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미술




미술사에서 동남아시아는 보통 인도 문화의 수용으로 일찍부터 개화 되어, 인도계 종교 미술이 전개된 여러 나라를 말한다. 즉 미얀마 · 타이·말레이지아에서부터 캄보디아 ·라오스·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은 기원 초기부터 인도의 종교나 관습 혹은 문예나 산스크리트어를 받아 들여 오랫동안 인도문화권을 형성했다. 힌두교 미술과 불교 미술이 전개되었고 인도를 본받아 웅장한 탑과 많은 존상이 제작되었다.

나라와 민족에 따라 각각 독특한 전개를 보이고 있지만 민예적인 것을 제외한 동남아시아의 미술은 초기에는 인도적인 요소가 많고 이것이 점차로 토착화하여 각각의 민족적 성격을 나타냄과 동시에 양식적으로는 점점 퇴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인도네시아 특히 인도-자바 미술은 이와 같은 전개의 전형을 보여준다. 여러 민족 중에서 조형적으로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것은 자바인과 크레르 인의 미술로서 특히 자바인이 남긴 보로부드르와 크메르인이 이룩한 앙코르 와트는 가장 크고 우수한 예술적 유산이다. 회화는 거의 없으나 건축 유구물과 존상 등의 조각은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풍부하게 남아 있으며 오래된 것은 대체로 5∼6세기까지 소급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8∼9세기, 캄보디 아와 미얀마에서는 10∼12세기에 최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의 미술은 14∼15세기 이후 급격히 쇠퇴하여 대륙에서는 남방 불교 미술이 행해진 것 이외에는 볼만한 조형 활동이 없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이슬람화되어 발리 섬에 후기 인도-자바 미술이 잔존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인도미술




인도는 아시아 서남부에 위치한 거의 삼각형의 반대륙으로서 북방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 대륙과 접하고, 동서의 양면은 바다에 접하고 있어 외부와의 접촉이 적었다. 국토가 광대하여 남북지방은 기후 풍토의 차이가 심하고 험준하여 높은 산악이 많고, 미개척 지대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이는 수많은 종족과 다양한 방언을 낳게하였다.

기원전 4000년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민족 또는 종족이 출몰하면서 종교와 관습 등 사회생활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인도 사람들이 일상의 생활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미술작품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형식과 양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인도미술을 간단하게 설명한다든가 답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인도는 불교 미술, 힌두교 미술, 자이나교 미술, 이슬람교 미술의 조각, 회화, 건축 등의 수많은 유구나 유품이 인도 각지에 남아 있는데 이들은 종교적 성격과 함께 인도인의 미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인도인의 미의식인 관능적이고 육감적이면서 힘차고 씩씩한 조형을 좋아한 민중의 미적 감각은, 외부로부터 수많은 자극과 이식이 이루어져 다양한 미술작품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고왕조 미술 B.C. 320-230년경

마우리아Maurya 왕조시대 처음으로 통일국가를 이루어 정치적인 미술품이 나타났다. 이 왕조의 3대 왕인 아소카Asoka왕은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자신의 왕도에 수많은 사원과 불탑을 세웠는데 이는 주로 그리스와 오리엔트 양식을 모방한 것이다.

마우리아 왕조의 뒤를 이은 숭가Sunga왕조는 동부의 갠지스 강 일대를 중심으로 건국되어 불탑 조영사업이 성하였다. 불탑은 "불교도의 무덤"을 뜻하는 것으로 석존이 입멸하자 이를 화장하여 나온 6만 8,000개의 사리舍利를 각지의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이것을 땅에 묻고 기념하기 위한 탑을 세우게 되었다. 이들 불탑의 형식과 재료는 각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면서 동방 전역으로 퍼지게 된다. 인도에서는 전조塼造, 중국에서는 다층 누각식의 전조와 목조, 우리나라에서는 석조와 목조, 전조, 일본에서는 목조와 불탑이 많이 세워졌다.

안드라Andhra 왕조는 불교조영사업을 숭가왕조에 이어 활발히 전개하였다. 인도 중부의 산치Sanchi는 불탑과 다양한 조각상이 장신된 탑문이 서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외래적 요소를 인도 고유의 전통과 함께 융합한 것이다. 아직은 불상을 표현하지 않고 대신 법륜法輪, 불탑, 연꽃, 보리수 및 공백空白등의 상징물을 표현하였다.



2)쿠샨Kushan 왕조, 굽타Gupta 왕조 45-520

인도의 서북지방은 서방세계와의 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문화교류의 중요한 지대로서 쿠샨족은 이 지역을 기점으로 일어나 간다라 지방에 수도를 정하고 대승불교 사상을 널리 전파시켜 불탑의 조영과 불상, 불화의 제작 등 불교미술이 크게 일어났다. 간다라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 미술은 알렉산더 대왕이 들여온 헬레니즘과 융합하여 "간다라 미술Gandhara Art"을 낳았다. 간다라 미술은 인도의 불교적 주제가 그리스 미술의 감각과 기술에 의하여 나타난 것으로, 인도 불교의 조상이 그리스의 양식과 기법에서 나온 것이다. 이 시대에 들어서는 헬레니즘의 유입으로 신상이 제작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간다라 미술의 발달은 건축에 있어서 석굴 양식과 공예에 당초문, 인동문 양식등과 함께 서역, 중국, 한국, 일본 등 동방세계로 전파되었다.

한편 인도 고유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마투라Mathura 미술"은 "간다라 미술"보다 인도 고유의 예술성을 지녀 이를 바탕으로 "힌두 미술Hindu Art"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힌두교는 브라만, 비슈누, 시바 등의 다신적 계급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창조, 생산등을 상징하는 여신을 숭배하여 순결한 그대로의 나체상의 조상이 제작되었다.

쿠샨왕조가 망한 뒤 인도 중부의 굽타왕국이 통일왕국을 세웠다. 굽타 왕조는 인도 고유의 마투라와 간다라 미술을 융합한 동·서양식의 종합적 미술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굽타 왕조 시대의 조형예술 문화의 대표적인 특징은 석굴사원의 조영사업이었다. 인도의 석굴은 승려들이 수도하는 곳으로 "아잔타 석굴"은 인도 최대의 불교 석굴이다. 23개의 석굴이 있으며 건축, 조각, 벽화 등에서 일체화를 이루는 불교유적으로서 아시아권 불교예술의 원류로서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3)팔라Pala 왕조의 힌두미술 765-1200

굽타 왕조가 망한 뒤 여러 작은 왕조로 분립되었던 인도 대륙에 동북 벵골 지방의 팔라 왕조가 왕국을 세워 13세기 이슬람이 침입할 때까지 세력을 유지하였다. 팔라 왕조에는 힌두 미술이 융성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은 복잡하고 장려한 힌두교 사원건물을 장식하는 수많은 조각적 군상들이 있다. 힌두교의 주신은 브라만·비슈누·시바의 다신을 삼위일체로 하는데, 이들은 주로 태양·보존·파괴를 상징하며 이 사상은 각양 각종의 조상으로 나타나 힌두교의 건물을 장식하고 있다. 인간의 육체가 신이 내려 준 가장 생명력 있는 존귀한 것으로 여겨 육체의 관능미를 나타나게 되었다. 또 밀교예술密敎藝術이 성함에 따라 조상에도 생명의 움직임을 보이는 각종 양식의 다양한 형태가 나타난다. 이러한 힌두 미술의 표현은 불교보다도 현세의 인간 생활과 결부되는 휴머니즘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4)이슬람 왕조의 회교미술 1526-1858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이슬람교는 마호메트가 창시한 세계3대 종교로서 그 강대한 세력은 사라센 제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동쪽은 인도에서 아프리카 북안을 지나, 서쪽은 한때 스페인까지 그 판도가 미쳤다. 인도는 팔라 왕조가 망한 뒤 정치적인 혼란시기에 들어갔다. 13세기 이슬람 교도들의 침략으로 인하여 불교와 힌두교는 정치·문화·예술에서 이슬람의 영향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슬람 문화예술은 서양의 기독교 문화예술, 동양의 불교문화예술과 아울러 세계3대 문화권과 예술계통의 하나로 중동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일반적인 이슬람 미술의 특색은 궁륭형의 천장 돔과 높은 첨탑, 그리고 회교사원인 모스크가 있다. 모스크들은 엽식 도안과 아라비아 문자로써 복잡하고도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아름다운 반구형 지붕의 돔dome과 높이 솟아 있는 첨탑, 모스크의 내외를 장식한 각종의 도안과 문자는 호화로운 이슬람 건축예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이슬람 미술은 서방으로는 비잔틴Byzantine 시대를 비롯하여 중세의 기독교 문화에 영향을 주었고, 동방으로는 인도·파키스탄·중앙 아시아·중국 등지의 아시아 미술에 널리 영향을 미쳤다.

