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미술전람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는 1921년 12월 27일 조선총독부에 의해 발족되었고 첫 전람회를 연 것은 이듬해였다.
당시 정무총감 수야련태랑水野鍊太郞, 학무국장 園田善三郞, 주석 참사관 화전일랑和田一郞 등의 발기로 서울에 있는 화가 및 감상가 156명을 총독부 회의실에 초대해 의견 교환회를 열었다.
이때 미즈노가 회장이 되어 동양화, 서양화, 서예의 3부를 두는 안을 제출하여 그대로 결정하고 명칭을 조선미술전람회라고 했다.
선전이 열리게 된 배경에는 3·1운동 등 식민지 정책에 대한 우리 민족의 거센 반발을 문화정책을 통해 회유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선전은 일본의 관전인 문부성전람회(나중에 제전이 됨)를 모델로 총독부에 의해 생겼는데 문부성전람회는 프랑스 살롱전을 모델로 한 것이어서 살롱전의 형식이 우리나라에까지 전해진 것이다.
선전의 창립전은 1922년 6월 1일부터 21일까지 영락정 조선총독부 상품진열관에서 열렸다.
선전은 창립전을 연 이래 해마다 5월에 국립도서관, 경복궁 미술관 등에서 1944년까지 23회나 지속되었다.


윤희순은 1931년 5월 31일자 『동아일보』에 선전이 출범하게 된 동기에 관해 적었다.

“원래 이 전람회의 출발이 순수예술 기관으로서의 사명에 있지 않았고 소위 문화정치 표방이 일교화 시설에 있었음을 폐언을 요치 않는다.”


선전은 일본 문부성 전람회의 규칙과 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다른 점은 조선의 실정을 참고해서 서예를 따로 마련한 것이다.
총독부는 선전을 동양화, 서양화, 서예로 나누고 출품자격을 조선 작가와 조선에 체류하는 일본인 작가로 했으며 입선과 특선을 두고 특선에 1, 2, 3, 4등의 등급을 두었다.
그리고 1등상을 수상한 사람과 특출한 작가에게는 심사를 받지 않고 출품할 수 있게 했다.


선전 창립전에 응모한 작품은 동양화가 165점, 서양화가 115점, 조각이 10점 등 모두 368점이었다.
많은 한국인이 출품했지만 서양화에는 세 사람만이 출품했다.
수상자로 동양화에서 2등에 허백련, 3등에 심인섭, 이한복, 4등에 김은호, 김용진, 이용우가 있었고, 서예에서는 2등에 오세창, 3등에 김영진, 현채, 4등에 김용진, 안종원, 이한복이 있었다.
제3회전에서는 서양화 3등에 나혜석, 4등에 이제창, 강신호, 이승만, 손일봉이 있었고 조각에서는 김복진이 3등을 수상했다.


선전 심사위원에 서양화와 조각 부문을 제외한 동양화와 서예에 한국인이 추대되었지만 중반 이후에는 거의 전원을 일본에서 초빙했으며 동경미술학교 교수와 일본 화단의 중진 작가들이 주로 선발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선전이 조선의 독특한 성향을 나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창립전 서양화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와다는 1923년 4월 26일자 『매일신보』에 적었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바는 조선에서는 조선의 것을 발달시키지 아니하면 불가하다 하나니 정치상에 동화라든가 유화라 함은 별문제로 하고 풍속, 습관, 언어, 예술이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든 그 민족 고유의 물을 발달하게 하지 아니하면 안 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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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예와 사군자를 하찮게 취급했음을




선전에서 논란이 생긴 건 서예와 문인화에 대한 것이었다.
선전 출범 때부터 이 두 장르가 동양화, 서양화와 동등하게 취급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서화계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의식해서 서예를 선전에 포함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26년 일부 동양화가와 서양화가들이 중심이 된 화우다화회畵友茶話會가 총독부에 서예와 문인화를 선전에서 빼줄 것을 진정함으로써 이 문제가 불거졌다.
이한복과 일본인 가토를 비롯하여 7명의 화가들이 조직한 화우다화회는 1926년 3월 16일자 『매일신보』에 자신들의 요구를 적었다.


