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필주




강필주(?~1930년 전후)의 화단 등단 배경과 생몰연대는 알려지지 않는다.
1907년 관보에 궁내부 영선사 위원으로 적혀 있어 한일합방 전에 관직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선사는 건물 신축 및 보수를 담당한 보서로 그가 화가의 신분으로 건축물에 그림 그리는 일에 관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1911년 서화미술회 강습소에서 조석진, 안중식 등과 함께 후진을 가르친 것을 보면 이 시기에 이미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그의 그림은 드물고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1910년대 후반 혹은 192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슴>의 화제는 “백세토록 수를 누리며 복록을 받으소서”이며, 고목과 십장생 중 하나인 사슴을 그린 것이다.
누군가의 화면 세척과정에서 목빛과 담채의 본색을 잃게 했지만 상단 대범한 필치로 묘미 있게 횡단시킨 고목의 줄기 및 가지의 곡선과 둥글게 뭉쳐진 나뭇잎의 구성에서 그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작례로 보인다.
아래 완만하게 경사진 풀언덕에 출현한 사슴은 세필로 섬세하게 묘사되었다.
사슴은 오른편으로 경쾌한 발걸음을 옮기다가 왼편에서 무슨 소리가 났는지 머리를 돌려 경계하는 모습인데, 세밀 묘사가 고목의 자유분방한 붓놀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가 73세에 그린 <팔준도 八駿圖>가 있어 1930년 이후에까지 생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서화미술회 제자 김은호와 평양에서 휘호회揮毫會를 가진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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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협회의 창립 취지




서화협회의 담당지도는 동양화에 이도영, 서양화에 고희동, 서예에 김돈희였다.
서화협회의 창립 취지는 “신구 서화계의 발전, 동서 미술의 연구, 향학 후진의 교육 및 공중의 고취아상을 증장케 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었고, 내건 주요 사업은 휘호회, 전람회, 주문 제작, 도서 인행, 강습소의 개설이었다.


고희동은 1950년에 서화협회 창설 당시를 술회했다.


“… 우리에게는 화단이니 미술단체니 하는 것은 이름조차 없었다.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하여 너무도 딱하게 생각하고 쓸쓸하게 생각하였다.
그 당시의 서書와 화畵로 명성이 높던 분과 여러 번 말을 하였었다.
우리도 당연히 한 단체가 있어서 우리의 나아가는 길을 정하고 후진을 양성하여야 한다고 항상 말을 하고 지내왔다.
내가 이러한 생각이 난 거은 일본 도오꼬오에서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왔던 까닭이었다.

… 13인이 발기인이 되어 회를 조직하였는데, 우선 명칭을 의정할 새 미술 두 자는 채택을 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서화협회’라고 결정하였다. 이름이야 무엇이건 간에 일만 하면 된다는 뜻으로 그냥 해버렸었다.
그리하여 초대 회장에 심전 안중식을 추대하고 총무라는 명칭으로 내가 일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회원을 천거하고 회비를 징수하여 장교천변의 어느 친구의 집 사랑을 빌어서 사무소를 정하고 우선 제1회로 전람회를 열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작품을 내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1, 2년 지내 나가는 중에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서 그냥 정지 상태에 들어가고, 회장 안 선생님이 별세하시어서 소림 조 선생님이 회장이 되시었다가 또 별세하시고, 우향 정 선생님이 회장이 되신 후 35년 전(1921년)에 비로소 처음으로 전람회를 열었다.”


서양 양식이 들어오면서 전통 양식을 동양화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서예와 회화를 통칭하여 서화란 말도 통용되었다.
서화란 말이 통용되었다는 것은 아직 서예와 회화가 분리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서예와 회화 모두 지, 필, 묵을 사용한다고 해서 동양에서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이명동체異名同體로 보았다.
서양화가 들어오자 서예와 회화를 구분할 필요를 느꼈고 서양화에 대한 상대적인 명칭으로 동양화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회화전에 서예를 배제해야 한다는 요구가 생겼다.
서예와 회화의 분리는 1922년 선전이 열리면서 동양화부와 서예부를 설정하면서부터였다.