"미니어처miniature미술"은 이슬람 미술의 독특한 특색으로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을 장식한데서 시작되었다. "미니어처 미술"은 화려한 궁전, 왕후 귀족들의 초상과 전투, 수렵장면과 남녀의 연애, 결혼 등의 각종 생활풍습과 동식물, 엽식葉飾, 문자의 도안등을 주제로 하여 극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이 그림의 화법과 양식은 묵선을 중심으로 짙은 채색을 써서 제작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일본미술




1)아스카 시대와 나라 시대

아스카 시대의 미술은 크게는 중국의 육조 시대 위나라와, 직접적으로는 우리 나라의 백제와 신라의 불교 미술 양식을 받아들였다. 백제의 아좌태자는 일본에 건너가 성덕태자상을 그려주었다고 한다. 다카마쓰 옛 무덤의 벽화는 고구려 바탕에 토착 요소가 가미되어 있어서 일본의 고대 문화가 한국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 것이다.

나라 시대의 미술은 중국 당나라 미술을 받아들여 불교 미술이 성행하였으며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인 그림으로 고구려 스님 담징이 그린 법륭사 금당벽화인 「아미타정토도(阿彌陀淨土圖)」는 일본 회화 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자랑하고 있다.




2)헤이안 시대

헤이안 시대(794-1185)는 견당사 파견을 중지한 894년을 분기로 하여 헤이안 전기와 헤이안 후기로 양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헤이안 전기는 나라시대 이래 당의 문화가 일본으로 이행되는 과도기라 할 수 있다. 불교는 사이쵸와 구우카이가 당불교의 교학을 배우고 돌아와 천태종과 진언종을 창시했다. 궁중에서는 한시와 한문이 성행하는 등 높은 수준의 문화가 형성되었고, 9세기 후반에는 '가나'문자가 나타났다. 9세기말에는 독자적인 일본 문화가 성장했다. 10세기경에는 권문세가의 장원이 늘어나 화려한 궁정 문화가 조성되었다. 헤이안 후기에는 자연을 동경하여 자연과 생활을 조화시키는 주택 건축 양식이 생겼다. 이 때 야마토에 등 여러 분야에서 일본 양식이 성립되었고 이후 일본 문화의 고전이 되었다. 11세기에는 궁정 문화가 완성되었으며 정토교 미술이 유행하였다. 한편 민중에 관심을 돌린 설화문학과 민중의 모습을 소재로 다룬 에마키모노가 나와 귀족 사회 말기의 새로운 시대적 기운을 반영했다.




3)카마쿠라 시대

카마쿠라 시대(1185-1333)는 쿄토의 공가(公家)와 카마쿠라 지방의 무가(武家)가 대립 또는 교류하면서 이원적 문화가 형성되었던 시기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강력한 힘을 추구했던 시대의 내면에는 아름다움을 회상하는 무상관(無常觀)이 감돌았다. 새로운 미술의 출발점은 도다이지의 부흥 사업이었다. 남송의 건축 양식이 채용되고 텐표 양식의 복고적 성격의 불상 조각이 조성되었다. 후반에는 무가의 지지를 받은 선종의 송원 문화가 카마쿠라에 이식되어 수묵화가 시작되기도 했다. 한편 정토종·진종·시종등 신흥 종파와 남도 불교는 포교활동에 에마키모노를 활용했고, 수이쟈쿠 미술도 성행했으며 민중의 감각이 미술에 나타 나기도 했다. 말기에는 쿄토·카마쿠라에 중국 취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4)무로마치 시대

일본 무로마치 시대(1333-1573)는 새로운 아시카가 막부의 권력과 남북조 통일, 대명 무역 등을 기반으로 한 시대였다. 이 시대의 미술은 선종미술과 무가(武家)의 카라모노(唐物) 취미등으로 상징된다. 송원화(宋元畵)를 규범으로 한 정상과 도석인물화가 부흥하고, 카오오와 모쿠안등의 선승 화가가 나타 났다. 1368년부터 1441년까지 계속된 키타야마 문화에서는 수묵화가 애호됐고, 공무(公武)와 연가(連歌)가 성행하였다. 슈분은 남송과 조선의 산수 양식을 섭취하여 수묵화를 일본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467년부터 히가시야마 문화가 탄생했는데 이 시대 문화적 성격은 서원·정원 ·차 꽃등을 취미로 하는 왕조문화와 민중 문화의 성숙을 특징으로 하는 장식적인 쇼헤이화 와 공예등이 발전했다. 특히 한화(漢畵)가 융성했는데 소오탄, 쇼오케이, 가쿠오를 비롯하여 다이토쿠 지일파, 코아미파, 카마쿠라파, 카노 오파등이 유명하다. 카노오파의 카노 모토노부는 야마토에의 기법을 가미하여 근세 회화의 기초를 확립 했다.




5)모모야마 시대

일본 모모야마 시대(1573-1615)는 쇼쿠호 정권에서 도쿠가와 막부의 강력한 권력에 의해 근세로 진입한 시기로, 고대·중세적인 권위의 몰락을 반영한 강렬한 표현과 호화로운 장식을 보여주는 현세주의적 인간 중심의 문화적 경향을 볼 수 있다. 전국을 통일한 여력은 장대한 성을 구축하고, 미술의 제 분야를 동원 하여 장대한 장식 미술을 창출했다. 평화로운 현세를 반영한 의장(意匠) 감각과 고전 문화의 부흥을 의도한 공공연한 결집 등의 기운도 이 시기의 특색이다. 또 하나의 특징으로 센리큐의 '와비차'는 간소하고 한적한 미의식을 추구하여 당시의 호화로운 미의식에 대응했다. 여기에서 일본화적인 독자적 화풍이 싹트기 시작한다. 무가의 초상화, 부처와 부인상, 유아상등 풍속화가 확립되었고 쇼헤이(障屛) 그림의 황금 시대를 이루었다. 금·은을 사용한 금벽화가 유행하였다. 소서원(小書院)등의 사적인 곳에서는 수묵화를 선호했다. 이 시대의 화가들은 중국 그림을 일본화하고 다각적인 표현으로 유파를 형성했는데 카노오파가 대표적이다. 성화(聖畵)의 모사와 서양 판화의 제재를 이용한 인물도, 세계도 등을 제작한 풍속도 있었다.



6)에도 시대


에도 시대(1603-1867)에는 막번체제 확립에 의한 봉건 사회가 완성되고 사농공상의 신분제와 쇄국 등의 정책으로 국내 평화가 유지된 시기였다. 상공업의 발달과 민중 계급이 형성되고 봉건제와의 갈등이 표출된 갖가지 문화가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모모야마 양식이 남아있는 웅장한 금벽장 벽화가 묘사되어 화조 화, 풍속화 등이 주제가 되었다. 전통적인 미술이 보급되었고, 주자학을 관학으로 한 무가의 미적 선호 경향이 나타났다. 소타즈는 민중을 기반으로 하여 야마토에의 전통을 장식적이고 독특한 양식으로 창조했는데 이것은 린파로 계승되었다.
또 신흥계급의 성장으로 사치스런 속세의 향락을 추구하는 미술이 전개되었다. 중기 이후에는 나가사키를 통하여 수용된 청나라와 네덜란드의 지식에 의해 서양화가 탄생했다. 후기에는 막번의 모순이 심화되어 퇴폐적인 풍조가 가득했고 도시 대중들 사이에는 가부키등 상징적인 미의식이 유행했다. 나가사키를 통해 들어온 유리공예는 병, 그릇 , 잔 등으로 실용화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중국미술




중국은 아시아 대륙의 동반부에 위치한 광대한 지역으로, 북은 시베리아의 한대에, 남은 동남 아시아의 열대에 접경하여 남북으로 한서의 차이가 심한 기후에다 고산, 황량한 고원과 초원·사막, 비옥한 평야 등 다양한 기후·풍토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이와 같이 중국 대륙은 기후 풍토에 의한 자연환경의 차이가 심하여 화북華北, 화남華南의 남북 지방에 거주하는 주민의 민족성과 사용하는 언어가 현저히 달라 문화·예술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다. 문화 교류는 주로 서역 지방을 통하여 서방 세계와 이루어졌고, 동방으로는 서방에서 받아들인 불교문화를 중국화하여 변화 발전시켰다.

