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미술




중국은 아시아 대륙의 동반부에 위치한 광대한 지역으로, 북은 시베리아의 한대에, 남은 동남 아시아의 열대에 접경하여 남북으로 한서의 차이가 심한 기후에다 고산, 황량한 고원과 초원·사막, 비옥한 평야 등 다양한 기후·풍토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이와 같이 중국 대륙은 기후 풍토에 의한 자연환경의 차이가 심하여 화북華北, 화남華南의 남북 지방에 거주하는 주민의 민족성과 사용하는 언어가 현저히 달라 문화·예술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다. 문화 교류는 주로 서역 지방을 통하여 서방 세계와 이루어졌고, 동방으로는 서방에서 받아들인 불교문화를 중국화하여 변화 발전시켰다.

중국은 서역西域을 통하여 전래된 인도의 불교 예술을 중국화하여 이것을 다시 서역·서방 세계에 전파하고, 한편으로 동방의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하였다. 당대唐代에는 비단·도자기·회화 예술을 서역지방을 통해 서방의 인도·이란 및 서부 아시아 지역에 보내 중국문화의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중국의 일반 미술이 한문화권 안의 한국과 일본에 들어가 자체적인 고유의 민족예술로 발전하였다.



1)고대왕조의 미술

은殷 왕조는 하남성 안양의 은허 유적의 발굴로 인해 우수한 문화를 가진 왕국이었음이 증명되었다. 고도의 물질문명을 가졌으며 농업국가였던 이 나라는 당시 2,000자의 한자와 우수한 동기銅器를 사용한 봉건 전제국가였다. 이들은 조상신을 숭배하였고, 신전·사당·궁전등을 세웠으며, 임금은 백성을 대표하여 여러 신과 선조에게 제사드리는 의식을 집행하였다.

은허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명한 것은 '갑골문자'로서 당시의 점복에 관한 설명과 제사·종교에 관한 설명 등 당시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상형문자이다. 은殷 왕조는 제사의식을 중요시하여 '청동기'를 비롯한 각종 동기류 등의 제사용 기물이 발달하였다. 당대의 청동 기물은 중국 최초의 우수한 조형 예술품인데 그 정교한 표현기법과 독특한 도안은 다른 시대와 다른 고유한 것이다. 이들 청동 기물에는 구름·비·번개·별·물결 등의 풍년을 상징하는 문양과 다산을 비는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있다.

주周왕조는 황제가 천자로 받들어 하늘을 대신하여 종교와 정치의 권력을 가지고 지배하였다. 당시 귀족계급들은 모든 생활의 의식 곧 예禮·악樂·산算·서書등에 관한 높은 교양을 쌓았다. 뿐만 아니라 당시는 철학·문학 등 학문의 발달로 역易·서書·시경詩經등 최초의 고전 문헌이 풍부하였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전국시대를 맞게된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는 노예시대의 마지막에서 봉건 시대로 들어서는 초기로서 한 분기점에 해당된다. 또한 이 시기에 공자, 노자, 묵자, 관자 등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백가쟁명'의 시대라고 말한다. 이 시대는 철학과 사상의 발전뿐만 아니라, 예술측면에서도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춘추시대에는 최초로 수도를 장안에 정하고 농경의 수공업 생산을 국민의 주업으로 하여, 전대의 동기 사용에서 철기 사용으로 바뀌어 일용가구를 비롯한 각종 공예품이 발달하였다. 또한 혼란한 시국으로, 귀족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궁술, 검술 등 전사로서의 훈련을 받아야 했고, 각종 무기·전차 등의 생산이 활발하여 수공업의 공방이 발달하였다.


2)진秦·한漢

어지러웠던 전국시대는 진의 시황제의 출현으로 끝나고 국토는 통일되었다. 시황제는 봉건주의의 고전을 불사르는 '분서갱유'를 감행하여 학문과 문화를 탄압하였다. 또한 불로장생을 기원하고 부귀영화를 영원히 누리려 하였으나 그의 치세는 이대二代로 끝나고 말았다.