“이번 우리들의 운동이 어떠한 효과를 나타낼지는 알 수 없으나 제3부의 서와 사군자는 예술미가 적고 또 작가들의 생활을 보더라도 일종의 소인들의 예술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어떠한 방법으로든 구분하여 둘 필요가 있을 줄로 생각한다.”


당시 서예와 사군자를 하찮게 취급했음을 안석주가 1927년 5월 27~30일자 『조선일보』에 ‘미전을 보고’란 제목으로 쓴 글에서 알 수 있다.


“동양화를 말하기 전에 서와 사군자에 대하여 일구도 없다는 것은 좀 섭섭한 일이나 다른 것보다도 더 큰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봉건시대의 유물인 그것이 현대까지 잔존할 가치도 없는 것 같이 서와 사군자의 조락함을 관자들에게 느끼게 하는 동시에 얼마만 있으면 스스로 소멸될 것을 보여주는 연고다.
그런고로 너무도 경솔한 것 같으나 동양화부터 시작하려 한다.”


이런 여론이 확산되자 1932년 선전은 서예를 없애고 사군자를 수묵채색화 분야에 끼워 넣고 공예 분야를 신설했다.
서예의 폐지에 많은 사람들이 동감을 표했지만 동양 고유의 예술을 폄하한 데 대해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구본웅은 1934년 ‘제13회 조선미전을 봄’이란 제목의 글에서 적었다.


“서·사군자가 없어진 것도 아깝기 짝이 없습니다.
사군자만은 동양화부에 속하여 그 미미한 흔적을 보이기는 하나 서의 한 가지만 없어졌다 하겠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론과 여러분, 당사자 재현의 의당한 의견이 있어 폐지하였겠으나 필자는 서와 사군자도 미술작품으로 인정하며 다른 미술품과 한가지로 진전함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까닭은 서가 각기 서가의 개성을 표현함은 새삼스러이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떠한 평면을 미화하는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공예 분야의 신설에 대해 총독부 관리 하야시 시게키林茂樹는 1932년 3월호 『조선』에 기고한 ‘선전의 변혁’이란 글에서 “근래의 추세인 민예 또는 향토예술에 대한 좋은 방향의 진보를 감안하고 조선 고유 공예의 발전을 위해서” 순정미술純正美術이 아닌 공예를 첨가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조선 고유의 민예·향토예술에 대한 일제의 장려정책이었다.
윤희순은 1932년 6월 『매일신보』에 기고한 ‘제11회 조선미전의 제 현상’이란 글에서 공예부 신설 및 장려정책에 대해 “생산적 미술의 쿠데타”라고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미술전람회의 공예품은 당연히 상업공예가 아니라 순수한 “공예미술이 표준”이어야 한다고 제창했다.
그는 순수미술과 상업미술을 구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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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의 회화론에 이태준은 반발했다




윤희순은 당시 유행한 지방색에 관해 “로컬 컬러는 결코 외국인 여행가에게 에조틱한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풍속적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윤희순은 “외국인 여행가”들인 선전 심사위원들이 애써 주장하는 “편협한 관념으로서 향토색” 비판을 꾀했다.
그는 선전에서 유행하는 향토색 제재로 초가집, 문루, 자산紫山, 무너진 흙담, 색상자, 소반 및 인물에서 물동이 얹은 부인에 아기 업은 소녀, 노란 저고리 파란 치마, 백의, 표모漂母 따위를 예로 들어보였다.
그것은 “건물과 첩경添景 인물에 조선 독특한 형태 및 색채를 담으려고, 또는 애향토적 감정을 발휘하려고 의도한” 것일 텐데, 그것은 “조선의 자연과 인생의 아무러한 약동적 미와 생명과 에네르기를 발휘 앙양하지 못한 것”으로, “작가의 정서 내지 미감, 즉 미학 형태의 오류 및 타락이 그 치명적 소인”이라고 지적했다.
윤희순은 오브제 자체보다는 어떻게 보느냐 하는 정조情調가 중요하고, 그것을 보는 것보다는 어떻게 표현했느냐가 더 중요하며, 나아가 어떻게 발표했느냐보다는 “그 작품이 인생, 사회, 문화에, 다시 말해 조선에 어떤 가치를 던져주느냐가 결정적 계기”라고 주장했다.
그는 시대, 사회, 계급의 저류를 흐르는 정서란 자연과 인물, 기타 제재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지방색 발휘는 “향토애심의 표현이며, 향토 속에서 생활하며 향토와 함께 생장하는 중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윤희순은 1932년 6월 『신동아』에 기고한 ‘조선 미술의 당면과제’란 제목의 글에서 신라 불상, 고구려 벽화, 고려청자, 조선 회화에는 일관되게 드러나는 미의 형식이 있다면서 이를 “완전 무구한 조화 통일의 미! 원만극치의 미! 웅건과 우미와 신비를 겸한 최고의 미! 미의 절정 …”이라고 했다.
그는 이를 민족의 특수한 정조로 보고 계승 발전시켜 민족을 기조로 한 미술이 나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조선시대 문인화의 계급성과 더불어 그것의 상징성, 도피성을 비판하는 가운데, 정치, 경제, 민족, 문화, 생활과 무관함을 지적했다.
게다가 “최근 양반계급의 몰락과 소소한 부자의 출현 이후에는, 소위 조선 동양화가들은 주문대로 휘호하고 주찬酒餐의 향응을 받았으니 그것은 완연 기생적 대우밖에는 아니 되는 것”이므로 그것의 극복이 시급하다고 했다.