중국은 서역西域을 통하여 전래된 인도의 불교 예술을 중국화하여 이것을 다시 서역·서방 세계에 전파하고, 한편으로 동방의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하였다. 당대唐代에는 비단·도자기·회화 예술을 서역지방을 통해 서방의 인도·이란 및 서부 아시아 지역에 보내 중국문화의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중국의 일반 미술이 한문화권 안의 한국과 일본에 들어가 자체적인 고유의 민족예술로 발전하였다.



1)고대왕조의 미술

은殷 왕조는 하남성 안양의 은허 유적의 발굴로 인해 우수한 문화를 가진 왕국이었음이 증명되었다. 고도의 물질문명을 가졌으며 농업국가였던 이 나라는 당시 2,000자의 한자와 우수한 동기銅器를 사용한 봉건 전제국가였다. 이들은 조상신을 숭배하였고, 신전·사당·궁전등을 세웠으며, 임금은 백성을 대표하여 여러 신과 선조에게 제사드리는 의식을 집행하였다.

은허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명한 것은 '갑골문자'로서 당시의 점복에 관한 설명과 제사·종교에 관한 설명 등 당시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상형문자이다. 은殷 왕조는 제사의식을 중요시하여 '청동기'를 비롯한 각종 동기류 등의 제사용 기물이 발달하였다. 당대의 청동 기물은 중국 최초의 우수한 조형 예술품인데 그 정교한 표현기법과 독특한 도안은 다른 시대와 다른 고유한 것이다. 이들 청동 기물에는 구름·비·번개·별·물결 등의 풍년을 상징하는 문양과 다산을 비는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있다.

주周왕조는 황제가 천자로 받들어 하늘을 대신하여 종교와 정치의 권력을 가지고 지배하였다. 당시 귀족계급들은 모든 생활의 의식 곧 예禮·악樂·산算·서書등에 관한 높은 교양을 쌓았다. 뿐만 아니라 당시는 철학·문학 등 학문의 발달로 역易·서書·시경詩經등 최초의 고전 문헌이 풍부하였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전국시대를 맞게된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는 노예시대의 마지막에서 봉건 시대로 들어서는 초기로서 한 분기점에 해당된다. 또한 이 시기에 공자, 노자, 묵자, 관자 등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백가쟁명'의 시대라고 말한다. 이 시대는 철학과 사상의 발전뿐만 아니라, 예술측면에서도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춘추시대에는 최초로 수도를 장안에 정하고 농경의 수공업 생산을 국민의 주업으로 하여, 전대의 동기 사용에서 철기 사용으로 바뀌어 일용가구를 비롯한 각종 공예품이 발달하였다. 또한 혼란한 시국으로, 귀족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궁술, 검술 등 전사로서의 훈련을 받아야 했고, 각종 무기·전차 등의 생산이 활발하여 수공업의 공방이 발달하였다.


2)진秦·한漢

어지러웠던 전국시대는 진의 시황제의 출현으로 끝나고 국토는 통일되었다. 시황제는 봉건주의의 고전을 불사르는 '분서갱유'를 감행하여 학문과 문화를 탄압하였다. 또한 불로장생을 기원하고 부귀영화를 영원히 누리려 하였으나 그의 치세는 이대二代로 끝나고 말았다.

진시황은 짧은 치세기간 중에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여 '아방궁'을 비롯한 장대한 규모의 궁전과 누각을 세우고, 북방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위한 장성을 대규모로 확장하는 사업을 벌여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성축물인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또한 1974년 3월 섬서성에서 발견된 진시황의 지하군단인 병마용은 진시황릉을 지키는 병사들로 진시황 시대 연간 70여만명이 동원된 실로 장대한 규모이다.. 군사들의 머리형태나 옷차림으로 당시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병마용은 고도의 사실적인 묘사로 생명력 넘치는 위엄을 지니고 있다.

한漢 나라는 한족이 세운 대륙 최초의 중앙 집권국가로서 그 국세는 동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은 중앙 아시아에까지 미쳤다. 한나라는 정치·군사·종교·문화·예술의 대발전을 보여 이시기 중국은 문명국으로서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능묘조각에는 공자의 교훈에 의한 역사적·도덕적 설화, 도교 사상에 의한 종교적·환상적 장면, 죽은 자의 생에서 얻은 속세의 장면 등이 주요 주제로 다루어 졌으며, 사실적인 표현에 상징성을 더하였다.

서법 예술의 역사가 실질적으로 출발한 것은 이 시기로 진의 문자 통일의 뒤를 이은 한 대는 각종 서체가 발달하여 전문적인 서가가 나오게 되었다. 회화는 주로 도자기와 능묘 안의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도자기의 그림에는 도가의 전설적 신령·악귀·동물 등이 있으며, 고분 안의 벽면에는 가무장면이나 동물들이 장식적인 필선으로 그려져있다.



3)위魏·진晋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인 한漢제국이 망하고 중국 대륙은 분열과 무질서의 혼란한 시대가 되었다. 삼국 위魏·촉蜀·오吳시대가 지난 뒤 진무제晉武帝의 통일로 잠시 안정되었으나, 북방외족의 침입으로 진晉왕조가 서북에서 강남으로 이동 남하하니, 위魏가 천하를 통일하고 뒤이어 진晋도 나라를 세우기까지의 어지러운 370여년간의 시대에도 한족의 문화와 예술은 주도적 역할을 하여,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문화·예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위·진시대는 불안과 동요의 난세에서 문화·예술도 도피와 안일의 성격을 갖게되어 '죽림칠현竹林七賢'사상 같은 것이 유행하였다. '죽림칠현'사상은 한족의 문인 묵객들이 산 깊고 물 맑은 조용한 대자연 속에 도피하여 허무주의적 청담 談사상에 의한 풍류를 즐긴 것에서 나온 말이다.

이 시대에는 전대의 한문화를 계승하는 한편 고승의 인도여행으로 인도·서역의 문화·예술이 많이 들어왔다. 서역에서 들어온 석굴 건축과 불상 조각 중 최고의 석굴예술은 '돈황석굴'로서 세계적인 중국의 석굴 예술을 대표하고 있다.

서법예술은 서성書聖이라 일컬어지는 왕희지王羲之와 왕헌지王獻之가 행서와 초서를 완성하였다. 회화는 동진의 명화가 고개지顧愷之가 그린 「여사잠도」가 유명한데, 이는 궁중 부녀자들의 윤리 도덕을 교훈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자연을 벗하며 도교적 선인仙人같은 풍류생활을 주제로 한 그림도 제작되었다.



4)남북조南北朝

동진이 망하자 강남에서는 그 자리에 송宋·제濟·양梁·진陳의 네 왕조가 이어서 바뀌었고, 화북에서는 만족의 오호십육국 시대를 지나 북위가 통일되었다. 북위는 다시 동·서위로 분열되었고 북제·북주의 왕조가 교체해서 섰다가 589년 수隨에 의해 천하가 통일되니 이동안의 170여년간을 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남북조는 민족은 달랐으나 결국 문화는 한족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북조의 문화는 유목민인 북위의 선비족이 정치의 권력을 잡고 한족을 시켜 외래의 서역문화와 한족 문화를 종합하여 봉건문화를 이루었다. 한편 강남으로 내려간 한족의 남조는 기후와 풍토가 온화하고 기름진 땅에서 화려한 귀족적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여 육조六朝 문화시대를 펼쳐나갔다. 이들은 재래의 전통적 예교주의와 도교적 청담 사상과 불교사상을 두루 아울러 다양한 예술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는데 문인사대부의 시문 서화와 산수풍월을 즐기는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남조 문화는 우리나라 삼국 시대 백제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북조의 그림으로는 돈황 석굴의 벽화가 유명하다. 돈황 석굴의 벽화는 필치가 대담하고

굳세며, 색채가 정열적인 서역풍에서, 후기에는 부드러운 필치에 고상한 착색을 한 깊이있는

중국풍이 그 주류를 이룬다.

이 시대의 평론가 사혁謝赫은 그의 저서 《고화품록古畵品錄》에서 '화론육법'의 여섯가지 화법을 말하였다. '화론육법'은 기운생동氣運生動, 골법용필骨法用筆, 응물상형應物象形, 수류부채隨類賦彩, 경영위치經營位置, 전이모사傳移模寫 등이며 이 중에서 기운생동을 으뜸으로 말하여, 동양 전통회화의 중요한 창작사상이자, 품평과 감상의 요소로 여겼다.