진시황은 짧은 치세기간 중에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여 '아방궁'을 비롯한 장대한 규모의 궁전과 누각을 세우고, 북방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위한 장성을 대규모로 확장하는 사업을 벌여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성축물인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또한 1974년 3월 섬서성에서 발견된 진시황의 지하군단인 병마용은 진시황릉을 지키는 병사들로 진시황 시대 연간 70여만명이 동원된 실로 장대한 규모이다.. 군사들의 머리형태나 옷차림으로 당시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병마용은 고도의 사실적인 묘사로 생명력 넘치는 위엄을 지니고 있다.

한漢 나라는 한족이 세운 대륙 최초의 중앙 집권국가로서 그 국세는 동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은 중앙 아시아에까지 미쳤다. 한나라는 정치·군사·종교·문화·예술의 대발전을 보여 이시기 중국은 문명국으로서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능묘조각에는 공자의 교훈에 의한 역사적·도덕적 설화, 도교 사상에 의한 종교적·환상적 장면, 죽은 자의 생에서 얻은 속세의 장면 등이 주요 주제로 다루어 졌으며, 사실적인 표현에 상징성을 더하였다.

서법 예술의 역사가 실질적으로 출발한 것은 이 시기로 진의 문자 통일의 뒤를 이은 한 대는 각종 서체가 발달하여 전문적인 서가가 나오게 되었다. 회화는 주로 도자기와 능묘 안의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도자기의 그림에는 도가의 전설적 신령·악귀·동물 등이 있으며, 고분 안의 벽면에는 가무장면이나 동물들이 장식적인 필선으로 그려져있다.



3)위魏·진晋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인 한漢제국이 망하고 중국 대륙은 분열과 무질서의 혼란한 시대가 되었다. 삼국 위魏·촉蜀·오吳시대가 지난 뒤 진무제晉武帝의 통일로 잠시 안정되었으나, 북방외족의 침입으로 진晉왕조가 서북에서 강남으로 이동 남하하니, 위魏가 천하를 통일하고 뒤이어 진晋도 나라를 세우기까지의 어지러운 370여년간의 시대에도 한족의 문화와 예술은 주도적 역할을 하여,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문화·예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위·진시대는 불안과 동요의 난세에서 문화·예술도 도피와 안일의 성격을 갖게되어 '죽림칠현竹林七賢'사상 같은 것이 유행하였다. '죽림칠현'사상은 한족의 문인 묵객들이 산 깊고 물 맑은 조용한 대자연 속에 도피하여 허무주의적 청담 談사상에 의한 풍류를 즐긴 것에서 나온 말이다.

이 시대에는 전대의 한문화를 계승하는 한편 고승의 인도여행으로 인도·서역의 문화·예술이 많이 들어왔다. 서역에서 들어온 석굴 건축과 불상 조각 중 최고의 석굴예술은 '돈황석굴'로서 세계적인 중국의 석굴 예술을 대표하고 있다.

서법예술은 서성書聖이라 일컬어지는 왕희지王羲之와 왕헌지王獻之가 행서와 초서를 완성하였다. 회화는 동진의 명화가 고개지顧愷之가 그린 「여사잠도」가 유명한데, 이는 궁중 부녀자들의 윤리 도덕을 교훈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자연을 벗하며 도교적 선인仙人같은 풍류생활을 주제로 한 그림도 제작되었다.