미술이란 말이 사용되기 전에는 도화圖畵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었다.
1895년의 대한제국 선포 이전부터 서양식 제도의 각종 학교 설립이 시작되어 서울과 지방 각지에서 급속한 파급이 이루어지면서 도화 과목은 창가, 체조 등과 더불어 새로운 인식의 필요한 예체능 교육으로 여겨졌다.
1906~07년 무렵에 이르면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에 학생 모집광고를 내는 관립, 사립학교의 교과 과목 속에 으례 도화가 들어 있었다.
1908년 정부의 학부가 발행한 교과서 중에 『도화임본 圖畵臨本』이 있으며 원화를 이도영이 그렸다.
내용은 윤곽선이 먹 붓으로 그려진 것이지만 서양화법을 도입환 풍경과 인물, 정물의 사실적 묘사법과 명암법을 알려주고 있다.
이때부터 전통 회화와 서양화의 두 흐름이 병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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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의 소설은 예술을 위한 예술




김동인이 1937년에 발표한 소설 『광화사 狂畵師』는 미술과 화가의 관계를 극단적인 낭만적 모습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소설의 주인공 솔거는 죽음에 의해 작품을 완성하며 이는 마침내 화가 자신의 광기로 귀결된다.
이처럼 단편적이나마 미술이 우연한 영감이나 광기, 죽음 등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되었다는 점에서 김동인이 그려낸 화가의 모습은 다분히 서양의 근대 미술에 대한 인식을 반명한 것이다.
그의 소설은 예술을 위한 예술, 즉 서양에서 말하는 순수미술관을 반영한 것이다.
미술이란 말이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1884년 『한성순보』에서였다.
이 신문 17호에는 ‘아국 송보각회 회액 俄國 頌補各會 會額’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각국의 문화실태를 소개한 것으로 여기서 ‘음악학교’ 및 학회와 함께 ‘미술국 美術局’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했다.
전후에 아무런 설명 없이 미술국이란 단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미술이란 단어가 그 이전에 이미 도입된 것으로 짐작된다.


19세기 말에 도입된 미술이란 용어는 1915년에 이르러 순수미술의 개념으로 확립되었다.
안확은 1915년 『학지광 學之光』에 기고한 글 ‘조선의 미술’에서 조선의 미술을 회화, 조각, 도기, 칠기, 건축, 의관무기衣冠武器 등으로 나눠 설명한 후 “이상의 유품을 미술안으로 관하고 다시 개괄적으로 언하면 소위 순정미술에 속할 자는 회화 조각이오 기타는 미술적 의장意匠을 표한 준미술 혹 미술상 공예품이라 할지니라”라고 함으로써 순수미술Fine Art로서의 순정미술을, 공예품을 포함하는 준미술과 구분했다.
안확은 두 번째 절 ‘조선 미술품을 감’이란 글에서 문화사를 연구할 때 물질적 측면과 더불어서 “정신적 방면으로는 인격적 의식의 활동 즉 철학과 예술 등을 관찰”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미술의 정신적 측면을 강조했고 ‘철학과 예술 등’이란 말로 미술의 독자성을 전제했다.
그러나 같은 글에서 그는 미술이 온갖 공업의 발달을 위한 기초로 보았고 또한 미술과 문명과의 관계 속에서 “미술을 통해 국가의 흥망을 가늠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이전의 미술 담론과 동일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전통 서화는 원래부터 어떤 사용가치에 의해 규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서양인들이 말하는 순수미술로서의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입 초기에 기술 혹은 실용성과 분리될 수 없었던 미술 개념,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획득한 신지식인으로서의 예술가에 대한 인식이 전통 서화가들과 양립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1910년대 이후 서양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으며 서화가도 과거 화원이나 문인화가들과는 변별되었다.
1911년에 설립된 경성서화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은 미술이란 용어가 들어간 단체로서 이런 의미에서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하나의 첨점尖點이었다.
그러나 1913년 평양에서 창설된 기성서화미술회에서도 보듯 서화와 미술이 함께 사용된 데서 서화와 미술은 구별되었다.
서화를 전통 양식에 의한 것으로 미술을 서양 양식에 의한 것으로 구별한 것이다.


