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협회가 거둔 가장 큰 성과는
특기할 점은 서화협회가 실제로 보는 사물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주관적인 소감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쳤다.
화가의 주관적인 지각, 감성, 표현을 고희동은 1921년 『서화협회회보』 제1권 제1회에 기고한 글 ‘서양화를 연구하는 길’에서 강조했다.
“서양화라 하는 것은 그 그리는 바가 별로 타他에 재在함도 아니오, 그 취미가 또한 별처에서 생生함도 아니라, 인물이던지 풍경이던지 동물이던지 화과이던지 각각 각자의 마음대로 그리어 천연의 현상에 소감된 기분이 화폭에 충일하면 그것이 곧 위대한 작품이 되고 우아한 취미가 여기에서 생하는 도다.
…
사생이라 하면 그 생물 즉 실물을 사래寫來함이라 운하겠으나 그 실물의 형상을 모사함보다 그의 기분을 사함이 화의 정신이니 화는 즉 천공天工을 인화人化함에 있고 물형을 설명함에 있음은 아니로다.
차를 간단하게 말하면 천연을 인공으로서 번역하는 것이오.
…
일례를 들거대 삼각산을 그린다 하면 그 봉우리의 기세는 물론이고 그 때를 따라 변하는 현상이 있으니, 아침이면 그 아침의 맑아오는 공기의 여하와 퍼져 오르는 광선의 여하를 조차 우리의 소감이 여하하며, 석양이 되면 그 지는 해의 비취는 것과 덥히어 오는 어두운 장막에 변환되는 기분이 그 어떠한가 이것을 충분하게 그리어 내는 것이 서양화의 법이오.
…
그러나 그 화법을 연구하여 알기는 쉽되 그리기는 어려우니 자연미에 소감되는 점이 사람마다 다르며 그 발휘하는 바에 따라 우열이 있음은 재질여하에 있음이거니와 …”
서화협회가 거둔 가장 큰 성과는 전람회의 개최였다.
전람회를 통해 작품을 널리 소개하고 작품의 매매를 통해 기금을 마련했는데, 판매액의 20퍼센트를 협회가 기금으로 받았다.
협전은 1921년부터 1936년까지 15회에 걸쳐 개최되었다.
협전은 일본의 식민지 문화정책으로 시행된 선전과 달리 민전民展으로 관전官展과는 비교가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로 이루어진 협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단체전으로 매일신보와 동아일보 등 일간지들이 창립전을 전람회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했다.
『동아일보』는 1921년 4월 2일자 지면에서 창립전을 조선 서화계의 깨우는 첫소리에 비유했다.
“꿈속에 있는 조선 서화계의 깨우는 첫소리 … 침쇠하기 거의 극한에 이르렀다 할 우리의 서화계로부터 다시 일어나는, 첫 금을 그으려 하는 이 새 운동이 과연 어떠한 성적을 보일런지.
이 전람회의 성공과 실패는 조선 서화계에 대하여 중대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서화협회는 창립 취지를 충실히
협전은 비상한 관심과 격려 속에 출범했다. 회원전으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공모전도 병행하여 전람회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협전을 의식해 이듬해 총독부가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만든 선전이 열리면서 협전의 위상은 낮아지고 말았다.
선전은 최대 규모의 종합미술전이었으므로 일반 서화가들뿐 아니라 서화협회의 젊은 서화가들도 선전에서 입선이나 입상을 하게 되면 자랑스럽게 여겼다.
선전에 대한 보도는 매년 증가했지만 협전이나 서화협회의 동향에 관한 보도는 1924년경부터 줄어들었다.
선전은 대대적인 홍보와 시상제도로 많은 작가들을 끌어안은 반면 회원들로 운영된 협전은 경제적인 문제와 더불어 회원들의 비협조로 위상이 더욱 낮아졌다.
선전을 출세의 지름길로 생각한 회원들은 선전에 출품하는 작품에는 심혈을 기울이면서 협전에는 형식적으로 참여했다.
결국 협전은 1936년에 제15회를 마지막으로 종료되었고 이듬해 협회가 해산되었다.
마지막 협전 서예부의 회원 입선자는 김돈희, 오세창, 안종원, 이석호, 민형식 등이었고, 일반부 입선자들은 김문현, 정현복, 이명룡, 민태식, 허소, 김흡, 노재천, 윤석오, 윤제술, 안순동, 원충희 등이었다.
원충희는 당시 고서화 감정가로 유명했으며, 민태식은 한학자였고, 윤재술은 훗날 국회부의장이 되며, 윤석오는 훗날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관을 역임하게 된다.
협전에 나타난 현상 중 특기할 점은 일본 회화의 영향이다.
이는 비단 협전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런 현상은 일본 유학파가 늘었고 그들을 통해 서양화를 배운 젊은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인 화가들이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일본 제전帝展의 도록 『제전집』 등 일본에서 발행된 화집들이 들어왔고, 1933년부터 덕수궁미술관에는 일본 근대 작품들이 상설 전시되었으며, 선전을 통해 일본 양식이 널리 알려졌다.
서화협회는 창립 취지를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지만 전람회와 강습소를 통해 우리나라 근현대미술 발전에 기여했다.
1940년 조선미술관이 기획한 10명가名家 산수풍경화전에 고희동, 허백련, 김은호, 이용우, 이한복, 박승무, 이상범, 최우석, 노수현, 변관식이 선정되었는데, 허백련만 제외하고 나머지 9명 모두 서화협회 출신이었다.
그러나 조선 미술의 침체를 개탄하여 결성된 협회가 일본 회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오히려 조선 미술을 침체하게 했다.
게다가 협회 출신 작가들 대부분 훗날 친일작가로 낙인찍힌 것인데,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인 김은호와 이상범은 물론 고희동을 비롯하여 협회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벌인 거의 모든 작가들이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친일에 대한 심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대부분 작가들은 해방 후에도 친일에 대한 반성 없이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