윤희순의 회화론에 이태준은 반발했다.
그는 1934년에 “요즘 조선심이니 조선 종조니” 하는 예술가들이 있지만 그들은 거의 “내면적인 것을 잊어버리고 외면적인 것에만 관심”을 기울인다고 비판했다.
그는 1934년 9월 27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제13회 협전 관후기’에서 “조선 물정을 묘출하였다고 해서 조선적 작품은 될지언정 조선 미술이 되는 것은” 아니라면서 “조선 사람다운 작품”은 “조선 사람다운 작가의 솜씨, 작풍”에 핵심이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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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은 ‘회화로 나타나는 향토색의 음미’에서




김용준은 1936년 5월 5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회화로 나타나는 향토색의 음미’에서 조선 향토색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조선 사람, 물건, 풍경을 그린 작품이 덮어놓고 조선 정조가 흐른다고 하여 “조선 화가는 조선지화朝鮮之畵” 식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라면서 조선 사람이 아닌 어느 나라 사람일지라도 그런 취재로 그린 작품이 얼마든지 있으므로 인종과 풍습을 그렸다고 해서 조선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또 “조선 사람이 아니라고 나타내지 못할 색채란 없다”면서 색채란 개인의 개성에 따라 다르며, 근본에 깔린 민족 색채는 그 문화 발달 정도에 따른다고 했으며, “대체로 보아 문화가 진보된 민족은 암색暗色에 유類하는 복잡한 간색間色을 쓰고, 문화 정도가 저열低劣한 민족은 단순한 원시색을 쓰기를 좋아 한다”고 적었다.


“1932년 선전은 이왕가상(창덕궁상)과 총독상을 제정했다.
1935년에는 추천작가제를 도입했는데, 일부 화가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으로 3회 이상의 특선을 수상한 사람에게 추천작가의 자격을 주는 것이었다.
1935년 처음으로 추천작가로 추대된 사람은 동양화에 이상범, 이영일이었고 서양화에서는 김종태였다.”


선전의 작품 수준이 일본의 관전에 비해 형편없다는 점이 자주 지적되었다.
선우담은 1933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선전의 서양화 작품을 비판했다.


“… 이번 조선미전의 일반 작품 경향은 너무도 천박하고 기술은 예상 이상으로 저급하다.
회장에 들어설 때에 우리에게 주는 제일 인상은 공허 그리고 불쾌한 색채의 존재뿐이었다.
아무 감격도 없고 무게도 없고 박력도 없고 다만 미숙한 색채의 진열장이라는 느낌을 줄 뿐이다.
… 조선미전의 대부분 작품은 사실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기술이 미급하여 그 효과를 얻지 못하고 따라서 작품의 중량이라고도 할 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회화 제작 상 중대 요소인 데생으로 볼 때에 대부분의 작품이 다 아직 미급이라는 감을 주고 색채 또한 그 대조와 조화가 아무리 보아도 미숙하다.”


