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전주의의 선두자 자크-루이 다비드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로코코가 극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1780년 이후, 특히 다비드가 등장한 후였다.
다비드는 <안티오코스의 병의 원인을 밝혀낸 에라시스트라토스>77로 1774년 로마대상을 수상한 후 스승과 함께 로마로 갔다.
로마에서 다비드는 고대 미술에 탐닉했고 스코틀랜드 출신의 화가 개빈 해밀턴을 포함한 새로운 고전 부흥의 선구자들과 교류했다. 해밀턴은 화가이면서 고고학자였고 또한 유명한 화상이었다.
해밀턴은 역사화를 그릴 때 대부분 호메로스에서 주제를 얻었으며, 고대 미술뿐 아니라 푸생의 영향도 받았다.
그의 작품은 복제 판화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동시대 화가들과 다비드를 포함한 젊은 세대에게 영향을 미쳐 신고전주의 양식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영국보다는 유럽에서 더 유명했다.
그는 독일의 화가 안톤 라파엘 멩스의 견해에 공감했는데, 멩스는 완벽한 미를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구상 위에 라파엘로의 표현성과 코레조의 명암법 그리고 티치아노의 색채를 결합시켜야 한다는 절충주의를 주장했다.
드레스덴 궁정 화가였던 멩스의 아버지 이스마엘 멩스(1764년에 사망)는 멩스를 훌륭한 화가로 만들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시켰으며 코레조와 라파엘로의 작품을 주로 모사하게 했다.
멩스는 빙켈만의 친구이며 그로부터 이론적 영향을 많이 받아 작품에 적용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고대 그리스는 모든 예술 창조의 정점으로 받아들여졌다.
『회화에 있어 미와 취미에 대한 사상』에서 멩스는, 그것은 사람들이 라파엘로의 표현과 코레조의 우아미, 그리고 티치아노의 색채를 하나의 새로운 전체로 결합시킬 수 있다는 절충주의적 견해에서 절정에 이른다고 적었다.


자연은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세 위대한 거장은 동일한 사실을 공유했다.
그들 모두 자신의 몫이 모든 예술을 포함하는 것인 양 진중한 노력으로 자신의 분야를 이루어낸 것이다.
라파엘로는 구성과 소묘에서 자신이 발견한 표현을 선택했다.
코레조는 확실한 형상과 특히 명암법에 있는 우아미를 얻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티치아노는 색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은 진리를 추구했다.


다비드는 1783년에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그가 모티브로 삼은 것은 자기희생·의무에 대한 헌신·정직·금욕 등 시민이 지켜야 할 미덕이었다.
이런 미덕은 역사적 사실로서 낭만적으로 해석되어 고대 로마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비드의 작품 중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80, <브루투스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호위병들>82, <소크라테의 죽음>81은 한 시대의 감정을 완벽하게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호라티우스 삼형제는 기원전 7세기의 로마 왕국 사람들이다.
로마 왕국이 이웃의 알바 왕국과 영토 문제로 분쟁하던 중 두 왕국은 각각 세 용사를 뽑아 싸우게 해 분쟁을 해소하기로 합의했다.
호라티우스 삼형제 중 하나는 알바의 쿠리아티 가의 딸 사비나와 결혼한 몸이었고 알바의 삼형제 중 하나는 호라티우스 가의 딸 카밀라와 결혼한 몸이었다.
어느 편이 이겨도 두 집안에는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호라티우스 삼형제가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카밀라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큰오빠를 저주했고 그는 누이동생마저 칼로 쳐 죽였다.
장남은 살인죄로 기소되었는데 아버지가 변호해 아들의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주제는 조국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비극은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브루투스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호위병들>은 1787년의 살롱전에 소개하도록 왕이 주문한 것으로 1789년에 완성되었다.
작품의 원제목은 <브루투스, 제1 집정관, 로마의 자유에 대항해 타르퀴니우스의 음모에 가담한 두 아들을 죽게 하고 귀가하다; 장사를 지낼 수 있도록 아들들의 시신을 가져온 호위병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브루투스는 로마의 마지막 전제군주 타르퀴니우스에 맞서 로마를 구하는 데 공헌한 인물로, 그보다 500년 후 율리우스 시저를 살해한 마르쿠스 브루투스와는 다른 인물이다.
사건은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섹스투스가 브루투스의 동료 콜라티누스의 정숙한 아내 루크레티아를 강간하는 데서 시작된다.
정조를 잃은 루크레티아가 남편과 브루투스 눈앞에서 자살하자 브루투스는 그녀의 몸에 꽂힌 칼을 뽑아 그녀의 피에 대한 복수와 더불어 부패한 독재자를 몰아내겠다고 맹세한다.
결국 타르퀴니우스는 추방되고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는 기원전 508년에 세워진 로마 공화국의 최초의 집정관으로 선출된다.
그런데 브루투스의 두 아들 티투스와 티베리우스가 타르퀴니우스의 복귀에 가담하자 부르투스는 두 아들을 사형에 처한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브루투스의 행위가 가장 칭찬받을 만하거나 아니면 가장 비난받을 만하다면서 부르투스는 신과 같은 존재인 동시에 야수와도 같은 존재라고 했다.
이 작품은 1789년 8월 말에 완성되어 살롱전에 소개된 후 문제의 작품이 되었다.
이듬해 11월 19일 볼테르의 작품 『브루투스』가 공연되자 수많은 갈채를 받았는데, 배우들은 다비드 작품의 구성에 따라 그룹을 지어 연기했다.