4)남북조南北朝

동진이 망하자 강남에서는 그 자리에 송宋·제濟·양梁·진陳의 네 왕조가 이어서 바뀌었고, 화북에서는 만족의 오호십육국 시대를 지나 북위가 통일되었다. 북위는 다시 동·서위로 분열되었고 북제·북주의 왕조가 교체해서 섰다가 589년 수隨에 의해 천하가 통일되니 이동안의 170여년간을 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남북조는 민족은 달랐으나 결국 문화는 한족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북조의 문화는 유목민인 북위의 선비족이 정치의 권력을 잡고 한족을 시켜 외래의 서역문화와 한족 문화를 종합하여 봉건문화를 이루었다. 한편 강남으로 내려간 한족의 남조는 기후와 풍토가 온화하고 기름진 땅에서 화려한 귀족적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여 육조六朝 문화시대를 펼쳐나갔다. 이들은 재래의 전통적 예교주의와 도교적 청담 사상과 불교사상을 두루 아울러 다양한 예술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는데 문인사대부의 시문 서화와 산수풍월을 즐기는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남조 문화는 우리나라 삼국 시대 백제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북조의 그림으로는 돈황 석굴의 벽화가 유명하다. 돈황 석굴의 벽화는 필치가 대담하고

굳세며, 색채가 정열적인 서역풍에서, 후기에는 부드러운 필치에 고상한 착색을 한 깊이있는

중국풍이 그 주류를 이룬다.

이 시대의 평론가 사혁謝赫은 그의 저서 《고화품록古畵品錄》에서 '화론육법'의 여섯가지 화법을 말하였다. '화론육법'은 기운생동氣運生動, 골법용필骨法用筆, 응물상형應物象形, 수류부채隨類賦彩, 경영위치經營位置, 전이모사傳移模寫 등이며 이 중에서 기운생동을 으뜸으로 말하여, 동양 전통회화의 중요한 창작사상이자, 품평과 감상의 요소로 여겼다.



5)당唐 시대

외족의 침입으로 남북으로 분열되었던 중국대륙은 470년만에 수隨의 통일로 한漢족의 나라가 되었다. 수 왕조는 반세기의 짧은 시대였지만 불교를 크게 장려하고 재건 사업에 힘썼다. 이러한 수 왕조의 재건사업을 그대로 이어받은 당唐 시대는 한나라 이래 최대의 제국으로서 광대한 국토를 건설하였고, 문화 예술에 있어 동양의 르네상스를 이루었다. 당은 서역문화와 한민족 고유의 전통성을 아울러, 동서 문화를 종합하였다. 한대부터 성향한 명기明器 곧 토우의 제작은 장례풍습으로 더욱 유행하였는데, 귀족들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명기에는 '당삼채'가 유명한데 이는 백색 바탕에 녹색·황색·적색을 중심으로 하고 그 외에 남색·갈색 등이 가미된 도자기의 토우, 도용등을 말하는 것이다. 동물상의 말, 낙타등은, 당제국의 번영한 국세로 동서의 교통이 발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관능미가 풍부한 부녀상·문관상·무관상·소년상 및 기타 호복의 호인상 등이 있다. '당삼채'는 장안·낙양 등의 고도를 비롯하여 함양·돈황·안양의 은허등지에서 출토되었다. 서법에서 구양순은 뼈대있는 필법과 짜임새가 정확한 해서를 잘 썼고, 4대가의 한 사람인 안진경顔眞卿은 무겁고도 정중한 필법으로 명작을 많이 남겼다.

회화에서는 처음에 수묵화풍이 발생하여 당 시대의 시문학 발달에 의한 문학과 회화를 연결 종합한 '남종 문인화풍'의 예술이 역사적 출발을 이루었고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王維는 남화의 창시자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한편으로 극사실풍의 채색화 양식은 이사훈李思訓에 의하여 발전하여 북화의 창시자가 되었다. 동양 회화사의 이대二大 화풍의 조류를 이룬 남북화의 시작이 이 시기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6)송宋