5)당唐 시대

외족의 침입으로 남북으로 분열되었던 중국대륙은 470년만에 수隨의 통일로 한漢족의 나라가 되었다. 수 왕조는 반세기의 짧은 시대였지만 불교를 크게 장려하고 재건 사업에 힘썼다. 이러한 수 왕조의 재건사업을 그대로 이어받은 당唐 시대는 한나라 이래 최대의 제국으로서 광대한 국토를 건설하였고, 문화 예술에 있어 동양의 르네상스를 이루었다. 당은 서역문화와 한민족 고유의 전통성을 아울러, 동서 문화를 종합하였다. 한대부터 성향한 명기明器 곧 토우의 제작은 장례풍습으로 더욱 유행하였는데, 귀족들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명기에는 '당삼채'가 유명한데 이는 백색 바탕에 녹색·황색·적색을 중심으로 하고 그 외에 남색·갈색 등이 가미된 도자기의 토우, 도용등을 말하는 것이다. 동물상의 말, 낙타등은, 당제국의 번영한 국세로 동서의 교통이 발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관능미가 풍부한 부녀상·문관상·무관상·소년상 및 기타 호복의 호인상 등이 있다. '당삼채'는 장안·낙양 등의 고도를 비롯하여 함양·돈황·안양의 은허등지에서 출토되었다. 서법에서 구양순은 뼈대있는 필법과 짜임새가 정확한 해서를 잘 썼고, 4대가의 한 사람인 안진경顔眞卿은 무겁고도 정중한 필법으로 명작을 많이 남겼다.

회화에서는 처음에 수묵화풍이 발생하여 당 시대의 시문학 발달에 의한 문학과 회화를 연결 종합한 '남종 문인화풍'의 예술이 역사적 출발을 이루었고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王維는 남화의 창시자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한편으로 극사실풍의 채색화 양식은 이사훈李思訓에 의하여 발전하여 북화의 창시자가 되었다. 동양 회화사의 이대二大 화풍의 조류를 이룬 남북화의 시작이 이 시기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6)송宋

당조 말기에 화북 지방에 오왕조가 서고 화남지방에 여러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를 "오대五代" 라고 이른다. 또한 요동 지방에서 거란이 요遼를 세웠으나 다시 여진족의 금金에게 멸하게 된다. 거란을 정복한 금은 한족을 압박하게 되고 무력에 의해 화남 지방으로 쫒겨내려가 나라를 세우니, 그 이전을 북송, 그 이후를 남송이라 부른다. 거란과 여진의 두 종족은 높은 문화를 가진 한민족을 무력으로 정복하였지만 문화·예술면으로는 동화되었다. 송이 혼란스러운 오대를 거쳐 중원 천하를 통일하자, 다시 평화가 돌아와 사회가 안정되니 문화 또한 융성하여 당시대 이후 다시금 중국 문화예술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당시대의 문화가 국제성을 띤 융합문화임에 반하여, 송의 문화는 보수주의와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송대 건축은 수많은 누각식 다층탑 양식의 불탑이 특징이다. 이러한 높은 불탑들은 우리나라의 고려시대 불탑에도 영향을 주었으니「경천사지 석탑」이 그 예이다. 또한 수도 변경 같은 큰 도회의 거리를 번화하게 장식하여 근세적인 거리 모양을 그린 유명한 「청명상하도」가 있다. 이는 그 당시의 가두풍경을 짐작케 한다.

공예에서는 일명 비색秕色이라고 일컬어지는 청자가 당 시대 이후로 가장 많이 산출되었다. 당시 이 청자는 궁중에서만 비밀리에 사용하는 색기色器라고 하여 비색秕色이란 이름이 나온 것이다. 또한 순백색의 백자는 송대 지식인의 지적인 정신 생활을 시각화한 것이다.

송 왕조의 역대 황제는 예술을 사랑하고 서화를 장려하며 서화가를 애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황제 자신이 서화에 뛰어나 휘종徽宗, 고종高宗 같은 임금이 나와 각종 서화집을 발간하는 등 번성하였다. 또한 당 시대의 시문학 발달에 의한 '시서화 삼절' 사상, 문인 서화 예술의 풍조가 유행하여 소동파蘇東波·미불米  등의 예술인이 나왔고 행서, 초서체가 발달하였다.

송대 회화는 전통적 사실주의와 신흥 이상주의의 2대 화풍의 양식이 아울러 성행하였다. 사실주의는 육조·당조의 정통성을 지키면서 만물을 객관적 입장에서 세밀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주로 궁정화원의 전문적 화가들에 의해 '원체화院體畵풍'의 화조화와 북송화풍의 산수화를 연결시켰다.

이상주의는 형식에 구애받지않고 이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으로 주로 문인, 학자, 사대부 등의 비전문적 화가들에 의하여 '남종 문인화풍'의 산수화를 성립시켰다. 산수화는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작품을 많이 하였고, 대표적인 화가로는 곽희郭熙가 있다. 그는 저서《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중국 산수화의 기본 조건이 되는 '삼원법三遠法'을 주장하였다. 고원법高遠法은 산을 바라보는 데서 생기는 공간의 높이, 심원법深遠法은 산의 속을 들여다 보는 데서 생기는 공간의 깊이, 평원법平遠法은 산을 멀리서 바라보는 데서 생기는 공간의 넓이를 말하는 것으로, 산의 모양세에 대한 작가의 위치와 거리, 계절의 변화에서 생기는 중국화의 독특한 원근법이다. 이러한 이론은 동양 회화 표현에서 무한한 공간을 화면에 담아내는 여백을 가장 중요시하는 동양철학적 결과를 낳았다. 북송 산수화의 대표적인 화가는 이성李成으로 그는 화북 지방의 산수풍경화를 잘 그렸다. 중국 산수화에 있어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는 유명한 화제인데 '소상팔경'이란 강남 호남성 동정호 부근의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이루어지는 8경을 평원법으로 그린 것이다.

남방 화단은 북방식의 거칠고 메마른 화풍과는 달리 부드럽고 물기 있는 필법으로 나타내어 남종 산수화의 특성을 이루었다. 재야파의 대표적인 작가인 미불米 과 그의 아들 미우인米友仁은 수묵농담과 점묘법에 의한 미점식 산수화를 창안하여 이후 동양 남종 산수화의 새로운 화풍을 이루었다.



7)원元 시대

송나라를 강남으로 쫓아낸 금나라는 나라를 세운지 120년만에 유목 민족 몽고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한족의 남송마저 무너지고 마니, 중국 대륙은 약 100여년동안 몽고족의 치하에 놓이게 된다. 몽고족의 나라인 원은 무력으로 한민족을 정복하였으나, 예술적인 독창력은 없었으므로 송의 예술을 그대로 계승하여 다음 대인 명明에 전수하였다. 그러나 라마교 성격이 가미된 조상彫像은 명조와 청조까지 이어졌다.

원나라는 회화예술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원체화풍의 예술을 쇠퇴의 길로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원대 문인화의 부흥을 주도했던 화가로 고극공高克恭, 조맹부趙孟賦등에 의한 복고 운동으로 주로 북송 산수화가의 양식과 묘법이 연구되기도 하였다. 조맹부는 왕족 출신이란 신분과 임금의 사위라는 지위, 품격 있는 서화예술가로서 당시 예술계에 큰 영향을 주어 고고한 문인 사대부의 기풍을 나타내는 남종문인화의 발전을 가져와, 원 말기에 이르러서는 유명한 원말 사대가와 그 예술을 탄생시켰다. 원말 4대가 (황공망黃公望, 예찬倪瓚, 오진吳鎭, 왕몽王蒙)를 중심으로 한 남종 문인화 예술은 사군자四君子·세한삼우歲寒三友같은 이상향을 주제로 하여 사실화풍에서 벗어나 사의寫意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엄동설한에도 본래의 절개를 지키는 산수는 이민족 치하 예술인들이 처해있는 시대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8)명明 시대

명조는 4세기 이상에 걸친 북방민족으로부터 해방되어 민족의 시대가 부활된 시기이다.

