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협회전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한




미술문화협회에는 후쿠자와 이치로를 포함하여 테라다 마사아키寺田正明, 후루자와 이와미古澤岩美, 기카와키 노보루, 아이 미츠, 사이토 요시시게, 스기마타 타다시 등 40여 명의 화가들이 소속되어 있었고 1940년 4월에 창립전을 열고 공모작을 포함하여 227점을 소개했다.
이듬해 제2회 전람회를 열기 전 초현실주의를 공산주의로 오인한 경찰이 협회의 이론적 리더 후쿠자와 이치로와 평론가이자 시인 다키구치 슈조瀧修造를 치안법 위반으로 검거했다.
이에 미술문화협회는 전향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제3회 전람회에서는 전쟁화가 ‘과제작품 특별 진열’이라는 명칭으로 전시하는 등 1944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전람회를 열었지만 전위적 경향은 창립전 이후 나타나지 않았다.


미술문화협회전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한 우리나라 화가는 가네코 히데오金子英雄(1915~?)과 김하건(?~1951)이며 김자영웅은 다섯 차례 모두 참여했고 김하건은 제2, 3, 4회에 참여했다.
김자영웅은 창립전에 <풍경 1>, <풍경 2>, <풍경 3>을 출품한 후 미술문화상을 수상했고 제3회전에서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김하건은 제3회에 <綠의 교향악>, <十九의 기원>, <항구의 설계>, <밤의 정거장>을 출품한 후 미술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제4회 때에 회원에 추대되었다.
김자영웅은 1915년 경상남도 태생으로 김종남인데 14살 때인 1929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1918년에 설립된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후쿠자와 이치로의 연구소에서 수학했다.
그는 일본인을 아내로 맞았으며 일본에 귀화하면서 이름을 마나베 히데오로 바꾸었다.
김하건은 동경미술학교에 재학할 때인 1941년에 출품하고 이듬해에는 회원으로 추대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현존하는 작품은 자화상 한 점뿐이며 사진으로 남아 있는 제3회전 출품작 <항구의 설계>를 보면 외딴 건물이 있는 한적한 바닷가를 배경으로 책상 위에 피라미드와 원구가 있어 데 키리코와 살바도르 달리의 사차원적 공간 혹은 초현실적 공간이 있는 작품을 연상시킨다.
그는 청진으로 돌아와 1943년 8월 12일~16일 청진의 궁내대환宮內大丸에서 청진일보사 북선문화회와 경성 공립중학교 동창회 주최로 ‘김하건 양화 개인전’을 가졌다.
팜플렛에 30여 점의 작품 목록과 함께 미술문화협회의 후쿠자와 이치로, 테라다 마사아키, 그리고 동경미술학교 교수 타나베 이치로 등의 격려사가 실렸다.
팜플렛에 의하면 그는 1942년 ‘신 로망파 협회전’에 참여했다.
그는 6·25동란 때 인민군으로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규모 단체전과 소규모 동인전 모두 회원들의 그룹전으로 열렸고 이들의 작품들 외에 공모를 통해 일반 화가들의 작품을 함께 소개했다.
우리나라 화가들의 참여는 거의 공모전을 통해 이루어졌다. 일반 화가들은 협회상을 수상하거나 회우로 추대되기도 했는데, 우리나라 화가들 중에서 처음 회우로 참여한 사람은 김환기로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참여했다.
문학수, 이중섭, 김하건 등은 자유미술가협회와 미술문화협회에서 활동했고 회원 혹은 회우로 추대되었다.
조선인에 대한 이런 대우는 소규모 동인전에서는 가능했지만 관전은 물론 이과전과 독립미술가협회전 같은 대규모 그룹전에서는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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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할 수 있는 사람은 창조할 수 있다.”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이 책은 15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약 500년에 걸친 프랑스 미술을 다루는 것이므로 프랑스 역사를 함께 서술해야 하는 방대한 작업이 되었다.
역사란 한마디로 이야기이다.
하지만 누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느냐에 따라서 이야기의 틀이 달라지고 그 내용의 본질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보통 권력과 부를 가진 궁정으로부터 시작된 미술사는, 왕족과 귀족의 선택이나 정치적 행동에 따라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정치적인 요인, 나라의 위상을 세우려는 의도, 또한 인접 국가들과의 문화경쟁이 크게 작용한다.
따라서 이야기는 수직적 구조로 단순하게 전개될 수 없고, 큰 틀 속에서 가지 많은 나무처럼 횡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내용은 고딕 건축 이후 침체해 있던 프랑스 미술이 프랑수아 1세의 예술적 부흥에서 시작하여 지속적인 왕정 정책의 후원을 받아 쿠르베에 이르기까지, 즉 독자적인 회화를 창조해낼 때까지의 역사적 과정이다.
프랑수아 1세가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프랑스로 초청하고 늙은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에 뼈를 묻은 것은 이탈리아의 영향 하에 프랑스 미술이 재건했다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프랑스 왕정은 정치적으로 프랑스 미술을 앙양하기 위해서 여러 나라의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초청하는 재정적 뒷받침을 했다.
특히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공헌은 눈부셨으며, 프랑스 대혁명의 시기에 침공과 미술품 약탈을 통해 발생한 이웃나라 스페인의 영향도 매우 컸다.


