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순의 회화론에 이태준은 반발했다
윤희순은 당시 유행한 지방색에 관해 “로컬 컬러는 결코 외국인 여행가에게 에조틱한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풍속적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윤희순은 “외국인 여행가”들인 선전 심사위원들이 애써 주장하는 “편협한 관념으로서 향토색” 비판을 꾀했다.
그는 선전에서 유행하는 향토색 제재로 초가집, 문루, 자산紫山, 무너진 흙담, 색상자, 소반 및 인물에서 물동이 얹은 부인에 아기 업은 소녀, 노란 저고리 파란 치마, 백의, 표모漂母 따위를 예로 들어보였다.
그것은 “건물과 첩경添景 인물에 조선 독특한 형태 및 색채를 담으려고, 또는 애향토적 감정을 발휘하려고 의도한” 것일 텐데, 그것은 “조선의 자연과 인생의 아무러한 약동적 미와 생명과 에네르기를 발휘 앙양하지 못한 것”으로, “작가의 정서 내지 미감, 즉 미학 형태의 오류 및 타락이 그 치명적 소인”이라고 지적했다.
윤희순은 오브제 자체보다는 어떻게 보느냐 하는 정조情調가 중요하고, 그것을 보는 것보다는 어떻게 표현했느냐가 더 중요하며, 나아가 어떻게 발표했느냐보다는 “그 작품이 인생, 사회, 문화에, 다시 말해 조선에 어떤 가치를 던져주느냐가 결정적 계기”라고 주장했다.
그는 시대, 사회, 계급의 저류를 흐르는 정서란 자연과 인물, 기타 제재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지방색 발휘는 “향토애심의 표현이며, 향토 속에서 생활하며 향토와 함께 생장하는 중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윤희순은 1932년 6월 『신동아』에 기고한 ‘조선 미술의 당면과제’란 제목의 글에서 신라 불상, 고구려 벽화, 고려청자, 조선 회화에는 일관되게 드러나는 미의 형식이 있다면서 이를 “완전 무구한 조화 통일의 미! 원만극치의 미! 웅건과 우미와 신비를 겸한 최고의 미! 미의 절정 …”이라고 했다.
그는 이를 민족의 특수한 정조로 보고 계승 발전시켜 민족을 기조로 한 미술이 나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조선시대 문인화의 계급성과 더불어 그것의 상징성, 도피성을 비판하는 가운데, 정치, 경제, 민족, 문화, 생활과 무관함을 지적했다.
게다가 “최근 양반계급의 몰락과 소소한 부자의 출현 이후에는, 소위 조선 동양화가들은 주문대로 휘호하고 주찬酒餐의 향응을 받았으니 그것은 완연 기생적 대우밖에는 아니 되는 것”이므로 그것의 극복이 시급하다고 했다.
윤희순의 회화론에 이태준은 반발했다.
그는 1934년에 “요즘 조선심이니 조선 종조니” 하는 예술가들이 있지만 그들은 거의 “내면적인 것을 잊어버리고 외면적인 것에만 관심”을 기울인다고 비판했다.
그는 1934년 9월 27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제13회 협전 관후기’에서 “조선 물정을 묘출하였다고 해서 조선적 작품은 될지언정 조선 미술이 되는 것은” 아니라면서 “조선 사람다운 작품”은 “조선 사람다운 작가의 솜씨, 작풍”에 핵심이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