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준은 ‘회화로 나타나는 향토색의 음미’에서




김용준은 1936년 5월 5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회화로 나타나는 향토색의 음미’에서 조선 향토색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조선 사람, 물건, 풍경을 그린 작품이 덮어놓고 조선 정조가 흐른다고 하여 “조선 화가는 조선지화朝鮮之畵” 식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라면서 조선 사람이 아닌 어느 나라 사람일지라도 그런 취재로 그린 작품이 얼마든지 있으므로 인종과 풍습을 그렸다고 해서 조선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또 “조선 사람이 아니라고 나타내지 못할 색채란 없다”면서 색채란 개인의 개성에 따라 다르며, 근본에 깔린 민족 색채는 그 문화 발달 정도에 따른다고 했으며, “대체로 보아 문화가 진보된 민족은 암색暗色에 유類하는 복잡한 간색間色을 쓰고, 문화 정도가 저열低劣한 민족은 단순한 원시색을 쓰기를 좋아 한다”고 적었다.


“1932년 선전은 이왕가상(창덕궁상)과 총독상을 제정했다.
1935년에는 추천작가제를 도입했는데, 일부 화가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으로 3회 이상의 특선을 수상한 사람에게 추천작가의 자격을 주는 것이었다.
1935년 처음으로 추천작가로 추대된 사람은 동양화에 이상범, 이영일이었고 서양화에서는 김종태였다.”


선전의 작품 수준이 일본의 관전에 비해 형편없다는 점이 자주 지적되었다.
선우담은 1933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선전의 서양화 작품을 비판했다.


“… 이번 조선미전의 일반 작품 경향은 너무도 천박하고 기술은 예상 이상으로 저급하다.
회장에 들어설 때에 우리에게 주는 제일 인상은 공허 그리고 불쾌한 색채의 존재뿐이었다.
아무 감격도 없고 무게도 없고 박력도 없고 다만 미숙한 색채의 진열장이라는 느낌을 줄 뿐이다.
… 조선미전의 대부분 작품은 사실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기술이 미급하여 그 효과를 얻지 못하고 따라서 작품의 중량이라고도 할 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회화 제작 상 중대 요소인 데생으로 볼 때에 대부분의 작품이 다 아직 미급이라는 감을 주고 색채 또한 그 대조와 조화가 아무리 보아도 미숙하다.”


선우담(1904~84)은 동경미술학교 사범과에 입학했지만 서양화과로 전과했다.
1929년에 졸업하고 귀국했으며, 해방 후 1946년 북한예술총연맹 황해남도위원회 위원장으로, 1948년에는 북한미술동맹위원장으로 활동했다.
6·25동란 이후 1958년에는 평양미술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1934년 선전의 심사위원들 모두 심사의 기준을 “조선색의 표현 여하”에 두었다.
심사위원 히로시마 신타로廣島新太郞는 심사평에서 그림은 그 지방 인정이라든지 환경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는 것이라면서 좀 더 조선색이 나타나야 한다고 했으며, 또 다른 심사위원 야마모토 카나에山本鼎는 1934년 5월 16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조선색에다 주력을 하라’란 글에서 “조선의 자연과 인사人事의 향토색을 선명히 표현한 출품을 표준으로 심사한 것은 물론입니다”라고 했다.
전람회를 마친 후 발간하는 『조선 미술전람회 도록』 제13집 머리말에서 총독부 학무국장 와타나베 토요히코渡邊豊日子는 공예 분야를 언급하는 가운데 “반도 독자의 향토색이 충일한 민예적 작품을 볼 수 있다”고 적었다.
향토색이란 말이 처음으로 문헌에 기록되었다. 와타나베 토요히코는 1935년 3월 27일자 『경성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선전에서 향토색 작품을 많이 보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그가 말한 향토색은 조선색, 지방색, 반도적인 색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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