당조 말기에 화북 지방에 오왕조가 서고 화남지방에 여러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를 "오대五代" 라고 이른다. 또한 요동 지방에서 거란이 요遼를 세웠으나 다시 여진족의 금金에게 멸하게 된다. 거란을 정복한 금은 한족을 압박하게 되고 무력에 의해 화남 지방으로 쫒겨내려가 나라를 세우니, 그 이전을 북송, 그 이후를 남송이라 부른다. 거란과 여진의 두 종족은 높은 문화를 가진 한민족을 무력으로 정복하였지만 문화·예술면으로는 동화되었다. 송이 혼란스러운 오대를 거쳐 중원 천하를 통일하자, 다시 평화가 돌아와 사회가 안정되니 문화 또한 융성하여 당시대 이후 다시금 중국 문화예술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당시대의 문화가 국제성을 띤 융합문화임에 반하여, 송의 문화는 보수주의와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송대 건축은 수많은 누각식 다층탑 양식의 불탑이 특징이다. 이러한 높은 불탑들은 우리나라의 고려시대 불탑에도 영향을 주었으니「경천사지 석탑」이 그 예이다. 또한 수도 변경 같은 큰 도회의 거리를 번화하게 장식하여 근세적인 거리 모양을 그린 유명한 「청명상하도」가 있다. 이는 그 당시의 가두풍경을 짐작케 한다.

공예에서는 일명 비색秕色이라고 일컬어지는 청자가 당 시대 이후로 가장 많이 산출되었다. 당시 이 청자는 궁중에서만 비밀리에 사용하는 색기色器라고 하여 비색秕色이란 이름이 나온 것이다. 또한 순백색의 백자는 송대 지식인의 지적인 정신 생활을 시각화한 것이다.

송 왕조의 역대 황제는 예술을 사랑하고 서화를 장려하며 서화가를 애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황제 자신이 서화에 뛰어나 휘종徽宗, 고종高宗 같은 임금이 나와 각종 서화집을 발간하는 등 번성하였다. 또한 당 시대의 시문학 발달에 의한 '시서화 삼절' 사상, 문인 서화 예술의 풍조가 유행하여 소동파蘇東波·미불米  등의 예술인이 나왔고 행서, 초서체가 발달하였다.

송대 회화는 전통적 사실주의와 신흥 이상주의의 2대 화풍의 양식이 아울러 성행하였다. 사실주의는 육조·당조의 정통성을 지키면서 만물을 객관적 입장에서 세밀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주로 궁정화원의 전문적 화가들에 의해 '원체화院體畵풍'의 화조화와 북송화풍의 산수화를 연결시켰다.

이상주의는 형식에 구애받지않고 이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으로 주로 문인, 학자, 사대부 등의 비전문적 화가들에 의하여 '남종 문인화풍'의 산수화를 성립시켰다. 산수화는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작품을 많이 하였고, 대표적인 화가로는 곽희郭熙가 있다. 그는 저서《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중국 산수화의 기본 조건이 되는 '삼원법三遠法'을 주장하였다. 고원법高遠法은 산을 바라보는 데서 생기는 공간의 높이, 심원법深遠法은 산의 속을 들여다 보는 데서 생기는 공간의 깊이, 평원법平遠法은 산을 멀리서 바라보는 데서 생기는 공간의 넓이를 말하는 것으로, 산의 모양세에 대한 작가의 위치와 거리, 계절의 변화에서 생기는 중국화의 독특한 원근법이다. 이러한 이론은 동양 회화 표현에서 무한한 공간을 화면에 담아내는 여백을 가장 중요시하는 동양철학적 결과를 낳았다. 북송 산수화의 대표적인 화가는 이성李成으로 그는 화북 지방의 산수풍경화를 잘 그렸다. 중국 산수화에 있어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는 유명한 화제인데 '소상팔경'이란 강남 호남성 동정호 부근의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이루어지는 8경을 평원법으로 그린 것이다.

남방 화단은 북방식의 거칠고 메마른 화풍과는 달리 부드럽고 물기 있는 필법으로 나타내어 남종 산수화의 특성을 이루었다. 재야파의 대표적인 작가인 미불米 과 그의 아들 미우인米友仁은 수묵농담과 점묘법에 의한 미점식 산수화를 창안하여 이후 동양 남종 산수화의 새로운 화풍을 이루었다.