서양 미술사를 하나의 큰 틀로 볼 때, 앞서 문명이 발달했던 이집트·고대 그리스·로마의 양식들이 끊임없는 모방을 통해 변형을 거듭해왔음을 볼 수 있다.
마네의 누드화의 뿌리는 티치아노에 닿아 있고, 티치아노의 양식은 조르조네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조르조네의 누드는 고대 비너스의 변형이다.
이런 식으로 모방에 모방이 거듭되어왔다.
따라서 미술사 공부는 최초의 양식이 누구의 혹은 어느 시대의 것이며, 그런 양식이 모방을 통해 어떻게 변형되었으며 시대적으로 어떻게 달리 해석되었는가 하는 것을 밝혀내고 이해하는 것이다.
필자는 프랑스 미술을 예로 하여 미술사의 형성과정을 말하고자 했다.
왕족의 취향과 정치적 변수에 의해 미술의 토양이 만들어졌고, 그 토양에서 모방이 가능해졌으며, 모방을 통해 자신의 창조성을 발견하고 만들어나가는 데서 프랑스는 미술의 선진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가 모방할 수 있는 사람은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한 대로 모방은 창조를 위한 자아수련이다.
그 당시는 모방이 아니고서는 기초를 쌓을 수 있는 방법이 특별히 따로 없었던 시대로서 뮤지엄이 곧 미술교실이었던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였던 대로 프랑스의 루브르 뮤지엄은 과거에 궁전이었고 또한 궁전 소장품들을 전시하는 곳이었으므로, 그곳에 걸린 작품들은 소수의 왕족과 귀족의 취향에 따라 선별된 것들이었다.
따라서 궁정의 취향이 일반 대중의 취향이 될 수밖에 없었고, 초기의 모방은 매우 한정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예술가들이 유럽의 나라들을 쉽게 여행하게 되면서 궁정의 취향보다는 일반 대중의 취향이 더욱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그런 다양성에서 독자적인 양식들이 창조될 수 있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수세기가 걸렸다. 인터넷으로 모든 자료를 실어 나르는 오늘날에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모방이 가능하고 따라서 창조도 빠르게 이루어지지만 말을 타고 다니던 시대에는 말의 속도만큼 더딜 수밖에 없었다.
르네상스로부터 19세기 중반까지에는 모든 것이 오래 걸렸으며 정치적 후원 없이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런 점들이 이 책을 쓰는 동기가 되었다. 미술문화의 발전이 요구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프랑스의 정치와 미술사는 예술부흥을 위한 정치적 노력이라는 관점에서 귀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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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미술 500년 - 모방에서 창조로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약탈로 쏘아올린 문화의 메카 프랑스


