스어 로카이유Rocaille의 합성어이다.
18세기 중반부터 로카이유는 바로크와 유사한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불규칙하고 유연한 선으로 장식된 형상들을 로카이유라고 불렀다.
로코코의 어원적 의미는 ‘비속하게 현란하거나 잘 꾸민’이란 뜻이다.
그러나 현재는 이런 경멸적인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18세기 말에 다비드의 제자들 사이에서 바로크와 로코코라는 말은 혼용되었으나, 19세기에 들어서 로코코는 18세기 미술에 국한하여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17세기 미술을 바로크라 부르면서 약 1700년부터 프랑스 혁명까지의 로코코와 구분하기도 하고, 로코코를 단지 바로크 후기의 프랑스 미술에 국한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바토가 지닌 시적인 경향과 우울함은 프라고나르의 작품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그 시대의 경박함과 대조를 이룬다.
오늘날 샤르댕과 더불어 대혁명 이전의 18세기 프랑스 화가들 가운데 최고로 평가받는 바토가 다룬 테마는 상상적이며 환상적인 세계였다.
생전에 그가 플랑드르 화가로 알려진 건 그의 화풍 때문이 아니라 태어난 지역에 대한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그의 고향 발렌시엔느는 그가 태어나기 6년 전 스페인 령 네덜란드에서 프랑스령으로 이양된 지역이었다.
지붕기와공의 아들로 태어난 바토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소설을 탐독하고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
18세에 파리로 갔으며 1703년경 클로드 질로를 만났는데, 질로는 그로테스크한 장면과 목신이나 사티로스의 그림 및 오페라 장면 등 무대배경을 그리는 뛰어난 장식가였다.
질로는 유려하고 여성적인 우아함을 갖춘 16세기 퐁텐블로 파의 양식을 선호했는데, 그의 소묘 방식과 주제 선택이 바토의 작품에도 나타나 있다.
바토는 극장의 2층 발코니에 앉아 무대를 관찰하면서 실재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모든 분장과 도구 및 무대장치를 연구했다.
그는 분장한 얼굴, 화려한 의상, 그려진 배경막과 짙은 그림자에 비치는 다양한 인공조명의 반사광을 통해 빛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얻었다.
그는 연극계와 뤽상부르 대정원, 미술품 연구 등 파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했다.
루벤스가 30여 년 전 마리 데 메디치에게 바친 일련의 승리를 축하하는 그림들을 연구했으며 생기 있고 기쁨이 넘치는 루벤스의 대작들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명성은 점점 높아졌지만 바토는 여전히 수줍어하며 사람을 싫어하고 자기 자신을 불만스럽게 여겼으며, ‘정신은 자유분방했지만 행실은 신중했다’.
바토의 작품에 강한 영향을 끼친 것은 엄숙한 비극이 아니라 가장 생명이 짧은 극형식들이었는데, 특히 희곡을 인용하기보다 배우가 즉흥적으로 연기함으로써 말보다 가면이나 제스처를 중요하고 등장인물이 항상 전형화되어 있는 코메디아 델아르테comedia dell’arte였다.
바토를 사로잡은 또 다른 주제는 댄스·노래·의상·장식물로 구현된 순간적인 상을 보여주는 오페라 발레였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전前시대의 고전주의에 반발을 일으킨 시기였으며, 예술 여러 장르와 양식적 조류들이 각기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열등한 것으로 생각되던 장르들 소극·즉흥희극·소설을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시·음악·회화·무용이 융합되어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진 것처럼 여러 분야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대체로 바토의 회화는 오페라를 색채로 치환한 것 같은 효과를 보여준다.
그는 모든 형태의 회화적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덧없는 것들에 전념했으며, 회화에서 여인들에게 보다 많은 비중을 두었다.
호위 기사나 어릿광대 같은 남자들은 화려한 비단옷을 두르고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여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공원에 있는 조각상도 대부분이 여인상이며 또 자연조차도 여성적인데, 나무는 줄기가 가늘며 윤곽이 부드럽고 흐릿한 잎으로 무성하다.
바토는 이탈리아화 된 아카데미의 규범으로부터 프랑스 회화를 해방시켰으며 루벤스와 파올로 베로네세의 여러 요소를 채용하면서도 진정한 ‘파리풍’ 양식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하다.
이 양식은 다비드의 신고전주의가 등장할 때까지 18세기 프랑스 미술의 일반적 경향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테마가 외견상 경박함으로 흐르지 않게 하는 우수가 감돌고 있으며 그의 깊은 시정에 찬 화풍 앞에서는 그 어떤 작품도 평범해졌다.
그의 명성은 대혁명과 함께 한때 빛을 잃었지만 공쿠르 형제와 월터 호레티오 페이터 등에 의해 재평가되었다.
베로네세는 자신의 양식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출생지인 베로나의 전통과 함께, 줄리오 로마노와 파르미자니노 등의 매너리즘 화가들과 당시 베네치아의 티치아노, 틴토레토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유행한 급진적인 매너리즘이 지닌 무절제한 표현의 과잉을 피했다.
그는 틴토레토보다 아홉 살 어렸는데, 이 두 대가는 어느 정도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런 점은 두 화가의 작품 분위기가 상당히 유사한 우의화에서 특히 눈에 띈다.
