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스파와 푸생파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기운 속에서 아카데미 회원이 누리던 귀족주의적인 특권은 신랄한 비판을 받았으며 다비드를 지도자로 한 많은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의 해산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아카데미는 1816년 아카데미 데 보자르Academie des Beaux-Arts로 재출발했다.
실질적으로 아카데미를 위협한 것은 예술가를 천재로 본 낭만주의적인 작가 개념이었다.
즉 예술가는 가르쳐질 수도 없고 규범에 종속될 수도 없는 영감의 빛으로 걸작을 창조하는 천재라는 관점이었다.
예술가가 곧 천재라는 개념은 18세기 영국의 저술가들 사이에서 처음 생겼다.
이 개념을 칸트가 공식화했으며 괴테와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등장으로 촉진되었다.


푸생은 고대의 신화적 세계를 목가적·시적 분위기로 다루었으며, 인물의 몸짓·자세·얼굴 표정 등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열중했고, 회화에서의 문학적·심리적 묘사에 심사숙고했다.
이 같은 그의 감정 표현은 미술 아카데미의 교칙으로 명문화되었다.
그 결과 베네치아파는 색채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경시되었으며 플랑드르파와 네덜란드 파는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과 사실성이 그랜드 매너의 장중한 테마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낮게 평가되었다.
르 브룅은 푸생의 이론에 따라 감정의 표현법에 관한 논문을 간행하고 일정한 정서와 심리적인 상황을 나타내는 방법을 규칙화하고자 시도했다.
결국 아카데미는 서기관 앙리 테스트랭을 통해 회화의 모든 측면을 포함하는 엄밀하고 총괄적인 법칙집을 1680년에 간행했다.
이것은 국내에서의 반대뿐만 아니라 미술사에서 푸생 파와 루벤스파 사이의 논쟁으로 알려진 사건을 야기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미술사가·이론가 드 필과, 화가 라 포스가 이끈 개혁파는 베네치아파와 루벤스 작품에 나타난 색채의 중요성과 일정한 사실성을 주장했다.
푸생과 루벤스는 동시대 화가지만 서로 다른 경향의 그림을 그렸는데, 푸생은 고대와 르네상스로 회귀하려고 한 데 반해 루벤스는 감정을 중요시하는 바로크 풍의 그림을 그렸다.
두 사람의 차이는 이성과 감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성을 중시한 푸생의 추종자들에게 바로크 회화는 기괴하고 혼란스러운 취향의 타락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는 또한 소묘를 중요시한 푸생과 색채를 중요시한 루벤스와의 차이이기도 해서 선과 색의 대립으로 나타났으며, 이런 대립은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추종자들에 의해 더욱 커졌다.


드 필은 루이 14세의 외교사절로 유럽의 여러 나라를 방문했으며 각 나라의 미술을 현지에서 직접 연구했다.
루벤스를 숭배한 그는 ‘루벤스파’와 ‘푸생파’의 논쟁에서 아카데믹한 드로잉의 강조에 반대하고 색채와 명암법이 회화에서 가장 중요하다며 루벤스파의 편에 섰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가장 높이 평가한 장르인 역사화의 개념을 확대하여 모든 종류의 테마를 이에 적용했다.
그는 『색채에 관한 대화』(1673), 『루벤스의 생애를 포함한 유명 화가들의 작품론』(1681), 『화가들의 생애론 - 화가의 완전한 이상』(1699), 『화가들의 원리와 균형에 의한 회화 강연』(1708) 등을 출간했는데, 이중 마지막 저서는 그의 이론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책이다.


샤를 라 포스는 1658~60년 이탈리아에 체류했고, 1670년대에는 주로 르 브룅의 조수로 활동했으며, 베르사유 궁전의 다이아나 회랑과 아폴로 회랑 장식을 부분적으로 담당했다.
1680년대의 그의 작품에서는 북부 이탈리아의 화파, 특히 베로네세와 코레조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는 드 필의 친구로서 색채와 소묘의 우열 논쟁에서 색채가 중요하다고 한 드 필의 주장을 지지했다.
라 포스는 1680년대 프랑스 화단에 루벤스의 영향을 도입한 사람들 중 하나이다.
17세기 말 프랑스 회화의 쇠퇴기에 많은 예술가들 가운데 최대의 독창성을 발휘한 그의 작품에는 차세대의 경쾌하고 우아한 로코코 미술을 앞서는 것도 있다.


르 브룅은 1672년 ‘루벤스파’와 ‘푸생파’의 논쟁에서 소묘에 찬성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것이 아카데미의 공식 견해가 되어 다음 세기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리하여 17세기 중엽의 프랑스는 고전주의가 곧 아카데미즘이 되었다.
그리고 예술에서 교육과 비평이라는 개념에 정식으로 권위가 주어졌으며 이후 이 개념은 아카데미의 관점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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