경성서화미술원의 교수 내용은 여전히 서와 화를 위주로 하는 것이었으며, 교수방식 역시 『개자원화보 芥子園畵譜』를 모사하거나 각 글씨체를 임서臨書하는 전통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1911년 4월 2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창립 취지서에서 서화가들은 근대적 자기인식을 명확히 드러냈다.


“어떤 이는 비난하기를, 서화란 하나의 기예에 불과한데, 어째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냐고 할 사람도 있으나, 이것은 글씨와 그림이 문장의 도와 함께 삼절을 이루어 예술 분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말이다.

더구나 글씨와 그림은 그 시대의 인심과 풍기를 나타내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세도의 승침丞沈과 문운의 성쇠盛衰에 관계되는 것이 적지 않다.
여러분이 또한 이를 찬조하여 이룩할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고 학생 이십 명을 뽑아 이 원에서 미술을 가르친다.
이것은 또한 옛 전통을 살리며 후학에게 길을 열어주는 훌륭한 일이다.”


취지서에서 그들이 글 쓰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문명개화 담론에서 생긴 미술 개념을 유지하고 동시에 자신들의 존재를 직업화가 대 문인화가라는 구분을 떠나 사회적 임무를 부여받은 전문인으로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서화미술원이란 명칭에서 시서화 일치 사상의 기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는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미술 개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서화인들의 미술에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서화미술회가 해체된 후 서화협회를 결성할 때 명칭에 미술이란 용어가 빠지기는 했지만, 『서화협회회보』 제1권 제1호에 밝힌 대로 “조선 미술의 침쇠함을 개탄하야 전 조선의 서화가를 망라하고 신구서화의 발전과 동서미술의 연구와 향학 후진의 교육, 공중의 고취아상高趣雅想을 증장”기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음을 볼 때, 이들 역시 미술이라는 보다 상위의 범주 안에서 자신들의 활동을 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
경성서화미술원의 창립으로부터 서화협회의 창립에 이르는 예술가 단체의 형성은 미술 행위에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가치를 부여하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전문화시켰다는 점에서 전대미문의 근대적 양상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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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이 서화미술원 원장에 취임했으며




1918년 서화협회를 결성할 때 명칭에 대해 이견이 상당히 분분했다.
고희동은 “명칭이야 어떻게 되었든 일만 제대로 하면 되지 않느냐”고 푸념했다는데, 고희동은 서화 대신 미술을 사용할 것을 고집했지만 대부분의 중견 작가들이 서화를 고집하여 서화협회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중견 작가들이 미술이란 명칭을 기피한 데서 서양 양식을 받아들이기에는 당시 사회가 전통에 매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술美術은 Beaux-Art 또는 Fine Art에 대한 번역으로 ‘아름다움을 구사하는 기술’이란 뜻이다.
이것은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 번안된 많은 개념들 중 하나이다.
서화란 명칭은 한동안 공존하다가 사라지고 미술이란 명칭이 널리 통용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도화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으며 미술 교사를 도화 선생으로 불렀다.
미술이란 명칭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선전이 열리고부터였다.
미술은 서화와 도화와는 달리 회화, 조각, 건축, 공예를 모두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명칭에서도 당시 서양 양식의 유입에 대한 사회의 거부반응이 어떠했는지 짐작된다.