허미경 기자
&raquo; 프랑스미술 500년
김광우 지음. 미술문화 펴냄. 2만원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드 다 빈치는 어째서 프랑스에 뼈를 묻었던가. 젊은 피카소는 왜 고향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서 청운의 꿈을 피워올렸던가. 루브르미술관엔 어떻게 해서 그리 많은 남의 나라 미술품들을 소장하게 된 걸까. 이 책은 이런저런 물음에 대한 일종의 대답을 모색한다.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프랑스 미술의 발전사를 들여다봤는데, 르네상스 시절부터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때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쪽 들어찬 당대의 그림 사진들과 함께다.
그 유명한 루브르미술관은, 새삼스레 말하자면, 본디 왕들의 궁전이었다. 미술이 정치권력의 우산 아래 자라났던 역사성 탓이다. 프랑수아 1세는 다 빈치라는 대가를 극진히 대접하며 프랑스에 머물게 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스페인 등 당시 미술 선진국 출신 대가들의 작품은 물론 세계 각지의 명화 약탈에 골몰했다. 세계의 뭇 걸작들이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된 이유다. 나쁘게 보면 야만적 문화 침탈이지만 프랑스의 눈으로 보면 문화의 메카로 발돋움하려는 전략이었다. 루브르에 걸린 걸작들은 수많은 프랑스의 화가들에게 ‘모방하면서 창조’하도록 해준 교본이었고, 하여 파리는 세계의 뛰어난 예술가들을 불러들이는 요람이 되었던 것이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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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매너리즘: 퐁텐블로파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프랑스 미술에서는 퐁텐블로 파의 역할이 컸다.
16세기 중후반, 대략 1530년부터 1579년까지 퐁텐블로 궁전과 관련 있는 작품을 제작한 예술가 집단을 훗날 퐁텐블로파라고 불렀는데, 퐁텐블로궁은 프랑수아 1세의 대망을 가장 멋지게 구현한 곳이다.
프랑수아는 국가적 예술부흥을 실현함으로써 이탈리아의 고전을 신봉하던 대제후들을 견제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이 같은 장대한 이념에 어울릴 만한 대벽화 장식의 전통이 없었다.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이탈리아의 대가들을 초빙해야 했고, 이 작업은 1528~58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퐁텐블로 궁전의 내부를 장식하면서 궁전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이 프랑스로 도입되는 창구가 되었으며, 여기에 뿌리를 내린 양식이 바로크 양식의 선구가 되었다.
초청된 예술가들이 누드 여인의 관능미와 궁정풍의 우아미를 조화시킨 온화하고 장식적인 양식을 만들어냈는데, 이를 제1차 퐁텐블로 파라고 한다.
피오렌티노가 퐁텐블로 궁전에서 주로 한 작업은 프랑수아 대회랑을 당시 프랑스의 궁정 취향에 맞추면서 이탈리아 양식으로 장식하는 것이었다.
그는 미켈란젤로와 스승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영향을 받았지만 <피에타>23에서 보듯 어느 정도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했고 동판화 제작을 위한 수많은 밑그림은 프랑스의 회화와 장식미술에 골고루 영향을 미쳤다.
1540년 타계할 때까지 그는 대회랑을 장식하는 일에 전념했다.


