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서예와 사군자를 하찮게 취급했음을




선전에서 논란이 생긴 건 서예와 문인화에 대한 것이었다.
선전 출범 때부터 이 두 장르가 동양화, 서양화와 동등하게 취급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서화계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의식해서 서예를 선전에 포함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26년 일부 동양화가와 서양화가들이 중심이 된 화우다화회畵友茶話會가 총독부에 서예와 문인화를 선전에서 빼줄 것을 진정함으로써 이 문제가 불거졌다.
이한복과 일본인 가토를 비롯하여 7명의 화가들이 조직한 화우다화회는 1926년 3월 16일자 『매일신보』에 자신들의 요구를 적었다.


“이번 우리들의 운동이 어떠한 효과를 나타낼지는 알 수 없으나 제3부의 서와 사군자는 예술미가 적고 또 작가들의 생활을 보더라도 일종의 소인들의 예술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어떠한 방법으로든 구분하여 둘 필요가 있을 줄로 생각한다.”


당시 서예와 사군자를 하찮게 취급했음을 안석주가 1927년 5월 27~30일자 『조선일보』에 ‘미전을 보고’란 제목으로 쓴 글에서 알 수 있다.


“동양화를 말하기 전에 서와 사군자에 대하여 일구도 없다는 것은 좀 섭섭한 일이나 다른 것보다도 더 큰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봉건시대의 유물인 그것이 현대까지 잔존할 가치도 없는 것 같이 서와 사군자의 조락함을 관자들에게 느끼게 하는 동시에 얼마만 있으면 스스로 소멸될 것을 보여주는 연고다.
그런고로 너무도 경솔한 것 같으나 동양화부터 시작하려 한다.”


이런 여론이 확산되자 1932년 선전은 서예를 없애고 사군자를 수묵채색화 분야에 끼워 넣고 공예 분야를 신설했다.
서예의 폐지에 많은 사람들이 동감을 표했지만 동양 고유의 예술을 폄하한 데 대해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구본웅은 1934년 ‘제13회 조선미전을 봄’이란 제목의 글에서 적었다.


“서·사군자가 없어진 것도 아깝기 짝이 없습니다.
사군자만은 동양화부에 속하여 그 미미한 흔적을 보이기는 하나 서의 한 가지만 없어졌다 하겠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론과 여러분, 당사자 재현의 의당한 의견이 있어 폐지하였겠으나 필자는 서와 사군자도 미술작품으로 인정하며 다른 미술품과 한가지로 진전함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까닭은 서가 각기 서가의 개성을 표현함은 새삼스러이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떠한 평면을 미화하는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공예 분야의 신설에 대해 총독부 관리 하야시 시게키林茂樹는 1932년 3월호 『조선』에 기고한 ‘선전의 변혁’이란 글에서 “근래의 추세인 민예 또는 향토예술에 대한 좋은 방향의 진보를 감안하고 조선 고유 공예의 발전을 위해서” 순정미술純正美術이 아닌 공예를 첨가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조선 고유의 민예·향토예술에 대한 일제의 장려정책이었다.
윤희순은 1932년 6월 『매일신보』에 기고한 ‘제11회 조선미전의 제 현상’이란 글에서 공예부 신설 및 장려정책에 대해 “생산적 미술의 쿠데타”라고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미술전람회의 공예품은 당연히 상업공예가 아니라 순수한 “공예미술이 표준”이어야 한다고 제창했다.
그는 순수미술과 상업미술을 구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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