티에폴로의 밝은 색상, 당당한 인물 표현 등은 그에게서 받은 영향이다.
일화적인 풍속화의 창시자 장-밥티스트 그뢰즈의 작품에서는 지나친 감상적 요소가 결점으로 지적되지만 일련의 극적인 그림에는 고결한 농민의 모습이 있다.70
그뢰즈는 풍속적인 정경에 도덕적·사회적 의미를 불어넣었으며 시골의 순박한 미덕과 바르비종 파의 지도자 테오도르 루소의 화풍처럼 감상에 호소하는 작품을 제작했다.
관능적 도덕주의자 드니 디드로는 그의 작품을 “회화로 나타낸 도덕”이라고 칭송하면서 당대 회화의 최고 이상을 대표한다고 극찬했다.
그뢰즈는 다비드와 심지어 제리코의 일면을 예견하는 뛰어난 화가지만 작위성과 위선, 그리고 대중 취향에 영합하려는 어울리지 않는 관능성의 암시 때문에 실패했다.
취향이 신고전주의로 변화되는 것과 더불어 그의 작품은 유행에 뒤쳐지게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후에는 세상에서 잊혀졌다.
로코코 양식을 완벽하게 표현한 프랑수아 부셰는 레이스 디자이너인 아버지에게서 미술을 배웠으며, 1723년에 로마상을 수상했다.
티에폴로, 루벤스 그리고 스승 프랑수아 르 무안의 영향을 받은 그가 주문받은 첫 주요 작품은 앙투안 바토가 그린 125점의 드로잉을 판화로 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 감각적이고 명랑한 분위기의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과 목가적 풍경화로 명성을 얻었다.
1734년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며 그 후 고블랭 태피스트리 공장의 책임자이자 왕립 자기공장의 주요 도안가가 되었다.
1765년 왕립 아카데미 회장이 되었으며 루이 15세의 수석화가로 임명되었다.
1740년대와 1750년대 동안 부셰의 우아하고 세련되면서도 경쾌한 양식은 루이 15세 왕실의 특징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미묘한 색채의 사용과 품위 있는 형태, 뛰어난 기교, 평범한 주제 등을 특징으로 한다.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퐁파두르71의 후원을 받은 가장 전형적인 로코코 화가 부셰는 신화를 매력적인 내용으로 표현했다.
<목욕하는 다이아나>73에서는 남신과 여신 모두 영웅이 아닌 16세의 젊은이들처럼 행동한다.
마담 드 퐁파두르를 파스텔화로 그린 모리스-켄탱 드 라 투르는 페로노와 더불어 18세기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파스텔 초상화가였다.
라 투르는 이 기법의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했다.
그의 예술의 본질은 빠르고 정확한 소묘에 있으며, 결코 깊지 않은 색채와 화려하면서 매끄러운 마감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종종 통속적인 부분도 보이지만 그의 초상화는 모델의 표정을 잘 포착한 생기 넘치는 작품이다.
로코코 회화는 사람들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해주었지만 정신적인 면은 결여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로 계몽주의 철학자와 작가들은 회화가 단지 장식적이거나 감각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디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먼저 날 동요시켜라. 날 놀라게 하라. 날 공격하고, 전율하게 하며, 울게 만들고 조바심 나게 하고, 화나게 하라. 그러고 나서 할 수만 있다면 나의 눈을 진정시켜라.
디드로의 말에서 로코코 회화가 결여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시각적으로만 요란한 로코코 회화에는 관람자의 정신 혹은 영혼에 호소하는 요소가 결여되어 있었다.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술이론을 추구한 디드로는 매년 개최되는 살롱전을 통해 동시대인에게 알려졌는데, 1759년부터 1781년까지 살롱전에 계속 참여했다.
프랑스의 첫 미술비평가로 알려진 디드로는 자신의 글을 묶어 책으로 출간했고 그의 저서는 훗날 작가이면서 미술비평가 테오필 고티에·샤를 보들레르·에밀 졸라 등에게 규범이 되었다.
그의 이론은 철학자의 것이라기보다는 저널리스트의 어조로 일시적인 인상이나 주제에 대한 문학적 흥미나 충분한 성찰 없이 내려진 판단 등에 기인한 자가당착적인 면도 있지만, 미술비평이라는 장르를 마련하여 작품을 구체적으로 비판하고 프랑스에서 미술비평을 활성화시켜 미술 발전에 기여한 데 의의가 있다.
그는 살롱전 비평에 덧붙여 「회화, 건축예술, 시작詩作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합리적 측면으로만 경직된 예술관의 결과에 대해 경고했다.
규칙은 예술가를 상투적으로 만든다. 나는 규칙이 이익이 되기보다는 해가 되지 않을까 저으기 의심한다.
규칙이란 평범한 예술가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천재에게는 해가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내게 바르게 이해시켜준다.
디드로는 화가들이 화실에서 모델을 사용하여 인위적인 제스처를 그리는 것을 비난하고 아카데미 회화에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성당에 가서 고해실 근처를 서성거리도록 하라. 그러면 경건함과 참회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
술집에 가라. 그러면 성난 남자의 참 제스처를 보게 될 것이다.
대중이 모이는 곳을 찾고 거리에서 정원에서 시장에서 관망하도록 하라.
그러면 삶의 약동 안에서 자연적 운동의 적절한 아이디어들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