7)원元 시대

송나라를 강남으로 쫓아낸 금나라는 나라를 세운지 120년만에 유목 민족 몽고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한족의 남송마저 무너지고 마니, 중국 대륙은 약 100여년동안 몽고족의 치하에 놓이게 된다. 몽고족의 나라인 원은 무력으로 한민족을 정복하였으나, 예술적인 독창력은 없었으므로 송의 예술을 그대로 계승하여 다음 대인 명明에 전수하였다. 그러나 라마교 성격이 가미된 조상彫像은 명조와 청조까지 이어졌다.

원나라는 회화예술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원체화풍의 예술을 쇠퇴의 길로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원대 문인화의 부흥을 주도했던 화가로 고극공高克恭, 조맹부趙孟賦등에 의한 복고 운동으로 주로 북송 산수화가의 양식과 묘법이 연구되기도 하였다. 조맹부는 왕족 출신이란 신분과 임금의 사위라는 지위, 품격 있는 서화예술가로서 당시 예술계에 큰 영향을 주어 고고한 문인 사대부의 기풍을 나타내는 남종문인화의 발전을 가져와, 원 말기에 이르러서는 유명한 원말 사대가와 그 예술을 탄생시켰다. 원말 4대가 (황공망黃公望, 예찬倪瓚, 오진吳鎭, 왕몽王蒙)를 중심으로 한 남종 문인화 예술은 사군자四君子·세한삼우歲寒三友같은 이상향을 주제로 하여 사실화풍에서 벗어나 사의寫意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엄동설한에도 본래의 절개를 지키는 산수는 이민족 치하 예술인들이 처해있는 시대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8)명明 시대

명조는 4세기 이상에 걸친 북방민족으로부터 해방되어 민족의 시대가 부활된 시기이다.

명조의 한인들은 다시 정치적으로 위력을 되찾고 문화적으로도 전통을 세우게 된다. 오랫동안의 이민족의 지배하에 눌려있던 중국은 국수주의적 복고주의 경향을 띠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지나친 전통문화의 답습은 문화적 침체기를 불러와 한편에서는 자유주의 사상이 태동하게 되었다. 또한 서양인의 동방 세계로 향하는 항로가 개척되고 기독교 선교사들의 전도로 인하여 서양의 과학적 지식이 밀물과 같이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이는 중국 문화의 근대화로의 출발점으로 청조의 문화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명조는 한족의 정치적 위력과 문화의 영광을 다시 자랑한 시대이다. 명 왕조는 물질적 영화와 영광을 누려, 사치스러운 생활로 당조의 재현을 이루었다. 오늘날 북방의 '만리장성'과 초기의 수도였던 남경, 그리고 북경의 웅장하고 장엄한 궁궐과 사원 건물들이 이 시대 건축물들이다. 명·청의 수도 북경은 세계의 여러 수도 중에서 가장 웅대한 규모와 제도를 가진 동양의 대표적인 대도大都이다. 웅장하고 화려한 성벽, 궁궐, 불사, 전묘, 누각 등의 다양한 건물들은 동양문화의 정서와 풍취가 가득하여, 유구한 중국의 역사와 역대왕조의 권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회화는 두개의 화풍이 전·후기로 나뉘어 성행하였다. 남송의 원체화나 수묵화의 흐름을 받아들인 궁정 직업화가의 화풍과, 문인들인 원말 4대가를 따른 화픙이다.

대진戴進, 오위吳偉, 장로張路등 절파浙派의 직업화가들은 직선적이고 호방한 필선을 사용하여 감각적인 효과를 중심으로 강한 시각성을 추구하였다.