서화협회가 결성된 배경에는 1911년 봄 윤영기가 설립한 서화미술원이 있다.
윤영기는 묵란墨蘭을 그리던 문인화가로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묵란법을 배워 대원군의 필법 그대로의 난초 그림을 그리며 왕실과 고관대작들과 친분이 두터운 사교에 능한 인물이었다.
시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후진 양성을 목적으로 서화미술원 설립에 착안한 야심을 가진 인물이지만, 한일합방 전에 조선 검거 세력으로 군림한 일제 통감부에까지 지원을 간청할 정도로 민족의 현실을 외면한 비열한 서화가였으며 한일합방 후에는 일부 매국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이 단체를 설립했다.
당시 『매일신보』는 백작 이완용과 자작 조중응, 남작 조민희 등이 서회미술원에 보조금을 냈다는 기사를 실었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 근처 한 건물을 빌어 1911년 3월 22일 많은 한묵인사翰墨人士가 모인 가운데 개원식을 거행했다.
윤영기는 설립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떤 이는 비난하기를 서화란 하나의 기예에 불과한데 어째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냐고 한 사람도 있겠으나 이것은 글씨와 그림이 문장의 도道와 함께 삼절三絶을 이루어 예술분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말이다.
문장을 없앨 수 없다면 서화는 또 어떻게 가볍게 다룰 수 있겠는가.
… 글씨와 그림은 그 시대의 인심과 기풍을 나타내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세도世道의 승강昇降과 문화 성쇠에 관계되는 것이 적지 않다.
여러분이 서화미술원을 찬조하여 이룩할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고 학생 20명을 뽑아 보내서 미술을 가르친다.
이것은 또한 옛 전통을 살리며 후학에게 길을 열어주는 훌륭한 일이다.”


윤영기가 설립한 서화미술원은 몇 가지 사업과 운동을 남긴 채 그의 재정적 지원을 맡고 나선 이완용에 의해 또 다른 미술단체와 미술학원으로 변질되었다. 한일합방조약 체결을 맡았던 이완용이 서화미술원 원장에 취임했으며 그는 이 단체에 매국내각의 공동 역신 조중응과 조민희를 포함한 일부 귀족층 인사들을 끌어들였다.
서화미술원은 사라지고 서화미술회가 생겼다. 윤영기의 존재는 사라졌고 대신 이완용이 추진한 서화미술회가 부각되었다.
윤영기가 이룩한 공적은 없더라도 그가 최초로 미술이란 말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미술사에 남게 되었다.
윤영기의 주도하에 운영되던 경성서화미술원은 이완용이 주동이 되어 표면상에는 이왕직을 내세웠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서화를 즐기던 친일 계열의 귀족들을 이끌어서 미술학원을 탄생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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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협회가 거둔 가장 큰 성과는




특기할 점은 서화협회가 실제로 보는 사물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주관적인 소감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쳤다.
화가의 주관적인 지각, 감성, 표현을 고희동은 1921년 『서화협회회보』 제1권 제1회에 기고한 글 ‘서양화를 연구하는 길’에서 강조했다.


“서양화라 하는 것은 그 그리는 바가 별로 타他에 재在함도 아니오, 그 취미가 또한 별처에서 생生함도 아니라, 인물이던지 풍경이던지 동물이던지 화과이던지 각각 각자의 마음대로 그리어 천연의 현상에 소감된 기분이 화폭에 충일하면 그것이 곧 위대한 작품이 되고 우아한 취미가 여기에서 생하는 도다.

사생이라 하면 그 생물 즉 실물을 사래寫來함이라 운하겠으나 그 실물의 형상을 모사함보다 그의 기분을 사함이 화의 정신이니 화는 즉 천공天工을 인화人化함에 있고 물형을 설명함에 있음은 아니로다.
차를 간단하게 말하면 천연을 인공으로서 번역하는 것이오.

일례를 들거대 삼각산을 그린다 하면 그 봉우리의 기세는 물론이고 그 때를 따라 변하는 현상이 있으니, 아침이면 그 아침의 맑아오는 공기의 여하와 퍼져 오르는 광선의 여하를 조차 우리의 소감이 여하하며, 석양이 되면 그 지는 해의 비취는 것과 덥히어 오는 어두운 장막에 변환되는 기분이 그 어떠한가 이것을 충분하게 그리어 내는 것이 서양화의 법이오.