명조의 한인들은 다시 정치적으로 위력을 되찾고 문화적으로도 전통을 세우게 된다. 오랫동안의 이민족의 지배하에 눌려있던 중국은 국수주의적 복고주의 경향을 띠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지나친 전통문화의 답습은 문화적 침체기를 불러와 한편에서는 자유주의 사상이 태동하게 되었다. 또한 서양인의 동방 세계로 향하는 항로가 개척되고 기독교 선교사들의 전도로 인하여 서양의 과학적 지식이 밀물과 같이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이는 중국 문화의 근대화로의 출발점으로 청조의 문화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명조는 한족의 정치적 위력과 문화의 영광을 다시 자랑한 시대이다. 명 왕조는 물질적 영화와 영광을 누려, 사치스러운 생활로 당조의 재현을 이루었다. 오늘날 북방의 '만리장성'과 초기의 수도였던 남경, 그리고 북경의 웅장하고 장엄한 궁궐과 사원 건물들이 이 시대 건축물들이다. 명·청의 수도 북경은 세계의 여러 수도 중에서 가장 웅대한 규모와 제도를 가진 동양의 대표적인 대도大都이다. 웅장하고 화려한 성벽, 궁궐, 불사, 전묘, 누각 등의 다양한 건물들은 동양문화의 정서와 풍취가 가득하여, 유구한 중국의 역사와 역대왕조의 권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회화는 두개의 화풍이 전·후기로 나뉘어 성행하였다. 남송의 원체화나 수묵화의 흐름을 받아들인 궁정 직업화가의 화풍과, 문인들인 원말 4대가를 따른 화픙이다.

대진戴進, 오위吳偉, 장로張路등 절파浙派의 직업화가들은 직선적이고 호방한 필선을 사용하여 감각적인 효과를 중심으로 강한 시각성을 추구하였다.

'남종문인화풍'은 북송의 동원童源·거연巨然의 화풍을 그 모범으로 삼아 심주沈周·당인唐寅·동기창董基昌등 이른바 '오파吳派'작가들에 의하여 이어졌다. 심주沈周는 시문서화의 명문출신으로, 북송의 동원, 거연과 원 말기의 황공망, 오진의 화풍을 연구하여 웅건한 필선과 패기에 찬 필치로 개성적이고 독특한 남종화풍을 이루었다. 명조의 화단과 화풍은 중기 후반부터 남종 문인화 계통이 우세하여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직 남화 일색의 시대라 할 수 있을 정도인데, 이는 제왕들이 화원 육성에 힘을 쓰지않고 명문 출신의 사대부들이 화단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간데 있다.

동기창董基昌은 시문서화를 잘하고 화론畵論에 조예가 깊어, 북화보다 남화가 우위에 있다는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을 주장하였다. '남북화론'은 당의 왕유王維와 이사훈李思訓을 남북화의 시조로 한 2대 화풍으로 오대五代에 이르러 화조화에 있어서 몰골 담채법의 서희徐熙와 쌍구 농채법 황전黃筌에 의하여 성격이 확실해졌고, 송대宋代 산수화에 있어서 북송北宋의 동원董源, 거연巨然등을 중심으로 하는 이상적 남종화풍은 휘종 宗, 곽희郭熙등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사실주의의 원체파院體派 북화풍에 대항하여 나갔다. 남송南宋에 들어서서 원체풍의 산수화는 이당李唐, 마원馬遠, 하규夏珪 등의 거세고 대담한 필치의 '수묵 산수화풍'을 낳았고, 한편 남종화에 있어서 보다 거세고 힘찬 필치의 소유자 양해梁楷와 목계牧谿가 나와 독특한 남화풍을 발전시켰다. 이런 경향은 원말 사대가인 황공망, 오진, 예찬, 왕몽 등에 의하여 완전한 '남종문인화풍'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명조에 들어가 남화는 대가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 동기창董基昌등으로 인하여 중국 회화사상 귀족주의적 궁중예술을 누르고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위의 남북의 2대 화풍을 정리해보면 북화는 화북지방의 험악한 기후 풍토를 배경으로 원체파의 전문적 궁정 화가 중심의 아카데믹한 전통파 예술이다. 왕실, 귀족 중심의 화려한 성격으로 강한 필치와 농채, 수묵을 사용하여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한편 남화는 강남 지방의 온화하고 기름진 기후와 풍토를 배경으로 재야파의 비전문적 문인 중심의 이상적 성격의 예술이다. 문인들의 절개와 지조를 표현하여 부드러운 필치와 담채, 또는 수묵을 사용한 사의적寫意的 화풍이 특징으로 시문서화를 아우른 종합 예술이다.

한편, 명대는 도자 예술에 독창성을 보이고 있는데 명조 도자예술의 특징은 청화자기의 발달로 섬세한 문양과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다채자多彩瓷'는 원의 영향을 받아 복합적인 색으로 그 화려한 장식미는 명조의 사치스러운 귀족주의적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청색, 검푸른색, 자주색을 주된 색으로 한 삼채와 백자에 오색의 채색을 한 오채 기법의 도기들이 있다.



9)청靑

청은 만주족이 세운 정복왕조로서 명조를 멸하고 청제국을 세우니 이후 270년 동안 중국은 다시 이민족의 천하가 되었다. 이들은 정치·문화적으로 명조의 행정과 문화를 그대로 계승하여 시행하였다. 명조 말기부터 들어온 서양문물의 전래는 근대화의 결과를 낳기도 하였으나, 외국의 제국주의자들에게 침략의 기회를 만들어 20세기에 들어서 청국은 패망하게 된다. 청조 전반기인 강희康熙·옹정雍正·건륭乾隆시대는 청조의 문화·정치·경제의 절정기로서 학문과 예술을 애호하고 후원함으로서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 주위의 이웃나라인 미얀마, 타이, 베트남 및 조선 등의 각국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고 교류를 하여 청조의 문화는 이웃나라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봉건주의와 제국주의의 침략은 청조의 국세를 기울게 하여 결국 쇠망의 길로 이끌었다.

건축은 청 문화의 전성기인 강희康熙·옹정雍正·건륭乾隆 치세 아래 약 130여년간 대규모의 건축조영사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대의 양식을 모방하였을뿐, 새로운 예술적 발전은 보지 못하였다.

청대의 도자는 명대와는 달리 명대 도자가 자유로운 느낌을 주며 채색도 생기가 넘친다면 청대 도자는 신중하고 세밀한 필법으로 단정하고 예리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도 기술이 현저하게 향상되고 채유한 색깔의 수도 많아서 화려하다.

회화는 초기에서 중기까지는 융성하였으나, 후기 이후부터는 재야 작가들의 활동이 성하였고, 또 다양한 화파와 화풍이 나오게 된다.

명 말기 동기창董基昌의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으로 청조 초기는 남화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이에는 '사왕오운四王吳 '의 육대가를 중심으로 하는 묵수주의墨守主義화파들과, 명말의 유민인 석도石濤와 팔대산인八大山人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파들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사왕오운四王吳 이란 왕시민王時敏, 왕감王鑑, 왕희王 , 왕원기王原祁의 사왕四王씨와 오력吳歷, 운수평 壽平의 2인을 합한 6대가를 말하는데 이들은 남종산수화의 명인들이다. 이들은 주로 강남 지방을 중심으로 청조 산수화의 전통을 세웠다. 한편 독특하고 기이한 화풍으로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화가로는 석도石濤와 팔대산인八大山人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명이 망하자 초야에 묻혀 화조풍월花鳥風月을 벗삼아 살면서 그림을 통하여 이민족 통치의 시대상황에 반항 의식을 표현하였다. 이는 '원말4대가'들과 정신적인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은 '사왕오운'작가들이 남화풍의 전통을 계승한 아카데미즘에 대항하여, 같은 남화풍이지만 새로운 착상과 구도, 대담한 필치로서 자유롭게 표현하였다.

한편 양자강 하류 북방에 위치한 양주는 청대 학술·예술의 한 중심이 되었으며 옹정과 건륭기에는 이 지방에 양주팔괴라고 불리는 문인화가가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양주팔괴는 이선李鮮, 왕사신汪士愼, 김농金農, 황신黃愼, 고상高翔, 정섭鄭燮, 이방응李方膺, 나빙羅聘등의 여덟명을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개성을 중시하고 감흥의 솔직한 발현을 목표로 하여 기성의 형식이나 기교를 버리고 자유분방하게 붓을 휘둘렀다. 반전통적인 제작태도로 선적인 묘사보다 면적인 표현을 취했으며 고전적 절도를 무시하고 짙은 먹색과 화려한 색채, 강한 필세와 격한 붓처리를 하였다.

