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협회의 창립 취지




서화협회의 담당지도는 동양화에 이도영, 서양화에 고희동, 서예에 김돈희였다.
서화협회의 창립 취지는 “신구 서화계의 발전, 동서 미술의 연구, 향학 후진의 교육 및 공중의 고취아상을 증장케 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었고, 내건 주요 사업은 휘호회, 전람회, 주문 제작, 도서 인행, 강습소의 개설이었다.


고희동은 1950년에 서화협회 창설 당시를 술회했다.


“… 우리에게는 화단이니 미술단체니 하는 것은 이름조차 없었다.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하여 너무도 딱하게 생각하고 쓸쓸하게 생각하였다.
그 당시의 서書와 화畵로 명성이 높던 분과 여러 번 말을 하였었다.
우리도 당연히 한 단체가 있어서 우리의 나아가는 길을 정하고 후진을 양성하여야 한다고 항상 말을 하고 지내왔다.
내가 이러한 생각이 난 거은 일본 도오꼬오에서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왔던 까닭이었다.

… 13인이 발기인이 되어 회를 조직하였는데, 우선 명칭을 의정할 새 미술 두 자는 채택을 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서화협회’라고 결정하였다. 이름이야 무엇이건 간에 일만 하면 된다는 뜻으로 그냥 해버렸었다.
그리하여 초대 회장에 심전 안중식을 추대하고 총무라는 명칭으로 내가 일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회원을 천거하고 회비를 징수하여 장교천변의 어느 친구의 집 사랑을 빌어서 사무소를 정하고 우선 제1회로 전람회를 열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작품을 내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1, 2년 지내 나가는 중에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서 그냥 정지 상태에 들어가고, 회장 안 선생님이 별세하시어서 소림 조 선생님이 회장이 되시었다가 또 별세하시고, 우향 정 선생님이 회장이 되신 후 35년 전(1921년)에 비로소 처음으로 전람회를 열었다.”


서양 양식이 들어오면서 전통 양식을 동양화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서예와 회화를 통칭하여 서화란 말도 통용되었다.
서화란 말이 통용되었다는 것은 아직 서예와 회화가 분리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서예와 회화 모두 지, 필, 묵을 사용한다고 해서 동양에서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이명동체異名同體로 보았다.
서양화가 들어오자 서예와 회화를 구분할 필요를 느꼈고 서양화에 대한 상대적인 명칭으로 동양화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회화전에 서예를 배제해야 한다는 요구가 생겼다.
서예와 회화의 분리는 1922년 선전이 열리면서 동양화부와 서예부를 설정하면서부터였다.


미술이란 말이 사용되기 전에는 도화圖畵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었다.
1895년의 대한제국 선포 이전부터 서양식 제도의 각종 학교 설립이 시작되어 서울과 지방 각지에서 급속한 파급이 이루어지면서 도화 과목은 창가, 체조 등과 더불어 새로운 인식의 필요한 예체능 교육으로 여겨졌다.
1906~07년 무렵에 이르면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에 학생 모집광고를 내는 관립, 사립학교의 교과 과목 속에 으례 도화가 들어 있었다.
1908년 정부의 학부가 발행한 교과서 중에 『도화임본 圖畵臨本』이 있으며 원화를 이도영이 그렸다.
내용은 윤곽선이 먹 붓으로 그려진 것이지만 서양화법을 도입환 풍경과 인물, 정물의 사실적 묘사법과 명암법을 알려주고 있다.
이때부터 전통 회화와 서양화의 두 흐름이 병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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