볼로냐 태생의 프란세스코 프리마티초는 줄리오 로마노로부터 매너리즘을 익히고 화가·건축가·실내장식가로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다.
1526년 볼로냐를 떠나 만투바로 가서 줄리오 로마노 작업장에서 조수로 일한 그는 1540~41년 프랑수아를 위해 로마로 가서 당시 가장 유명한 고대 조상들의 모형을 수집했다.
1546년 다시 로마로 갔을 때 바티칸에 소장된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피에타>의 모형을 만들어 프랑스 추기경에게 전달했다.
프리마티초는 로소 피오렌티노와 더불어서 프랑스 매너리즘 일파인 제1차 퐁텐블로 파를 이끌었다.
그는 1559년에 프랑스의 궁정건축가가 되었으며 그의 장식화는 종래의 종교적 주제를 고전적인 신화로 대체하는 새로운 경향을 나타내며 이에 의해 파르미자니노의 거친 매너리즘 양식이 프랑스 취향에 합치하는 지적 세련됨을 갖춘 표현으로 변화했다.
프리마티초는 1532년부터 피오렌티노와 함께 퐁텐블로 궁전의 ‘프랑수아 1세의 회랑’ 내부를 장식했고, 퐁텐블로 궁전 내에 있는 다른 회랑들의 내부 장식도 맡았다.
1559년에는 앙리 2세의 왕실 건축가가 되어 생드니 수도원 성당의 발루아 예배당 건설에 큰 역할을 했다.


피오렌티노·프리마티초·니콜로 델 아바테 세 사람은 프랑스와 플랑드르 예술가들의 도움으로 자신들의 양식을 프랑스 궁정의 기호에 맞추는 데 성공했다.
세 사람에 의해서 관능성과 장식성, 규방의 사치스럽고 자유분방함과 다소곳하고 우아함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특수한 매너리즘 양식이 생겨났으며, 스투코Stucco(구운 석회와 고운 흙을 섞어 만든 치장 벽토) 장식과 벽화의 결합은 ‘프랑스 양식’으로 알려진 독특한 기법을 완성시켰다.
‘프랑수아 1세의 회랑’에 있는 피오렌티노의 장식과 프리마티초의 작품은 두 번씩이나 덧칠이 되어 있어서 그 후 복원작업이 수차례 시도되었으나 최초의 상태를 어림하기가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작품은 프랑스에서 두드러진 전통으로 뿌리내렸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로 보급되어 새로운 장식 양식에 크게 기여했다.
이 양식에서는 신화적인 세계를 연출한 인위적 장치·목가적 풍경·나긋나긋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억지 미소를 짓는 누드 여인 등 새로운 것을 지향했으므로 진지하고 화려한 회화에 속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시 유행한 실내장식 분야에 속한다.


종교전쟁으로 인한 공백 이후 궁전의 장식화는 앙리 4세(1589-1610년 재위)의 비호 하에 부활했다.
일반적으로 제2차 퐁텐블로 파라는 명칭은 앙리 4세를 위한 장식화 제작에 참여한 화가들을 말한다.
그들의 작업은 평범했으며 제1세대의 예술가들의 특징이었던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전의 플랑드르 사실주의가 프랑스 궁정 취향과 결합하여 국제 고딕 양식이 생겨난 것과 마찬가지로 퐁텐블로에서도 이탈리아 매너리즘이 궁정의 기호에 맞춰진 독특한 프랑스 화파가 형성되었다.
이는 가냘프고 창백한 누드의 요정에서 보이는 섬세함·규방을 암시하는 정경·전통적인 종교적 내용을 대신하는 신비주의적인 테마 등 거의 유희에 가까운 묘사들이 결합된 것이다.27
이것은 세기가 바뀐 후에도 프랑스 회화의 주류를 형성했으며 그 모태가 되는 이탈리아 매너리즘과 더불어 인접 국가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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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왕정 루이 14세시대의 예술적 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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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드 샹파뉴 그리고 푸생과 더불어 17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 정신을 대표하는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웅대한 간결성과 힘 있는 구도는 푸생, 로랭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1620년경 로랭 공작령인 뤼네빌로 가서 타계할 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한 라 투르는 위트레흐트 파에 속한 네덜란드 화가로, 풍속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린 게리트 반 혼토르스트50로부터 카라바조 풍의 극적인 효과를 내는 명암법을 배웠다.
1645년경에 그린 <신생아>49가 한 예인데, 대부분의 화가들이 실재 아기를 보지 않고 이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했지만 라 투르는 실재 모습을 보고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했다.
코와 입이 두드러지고 볼이 생략된 것은 아기를 보고 그렸기 때문이다.
그는 인물의 형상을 기하적 형태로 단순화시키고 촛불이나 횃불만이 비추는 실내 정경을 묘사하여 장엄한 단순미와 경이로운 고요함을 보여주었다.
라 투르는 카라바조 신봉자들로부터 유래한 자연주의를 고전주의로 전환시켰으며 거기에는 푸생과 샹파뉴와 동일한 정신이 담겨 있다.