선우담(1904~84)은 동경미술학교 사범과에 입학했지만 서양화과로 전과했다.
1929년에 졸업하고 귀국했으며, 해방 후 1946년 북한예술총연맹 황해남도위원회 위원장으로, 1948년에는 북한미술동맹위원장으로 활동했다.
6·25동란 이후 1958년에는 평양미술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1934년 선전의 심사위원들 모두 심사의 기준을 “조선색의 표현 여하”에 두었다.
심사위원 히로시마 신타로廣島新太郞는 심사평에서 그림은 그 지방 인정이라든지 환경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는 것이라면서 좀 더 조선색이 나타나야 한다고 했으며, 또 다른 심사위원 야마모토 카나에山本鼎는 1934년 5월 16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조선색에다 주력을 하라’란 글에서 “조선의 자연과 인사人事의 향토색을 선명히 표현한 출품을 표준으로 심사한 것은 물론입니다”라고 했다.
전람회를 마친 후 발간하는 『조선 미술전람회 도록』 제13집 머리말에서 총독부 학무국장 와타나베 토요히코渡邊豊日子는 공예 분야를 언급하는 가운데 “반도 독자의 향토색이 충일한 민예적 작품을 볼 수 있다”고 적었다.
향토색이란 말이 처음으로 문헌에 기록되었다. 와타나베 토요히코는 1935년 3월 27일자 『경성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선전에서 향토색 작품을 많이 보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그가 말한 향토색은 조선색, 지방색, 반도적인 색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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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미술



중앙 아시아는 파미르고원을 경계로 하여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진다. 동부는 중국의 신 강에 있는 위구르 자치구로, 북은 천산, 남은 곤륜, 카라코람 산맥등으로 둘러싸인 타림 분지에 해당하며, 그 북변을 타림강이 동류하여 누란 분지로 훌러들고, 그 남쪽 일대에 타클라마칸 대사막이 펼쳐져 있다. 서부는 카자흐, 키르기스, 타지크, 우즈벡, 투르코멘의 다섯 공화국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으로, 아랄해로 흘러드는 실암두강과 그밖의 좁은 평야와 키지르등의 사막과 초원으로 되어 있다. 9세기 이전에는 아리안 계통, 이란 계통의 민족이 살고 있었다. 서역미술이라고도 불리우는 동투르키스탄 미술은 동서 여러 나라의 미술을 혼합시킨 미술이지만 독특한 서역 양식의 것도 있다.

그것은 불교 미술을 필두로 하는 종교 미술이 주가 되지만 세속 미술의 유물도 많으며, 동서 미술 교류의 자취를 여실히 보여준다. 유물로서는 대부분이 벽화이다.

중앙 아시아의 벽화는 건벽화로 연와벽 또는 암벽을 평평하게 다듬고, 볏집이나 식물의 섬유, 양모, 동물의 배설물등을 혼합한 점토를 발라 밑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회반죽을 칠한 화면에 그려졌다.

밑그림은 모형종이를 이용하여 그 윤곽선을 따라 선각법으로 화면에 옮겨 그린 듯 하다

동투르키스탄의 불화는 북쪽의 쿠챠 지역이 소승적인 불전이나 본생담을 주제로 삼은 것에 비해서 투르판 지역과 남쪽에서는 대승적인 만다라식의 도상이 그려지고 있다. 화풍은 오리엔트화한 그레코로만 계통의 음영묘법과 중국 계통의 선본위의 묘법이 가미되어 다채로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중앙 아시아의 풍토에 영향을 받아 조소의 대부분은 소상이며, 청동·주조, 목조는 동투 르키스탄, 석조는 서투르키스탄에 약간의 유품이 보일 뿐이다.

양식으로는 최초는 남쪽에 그레코로만풍의 것이 나타나며, 뒤이어 남북 두 지역에 걸쳐서 간다라 후기, 중인도, 이란의 영향이 보이고 마지막으로 북쪽에 특유한 서역 양식이 나타났다가 그것에 이어지는 중국 양식의 것으로 끝난다.


건축물은 서투르키스탄에서는 니사, 토브라크 카라, 벤지켄트등의 궁전 유적이 발견되고 있지만, 동투르키스탄에는 카라 호조의 궁전 유적과 니야의 주거지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불교 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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