청조의 궁중 화원으로 서양화 기법을 전한 것은 이탈리아인 화가 낭세녕郎世寧, Josephus Castiglione 이다. 그는 강희제 시대 궁정 화가로 일하면서 주로 화조, 인물들을 음영법에 의하여 극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청조 말기에 이르러 나라 안팎으로 혼란하자 문인등의 예술가들은 경제 생활이 활발한 상해·북경 등의 대도시로 모여들었다. 대도시를 생활무대로 직업적으로 그림을 팔며 생활한 이들은 사의적 작품을 즐겨 그려 일반 대중의 기호에 맞는 그림을 제작하였다. 산수화보다는 묵색이 물씬 풍기고 필치가 통쾌한 화훼·절지의 신문인화 등이 많았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오창석吳昌碩을 들 수 있는데, 운치있는 고전의 석고 문체를 잘썼고, 웅건한 필치로 화훼를 잘 그려 새로운 문인화 예술을 이루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한국미술




1. 고대(古代)

1. 선사시대
우리 조상들은 대체로 요서, 만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에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우리 나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부터이며,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를 거치는 사이에 민족의 기틀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자연물에 영혼이 깃들여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 사상에서 자연숭배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정 동물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신앙을 바탕으로 예술 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특히 토기는 표면에 색채를 발라서 갈거나, 점·선·원과 같은 단순한 기하학적무늬를 압각(押刻)하였다. 기교적으로는 세련된 형태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2.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부터 농경생활이 시작되었다. 농경 도구나 토기의 제작이외에 원시적인 수공업 생산도 이루어졌다. 신석기 시대의 미술품으로는 우선 '빗살무늬토기'를 들
수 있다. 약간 배가 부른 V자 모양의 토기 표면에 평행으로 사선을 그어서 장식을 하였는데, 선의 방향을 줄에 따라서 엇갈리게 하기도 하였다. 가지런한 선은 서로 대칭을 이루고 통일된 조화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토기의 무늬는 단순히 미적인 것이 아니라 주술적 의미가 강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이 시대의 미술품은 주로 흙으로 빚어 구운 얼굴 모습이나동물의 모양을 새긴 조각품, 조개 껍데기 가면, 조가비로 만든치레걸이, 짐승의 뼈나 이빨로 만든 장신구 등이 있었다.

3. 철기 시대
청동기를 사용하고 농사가 발달하면서 평등했던 부족사회는 무너지고, 사유 재산이 축적되고 계급이 발생하면서 예술이 함께 발전하였다.
이 시기의 예술은 종교 및 정치적 요구와 밀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당시 제사장이나 군장들이 사용하였던 칼, 거울, 방패등의 청동제품이나 토제품, 바위 그림등에 반영되어 있다. 또 지배층의 무덤인 돌널무덤등에서 출토된 청동제 의기들은 말이나 호랑이, 사슴, 사람 손 모양등을 사실적으로 조각하거나 기하학 무늬를 정교하게 새겨 놓았다. 이들은 주술적 의미를 가진것으로, 어떤 의식을 행하는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흙으로 빚은 짐승이나 사람 모양의 토우(土偶) 역시 장식으로서의 용도 외에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위면을 쪼아새긴 바위 그림은 당시 사람들의 활기에 찬 생활상을 보여주고있다.
이 시대 미술품으로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은 암각화(岩刻畵)이다. 울산의 반구대 바위 그림에는 거북, 사슴,호랑이, 새 등의 동물과 작살이 꽂힌 고래, 그물에 걸린 동물, 우리안의 동물 등 여러 가지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사냥과 물고기잡이의 성공과 풍성한 수확을 비는 염원의 표현으로 보인다.




2. 삼국시대 (三國時代)

삼국시대에는 또한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가 전래되어 우리나라의 미술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특히 불교와 도교가 이 시대미술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불교의 발전과 함께 사상적 내용이 풍부해지고 기술이 고도화됨에 따라 높은 미의 감각을 엿볼 수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1. 고구려 시대
고구려는 19대 광개토대왕 시대에 만주 통구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였다. 광대한 지리적 풍토와 외세의 영향을 받아 길러진 늠름하고도 분방하며 용맹스러운 고구려인의 기상은 그대로 미술에 반영되어 어느 나라의 미술보다도 힘과 정열이 넘쳤다.
고구려의 고분에는 돌무지 무덤과 굴식 돌방 무덤이 있다. 초기에는 주로 돌무지 무덤이 만들어졌으나 점차 굴식 돌방 무덤이주류를 이루었다. 돌무지 무덤으로는 장군총이 유명한데, 계단식으로 화강암을7층으로 쌓아올렸다. 굴식 돌방 무덤 내부에는 벽화가 있기도 하여 당시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굴식 돌방 무덤은흙으로 덮은 봉토 내부에 굴식 돌방이 있는 것으로 쌍영총, 무용총,강서 고분등이 유명하다. 여기에는 풍속도, 수렵도, 무용도,사신도등이 그려져 있어 고구려인의 강건하고 남성적인 기질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무용총의 수렵도는 이러한 사실을 잘 입증해 준다.
그림의 주제는 주로 영생사상을 반영해 주는 죽은 사람의 생활기록이 가장 많다. 선이 굵고 강직하며 주제를 상징적이고 박력있게 다루어 대담하고 웅혼한 고구려인의 대륙적 기상을보여준다.
고구려 미술의 특색은 회화 못지않게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을 비롯하여 불상들의 나부끼는 옷자락이나 화염문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은 두꺼운 법의를 입어 몸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신비하면서도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다. 공예는 통구와 평양 지방에서 나온 기와와 벽돌에 새겨진 장식 무늬에서 힘찬 고구려인의 기상과 솜씨를 알 수 있다.

2. 백제 시대
백제는 부여족의 일파가 한반도의 서남부로 이동하여 옛 삼한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백제의 미술은 북방적인 성격을 가진 원래의 전통에 중국과의 해상교통이 발달되어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 높은 문화 수준을 유지하였다. 불교미술과 중국의 남조 문화를 흡수하여 온화하고 우아하며 향토적인 색채의 아름다운 미술을 발전시켰다. 백제의 미술은 매우 부드럽고 모나지 않으며 인간미가 넘치고 세련되었다. 이러한 특색은 5세기부터 7세기 중엽까지의 고분벽화,불상, 와당을 비롯한 공예품, 탑등의 미술 전반에 걸쳐 볼 수 있다.
백제의 회화는 능산리고분(陵山理古墳)의 비운문(飛雲文)과연화문(蓮華文)에서 볼 수 있듯이 부드럽고 완만한 움직임의느낌을 자아낸다. 백제의 회화는 6세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회화에 영향을미친다.
이렇게 부드럽고 인간미가 넘치는 백제 미술의 특징은 불상에서도 드러난다. 서산 마애삼존불은 양식적인 면에서 외래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들의 얼굴은 복스럽고 밝은 웃음으로 가득차 있어 '백제의 미소'라 불리운다.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과 말기의 대표작 금동관세음보살상(金銅觀世音菩薩像)은 그 기법이 고졸(古拙)하며 백제의 온화함에 중국 남북조의 영향이 가미되어 있다.
공주 송산리의 무령왕릉은 무령왕에 대한 기록인 지석과 함께 금제관식, 무기, 그릇, 구리 거울 등 많은 껴묻거리가 발견되어 당시의발전된 공예 미술을 보여준다. 최근에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 대향로도 도교와 불교의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 훌륭한 공예품이다.
건축에 있어서는 오늘날 전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백제의 공장들이 신라의 황룡사 9층탑과 일본의 법륭사, 사천왕사, 법륜사등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 건축에서 백제시대 절의 건축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석탑으로는 목조탑의 건축 양식을 모방한 초기 양식의 익산미륵사지 석탑과, 균형이 잡힌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고 있는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다. 미륵사지 탑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석탑으로서 9층이며, 우리나라 탑 건축의 원류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3. 신라 시대
한반도의 남동부를 차지한 신라는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된 지역적조건 밑에서 독자적인 미술문화를 이루었다. 신라의 미술은 조화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신라의 미술은 중국의 남조 문화와 고구려, 백제등과 접촉하면서 화려하고 다양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특히 5세기 후반에 전래된 불교의 영향으로 더욱 화려하고 독특한종교문화를 이룩하였으며 고분의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들에서 당시의 뛰어난 공예 예술을 엿볼 수 있다. 신라의 미술은 전체적으로 보면 이웃했던 고구려나 백제의 미술과는 달리 엄격하고 추상적이며 사변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신라의 회화는 경주의 천마총과 황남대총이 발굴되기까지는 거의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고분들에서 출토된 천마도(天馬圖),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 서조도(瑞鳥圖), 우마도(牛馬圖)등을통해서 우리는 신라 회화의 뛰어남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그림들은 모두 화원의 작품이기보다는 공장에 의한 공예화였다.
불교 미술은 삼국 중에서 신라가 가장 늦게 시작하였으나, 이미6세기 후반에는 특유의 전통을 확립하였다. 7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라의 불상은 삼화령미륵삼존석불(三化嶺彌勒三尊石佛)이나 황룡사지 출토의금동보살두(金銅菩薩頭)에서 처럼 밝은 표정을 보이지만 몸의비례나 옷의 처리등에는 여전히 추상성이 감돌고 있다.
신라 미술의 일반적인 경향은 대개가 매우 정교하고 호화로우며 또 간혹 현대적인 감각을 풍겨주기도 한다. 금속 공예나 유리 공예와는 대조적으로 토기는 다소 조방하고 거칠며 문양은 기하학적이거나 추상적이다. 그러나 기마 인물형 토기에서 볼 수 있듯이 조형성이 뛰어난 특성도 보여준다. 이 밖에도 삼국시대에는 가야도 높은 수준의 미술을 발전시켰음이 금속공예나 이형토기(異形土器)등을 통해 확인된다. 고령지산동에서 출토된 금관이나 기마인물형토기 등을 예로 봐도 이를확인할 수 있다.