루이 13세는 1643년 5월 14일에 사망했다. 당시 루이 14세(1661-1715)는 다섯 살에 불과했다.
그의 어머니인 안은 파리에 자리를 잡고 새 섭정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남편의 유언을 무효화했고, 추기경 쥘 마자랭(1604-61)은 수석대신이 되었다.
안이 섭정을 시작할 때의 나이는 42세였다. 보석과 궁정 생활을 좋아한 안은 루이 13세와 리슐리외로부터 자주 모욕을 받곤 했다.
두 아들 루이와 필리프를 둔 안은 정치적 경험이 없었으므로 국사의 운영을 마자랭에게 맡겼다.
여러 해에 걸쳐서 스페인 출신의 안과 이탈리아 출신의 마자랭의 기이한 결합은 메디치 가의 마리의 섭정기 때와 마찬가지로 불평과 중상모략, 끝내는 다양한 사회 층에서 반란을 야기했다.
루이 14세가 아홉 살 되던 해인 1648년, 마자랭의 미움을 받아오던 귀족들과 파리 최고법원이 왕에 대항해 반기를 든 프롱드의 난(1648-53)으로 알려진 기나긴 내란이 시작되었다.
내란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루이 14세는 가난과 불운, 두려움과 굴욕감, 추위와 배고픔을 겪어야 했다.
이런 시련이 앞으로 드러낼 성격과 행동 그리고 사고방식에 크게 작용했다.


1653년 반란 진압 후 마자랭은 자신의 가르침을 받은 루이 14세와 더불어 특별한 행정기구를 만들어 나갔으며, 어린 왕은 예술과 우아함 그리고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마자랭의 성향을 몸에 익혔다.
그는 마자랭의 조카딸 마리 만치니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2년 동안이나 자기 자신과 싸워야 했다.
절박한 정치 상황 앞에 무릎을 꿇은 그는 스페인과의 평화를 위해 1660년 8월 26일 스페인의 공주 마리아 테레사를 아내로 맞아야 했다.


마자랭은 1661년 3월 9일에 사망했다.
유방암에 걸린 안은 1666년 1월 20일에 사망했다. 섭정을 해오던 마자랭이 죽자 실질적으로 정권을 잡게 된 루이 14세는 재무총감 장-밥티스트 콜베르(1619-83)의 도움을 받아 국가 재정을 증대시키는 데 성공했다.
상인 집안 출신의 콜베르는 다양한 행정직을 거친 뒤 재무총감이 되고 국가의 통제 기관을 움직이는 주요 인물이 된다.


리슐리외와 마자랭의 업적으로 국력이 증대된 프랑스는 17세기 후반기의 유럽에서 명백한 우월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루이 14세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어머니와 대부인 마자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중간키의 그는 끊임없는 예식 속에 살면서 하녀에게도 경어를 쓸 만큼 예의범절에 밝고 비상한 자제력을 지녔다.
그는 대식가, 사냥꾼, 호색가였고, 그의 정부들은 12명의 서자를 낳았다.
그는 지나친 오만함, 매우 높은 직분의식으로 말미암아 1662년부터 태양을 자신의 상징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루이 14세는 54년 동안 매일 8시간 정무에 열중했다.
궁정의 예절부터 군대의 이동까지 그리고 길을 닦는 일부터 신학적 논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자신이 주관하려고 했다.
그는 젊음과 정열이 넘쳐흘렀으며, 장엄함에 매료되는 프랑스다운 기질을 충실히 나타냈기 때문에 성공을 거둔 셈이다.
왕은 정력적으로 새로운 주거지를 세우는 데 열을 쏟았으며 프랑스의 모습과 삶의 방식이 바뀌어 거대한 도시들의 형태가 변했고 풍경은 달라졌다.
생제르맹과 마를리에 있던 눈부신 궁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베르사유 궁전은 아직도 건재하다.
건축 도중에는 낭비라고 손가락질 받았으며 나라를 파멸로 몰아넣는다고 비난받았으나 베르사유 궁전이 세워진 뒤에는 유럽 여러 나라의 감탄을 자아냈으며 프랑스의 위신을 드높였다.