'남종문인화풍'은 북송의 동원童源·거연巨然의 화풍을 그 모범으로 삼아 심주沈周·당인唐寅·동기창董基昌등 이른바 '오파吳派'작가들에 의하여 이어졌다. 심주沈周는 시문서화의 명문출신으로, 북송의 동원, 거연과 원 말기의 황공망, 오진의 화풍을 연구하여 웅건한 필선과 패기에 찬 필치로 개성적이고 독특한 남종화풍을 이루었다. 명조의 화단과 화풍은 중기 후반부터 남종 문인화 계통이 우세하여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직 남화 일색의 시대라 할 수 있을 정도인데, 이는 제왕들이 화원 육성에 힘을 쓰지않고 명문 출신의 사대부들이 화단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간데 있다.

동기창董基昌은 시문서화를 잘하고 화론畵論에 조예가 깊어, 북화보다 남화가 우위에 있다는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을 주장하였다. '남북화론'은 당의 왕유王維와 이사훈李思訓을 남북화의 시조로 한 2대 화풍으로 오대五代에 이르러 화조화에 있어서 몰골 담채법의 서희徐熙와 쌍구 농채법 황전黃筌에 의하여 성격이 확실해졌고, 송대宋代 산수화에 있어서 북송北宋의 동원董源, 거연巨然등을 중심으로 하는 이상적 남종화풍은 휘종 宗, 곽희郭熙등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사실주의의 원체파院體派 북화풍에 대항하여 나갔다. 남송南宋에 들어서서 원체풍의 산수화는 이당李唐, 마원馬遠, 하규夏珪 등의 거세고 대담한 필치의 '수묵 산수화풍'을 낳았고, 한편 남종화에 있어서 보다 거세고 힘찬 필치의 소유자 양해梁楷와 목계牧谿가 나와 독특한 남화풍을 발전시켰다. 이런 경향은 원말 사대가인 황공망, 오진, 예찬, 왕몽 등에 의하여 완전한 '남종문인화풍'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명조에 들어가 남화는 대가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 동기창董基昌등으로 인하여 중국 회화사상 귀족주의적 궁중예술을 누르고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위의 남북의 2대 화풍을 정리해보면 북화는 화북지방의 험악한 기후 풍토를 배경으로 원체파의 전문적 궁정 화가 중심의 아카데믹한 전통파 예술이다. 왕실, 귀족 중심의 화려한 성격으로 강한 필치와 농채, 수묵을 사용하여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한편 남화는 강남 지방의 온화하고 기름진 기후와 풍토를 배경으로 재야파의 비전문적 문인 중심의 이상적 성격의 예술이다. 문인들의 절개와 지조를 표현하여 부드러운 필치와 담채, 또는 수묵을 사용한 사의적寫意的 화풍이 특징으로 시문서화를 아우른 종합 예술이다.

한편, 명대는 도자 예술에 독창성을 보이고 있는데 명조 도자예술의 특징은 청화자기의 발달로 섬세한 문양과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다채자多彩瓷'는 원의 영향을 받아 복합적인 색으로 그 화려한 장식미는 명조의 사치스러운 귀족주의적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청색, 검푸른색, 자주색을 주된 색으로 한 삼채와 백자에 오색의 채색을 한 오채 기법의 도기들이 있다.



9)청靑

청은 만주족이 세운 정복왕조로서 명조를 멸하고 청제국을 세우니 이후 270년 동안 중국은 다시 이민족의 천하가 되었다. 이들은 정치·문화적으로 명조의 행정과 문화를 그대로 계승하여 시행하였다. 명조 말기부터 들어온 서양문물의 전래는 근대화의 결과를 낳기도 하였으나, 외국의 제국주의자들에게 침략의 기회를 만들어 20세기에 들어서 청국은 패망하게 된다. 청조 전반기인 강희康熙·옹정雍正·건륭乾隆시대는 청조의 문화·정치·경제의 절정기로서 학문과 예술을 애호하고 후원함으로서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 주위의 이웃나라인 미얀마, 타이, 베트남 및 조선 등의 각국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고 교류를 하여 청조의 문화는 이웃나라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봉건주의와 제국주의의 침략은 청조의 국세를 기울게 하여 결국 쇠망의 길로 이끌었다.