4. 통일신라시대의 미술

(1)통일신라
①고유의 전통 문화에 당나라의 문화를 흡수, 소화하여 우리 나라 미술사상 황금기를 이룩하였다.
②불교는 신라의 호국 사상과 일치되어, 불교 중심의 미술이 발달하였다.
③섬세하고 화려하며, 독자적인 정교한 양식을 확립했다.
④사찰과 석탑 등 불교와 관련된 조형품이 많이 제작되었으며, 특히 불국사와 석굴암은 조형상의 구성미가 뛰어난 걸작이다.
⑤금관이나 장신구 등의 정교한 금속 공예와 함께, 상원사와 봉덕사의 범종들은 조형미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2)조각
①석굴암 본존상: 석굴암 중앙에 안치되어 있는 본존상은 높이가 3m이고, 우리 나라 석조 불상 중 으뜸가는 것으로 세계의 자랑거리이다. 이 본존상을 중심으로 주위의 돌 벽에는 석가모니의 10대 제자와 보살, 11관음 등을 부조로 조각하여 배열하였다. 전실(前室)에는 금강역사상과 천왕(天王)이 역시 부조로 힘차게 표현되어 있다. 그 솜씨는 극히 우아하고 날카로우며, 알맞은 양감과 부드러운 질감이 조화된 신라 문화의 대표적인 미술품이다. 석굴암은 중국의 윈강 석굴의 영향을 받아서 화강암으로 축조되었다.
②금동 약사여래 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 성덕왕 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순금 여래 좌상과 더불어 금속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
③아미타 여래 입상: 경주 갑산사에 있으며, 높이는 1.8m이다.

(3)건축
①불국사: 경덕왕 10년에 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목조 건물은 임진왜란 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와 함께 돌로 만든 것만 볼 수 있어 옛 모습을 찾을 수는 없으나, 다보탑과 석가탑, 여러 가람들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안정되고 세련된 통일 신라의 미술 역량을 잘 나타내고 있다.
②석굴암: 불국사와 함께 건립된 인공 석굴로, 석가여래좌상, 관음보살상, 나한상, 인왕상 등이 있다.
③다보탑: 곡선과 직선을 잘 조화시켜 구성했으며, 화려한 변화와 안정성이 있는, 통일 신라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④석가탑: 다보탑의 부드러운 곡선미에 대조를 이룬 직선적인 탑으로, 단순하고 힘차며 안정성이 있는, 통일 신라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인데, 사리탑으로 일명 "무영탑"이라고도 한다.
⑤그밖에 화엄사 사리탑, 감은사 3층 석탑 등이 있다.



3. 발해시대 (渤海時代)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으로 이루어졌던 발해에서도 회화, 조각,공예, 건축등 다방면의 미술이 발전했다. 발해 시대의 지상 건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유적의 발굴로 그웅장함이 확인된다.
발해의 자기는 대체로 무게가 가볍고 광택이 있는데, 그 종류나크기, 형태, 색깔등이 매우 다양하다. 특히 발해의 자기는 같은 시대 여러 나라의 도자기 공예보다 독특하게 발전되었으며, 당에 수출하기도 했다. 발해의 미술은 대체로 고구려 미술의 전통을 계승하고 당나라문화의 영향을 수용하여 그 나름의 미술을 발전시켰다고 볼 수있으나, 그에 대한 구체적인 규명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



4. 고려시대 (渤海時代)

신라의 미술을 계승한 고려의 미술은 불교미술의 발달과 송나라미술의 영향으로 섬세하고 정교한 귀족적인 미술문화를 남겼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불교가 융성하였고 이에 따라 각 방면의 불교미술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거란·여진·몽고등 북방 민족들의 잇단 침략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문화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고려가 북송(北宋), 남송(南宋), 원(元), 명(明)등 중국의왕조들과 문화적 교류를 빈번히 하면서 미술 양식을 수용하여 자체의 미술을 발전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시대의 모든 미술이 시종 완벽을 지향했던 것으로 단언하기는 어려울 지 모르나 이 시대 미술의 주된 경향은 역시 귀족적 문화를구현하는데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 시대에는 도자기, 칠기, 금속등의 공예가 발달하였고, 특히 상감청자의 독특한 기법은 세계적인 가치를 지니며, 회화 역시 다양한 기법과 양식의 불화가 제작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삼국시대, 통일신라 시대와 비교하여 같은 미술계통에서도 분야에 따라 두드러진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불교 미술에서도 불교 회화와 공예는 호화롭고 정교하여 아취가 넘치는 경향으로 발전되었지만, 불상이나 불탑은 소수의예를 제외하면 다소 균형이 깨지고 경직된 경향을 띠게 되었다.
포괄적으로 말해서 고려시대의 불상이나 불탑등은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 비해 수준이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또한 중앙과 지방과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회화
회화는 공민왕 무덤의 벽화와 수락암동 옛 무덤의 사신도, 부석사조사당의 천왕상과 보살, 수덕사 벽화등이 전해진다. 그 밖에 공민왕이 그린것으로 전해지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가 있는데, 말을 탄 인물과 마른 나무, 풀 등 극도의 사실적인 필치는 웅대하고 품위있는 현세감을 느끼게 한다.
고려시대의 미술 중에서도 회화의 경우에는 인물과 산수는 물론묵죽을 비롯한 문인화 계통의 그림등이 귀족, 화원(畵圓),선승(禪僧)등에 의해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송나라 휘종의 찬사를 받았던 이령(李寧)의 「예성강도」와「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를 위시하여 이제현의 「기마강상도」, 필자 미상의「금강산도」 「진양산수도」「송도팔경도」등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이미 고려 전기에 한국적인 실경산수화가 발전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현재 이 시대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우수한 일반회화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지금 전해지는 작품으로서 고려시대 회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것은 불교 회화이다. 이 작품들 중에서도 1286년 제작된 「아미타여래입상」, 동경 천초사 소장의 「양류관음상」, 서구방이 1323년에 그린 「수월관음보살도」등은 고려시대 불교회화의 높은 수준과 독특한 성격을 특히 잘 보여준다. 이러한 그림들은 한결같이 금빛과 채색이 찬란하고 의습과 문양이 정교하며 자태가 단아하여 고려적인 특색을 짙게 풍긴다. 고려시대의 전기에는 호국불교가 성행했던 데에 반하여 후기에는 내세의 구원과 행복을 비는 구복신앙과 관련이 깊은 아미타여래, 관세음보살,지장보살등이 널리 신봉되고 또 자주 그려지곤 했다.

도기와 공예
중국에서도 높이 평가되어 그곳에 다량으로 전해지기까지 했던 고려의 불교회화와 함께 이 시대 미술의 경향과 특색을 직접적이고도 강렬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은 역시 순청자(巡靑磁),상감청자(象嵌靑磁), 회청자(繪靑磁)등의 자기이다.
대체로 고려 초기에는 비색이 가장 아름답고 조형감각이 특히 뛰어난 이른바 순청자(純靑磁)가, 중기에는 세계 초유의 상감청자(象嵌靑磁)가, 그리고 후기에는 이밖에 철사(鐵砂) 등으로 그림을 그려 장식하는 회청자(繪靑磁)가 초·중기에 이어 더욱 유행하였다.

