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매너리즘: 퐁텐블로파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프랑스 미술에서는 퐁텐블로 파의 역할이 컸다.
16세기 중후반, 대략 1530년부터 1579년까지 퐁텐블로 궁전과 관련 있는 작품을 제작한 예술가 집단을 훗날 퐁텐블로파라고 불렀는데, 퐁텐블로궁은 프랑수아 1세의 대망을 가장 멋지게 구현한 곳이다.
프랑수아는 국가적 예술부흥을 실현함으로써 이탈리아의 고전을 신봉하던 대제후들을 견제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이 같은 장대한 이념에 어울릴 만한 대벽화 장식의 전통이 없었다.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이탈리아의 대가들을 초빙해야 했고, 이 작업은 1528~58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퐁텐블로 궁전의 내부를 장식하면서 궁전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이 프랑스로 도입되는 창구가 되었으며, 여기에 뿌리를 내린 양식이 바로크 양식의 선구가 되었다.
초청된 예술가들이 누드 여인의 관능미와 궁정풍의 우아미를 조화시킨 온화하고 장식적인 양식을 만들어냈는데, 이를 제1차 퐁텐블로 파라고 한다.
피오렌티노가 퐁텐블로 궁전에서 주로 한 작업은 프랑수아 대회랑을 당시 프랑스의 궁정 취향에 맞추면서 이탈리아 양식으로 장식하는 것이었다.
그는 미켈란젤로와 스승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영향을 받았지만 <피에타>23에서 보듯 어느 정도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했고 동판화 제작을 위한 수많은 밑그림은 프랑스의 회화와 장식미술에 골고루 영향을 미쳤다.
1540년 타계할 때까지 그는 대회랑을 장식하는 일에 전념했다.
볼로냐 태생의 프란세스코 프리마티초는 줄리오 로마노로부터 매너리즘을 익히고 화가·건축가·실내장식가로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다.
1526년 볼로냐를 떠나 만투바로 가서 줄리오 로마노 작업장에서 조수로 일한 그는 1540~41년 프랑수아를 위해 로마로 가서 당시 가장 유명한 고대 조상들의 모형을 수집했다.
1546년 다시 로마로 갔을 때 바티칸에 소장된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피에타>의 모형을 만들어 프랑스 추기경에게 전달했다.
프리마티초는 로소 피오렌티노와 더불어서 프랑스 매너리즘 일파인 제1차 퐁텐블로 파를 이끌었다.
그는 1559년에 프랑스의 궁정건축가가 되었으며 그의 장식화는 종래의 종교적 주제를 고전적인 신화로 대체하는 새로운 경향을 나타내며 이에 의해 파르미자니노의 거친 매너리즘 양식이 프랑스 취향에 합치하는 지적 세련됨을 갖춘 표현으로 변화했다.
프리마티초는 1532년부터 피오렌티노와 함께 퐁텐블로 궁전의 ‘프랑수아 1세의 회랑’ 내부를 장식했고, 퐁텐블로 궁전 내에 있는 다른 회랑들의 내부 장식도 맡았다.
1559년에는 앙리 2세의 왕실 건축가가 되어 생드니 수도원 성당의 발루아 예배당 건설에 큰 역할을 했다.
피오렌티노·프리마티초·니콜로 델 아바테 세 사람은 프랑스와 플랑드르 예술가들의 도움으로 자신들의 양식을 프랑스 궁정의 기호에 맞추는 데 성공했다.
세 사람에 의해서 관능성과 장식성, 규방의 사치스럽고 자유분방함과 다소곳하고 우아함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특수한 매너리즘 양식이 생겨났으며, 스투코Stucco(구운 석회와 고운 흙을 섞어 만든 치장 벽토) 장식과 벽화의 결합은 ‘프랑스 양식’으로 알려진 독특한 기법을 완성시켰다.
‘프랑수아 1세의 회랑’에 있는 피오렌티노의 장식과 프리마티초의 작품은 두 번씩이나 덧칠이 되어 있어서 그 후 복원작업이 수차례 시도되었으나 최초의 상태를 어림하기가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작품은 프랑스에서 두드러진 전통으로 뿌리내렸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로 보급되어 새로운 장식 양식에 크게 기여했다.
이 양식에서는 신화적인 세계를 연출한 인위적 장치·목가적 풍경·나긋나긋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억지 미소를 짓는 누드 여인 등 새로운 것을 지향했으므로 진지하고 화려한 회화에 속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시 유행한 실내장식 분야에 속한다.
종교전쟁으로 인한 공백 이후 궁전의 장식화는 앙리 4세(1589-1610년 재위)의 비호 하에 부활했다.
일반적으로 제2차 퐁텐블로 파라는 명칭은 앙리 4세를 위한 장식화 제작에 참여한 화가들을 말한다.
그들의 작업은 평범했으며 제1세대의 예술가들의 특징이었던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전의 플랑드르 사실주의가 프랑스 궁정 취향과 결합하여 국제 고딕 양식이 생겨난 것과 마찬가지로 퐁텐블로에서도 이탈리아 매너리즘이 궁정의 기호에 맞춰진 독특한 프랑스 화파가 형성되었다.
이는 가냘프고 창백한 누드의 요정에서 보이는 섬세함·규방을 암시하는 정경·전통적인 종교적 내용을 대신하는 신비주의적인 테마 등 거의 유희에 가까운 묘사들이 결합된 것이다.27
이것은 세기가 바뀐 후에도 프랑스 회화의 주류를 형성했으며 그 모태가 되는 이탈리아 매너리즘과 더불어 인접 국가에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