1785년 살롱전에서 인기를 한몸에 받은 후부터 다비드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그 가운데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기원전 399년 신성불경죄와 아테네 청년들을 선동한 죄로 기소되어 사형에 처해진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최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의 순간까지도 평소와 다름없이 제자들과 철학적 대화를 했다.
이런 소크라테스는 계몽주의자들에게 가장 모범이 되는 위인으로 받들어졌다.


이 세 작품으로 다비드는 프랑스의 새로운 상징이자 프랑스 국경 너머까지 널리 확산된 신고전주의의 선두가 되었다.
영국 화가 조수아 레이놀즈 경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시스티나 예배당과 바티칸 궁전을 장식한 르네상스 대가들의 그림과 나란히 평가하면서 이 작품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살롱전을 관전한 영국 언론인 존 보이델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뛰어난 걸작이라고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보이델은 열흘 동안이나 이 작품을 감상한 결과 고대 그리스 전성기였던 페리클레스시대의 소크라테스에게 경의를 표하는 듯한 작품으로 샅샅이 살펴봐도 결함이라고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적었다.
당시 프랑스 대사로 주재하던 미국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역시 살롱전을 관전한 후 다비드의 소크라테스가 가장 탁월한 작품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주목할 점은 신고전주의는 과거의 어떤 고전주의보다도 더욱 엄격하고 냉철하며 계획적이었고, 종래의 어떤 고전주의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형식을 압축하여 직선적인 것과 구성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을 추구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전형적인 것과 규범적인 것을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고고학적 고전주의”라고도 불리는 신고전주의는 여태까지의 예술경향들에 비해 더욱 직접적으로 그리스·로마 예술의 고전 체험에 의존했다.
고대에 대한 학문적 흥미가 먼저 생겨 그것이 새로운 사조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취미의 변화가 있었으며 또 이런 취미의 변화 역시 삶의 가치의 변화를 바탕으로 일어난 것이다.
18세기 예술가들이 고대 예술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그들이 너무 유연하고 유동적이 되어버린 회화기술이나 색채와 음조의 지나친 유희적 자극을 맛보고 난 후 좀 더 엄숙하고 진지하며 객관적인 예술적 표현 방식에 끌린 것에도 기인한다.
그러나 다비드에 의해 추구된 신고전주의는 윤리적인 문제 내지는 단순성과 진실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순수하고 명확하며 단순한 선, 법칙성과 규율, 조화와 평온, 빙켈만이 말한 이른바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 이런 것들에 대한 동경은 무엇보다도 로코코의 불성실성과 지나칠 정도의 세련성, 공허한 기교와 화려함에 대한 반항인데, 사람들은 로코코를 타락하고 부패한 것, 병적이며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공식 화가가 되었고 이들은 협력하여 이전의 아카데미를 폐지하고 대신 앵스트튀 나시오날(국립 학사원)의 일부분으로서 아카데미 데 보자르(미술학교)를 창설하게 된다. 다비드를 지도자로 많은 예술가들이 1793년부터 아카데미의 해산을 요구했고 아카데미를 대신한 새로운 조직이 여러 차례 결성되었지만, 결국 아카데미는 1816년에 아카데미 데 보자르로 재출발하게 된 것이다.
취향에까지 미쳤던 나폴레옹의 영향력은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강력했다.


나폴레옹의 영향은 여성의 의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품위와 위엄을 갖추는 제국주의적 요소가 여성의 의상에 나타난 것이다.
나폴레옹 제1 제정기(1804-14)의 앙피르 양식(독일에서는 비더마이어 양식, 영국에서는 섭정 양식이라고도 부른다)에서 실내장식은 약간 단조로웠으며 무게와 힘을 강조했다.
색채는 회색을 띤 주황과 암적색, 어두운 노랑이었으며, 가죽·호두나무·청동 장식을 많이 사용했다.
이는 한가지의 중요한 차이점을 제외하고 루이-필리프시대의 중산층의 실내장식을 예고했다.
중요한 차이점은 나폴레옹이 안락한 의자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폴레옹 퇴위 후 부르봉 왕가의 왕정복고시대는 좌석을 푹신하게 하기 위한 소재를 처음으로 사용한 시기이다.
이는 실내장식의 발전에서 19세기 최대의 공헌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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