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협회전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한
미술문화협회에는 후쿠자와 이치로를 포함하여 테라다 마사아키寺田正明, 후루자와 이와미古澤岩美, 기카와키 노보루, 아이 미츠, 사이토 요시시게, 스기마타 타다시 등 40여 명의 화가들이 소속되어 있었고 1940년 4월에 창립전을 열고 공모작을 포함하여 227점을 소개했다.
이듬해 제2회 전람회를 열기 전 초현실주의를 공산주의로 오인한 경찰이 협회의 이론적 리더 후쿠자와 이치로와 평론가이자 시인 다키구치 슈조瀧修造를 치안법 위반으로 검거했다.
이에 미술문화협회는 전향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제3회 전람회에서는 전쟁화가 ‘과제작품 특별 진열’이라는 명칭으로 전시하는 등 1944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전람회를 열었지만 전위적 경향은 창립전 이후 나타나지 않았다.
미술문화협회전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한 우리나라 화가는 가네코 히데오金子英雄(1915~?)과 김하건(?~1951)이며 김자영웅은 다섯 차례 모두 참여했고 김하건은 제2, 3, 4회에 참여했다.
김자영웅은 창립전에 <풍경 1>, <풍경 2>, <풍경 3>을 출품한 후 미술문화상을 수상했고 제3회전에서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김하건은 제3회에 <綠의 교향악>, <十九의 기원>, <항구의 설계>, <밤의 정거장>을 출품한 후 미술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제4회 때에 회원에 추대되었다.
김자영웅은 1915년 경상남도 태생으로 김종남인데 14살 때인 1929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1918년에 설립된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후쿠자와 이치로의 연구소에서 수학했다.
그는 일본인을 아내로 맞았으며 일본에 귀화하면서 이름을 마나베 히데오로 바꾸었다.
김하건은 동경미술학교에 재학할 때인 1941년에 출품하고 이듬해에는 회원으로 추대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현존하는 작품은 자화상 한 점뿐이며 사진으로 남아 있는 제3회전 출품작 <항구의 설계>를 보면 외딴 건물이 있는 한적한 바닷가를 배경으로 책상 위에 피라미드와 원구가 있어 데 키리코와 살바도르 달리의 사차원적 공간 혹은 초현실적 공간이 있는 작품을 연상시킨다.
그는 청진으로 돌아와 1943년 8월 12일~16일 청진의 궁내대환宮內大丸에서 청진일보사 북선문화회와 경성 공립중학교 동창회 주최로 ‘김하건 양화 개인전’을 가졌다.
팜플렛에 30여 점의 작품 목록과 함께 미술문화협회의 후쿠자와 이치로, 테라다 마사아키, 그리고 동경미술학교 교수 타나베 이치로 등의 격려사가 실렸다.
팜플렛에 의하면 그는 1942년 ‘신 로망파 협회전’에 참여했다.
그는 6·25동란 때 인민군으로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규모 단체전과 소규모 동인전 모두 회원들의 그룹전으로 열렸고 이들의 작품들 외에 공모를 통해 일반 화가들의 작품을 함께 소개했다.
우리나라 화가들의 참여는 거의 공모전을 통해 이루어졌다. 일반 화가들은 협회상을 수상하거나 회우로 추대되기도 했는데, 우리나라 화가들 중에서 처음 회우로 참여한 사람은 김환기로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참여했다.
문학수, 이중섭, 김하건 등은 자유미술가협회와 미술문화협회에서 활동했고 회원 혹은 회우로 추대되었다.
조선인에 대한 이런 대우는 소규모 동인전에서는 가능했지만 관전은 물론 이과전과 독립미술가협회전 같은 대규모 그룹전에서는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