루이 14세의 정치적 절대주의는 17세기에 가장 과장된 형태로 나타났다.
절대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왕권신수설과 계약설이 있다. 왕권신수설은 지상에 왕권이 가장 우월하고 이는 신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견해이다.
왕의 권력행사는 절대적이며 어느 누구로부터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계약설은 토마스 홉스로 대표되는데,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체계 있는 군주론을 전개했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저술을 통해 왕이란 신의 지시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유일한 입법자이자 사법자이고, 또한 국민의 최고 행정관이라고 선언했다.


결정의 권리를 신하에게 혹은 명령의 권리를 백성에게 귀속시키는 건 사물의 올바른 질서를 문란케 하는 것이다.
심의 혹은 결정의 권리는 오로지 수장인 왕에게 있다.
신하들의 권리는 자기들에게 내려진 명령을 효과 있게 운영하고 수행하는 데 있다.


그는 “신하가 군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면, 비록 군주가 악인이나 압제자라 하더라도 언제나 변치 않는 범죄를 범하는 것이다”라고 했고, 또 “왕은 절대군주이므로 당연히 성직자든 평신도든 신하들의 전 재산의 처분권은 완전히 왕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17세기 후반기를 루이 14세의 시대라 한다.
루이 14세의 왕권신수설은 17세기 유럽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서 1660년대까지는 공화국인 스위스 일부와 이탈리아 및 네덜란드를 제외한 나머지 유럽 나라들은 절대군주제를 받아들였으며, 각국의 군주는 루이의 행동 패턴을 모방하려고 했다.
루이는 ‘태양왕 le Roi-Soleile’ 혹은 ‘대군주 Grand Monarque’로 불렸다.


프롱드의 난이 일어났을 때 파리 시민이 마자랭 추기경의 저택 유리창을 돌로 깬 사건이 일어나자 1651년 마자랭은 파리를 떠나 지방 도시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파리에 남은 콜베르는 마자랭의 대리인이 되어 파리 소식을 그에게 전해 주고 개인적인 일을 돌보아주었다.
마자랭은 다시 권력을 잡은 뒤 콜베르를 개인비서에 임명하고 사적으로 이익이 많이 남는 관직을 사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콜베르는 부자가 되었고 세넬레 남작령도 취득했다.
마자랭은 임종하면서 루이 14세에게 콜베르를 추천했고 왕은 곧 콜베르를 신임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콜베르는 왕의 개인적인 일만이 아니라 프랑스 왕국의 행정 전반에 걸쳐 국왕에게 봉사하는 데 비상한 업무능력을 발휘했다.