그러나 그 화법을 연구하여 알기는 쉽되 그리기는 어려우니 자연미에 소감되는 점이 사람마다 다르며 그 발휘하는 바에 따라 우열이 있음은 재질여하에 있음이거니와 …”


서화협회가 거둔 가장 큰 성과는 전람회의 개최였다.
전람회를 통해 작품을 널리 소개하고 작품의 매매를 통해 기금을 마련했는데, 판매액의 20퍼센트를 협회가 기금으로 받았다.
협전은 1921년부터 1936년까지 15회에 걸쳐 개최되었다.
협전은 일본의 식민지 문화정책으로 시행된 선전과 달리 민전民展으로 관전官展과는 비교가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로 이루어진 협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단체전으로 매일신보와 동아일보 등 일간지들이 창립전을 전람회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했다.
『동아일보』는 1921년 4월 2일자 지면에서 창립전을 조선 서화계의 깨우는 첫소리에 비유했다.


“꿈속에 있는 조선 서화계의 깨우는 첫소리 … 침쇠하기 거의 극한에 이르렀다 할 우리의 서화계로부터 다시 일어나는, 첫 금을 그으려 하는 이 새 운동이 과연 어떠한 성적을 보일런지.
이 전람회의 성공과 실패는 조선 서화계에 대하여 중대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서화협회는 창립 취지를 충실히




협전은 비상한 관심과 격려 속에 출범했다. 회원전으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공모전도 병행하여 전람회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협전을 의식해 이듬해 총독부가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만든 선전이 열리면서 협전의 위상은 낮아지고 말았다.
선전은 최대 규모의 종합미술전이었으므로 일반 서화가들뿐 아니라 서화협회의 젊은 서화가들도 선전에서 입선이나 입상을 하게 되면 자랑스럽게 여겼다.
선전에 대한 보도는 매년 증가했지만 협전이나 서화협회의 동향에 관한 보도는 1924년경부터 줄어들었다.
선전은 대대적인 홍보와 시상제도로 많은 작가들을 끌어안은 반면 회원들로 운영된 협전은 경제적인 문제와 더불어 회원들의 비협조로 위상이 더욱 낮아졌다.
선전을 출세의 지름길로 생각한 회원들은 선전에 출품하는 작품에는 심혈을 기울이면서 협전에는 형식적으로 참여했다.
결국 협전은 1936년에 제15회를 마지막으로 종료되었고 이듬해 협회가 해산되었다.
마지막 협전 서예부의 회원 입선자는 김돈희, 오세창, 안종원, 이석호, 민형식 등이었고, 일반부 입선자들은 김문현, 정현복, 이명룡, 민태식, 허소, 김흡, 노재천, 윤석오, 윤제술, 안순동, 원충희 등이었다.
원충희는 당시 고서화 감정가로 유명했으며, 민태식은 한학자였고, 윤재술은 훗날 국회부의장이 되며, 윤석오는 훗날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관을 역임하게 된다.


협전에 나타난 현상 중 특기할 점은 일본 회화의 영향이다.
이는 비단 협전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런 현상은 일본 유학파가 늘었고 그들을 통해 서양화를 배운 젊은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인 화가들이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일본 제전帝展의 도록 『제전집』 등 일본에서 발행된 화집들이 들어왔고, 1933년부터 덕수궁미술관에는 일본 근대 작품들이 상설 전시되었으며, 선전을 통해 일본 양식이 널리 알려졌다.


서화협회는 창립 취지를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지만 전람회와 강습소를 통해 우리나라 근현대미술 발전에 기여했다.
1940년 조선미술관이 기획한 10명가名家 산수풍경화전에 고희동, 허백련, 김은호, 이용우, 이한복, 박승무, 이상범, 최우석, 노수현, 변관식이 선정되었는데, 허백련만 제외하고 나머지 9명 모두 서화협회 출신이었다.
그러나 조선 미술의 침체를 개탄하여 결성된 협회가 일본 회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오히려 조선 미술을 침체하게 했다.
게다가 협회 출신 작가들 대부분 훗날 친일작가로 낙인찍힌 것인데,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인 김은호와 이상범은 물론 고희동을 비롯하여 협회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벌인 거의 모든 작가들이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친일에 대한 심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대부분 작가들은 해방 후에도 친일에 대한 반성 없이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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