건축은 청 문화의 전성기인 강희康熙·옹정雍正·건륭乾隆 치세 아래 약 130여년간 대규모의 건축조영사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대의 양식을 모방하였을뿐, 새로운 예술적 발전은 보지 못하였다.

청대의 도자는 명대와는 달리 명대 도자가 자유로운 느낌을 주며 채색도 생기가 넘친다면 청대 도자는 신중하고 세밀한 필법으로 단정하고 예리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도 기술이 현저하게 향상되고 채유한 색깔의 수도 많아서 화려하다.

회화는 초기에서 중기까지는 융성하였으나, 후기 이후부터는 재야 작가들의 활동이 성하였고, 또 다양한 화파와 화풍이 나오게 된다.

명 말기 동기창董基昌의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으로 청조 초기는 남화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이에는 '사왕오운四王吳 '의 육대가를 중심으로 하는 묵수주의墨守主義화파들과, 명말의 유민인 석도石濤와 팔대산인八大山人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파들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사왕오운四王吳 이란 왕시민王時敏, 왕감王鑑, 왕희王 , 왕원기王原祁의 사왕四王씨와 오력吳歷, 운수평 壽平의 2인을 합한 6대가를 말하는데 이들은 남종산수화의 명인들이다. 이들은 주로 강남 지방을 중심으로 청조 산수화의 전통을 세웠다. 한편 독특하고 기이한 화풍으로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화가로는 석도石濤와 팔대산인八大山人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명이 망하자 초야에 묻혀 화조풍월花鳥風月을 벗삼아 살면서 그림을 통하여 이민족 통치의 시대상황에 반항 의식을 표현하였다. 이는 '원말4대가'들과 정신적인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은 '사왕오운'작가들이 남화풍의 전통을 계승한 아카데미즘에 대항하여, 같은 남화풍이지만 새로운 착상과 구도, 대담한 필치로서 자유롭게 표현하였다.

한편 양자강 하류 북방에 위치한 양주는 청대 학술·예술의 한 중심이 되었으며 옹정과 건륭기에는 이 지방에 양주팔괴라고 불리는 문인화가가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양주팔괴는 이선李鮮, 왕사신汪士愼, 김농金農, 황신黃愼, 고상高翔, 정섭鄭燮, 이방응李方膺, 나빙羅聘등의 여덟명을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개성을 중시하고 감흥의 솔직한 발현을 목표로 하여 기성의 형식이나 기교를 버리고 자유분방하게 붓을 휘둘렀다. 반전통적인 제작태도로 선적인 묘사보다 면적인 표현을 취했으며 고전적 절도를 무시하고 짙은 먹색과 화려한 색채, 강한 필세와 격한 붓처리를 하였다.

청조의 궁중 화원으로 서양화 기법을 전한 것은 이탈리아인 화가 낭세녕郎世寧, Josephus Castiglione 이다. 그는 강희제 시대 궁정 화가로 일하면서 주로 화조, 인물들을 음영법에 의하여 극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청조 말기에 이르러 나라 안팎으로 혼란하자 문인등의 예술가들은 경제 생활이 활발한 상해·북경 등의 대도시로 모여들었다. 대도시를 생활무대로 직업적으로 그림을 팔며 생활한 이들은 사의적 작품을 즐겨 그려 일반 대중의 기호에 맞는 그림을 제작하였다. 산수화보다는 묵색이 물씬 풍기고 필치가 통쾌한 화훼·절지의 신문인화 등이 많았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오창석吳昌碩을 들 수 있는데, 운치있는 고전의 석고 문체를 잘썼고, 웅건한 필치로 화훼를 잘 그려 새로운 문인화 예술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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