건축과 조각
조소는 불교 조각으로 대표되지만 이미 조형의 이상미는 사라졌다.
선종불교에 의한 부처 모시기의 경시, 불상 수요의 감소가 그원인이 되어 이 시대에 와서 불상 조각은 퇴조하였다. 관촉사 미륵불(일명, 은진미륵)과 우리 나라 유일한 소조 작품인부석사의 아미타여래좌상 등이 있다.
건축은 사원을 중심으로 한 불교 건축이 신라시대의 질서정연한비례 감각을 잃고, 잡다하고 뒤섞인 집과 궁전 건립으로 기법이나 외관이 치졸해진다.
대표적인 목조 건물은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조사당, 수덕사의 대웅전, 성불사의 극락전등이 있다. 그 중 부석사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5. 조선시대 (朝鮮時代)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불교를 삼았던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와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여 그 전까지의 문화와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냈다. 즉, 이 시대를 시종일관 지배했던 억불숭유정책은 당시의 문화를 검소하고 실용적이며 소박한 성격의 것으로 발전하게 했다.
이 점은 미술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교를 숭상한 조선은 불교적이고 귀족적인 성격을 탈피하였다. 사찰 중심의 건축 미술은 궁궐 중심으로, 불교 중심의 회화는 남종화풍의 담담한 화풍으로 변모되었다. 초기에는 안견, 강희안, 이상좌등이, 후기에는 정선, 심사정등의 화가가 전통 회화의 발전에 기여했다. 18세기 이후에는 서민생활을 다룬 풍속화와 민화가 많이 그려졌다.
서민적이고 순박한 조선 미술의 특징은 도자공예, 목죽공예,칠기공예등의 생활용품의 발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 시대의 미술은 대체로 고려시대의 귀족적인 정서와는 달리 민족적인 정취를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조선시대의 미술 중에서도 특히 발달했던 것은 회화와 도자 공예및 목칠 공예, 그리고 목조 건축 등이다.

조선시대 회화
이 시대의 미술 중에서도 회화는 우리 나라 미술사상 가장 크게 발전하였다.
건국 초부터 도화원(圖畵圓)이 설치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회화 미술이 꽃피게 되었다. 사대부와 화원들이 이 시대 회화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하였다. 또한 대나무, 산수, 인물, 화초 등 다양한 소재들이 다루어졌으나감상을 위한 산수가 대종을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초상화는 동양의 삼국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다.
인물의 정확한 묘사와 미묘한 정신 세계의 표출은 괄목할 만하다.
조선 시대의 회화는 화풍의 변천에 따라 초기(1392∼약 1550), 중기(약1550∼약 1700), 후기(약 1700∼약 1850), 말기(약 1850∼1910)로나누어지는데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초기에는 고려시대 회화 및 그 시대에 전래되어 축적되었던 중국 역대의 화풍과 새로이 명으로부터 수용한 화풍등을 토대로, 중국이나 일본의 회화와는 다른 양식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화풍상의 특징은 이 시대작품들의 구도, 공간 개념, 필묵법, 준법등에서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세종조의 안견(安堅), 사대부화가 강희안(姜希顔), 그리고 세종대왕의 아들로 당대 최고의 서예가이며 최대의 중국화 소장자이자 안견의 후원자였던 안평대군등이 활동하며 서화의 발전에 크게기여하였다. 이 시기의 그림 중에서도 특히 안견과 그의 추종자들의 작품들에 한국적인특색이 진하게 배여 있다.
안평대군이 꿈속에 도원을 여행하고 꿈에 본 바를 안견에 명하여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1447년 4월에 제작한 것으로 조선시대 최대의 걸작이다.

조선 초기에는 안견뿐만 아니라 사대부 화가로서 명대 절파화풍을 수용하여 대성한 강희안, 인물화의 최대 거장이었던 최경,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타고난 그림 재주 때문에 화원이 되었던 이상좌, 여성으로서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여성적인 「초충도(草蟲圖)」를 비롯하여 다방면의 그림을 그렸던 신사임당, 왕손으로서 천진난만한 강아지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렸던 이암,「달마도(達磨圖)」를 그린 김명국 등이 관심을 끈다.

조선 중기의 회화 역시 임진왜란, 병자호란등의 대란과 격렬한 당쟁이 계속되던 정치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화풍을 이룩하였다. 한편으로는 안견파 화풍, 절파화풍등 조선 초기 이래의 전통을 나름대로 계승, 발전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모나 화조화(花鳥畵), 묵죽(墨竹), 묵매(墨梅),묵포도(墨葡萄)등에서 종래에 보기 드물었던 새로운 한국적 특징을발전시켰다.
김제의「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김명국의「설중귀로도(雪中歸路圖)」,이 정의 「묵죽도(墨竹圖)」등은 이 시대 회화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적 화풍이 더욱 뚜렷한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은 조선 후기이다.
영조와 정조의 재위 연간을 전후하여 꽃피웠던 조선 후기의 회화는 정선에 의해 발전된 진경산수(眞景山水), 김홍도와 신윤복을 중심으로 유행된 풍속화에서 특히 한국적인 특색을 농도 짙게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이시기에는 남종 문인 화풍이 크게 유행하였고 또 청나라를 통해 서양화법이전래되는 등 전과는 다른 경향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밖에 이 시대에는서민들 사이에서 민화가 크게 풍미하였다.
정선의 진경산수는 「금강전도」나「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등에서 보듯이 실제로 우리나라에 있는 산천을 새로운 화풍으로 구사하여 그린 것으로 후대의 화원과 민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정선의 제자였던 심사정은 대담한 필선과 고아한 담채를 혼합한 우수한 기법의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이러한 정선파의 산수화들은 종전의 산수화와는 현저하게 다르며 또한 우리의 국토에 실재하는 산천을 묘사한 것이기에 특히 우리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서민들의 생활의 전경을 주로 해학적으로 묘사한 김홍도와 김득신의 풍속화, 또 이와는 대조적으로 주로 한량과 기녀등 남녀간의 로맨스를 예리하게 파헤친 신윤복은 「미인도」등으로 풍속화에 더욱 한국적인 멋과 특색이 넘쳐 흐른다.
이처럼 한국적인 화풍이 크게 발달하였던 조선 후기를 거쳐 말기에 이르면, 추사 김정희와 그를 추종하던 화가들에 의해 남종문인화가 확고히 뿌리를 내리게 되고후기의 토속적인 진경산수나 풍속화는 급격히 쇠퇴하게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김정희의 제자로서 호남화단의 기초를다진 소치 허련과 함께 오원 장승업이 배출되어 개성이 강한 화풍을 형성하고 제자들인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 등을 통해 현대 화단으로까지 그 전통을 계승하게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화풍이 중국적 성향을 강하게 띤 점은 아쉽게 생각된다.

조선시대 도기와 공예
조선 시대의 미술에서 회화와 더불어 한국적인 특색을 두드러지게보여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도자기이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시대의 청자에서 변천된 분청사기와 희고 고운백자가 크게 발전하였다. 이들 분청 사기는 고려시대의 청자와는 달리 서민적이고 즉흥적이며 소박한 특징을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조선왕조적인 특성이 담뿍 함축되어 있다고하겠다. 이러한 분청사기는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자취를 감추게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종조를 전후한 초기의 백자는 한결같이 균형이 잡히고 때깔이 곱고 단아하며 초기에는 어기로만사용되었으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차차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 미술의 특색은 이 밖에도 목리(木理)를 최대한 살리고 장식을 가능한 한 피하며 뛰어난 비례미를 보이는 목조가구나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 건축 및 자연경관을 돋보이게 하고 인위적인 요소를 최소한으로 제한한 정원등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목죽 공예는 서민생활에 스며든 여러 가지 단순하고 소박한 가구들에서 그 독특한 양식을 자아내고 있다. 이들 목공예품에는 장롱·궤·경대·소반·문갑·탁자·등에 십장생도(十長生圖)나 박쥐무늬, 수복(壽福) 무늬등을 넣었다. 아름다운 목리를 교묘히 이용하여 순박한 의장과 건실한 구조로서구수하고 진실함이 잘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 건축
건축으로는 궁정 건축을 비롯한 성곽·문묘·서원·사원·객사등등 많은 건물이 세워졌다. 그러나 대부분이 임진, 병자의 양란 때 타서 없어지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대개 조선 후기의 건물이다. 조선 시대 건축은 고려시대 건축에 비하여 대개 장식이 번잡해지고 구조가 육중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지붕선의 아름다움, 창살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디자인의 발전은 조선시대 건축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초기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남대문과 개성의 동대문이 있고, 후기를대표하는 것으로는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비원의 연경당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