콜베르는 통찰력이 있었으며 매우 부지런했고, 오늘날의 6~8명의 장관에 맞먹는 권한을 지녔다.
그는 총감독관이자 재무총감이며, 고등참사회의 구성원이자, 바로 그 자격으로 국무대신이며, 해군담당 국가비서이자 왕실담당 국가비서였다.
콜베르는 세금을 더 많이 거두는 것이 아니라 지출을 절감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강화시켰다.
가장 정직하고 효과적인 제도에 따라 정부 수입을 징수했으며, 예산 지출을 절감하고 담세 능력이 있는 모든 계급에게 과세를 균등하게 부담시켰다.
그리고 부진한 농업과 공업 부분을 면세와 지원으로 장려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정책으로 중상주의와 일치한다.
이 같은 콜베르주의는 새로운 절대군주의 국가 정책에 큰 도움이 되었다.
말하자면 콜베르가 이루어놓은 풍부한 재원으로 국방장관 루보아의 지휘 아래 프랑스 육군은 유럽에서 가장 효율적인 군대가 되었다.
프랑스는 정부에서 훈련을 실시하고 봉급과 제복을 지급하는 근대적인 의미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루이 14세는 1669년에 콜베르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해 프랑스의 예술 및 지적 생활을 책임지게 함으로써 그의 지위를 더욱 높여주었다.
콜베르는 예술에서도 프랑스의 힘과 명성을 높인다는 원칙을 그대로 적용했다.
프랑스 학술원 회원인 콜베르는 왕의 승리를 기념하는 훈장과 기념비에 새길 명문을 선정하기 위해서 ‘금석학 및 문학 아카데미’를 창설했고(1663), 프랑스 왕국을 위해 과학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과학 아카데미를 창설했으며(1666), 프랑스 건축 작품의 취향을 세련되게 하고 규칙을 정하기 위해서 왕립 건축 아카데미를 창설했다(1671).
콜베르는 또한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처럼 예술가들이 당대의 거장들 밑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는 학교들을 세웠고, ‘언어 학교’처럼 동양의 언어들을 공부하는 실제적인 목적을 가진 학교도 세웠다.
그와 루이 14세의 목적 중 하나는 프랑스의 왕권을 전 세계에 장엄한 이미지로 알리는 것이었다.
루이 14세의 치세기가 고전예술이 꽃피고 교양인의 전형이 나타난 시기이기는 했으나 1690년경 남성의 70퍼센트와 여성의 86퍼센트는 여전히 문맹이었으며, 그들의 정신세계는 허황된 이야기나 미신으로 이루어진 초자연적인 세계였다.


장엄한 프랑스의 왕권을 수립하기 위해 베르사유 궁전의 재건축이 이루어졌으며 그 화려한 위용은 중앙집권체제의 상징이 되었다.
파리 남서쪽 베르사유에 위치한 이 궁전은 1624년 루이 13세가 착공한 수렵용 별장을 루이 14세가 3단계로 증축한 것이다.


루이 14세는 실권을 잡자마자 1661년 르 보에게 베르사유 궁전 앞뜰에 두 개의 부속건물을 증축하고 장식을 첨가해 기존의 성채를 확장할 것을 명령했다.
정원은 1662~90년 조경설계가 앙드레 르 노트르의 설계에 따라 변형되었다.54, 55
이것은 당시의 프랑스 문화를 지배하던 합리주의 정신을 잘 나타내는 형식과 질서를 추구하고 있다.
또한 루이 14세는 1669년에 르 보의 설계에 따라 좀 더 근본적이고 장대한 궁전 재건축을 시도했다.
이때 중앙부가 증축되었으며 그 의장은 장대한 규모와 고전주의 원리가 결합된 것이다. 건물 내부는 르 브룅의 지휘 아래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당시 이탈리아 바로크의 흐름을 받아들인 기법과 디자인을 적용한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특히 ‘대사의 계단’이 유명하다.


세 번째 재건축은 1678년 쥘 아르두앵 망사르의 지휘로 시작되었다.
망사르는 1674년 루이 14세의 정부 몽테스팡 부인을 위한 클라니 성 개수작업을 맡으면서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재건축은 그 규모가 유례없이 커서 르 보의 건축물에 담겨 있던 정신을 모두 없앨 정도였다.
정원쪽 1층 위에 세운 르 보의 테라스는 뮤지엄으로 대체되었으며 양쪽 부속건물은 일직선으로 통합되었다.
그는 중앙 건물 남북에 약간씩 후퇴한 부속건물을 각각 세워 전체적으로 파사드를 503미터까지 확장시켰다.
‘거울의 회랑’56에는 17개의 거울로 만들어진 아케이드가 천장 부근까지 메우고 있으며 천장은 프레스코화로 뒤덮였다.
‘그 양쪽에 인접한 두 개의 회랑, 즉 ‘전쟁의 회랑’과 ‘평화의 회랑’도 이때 만들어졌으며 망사르와 르 브룅이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했다.
‘전쟁의 회랑’에는 색조 회반죽으로 된 타원형의 커다란 부조가 있었으며, 말을 타고 적을 물리치는 루이 14세의 위엄 있는 모습이 새겨졌다.
‘평화의 회랑’에도 유럽의 평화를 확립한 루이 14세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그려졌다.
망사르는 1689년 베르사유 궁전에 거대한 궁전 예배당57을 착공했으며 건축물은 1703년에 완공되었다.
여러 해 동안 2~3만 명의 노동자들이 동원되었고, 루이 14세는 공사장에서 죽은 노동자들의 부인들에게 연금을 주었다.


바로크의 풍요로움과 장중함을 프랑스 합리주의와 ‘좋은 취미’에 적당히 결합시킨 베르사유 궁전의 기호는 프랑스의 다른 지역과 유럽에서 궁정 양식의 기준이 되었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자신의 위대함의 상징으로 계획하여 궁정을 이곳으로 옮겼다.
여기에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수 예술가들에 의해 새롭고 장엄한 아름다움이 유지되었다.
그들은 프랑스 고전주의의 전통 속에서 성장했지만 왕의 전례 없이 강력한 과시욕에도 자극을 받았다.
루이 14세는 여섯 개의 궁전을 가졌지만 베르사유 궁전을 좋아했다.
이 궁전의 인구는 1만 5천 명에 달했으며 궁전에서는 사치와 안일의 생활이 지속되었다.


1663년 소규모로 태피스트리를 제작하던 고블랭이 왕가에 물건을 대주는 종합공장으로 확장되면서 르 브룅은 책임자가 되어 왕실에 봉사하는 각종 공예기술자들을 모집했다.
이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예술적 교의의 공식 체계와 미적 가치관의 공식 기준이 1663년 회화·조각 아카데미의 재편성을 통해 강화되었다.
1666년에는 프랑스 출신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공인된 훈련을 제공할 목적으로 로마에 프랑스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콜베르가 정치 고문 겸 재무총감에 임명된 후 프랑스는 역사상 가장 화려한 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국가는 전제적 통제가 이루어지는 고도의 체계화된 강력한 기구가 되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예술적 기호와 제작의 통제도 이루어졌다.
그는 뛰어난 감식안을 지닌 미술품 컬렉터였으며 이탈리아를 대신하여 프랑스가 유럽 예술의 중심지가 되는 데 기여한 유능한 수완가였다.
콜베르의 독재 하에 콜베르의 사상을 충실히 구현한 샤를 르 브룅의 기교에 힘입어 유럽 예술의 중심은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파리로 옮겨졌다.
루이 13세의 전형적인 프랑스 고전주의에서 루이 14세의 장엄하고 화려한 양식으로서의 그랜드 매너Grand Manner가 탄생했다.


루이 13세 때에 예술과 정신의 영역에서 나타났던 표현의 절제, 중용, 고대적 장중함의 존중 등의 경향이 루이 14세의 치세 초기에 확고해졌다.
이리하여 1660년경에 고전주의가 만개하여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대와 르네상스에 뿌리를 둔 고전주의는 절제와 조화를 추구하고 상상력을 이성에 종속시키며 보편적 진리를 추구했다.
고전주의는 바로크적 조류와 결정적으로 단절하지 않으면서 그 극단적인 경향과는 거리를 두었다.
예술의 개화가 치세의 영광을 드높일 것으로 확신한 루이 14세는 권력을 정신과 예술의 문제에까지 확대시켰다.
그의 문예옹호는 재능인의 공무원화로 나타났다.
루이 14세는 콜베르의 도움을 받아 외국의 예술가와 학자들을 초빙하고 문예한림원, 과학한림원, 음악한림원, 왕립 천문대, 식물원, 국립 극장과 같은 수용기관을 많이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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